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연재】 나와 주체사상과의 대화 (15)
제 1장 주체사상의 창시와 전일적 체계를 갖춘 학설로의 심화발전
제2장 김일성주의의 견인력의 원천
제 3장 인간위주의 철학적 세계관의 독창성문제
제 4장 민중중심의 사회역사관의 독창성 문제
제 1절 사회의 본질과 구성요소
제 2절 사회역사적 운동을 보는 주체적 시각
(1) 사회역사적 운동의 본질적 특성에 대한 논의
나: 이남의 일부 ML 론자들은 사회역사적 운동을 보는 주체적 시각이 “‘사람중심’이라기 보다는 유령중심”(8)이라고 지적하면서 그것이 <주관관념론>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주: 그러한 견해 역시 경제적 관계를 위주로 하여 사회역사적 운동을 분석한 유물사관의 방법론을 유일한 척도로 하여 그에 맞으면 옳은 것이고 그에 맞지 않으면 관념론이라고 보는 독경주의자들의 ‘흑백논리’의 산물입니다. 오늘의 구체적 현실에서 출발하여 사회역사적 운동을 보는 사람들은 결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유물사관의 주되는 한계성은 자연의 운동과 사회적 운동이 다 물질적 운동이라는 공통성을 기본으로 하여 사회역사적 운동을 고찰한 점입니다. 물질세계 발전의 일반적 합법칙성을 밝힌 유물변증법의 원리를 사회역사에 그대로 적용하여서는 사회의 본질도 사회역사적 운동의 합법칙성도 정확히 해명될 수 없습니다. 유물사관은 사회도 자연과 같이 물질적 체계이기 때문에 사회역사적 운동에도 자연의 운동에서처럼 ‘필연성’이 작용하며 사회역사적 운동도 자연사적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지난 시기 맑스주의는 관념론적인 역사관, 주관주의적인 역사관을 반대하면서 사회역사적 운동도 물질적 운동이라는 것을 해명하는 데 주되는 주의를 돌렸습니다. 유물사관은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는 원리를 기초로 하여 고찰하면서 모든 사회역사적 운동과정을 ‘물질적인 것’과 ‘관념적인 것’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으로 갈라 보았습니다. 여기에 기초하여 이남의 ML 론자들은 인간을 중심에 놓고 역사과정을 고찰하는 것을 마치도 주관적인 것을 중심에 놓고 고찰하는 관념론으로 간주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가장 발전된 물질적 존재이며 자주성과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주관’도 아니고 ‘관념’도 아니며 또한 단순한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지고 주동적으로 목적의식적으로 사회를 개조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주체적 존재>입니다.
나: 여기서 ‘주체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을 올바로 식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습니다.
주: 그렇습니다. ‘주체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이며 단순한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존재인 ‘인간적인 것’입니다. ‘주관적인 것’은 ‘의식을 통과하는 것’이며 따라서 ‘관념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관적인 것은 주체적인 것의 한 계기, 한 측면으로 됩니다. 즉 의식, 주관은 인간의 두뇌의 작용이라는 점에서 인간적인 것의 한 계기, 한 측면으로 됩니다.
그런데 오랜 기간 철학적 사유에서는 물질과 의식, 존재와 사유의 관계 문제를 기본문제로 하여 철학이론을 전개하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사회현상을 구분하는 데서도 ‘물질적인 것’과 ‘관념적인 것,’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으로 구분하여 고찰하는 사고방식이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지난 시기의 철학적 사고에서는 ‘주관'이라는 용어와 ‘주체'라는 용어가 동의어로 사용되었고 ‘주체'는 ‘객체'에 대응한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주체'는 곧 ‘주관적인 것,’ ‘관념적인 것'으로 이해되었고 ‘객체'는 곧 ‘물질적인 것,’ ‘객관적인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주체철학에 의하여 비로소 역사상 처음으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주동적으로, 목적의식적으로 사회역사적 운동을 전개해 나가는 ‘주체’로 명시되었고 ‘주관’과 엄격히 구별되는 ‘주체’라는 범주가 설정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영어로 ‘주체’와 ‘주관’은 다같이 <Subject>이고 ‘객체’와 ‘객관’은 다같이 <Object>이지만 주체철학에서 독창적으로 밝혀진 기본개념인 주체는 영어로 혹은 다른 서구어로 ‘Juche’라는 고유한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을 고찰의 중심에 놓는다는 것을 곧 주관적인 것, 관념적인 것을 중심에 놓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인간을 고찰의 중심에 놓는다는 것은 ‘주체적인 것,’ 가장 발전된 물질적 존재이며,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인 인간을 고찰의 중심에 놓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관념론과 인연이 없을 뿐 아니라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대립됩니다.
나: 인간을 중심에 놓고 사회역사적 운동을 고찰하는 주체적 시각은 자연의 운동과 구별되는 사회역사적 운동의 본질적 특성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 데 사회역사적 운동의 본질적 특성은 무엇인지요.
주: 주체사상에 의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역사적 운동의 본질적 특성이 과학적으로 해명되었습니다.
김정일총비서께서는 그 본질적 특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었습니다.
“...자연의 운동에는 주체가 없지만 사회역사적 운동에는 주체가 있습니다. 자연의 운동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질들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 지지만 사회역사적 운동은 주체의 주동적인 작용과 역할에 의하여 발생발전합니다.”(9)
한마디로 말하여, 자연의 운동에는 주체가 없지만 사회역사적 운동에는 주체가 있다는 것, 이것이 자연의 운동과 사회역사적 운동의 근본적 차이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자연의 운동에 주체가 없다는 것은 이 운동의 물질적 담당자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운동을 주동적으로 목적의식적으로 일으키고 추진해 나가는 담당자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자연의 운동은 객관세계에 존재하는 사물현상들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지는 운동입니다.
따라서 자연의 운동에서는 어느 것이 주동적인 작용을 하는 것이고 어느 것이 피동적인 작용을 하는 것인지를 말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태양계의 운동이 태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운동이라고 하여 태양의 주동적인 작용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볼 수 없습니다. 태양계의 운동은 태양과 다른 행성들과의 상호 인력작용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운동입니다. 이 운동에서 태양과 다른 행성들의 상호작용에 차이가 있다면 질량상의 차이에서 생기는 인력의 크고 작음이 있을 따름입니다. 태양의 인력이 크다고 해서 태양계의 운동이 태양의 주동적인 작용에 의해서 진행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처럼 자연의 운동에는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이 운동을 목적의식적으로 일으키고 추진해 나가는 담당자, 즉 주체가 없다는 것이 근본특징입니다.
그러나 사회역사적 운동에는 주체가 있으며 이 운동은 주체의 운동입니다.
김정일총비서께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시었습니다.
"사회적 운동은 인간이 일으키고 인간이 떠밀고 나가는 인간의 운동입니다.”(10)
사회역사적 운동은 간단히 말하여 인간의 운동입니다. 자연개조운동은 인간이 벌려나가는 사회적 운동의 한 형태로서 자연을 개조하는 데 이해관계를 가지는 담당자, 인간이 이 운동을 일으키고 추진시켜 나갑니다. 예컨대, 꽃과 꿀벌이나 나비의 상호작용은 본능적인 생존방식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진행되는 것으로 주동과 피동이 없는 자연의 운동이지만 인간과 꽃과의 상호작용은 그 어떤 열매를 얻기 위해서나 문화정서적 생활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나 인간이 목적의식적으로 주동적으로 벌리는 사회적 운동입니다.
사회개조운동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낡은 사회를 청산하고 새로운 사회를 세우는 데 이해관계를 가지는 사회의 각계각층의 주동적인 작용에 의하여 일어나며 추진됩니다. 물론 사회역사적 운동도 틀림없이 물질적 운동이며 그런 점에서 사회적 운동과 자연의 운동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가 물질세계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사회역사적 운동에도 물질세계의 일반적 법칙이 작용합니다. 예를 들어, 사물현상은 모두 상호 연관되어 있으며 부단히 변화발전한다든가 낡은 것이 사멸하고 새것이 발생발전하는 부단한 과정으로 물질세계의 발전이 이루어진다는 법칙 등은 자연계 뿐 아니라 사회에도 그대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이런 법칙의 경우에도 사회에서는 자연발생적으로 맹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주동적이며 목적의식적인 활동을 통해서 작용합니다. 여기에서 강조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사회역사적 운동이 물질적 운동이라는 점에서 자연의 운동과 공통점을 가지며 물질운동의 일반적 법칙이 사회역사적 운동에도 작용한다고 하여 자연에만 고유한 운동법칙이 사회에도 그대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회적 운동도 물질적 운동이라는 점에서 자연의 운동과 공통점을 가지지만 사회에만 고유한 운동법칙이 있는 것입니다.
제국주의의 일부 학자들이 큰 발견이나 한듯이 떠들어 대면서 자연의 법칙을 사회적 운동에 그대로 적용한 법칙들로서는 '생존경쟁의 법칙'과 '생명유기체설'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생존경쟁의 법칙'을 사회에 적용하여 제국주의적 침략과 약탈, 학살을 정당화하고 또 '생명유기체설'을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여 '사회유기체설'을 안출하여 사회의 계급적 대립과 투쟁을 무마시키고 계급적 조화를 역설하였습니다. 자연의 운동에는 자연에 고유한 운동법칙이 있듯이 사회역사적 운동에도 그것에 고유한 운동법칙이 있습니다. 물질세계의 일반적 운동법칙이 사회역사적 운동에 작용한다고 하여 그것이 사회역사적 운동법칙의 기본내용으로 될 수 없습니다.
주체사관은 자연의 운동과 사회역사적 운동의 근본적 차이를 명시한 데 기초하여 사회역사적 운동, 주체의 운동의 고유한 합법칙성을 밝혔습니다. 인간이 주동적으로 목적의식적으로 일으키고 추진해 나가는 주체의 운동으로서의 사회역사적 운동의 고유한 합법칙성이 주체사관의 기본내용을 이룹니다. 주체의 사회역사관에 의하여 사회역사적 운동이 주체의 운동이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해명됨으로써 사회역사관의 발전에서 새로운 전환이 이룩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사회역사적 운동의 법칙에 대한 이해
나: 이남의 일부 MIL 론자들은 주체의 운동으로서의 사회역사적 운동의 합법칙성은 주관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며 혹자는 심지어 그것이 법칙으로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주: 오랫동안 사람은 곧 ‘주관,’ '의식의 대변자’로만 파악되어 왔기 때문에 그러한 사고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은 인간은 단지 물질적 조건에 작용하는 객관적 법칙을 자기의 활동을 통해서 실현할 뿐이라고 이해하여 왔습니다. 결국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인간은 사회법칙의 주인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법칙에 종속되는 존재로 되어 버립니다.
그리하여 이남의 일부 ML 론자들은 "주체의 운동으로 파악된 인류의 역사나 사회에는 자연과 달리 인간의 마음먹기에 따라 합법칙성에 제약되지 않고 이를 거슬리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11) "주체사상이 밝힌 사회역사 발전의 보편적 합법칙성은 사회발전의 객관적 필연성을 무시하는 주관주의적인 것"(12)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인간을 사회의 물질생활조건의 제 요소에 해소시켜 버리고 사회의 물질적 제관계들 사이의 필연적 관계, 즉 인간밖에 있는 물질적 요소들간의 관계만을 역사발전 법칙으로 이해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인간과 사회생활의 물질적 조건과의 상호관계에 작용하는 법칙은 역사발전의 법칙으로 될 수 없다고 이해하며 인간이 주동적으로, 목적 의식적으로 사회관계를 개조하고 변혁하는 것을 객관적 필연성을 무시하는 주관주의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회를 주동적으로, 목적의식적으로 개조해나가는 사회역사적 운동의 담당자는 개체적 인간이 아니라 일정한 사회적 집단입니다. 일정한 사회적 집단을 이루고 자주적 요구를 실현해 나가는 인간의 활동은 그 어떤 개체적 개인의 자의에 의해 일어나고 추동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주적 요구는 개체적 인간의 요구가 아니라 사회적 집단의 요구이며 인간의 이해관계는 개체적 인간의 이익이 아니라 자주적 요구와 그 실현조건과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이해관계입니다. 따라서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자주적 요구와 이해관계에 기초하여 일어나고 추진되는 사회역사적 운동의 합법칙성은 개체적 인간의 자의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체의 자주적 요구는 곧 역 사발전의 객관적 요구입니다. 즉 인간과 사회의 물질적 조건과의 상호작용에서 인간의 주동적이고 목적의식적인 활동은 역사발전의 객관적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활동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운동인 사회역사적 운동은 개체적 인간의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정한 법칙에 따라 발전합니다. 그러나 사회에서의 법칙의 작용은 자연에서의 법칙의 작용과 다른 본질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에서는 법칙이 인간의 활동과는 관계없이 자연발생적으로 작용하지만 인간의 운동인 사회역사적 운동에서는 인간의 자주적이며 창조적이며 목적의식적인 활동을 통하여 작용합니다. 사회의 법칙이 인간의 활동을 통하여 작용하는 것만큼 인간이 어떻게 활동하는가에 따라 순조롭게 작용할 수도 있고 그 작용이 억제되거나 제한될 수도 있습니다. 즉 인간이 자주적 요구와 이해관계에 대한 자각이 있는가 없는가, 자주적 요구와 이해관계를 실현하기 위한 옳은 방도를 파악하고 있는가 없는가,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준비하고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사회역사적 운동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도 있고 억제되거나 제한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사회역사적 운동이 인간의 활동을 통하여 작용한다고 하여 사회역사적 운동에는 자연발생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회역사적 운동에 자연발생성이 작용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의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지 못하고, 또, 그것을 충분히 발양시킬 수 있는 사회제도가 세워지지 못한 것과 관련됩니다. 인간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이 높아지고 그것을 충분히 발양시킬 수 있는 사회제도가 세워지면 인간은 자기의 자주적 요구와 이해관계에 대한 자각에 기초하여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방도를 파악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면 인간은 자주적 요구와 이해관계를 실현할 수 있는 능력, 창조적 역량을 충분히 마련하게 되고 사회를 변혁하기 위한 활동을 사회발전의 객관적 요구에 맞게 벌려나가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발생성의 작용범위도 더욱 더 좁아지게 됩니다. 인간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이 높아지고 그 요구에 맞게 사회제도가 완성되면 사회역사적 운동은 더욱 더 인간의 주동적이며 목적의식적인 활동에 따라 발전하게 됩니다. 이것은 주체의 주동적이며 목적의식적인 활동에 의하여 변화발전하는 사회역사적 운동의 고유한 합법칙성이 전면적으로 관철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맑스주의 창시자들은 물질세계 발전의 일반적 합법칙성을 사회역사에 적용하여 유물사관을 확립하였지만 물질세계의 일반적 합법칙성만으로 풀 수 없는 많은 문제들에 부닥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경제적 범주를 ‘인격화’하여 경제적 운동법칙을 전개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즉 의식은 물질경제적 조건을 반영하여 발생하지만 물질경제적 조건에 반작용하며 정치도 경제에 의하여 규정되지만 경제에 반작용한다는 이론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물사관은 어디까지나 자연의 운동과 사회역사적 운동의 공통성을 기본으로 보는 사회역사관이며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는 원리와 물질-의식의 상호관계 문제의 ‘틀’에서 전개된 사회역사관인 것으로 하여 인간을 중심으로 사회역사적 운동을 고찰할 수 없었으며 사회역사적 운동도 자연사적 과정으로 보는 한계성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나: 그러면 인간을 위주로 하는 사회역사적 운동의 법칙은 어떤 것인지 자세히 설명해 주시지요.
주: 주체의 운동으로서의 사회역사적 운동의 고유한 법칙은 무엇보다도 역사의 주체인 인간의 자주성과 창조성이 발전하는 데 맞게 사회적 재부가 창조되고 사회관계가 개선되어 나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정일총비서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습니다.
“...사람의 자주적인 사상의식과 창조적 능력이 발전하는 데 상응하게 사회적 재부가 창조되고 사회적 관계가 개선되어 나갑니다."(13)
인간은 사회를 이루는 요소들 가운데서 주인의 지위를 차지합니다. 인간이 발전하는 데 따라 즉 인간의 본질적 속성인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의 발전수준에 맞게 사회적 재부가 창조되고 사회적 관계가 개선되어 나갑니다. 사회적 재부는 인간의 창조물이며 사회적 관계도 역시 인간의 창조물로서 인간에 의하여 개선되어 나갑니다. 이것은 인간을 한편으로 하고 사회생활의 물질적 조건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양자사이의 관계에서 인간이 주인의 지위에 있고 사회적 재부와 사회적 관계의 지배자, 개조자이라는 것을 명시해 주며 사회역사적 운동의 법칙이란 사회를 지배하고 개조해나가는 인간의 운동법칙, 즉 인간의 주인으로서의 지위와 역할이 높아지는 과정의 법칙이라는 것을 말하여 줍니다.
그러므로 역사가 발전한다는 것은 곧 역사의 주체로서의 민중의 지위와 역할이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계를 지배하고 개조해 나가는 인간의 사회역사적 운동은 자연개조, 사회개조, 인간개조의 3가지 영역에서 진행됩니다. 인간은 객관적 물질세계에 대한 지배와 개조를 실현하기 위하여 자연개조 활동을 벌려나갑니다. 인간은 자연을 개조하여 물질적 부를 창조하고 자기의 물질적 생활조건을 마련합니다. 자연개조 활동은 인간의 사회적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활동이며 그것은 인간들의 사회적 협력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습니다.
인간들은 사회적 협력관계를 개선하고 완성하기 위하여 사회개조 활동을 벌려나갑니다. 사회개조 활동은 인간의 자주성을 짓밟고 억누르는 낡은 사회관계를 개조하고 자주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사회정치적 조건을 마련하는 활동입니다. 자연을 개조하는 것도 인간이며 사회를 개조하는 것도 인간입니다. 인간은 자연과 사회를 개조하는 활동을 벌리면서 자기자신을 끊임없이 개조하고 발전시켜 나갑니다. 자연개조, 사회개조, 인간개조를 통하여 인간에 의한 세계의 지배와 개조가 실현되며 인간의 지위와 역할이 높아지고 자주성이 실현되어 나갑니다.
나: 그런데 이남의 일부 ML 론자들은 사회역사적 운동을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대립과 통일로 이해해야만 사회역사적 운동도 물질적 운동이라는 말의 의미가 살아난다고 하면서 생산양식 주재론을 주체사관에 대립시키고 있으며 그것을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의 인용으로 근거짓고 있습니다.
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맑스의 생산양식 주재론은 사회생활의 물질적 조건이 사회발전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근거짓기 위한 것이었으며 또한, 그것은 물질-의식 문제의 '틀’에서 출발하여 전개된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하는 것이고 인간위주의 시각에서 그 명제의 한계성을 올바르게 분석하는 것입니다.
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인간은 그들의 생활의 사회적 생산에서 그들의 의사에 의존하지 않는 일정한 필연적 관계 즉 그들의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상응한 생산관계에 들어선다...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이 그 일정한 발전단계에 이르면 생산력이 그 내부에서 지금까지 발전하여 온 현존하는 생산관계 또는 그것의 법률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 소유관계와 모순되게 된다. 이 관계는 생산력의 발전형식으로부터 그 질곡으로 전화한다...어떠한 사회구성체도 그것이 생산력의 발전에 충분한 여지를 주어 그 생산력이 다 발전하기 전에는 결코 멸망하지 않으며 또 새로운 보다 높은 생산관계는 그것의 물질적 조건이 낡은 사회관계의 태내에서 성숙하기 전에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14)
맑스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상호관계에서 생산력은 내용이고 생산관계는 형식으로서 생산력에 의하여 생산관계가 규정된다고 보았습니다. 생산관계는 생산력에 적응할 때에는 그 발전의 형식으로 되지만 상대적으로 가변적인 측면인 생산력이 일정한 발전단계에 이르면 보수적인 측면인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발전에 질곡으로 됩니다. 이때에 사회변혁의 시대가 도래하며 사회변혁에 의해 생산력에 적응하는 새로운 생산관계가 확립된다는 것입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이러한 변증법에 의하여 사회역사적 운동은 생산양식이 교체되는 자연사적 과정으로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형식으로 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생산수단의 소유관계나 생산물의 분배관계와 같은 생산관계의 요소들은 생산력의 발전에 영향을 주며 또 생산력의 발전으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하나 그 자체는 생산력의 작용인 자연을 개조하는 것과 직접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부를 둘러싼 인간들의 이해관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소유관계와 분배관계에서는 생산력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쓸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로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수단과 생산물을 처분할 권리를 누가 가질 것인가 하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인간들의 이해관계가 문제로 됩니다.
인간들 사이의 경제적 이해관계 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분쟁은 자연을 정복하는 힘인 생산력으로써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생산력은 인간과 자연과의 대립을 해결하는 수단으로는 될 수 있어도 인간과 인간과의 사이의 이해관계의 대립을 해결하는 직접적인 수단으로는 될 수 없습니다. 인간과 인간과의 사이의 이해관계의 대립은 자연을 다스리는 힘인 생산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다스리는 힘인 정치적 권력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생산력은 고도로 발전하였으나 생산관계는 의연히 낡은 자본주의적 테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여기서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사이의 대립은 생산력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쓸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재부인 생산수단과 생산물을 자본가 계급이 부당하게 독점하고 있는 상황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노동자계급을 위시한 근로민중이 자본주의적 착취를 부수지 못하는 것은 생산력의 발전이 낮거나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이 첨예화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계급의식이 미숙하고 자본주의적 착취를 국가권력으로 옹위하고 있는 자본가계급을 척결할만한 <주체적 역량>이 마련되지 못한 데 있습니다.
자연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연을 정복하는 힘인 생산력을 발전시켜야 하며 사회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를 지배하는 힘인 <정치적 역량>을 강화시켜야 합니다. 정치적 역량은 인간들의 정치사상적 각성과 조직적 결집, 사회변혁운동의 경험의 축적, 반민중적 힘을 제압할 수 있는 민중의 <혁명적 힘>의 준비와 같은 요인들에 의해 규정됩니다.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작용을 규제하는 면과 인간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규제하는 면, 두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생산관계의 변화발전은 생산력의 발전에 의존할 뿐 아니라 주로는 인간들의 정치적 역량의 준비정도에 의존합니다.
이처럼 생산력은 발전하였지만 그것의 사회적 형식인 낡은 생산관계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데로부터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생기게 되어 이 모순을 극복하고 생산력의 발전에 넓은 길을 열어주기 위해 사회변혁운동이 일어나며 새로운 생산관계의 확립과 함께 그 위에 서있는 상부구조가 변화된다고 보는 경제적 결정론의 일면성과 원리적 한계성은 앞에서 해명한 인간중심의 주체적 시각에 의해 명백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나: 그러면 생산력의 발전이 생산관계의 변혁과 무관하다는 말씀인지요.
주: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이남의 최근의 경제적 대란이 잘 말해주듯 생산관계가 생산력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하게 되면 그것이 인간들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지금의 이남에서처럼 경제공항이 일어나고 실업자가 늘어나면 그것 때문에 근로민중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크게 미치게 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사회변혁운동은 단순히 생산관계가 생산력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새로운 생산관계로 교체해야 하겠다는 요구로부터 출발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 계급의 착취와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계급적 자주성을 실현해야 하겠다는 계급적 이해관계의 자각으로부터 출발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사회변혁운동은 결코 빈궁에 시달린 사람의 단순한 몸부림이 아니며 단지 경제적 이해관계를 실현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정치적 압박과 경제적 예속으로 인한 인간의 자주성의 유린이 근본적 원인으로 됩니다.
따라서 어떤 생산관계든지 그 밑에서 더 이상 발전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생산력이 최대한으로 발전하기 전에는 교체되지 않는다고 볼 것이 아니라 그 생산관계를 유지하는 데 이해관계를 가지는 계급의 역량이 더 강한 동안은 교체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합니다. 또한 새로운 생산관계는 그 존립의 물질적 여건이 낡은 사회의 태내에서 충분히 성숙되기 전에는 출현하는 법이 없다고 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산관계를 세우는 데 이해관계를 가지는 계급의 역량이 충분히 마련되기 전에는 출현하는 법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생산력의 발전과 낡은 생산관계와의 모순은 사회변혁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물질적 객관적 여건으로 됩니다.
사회변혁운동이 일어나고 승리하는 데서 결정적 의의를 가지는 것은 생산력이 얼마나 발전하고 생산관계와의 모순이 어느 정도로 첨예화되었는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변혁운동의 주인인 민중의 자주적 요구와 이해관계에 대한 자각과 그 실현을 위한 정치적 역량이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실제로 사회주의 혁명은 맑스가 염두에 두었던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먼저 일어난 것이 아니라 착취와 압박이 극도로 심한 뒤떨어진 자본주의 나라에서와 식민지, 반식민지 나라들에서 먼저 일어나 승리하였습니다. 이것은 경제적 결정론의 일면성과 한계성을 실증하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사회역사적 운동은 그 주체인 인간이 세계를 지배하고 개조해나가는 법칙이며 민중의 지위와 역할이 높아지고 자주성이 더욱 더 전면적으로 완전하게 실현되어 나가는 법칙입니다. 생산양식의 주재론만이 사회적 운동을 물질적 운동의 법칙으로서 유물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고 가장 발전된 물질적 존재이며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주동적이며 목적의식적인 운동으로서의 사회역사적 운동의 법칙은 물질적 운동이 아닌 주관주의적 운동법칙이라는 일부 이남의 ML 론자들의 이해는 참으로 시대착오적인 동키호테적 발상이며 교조주의적 ‘틀’에 깊이 빠진자들의 궤변적인 흑백논리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
(8) "비판,” P25 참조
(9) 김정일, "주체사상에 대하여,” P15-16
(10) 김정일, "주체사상교양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 P7
(11)"비판," P38
(12) 위와 같은 책, P37-38
(13) 김정일, "주체사상 교양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 P7
(14) ”맑스 엥겔스 전집," 13권, P32-33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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