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위대한 사상에 고무되여
김성국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친솔밑에 항일유격대가 처음으로 장백으로 나오던 해이다.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여나 일찌기 어머니까지 여읜 나는 어려서부터 지주놈의 머슴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리하여 그해에도 나는 장백현 가재수부락의 어떤 지주놈의 집에서 아침일찍부터 저녁늦게까지 등뼈가 휘도록 일을 했다.
그때 나의 아버지는 팔도구강변에 있는 중국인지주의 고용농으로 외따로 떨어진 농막에서 살며 일했다. 그러다나니 우리는 서로 가까이 있으면서도 만나보기조차 힘들었다. 일을 죽게 해도 살림은 쪼들리기만 했다.
이러한 어느날이였다.
나는 그날도 역시 마을에서 좀 떨어진곳에 있는 밭에 나갔다. 그런데 내가 한창 일을 하고있는데 밭머리에서 키가 후리후리한 농민복차림의 한 청년이 불쑥 나타나 나에게로 가까이왔다. 나는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마치 오랜 구면친구나 만난듯 정다운 얼굴에 벙글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담배나 한대 붙일가. 더운데 좀 쉬여서 하는게 어떤가?》하고 나에게 말을 걸며 밭머리의 돌우에 걸터앉았다.
청년은 어딘지모르게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그러한 사람이였다. 그래 나는 땀도 들일겸 하여 인차 밭머리로 나갔다.
청년은 내가 몇살 났으며 부모들은 무엇을 하는가 하는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부락내의 형편을 물어보는것이였다.
그리고나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조선사람들이 왜 제나라에서 살지못하고 여기까지 쫓겨와서도 헐벗고 배를 곯으며 이 고생을 해야 되는지 아오? 그게 다 왜놈들때문이요. 우리는 왜놈들을 내쫓아야 하오. 그리고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이 잘 살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단말이요.》
이렇게 말하는 청년의 두눈은 유난히 빛나는것이였다. 일제놈들과 지주들을 미워한 나는 그의 말에 점점 끌려들어가 시간이 가는줄 몰랐다.
그때 청년은 알기쉬운 말로 지금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우리 나라를 착취가 없고 모든 사람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로동자, 농민이 나라를 다스리며 누구나 일을 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잘사는 나라로 만들기 위해 일제놈들과 싸우고있다는것을 말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나는 그가 보통 농촌에 있는 청년과는 다르다는것을 느끼였다. 그래서 그에게 어디서 왔는가를 캐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빙그레 웃음을 띠운채 나를 똑바로 보며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끄시는 조선인민혁명군에서 왔소.》하는것이였다. 나는 그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때 장백일대에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령도하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용감한 투쟁에 대한 소문이 쫙 퍼진 때였다. 사람들은 서로 만나기만 하면 일제놈들을 감쪽같이 소탕해치우는 유격대의 이야기를 신이 나서 하며 그들이 하루속히 장백현지방으로 나오기를 고대하였던것이다.
유격대에 대한 이야기를 나는 벌써 여러번 들은바가 있는터라 기쁨에 울렁거리는 가슴으로 그에게 바싹 다가붙어 알고싶은 여러가지 이야기를 더 물어보았다.
그리고 나는 이날밤 12시경에 그와 이미 약속한 지점에서 다시만나 그를 아버지가 계시는 농막으로 안내했다. 그 청년은 유격대에서 파견한 정치공작원이였는데 조국광복회 조직망을 조직하기 위해 이곳으로 나왔던것이다.
나는 그날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정치공작원의 말이 가슴속에 뜨거운 불씨를 안겨주었기때문이였다.
그후 나는 이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독산이라는곳에서 그와 여러번 만나게 되였고 그해(1936년) 가을 유격대가 장백으로 나오자 곧 입대하게 되였던것이다.
유격대에 들어간후에 나는 우리가 무엇때문에 혁명을 하며 또 반드시 혁명을 해야 하는가를 더욱 똑똑히 깨닫게 되였으며 혁명가란 어떠한 품성을 가져야 하는가를 알게 되였다.
나는 당시 위대한 수령님께서 친솔하신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에서 복무하게 되였으므로 이런 문제에 대하여 직접 그이에게서 여러번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어느때엔가 한번은 하루종일 행군을 한후 숙영지에 도착하였을 때다. 며칠째 끼니도 변변히 잇지 못한 대원들은 이날도 눈이 허리를 치는 험한 산을 몇개나 넘었는지 몰랐다. 허나 모두들 숙영지에 도착하자 우등불을 피운다, 눈을 녹인 물을 끓인다 하며 서둘고있었다. 그렇게 곤난한 조건에서도 대원들의 높은 사기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이것을 보시고 매우 만족해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날저녁 우등불가에 있는 우리들과 자리를 같이 하시고 혁명가들이란 곤난을 극복할줄 알아야 하며 언제 어떤 어려운 처지에 놓이더라도 혁명적절개를 굽히지 말고 투쟁해야 합니다라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혁명이란 결코 쉬운것이 아닙니다. 더우기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무장한 흉악무도한 일제침략군을 반대하여싸우는 우리에게는 앞으로도 곤난이 많을것입니다. 그러나 그 곤난은 모두다 극복할수 있는것들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사상적으로 어떻게 준비되였고 어떻게 싸우는가에 달려있습니다.
때문에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깊은 산중에 있거나 먼바다속의 섬에 있거나를 막론하고 언제어디서나 혁명사업을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마디한마디에 깊은 뜻이 담겨진 그이의 말씀은 우리들의 가슴속에 새로운 결의를 굳게 간직하게 했다.
이렇게 우리는 그이에게서 직접 말씀하시는것을 듣는외에도 《위대한 사회주의10월혁명의 의의》, 《제국주의란 무엇인가?》,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새것은 승리하고 낡은것은 멸망한다》등 여러가지 제목으로 정치토론회를 활발히 진행하는 과정을 통하여 조국이 반드시 광복될 날이 온다는것을 더욱 굳게 믿게 되였다. 매일과 같이 전투가 계속되고 행군이 계속되는 어려운 조건에서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혁명의 매 시기와 계단마다에 창조적으로 빛나게 적용하는 전략전술을 수립하시여 우리를 승리에로 인도하시였다.
뿐만아니라 그이께서는 대원들에게 인민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그들의 힘에 의거해 사업하는 바로 거기에 혁명가로서의 고상한 품성의 특징이 있다는것을 가르치시면서 우리들이 인민을 사랑하고 존경할줄 알아야 하며 원쑤를 미워할줄 알아야 한다고 교양하시였다.
이런 말씀을 하실 때면 그이께서는 의례히 고기는 물을 더나서 살수 없는것과 같이 유격대는 인민을 떠나서는 살수없다는것을 이야기하시고는 우리들에게 항상 인민대중을 믿고 그들의 힘에 의거하여 사업할줄 알아야 하며 대중을 교양하고 대중에게서 배우는것, 이것이 바로 혁명가들이 일하는 방법의 첫째가는 특성이라는것을 간곡히 가르치시였다.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의 바로 이 사상으로 살고 이 사상으로 싸웠기에 인민들의 그렇듯 지극한 지지와 성원을 받을수 있었던것이다.
그리고 그이께서 말씀하신것처럼 강의한 투지로 난관에 부닥치면 부닥칠수록 오히려 더 분발하여 싸워야만 곤난을 반드시 극복할수 있다는것을 생활을 통하여 체험했던것이다.
지금도 나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소부대공작을 하던 1943년 여름이다. 당시 나는 훈춘현 두황자와 왕청현 허스포부근에서 소부대활동을 하다가 적들에게 발견되였다.
나는 불의에 사격을 받았으나 놈들을 즉석에서 여러놈 쏴넘겼다.
허나 그때 불행히도 왼팔에 다섯군데와 오른팔에 한군데를 부상당한데다가 왼발목에 골절상까지 입었다.
나는 동지들하고도 멀리 떨어졌으므로 부득불 산중에 혼자남게 되였다. 출혈이 심한데다가 한쪽 발목뼈까지 상한 나는 풀섶에 털썩 쓰러진 다음에는 아예 온몸을 꼼짝하지 못했다.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 입에는 아무것도 대보지 못했다. 그렇게 되자 정신이 더욱 아찔해지며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귀전에서는 그냥 윙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에서 적들이 있는곳은 멀지 않았다. 그러므로 만약 놈들이 내가 있는곳을 아는 날이면 큰일이였다.
이런것을 생각한 나는 놈들에게 붙잡히기보다는 차라리 제손으로 제목숨을 끊는것이 나으리라고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순간 나의 머리에는 문득 언젠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공산주의자는 어떤 깊은 산중이거나 바다속의 섬에 있어도 혁명을 위하여 실망을 모르고 살아나가야 하며 싸워나가야 합니다라고 하시던 말씀이 번개같이 스치였다.
(그렇다. 살아야 한다. 혁명을 위해서는 살아서 싸워야 한다. 이만한 곤난을 이기지 못하다니…)
이렇게 결심한 나는 온몸의 힘을 모아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배밀이로 기여다니며 생풀을 뜯어먹었다.
(동무들이 꼭 올것이다. 그들이 찾아올 때까지 두달이고 석달이고 아니 1년도 좋고 2년도 좋다. 기다리자.)
이리하여 나는 그 산중에서 혼자 27일간이나 낟알이라고는 한알도 구경못한채 풀과 나무껍질로 살아나가다가 마침내 임철동지를 비롯한 15명의 소조원들을 만나 다시 본부대로 갈수 있었던것이다.
물론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이러한 일을 겪은것은 결코 나만이 아닌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백절불굴의 투지로 그러한 곤난을 물리치며 살아나갔고 싸워나갔다.
이 불굴의 투지가 어디서 나왔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혁명이 반드시 승리하고 조국이 광복된다는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의 위대한 혁명사상을 확고히 믿었기때문인 것이다.
6. 오중흡동지를 회상하여
오백룡
나는 유격대에 입대하기 이전에 남양촌(왕청현 춘화향)에서 오중흡동지를 한두번 만나본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는 소속이 다르긴 했으나 같은 소년선봉대원으로 통신련락이며 삐라살포공작에 함께 참가하고있었다. 당시 오중흡동지는 유격대를 원호하는 사업에서 모범을 보이고있었다. 워낙 가난한 살림에서 돈을 장만할수 없었던 그는 동생과 같이 산에 올라가서 온종일 나무를 하군 했다. 그리고 다음날 남의 집에 가서 반작으로 소달구지를 빌려다가 나무를 싣고 도문거리에 나가서 팔았으며 그 돈으로 유격대에 필요한 물품을 사다가 보내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가 어려서부터 이처럼 열렬하게 혁명사업을 도와나서게 된데는 그의 부친과 사촌형들에게서 받은 영향이 아주 컸다.
그의 부친(오창락)은 일제와 지주의 등쌀에 못이겨 고향을 떠나 중국동북 왕청에 이주해와서도 나이 30살이 되도록 삯김이나 매주면서 남의 웃방살이를 하였다. 그래서 오중흡동지는 간신히 학교에 입학은 했으나 갈아입을 옷조차 없어서 빨래할 때면 종일 이불속에 박혀있어야 했고 월사금을 낼수 없어서 며칠씩 학교에 가지 못하는 때도 많았다. 이렇듯 구차한 처지에서 겨우 소학교를 졸업하고난 그는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지주 양가놈이 어찌나 고약하게 구는지 한번은 작대기를 들고 대들었다가 당장 밭을 떼웠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꾸짖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못사는것은 팔자탓이 아니라 왜놈이나 그의 등을 믿고 농민들의 피를 빨아먹는 지주놈들탓이라고 하면서 차라리 맞아죽거나 굶어죽을망정 놈들에게 굽신거리는 개는 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쳐주었다. 그럭저럭 사람을 내세워서야 산전습지 한뙈기를 겨우 얻어내였다.
이러한무렵 이 고장인 석현(남양촌과 이웃하고있었다.)일대에서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령도밑에 일제를 반대하는 항일혁명투쟁이 료원의 불길처럼 일어나고있었다.
석현에서는 주로 그의 4촌들인 오중화, 오중옥, 오중성동지들이 혁명운동을 지도하고있었다. 그의 일가에는 이외에도 오석영, 오중보, 오중선, 오중협, 오중룡 등 여러 동지들이 모두 직접 유격대에 참가하였거나 지방공작에 헌신하다가 영용하게 희생되였다.
오중흡동지는 나날이 고조되여가는 혁명의 불길속에서 자기 일가친척들로부터 많은 혁명적영향을 받아 더욱 계급적으로 각성되여 일찍부터 원쑤일제를 격멸소탕하고 반드시 조국을 광복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지게 되였다.
그는 당시 나이가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에 못지 않게 대담하였다. 한번은 소팔평 일제수비대졸병놈을 까눕히고 무기를 탈취하여 유격대에 보냈다. 그리하여 그는 이 사건의 혐의자로 놈들에게 체포된 일이 있었다. 일제교형리들의 모진 고문과 위협, 회유에도 그는 종시 굴하지 않고 그저 한마디로 모른다고 버티였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고 몇번씩 실신하였다가 다시 깨여나면서도 그는 계속 완강히 부인하였다. 놈들은 더욱 발악적으로 증거를 찾으려고 갖은 애를 썼으나 단서를 찾지 못하자 오중흡동지를 남몰래 총살해버릴 흉계를 꾸미였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동지들은 군중들앞에서 일제의 흉계를 폭로하면서 석방운동을 전개하였다. 련일 수백명의 서명으로 된 진정서, 항의문이 일제당국에 꼬리를 물고 들어갔다. 이러한 대중의 분격에 찬 목소리에 당황망조한 놈들은 할수없이 오중흡동지를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후 석현지구 인민들의 투쟁이 더욱 고조되여가자 이에 놀란 일제 룡정총령사관에서는 이 지구에서 지도적위치에서 사업하는 오중화일가를 멸족시킴으로써 대중의 기세를 꺾어보려고 계획하고있었다.
이러한 적들의 흉계를 알게 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일가를 시급히 유격근거지로 이주시킬것을 지시하시였다. 그리하여 이 지시를 전달받은 오중화일가는 1933년 5월초순 야밤에 근거지를 향하여 떠났다.
그들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념려하여 파견하여주신 유격대원들에 의하여 무사히 유격근거지로 들어올수 있었다. 오중흡동지는 유격근거지로 들어오자 곧 유격대에 입대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나와 같은 중대에 배속되였다.
그는 유격근거지에 들어와 처음으로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뵈왔다. 그때 그는 그이의 슬하에서 평생을 몸바쳐 싸우리라고 굳게 다짐하였다. 특히 그는 유격대생활에서와 그리고 전투를 통하여 그이의 위인적풍모와 지략에 더욱 경모의 정이 두터워갔고 이로부터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그이를 모시고 그이를 따라배우기로 결심하였다.
그후 그는 위대한 수령님의 보살핌과 가르치심을 받아 더욱 자질을 높이고 전투에서 단련되였으며 드디여는 공산당에도 입당하였다. 그가 입당할 때 당과 혁명을 위하여 물불을 헤아리지 않으며 조국과 인민의 리익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쳐서 싸우겠다고 엄숙히 맹세하던 그 모습이 지금도 내눈앞에 선히 떠오른다.
실지 그는 자기의 맹세를 영예롭게 지켜내였다.
오중흡동지는 그후 오래지 않아 중대청년간사의 책임을 졌다. 그는 정치적식견이 높았을뿐만아니라 원칙성이 강하고 자각적인 열성이 비상했으며 군중정치사업에도 능하였다.
평소에는 얌전해보이는 그였지만 한번 군중앞에 나서기만 하면 사람이 판이하게 달라지였다. 그는 군중들과 우스개소리도 잘했고 노래도 썩 잘 불렀으며 군중들의 감정에 맞게 곧잘 어울렸다. 이러한 가운데 그는 군중들의 사기를 고무해주며 단합된 힘으로 그들을 묶어세우는 장끼를 가지고있었다.
우리 중대가 독립련대에 편입되여 안도방면으로 진출하고있을 때 그는 역시 중대청년간사사업을 하고있었다.
그는 우리의 안도진출이 위대한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유격구역확대와 통일전선정책과 밀접히 결부되여있다는것을 똑똑히 인식하고있었기때문에 무엇보다 부대안의 사상의지적통일과 광범한 인민들의 결속, 조중인민의 단결 등에 특히 류의하였다.
그는 이런 말을 자주 하였다.
… 우리는 어디를 가나 사령관동지로부터 직접 교양을 받은 사람들이라는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이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모범을 보여주신것을 우리스스로가 실지행동으로써 따라배워야 한다. 우선 전투에서나 일상생활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일에 우리가 앞장서자. 그리고 항상 겸손하고 즐거운 일에 동무들을 먼저 내세우자.…
안도지방의 반일부대들과 접촉하는데 있어서도 그는 언제나 선두에서 훌륭하게 사업하였다.
또한 우리가 대전자를 점령하고 몇개월간 그곳에 주둔하고있을 때 그는 거리의 청년들과 누구보다도 빨리 친숙해졌다. 당시까지만 해도 아직 혁명적영향을 덜받았던 이곳 청년들은 짬만 있으면 오중흡동지를 찾아와서 그의 이야기를 듣거나 혁명가요를 배우는것을 아주 좋아하였다. 그는 청년들에게 먼저 위대한 수령님께서 직접 작사작곡하시였으며 또 배워주시기까지 했던 《반일전가》를 가르쳐주었으며 그 과정에 반일사상을 고취하고 조중인민들의 단결의 필요성을 알기쉽게 해설해주군 하였다. 그리고 특히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가적풍모와 숭고한 덕성에 대하여 그는 그들에게 이야기하여 주군하였다.
얼마안있어 그곳 청년들은 계급적으로 각성되여 우리가 그곳을 떠날 때는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 유격대입대를 요구해나섰다.
오중흡동지는 전투에서 언제나 용감하였으며 유능한 군사지휘관이였다.
한번은 그가 일부 부대를 거느리고 화룡현에 있는 한 금광을 습격한적이 있었다. 이 전투에 나는 직접 참가하지는 못하였으나 후에 들은바에 의하면 그때 광산경찰대놈들의 발악적저항으로 정황은 아주 불리하였다고 한다.
그 싸움을 지휘할 때 적탄이 오중흡동지의 이마에 와맞았다. 그런데 좀 빗맞은탓인지 그는 살아났다. 오중흡동지가 이마에 적탄을 맞고도 전투를 계속 지휘하고있을 때에 놈들이 던지는 수류탄이 곳곳에서 터졌다. 그는 이런 정황에서도 아주 태연자약했다. 그는 작렬하는 수류탄의 화광을 주의깊게 주시하고있었다.
그때 성벽안에서 무엇이 희뜩하더니 수류탄 하나가 대원들의 발밑에 떨어졌다. 그곳에서는 《지직지직》하고 심지타는 소리가 났다. 오중흡동지는 누가 말릴새도 없이 성큼 뛰여나가 그 수류탄을 움켜잡았다. 동무들은 순간 깜짝놀라 저도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작렬직전의 수류탄이 아닌가! 그는 재빨리 수류탄을 들여다보더니 쓰겁게 픽 웃으며 도로 놈들의 담안으로 힘껏 던지였다. 이윽고 성벽안에서는 폭발소리가 일고 놈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 동작이 눈깜짝할 사이여서 다른 동무들은 그저 그의 대담성에 어안이 벙벙하여있을뿐이였다.
그때 오중흡동지는 대원들에게 돌격명령을 내렸다.
오중흡동지의 이러한 용감한 행동은 수없이 많다.
화룡현 맹산촌집단부락을 습격할 때 있은 일이다.
그때 대원들이 토성을 미처 넘기전에 적에게 발각되였다. 놈들의 불질에 우리의 한 동무가 토성밑에 쓰러졌다. 그를 구출해야겠으나 놈들이 포대안에서 비발치듯 기관총을 쏘아대는 바람에 도저히 접근할수가 없었다. 그러자 불리한 정황을 타산한 지휘부에서는 일시 후퇴신호를 내렸다. 그러나 오중흡동지는 쓰러진 동지를 버리고 그 자리에서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우박치는 탄우속을 맹호처럼 뚫고뛰여들어가 끝끝내 동지를 업어내오고야 말았다. 그의 이와 같이 숭고한 동지적우애는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오중흡동지에 대하여 생각할 때 나는 무엇보다도 그가 위대한 수령님을 무한히 신뢰하고 그이를 목숨으로 보위하며 그이의 명령이라면 물불을 헤아리지 않고 용감하게 싸운 투사라는 점에 대하여 우선 말하지 않을수 없다.
참으로 15성상에 걸치는 우리의 항일무장투쟁행정에는 얼마나 간고하고 어려운 고비가 많았던가. 일제군경들과의 수천수만의 가렬한 전투들, 대내에 잠입한 적들과의 투쟁, 무서운 추위와 험산준령들, 식량난과 병마, 이 모든것을 한해도 아닌 10여년간을 하루같이 극복하면서 오직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싸울수 있은 여기에는 바로 위대한 수령님의 탁월한 령도와 정확하고도 령활한 전략과 전술에 의해서만 비로소 가능하였다. 우리의 항일무장투쟁행로의 가장 어렵고 힘겨운 고비마다 그리고 승리의 고비마다에서 위대한 수령님의 령도와 그를 받들고나가는 그 선두에는 오중흡동지와 같은 믿음직한 지휘관들이 서있었다.
그러나 나는 제한된 지면에서 그가 걸어온 이 모든것을 다 이야기할수는 없다. 다만 한두가지 례를 드는것으로 혁명가로서의 그의 면모의 일부분이나마 적어보려고 한다.
1939년 여름 우리가 올기강상류에서 군정학습을 진행하고있던 어느날이였다. 강기슭에서 오중흡동지와 만난 나는 그때 무심결에 사령관동지께서 식사를 하시면서 문뜩 8월 한가위가 가까와온다고 말씀하시였다는 말을 그에게 하였다. 그랬더니 그는 심중하게 그이께서 그때 한가위에 대해 더 다른 말씀이 없으셨는가고 나에게 다시 묻는것이였다. 나는 그밖에 딴말씀은 없었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올해 따라 사령관동지께서 8월 한가위를 미리부터 예견하시는데는 특별히 생각하시는바가 있다고보오. 사실 금년에는 신입대원들도 적지 않게 대오에 받아들이지 않았소. 그이께서는 모름지기 그들이 한가위날을 맞으면 의례히 자기 고향에서 해마다 즐겁게 한가위를 쇠던 그날을 그립게 생각할것이라고 벌써부터 념두에 두고계시는거요. 지휘관들인 우리는 그이의 이 깊은 의도를 절대로 소홀히 할수 없소. 내가 이 과업을 담당수행하겠소. 그래서 이번 한가위를 사령관동지께서 뜻하신대로 전사들의 사기를 한층 고무해주고 그들을 더욱 단결시키는 좋은 기회로 되도록 해야겠소.》
마침내 그는 사령관동지의 지시를 받고 다음날밤 일부 부대를 거느리고 출발하였다.
당시 우리의 주위에는 일제《토벌대》놈들이 욱실거렸고 식량공작도 집단부락이 된 조건하에서 여간 어려운것이 아니였다. 그러나 오중흡동지는 이틀만에 돌아올것을 약속하고 떠났던것이다. 그런데 목적하고 갔던 목재소는 텅비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고보니 식량이 떨어져서 모두들 온 하루를 꼬빡 굶었다. 오중흡동지는 다른 목재소를 치기로 결심하였다. 그곳까지는 이틀을 더 걸어야 했다. 그들은 결국 사흘이나 굶으면서 행군하였다.
끝끝내 그들은 목적했던 목재소를 습격하고 경찰대놈들을 소탕했으며 많은 식량과 물자들을 해결하였다.
드디여 한가위날이 왔다.
우리 부대의 전체 성원들은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한자리에 모였다. 다채로운 음식이 차려진 이날 우리는 어느때보다 마음껏 한가위를 즐길수 있었다. 오락회가 벌어지자 모두가 춤을 추며 흥겹게 노래를 불렀다. 그때 나는 이 광경을 한쪽모퉁이에 서서 흐뭇하게 바라보고있는 오중흡동지를 발견하였다.
1938년 겨울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그때 몽강현 남패자에서부터 출발하여 장백현 북대정자에 이르는 100여일의 행군은 세상에 《고난의 행군》으로 알려져있지만 실로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어렵고도 간고한 시련의 나날이였다. 모진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혹한속에서 허리를 치는 생눈길을 뚫으며 수천리길을 걸어나온다는것만도 어려운 일이였는데 거기에 식량까지 떨어져 며칠씩 굶는것은 보통일로 되였고 더우기 발악적으로 달려드는 적들과 하루에도 10여차례씩 싸워야 하였다.
우리는 이 곤난을 극복해야 했고 진드기처럼 달라붙는 적들을 쳐부셔야만 했다.
이는 바로 우리의 강의성과 투지를 검열하는 일대 시련의 시기이기도 하였다. 누구라 할것없이 이를 악물고 이 시련을 이겨낼 굳은 결의를 가슴깊이 다지고 적의 포위를 뚫고 전진하였다.
이때 오중흡동지는 앞뒤의 적을 물리치면서 사령부를 보위할 무겁고도 어려운 과업을 맡고나섰다.
그는 허리까지 치는 생눈길을 뚫어 부대의 길을 개척하는가 하면 뒤에서 추격해오는 적들을 솜씨있게 격퇴하는 주밀하고도 과감한 전투의 앞장에 섰다.
그에게는 오직 한마음 어떻게 하면 사령부를 더 안전하게 보위할수 있을것인가에 대한 생각뿐이였다.
그는 사령부의 안전을 위함이 곧 조선혁명의 승리를 보장하는 길이라는것을 자각하고있었기때문에 이것이야말로 자기앞에 지워진 첫째가는 임무라고 간주하였다. 그는 불의에 적이 나타날 때나 조우하게 될 때면 언제나 우선 위대한 수령님께서 계시는 사령부의 안전부터 걱정하였으며 사령부에 위험이 조성되였을 때는 자기 한몸도 서슴없이 내대는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적의 추격을 받을 때면 오중흡동지는 언제나 사령부와 기본부대를 먼저 떠나보내고 그들의 발자국을 메운 다음에 자기는 일부 부대를 데리고 적들이 추격해오기를 기다려서 기본부대의 행동방향과는 딴방향으로 놈들을 유인해다가 엉뚱한 곳에 몰아넣고 족치는 일을 곧잘 하였다.
그러나 놈들은 그럴수록 더 기를쓰고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우리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한달가까이 행군해서 장백현 7도구치기에 와닿았을 때의 일이였다. 적들은 자기 력량을 증강해서 1만여명의 병력으로 주위의 산골짜기와 부락과 밀림속을 누렇게 뒤덮고는 어디서 총소리만 나면 사방에서 덤벼들 태세를 갖추고있었다.
이러한 정황에 대처하여 사령관동지께서는 긴급회의를 소집하시였다.
회의에서는 부대가 3개방향으로 갈라져 행동함으로써 적의 력량을 분산시키며 나아가서 놈들이 우리 사령부를 노리고있는 기도를 완전히 파탄시킬 전술적대책을 토의하였다. 이때에도 오중흡동지는 가장 어렵고 중요한 전투임무를 자진하여 담당하였다. 그는 7련대를 인솔하여 놈들을 뒤에 달고 상강구방향으로 가게 되였다.
아직 새별이 반짝이고있는 이른새벽에 사령부와 8련대가 먼저 7도구 산등성이로 오르게 되였다.
서로 갈라지기 직전에 오중흡동지는 나를 찾아왔다.
우리는 말없이 손을 굳게 잡고 흔들었다.
《수고를 하겠소.》
내가 이렇게 그와 작별인사를 하자 그는 손에 더욱 힘을 주면서 《사령부를 부탁하오.》하고 말하는것이였다.
자기의 한몸보다도 또 과업의 어려움보다도 오히려 위대한 수령님께서 계시는 사령부의 안전을 더 생각하며 나에게 신신당부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볼 때 나의 눈시울은 뜨거워왔다. 사령관동지에 대한 그의 다함없는 존경과 충실성, 적앞에서 두려움을 모르는 그 불굴의 투지에 대하여 나는 고개를 숙이였다.
우리가 7도구쪽 고지에 올라서 발자국을 메우고있을 때 오중흡동지도 우등불을 꺼서 파묻어버리고 부대에 출발명령을 내리고있는것이 내려다보였다.
그때 후방초소에서 갑자기 총성이 들려왔다. 적《토벌대》놈들이 벌써 달려들기 시작한것이였다. 이윽고 바로 몇분전에 우리가 있던 골짜기로 1,000여명이나 되는 적의 대부대가 몰려들고있었다.
그러자 어느새 맞은편 고지우에 올라선 오중흡7련대에서 류창한 나팔소리가 울리였다. 반격에로 호소하는 우렁찬 나팔소리는 골짜기와 산줄기를 타고 힘있게 울렸으며 여기저기서 메아리쳐 더욱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적이 이 나팔소리에 깜짝 놀라 미처 정신도 가다듬기전에 한방의 싸창소리가 대기를 찢고 뒤이어 경기, 보총들의 노호하는 불벼락이 산을 뒤엎을듯 터졌다. 적들이 무리로 쓰러지는 비명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놈들은 당황한 속에서도 인차 맞불질을 하면서 산발을 타고 기여오르기 시작하였다.
《7련대는 정면돌격!》
《8련대는 좌우로 우회하여 퇴로를 차단하라!》
사령부로 가장한 오중흡동지의 이런 구령이 쟁쟁하게 대기를 가르면서 들려왔고 나팔소리는 더욱 세차게 울려나왔다.
…
그뒤 나는 오중흡7련대가 얼마나 힘겨운 악전고투를 거듭하면서 놈들을 끌고 20도구방향으로 갔는가를 들을수 있었다.
그것은 한걸음한걸음마다가 피로 아로새기는 간고하고도 눈물겨운 싸움의 련속이였다. 이름난 장백의 깊은 눈길을 헤치고 굶주림과 혹한을 뿌리치면서 악착한 적들과의 싸움을 또한 한시한초나마 멈출수 없는 가장 긴장되고 어려운 나날이였다. 놈들은 여러대의 비행기까지 날려서 밀림우를 핥아가듯 하며 정찰을 하다가는 조금만 이상한 기미를 감촉하면 기총사격을 퍼붓고 폭탄을 투하했으며 그뒤를 이어 인차 적《토벌대》가 군견을 앞세우고 달려드는것이였다.
그럴수록 오중흡동지는 자기가 인솔하는 부대를 더욱더 사령부인것처럼 가장하면서 적들을 지형조건이 유리한데 끌어다놓고는 무서운 불벼락을 안겨주군 하였다. 그래도 또 달려들면 일정한 지점에서 다시 만날것을 약속하고 일부 부대를 떼여 계속 행군시키는 한편 자기는 또다시 적을 엉뚱한 방향으로 유인해다가 함정속에 몰아넣고 소탕해버리군 하였다.
이런 정황속에서도 그에게서는 동요나 우울이란 추호도 찾아볼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여느때와 다름없이 침착하고 명랑하였다.
불시에 적들이 달려들어도 그는 민첩하게 부대를 지휘하면서 어느때나 이렇게 주의를 주는것을 잊지 않았다.
《소지품을 잊지 마시오. 어떤 흔적이라도 남겨놓으면 적들의 손에 들어가오.》
그는 또한 이렇게 매사에 세심하였다. 혹 밤에 숙영하게 되여 대원들이 고깔불을 피우고 둘러앉아 휴식할 때이면 그는 의례히 대원들속에 파묻혀 그들과 함께 어울렸다. 그리고 지어는 대원들의 신발을 말려준다, 피로한 동무의 어깨를 두드려준다 하며 그들을 보살폈고 또 지극히 사랑했다.
그리고 그는 이 과정에서도 언제나 대원들의 교양을 잊지 않았다.
《우리가 지금 10년을 하루같이 고생들을 하지만 그러나 고생끝에는 언제나 락이 따르는 법이다. 이제 우리들이 일제를 격멸소탕하고 광복된 조국땅을 향하여 행군할 때를 생각해보라. 조선사람으로 태여나 이이상 더 보람차고 영광스러운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오늘의 이 간고한 행군이 광복된 조국으로 잇닿은 걸음이라는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 말씀은 김일성장군님의 말씀이다. 모두다 사령부를 위하여 앞으로 나아가자.》
그는 이렇게 대원들을 승리의 신심으로 교양하였다.
그렇기때문에 대원들은 그 엄동설한에서 비록 옷이 해지고 굶으며 신발이 없어 각반을 발에 동여매고 걸었지만 누구하나 힘들다고 하지 않았으며 수십수백번의 적과의 전투에서 고되다고 하는 사람이 없이 그의 뒤를 따라 앞으로앞으로 전진하였다.
이듬해 봄 우리는 북대정자에서 감격적인 상봉의 기쁨을 나누었다. 나는 다시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끄시는 길을 따라 조국진군의 길에 올랐으며 국경을 넘어 사랑하는 조국땅에서 연분홍 진달래꽃향기와 훈훈한 대지의 흙냄새를 맡았으며 또한 삼지연 맑은 물을 떠마시였다.
그때 나는 이러한 심회를 주고받았다.
… 우리가 걸어온 모진 간난신고의 《고난의 행군》도 사랑하는 조국의 대지우에서 한없이 안겨오는 환희와 감격의 격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 땅의 주인이며 이 물을 젖줄기처럼 퍼먹으며 자란 조선의 아들들이다. 일제놈들이 제아무리 발악을 하며 우리 형제자매들을 도륙하고 우리를 없애보려고 발악해도 결코 우리는 이 땅과 떨어지지 않을것이며 영원히 그와 같이 있을것이다.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가리키시는 그 길에서 반드시 놈들의 숨통을 찌르고 이 땅에서 일제놈들을 영원히 내몰것이다. 그리고 그이의 뜻을 받들고 그이의 가르치심따라 휘황한 조국을 건설할것이다.…
잠시후 오중흡동지는 선두에서 부대를 인솔하고 대낮에 갑산에서 무산으로 통하는 《갑무경비도로》를 당당히 걸어나갔다. 그 행진은 마치 개선행진과도 같이 씩씩하고도 기운찼다.
그러나 오중흡동지에게 있어서 그것이 조국에 대한 마지막작별이였다는것을 누가 알았으랴!
1939년 12월 17일 오중흡동지는 돈화현 륙과송전투에서 원쑤들의 흉탄에 그만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그 비보에 접하자 우리모두는 얼굴을 들지 못하고 흐느껴울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가슴아픈 소식이였기때문이였다.
그러나 우리는 곧 슬픔을 거두었다.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께 끝없이 충직하였으며 일생을 오직 혁명의 리익을 위해 싸운 오중흡동지를 빼앗아간 일제흡혈귀놈들에 대한 불타는 증오와 복수의 맹세를 다지고 또 다지였다. 그리고 오중흡동지처럼 위대한 수령님과 혁명에 무한히 충직할것이며 그와 같이 용감할것을 마음속에 깊이 새겨넣었었다.…
벌써 그가 전사한지도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오중흡동지의 영웅적생애를 돌이켜볼 때마다 항일혁명의 나날 조선혁명의 사령부를 목숨으로 보위한 그의 고귀한 혁명정신과 투쟁업적은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간직되여있다.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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