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어보기>
백사의 후손들 김문보의 '아리아리랑'
특별인터뷰- 이종찬 現 광복회장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장)
전 재산 팔아 만주행...신흥무관학교 세워 봉오동 청산리전투 대승 이끌며 항일전쟁 여섯형제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야기
- 인터뷰 : 김문보(2021. 6. 22)
"우당(友堂)이란 호는 문자 그대로 벗들의 집이란 뜻입니다. 벗들을 보듬어 생사고락을 함께 한다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따라서 우당 기념관이라 해서 우당 관련 유물전시나 사업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당정신이 아닙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직계손자이자 국립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장으로서 활약 중인 이종찬 위원장은 최근 서울시가 남산에 개관한 이회영 선생 기념관의 활동 방향과 관련, 의미있는 말을 전했다.
기념관의 안쪽 방으로 우당과 형제분들의 스토리나 유물을 모신다면 거실에 해당하는 공간엔 우당의 동지들에 관한 이야기와 유물들을 최대한 많이 모시도록 하겠다는 구상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남산 예장공원에 개관한 이회영 기념관엔 아직 업무공간과 수장고가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시설이 차츰 보완되는 대로 이종찬 위원장의 구상대로 우당과 그의 동지들이 함께 하는 공간으로 거듭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남산 기슭은 원래 우당을 포함한 여섯 형제분들이 태어나 자란 곳입니다. 거기서 청년시절을 보내며 국권을 강탈당하는 과정을 목도했습니다. 이상설, 이동녕, 이준 등 애국청년들과 을사늑약을 반대하며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결의한 곳도 남산 기슭입니다. 바로 그곳에 기념관을 세웠으니 잘된 일이고, 서울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종찬 위원장은 이회영 기념관이 남산 기슭에서 개관한 데 대한 의미를 귀하게 두면서도 2024년 쯤에 명동으로 기념관을 다시 옮기게 될 것이라고 전한다.
명동은 어떤 곳인가? 명동 1번가, 현재 YWCA가 자리 잡고 있는 명동 1번가는 바로 이회영 형제들의 집이 있던 곳이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자 형제들은 이곳에서 역사적인 일을 도모한다. 나라가 없어졌는데 집이 다 무엇이며, 억만금의 재산은 또 무엇이냐, 나라를 찾아야 할 것 아닌가?
여섯 형제 중 넷째인 이회영이 한번 뜻을 밝히자 맏형 이건영, 둘째 이석영, 셋째 이철영, 다섯째 이시영, 막내 이호영 형제들은 전 재산을 처분하기 시작했다. 둘째인 이석영은 영의정인 이유원의 양자로 갔으나 경기도 포천 등지 1만여 석의 논밭과 가옥을 모두 팔았다. 이회영도 명동 일대의 땅들을 모두 처분했다.
이렇게 만든 자금이 요즘 시가로 약 2조원. 형제들이 만주에서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게 되는 돈이다.
"당시 서울 사대문 안에는 76명의 대표 가문이 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가문들이 일본으로부터 훈작을 받으며 타협의 길을 걸었습니다. 우당과 그 형제들도 적당히 타협하면 편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마다한 것이지요. 스스로 가시밭길을 택한 것입니다”
이종찬 위원장이 전하는 이야기는 단순히 한가문의 이야기가 아니다. 자연스레 나라의 독립운동사로 이어진다. 만주로 이주를 감행한 형제들이 세운 학교가 바로 그 유명한 신흥무관학교다. 1911년 봄 형제들은 삼원보라는 곳에서 경학사를 설립하고, 6월에 부설 신흥강습소를 개설하니 바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다.
이후 재정난과 일제의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독립군 간부 3천 5백여 명이 양성된다. 이들이 바로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등 일제시기 거의 모든 독립전쟁의 주역이 되는 것이다. 1941년 임시정부에서 광복군을 조직할 때 지청천 사령관, 이범석 참모장 겸 제2 지대장, 김원봉 1지대장, 김학규 3지대장 등 지휘관 대부분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다.
사회주의계 애국지사들도 기념관에 모셔야 음지에서 빛보지 못한 투사들도 함께 해야
피상적으로 보기에 찬연한 독립운동사와 달리 여섯형제들의 생활은 비참했다.
“일주일에 겨우 서너 끼를 먹을 만큼 지내기도 하다가 광복후 부통령이 되는 성재 이시영 외에 다른 형제들은 모두 병사하거나 옥사하고, 심지어 영양실조로 아사까지 합니다. 그래도 독립군이 집으로 찾아오면 꼭 밥을 해 먹였습니다”
무관학교 폐교 이후 형제들의 독립운동은 당시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마찬가지로 유랑 생활과 맞물리게 돌아갔다. 우당의 경우는 3.1운동 때 대규모 봉기와 독립선언을 계획 하였고, 4월에 이동녕과 아우인 성재공과 함께 상해로 이동,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했다. 1923년엔 김창숙 신채호 등과 행동조직인 의열단 활동을 후원했다. 백정기 등과는 ‘재중 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을 결성하여 아나키스트 운동의 중심이 됐다.
64세가 된 1931년에는 다시 동지들을 규합하여 상해에서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흑색 공포단을 조직했다. 이 흑색공포단이 1932년 천진부두에서 군수물자를 적재한 일본 기선을 폭파한 행동조직이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만주일대는 완전 일본군 판이 되었습니다. 중국인들도 화북지대로 쫒겨 갔습니다. 그때 만주에는 양세봉 부대와 몇 갈래의 항일군이 중국군 소속으로 있었는데, 군대끼리의 연결과 협력체제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군대 간의 연결과 협력체제를 구축하는 교량역할을 해야 했어요. 우당이 이를 자청했습니다. 우당은 그동안 너무 많은 젊은 동지들을 희생시켰으니, 이젠 나이 든 내가 사지로 간다며 길을 나섰습니다”
이종찬 위원장이 전하는 이 대목이 이회영의 마지막 길이다. 정보가 일본군에게 새어나갔던 것이다. 일본 경찰은 이회영이 요령성으로 잠입하려 대련항에 내릴 때를 기다렸다가 바로 체포해 버렸다.
"마중나온 동지들이 이를 보고 구출작전을 세우려 했으나 악랄한 일경들이 눈치 채고 미결수인 우당을 바로 뤼순 감옥으로 데려가 버렸어요. 거기서 모진 고문을 당하다 1932년 11월 17일 순국하고 맙니다. 안중근 신채호 등의 애국지사들이 순국한 바로 그곳입니다”
팔순을 훌쩍 넘겼지만 쟁쟁하게 이야기를 이어가던 이종찬 위원장. 독립운동사의 중요 대목을 짚어나가는 그의 표정은 열정에 넘치는가하면 천진하기까지 하다. 역사이야기는 당대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후대가 이야기로 풀 때는 신명이 깃들어야 하는 법이다.
이종찬 위원장의 가맥을 조금 더 올라가면 오성대감으로 유명한 바로 그 백사선생 이항복에 닿는다. 도원수 권율장군의 사위로 임란극복에 큰 공을 세운 분이다. 이종찬은 백사의 12대손이 된다. 권율과 백사로부터 내려오는 구국정신이 여섯형제에게 미쳤다는 이야기다.
추진 중인 임시정부 기념관건립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었다.
“임시정부 기념관이 우리 독립운동사의 본류를 다루며, 큰 나무 역할을 할 겁니다. 하지만 큰 나무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는 역사가 많습니다. 사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도 무정부주의자나 사회주의계열 인사들의 항일투쟁은 너무 왜곡되거나 숨겨 버렸습니다. 이런 부분은 앞으로 이회영 기념관에서 포괄하여 선양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아나키스트 이회영의 손자다운 생각일까. 이종찬 위원장은 우당(友堂)이란 호에 걸맞게 장차 명동으로 옮겨갈 이회영 기념관에서 준비가 되는 대로 음지에 가려 빛 보지 못한 수많은 애국 독립지사들이 모두 벗으로 모일 수 있기를 간구했다.
1980년대 정치1번지 종로에서 내리 4선한 후 1990년대 대권후보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킹 메이커로, 국가정보원장으로 종횡무진 활약한 이종찬 위원장과의 인터뷰는 그 자체로 뿌듯했다.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노블리스 오블리주’로 회자되는 이회영 형제분들의 전설적인 이야기를 바로 그 손자분께 직접 들을 기회는 잘 없기 때문이다.
조국이 무엇이냐 묻거든 그것을 위해 피흘리며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하라는 말이 있다. 이종찬과의 인터뷰는 역사가 푸대접받는 이상한 풍토가 만연한 이 나라에서 조국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 가슴 짠한 시간이었다.
# 김문보는 제 필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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