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로동자들속에서
박성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지난날 유격대를 조직하던 초기에 있어서나 그후 유격대를 확대강화함에 있어서 항상 로동계급을 선차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것을 가르쳐주시였고 로동계급성분을 장성시키기 위하여 각지에 있는 광산과 목재소 등에 비밀지하단체들을 광범히 조직하고 로동계급을 정치사상적으로 교양함에 깊은 관심을 돌리시였다.
1930년대초에 공청원이였던 내가 나의 상부 공청조직원이였던 허학림동무와 련계를 맺고 연길현 8도구 금광으로 가게 된것도 바로 이와 같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것이였다.
8도구 금광로동자로 취직한 나는 처음에 질통을 졌다. 아직 나이도 어리고 로동에 익숙하지 못한 내가 좁고 깊은 굴속에서 하루 12시간씩이나 계속 흙과 돌을 져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혁명임무를 수행함에 필요한것이였으므로 나는 이를 악물고 견디여냈으며 조직에서 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서는 보다 더한 곤난이라도 능히 극복해내야 한다는 결의를 더욱 굳게 다졌다. 그러면서 8도구 금광지구내의 실정과 로동자들의 형편을 파악하기에 노력하였다.
당시 이곳에는 개인자본으로 경영하는 금광도 있고 《관방》이라고 불리는 국가경영의 금광도 있었다. 그중 《관방》은 두개뿐이였고 기타는 전부 개인기업이였다.
어느 광주를 물론하고 모두다 악착한 착취자들이며 일확천금에 눈이 뒤집혀날뛰는 투기업자들인데다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여 헤매는 로동자들이 많은 때였으므로 임금은 극도로 줄어들고 로동조건은 나날이 가혹해갔다.
경영주들은 최저임금조차도 제대로 지불하지 않고 일을 시키려는 악착한 착취방법까지 꾸며냈다. 《모작금점》이라는 구실하에 일한것을 장부에 치부해두었다가 금맥이 발견되면 마지못해 임금을 지불하고 금맥이 나타나지 않으면 임금을 주지 않는것이 상례였다.
게다가 로동조건은 나쁘고 또한 위험하였다. 악착한 착취자들과 투기업자들은 사람이야 어찌되든 금이나 캐고보자는것이였다.
좁고 캄캄한 머리우의 돌짬에서는 물이 쏟아져내리고 굴바닥은 논판처럼 물이 고이고 발이 빠졌다. 이런속에서 로동자들은 물과 흙을 퍼냈으며 통기구멍이 없는 외통굴속에서 남포를 터뜨리기때문에 연기가 뽑히지 않아서 숨이 막혀 졸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매일 12시간이상씩 혹사를 당하면서 먹을것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로동자들은 굿병(일제때 광산유해로동자들에게서 발생하는 빈혈증과 호흡기질환)이 생기군 하였다.
또한 금맥이 발견되기전에는 대개 동발을 받치지 않았으므로 락반이 지거나 굴이 무너져서 수많은 희생자들이 빈번히 나군 했다.
때문에 그때 로동자들은 굴속으로 일하러 들어가는것을 《사지구뎅이》로 간다고 했으며 새벽에 일어나 죽을 마실 때는 《사자밥》을 먹는다고까지 했다.
로동자들이 사고로 인하여 병신이 되여도 퇴직금 한푼 못받고 직장에서 쫓겨났으며 사고로 인하여 죽어도 그 유가족들은 어디다 송사할곳조차 없었다.
이러한 형편은 로동자들로 하여금 착취자들에 대한 반발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유리하였고 우리들이 그들속으로 깊이 침투돼야 하겠다는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하였다.
나는 질통을 지는 일에도 아직 익숙치 못하였으나 직접부문 로동자들이 많은 막장일을 하기로 하였다. 힘도 더 들고 위험도 더 심하였다. 그러나 광산로동에서 가장 오래 시달렸고 자기 처지에서 해방될것을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끼고있는 그들과 직접 로동을 통하여 친숙해지면서 그들을 조직에 묶어세우기 위한 사업을 차차 본격적으로 진행하자는것이였다.
동시에 허학림동무가 알려주던대로 상급조직과 련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지정된 련락장소는 광산갱들이 있는 뒤산등 동발막이였다.(이 동발막은 개인광주들에게 동발나무를 파는 목재상인의 집이였다.) 그 동발막 산등을 넘어서면 북으로는 유격근거지인 부암동, 장재촌이 있고 동남으로는 석인구가 있었다. 동발나무는 바로 유격근거지인 부암동, 장재촌 등지에서 베여오는것이였고 조직원은 바로 이 동발막을 련락장소로 삼으면서 유격근거지내의 조직과 련계를 취하고있었다.
나는 허학림동무에게서 암호를 받아가지고 동발막을 찾아갔다. 그리고 거기서 동발파는 사람과 암호를 통하여 리천걸이라는 동무를 만나게 되였다. 그후부터 나는 리천걸동무와 련계를 맺게 되였는데 그에게서 처음 받은 지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것이였다.
…현계단에 있어서 로동자들과의 사업이 매우 중요하다. 진실한 로동청년들을 유격대나 적위대에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그들의 성분과 환경을 깊이 료해하고 조직에 흡수하여 교양을 주며 비밀을 엄수하도록 해야 하겠다. 적들도 이곳에 우리 조직체들이 있는것을 알아차리고 자기들의 주구를 박아넣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건달군을 조직에 받지 말며 고착된 진실한 로동자들을 조직에 흡수해야 하겠다.…
나는 리천걸동무가 전해준 이 과업을 실천하기에 심중한 연구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막장일도 열성적으로 하여 광주에게 신망을 얻어서 공작수행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기에 힘썼다.
그런데 3~4개월이 지나는 사이에 막장일은 이미 나의 사업에 적합하지 않다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그것은 조직이 강화되고 로동자들이 각성되여감에 따라서 한 막장안에서만 머무를수 없게 되였기때문이다. 그리고 12시간이상씩 로동을 하고 나와서 다음날 작업할 정을 벼리고나면 우선 나자신부터 곤해 잠자리에 드러눕지 않을수 없었으므로 그 시간에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한다는것은 매우 어려운 노릇이였다. 나는 리천걸동무를 만나서 이 문제를 의논하고 직업을 바꾸기로 하였다.
당시 환경에서 제일 유리한것은 취사원자리였다.
나는 리천걸동무와 토의한 뒤에 여러 굴막을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리가놈이 경영하는 갱에서 취사원노릇을 하게 되였다.
그 식당에서 밥먹는 사람은 30~40명정도였다.
광주는 식당서기를 따로 두지 않고 서기일까지 밀어맡겼다.
이렇게 되고보니 취사원의 일도 쉬운 노릇은 아니였다. 30~40명이 먹고 마셔야할 음료수는 깊은 굴안에 들어가 길어와야 했고 나무는 매일 고개너머에 가서 해와야 했다. 게다가 서기노릇까지 겸하고보니 그야말로 눈코뜰새가 없었다.
힘들고 피곤한것보다도 공작임무를 수행할 짬이 없는것이 큰 문제였다.
그래서 나는 생활곤난을 더 참기로 하고 내 품삯에서 3원을 떼여냈다. 그것으로 나는 다른 로력을 쓰기로 했다. 나무해오는 사람에게 1원을 주고 물길어오는 사람에게 2원을 주었다. 이렇게 하여 겨우 시간적여유를 얻게 되였고 서기노릇만 하면서 사람들을 료해하는데 정력을 기울일수 있게 되였다.
그리고 나는 더 많은 로동자들과 친근해지기 위해 각종 방법을 다했다.
그 당시 환경에서 그중 쉽고 좋은 방법의 하나는 그들과 결의형제를 맺는것이라고 생각했다.(물론 이것은 원칙적립장에서 볼 때는 좋은 방법이 아니였으나 그 당시 정치적으로 각성되지 못한 그들에게는 잠정적으로 필요한 사업방법이였다.) 이때 나는 19살이였으므로 결의형제를 맺은 결과 막내동생으로 정해졌다. 이렇게 되니 나의 형벌되는 로동자들은 많았고 그들은 나를 막내동생이라고 귀여워하며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도와주었다. 어떤 사람은 장작을 패주기도 하고 불도 때주었으며 어떤 사람은 쌀도 날라주고 그릇도 씻어주었다. 이러는 과정에서 나와 그들사이에는 차차 허물없이 되여갔다. 나는 이러한 처지를 리용하여 로동자들의 가정형편과 출신성분 등을 료해할수 있었고 주위환경들도 세세히 알게 되였다. 나는 장부를 만드는척 하면서 매개 로동자들의 명단을 작성했다. 그리고 그들의 성격까지도 일일이 료해할수 있었다.
나는 리천걸동무를 만나서 내가 수행한 사업정형을 보고했고 로동자들중에서 우수한 사람들을 리천걸동무와 직접 련계를 맺어주었다.
이러한 로동자들속에서 정치사상적으로 무장되고 검열된 몇사람은 그 당시에 벌써 유격대로 들어가게 되였다.
내가 금광에서 이렇게 사업하는 사이에 부암동, 장재촌 등지의 유격근거지가 점차로 형성강화되였고 내가 있는 광산내에도 여러개의 비밀지하단체들이 조직되였고 수많은 공작원들이 침투되였으며 조직체들과 각성된 혁명군중들의 력량이 점점 확장강화되여갔다. 그러나 나는 그 당시 광산안에 어떠한 조직들이 있는지, 누구누구가 조직에서 파견되여왔으며 얼마만한 군중이 조직에 참가했는지 잘 알지 못했다. 다만 나에게 지시를 전해주는 동무와 내가 담당한 일부 로동자들을 알고있을뿐이였다.
유격근거지들과 광산내부에서 차츰 조직이 확장되여감에 따라 삐라와 표어 등도 자주 나붙기시작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어떤 조직원들에 의하여 진행되는것인지를 알수 없었다. 다만 그 대담한 행동과 삐라와 표어의 내용으로 보아서 내가 수행하고있는 임무내용과 일치한것이였으므로 그 일이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지도밑에 조직전개된다는것만은 확신할수 있었다.
이와 같이 우리 력량이 나날이 확장되여감에 따라 적들의 경계도 차차 더 심하여갔다. 《관방》에는 무장보위대가 늘어갔고 경찰들과 헌병들이 더 자주 드나들었다.
바로 이러한 시기인 1933년 6월 어느날이였다.
나는 향춘발동무의 추도식에 참가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았다. 나는 지정된 시간인 저녁에 지정된 장소인 금광 뒤산으로 올라갔다. 나는 누구도 눈치를 채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은밀히 행동을 하였다. 그런데 산우에 올라가보니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곳에 모인 조직군중은 무려 300여명이나 되였던것이다.
나는 여기서 새삼스럽게 조직의 정확한 지도와 로동계급의 무궁무진한 힘을 느꼈다. 불과 얼마 안되는 사이에 광산내에서만 이렇게 많은 로동자들이 조직에 망라된줄은 미처 몰랐기때문이다.
광산내의 조직군중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것도 이날이 처음이였다. 그리고 누구누구가 조직원인지 잘 모르고지내던 나는 이날 비로소 얼굴들을 알게 되였다.
그 이튿날 적들은 뭇매맞은 개들처럼 몰려다녔다. 조직원들과 혁명군중들에 대한 검거가 시작된것이였다.
그러나 조직의 지시에 의하여 공작원들과 혁명군중들은 비밀을 고수하고 몸을 피하면서 지하투쟁을 계속했다.
나는 이때 조직의 지시에 의하여 다른 막으로 취사원공작을 옮겼다. 그 당시 거기에는 놈들이 손이 뻗치지 않았으므로 한동안 무사히 견딜수 있었다.
한달이 지난 7월 어느날 밤 나는 동발막으로 사업보고를 하러 갔다. 리천걸동무는 이때 나의 사업보고를 다 듣고나서 쌀독안에 감춰두었던 작탄을 꺼내보였다. 이것을 본 나는 새로운 용기가 부쩍 솟았다.
리천걸동무는 또한 유격근거지내에 병기창이 있다는것도 나에게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그날밤 리천걸동무와 함께 자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싶었다. 그러나 리천걸동무는 적들이 주목하고있으니까 어서 떠나가라고 엄격히 말하였다.
그날밤 늦게 집에 돌아와 자는 나를 한 동무가 깨웠다. 그리고 10여명의 동지들이 체포되여갔다는것을 알려주었다.
나는 밖으로 달려나갔다. 나의 가슴은 얼어드는것 같았고 주먹이 와들와들 떨렸다. 그러나 무모한짓을 하지 말라는 조직의 엄격한 지시가 있는 때인데다가 빈주먹뿐인 나는 어찌할바를 몰랐다. 리천걸동무가 보여주던 작탄이 생겨났고 그리로 달려갈 생각도 간절했으나 그것 역시 이미 주의를 받은 뒤라 나는 할수없이 그날밤을 막간에 들어와서 뜬눈으로 새울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후에 안일이지만 적들은 체포한 우리 동지들을 데리고가다가 도중에서 고문하였으나 한마디 비밀도 알아내지 못하게 되니 학살하였던것이다. 이것을 시초로 하여 광산안에서는 적들의 만행이 계속되였다.
우리들의 비밀은 굳건히 지켜졌고 혁명군중들의 단결이 강화됨에 따라 적들은 닥치는대로 로동자들을 붙잡아갔다.
《100명을 죽이면 그속에 한명의 공산주의자라도 있을것이다.》이렇게 고아대면서 놈들은 무차별적으로 학살을 감행하였다.
놈들은 혁명조직성원들에 의하여 각성되고 장성하는 로동계급의 위력을 두려워하였으며 이 힘을 눌러보려고 갖은 발악을 다하였던것이다.
수많은 로동자들을 놈들이 닥치는대로 검거학살했으나 로동자들의 기세는 불길처럼 거세게 일어났고 원쑤를 저주하며 복수를 맹세해나섰다. 그리고 학살당한 로동자들의 유가족들의 원성은 더욱더 우리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다.
나는 이렇게 격동된 로동자들의 적개심과 혁명기세를 리용하여 그들을 적극적으로 조직에 망라시켜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상부조직과의 련계도 잠시 끊어지고 리천걸동무를 만날수 없게 된 나는 처음에 암호를 교환하던 동발막의 동무를 찾아갔다. 그는 작탄제조에 필요한 화약심지(도화선), 깡(뢰관)등을 구해서 유격근거지에 보내야 한다는 조직의 지시를 나에게 알려주었다.
나는 이 과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로동자들을 추동하여 이 사업을 보장했다. 이렇게 우리의 투쟁은 계속되였다.
1933년 여름부터는 유격대동무들이 광산에 나타나서 선전사업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로동자들의 임금이 낮다는것, 로동시간이 길다는것, 로동보호가 전혀 없이 로동자들을 혹사하고 잔인하게 착취하며 나아가서는 고문학살하는 자들을 타도하고 우리의 주권을 세우기 위해서는 오직 유격대를 강화해야 한다는것 등을 선전했다.
이러한 선전에 고무된 로동자들가운데는 유격대에 입대할것을 탄원해나서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는 이들을 조직에 망라시켰으며 유격대원으로 양성했다.
한편 계급적으로 각성한 로동자들은 로동조건개선을 위한 투쟁에로 조직동원하였다.
박광주라는 자가 경영하는 갱은 가장 큰 금점구뎅이의 하나였는데 전체 로동자들이 일시에 맞교대(12시간로동)작업을 반대하여나서자 광주는 몹시 당황했다. 그 구뎅이에서 일하는 로동자들은 금광에서 오래동안 숙련된 로동자들이였으므로 광주의 타격을 컸다. 어느 한두명의 숙련로동자라거나 또는 신입로동자들이라면 경영주는 혹 딴전을 부릴수도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문제가 쉽지 않았고 로동자들의 요구를 거부할수 없게 되였다.
이것이 전례가 되여 다른 갱들에서도 3교대(8시간)작업을 실시하거나 또는 8시간작업을 초과한데 대한 로동임금까지 지불하게 되였다. 이로써 혁명조직들에 대한 로동자들의 신망은 더욱더 두터워졌고 유격대에 입대를 탄원하는 로동자들은 더 많아졌다.
나 역시 적들의 대검거가 있은후이라 적들의 감시와 탄압이 심한 조건하에서 직접 무장을 들고 놈들과 싸워야 되겠다는 결심이 더욱 새로와졌다. 그렇다고 무작정 조직사업을 중지하고 유격대로 들어갈수는 없어서 당분간 사업을 계속하면서 상급의 지시를 받기로 하였다.
1934년 봄이였다.
유격대원들이 광산으로 왔다. 그들은 유격대에 입대할 동무들을 데리러왔던것이다. 또한 그 유격대원들가운데는 내가 조직해서 들여보낸 동무들도 있었다.
나는 그 동무에게 내가 처한 실정을 이야기하고 나도 유격대에 들어가야겠다는것을 토론하였다. 결과에 나는 이 동무의 안내로 유격대책임자를 만나게 되였고 입대할것을 쾌히 승낙받았다.
이렇게 하여 나도 로동자들속에서 훈련된 한사람으로 영광스럽게도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직령도하시는 조선인민혁명군대오에 들어가게 되었던것이다.
6. 동녕현성전투
오백룡
1933년 9월에 있은 동녕현성전투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지휘밑에 우리 항일유격대가 구국군과 협동하여 진행한 최초의 큰 전투이다.
당시 왕청지방에서 활동하고있던 나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직접 지휘하신 이 전투에 참가하게 되였다.
동녕현성전투를 회상할 때마다 나는 당시의 환경에서 매우 어려운 문제로 제기되였던 구국군과의 반제공동전선을 능란하게 해결하고 실현하신 김일성동지의 탁월한 사업방법과 고상한 혁명가적품성에 대하여 감동을 새롭게 하게 된다.
이 시기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중국 동북을 완전히 강점한 때였다. 놈들은 만주강점에 뒤이어 만주괴뢰정부와 만주괴뢰군을 조직하여놓고는 《만주국》은 《왕도락토》이니 《동장철벽》이니 하는따위의 허위선전을 일삼으면서 중국인민들과 구국군들을 기만하려고 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조중인민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구국군부대들은 일제가 떠벌이는 허위선전에 넘어가거나 놈들의 학살만행에 겁을 집어먹고 동요하게 되였다.
원래 구국군이란 《9.18사변》후 중국 동북이 일제에게 강점되자 이전 동북군(장학량소속 군대)내의 일부 장병들이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여 무장을 가지고 탈출해나와 구성한 반일부대이다.
그들의 하층병사들은 주로 로동자, 농민출신이였으므로 애국적인 량심과 항일구국의 뜻을 품고있었다. 그러나 구국군의 지도적상층은 지주, 부농, 토호, 자산계급출신들로 구성되여있었기때문에 그들은 처음부터 자기들의 옛 지위를 회복하려는 목적밑에 반일을 하게 되였다. 따라서 그들의 지도를 받는 구국군은 본질에 있어서 지주와 자본가의 리익을 대표하는 민족주의적군대였다. 그들의 반일사상은 불철저하였으며 약간한 곤난앞에서도 동요 또는 투항하는 일들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것을 본 일제침략자들은 동요하는 구국군내부를 와해하기 위하여 회유, 기만정책을 일층 강화하면서 《귀순해오면 살 길이 있고 우대도 해준다.》고 갖은 방법과 수단을 다하여 선전하였다. 일제는 반일전선에서 구국군을 떼여내여 자기들이 리용하려고 획책하였다.
그리하여 일부 구국군은 놈들의 술책에 넘어가서 적들앞에 투항하는 길로 들어섰다. 이렇게 되자 끝까지 반일을 하겠다고 장담하던 구국군부대 일부 상층부들까지도 차츰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만일 사태를 이대로 방임하여 둔다면 적들은 커다란 리익을 볼것이며 반일혁명력량은 적지 않은 손실을 입을것이 분명하였다.
조성된 정세를 정확하게 분석하신 김일성동지께서는 구국군들을 적들에게 빼앗길것이 아니라 우리가 쟁취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들이 비록 지주와 자본가의 리익을 대표하는 민족주의적군대이기는 하지만 반일의 기치를 들고나선것만큼 그들과 공동투쟁을 전개하여 우리 유격대의 혁명적인 영향을 준다면 그들의 소극성이나 변절적경향도 차츰 고쳐질수 있고 우리의 반일력량은 더욱 확대강화할수 있다는 명백한 방침을 제시하시였다.
나는 당시 유격대에 들어간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김일성동지께서 항상 알기쉽게 말씀하여주셨기때문에 구국군과의 반제공동전선방침이 참으로 정당하다는것을 곧 깨닫게 되였다.
사실 강대한 일본침략군을 대항하여 싸우려면 무엇보다도 우리의 무장력량을 확대강화하여야만 하였다. 그리하여 수량상으로도 많고 무장도 적지 않게 갖춘 반일부대들을 쟁취하는 문제가 우리들앞에 가장 중요한 과업의 하나로 제기되였다.
그런데 당시의 환경에서 구국군과 공동전선을 실현한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일제가 조중인민간의 단결을 파괴하며 유격대와 구국군과의 통일전선을 방해하기 위하여 갖은 모략을 다하였기때문이다.
일제놈들은 1930년 5.30폭동 당시 종파분자들이 감행한 좌경적인 모험을 민족리간정책에 리용하였다.
5.30폭동에서 종파분자들은 제놈들의 종파적야욕을 달성할 목적으로 정확한 투쟁목표도 없이 그리고 대중의 준비정도도 고려함이 없이 조선농민들로 하여금 일률적으로 중국인지주집에 불을 지르도록 하였던것이다.
일제는 이것을 좋은 구실로 삼아 《만보산사건》을 도발하였다. 그리고는 《조선사람들이 만주를 빼앗으려 한다.》느니 《조선사람은 중국사람의 눈앞의 원쑤이다.》라는 터무니없는 악선전을 하면서 교활한 방법으로 조중인민간의 리간을 꾀하였다.
뿐만아니라 일제는 국내에서는 자기들의 주구인 천도교도 최린일파를 리용하여 《일본총독정치하에서의 조선사람의 자치》운동을 떠들게 하였고 특히 간도지방에서는 《민생단》을 조직하고 그자들로 하여금 《간도는 예로부터 조선사람의 땅이니 간도조선인들이 자치를 해야 한다.》고 부르짖게 함으로써 조중인민의 사이에 불화의 씨를 뿌리려하였다.
이와 같은 일제의 민족리간정책과 종파분자들의 책동에 의하여 구국군들은 조선사람과 조선혁명가들에 대하여 그릇된 인식을 갖게 되였으며 지어는 우리들을 반대하는데까지 이르렀다. 그들은 조선사람을 보면 《친일파》라고 하면서 죽이는 일이 빈번하였다.
당시 항일유격대의 우수한 간부였던 리광동지를 비롯한 적지 않은 혁명동지들이 구국군속에서 사업하다가 그들에 의하여 무참히 학살되였다.
구국군들과의 사업형편이 이러했던 까닭에 초기 일부 동무들은 구국군부대들을 반일공동투쟁에 이끌어들이려고 노력할대신에 그들과의 공동투쟁을 반대하였다. 그들은 말하기를 구국군은 원래 지주와 자본가의 리익을 대표하는 군대이므로 우리를 끝까지 반대할것이며 잡다한 반일부대는 일종 토비적성격을 띠고있으므로 인민에게 횡포한 행위를 할수 있으며 그때에는 그들과 함께 싸운 유격대가 도덕적책임을 져야 하니 결국 인민대중속에서 우리 유격대의 위신을 저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는것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이러한 견해가 협애하며 근시안적일뿐만아니라 일종 좌경기회주의적인 위험한 견해이라는것을 폭로규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일제는 동북을 강점한후 중국의 로동자, 농민들의 리익은 물론 중소 자본가와 중소 지주의 리익까지 침범하고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부 량심적인 중소 지주와 민족자본가들까지도 비록 소극적이고 동요성은 있으나 일제의 민족적압박과 경제적략탈로 인하여 항일하려는 의욕을 가지고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측면을 보지못하고 천편일률로 그들을 반동적인 지주나 예속자본가와 동일시하여서는 안됩니다.
일본침략자들과 완강히 싸우는 우리들이 항일하겠다고 나오는 그들과 손을 잡고 투쟁한다면 우리의 반일력량은 더욱 확대될것이며 일제에게는 그만큼 더 큰 타격으로 될것입니다.
그리고 항일구국군이 지주와 자본가의 리익을 대표한다고하여 그들의 반일적인 측면은 보지 않고 그들을 배척하며 그들과의 협동작전을 거절한다면 이는 일제가 바라는 즉 유격대와 구국군과의 통일전선을 실현할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것입니다. 현재 구국군은 정치적락후성때문에 우리의 정당한 반일투쟁을 리해하지 못하며 심지어 우리 공산주의자들을 살해까지 하고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들과 접촉하여 일제의 교활한 민족리간정책을 폭로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일제야말로 조중인민의 공동의 원쑤라는것을 잘 리해시켜야 합니다.
이와 함께 우리자신의 행동과 실지투쟁을 통하여 그들에게 산 모범을 보여준다면 그들은 우리를 따라올것이며 우리의 투쟁을 본받아 일제와 잘 싸우게 될것입니다.
그리고 인민에 대한 관계에서도 그들이 옳은 태도를 가지고 행동하도록 우리가 인내성있게 설복교양한다면 그들의 횡포한 략탈적인 경향도 고쳐지게 될것입니다.
구국군과의 통일전선은 능히 가능하며 또 해야할 혁명과업인데 곤난이 있다고하여 손을 뗀다면 이것은 진정 혁명가의 태도가 아닙니다.
김일성동지의 이 확고한 신념과 정확한 방침은 당시 누구도 감히 해결하지 못하던 구국군과의 반제공동전선을 정확히 실현할수 있게 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구국군과의 대규모적련합작전을 대담하게 전개하기 위하여 구국군의 거두들을 직접 만나시여 해설설복할 목적으로 미리 항일유격대가 라자구로 들어간다는 성명을 발표하신 다음 1933년 6월에 위험을 무릅쓰고 100여명의 대원들을 친솔하시고 대낮에 행군해가셨다. 그이께서는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시여 일부 대원들을 태평구에 대기시키시고 50명의 대원들만 데리고 백마를 타시고 위엄있게 오의성부대에 찾아들어가시였다. 이때 우리는 선두에 붉은기를 휘날리며 나팔을 불면서 당당하게 구국군부대에 갔다. 구국군은 감히 우리들을 건드리지 못하였다. 그것은 당시 김일성동지에 대한 명성이 조선인민들속에서뿐만아니라 중국인민과 구국군에까지 널리 알려져있었기때문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 구국군두령들에게 반일공동투쟁의 거대한 의의와 필요성을 구체적으로 해설하시였다.
그들은 처음에는 머리를 가로젓기도 하였으나 김일성동지의 높은 사상과 넓은 포옹력, 명철하고 론리정연한 옳은 주장에 탄복하여 마침내 그이의 제안을 접수하게 되였다.
이리하여 구국군들을 우리 편으로 인입하는데 성공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들과의 련합작전의 첫 공격대상으로 동녕현성을 정하시였다.
동녕현성은 중국 동북 동쪽에 있는 쏘중국경지대의 정치, 군사상 중요지점이였다. 일제는 쏘련에 대한 침략을 목적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한 일대에 대병력을 주둔시켰으며 각종 군사시설들을 축성하여놓았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동녕현성에 있는 적을 격파함으로써 일제침략자들에게 심대한 군사정치적타격을 줄뿐만아니라 구국군들에게 우리 유격대의 용감성, 대담성의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에게 승리의 신심을 북돋아주며 반일공동투쟁의 위력이 얼마나 거대한가를 똑똑히 인식시킬 목적으로 이해 9월 이 성시를 공격하기로 결심하시였던것이다.
동녕현성진공의 주력은 왕청과 훈춘에 있는 유격대에서 선발된 동무들로 조직된 우리 유격대가 되였고 구국군들인 사려장, 리삼협, 채사령, 오의성부대 등 동만일대에 널려있는 많은 부대들이 이에 동원되였다.
이에 대한 총지휘는 김일성동지께서 직접 하시였다.
적군의 력량은 일제침략군 약 5백명과 위만군 한개련대 약 2천명이 기본력량이였으며 그 외에도 다수의 일만경찰놈들과 자위단놈들이 현성안에 배치되여있었다.
적군은 포, 땅크 등의 현대적무장을 갖춘 정규군대였으므로 아군보다 무력장비에 있어서 우세하였다. 그러나 우리 유격대는 정의적인 목적과 필승의 신념을 가진 혁명군대이며 더우기 김일성동지의 직접적인 지휘에 의하여 행동하게 되는것만큼 그 사기는 비할바없이 높았다.
우리 유격대들은 이미 휴식하던 왕청지대에서 출발하여 동녕현성 서남쪽 7~8리 계선에 집결하였고 거기에서 전투준비를 더욱 빈틈없이 갖추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집결지점에서 정확한 정찰자료에 근거하여 지휘관들과 구체적인 전투계획을 토의하신후 각 부대에 전투임무를 제시하시였다.
그에 의하면 아군주력인 유격대는 김일성동지의 직접 지휘하에 적들의 완강한 저항이 예견되는 서산포대(현성 서문밖에 있는 릉선에 축성된 포대인바 여기에는 여러개의 중기관총 및 경기관총들이 배치되여있었고 포대와 성안에 있는 일제침략군부대 본부사이에는 깊은 교통호와 지하비밀통로가 굴설되여서 예비력량을 계속 증강할수 있는 조건이 조성되여있었다.)를 점령하며 서문으로 시내에 돌입하여 일제침략군병실을 점령하거나 제압봉쇄함으로써 적의 주력을 소멸하며 구국군부대들이 동문과 남문으로 진입하여 자기들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지어주는것이였다.
그리고 위만군부대에 대하여서는 그자들을 투항시킨 다음 그들도 우리 편에 인입할것이 예견되였었다.
9월 6일 김일성동지의 명령에 따라 아군부대들은 저녁식사를 한후에 집결구역에서 출발하였다. 밤 9시경에 유격대의 파괴조는 서산포대에 은밀히 접근하여 불의의 집중사격을 가하였다.
동녕현성밖에 높이 솟아있는 서산포대는 유리한 지형에 자리잡고있는데다가 돌로 쌓은 포대라 매우 견고하였다. 적들은 서산포대와 성안과의 교통호 및 지하비밀통로를 통하여 계속 력량을 증강하면서 완강히 저항하였다. 이리하여 아군 유격대와 적수비대사이에는 치렬한 화력전이 전개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서산포대에 대한 공격과 때를 같이하여 서문으로 현성안에 돌입한 유격대로 하여금 적병영에 대한 봉쇄를 강화하게 하시면서 일부 유격대원들을 포대북쪽으로 우회시켜 적들의 화력을 분산시킨후 유격대 주력의 결정적인 돌격으로 마침내 포대를 점령하게 하시였다.
서산포대를 점령한 다음 일부 유격대원들은 서북쪽포대를 향해 돌격하였으며 주력부대는 김일성동지의 친솔하에 서문안으로 돌입하여 일제침략군병실을 완전히 봉쇄하여 한놈도 나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때에 편의대로 차리고 성안에 들어가있던 구국군부대들과 동문과 남문으로 들어간 구국군부대들도 자기의 위치들을 성과있게 차지하였다. 위만군부대는 미처 손쓸사이도 없었다.
질겁한 위만군부대 본영에서는 아군의 요구대로 대표를 파견하여 담판에 응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때 우리측에서는 김일성동지께서 몸소 담판에 림하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담판석상에서 우리는 조중인민의 해방을 위하여 일제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싸우는 정의의 혁명군대라는것을 밝히시고 위만군장병들도 자기 민족을 배반하고 일제의 총마개가 되여 무모한 죽음을 당할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조중인민의 공동의 원쑤 일제를 반대하는 싸움에 대담하게 나서야 한다는것을 설복하시였다.
듣고있던 위만군대표는 김일성동지의 정당하고도 강경한 주장을 감히 거절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위만군은 마침내 우리와 협동하여 일제침략군을 공격하는데 동의하였다.
그런데 이때 현성내에 돌입한 일부 구국군부대 병사들은 위만군가족들과 또 그들과 관계되는 사람들에 대해서 략탈적행동을 감행하였다. 이것이 동기가 되여 훌륭히 성숙되여가던 위만군의 반변은 파탄되였고 위만군들은 아군을 대항해나서게 되였다. 이제는 오직 원쑤를 철저히 박멸하는수밖에 없었다.
적아간에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지게 되였다. 적들이 떼를 지어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일부 구국군병사들은 적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치자 겁을 먹고 도망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우리 유격대원들은 전투직전에 하신 김일성동지의 말씀을 명심하고 영용하게 싸웠다.
공산주의자들인 우리들에게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있을수 없습니다. 용감한 투쟁으로 현성을 점령하여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영웅적인 기개를 시위하며 구국군병사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김일성동지의 이 가르치심은 우리들의 심장을 파고들어 위대한 힘으로 되였다.
우리 유격대원들은 전투에서 선봉이 되여 도처에서 적을 무찌르고 용감히 희생적으로 싸웠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곡식 낟가리를 보고도 적이라고 도망치군 하던 일부 구국군병사들도 영웅적으로 싸우는 우리 유격대원들을 보자 용기를 내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적의 병기공장을 비롯하여 많은 군수품창고들을 습격하였다.
아군은 한편으로 로획한 군수물자를 인민들과 함께 운반하였다.
3~4시간에 걸치는 시가전이 계속되였다. 우리는 정예한 장비를 가진 적을 공격하여 놈들에게 무리죽음을 주면서 점령구역을 계속 확장하였다. 유격대의 결정적인 역할에 의하여 적은 현성 일각에 압축당하고 시가는 거의 점령되였다.
가렬한 시가전이 계속되고있을 때 한편에서는 우리 정치공작원들이 《조중 량국 인민의 공동의 원쑤는 일본제국주의다. 일제를 내몰며 괴뢰만주국을 타도하자!》등의 구호를 웨치면서 인민들을 투쟁에로 불러일으켰다. 인민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를 적극 원조하여주었다.
어느덧 날이 훤히 밝아오기 시작하였다. 적들은 보병외에 기병대와 함께 포, 땅크 등 중무장까지 동원하여 최후발악적으로 반공격을 하여왔다.
그러나 아군은 정면과 익측에서 적을 강력히 타격하여 놈들의 기도를 분쇄하고 시가를 일각에 압축해버렸다. 정황을 살피고계시던 김일성동지께서는 이미 아군부대들이 진공작전의 목적을 달성하였으므로 철수명령을 내리시였다.
유격대는 적을 계속 소멸하면서 질서정연하게 시내에서 주동적으로 철수하였다. 시외의 높은 고지에 방어대로 배치된 왕청현 유격대 제3중대 동무들은 전호에 의지하여 완강하게 싸우면서 아군의 철수를 엄호하였다.
이 전투에서 구국군의 한 부대장인 사려장이 중상을 당하였다. 그런데 그의 부대 병사들은 물론 20명이나 되는 그의 련락병, 부관들도 누구 하나 그를 돌보지 않고 제가끔 퇴각하였으므로 그는 적들에게 생포될 위급한 순간에 놓여있었다.
바로 이때에 김일성동지의 지시에 의하여 우리 유격대동무들이 위험속을 뚫고 들어가 그를 업어내여 구원하였다.
김일성동지의 극진한 보살핌이 아니였더라면 사려장은 적군에게 포로되여 희생되였을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후 사려장은 《김일성사령은 나의 생명의 은인이고 항일유격대는 우리 구국군의 첫째가는 형제들이다.》고 하면서 김일성동지께 깊은 신뢰와 경모의 정을 표시하였다. 그리고 그는 우리 유격대와 함께 끝까지 항일할것을 약속하였으며 김일성동지의 지시에 항상 충실하였다.
동녕현성전투의 승리는 항일무장투쟁사에서 거대한 정치군사적의의를 가지였다.
이 전투는 유격대가 창건된 이래 반제공동전선의 기치하에 전개된 최초의 대규모적인 성시공격전투였다.
아군은 200여명의 일제침략군과 300여명의 위만군을 살상하였으며 많은 군수물자를 로획하였다.
항일유격대는 이 전투에서 김일성동지의 탁월한 전략전술과 현명한 지휘하에 무비의 영웅성과 용감성을 발휘하여 주공방향의 어려운 임무를 훌륭히 담당수행함으로써 그의 전투적위력을 남김없이 시위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실제투쟁을 통하여 구국군들에게 일제를 반대하여 목숨바쳐 싸우는것은 혁명적무장대오인 항일유격대라는것을 보여주었으며 동시에 모든 반일력량이 단결하여 투쟁하면 반드시 승리할수 있다는 신심을 확고히 가지게 하였다.
그 결과 구국군들은 조선혁명가들에 대한 지난날의 그릇된 인식을 고치고 진심으로부터 우리를 존경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구국군과의 통일전선운동은 그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였으며 유격대의 주위에 그들을 집결시킴으로써 반일무장력량을 일층 확대강화할수 있게 되였다.
이와 같이 동녕현성전투는 구국군과의 반일공동투쟁의 첫 실현이였으며 그 모범이였다.
또한 동녕현성전투는 일제가 떠벌이는 소위 《무적황군》의 신화를 깨뜨림으로써 놈들에게 군사적으로뿐만아니라 정치도덕적으로도 큰 타격을 주었다.
실로 이 모든 성과들은 오직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와 탁월한 전략전술에 의하여 이루어진것이다.
동녕현성전투 이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명성과 우리 유격대의 위신은 더욱 높아졌다.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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