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
이야기 1
우리 엄마는 방가산 밑 분자골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아홉살 때 부모님 따라 대이 마을로 이사 나와 열다섯살 때 6.25를 만났다.
전쟁이 나자 마을에서 제일 먼저 피란에 나서 영천으로 넘어가고자 했다.
분자골 입구 외갓집 밭 언저리 큰 밤나무 밑에 집안 족보와 논밭 문서 등을 묻어두고 떠났다.
찐쌀과 말린 고두밥, 물 등을 챙긴 일본식 니꾸샤꾸 가방을 하나씩 메고 방가산 대박에 올라서자 벌써 군인들이 꽉 덮여 민간인을 막았다.
석산 쪽으로 가서 영천으로 가라 하여 석산 수기재까지 갔다. 거기도 군인들이 막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산으로 산으로 걸어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남자들은 낮엔 산에 숨고 밤에만 집에 와야 했다.
다른 가족들도 낮엔 양지 쪽인 집에 있을 수 없어 음지인 화동댁으로 피신해 지냈다.
이야기 2
6.25 전쟁으로 화산벌안 쪽 국군과 군위군 고로면 쪽 굼뜰까지 진격한 인민군의 전투가 치열했다.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고로면민을 부역에 부쳐 시신을 치우게 했다.
한 다리 건너 한 명씩 시신들이 엎어져도 있었고, 앉은 채로도 있었다. 하나 같이 새파란 청춘들이었다.
국군인지 인민군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머리가 꺼뭇하게 난 이들은 국군 이었고, 머리가 빨간 이들은 인민군 이라 했다.
이야기 3
피란길이 막혀 마을 음지에서 지내던 외갓집 가족에게 어느 날 사람이 찾아왔다.
외할매 동생, 엄마의 외삼촌이었다. "누부야, 여기 있으면 위험해. 빨리 딴 데로 가자."
엄마는 외삼촌을 따라 외가 곳인 의흥으로 피란갔다. 의흥은 옛 현청(縣廳)이 있던 곳이라 큰 고을이었다.
깊은 산 속과 달리 매미 구성지게 우는 한 낮을 지나 별 쏟아지는 밤이 되자, 외삼촌이 울엄마 손 이끌고 산책에 나섰다.
어느 곳을 지나는데, 길 옆 논에서 투닥투닥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전쟁 중이라 모심기가 안된 논이었다.
외삼촌이 말했다. "애야, 저기 봐. 아군 두구리와 인민군 두구리가 싸우고 있어. 두구리들끼리도 싸우는 거야."
청춘이 죽어 억울한 원혼이 됐을 국군과 인민군. 그들은 죽어 두구리가 되었어도 쉬지 못한 채 싸워야 했다.
이야기 4
큰 외갓집 뒤안 돌담 언덕에 오래된 감나무가 있었다.
삭을대로 삭아 감을 별로 달지 못했다.
어른들이 의논하여 그 나무를 베기로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나무를 베기로 한 바로 전 날에 누렇게 생긴 큰 구렁이 두 마리가 나무 밑 둥치에서 나오더니,
꼭대기까지 수십 번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이었다.
어른들이 보더니, 감나무가 구렁이 부부의 집이라 시위하여 알리는 거구나.
나무를 베지 못했고, 어릴 적 외갓집에 가면 나도 그 나무를 오랫동안 볼 수 있었다.
이야기 5
분자골 처녀 하나가 산판하러 온 남자와 좋아져서 아이를 뱄다.
좋아 지낼 때는 혼인하자 해놓고, 산판이 끝나자 남자가 도망치고 말았다.
말로는 신녕에 산다 했는데, 어디 사람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절망한 처녀가 분자골 깊은 못에 빠져 죽고 말았다.
* 대이마을 처녀들이 어느 날 물포구 열매 따먹으로 가마골로 갔다.
열매를 막 따먹으려는데, 멀쩡하던 하늘이 갑자기 시커멓게 변하며 빗방울이 뿌렸다.
소나기인가 보다 하고 처녀들이 황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천둥 번개가 심하게 쳤다.
옷을 흠뻑 적시고 말았다. 머리카락이 귀신처럼 날리고 옷고름들도 풀어져 기이하게 여겼다.
* 이튿날 마을에 소문이 돌았다. 산판하던 남자의 아이를 밴 분자골 처녀가 못에 빠졌다.
어제 비 쏟아지고 천둥 벼락 치던 그 시각이었다.
사람들이 말하길, "아하~! 그 불쌍한 처녀 하늘에 오르느라 그랬구나."
점 보는 지일할매가 말했다. "아니야, 아이 밴 처녀가 몸을 던지니 못지킴이가 더럽다고 하늘에 오른거야"
이 말도, 저 말도 그럴 듯 했지만 산골엔 슬픈 전설 하나 맺히고 말았다.
2025. 1. 29. 김문보
----------------------------------------------- * 두구리 : 해골바가지를 말함. * 산판 : 삼림 벌채작업. * 분자골 : 방가산 밑 군위군 쪽 첫 마을 * 대이 : 경북 군위군 고로면(삼국유사면) 인곡 2동, 나의 외갓집 마을. 분자골은 인곡 3동이었다. 인곡 1동은 핌팜(편파암 : 바위를 깨서 논밭을 만든 곳)이라는 마을. * 석산 : 아미산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돌산이 있어 석산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 수기재 : 군위군 고로면(삼국유사면)과 영천군 화북면 상송리, 청송 노귀재 길의 분계령이 되는 재. 옛날에 산적들이 출몰 할 만큼 깊고 넓게 펼쳐진 고개다.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특집기획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