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인민들의 뜨거운 사랑속에
김철호
1941년 3월 지방조직들과의 련계를 맺기 위하여 소부대활동을 전개하고있던 때의 일이다. 우리들은 안도지방에서 적들의 추격을 받게 되여 사흘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채 깊은 밀림속을 뚫고나가게 되였다.
마른 풀한잎 찾아볼수 없는 깊은 생눈길을 헤쳐나가다가 쓰러지는 동무들을 서로 부축여줄 때마다 나는 가슴아픈 생각에 그만 걸음을 멈추고는 어디 먹을만한 마른 풀잎이나 나무열매라도 없을가 하고 이리저리 눈길을 살피군 하였다. 이 동무들에게 묽은 죽한그릇이라도 대접할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싶었다. 우리 일행 6명중에 녀성대원은 나하나뿐이고보니 그렇게 못해주는 자신이 얼마나 민망스러운지 몰랐다.
《철호동무, 어서 걸읍시다. 적들은 우리의 발자국을 밟아올것이요. 이런 때에 한걸음 멈춰서는것은 그만큼 위험을 더 초래케하는것이요. 다른 아무런 생각도 말고 걷기요.》
《…》
나는 잠자코 동지들의 뒤를 따라설수밖에 없었다.
《우선 미혼진 통신처가 있던곳을 찾아가서 부대의 행처를 알아봅시다. 만일 그곳에서도 부대의 행처를 알아내지 못할 경우에는 쟈피거우로 나가서 지방조직들과 련계를 맺으면서 부대와의 련락을 취해봅시다.》
후방책임자인 곽동무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결심을 말하면서 앞서서 걷고있었다. 신이 해져서 대부분 동무들이 각반을 풀어 발을 싸매고 걷는 생눈길은 안타까울뿐 좀처럼 길이 붇지않았다.
이렇게 하여 우리 일행이 미혼진밀영까지 왔을 때 밀영지는 이미 적들의 습격을 받은지도 오랜듯 모든것은 불에 타고 깨여진 그릇쪼각들만 흩어져있었다.
어디엔가 대원들의 노래가 숨어있고 생활이 숨쉬고있을듯싶은 이 밀영지가 원쑤놈들의 더러운 발에 짓밟힌것을 보니 나는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위대한 수령님을 내가 처음 만나뵙던곳도 바로 이곳이 아니였던가.)
땅에 쓰러질것 같은 몸을 억지로 버티고서서 이런 생각을 하는 나의 눈앞에는 몇해전의 일이 불현듯 생각났다.
1936년 1월초순 우리 재봉대원들은 수백벌의 군복을 기한전에 만들려고 《유격대행진곡》을 부르며 재봉기를 돌리고 또 돌리고있었다. 이런 때에 지휘관차림을 한 젊은 간부한분이 우리들이 작업을 하고있는 귀틀집안으로 들어오셨다.
《동무들 추운데 수고들하오.》
키가 후리후리하고 영채어린 두눈에 인자한 웃음을 담으신 그분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우리 재봉대의 사업정형을 일일이 료해하시였다.
《남들은 다 총을 메고 싸우는데 우리는 이렇게 편안한곳에서 재봉기나 두르는데 무슨 수고겠어요.》
나는 그분이 누구이신지도 모르면서 적들과 직접 싸우고싶은 은근한 심정을 담아서 이렇게 허물없이 대답올렸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우리들이 하고있는 재봉대일이 결코 적과 싸우는것만 못지 않다고 하시면서 녀성들의 임무에 대해서 상세히 말씀해주셨다.
그분이 나가신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그분이 바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이시라는것을 알고서 얼마나 놀랐던가.
(지금은 어느곳에서 대부대를 지휘하시며 적들에게 죽음을 주고계실가?)
이렇게 생각하니 그분의 뒤를 따라 름름히 걸어나가고있는 수많은 동지들의 모습이 선히 떠오르고 그들에게 입힐 군복을 만들던 몇해전의 생활이 못견디게 그리웠다.
《제2목표로 정한 쟈피거우로 떠납시다. 그리고 거기가서 천령감이 있는 숯막에도 들려봅시다. 동지들을 못만나더라도 그 령감이 있으면 우선 우리 일이 해결될수도 있을게요.》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곽동무의 이 말에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행군대렬을 따라섰다.
천령감은 60살 가까운 로인인데 일제놈들에게 쫓기워 혼자 산속에 들어와 숯을 구우며 생활하는 로인이였다. 나는 그 로인을 만나본 일은 없지만 이미 여러차례 동무들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었다.
우리가 천령감이 있는 숯막에 이른것은 그후 또 이틀이 지나서였다. 인기척을 듣고 숯막에서 나온 천령감은 이미부터 낯익은 곽동무를 보자 그만 《살았댔구만!》하고 말하며 달려와서 그의 손을 덥석잡고 오래도록 놓지 않았다.
《왜놈들의 수작이 언제나 거짓인줄 뻔히 알면서도 당신들을 다시 못만나는줄만 알았댔소.》
그러면서 그는 지난날 자기 마을에 오셨던 위대한 수령님의 안부를 물었으며 그후에도 몇차례 이곳을 다녀간 소부대동무들이 요즘에는 소식이 없어서 몹시 궁금하였다는것을 거듭 되풀이하였다.
《자, 어서 안으로 들어갑시다.》
천령감은 우리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면서 숯막안으로 안내하였다. 그리고 우리들이 그곳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또 자기가 할수 있는 방조는 무엇인지 어서 말해달라고 하면서 우리에게로 다가앉았다.
곽동무는 천령감에게 우리들이 이 지방에서 당분간 정치공작을 하겠으니 우선 적정을 탐지해줄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우리가 부대로 돌아가기전까지 천령감과 함께 숯막부근에서 지내야겠다는것을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천령감은 한동안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던 끝에 자기가 모든것을 마련하겠으니 피곤을 풀면서 정치공작이나 지장없이 진행하라고 하였다.
《당신들이 왔다는것만 알아도 인민들은 기운이 되살아날게요. … 그러니 아예 딴걱정은 마시우. … 우리를 해방시켜줄 큰일을 당신들이 하지 않소.》
《아닙니다. 우리가 농사일을 하자는것은 로인의 일손을 덜어드리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들이 사업하는데도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날 우리는 천령감의 숯막을 떠나 산중으로 더 올라가서 부대를 일구기 시작했다. 그리고 농사가 잘되도록 온 정력을 다 기울였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당분간 이곳에서 사업을 계속하며 한편으로 부대와 련락을 취하기에 노력하였다. 그동안 우리를 돌봐주기 위한 천령감의 활동은 이루 말할수 없이 컸다. 그는 적정을 탐지해주었고 우리가 만나야 할 부락내의 혁명군중들과 련계를 맺어주었으며 우리의 식량까지도 여러차례 구입해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수고에 대해 마음속으로 크게 느끼면서도 말을 함부로 입밖에 낼수 없었다. 왜냐하면 전번에 내가 한번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가 그의 노여움을 단단히 샀기때문이였다.
《나를 무슨 장사군으로 아오? 당신들은 일본놈들과 싸우는 사람들이니 내가 당신들을 존중하는것은 응당한 일이 아니요. 일본놈들이 없어야만 우리들도 잘 살수 있다는것을 나도 알고있소. 다시는 그런 말을 마슈.》
그러나 천령감의 이러한 말에서 나는 무안을 당했다기보다 오히려 새힘과 기쁨을 느꼈다.
(이런 인민들이 곁에 있으니 우리가 무엇을 못하랴. 우리 또한 이러한 인민들을 위해 목숨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니… 이들을 위하여 혁명앞에 목숨도 바치리라.)
그런데 어느날 부락에 내려갔다가 올라온 천령감이 품안에서 천으로 곱게 만든 녀자신발을 한컬레 꺼내더니 나보고 신어보라고 하였다.
《아니, 이게 웬거예요.》
《동무한테 주라고 우리 딸애가 만든거요. 어서 신어보우.》
의아해하는 나에게 천령감은 자기에게도 내 나이와 비슷한 딸이 부락에 있는데 그애도 자기처럼 일본놈을 몹시 미워한다는것을 이야기했다.
나는 만나보지 못한 천령감의 딸이 밤을 새워 만들었을 정성어린 신발을 감격속에 신어보았다. 신발은 신통히도 발에 꼭 들어맞았다. 그럴수밖에 없는것이 천령감은 내가 잠든 사이에 다 헤여진 내 신발에서 본을 떠서 자기 딸에게 주었던것이다.
《따님에게 꼭 전해주세요. 이 신을 신고 혁명앞에 끝까지 용감하겠다고요.》
이러한 천령감의 지성어린 도움을 받으며 우리들은 그 지방 혁명조직들과의 련계를 가지고 적정탐지도 성과있게 수행하였으며 차츰 몸도 회복되여 이제는 떠날 준비를 하고있었다.
그런데 천령감이 부락으로 내려간지 20일이 되였는데 아무런 소식도 전해오지 않았다.
(어찌 되였을가. 부락에 내려가도 열흘을 넘긴 일이 없었는데 혹시 체포된게 아닐가.)
모두들 이렇게 근심을 하였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 먼곳으로 떠났는가?… 신병이 생겨서 자리에 눕지나 않았을가.)
구구한 생각들도 많았으나 결국은 적에게 체포된것이라는 의견이 종합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것인가?)
부대를 찾아떠나가자니 아직 식량도 피복도 마련되지 못했다. 만약 천령감이 체포되였다면 그가 우리의 비밀을 루설하지 않는다쳐도 적들이 숯막이 있는 이곳까지 오지 않으리라고 단정할수는 없는 일이였다. 결국 우리는 좀더 깊은 산중으로 우선 자리를 이동하고 며칠동안 더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경계를 강화하고 숯막근처에 보초를 세우기로 했다. 그것은 적들을 감시하는 동시에 천령감이 올라올지도 모르므로 그와 련계를 갖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답답한 며칠이 또 지나간 어느날 달밝은 밤이였다. 천령감이 다리를 절룩이며 지팽이에 의지하여 올라오는것이 나무숲아래로 내다보였다. 곽동무와 나는 그를 맞받아 급히 뛰쳐나갔다.
《아니 어찌된 일입니까?》
전에없이 수척하여진 로인의 몸을 부축하며 이렇게 묻는 내가슴에서는 울음이 터질것만 같았다.
《식량을 좀 사들이다가 그놈들에게 잡혀서 그저께야 나왔소. 몹시 기다리게 해서 안됐군.》하고 간단히 대답할뿐 놈들에게 당했을 악형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그동안 식량부족으로 우리들이 얼마나 고생들을 했겠느냐고 걱정하였다.
《어서 짐을 벗으세요.》하고 나는 로인에게로 다가섰다. 그러자 로인은 지고온 배낭을 벗는데 무척 힘들어했으며 부지중 신음소리까지 내였다. 나는 곽동무와 함께 로인의 짐을 받다가 깜짝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젖혀진 적삼사이로 보이는 목뒤와 잔등에는 가죽채찍이 휘감겼던 자리와 불로 지진 자리가 달빛에 뚜렷이 보이지 않는가. 나는 가슴이 미여지는듯 아팠고 원쑤놈들을 당장 치고싶은 격분을 걷잡을수 없었다.
《왜 이렇게들 서있소. 자, 어서 앉아 먹읍시다. 그놈들의 감방에 갇혀있으면서도 당신들이 시장해할 생각에 그만 잠을 못잤소.》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음식들을 배낭에서 손수 끄집어내놓았다.
우리는 로인이 내놓는 그 음식 하나하나에 뜨거운 시선을 던질뿐 어느 누구도 처음에는 차마 손을 못댔다.
《로인님, 어서 자리에 좀 누우십시오.》
곽동무가 이런 말을 했을 때에 우리도 비로소 눈물을 닦으며 로인에게 자리를 권했다.
《허, 당신들이 나를 산송장으로 아는 모양이군.》
고집스런 로인은 또 다가앉으며 이렇게 말하더니 《기뻐하라고 가져온 음식을 놓고 왜들 우오. …이거나 어서 먹자는데두 그러는군. 참 사람들두.》하고 우리에게 음식을 권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아무래도 이곳은 위험하니 이제라도 산속으로 더 들어가있으면서 갑갑한대루 이틀만 더 기다려주. 당신들이 떠날수 있게 준비는 다 돼있으니까 모레는 어김없이 부락민들이 찾아올게요. 그러니 그날밤 건넌산기슭에서 다시 만납시다.》
그리고는 우리의 얼굴을 하나하나 더듬어보면서 띠염띠염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당신들과 기어이 헤여져야 한단말이지. 하기야 당신들을 만나고싶고 가까이 하고싶은 사람들이 어찌 나뿐이겠소. 그보다도 당신들을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시는 김일성장군님께서 오죽 기다리시겠소. 그러니 어서들 가야지. 어서 가야하오.》
그리고 로인은 위대한 수령님께 부디 몸건강하시고 조국을 광복해주시기를 바라는 우리들의 소원을 하루속히 풀어달라는 말씀을 전해달라고 거듭 당부하였다.
《말씀드리고 말고요.》하고 로인에게 대답하면서 이런 인민들과 함께 있는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하리라는것을 나는 다시한번 가슴깊이 생각하였다.
(그렇다. 우리의 임무는 중하다. 천령감만 해도 위대한 수령님께서 령도하시는 우리 유격대만 믿고산다고 하지 않는가. 인민을 위해서 일떠선 우리들이 어찌 인민의 이런 숙망을 잠시인들 잊을수 있으랴.)
이틀후 천령감은 5명의 부락민과 함께 식량, 피복, 신발 등을 지고 약속한 시간에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는 그들을 맞받아나가면서 우선 로인의 짐을 받아지려고 하였다. 두세사람이 매달렸으나 로인은 계속 걸으면서 좀처럼 짐을 벗지 않았다.
《만일 로인님이 계속 짐을 지고가신다면 우리는 가지 않겠습니다.》하고 곽동무가 말을 하니 천령감은 그제야 할수 없는지 한숨을 깊이 쉬며 짐을 벗어주는것이였다.
《또 한번 말하오만 당신들만을 믿고사는 우리들을 앞으로도 잊지 말고 찾아와주슈. 목숨이 살아있는한 당신들과 헤여지고싶지않소.》
목이 메여 떠듬떠듬 이런 말을 하면서 우리를 배웅해주는 천령감의 두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있었다.
나는 천령감의 마디굵은 손을 내아버지의 손을 잡듯 덥석잡고 그우에 얼굴을 묻었다.
* *
천령감과 헤여진 우리 소부대인원이 한사람의 락오자도 없이 부대를 찾아간것은 그 이듬해였다. 부대에서는 우리가 모두 희생된것으로만 알고있던차에 다시 만나게 되니 미처 무슨 말부터 해야 좋을지 몰라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또 한가지 천령감에 대한 새로운 소식을 들었다. 부대에서는 그동안 우리를 찾기 위해 박성철동지를 두번이나 파견하여 밀영지가 있던곳마다 찾아보았다는것이였다. 박성철동지는 우리들이 있던 쟈피거우에도 왔었는데 그곳에서 숯굽는 로인도 만났다. 혹시 이곳에 유격대동무들이 오지 않았던가고 여러모로 물었으나 그 령감은 끝내 우리가 그곳에 왔었다는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것은 천령감이 우리를 찾아온 박성철동지를 혹시 적들의 특무가 아닐가 하는데서 끝내 우리의 행처를 비밀로 굳게 지켰던것이다. 그만큼 완고하다할가 자기가 믿고 결심한바는 추호도 굽히지 않는 로인이였다.
이런줄 알게 된 박성철동지는 급히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그 로인을 대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 숯막에서 로인과 함께 하루밤을 묵으면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죄악을 폭로하고 그를 반대하여싸우는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의 견결한 투쟁에 대해서 하나하나 이야기하였다.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하면서 박성철동지는 로인의 동정을 살폈다. 그러나 로인은 박성철동지의 말에 때로는 깊은 공감을 표시하기도 했지만 역시 그가 확고히 믿어지지 않으므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담배만 계속 피우고있었다.
이렇게 하루밤을 지낸다음 박성철동지는 아침에 길떠날 차비를 하였다. 그러면서 역시 어느때나 그러하듯 편히 쉬고가게 되였다고 깊이 사례를 하면서 밥값을 내주었다.
《일제놈들때문에 로인역시 량식이 곤난하실텐데 두 때씩이나 축을 내여 안됐습니다. 내 배낭에 그만한 량식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 동무들이 간곳을 알아내자면 이제 얼마를 더 다녀야 할지도 모르니 미안합니다만 대신 돈을 받아주십시오.》
이렇게 박성철동지는 로인에게 미안한 말을 하면서 돈을 쥐여주고 길을 나섰다.
그제야 로인은 겨우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이제 어디로 가시겠소.》
《글쎄올시다. 약속한 장소인 로인댁에까지 왔으니 이젠 짐작되는곳은 다 다녀보았는데 못만나 앞이 막연합니다. 그들을 찾지 못하고는 나도 부대로 돌아갈 면목이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시려우.》
《고생하는 동무들을 기어코 찾아다녀야지요.》
《알겠수다.》
이렇게 말을 하고 숯막뒤로 돌아갔던 로인은 바닥이 다 빠진 녀자신 한컬레를 들고나왔다. 그리고 그것을 박성철동지에게 보이면서 《이것이 어떤 사람의 신인지 알만하오?》하고 묻는것이였다. 박성철동지는 첫눈에 그것이 우리 유격대녀대원들의 신임을 알수 있었다.
그러자 로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옳수다! 이제는 당신에게 내가 아는것을 털어놓고 이야기하리다. 내가 너무 완고하다고 나무라지는 마오. 당신이 어제저녁 늦게까지 이야기를 하다가 새벽녘에 자리에 누웠을 때도 나는 자지 않고있었댔소. 그러다가 당신이 가지고다니는 배낭에 손을 넣어보았고 그 배낭의 냄새도 맡아보았소. 왜놈의 〈개〉들이라면 이렇게 변장을 할수도 없거니와 또 내눈에 무엇이든지 드러나고야말았을거요. 그놈들에게 너무도 속아왔기에 그만 당신을 괴롭혔으니 달리 생각을 마오.》
그러면서 로인은 우리가 그곳에 와서 정치공작을 진행한 일이며 떠난 날자와 행군해간 방향 그리고 우리 동무들의 모습까지 일일이 이야기해주었다는것이다.
《그들도 이곳을 떠나면서 언제나 부대를 만나게 될지 모르겠다고 근심들을 했소. 몸들은 다 무탈했으니 다른 근심일랑 아예 마슈.》
이렇게 숯막집 천령감은 우리들의 비밀을 지켜주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그토록 비밀을 지키고있는 천령감의 소박한 모습을 다시 눈앞에 그려보았다. 굳게 다문 입과 깊은 생각에 잠기는 그 눈이며 지팽이에 의지하면서도 짐을 벗지 않으려던 그 모습, 잔등에 휘감겼던 왜놈들의 가죽채찍자리 그리고 우리만 믿고산다는 그의 뜨거운 심정…
나는 그 로인의 모든 귀중한 모습과 심정을 어느 하나도 잊을수 없다.
우리는 그러한 인민들의 뜨거운 사랑속에서 간고한 싸움을 하며 승리하였던 것이다.
16. 잊을수 없는 로인에 대한 회상
리오송
1936년 초여름(내가 10살나던 해였다.) 우리 아동단일행은 새 밀영지를 향해 내도산근거지에서 떠났다. 우리 일행은 20여명의 아동단원과 우리를 지도하는 몇명의 유격대원(주로 녀자대원)들 그리고 인솔자 로인까지 합하여 30명가량 되였다.
이 로인은 지방공작원으로서 이 지방지형을 잘 알기때문에 이번 우리 일행의 인솔책임을 졌던것이다.
우리 일행은 로인의 안내로 마안산을 지나 마혜산골짜기로 들어갔다. 골안으로 한참 들어가니 귀틀집 한채가 나타났다.
이곳까지 이르는동안 우리는 수다한 난관을 겪었다. 며칠씩 계속되는 행군으로하여 많은 아동단원들이 발바닥에 물집이 생겨 절뚝거렸으며 가파로운 산발을 톺아올라갈 때면 힘이 모자라 나무아지를 휘여잡고 헐떡거리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럴때마다 로인은 앞뒤로 왔다갔다하며 걷지 못하는 아이들을 도와주었고 때로는 친자식처럼 등에 업고걸었다.
나는 그때 10살이였는데 어느한 가파로운 산길을 오르다가 그만 힘이 진하여 땅바닥에 주저앉고말았었다. 그러나 어느사이엔지 로인이 나를 안아일으켜 땀투성이가 된 자기의 등에 업고 령을 오르면서 숨가쁜 소리로 말하였다.
《오송아! 이런 고생을 고생으로 알지 말아라. 이 길이 왜놈들때문에 돌아간 네 아버지와 어머니의 원쑤를 갚는 길이라는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된다. 마음을 굳게 먹고 견디여나가야 한다.
너희들에겐 친부모보다 더 귀중한 조국이 있다. 김일성장군님의 령도를 받들고 그 조국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
어린 나였으나 로인의 이 말에 온몸이 뜨거워지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우리 일행은 귀틀집에서 쉬여가기로 했다.
그 집에는 중년부인이 대여섯살 먹었을 어린 딸을 데리고있었다.
주인어머니는 우리 일행을 반가이 맞이해주며 방안으로 들어오라고 권했다. 우리들은 주인어머니가 권하는대로 방안에도 들어가고 더러는 토방과 마당에 있는 나무등걸에도 걸터앉았다.
나는 방안으로 들어가 뚫어진 뒤문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집뒤 밭에는 양삼이 무성했는데 그속에 누런것들이 엎드려있었다.
적《토벌대》였다. 놈들은 우리 일행을 잡으려고 매복했던것이다.
나는 《적이다.》하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 소리에 로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앞마당과 잇달린 밀림을 가리키며 우리더러 재빨리 뛰쳐나가 숨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문가에 서서 우리 아동단원들이 빨리 밖으로 나가도록 도와주었다. 이때 나는 뒤문곁에 있었기때문에 맨 나중에야 마당으로 뛰쳐나가게 되였다. 내가 문턱을 넘어서려는 순간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나는 바른쪽 정갱이에 심한 타격을 느끼며 쓰러졌다. 다시 일어서려던 나는 또 그 자리에 쓰러졌다. 정갱이에 관통상을 입었던것이다.
위급한 순간이였다. 나는 엉겁결에 배밀이로 마당으로 기여나갔다. 좀 기여가느라니 앞에 서너아름이나될 개암나무가 가로누워있었다. 나는 그 개암나무를 기여넘었다. 개암나무너머에는 변소자리인듯한 조그마한 구뎅이가 있었다. 나는 그 구뎅이에 들어가 엎드렸다.
총소리는 로인이 뛰여간 방향에서 났다. 이윽고 총소리가 멎더니 《토벌대》놈들이 집으로 몰려오는듯 지껄이는 소리가 가까이로 들려왔다. 나는 귀를 도사리고 놈들의 동정을 살폈다.
《토벌대》놈들이 집안팎을 뒤지는 모양으로 거칠게 여닫는 문소리와 그릇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개암나무너머로 살며시 집쪽을 살펴보았다. 놈들은 집안과 집뒤로 몰려간듯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배밀이해온 자리에 줄을 친듯 피가 흘러있었다.
(필경 놈들이 피자국을 따라와 나를 발견해낼텐데.)
나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나는 피자국에 흙을 쥐여뿌리기 시작했다. 놈들의 동정을 살피며 계속 흙을 쥐여뿌렸다.
피자국은 얼핏 보기엔 없어진듯 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아직 좀 남아있었다. 놈들이 앞마당으로 나오는것같은 기색이 있어 나는 얼른 몸을 움츠렸다. 다리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 바지가랭이가 질퍽하니 피에 젖었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 대충 비끄러매고 도로 구뎅이속에 엎드렸다.
가만히 들으려니 방안에서 《토벌대》놈들이 욱박지르는 사나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안에 있는 어린애를 위협하는 모양인지 어린애가 앙앙 울며 어머니를 목이 터지게 찾았다. 나는 그 어린애가 몹시 애처롭게 생각되여 괴로왔다.
(저놈들은 사람이 아니야! 어린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나는 속으로 이렇게 웅얼거렸다. 그리고 늙은이와 어린애들을 집안에 가두고 집에 불을 지르던 놈들의 만행을 여러번 보아온 나는 놈들이 또 무슨짓을 하리라는것이 짐작되자 몸서리가 쳤고 이가 갈렸다.
이윽고 문여닫는 소리가 나더니 마당으로 나오는 군화소리가 들렸다. 잠시후 《피다!》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내가 흘린 피자국이 그놈의 눈에 뜨인것이라고 생각되자 오금이 저렸고 눈앞이 아찔해졌다.
저벅저벅 군화소리가 나더니 《흥, 요놈도 도망쳤구나.》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떠들썩하며 집뒤로 돌아가는 군화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내렸건만 저으기 마음이 놓였다. 이때 집안에서는 몽둥이로 사람을 패는듯한 《퍽! 퍽!》소리와 함께 놈들의 악다구니소리가 들려왔다.
《공산당새끼들을 어디로 빼돌리고 너 혼자 그리로 도망쳤어? 앙!》
《이 늙은것아, 아직두 안댈테야!》
《에익 죽어봐라!》
이렇게 을러대는 소리와 함께 《퍽! 퍽!》하는 소리가 연거퍼 들려왔다.
나는 로인이 붙들렸다는것을 알았다. 동시에 그는 우리 아동단원들을 무사히 빠져나가게 하기 위해 자기 혼자 적들을 딴데로 유인하다가 붙들렸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우리들을 친자식보다 더 사랑해주던 로인의 주름잡힌 얼굴이 떠오르자 뜨거운것이 목구멍으로 치밀어올라왔다. 그리고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퍽! 퍽!》하는 소리가 한결 잦아지고 돼지멱따는듯한 놈들의 목소리만이 더욱 악착스럽게 들려올뿐 로인의 목소리는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내 눈앞에는 우리 아동단원들이 무사하기만을 바라며 조용히 앉아 놈들의 악형을 말없이 받고있는 로인의 의젓한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뒤이어 지난 설명절날 일이 눈앞에 어리였다. 그때 로인은 손수 피나무껍질로 20여컬레의 신을 삼아 우리 아동단원들에게 일제히 신겼다.
모두 제신을 신고 기뻐 뛰노는 우리들을 보고 같이 기뻐 웃는 로인의 주름잡힌 얼굴에는 두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발에 꼭 맞는 새신을 받아신으면서 우리 아버지생각을 한 나는 눈물을 흘리는 로인의 심정을 알수가 있었다. 아버지생각이 더욱 간절해진 나는 로인한테로 달려가 《아바이!》하고 그의 품에 안겼다. 로인은 나를 꼭 껴안으며 《그 초신이 그리두 좋으냐? 허허 이제 김일성장군님께로 가면 맵시있는 운동화들을 주실게다. 그리구 너희들이 가죽구두를 마음대로 신게 될 날이 반드시 올게다.》하며 내 머리를 연신 쓰다듬어주었다.
(그러던 로인이 지금 원쑤놈들한테 모진 고문을 당하고있지 않는가.)
나는 조금전까지 놈들에게 붙들릴가봐 떨리던 마음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참을수 없는 분노에 치가 떨렸고 《아바이!》하고 부르며 당장 달려나가고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으려니 진땀이 온몸에 내돋았다.
(어떻게 아바이를 구해낼순 없을가? 총이 있으면…)
허나 나에게는 총도 없었다.
유격대아저씨들이 어디서 불쑥 나타나서 놈들을 몰살시키고 로인을 구해냈으면 하는 생각도 났다. 허나 유격대아저씨들은 어제 우리와 헤여져 어디론가 적들을 치러 떠났다.
《퍽! 퍽!》사람패는 소리와 놈들의 악을 쓰는 소리가 퍼그나 오래동안 들려온후에 로인의 긴 신음소리가 비로소 들려왔다. 그 신음소리는 나의 가슴을 후벼내는듯 아프게 들려왔다.
로인의 신음소리는 더는 들려오지 않았고 놈들의 떡떡거리는 소리도 멎었다.
조금후 방안에서 금시 숨이 넘어가는듯한 어린애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짐승같은 놈들이 어린애를 죽이는것이 아닌가고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끼쳐지고 분한 생각에 가슴이 미여지는듯 했다.
《토벌대》놈들이 떠날 차비를 하는 모양으로 왁자지껄 떠들며 앞마당으로 몰려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타는듯 안타깝고 초조한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놈들의 발자국소리가 멀어져갔다. 나는 구뎅이속에서 몸을 일으켜 살펴보았다. 집에 불이 붙었다. 로인과 어린애가 저속에 있다고 생각하니 주저할새가 없었다. 나는 구뎅이에서 뛰쳐나와 부상당한 다리의 아픔도 잊고 절뚝거리며 집으로 달려들어갔다.
영납새와 문에 불이 달렸다. 나는 부엌문을 열어젖혔다. 불길이 내몸을 덮치듯 확 휩쌌다.
나는 불길을 무릅쓰고 부엌안으로 들어섰다. 어디선가 어린애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귀를 강구고 신음소리가 나는곳을 찾아보았다. 신음소리는 연기속에 휩싸인 닭장에서 났다. 나는 그리로 달려가 닭장에 손을 쑥 들여밀었다. 뭉클하는것이 있었다. 그것은 어린애의 몸이였다.
나는 어린애를 끄집어내여 둘쳐업고 뛰여나오다가 문턱에서 쓰러졌다. 지독한 연기에 질식되기도 했지만 부상당한 다리에 맥이 빠져서였다.
나는 내몸을 몹시 흔드는 감촉에 정신을 차렸다. 눈을 떠보니 나는 개암나무옆에 누워있었다. 주도일동무와 녀자대원 한동무가 다급히 나를 흔들며 《오송아!》 《오송아!》하고 내 이름을 부르고있었다.
나는 상반신을 일으키며 《아바이가 저 불속에 있을거야요. 아바이를 끌어내오자요.》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정신을 차린것이 기쁜듯 후 하고 긴숨을 몰아쉬며 웃어보일뿐 내 말을 들은척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안타까와 《빨리빨리 끌어내자요.》했는데 그들은 나와 내가 업어내오던 어린애를 둘쳐업고 숲속오솔길로 들어갔다. 나는 자꾸 뒤를 돌아다보며 《아바이를 구해내자요!》하고 애타게 소리쳤다. 그들은 아무 대답도 없이 나와 어린애를 업고 그냥 밀림속으로 들어갔다.
얼마를 들어가 우묵진곳에 이르러 나를 내려놓았다. 거기에는 우리 일행이 모여있었다.
로인과 집주인어머니의 시체가 가지런히 누워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로인의 시체를 보자 내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나를 업고온 대원은 로인이 원쑤놈들의 날창을 잔등에 받으면서도 입을 다물고 끝내 비밀을 지켜냈다고 하며 눈물을 씻었다. 모두 눈물을 씻었다. 나는 그의 시체앞에 머리를 숙였다.
아바이가 우리들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바쳤다고 생각할수록 가슴은 터질듯 뜨거운것으로 꽉 차고 거침없이 눈물이 흘렀다.
(우리를 친자식처럼 귀여워해주고 우리들의 생명을 구해준 아바이의 원쑤를 백배천배로 갚으리라.
동지들의 안전을 위해 자기 한목숨을 서슴없이 바친 아바이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본받으리라.)
나는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며 이렇게 맹세를 다지고 또 다졌다.
로인의 희생은 나의 어린 가슴에 혁명을 위하여 나의 목숨이 요구될 때는 언제나 서슴없이 바치리라는 굳은 결심이 깊이 뿌리박게 하였다. 그리고 그후 잊을수 없는 로인의 희생을 생각할 때마다 내가슴속에는 원쑤들에 대한 복수의 불길이 더한층 거세게 일어나군 하였다.
로인은 오직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혁명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서슴없이 바친 훌륭한 혁명투사였다.
나는 일제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우리 나라가 가장 암담하던 시기에 2천만 조선인민의 선두에서 혁명의 홰불을 높이드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령도밑에 모든 곤난을 박차고 일제와 싸운 로인과 같은 이 나라의 수많은 영웅들이 있음으로하여 오늘과 같은 영광과 행복을 누리고있다는것을 가슴깊이 느끼며 당과 수령께 무한히 충직할 결의를 굳게 다진다.
-『항일빨찌산 참가자들의 회상기3』(조선로동당출판사, 2003)에서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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