문해청 작가의 통일문학
『통일투사 박정숙』
1999년 봄, 김 씨는 북측 남측 민간교류사업을 위한 한조무역(주)를 창업했고 새 삶을 시작했다. 사장이 된 김 씨는 “서울을 오가기 좋은 곳이다.”하고 충북 진천군 초평면 화산리 굴티마을 세금천 흐르는 농다리마을에 일터를 잡았다. 김 씨는 “밥 먹고 사는 것은 걱정하지 마세요. 가을에 결혼합시다.”하며 정숙에게 또 다시 청혼했다. 정숙은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했고 창업을 통해 “민중사회, 노동통일운동에 기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생각하며 저녁 무렵 결혼에 동의했다.
그해 여름, 사장 김 씨는 민중민주사회, 노동통일운동단체를 방문했고 국내시장의 확장사업을 위해 영업활동을 했다. 사장 김 씨는 노동자가 1천 만 명 노동조합에 가입되어 있는 전국민중노동조합총연맹(약칭 민중노총) 중앙본부로 발걸음이 자주 갔다. 민중노총 실무자들에게 북남민간교류사업을 하는 한조무역(주)을 소개했다. 이때 관심이 높은 총무국 옥미자 국장과 인사했다. 옥 국장은 서울 경성대학교 무역학과 95학번이고 단대여학생회장출신이며 학생회 소속 노래패 ‘전선’ 리더로 활동했다. ‘전선’노래패는 노동자집회와 가두시위에서 투쟁의지와 결의를 높이는 노래율동을 했다. 옥 국장은 민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그해 가을, 사장 김 씨는 “퇴근하고 한잔하며 코리아경제 북남민간교류사업을 이야기하면 어떨 까요? 무교동 낙지골목 낙지문어전문 ‘낙문’에서 저녁식사하고 소주 한 잔할 까요?”하며 옥 국장과 전화로 약속했다. “좋아요~ 김 사장님 한 잔 살 거죠? 옥 국장이 응했다. 그날 밤, 사장 김 씨는 옥 국장에게 “라이브노래방에서~ 한 곡~ 할까?”하며 미끼를 던졌다. 옥 국장은 노래방에서 나오며 술이 취해 다리가 풀렸는지? “잠자러 갈 거야~”했다.
사장 김 씨는 늦은 밤, 옥 국장을 귀가 시킬 택시를 손짓했지만 정차하는 택시는 없었다. 그때 옥 국장은 네온사인불빛 아래 비틀거렸고 “여관, 모델 김 사장님! 방은 두 개! 각 방! 아시겠죠?”하고 소리쳤다. 사장 김 씨에게 부축을 받던 옥 국장은 “고마워요~ 김 사장님 우리 동지해요~ 김 동지! 김 동지!”하자 사장 김 씨도 “옥 동지! 옥 동지!”하며 “누가 말했던가? 10년 인연에도 낯선 사람이 있고 하루 밤 인연에도 10년 동지가 있다하네~”하며 노랫가락처럼 흥얼거렸다.
1999년 겨울, 정숙은 사장 김 씨와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복지회관 대강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는 전국목회자정의구연사제단에서 활동하는 조선민족기독교장로회 분단공동체민통선교회 담임 이항미 목사님이 주례사를 했다.
“일제식민지강점기 때 반외세자주정신으로 자주독립에 함께했던 순국선열을 잊지 말고 기억하며 살아가길 바랍니다. 일제식민지 해방 후 분단이 된 현실의 삶에는 미제신식민지간접통치의 독수리발톱이 숨겨져 있습니다. 남측코리아 정치 경제 역사 문화 교육 등 갈수록 친미종미문화의 뿌리가 깊이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 민중의 살길은 우리민족끼리 자주와 대단결을 완성하는 통일 밖에 없습니다. 부디 민족 민중의 미래를 위해 살아가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 모든 것을 신랑 신부를 위해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했다.
그날 정숙은 서울 종로 한국기독교복지회관 대강당에서 결혼식 할 때 전국양심수인권후원회, 전국민주화운동가족인권협의회, 민중민주사회, 노동통일운동단체 회원들 및 지인을 초대했다. 그날 인사들이 축하를 했지만 정숙은 사장 김 씨와 신혼여행을 가지 않았다. 사장 김 씨는 “북측 남측 코리아평화관계가 더 좋아지면 금강산으로 신혼여행 갑시다.”하며 슬쩍 넘겼다. 정숙은 결혼식 후 충북 진천으로 돌아왔다.
정숙은 텃밭에서 고추, 상추, 당근, 쪽파, 대파, 양파, 양배추, 깻잎, 배추, 총각무, 오이, 가지, 호박, 부추, 조선콩, 감자, 토마토 등으로 상큼한 반찬을 만들었다. 정숙은 매일 회사 일을 했지만 사업은 몇 년 동안 매출을 확장하지 못했고 그렇게 흘러갔다.
2000년 봄, 정숙은 민주정부에서 ‘평화의 21세기 다시 열다’는 북측 남측 코리아경제 및 북남민간교류사업을 다시 시작하는 것을 환영했다. 사장 김 씨가 국내 출장할 때마다 정숙은 정성껏 도왔다. 한편 정숙은 소라와 소망이 두 딸을 출산할 때마다 제왕절개수술을 했다는 이유로 의사는 “두 번 수술하면 셋째 가질 수 없습니다.”하며 경고를 했다.
몇 년 동안 정숙은 한조무역(주) 물류창고일과 집안일을 동시에 하며 보냈다. 큰 딸 소라와 작은 딸 소망이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면 정숙은 식탁에 시원한 국수를 말아 나누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사장 김 씨는 가끔 출장 갈 때마다 “아들 낳아야 사업이 번창하는데...”하며 아들 타령했다. 정숙은 못들은 척 참으며 사장 김 씨가 “고리대 법대 졸업한 사람이다.”하며 믿음을 잃지 않았다.
2001년 봄, 정숙은 지난 해 민주정부가 6.15정상회담으로 북남평화교류에 활력을 주어 사업의 매출이 계속 늘었다. 정숙은 “민간교류사업으로 분단의 철조망을 찢어버리고 자유로운 북남민간교류를 앞당길 수 있다.”는 마음의 꽃이 피며 통일을 확신했다. 이때부터 한조무역(주) 특산품은 전국양심수인권후원회, 전국민주화운동가족인권협의회, 민중민주노동통일단체, 반미사회운동단체 등에서 선호했다. 특히 한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한민노총)과 전국민중노동조합총연맹(민중노총) 중앙본부 및 지역본부 노조간부들이 애호했다.
또한 지방시도지역본부 민중민주노동통일단체에서 설날, 추석, 연말연시 선물로 북측 특산물을 많이 찾았다. 전국민주대학생연대회의(전민연) 청년학생들, 전국민주청년단체연합(전청연) 등에서 특산물을 선호했다. 전국농민연합회(전농연) 농민들은 “70년 이상 북측 남측 물류운송로가 끊어진 철도를 연결할 수도 있다.”는 통일의 꿈을 널리 알렸다. 북측 토종농산물은 송이버섯, 고려인삼, 고사리, 더덕, 도라지, 장뇌삼, 산삼, 잣, 마, 황태, 울금 등 북측의 주류까지 천연자연이 잘 보존된 북측 신토불이라는 이유로 노동자, 농민, 청년,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한조무역(주) 특산품은 손발이 딸릴 정도로 물량을 유통하기 바빴다. 정숙은 물류창고에서 설날, 추석, 연말연시 상품을 검사, 선별하며 포장했다. 컨베이어벨트가 돌고 돌아도 인력이 딸려 연장근로, 야간작업 할 때가 많았다. 정숙은 허리가 휘청거리는 과로에도 통일사업의 끈을 놓지 않았다. 사장 김 씨는 어느 날 “물품정리할 직원 1명, 사무회계할 직원 1명 신입을 공채해야겠다.”고 했다.
2002년 겨울, 옥 국장은 전국민중노동조합총연맹(민중노총) 중앙본부 노조간부로 4년 동안 일한 총무국에 사표를 냈다. 한조무역(주) 사장 김 씨는 옥 국장을 경력직 총무로 추천했다. 정숙은 사무회계경력을 믿고 동의했다. 다음해 2003년 1월 초부터 옥 국장은 한조무역(주) 사무실에 출근해 총무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입사 후 한 달이 지난 음력 설 명절 후 옥 총무는 한복을 입고 출근했다. 옥 총무는 옛날 다방마담 주홍저고리에 남색치마를 입은 모습이었다. 옥 총무는 한 해 동안 남들 눈빛을 의식하지 않고 한복을 입었다.
옥 총무가 여러 달이 지난 어느 날 “오늘 입은 한복이 어때요~”하고 애교어린 눈빛을 주면 사장 김 씨는 포옹하는 시늉을 했다. 사장 김 씨는 “아들을 낳아야 사업이 번창할 거야!”하며 옥 총무의 입술을 살며시 훔쳤다. 사장 김 씨와 옥 총무는 정숙에게 특별한 애정행각을 감추며 아무 일 없는 듯이 지냈다. 어쩌면 원천이 다른 세 줄기 강물처럼 밤공기를 가르며 흘러갔다.
2008년 여름, 북측 군사작전지역인 금강산 바닷가에서 민간인 여성 백영자 씨 사망사건이 발생했다. 그 후 운명의 여신은 북남긴장관계의 정치상황으로 바꾸어 놓았고 한조무역(주)은 북측 남측 살찌우는 코리아경제 및 민간교류사업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4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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