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후 남쪽이나 북쪽이나 많은 사람들이 정국의 혼란을 맞이하였다. 친일파로 잘 나가던 인간들은 숨을 곳을 찾아갔고 해방의 주역들은 어깨를 펴고 거리를 활보하였다. 그것도 잠시 분단의 비극이 시작되면서 개개인의 삶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었고 각자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만 했다. 이러한 때에 자의반 타의반 누구는 남으로 누구는 북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 힘들게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을 재조명하고 소개하고자 한다. 북행을 택한 사람들의 관하여 남쪽의 여러 가지 자료에도 소개되었지만 내용이 대부분 짧아 전후 내막을 알기가 어려웠다. 마침 북에서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사이트에 당시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북에서 어떻게 정착했고 어떻게 살아갔는지 그나마 자세하게 소개 되었다. 그 자료를 다시 미국에서 운영하는 <재미련> 사이트에 소개된 것을 원문 그대로 소개한다. 북을 택하고 어렵게 올라간 사람들의 행적에 대해 알고자 하는 독자들에 매우 유용한 자료라 생각하며 <프레스아리랑>이 ‘[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작가 최로사의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 원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작가 최로사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
∙ 1932년 6월 15일 서울에서 출생.
∙ 1949년 김일성종합대학 외국어문학부(당시) 입학.
∙ 1950년 조선인민군대에 입대.
∙ 1953년 무대예술공연 소개자로 활동.
∙ 1967년 량강도예술단 작가로 활동.
∙ 1987년 피바다가극단 작가로 활동.
∙ 1989년 조선문학창작사(당시) 작가로 활동.
∙ 2011년 3월 11일 사망.
∙ 김일성상계관인.
그리도 가슴가득 안고 산 축원
그리도 가슴가득 넘치던 감사
그리도 가슴가득 품었던 맹세
어이하여 그날에 그이앞에서
한마디도 아뢰이지 못하여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죄송한 마음, 아쉬운 마음
이리도 이 가슴 파고드는것인가
…
그러나 사람들이여
나를 나무라지 마시라
그이의 사랑이 너무도 깊은것이여서
그이의 믿음이 너무도 높은것이여서
그이의 배려가 너무도 큰것이여서
참으로 이 세상 그 어떤 말도
찾을수 없었던것을
…
그날에 못올린
그 모든 축원을 담아
그날에 못올린
그 모든 감사를 담아
그날에 못올린
그 모든 맹세를 담아
노래하고 또 노래하리라
목숨이 진할 때까지
온 세상에 소리높이 노래하리라
세월의 끝까지
(최로사의 시 《나무라지 마시라 사람들이여》중에서)
절세의 위인들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 은혜로운 그 품에 피줄을 잇고 사는 우리 인민의 절절한 마음을 담은 시이다.
떨어져서는 단 한시도 살수 없는 위대한 그 품속에 오늘의 삶과 보람, 래일의 행복이 있다는것을 뜨거운 심장으로 절감한 한 인간의 격정이고 분출이리라.
시인 최로사는 이 시에서 자기 인생의 어버이, 삶의 영원한 생명수를 부어주신 위대한 수령님들에 대한 고마움을 절절하게 토로하였다.
이 나라 수천수만의 생명들이 그러하듯 시인 최로사는 바로 위대한 수령님들의 품속에서 김일성상계관인으로, 인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시인으로 자라날수 있었다.
삶의 빛줄기를 찾아서
세상만물은 태양이 있어 존재한다. 이것은 결코 자연의 리치만이 아니다.
인간생활에서도 바로 이 법칙이 존재한다.
아무리 총명한 두뇌와 재능을 가지고 태여났다 해도 그것을 중히 여기고 내세워주는 품, 봄빛처럼 따사롭고 자애로운 어버이의 품이 없다면 그것은 사막에 떨어진 씨앗에 불과하며 망망대해우에 떨어진 하나의 물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인간은 자기 삶을 아껴주고 빛내여주는 품, 뜨거운 사랑과 인덕으로 만사람을 따뜻이 안아주는 품을 갈망하는것이다.
작가 최로사가 걸어온 인생길은 바로 이를 여실히 증명해주고있다.
1932년 6월 서울 창덕궁의 긴 돌담을 에돌아 현제동(당시)의 막바지에 있는 오막살이 세집에서 맏딸로 태여난 최로사, 유년시절과 소녀시절이 흘러간 고향의 이 골목 저 골목마다에는 그의 피눈물이 비물처럼 고여있었다.
최로사는 어렸을 때부터 말이 없는 소녀였다. 오죽하면 그의 집에서는 그를 두고 《뚝보》라고 부르기까지 했겠는가. 그것은 천성이라기보다 가정과 주위환경에 많이 기인된것이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의 아버지 최승일은 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의 발기인중의 한사람으로서 1925년 8월 조명희, 송영, 리기영, 한설야, 류완희, 박세영, 박팔양을 비롯한 진보적인 문학예술인들과 함께 카프를 결성하였다. 그는 1926년 10월 카프의 림시총회에서 김복진, 김기진, 리량, 박영희, 안석주 등과 함께 위원으로 선거되였다.
그들은 1927년에 전국대회를 열고 조직을 재정비하였으며 계급적립장을 뚜렷이 밝힌 새 강령을 채택하였다. 동맹안에 문학부, 연극부, 영화부, 미술부, 음악부 등을 두고 기관지의 이름을 《예술운동》으로 고쳤으며 지방도시들과 일본 도꾜 등에 10여개의 지부를 두었다.
또한 카프는 1930년에 이르러 다시 조직을 정비하면서 부를 동맹으로 확대개편하고 기관지로서 《문학창조》, 《연극운동》, 《집단》 등을 발행하였다.
카프작가들은 작품에서 당대 사회제도를 비판하고 우리 인민의 민족적 및 계급적해방을 주장하였으며 무산계급의 선각자를 전형으로 내세우고 사회주의적리상을 표현하였다.
최승일도 진보적인 작가로서 주로 소설과 연극작품들을 창작하였다. 그러나 이름있는 재사로 손꼽히던 그의 재능과 념원은 일제의 탄압에 의해 여지없이 짓밟히우고말았다.
일제는 1931년과 1934년에 두차례에 걸쳐 모략사건을 조작하고 카프성원들을 대량적으로 검거투옥하였으며 1935년에는 강제로 카프를 해산시켰다.
최승일은 침략자들의 갖은 탄압과 박해속에서도 자기의 량심을 꺾지 않고 진보적문인으로서의 지조를 변함없이 지켜갔다.
그는 자기의 작품에 일제식민지통치하에서 겪는 무산대중의 비참한 생활을 그리면서 그 원인을 계급적견지에서 밝혔으며 착취자, 억압자들을 반대하는 인민들의 항거정신을 형상하였다.
연극, 영화연출도 하고 신문기자생활도 하면서 그는 노상 집을 나가 떠돌이생활을 하였다.
아버지의 이러한 모습은 어린 최로사의 눈가에 비극적인 운명을 걸머지고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불행한 인간으로 처량하게 비껴들었다.
어머니 석금성 역시 뛰여난 미모와 재능으로 연극계에서 파문을 일으킨 녀배우였다.
그는 1920년대 후반기부터 연극단체인 토월회, 취성좌, 연극사의 배우로 활동하면서 연극의 주제가들을 불렀다.
그는 1930년경 김안서가 쓰고 전기현이 작곡한 노래 《옛 생각》을 《콜럼비아》레코드에 취입하였다. 그후 무성영화 《젊은이들의 노래》의 주제가 《젊은이들의 노래》를 《리갈》레코드에 취입하였다.
그는 연극배우로 1929년에 남편인 최승일이 쓴 《고향을 떠나는 사람》에 녀주인공으로 출연하여 연극배우로서 인기를 끌었다.
이외에 그는 《시들은 방초》, 라운규가 쓰고 연출을 한 《망향가》, 림선규의 작품인 《페허우에 우는 충혼》, 김소량이 쓴 《사주팔자》, 《남편의 결심》을 비롯하여《개화전야》, 《동학당》, 《급수부》, 《눈오는 밤》, 《바람부는 계절》, 《심청전》, 《일체 면회를 거절하라》, 《한낮에 꿈을 꾸는 사람들》, 《아리랑고개》, 《동백꽃아가씨》, 《약혼》, 《종소리》 등 수많은 연극들에 출연하여 전도양양한 배우로서의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식민지예술인들의 처지가 그러하듯이 최로사의 가정형편도 말이 아니였다.
시부모들과 어린 자식들을 맡아 안고 무대생활을 하던 석금성은 가정적부담과 고달픔으로 하여 가정에 들어앉아버렸다. 그처럼 화려한 성공이 약속된 무대를 버리고 집안에 들어앉은 그의 마음은 괴로웠다.
한편 아버지는 리상향을 찾아 뜨내기풍각쟁이처럼 여기저기 헤매였으나 그 생활 역시 랑만적인것은 못되였다. 그는 그때 가정은 안중에 없이 돈푼이라도 생기면 자신이 운영하는 토월회라는 예술단체에 통채로 내여맡기군 했다.
그러니 근심과 걱정만이 덧쌓이는 생활앞에 어머니의 불만만 높아갔다.
자연스레 집안은 침침한 정적속에 묻히게 되였으며 풀이 죽어 여윈 어머니의 모습은 딸의 가슴에 아픈 상처로 깊숙이 파고들어 앉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도와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에 파묻혀버린 최로사의 침울한 얼굴에는 노상 시름이 실려있었다. 다정다감하고 민감한 소녀의 성정은 끝없이 속생각을 이어가고 그것을 끊임없이 적어나가는데 습관을 붙이게 했다. 이것이 아마도 후날에 최로사로 하여금 문학에 뜻을 두게 한 직접적인 계기로 되였던것 같다.
여기에 도움을 준것은 숙명녀고의 문학교원이였다. 그는 소녀의 일기장과 잡다한 기록들에서 무엇인가 천부적인 재능을 보았으며 그것을 키워주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 과정에 최로사는 자기의 취미에 맞는 흥미있는 세계를 발견하게 되였으며 책읽기와 글쓰기를 비롯한 문학적인 수련을 쌓기 시작하였다.
어느결엔가 우울하던 그의 성격도 밖에만 나오면 깔깔거리며 웃기도 잘하고 노래도 잘 부르는 명랑한 성격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나이에 비해 궁냥이 넓다며 재능있는 소녀의 재능에 탄복하던 동네사람들은 물론 문학교원도 그의 앞길을 축복해주지 못했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된 땅에서는 아무리 타고난 재능도 무참히 짓밟혀야 했으니 최로사의 운명에 밝은 빛이 흘러들리 만무했다.
언제면 자기도 행복이라는 단어의 꿈같은 현실에 묻힐수 있을가 공상하며 생활의 세파속에 주눅이 들어 살아온 그였다.
하지만 결코 검은구름만이 그의 머리우에 떠있는것은 아니였다.
그가 13살 나던 해 먹장구름은 가셔지고 맑고 창창한 하늘이 펼쳐졌다.
그날은 바로 1945년 8월 15일이였다.
한낮이 되여 오막살이들이 비좁게 들어앉은 골목이 소란스러워 최로사는 방문을 열었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모두들 벅적거릴가?)
두려움과 의문이 엇갈린 마음으로 쪽대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던 그의 두눈은 휘둥그래졌다. 해빛조차도 얼굴을 들이밀기 저어하는 숨막히는 골안에 크나큰 열광의 화폭이 펼쳐졌던것이다.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뛰쳐나온 동네사람들이 두손을 높이 쳐들고 《조선독립 만세!》를 부르며 한데 모여 거리쪽으로 달려나가는것이 아닌가. 얼마나 목청껏 웨치는지 그들의 웨침소리에 집이 무너질것만 같았다.
(조선독립! …)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언제면 이 나라가 일제의 마수로부터 해방될가 하는 막연한 기대속에 살아온 그였기에 눈앞의 현실은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학교에 나가서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누런 일본군의 군복에 단추를 다는 작업을 하고 돌아온 그였다.
《무슨 일이냐?》
영문을 몰라 묻는 할머니의 물음에 대답할새없이 최로사는 교복을 입고 자기가 다니는 숙명녀고로 달려갔다. 학교에 가면 무슨 소식이라도 귀동냥할수 있을것만 같았던것이다.
교문은 전에없이 활짝 열려져있었다. 꼭 무슨 일이 일어난것만 같았다.
속으로는 제발 일본이 망하고 조선이 독립되였으면 하고 빌었다.
교사에 들어서던 그의 긴장된 낯색은 다소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바라던 소원, 기원하던 현실이 눈앞에 다가오는것을 감득할수 있었다.
여느때 같으면 매일 아침 학교에 등교하자마자 제일먼저 허리를 무릎까지 굽히고 경례를 해야 했던 그 저주롭고 히살스럽던 《봉안전》(왜왕의 사진을 넣어두는 집)이 다 마사져있었다. 그리고 그안에 말그대로 《모셔져있던》 왜왕의 칙서 두루마리가 갈기갈기 찢어져 불타고있었다.
먼저 나온 학생들은 그앞에서 《와-아!》 하고 환성을 지르며 춤을 추고있었다. 모두의 눈가에서는 눈물이 샘줄기처럼 흘러내리고있었다.
그것은 이전에 볼수 없었던 눈물이였다. 자신들의 운명을 두고 한탄과 한숨속에 지어내던 눈물이 아니라 기쁨과 랑만, 환희에 젖은 눈물이였다.
이윽고 그들은 일본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가슴에 달고 다니던 명찰을 뜯어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두발로 마구 짓밟고있었다.
왜놈교원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조선사람인 몇명의 교원들이 학생들과 어울려 눈물을 흘리고있었다. 그중 어느 교원이 학생들에게 웨쳤다.
《너희들의 본래 이름을 대달라. 이제부터 출석부를 고쳐 기록하겠다!》
그러자 저저마다 자기의 본명, 부모들이 지어준 조선이름을 출석부에 올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새롭게 들려오는 이름들이였다.
최로사도 모든것이 꿈같고 믿어지지 않았지만 현실세계에 스스럼없이 말려들어갔다.
그는 앞가슴의 명찰을 뜯었다. 손에 잡힌 그 저주로운 이름을 쏘아보았다.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대신 일본이름으로 불리우며 살아온 인생, 일본사람이 아닌 일본사람으로 살며 제 이름과 제 글을 빼앗기고 왜왕에게 매일 절을 하며 조선민족의 넋마저 잃고 살아온 자신이였다.
(이제부터 나는 최로사이다. 일본사람이 아닌 조선사람 최로사로 살아갈테야!)
최로사는 명찰을 바닥에 던지고 발로 짓밟았다.
지금까지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모들은 물론 자신과 동생들에게 인간이하의 생활을 강요한 일제에 대한 울분의 폭발이였다.
《선생님! 제 이름도 써넣어주십시오.》
그는 물기어린 눈을 들어 교원을 바라보았다.
애젊은 교원은 제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저의 이름은 최로사입니다. 최- 로- 사-》
《최로사! … 그러니 우리 문학소녀 <종달새>의 이름이 로사였구나!》
동무들도 최로사의 주위에서 그의 이름을 불러보며 새기고있었다.
최로사!
난생처음 공개적인 석상에서 불리워지고 학교의 출석부에 새롭게 새겨진 세 글자를 내려다보는 소녀의 눈가에서는 참고참아왔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내렸다. 인제야 진짜 제모습을 찾은 그였다.
이어 강당에서는 경축모임이 있었다. 모임에서는 학교의 교무주임으로 있던 최씨성을 가진 선생이 연설하였다. 그는 눈물절반 웃음절반이 되여 격조높이 웨치다보니 목이 꽉 쉬여서 나중에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그는 연설의 마지막에는 목에서 피줄이 튀여나올 정도로 《만세! 만세!》를 웨치기만 했다.
새로 적은 출석부로 이름을 부르는데 누구나 다 《예!》라는 대답대신 습관이 되여 몸에 배인 그대로 《하이!》라고 대답해 모두 폭소를 터쳤고 다시 《예!》 하고 대답하고는 또다시 왕왕 울어대는것이였다.
다시 울음판으로 변한 장내가 진정되자 교무주임선생은 학생자치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 5명을 선출했다. 그리고 각 학급들에서 2명의 간사를 선발하였는데 최로사의 학급에서는 그와 다른 녀동무가 추천되였다.
학생자치위원회모임에 참가하니 이제부터 당면과업은 학생들모두가 일본말을 의식적으로 잊어버리고 조선말로 말하고 책도 읽는 운동부터 벌려야 하므로 위원들과 간사들이 그 앞장에서 동무들을 이끌고나가야 한다는것이였다. 그리고 학교보위사업은 당번을 짜서 교문과 현관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자기 주위에서 너무도 급작스럽게 일어나는 변화에 최로사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꼭 무슨 반일시위나 동맹휴학 같은 운동이 일어나는것처럼 여겨졌다.
한참후에 교무주임은 우리 나라가 해방된데 대하여 설명하면서 이제는 일본이 완전히 패망했다는것을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오늘부터 일본말을 쓰지 않아도 되며 일본이름을 안써도 된다고, 이제부터는 마음껏 우리 나라 말로 공부하고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두들 너무도 희한한 소식이고 또 지금까지 왜놈들에게 짓눌려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온지라 눈이 퀭해서 그의 말이 잘 믿어지지 않아 그저 《야!》, 《야!》 하고 감탄만 련발했다.
학생들의 모습을 이윽토록 지켜보던 교무주임은 지금 거리에서는 왜놈군대들이 무장해제당하고있다는데 모두 나가보자고 하였다.
천마디의 말보다 단 한번 보는것이 낫다는 말이 있듯이 최로사는 제눈으로 직접 모든 현실을 보고싶었다. 그래서 그는 동무들과 함께 거리로 달려나갔다.
모든것은 사실이였다. 그 광경은 참으로 가관이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조선사람들을 짐승처럼 대하던 왜놈들이 자라처럼 목을 잔뜩 움츠린채 주눅이 들어 비실비실 밀려가고있었다. 그자들은 총들을 한데 모아놓고는 마치 뒤에 무엇이 따라오기라도 한듯 뛰다싶이 걸어갔다.
누구의 선동인지는 모르나 《저 쪽발이놈들을 죽여라!》하는 소리와 함께 돌들이 그놈들에게로 날아갔다. 그것을 기화로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너도나도 돌을 왜놈들에게로 던졌다. 수십년동안 쌓이고쌓인 한을 풀어보려는것이였다. 비발치는 돌을 피하느라 두손으로 대가리를 감싸고 달아나는 놈들의 꼴이 정말 가관이였다.
사람들은 그 무리들을 보면서 생전처음으로 《와하하!》하고 크게 웃었다.
후더운 열기와 뜨거운 열광속에 새봄을 맞은듯 한 환희로 들끓는 해방된 서울거리를 돌아보고난 최로사는 저녁 늦게야 집에 돌아왔다. 방안에 들어서기 바쁘게 그는 저녁식사도 잊고 집식구들에게 자기가 보고 듣고 느낀것을 그대로 터놓았다.
기쁨과 희열에 흥분되여 손세까지 써가며 이야기를 하는 손녀를 할머니는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항상 말이 없던 뚝보가 어쩌면 저리도 구수하게 말을 잘할가!
3. 1인민봉기때 《조선독립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나섰다가 일본놈들이 휘두르는 칼에 맞은 상처때문에 고생한 일이 있는 할머니는 손녀를 꼭 그러안았다.
《이제는 우리가 기를 펴고 살게 되였구나!》
8월 15일! 그날 밤은 온 집안, 온 조선민족이 잠을 이루지 못한 밤이였다. 마당가에 노전을 깔고 여느때없이 맑게 개인 밤하늘을 바라보며 그들은 한숨과 탄식속에 살아온 지난날들을 돌이켜보았다. 모두들 앞으로 자기들의 앞길에 펼쳐질 광휘로운 앞날에 대한 환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며칠후에는 망국노의 설음을 안고 일본에 건너가있던 아버지와 고모 최승희가 집으로 돌아왔다.
최승희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왜색왜풍의 탁류속에서 시들어가는 민족성을 고수하고 민족적인것을 발전시키려는 강렬한 모대김이 문학예술의 여러 분야에서 분수처럼 솟구쳐오르던 때에 조선의 민족무용을 현대화하는데 성공한 녀성이였다.
그는 민간무용, 승무, 무당춤, 궁중무용, 기생무 등의 무용들을 깊이 파고들어 거기에서 민족적정서가 강하고 우아한 춤가락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여 현대조선민족무용발전의 기초를 마련하는데 기여하였다. 그의 무용은 국내에서뿐아니라 문명을 자랑하는 프랑스, 도이췰란드 등에서도 열렬한 환영을 받고있었다.
이젠 온 가정이 다 모였다. 일제의 압제속에 짓눌려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던 집안에는 해방의 기쁨과 더불어 웃음꽃이 사라질줄 몰랐다.
게다가 아버지의 출현으로 가난에 찌들려 기울어진 집안을 버텨줄 기둥을 맞은셈이였다. 최로사에게 있어서 암흑속에 보이지 않던 집안의 앞날을 비쳐줄 한줄기의 빛이였다. 억대우같은 아버지가 있어 등록금은 물론 집세 같은것은 걱정없을것만 같았고 동생들의 입학료도 문제될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봄날의 안개와도 같은것이였다. 미군의 남조선강점은 최로사와 그의 가정에 또다시 먹구름을 들씌웠다.
해방후 남조선은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모인 하나의 소굴로 전락되고말았다. 인민들은 조국의 운명을 자기의 손으로 자유롭게 해결할수 있는 해방된 민족으로서의 권리를 미군에게 강탈당하고 오히려 민족반역자, 친일분자들이 모든 정권기관들과 경제, 문화기관들을 장악하고있었다. 하여 남조선은 무법천지로 전락되고 반동과 백색테로가 서울장안에서 횡행하고있었다.
일제통치시기에 조선의 독립과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투쟁을 하였거나 수년동안 감옥에 투옥되여있던 애국지사들이 또다시 민족반역자, 친일분자들의 독수에 의하여 투옥, 학살되고있었다. 소위 언론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남조선에서는 8. 15기념행사까지도 자유롭게 거행할수 없었다. 이것은 언론, 출판, 집회, 시위의 《자유》가 보장된다는 미명하에 벌어지고있는 남조선의 현실이였다. 미군정의 비호하에 일제시기의 경찰, 행정제도가 그대로 유지되고있었으며 정치, 경제, 문화기관들에서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숙청되기는 고사하고 도리여 극악한 친일분자들이 친미분자로 둔갑하여 《정권》의 주인으로, 지도자로 자처하여나섰다.
진정한 조선의 문학, 진정한 삶의 품을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갈망하던 아버지와 고모는 드디여 결심을 내렸다. 진정한 인민의 나라, 인민의 세상으로 나날이 변모되여가고있는 북의 현실이 그들의 마음을 끌게 했던것이다.
더우기 힘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며 민주를 사랑하는 전민족이 굳게 단결하여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여야 한다고 하신 어버이수령님의 개선연설을 끓어오르는 격동과 흥분속에 받아안은 그들은 민족의 전설적영웅에 대한 흠모심으로 가슴을 끓였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고모는 후에 집안식구들을 데려가기로 약속하고 북행길에 올랐다.
흉변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땅에서 최로사와 같은 평백성들의 운명은 삶과 죽음의 계선에 선 등불과도 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월북자가정》이라는 딱지가 붙어 해방후 흥행극단에 적을 두었던 어머니마저 무대에서 쫓겨났으니 그들의 가정에 드리운 구름이란 그대로 악몽이였다.
최로사는 출학처분을 받았고 동생인 최호섭은 나이가 찼어도 입학금이 없어 학교에 못가고있는 형편이였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할아버지마저 뇌혈전이라는 중병으로 자리에 드러눕게 되였다.
그의 가정은 쥐면 부스러질 가랑잎같은 신세요, 잔파도만 일어도 뒤집힐 쪽배의 신세였다.
학교조차 다닐수 없게 된 최로사는 어머니를 도와 가정의 무거운 부담을 짊어질 결심을 내렸다.
하루 한끼나 겨우 차례지는 멀건 보리죽마저 집식구들에게 주고 부엌에 돌아앉아 치마폭으로 눈굽을 찍군 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의 가슴속에 큼직한 응어리로 들어앉기 시작했던것이다.
석금성이라는 이름만 불러도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연극계에서 늘 주역만을 담당해온 유명한 배우의 운명이 이렇듯 비참한 처지에 놓이고말았던것이다.
최로사는 어머니를 도와 집식구들이 세끼 보리죽이라도 번지지 않게 해보리라는 소박한 생각으로 어머니 몰래 서울 종로에 있는 극장으로 갔다.
원래 인물이 남달리 빼여난 최로사는 여러 극단들에서 눈독을 들이고있는 대상이였다. 사내들의 눈뿌리를 뽑아내는 미모와 그가 겸비한 성악가로서의 기질, 독특한 화술이면 얼마든지 예술계에서 인차 두각을 나타낼수 있었다.
최로사는 래일에 대한 공상을 불러일으키는 기대감을 안고 인물심사장에 들어갔다. 하지만 곧 후회의 회오리가 그의 두뇌를 뒤흔들었다.
속옷까지 벗기우며 육체를 검열받아야 하였던것이다. 난생처음 당하는 수치라 그는 주춤거렸다. 그러나 눈앞에는 가정의 무거운 부담에 치워 고생하는 어머니와 돈이 없어 나이가 차도록 학교문전에 가지 못하는 동생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늘만은 참아야 한다.)
참기 어려운 시험에서 합격된 그는 선금 만원을 받아쥐게 되였다. 난생처음으로 이렇듯 엄청난 돈을 손에 쥐여본 그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피여올랐다.
그 돈이면 동생을 야간중학교에 넣을 입학금과 끼니거리도 마련할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유명한 배우가 되면 집살림이 허리를 펼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이 돈을 받으세요.》
발걸음도 가볍게 나는듯이 집에 돌아온 최로사는 어머니에게 돈을 내밀었다.
석금성은 돈과 딸의 얼굴을 의문짙은 눈길로 번갈아보았다.
《어데서 이렇게 많은 돈이 생겼느냐?》
최로사는 자랑스럽게 모든 사연을 터놓았다.
《나도 어머니처럼 배우가 될 결심이예요.》
얼굴에 천진한 웃음을 띠우며 말하는 딸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안면근육은 시꺼멓게 죽어갔다. 대뜸 손에 든 돈을 마당가에 집어던졌다.
《네년이 미쳤구나!》
어느결에 어머니의 거치른 손이 최로사의 뺨에서 철썩 소리를 울렸다.
《엄마! …》
얼얼한 볼을 감싸고 최로사는 눈물이 일렁이는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무엇때문에 자기가 매를 맞아야 하는지, 어째서 어머니가 저렇듯 노여워하는지 도저히 알수 없었다.
석금성은 두손으로 땅바닥을 내려치며 통곡했다.
《네가 어디에 발을 들여놓았어, 어디에?! … 이 세상에서 배우란 한갖 노리개에 지나지 않는다는것을 그래 네가 모른단 말이냐? …》
가슴을 두드리며 설분을 토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최로사는 그때에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어느해인가 석금성이 번역극 《동백꽃아가씨》의 주역을 맡았을 때였다.
삼복더위속에서 만삭이 된 배를 칭칭 동이고 무대에서 그 몸을 뒤틀며 기구한 운명을 마치는 녀주인공의 연기를 할 때면 객석에서 흐느낌소리가 터지군 하였다. 그런데 눈물의 분수가 터지는 그 순간 쾌락을 느끼던 객석의 미군들이 그에게 뽈같은 사과알을 던졌다.
자감에 빠져 연기에 열중하던 석금성은 강한 타격으로 인한 아픔으로 그만 무대우에 쓰러지고말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객석에서 미군의 휘파람소리, 웃음소리, 악청소리가 소란스럽게 울렸다.
주인공의 운명을 두고 눈물을 흘리던 관중들은 그자들의 만행에 증오의 눈길을 보냈지만 어쩌지 못했다.
바로 지금까지 수십년간의 배우생활에 이런 모욕과 천대를 수없이 당해온 어머니로서 그 진탕에 들어서려는 딸의 행동을 두고 어찌 분통을 터치지 않을수 있으랴.
《엄마! 내가… 내가 잘못했…》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잘못을 비는 딸을 부여안고 계속 오열을 터치였다.
《이 철없는것아, 악극단 녀배우의 생활이 어떤것인지 알기나 하느냐? 온갖 수모와 천대속에 청춘을 빼앗겨야 하는거다. 너를 그런데 보내고 이 에미가 살아 무엇하겠니. 차라리 죽고말겠다.》
어머니는 딸을 뿌리치며 일어났다.
최로사는 겁이 덜컥 나서 어머니의 다리를 꼭 부여잡았다.
《어머니, 제가 잘못했으니 제발 용서해줘요. 예? 어머니!》
꼭 매달린 딸의 모습을 내려다보던 어머니는 머리를 들어 비구름 밀려드는 하늘가를 넋없이 바라보았다. 사람으로 태여나 살기를 거절해야 하는 이 남조선에서 저 어린것들이 어떻게 살아갈가 하는 암담한 생각에 눈앞이 새까매졌다.
《내가 일제때부터 배우노릇을 해왔다만 그게 얼마나 큰 화근이였고 그로 하여 어떤 곡절많은 운명의 길을 걸어오게 되였는지 아느냐. 이 세상에서는 녀자에겐 재간이 화근덩이고 미인박명이란 소리를 못들었느냐, 로사야! 넌 절대로 문학이나 예술은 하지 말아라.》
파란만장의 한생에 대한 총화라고 할수 있는 그 당부앞에 최로사는 끝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자기의 꿈과 희망을 도저히 피워볼수 없는 불모의 땅에 대한 원망은 자연히 아버지와 고모가 간 북에 대한 호기심으로 뒤바뀌게 되였다.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란 일제를 때려부시고 조국을 찾아주신 전설적영웅 김일성장군님께서 북에서 인민을 위한 정치를 펴신다는 이야기뿐이였다. 그곳에서는 토지를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주고 모든 사람들이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서 얼굴의 주름발을 펴고 살아간다는것이였다.
과연 세상에 그런 나라도 있을가?
밤을 새워가며 상상해보았지만 도저히 그 륜곽을 그려볼수 없는 땅이였다.
아버지가 하루빨리 집에 와서 모두를 데리고 갔으면 하는 생각뿐이였다.
며칠후 어머니는 딸 최로사와 아들 최호섭을 데리고 서울역에 나왔다. 북으로 자식들을 떠나보내려는것이였다.
《로사야, 길이 막혀 아버지는 우리를 데리러 못오지만 어쩌겠니. 녀자가 인물있고 재간이 있을수록 더 짓밟히는 이 세상이니… 나도 늙으신 부모님과 네 동생들만 아니라면 너와 함께 평양으로 가고싶다만…》
최로사는 쏟아져나오는 눈물을 억제하며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어머니, 무사히 분계선을 넘게 될거예요. 내가 인츰 아버지와 함께 모두 데리러 올게요. 그동안 몸성히…》
말끝은 흐려들고 하늘도 우는지 찬비를 뿌리고있었다.
최로사는 후날 남쪽에 있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때를 이렇게 회상하였다.
《… 어머니! 그날이 1948년 3월 3일이였지요. 보슬비가 하염없이 내리던 스산한 서울역두에서 제가 어린 동생을 데리고 평양으로 떠나던 그날에도 어머니는 곧 뒤따라오시겠다며 저에게 문학예술의 길에 들어서면 절대로 안된다고 거듭 당부하셨지요.
차창가에서 멀어져가는 어머니모습이 아슴푸레한 점으로 사라질 때 그 순간이 이 딸에게 준 어머니의 사랑, 이 딸의 장래를 위해 줄수 있는 어머니마음의 종착점으로 새겨질줄은 나는 미처 몰랐어요. …》
이리하여 최로사는 동생 최호섭을 데리고 분계선을 넘어 북으로 들어오게 되였다.
바로 이것이 최로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운명의 선택이였다는것을 그로서는 그때까지 다는 알지 못했다.
은혜로운 토양이 피워낸 처녀작
인정만으로는 살수 없고 재능만으로는 성공할수 없는 불모의 땅에 떨어진 한알의 씨앗, 무한한 희망과 랑만을 가슴에 묻어둔채 한숨과 한탄속에 세상을 저주해야만 했던 최로사!
남조선에 있을 때 최로사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은적이 있었다.
《아버지, 내 이름을 왜 로사라고 지었나요?》
《왜, 네 이름이 어때서? … 누가 뭐라고 하더냐?》
최로사는 길게 한숨을 내그으며 탄식조로 말했다.
《로사란 한자로 <이슬 로>자와 <모래 사>자를 쓰지 않나요. 그러니 모래속의 이슬처럼 빛도 없이 사라진다는 소리가 아니예요?》
지지리 쪼들려만 가는 가정살림에서 상급학교에 갈수 없음을 뻔히 아는지라 제대로 피지 못하고 수그러질 자신의 생이 바로 이름에 담겨져있는것만 같았다.
그때 아버지는 어이없어하며 이렇게 말을 했다.
《그건 네가 잘못 생각한거란다. 네 이름은 그런 뜻이 아니라 모래의 이슬처럼 귀하게 되라고 그렇게 지은것이란다.》
모래의 이슬! 아버지의 뜻은 알만 했지만 최로사는 자기의 현재생활로서는 도저히 그 뜻이 합당치 않다고 생각했다.
과연 무엇으로, 어떤 힘으로 그렇듯 귀한 사람으로 될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북의 현실은 정말 꿈만 같았다. 즙이 말라들어가는 남쪽사회와는 너무도 대조적이였다.
시름에 시들어가는 싹이란 단 하나도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오히려 약동하는 시대의 숨결속에 모두 호함진 꽃송이들만이 만발하였다.
매 인간들의 얼굴마다에서는 생의 활기가 흘러넘치고있었으며 사람마다 웃음과 랑만으로 삶을 즐기고있었다.
믿어지지 않는 현실이지만 평양에서 자기들의 평생념원이였던 문학과 예술에 몸을 잠그고 새 조국건설에 뼈심을 바쳐가는 아버지와 고모의 모습은 무엇으로써도 꾸밀수도 엮을수도 없는것이였다. 무엇이라 이름할수 없는 감격과 흥분에 자신의 눈과 귀가 의심되였으며 피부로 닿는 혜택이 믿어지지 않았다.
(세상에 이런 곳도 있었단 말인가!)
최로사는 평양에 있는 어느 한 고급중학교 2학년에 편입하면서부터 두눈을 크게 뜨게 되였으며 모든것을 새삼스럽게 지켜보고 리성적으로 분석해보는데 습관되였다. 인간불모지로 전락된 남조선에서는 지겹게만 여겨지던 세상살이였지만 이곳에서는 점차 삶에 대한 애정과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울밑에서 시들어가던 여린 꽃송이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츰차츰 하늘을 향해 머리를 쳐들게 되였다. 맑고 푸른 창공아래 티없이 정결하고 깨끗한 공기의 흐름새는 드디여 최로사로 하여금 가슴속에 고이 숨겨두었던 희망과 래일에 대한 꿈을 되살리게 해주었다.
참으로 꿈같은 일이였다. 남조선에서는 수업료요 뭐요 하면서 인간의 뼈를 깎던 설음이 공화국의 품에서는 가뭇없이 가셔지고 마음껏 배움의 나래를 펼치게 되였다.
동생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현실이 믿어지지 않아 누나에게 매달리며 이것저것 캐묻군 하였다.
《누나, 돈을 내지 않고도 계속 학교에 다닐수 있나?》
최로사는 그때마다 동생을 품에 꼭 껴안고 말해주었다.
《그래, 여기는 우리가 살던 남조선이 아니란다.》
북에서 최로사의 생활은 격동적이였다. 보고 듣는것마다 새롭고 환희로웠다.
사람들은 누구라 할것없이 자그마한 구김살도 없이 삶의 희열과 랑만에 넘쳐있어 현실은 말그대로 약동하는 모습이였다. 너도나도 새 조국건설의 벅찬 생활속에서 생의 보람을 찾고있었으며 날에 날마다 변모되는 공장과 농촌은 그대로 비약하는 조선의 모습이였다.
최로사는 자기의 새 생활을 창조하고싶었다. 산속에 흐르는 맑은 물처럼 여울이 되고 폭포가 되고싶었다. 사품치는 물결이 되여 대해로 흘러들고싶었다.
그는 마치 해면이 물을 빨아들이듯 자기 주위에서 벌어지는 새라새로운 전설같은 이야기들을 열심히 듣고 보고 배웠다.
남조선에서 짓밟혔던 재능의 싹은 드디여 머리를 쳐들고 밝은 태양의 뜨거운 열기속에 배움의 나래를 마음껏 펴며 씩씩하게 자라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곧은 줄기를 형성하였고 무성한 아지마다에 아름다운 푸른 잎새를 활짝 펼치게 하였다.
노력한 보람이 있어 최로사는 드디여 고급중학교를 높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그처럼 소원하고 갈망하던 김일성종합대학 외국어문학부(당시)에 입학하게 되였다.
김일성종합대학 학생!
최로사의 마음은 창공을 날으는것만 같았고 끝없이 펼쳐진 배움의 대통로앞에 가슴은 뿌듯했다.
모든 학과목들은 그의 배움에 대한 열망을 더욱 촉진시켜주었다.
더우기 방과후에 진행하는 예술소조활동은 남조선에서 굳게 닫아놓았던 최로사의 마음속 대문을 서서히 두드리고있었다.
해방된 민족의 드높은 열의와 열정을 새 조국건설을 위한 투쟁에로 힘차게 불러일으키는 예술의 거대한 힘과 견인력은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안겨주었다.
진정한 문학예술! 그것은 결코 식민지압제의 칼부림밑에서 몸부림치던 울분과 원한의 웨침이 아니였다.
돈많은자들의 롱락물로, 유흥거리에 지나지 않던 예술이 아니였다.
위대한 어버이의 품, 김일성장군님의 품에 안긴 최로사가 부르는 노래의 선률은 기쁨과 랑만에 넘친 인민의 행복상이였으며 그가 읊는 시는 민주의 새 조국을 이 땅우에 건설해가는 우리 인민의 투쟁과 열정, 승리의 신심에 대한 열렬한 토로였다.
드디여 최로사는 뚝보라는 허울을 벗어던지고 자기의 본태, 밝고 씩씩한 모습을 드러내보였다.
예술에 대한 남다른 재능을 가진 그는 대학무대에서 자기의 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노래와 화술 특히 창작에 특이한 소질이 있어 선배들과 교원들의 각별한 인기를 모았다.
그는 동무들과 교원들의 사랑과 도움속에 자기의 예술적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해나갔다.
솔숲푸른 룡남산언덕에 자리잡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울리는 글소리와 학생들의 랑만에 넘친 웃음소리는 그대로 그의 노래로 이어져갔다.
봄날의 꽃봉오리가 피여나기도 전에 악착한 벌레에 의해 좀먹던 남조선사회와는 전혀 달랐다.
따사로운 빛발은 지칠줄 몰랐고 피여나는 꽃송이를 보호해주고 아껴주며 뜨거운 사랑의 열기로 품어안아주고있었다.
자그마한 불편이 있을세라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보살펴주는 은혜로운 품속에서 그는 학문의 길에 자기의 열정을 남김없이 바쳐가게 되였다.
최로사는 이때를 회고하여 자기의 글에 이렇게 썼다.
《… 꿈같이만 생각되는 공화국의 품, 어느날 밤엔가는 이런 인민의 세상을 위하여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열네살 어리신 나이에 나라를 찾는 길에 나서시여 험난한 가시덤불길을 헤쳐오셨다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베개잇을 적시기도 하였다. 반드시 보답하여야 한다는 자각을 스스로 가다듬게 하는 공화국의 품속에서 흘러가는 학창시절은 정말이지 꿈같은 나날들이였다. …》
남조선에 있을적엔 두렵게 여기며 경계하던 이웃들의 사랑과 인정세계에도 최로사는 자기의 마음을 서서히 열게 되였다.
그것은 바로 가식과 허위가 없는 인간들의 애틋한 진정이였다.
대학시절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처녀의 가슴속에 지울수 없는 자욱을 남긴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후날 일생의 반려자로 된 김준도였다.
당시 대학 예술소조에서 지휘자로 있으면서 작곡, 편곡의 다재로 이름을 날렸던 김준도는 다방면적이고 활달하면서도 정열적인 최로사에게 문학과 음악을 보다 깊이있게 리해할줄 아는 안목을 키워주는데서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최로사에게 새 조국건설에서 가요가 노는 역할을 깨우쳐주면서 《로사는 가사를 쓰고 나는 작곡을 하면 얼마나 좋을가.》라고 친근하게 말하군 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하여도 아버지가 쓰는 소설만이 진짜 문학인듯이 생각하던 최로사에게 있어서 가요는 그닥 마음이 당기는 분야가 아니였다.
하여 최로사는 상급생인 김준도의 권고를 항상 흘려보내기만 했다.
바로 이러한 때 그의 앞길에는 새로운 시련의 시기가 도래하였다.
아니, 한 처녀만이 아니라 조국의 운명에 검은구름이 드리우게 되였다.
창건된지 겨우 2년밖에 안되는 우리 공화국을 요람기에 압살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만을 노리던 미제는 드디여 1950년 6월 25일 리승만역적을 내세워 우리 인민을 반대하는 침략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지폈던것이다.
《모든것을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어버이수령님께서 제시하신 이 구호를 피끓는 가슴에 새겨안은 전체 인민은 조국을 수호할 불타는 일념을 안고 떨쳐일어섰다.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은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 손에 총을 잡고 조국수호의 성전으로 떠나갔다.
시련의 시기에 최로사는 도저히 흥분된 마음을 진정할수 없었다.
전선으로 떠나가는 남학생들과 함께 자기도 군대에 내보내줄것을 선참으로 대학에 제기하였다. 남진하는 인민군대오와 함께 서울을 해방하고 미국놈들을 조국땅에서 내쫓고싶었다. 남쪽에 계시는 어머니와 가족들을 만나고 미군의 학정밑에서 배움의 꿈을 잃고 헤매이는 그리운 학우들을 구원하는 길에 피끓는 청춘을 바치고싶었다.
어느날 최로사는 교실의 창가에서 멀리 남쪽하늘을 바라보고있었다. 이제는 인민군대에 의해 해방된 서울의 거리들과 고향마을들을 그려보고있었다. 만세의 함성을 높이 부르며 남진하는 인민군대오속에서 딸애의 모습을 찾고계실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니!》
저도모르게 흘러나오는 부름과 함께 그의 쌍까풀진 두눈가에서는 뜨거운것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하루빨리 입대가 승인되여 어머니와 동생들이 있는 고향으로 달려가고싶었다. 정의와 진리를 말살하고 인간의 문명을 짓밟는 침략자 미제에게 복수의 총탄을 날리고싶었다.
《로사동무!》
갑자기 한학급의 녀동무가 황황히 교실에 뛰여들며 그를 불렀다.
《? …》
웬일이냐는듯 의문이 그득하니 실린 최로사의 두눈을 바라보며 처녀는 책망어린 어조로 말했다.
《아직도 여기에 있으면 어떻게 하니?》
최로사는 전후사연이 없이 무턱대고 자기를 질책하는듯 한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니?》 하고 물었다.
처녀는 그제서야 숨을 고르며 말했다.
《얘, 지금 <작곡가선생>이 해방지구에 정치공작대로 떠난대.》
대학의 예술소조성원들은 김준도를 두고 《작곡가선생》이라고 불렀다.
《준도동무가?!》
최로사는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그래, 방금 막 떠나려고 차에 오르는것을 봤어. 목을 게사니처럼 쭉 빼들고 우리들을 둘러보는게 꼭 너를 찾는것 같더라.》
녀동무는 동그스름한 얼굴에 방실 미소를 띠우며 최로사의 등을 떠밀었다.
《자, 어서 가봐. 》
《그런데 왜 하필이면 내가 바래워줘야 하니?》
《애두 참, 딴전을 부리지 마. 준도동무가 너를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해주었니, 자! 어서…》
처녀는 최로사의 등을 막무가내로 떠밀었다.
그의 말이 옳았다. 김준도는 언제나 최로사의 학업은 물론 노래련습, 희망에 대해서까지 깊은 관심을 돌려주었다. 선배이기 전에 또 다른 스승이기도 하였다.
최로사는 자기가 어떻게 교사밖으로 뛰여나왔는지 알수 없었다. 그는 룡남산언덕에 핀 갖가지 들꽃들을 꺾어 꽃다발을 엮었다.
《준도동무, 잘 싸워주세요!》
두볼을 홍조로 물들이며 최로사는 머리를 다소곳이 숙인채 속삭이듯 말했다.
김준도는 처녀의 두손을 꼭 잡았다.
《로사동무, 정말 고맙소. 우리 기어이 승리하고 사랑하는 이 모교에서 꼭 다시 만나기요.》
진심이 어린 그의 목소리는 최로사의 가슴에 야릇한 감정을 불러일으켜주었다.
그들은 이렇게 헤여졌다. 서로의 가슴속에 그 어떤 아름다운것이 새롭게 움트고있는가 하는것을 느껴볼 사이도 없었다. 다만 승리! 이 두 글자만이 그들의 심장속에 확고하게 자리잡고있었다.
최로사는 그로부터 며칠후 소원대로 인민군대에 입대하여 손에 총을 잡고 전선으로 떠났다.
정의의 총창을 억세게 틀어잡고 사랑하는 조국의 촌토를 목숨으로 사수하기 위해 싸우는 인민군전사들과 우리 인민들의 영웅적인 투쟁모습은 그에게 커다란 감흥과 충동을 안겨주었다.
불과 불, 철과 철이 마주치는 고지마다에서 한치의 땅을 위해 후더운 피를 뿌려가는 영웅전사들의 희생성은 최로사로 하여금 조국이란 무엇이며 자기의 생명이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를 페부로, 심장으로 절감하게 했다. 적의 총탄이 비발치는 속을 뚫고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적비행기의 폭격속에서 중환자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의 한몸을 희생적으로 내대는 순간에조차 그는 사랑하는 조국, 통일될 조국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가렬한 전투속에서 그는 노래가 어떻게 전사들을 돌격전에로 불러일으키며 어떻게 그들의 심장속에 조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승리의 신심을 심어주는가를 직접 체험하게 되였다.
바로 이러한 그였기에 단발머리간호원으로 위생가방을 메고 전선길을 드나들던 그 어려운 시련의 시기, 쪽잠마저 그리운 간고한 전투와 행군의 여가에 짬짬이 가사를 습작하는 버릇을 붙였다.
한치의 조국땅을 위해 청춘도 생명도 깡그리 바쳐싸우는 무비의 용감성을 지닌 우리 인민의 드높은 애국충정은 최로사에게 커다란 시적충동을 불러일으켜주었다. 위대한 인민의 영웅적인 희생정신과 투쟁모습은 그대로 격동적인 시를 탄생시켰다.
최로사는 그때를 이렇게 회고하였다.
《미제가 일으킨 전쟁으로 나는 교정을 떠나 손에 총을 잡았다. 헤여진 어머니와 동생들을 만나 그리움을 풀고 행복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이 고마운 제도를 수호해야 한다는,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미제침략자들을 쳐물리쳐야 한다는 병사의 의무를 나는 스스로 지니였던것이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엄혹한 시련속에서 나는 어느 전쟁사에서도 찾아볼수 없었던 위대한 현실에 또다시 감복하였다.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여 미제침략자들과 싸워 반드시 이긴다는 필승의 신념으로 가득찬 우리 인민, 장군님을 높이 받들고 우리의 행복을 수호하려는 불타는 그 마음들은 전쟁이라는 범주로써는 상상도 할수 없는 삶의 화폭을 펼쳐놓았다.
걸음걸음 피가 고이는 시련속에서도 서로 돕고 위해주는 군민간의 뜨거운 정, 목숨을 내대야 하는 아슬한 고비도 저마다 제가 맡겠다고 가슴을 내대는 사람들… 이 감동스러운 현실에 이끌려 나는 단풍이 붉게 타는 마가을의 바위틈에 기대여 병사수첩을 펼쳐들고 눈물로 이 아름답고 숭고한 우리 인민의 신념을 형상해보았다. 바로 이 습작시가 가요 <샘물터에서>의 가사였다.》
가요 《샘물터에서》는 자연의 모든 만물이 무참히 파괴되는 포화속에서도 언제나 시들줄 모르고 마를줄 모르는 우리 군대와 인민의 뜨거운 혈연의 정, 전쟁의 승리에 대한 락관을 그대로 담은 노래이다.
1950년 가을 어느날 최로사는 부상병들을 후송하며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의 길에 올랐다.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최고사령부를 찾아 북행길에 오른 그는 어느 한 농촌마을가에서 숙영하게 되였다. 환자들에게 아침식사를 보장하려고 그는 이른새벽 안개발을 헤치며 마을의 샘물터로 내려갔다.
그런데 어디선가 샘물터로 다가가는 처녀병사의 발걸음을 멈춰세우는 노래소리가 울려왔다.
(누가 이른새벽부터 노래를 부를가?)
음악에 남다른 감각을 가진 최로사는 저도모르게 노래의 세계에 끌려들어가게 되였다.
샘물터를 눈앞에 두고 소리나는쪽으로 발길을 옮겨가던 그는 우뚝 그 자리에서 굳어진채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아직도 꿈자리에서 헤매이고있을줄로만 알았던 군인들이 남먼저 일어나 여러명의 마을처녀들과 오손도손 재미있는 이야기를 주고받는가 하면 상쾌한 기분에 사로잡혀 노래를 부르며 빨래하고있었던것이다.
샘물터에 나란히 놓여있는 물동이를 보고 그는 모든것을 짐작할수 있었다. 물을 길러 나왔던 처녀들이 군인들이 빨래하는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칠수 없어 한명, 두명 모여 그들을 도와주고있는것이 분명하였다.
최로사는 군인들과 처녀들에게 다가가 《새벽부터 모두들 수고합니다!》라고 한마디 하고는 더 다른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어떤 강한 충격이 그의 뇌리를 쿵하니 울려주었던것이다.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여 우리 인민은 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한다!
조국이 준엄한 시련의 길을 헤치는 엄혹한 시련속에서도 비관과 동요, 주저를 모르고 울리는 그들의 티없이 맑고 깨끗한 웃음소리, 서로 오가는 군민의 정은 최로사의 마음을 끌어당겼으며 시적충동과 감흥으로 가슴을 불태우게 하였다. 그는 당장 그들의 생활을 그대로 시상에 담아보고싶었다.
최로사는 바위에 기대여 병사수첩에 자기의 감정을 그대로 옮겨갔다.
이것이 바로 당시 전문작가도 시인도 아닌 열여덟살의 애젊은 처녀병사가 생활체험에 기초하여 쓴 가사 《샘물터에서》였다.
샘물터에 물을 길러 동이 이고 나갔더니
빨래하던 군인동무 슬금슬금 돌아앉네
살그머니 바라보니 그 솜씨가 서투르지
부끄러워도 말했지요 제가 빨아드릴가요
제가 빨아드릴가요 제가 빨아드릴가요
…
그러나 그때까지만 하여도 최로사는 자기의 병사수첩에 씌여진 이 습작시가 우리 인민들이 그토록 사랑하며 즐겨부르는 명곡으로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최로사는 전화의 나날 전선에서 싸우는 학생들을 대학으로 불러주신 어버이수령님의 뜨거운 은정을 심장속에 깊이 새겨안고 모교인 김일성종합대학으로 떠나오게 되였다.
전우들의 바래움속에 평양에 도착한 그는 당시 김일성종합대학이 자리잡고있는 백송리로 가기 전에 먼저 모란봉으로 올랐다. 미제의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무참히 파괴되였지만 승리의 신심으로 약동하는 수도의 전경을 깊이 새겨두고싶은 심정에서였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감격적인 상봉이 자기를 기다릴줄은 꿈에도 몰랐다.
산언덕길을 따라 모란봉극장쪽으로 내려오는데 웬 사람들이 자동차에 싣고 온 악기들을 부리우고있었다.
그들의 곁을 지나던 최로사는 자기를 지켜보는듯 한 시선을 감촉하며 무심결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상대방도 뜻밖의 현실앞에 반가움을 선뜻 표현하지 못하고 자기의 눈을 의심하듯 멍하니 서있었다.
《아니… 이게 최로사동무가 아니요?》
《어마나! … 준도동무!》
대학의 교정에서 전승의 그날에 다시 만나자고 굳게 약속하며 헤여졌던 《작곡가선생》이였다.
최로사는 너무 기뻐 그의 손을 부여잡고 철부지소녀인양 콩당콩당 뛰였다. 정치공작대로 해방지구에 나가 활동하던 김준도는 그후 여기 모란봉극장으로 소환되여 작곡가로 창작생활을 하고있었던것이다.
뜨겁게 회포를 나누던 그는 최로사에게 그동안 작품들을 습작한것이 있는가고 물었다.
처녀는 어줍게 웃으며 전선에서 싸우면서 짬시간마다 적어두었던 시들이 들어있는 병사수첩을 내놓았다.
수첩을 거의 꽉 채우다싶이 한 습작작품들을 보며 김준도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소설가를 지향하던 최로사에게 이렇듯 놀라운 시적발견과 재능이 있는줄을 정말 몰랐던것이다. 더우기 그의 시선을 끌어당긴것은 가사 《샘물터에서》였다. 자그마한 샘물터에서 벌어진 생활상을 시적계기로 잡고 랑만적이며 통속적인 시어로 군민의 혈연적뉴대와 래일의 승리를 락관적으로 보여준것이 그의 마음을 틀어잡았다.
《로사동무, 이 시는 정말 훌륭하오. 여기에 곡을 붙이면…》
수첩을 손에 든 김준도의 낯빛은 벌써 곡상이 떠오르는지 흥분으로 상기되여있었다.
최로사는 그게 뭐 그렇게까지 훌륭한 작품이겠는가고 속으로 생각하며 대학으로 향했다.
다음해 어느 봄날, 대학동무들과 함께 농촌을 도와 어느 마을 논벌에서 모내기를 하던 최로사는 귀에 익은 노래구절에 허리를 폈다.
논뚝길로 걸어가는 대여섯명의 군인들이 노래 《샘물터에서》를 부르는것이였다.
자기의 귀를 의심하며 다시금 노래가사를 새겨보던 그는 마치 자석에 끌리우듯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저-어, 그 노래가사를 누가 썼는지 모르세요?》
자기들의 걸음을 멈춰세운 미모의 녀대학생을 군인들은 웃음으로 맞이했다.
《이 노래는 전선용사 최로사란 처녀간호원의 명작이지요. 동무는 그 유명한 시인을 아직 모르고있었소? 온 전선이 다 아는 처녀인데…》
순간 최로사는 쏟아지는 눈물을 걷잡을수 없었다. 너무도 보잘것없고 어설픈 자기의 습작품이 이렇게 노래로 되여 태여났으니 그때의 그 심정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수 있으랴.
그는 그때 자기의 수첩을 받아든 김준도가 곡을 붙여 이렇게 노래로 형상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후날에야 가사의 작곡가는 그가 아닌 윤승진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날 김준도는 자기 동료들에게 그 수첩을 꺼내들고 자기의 애인이 창작한 작품이라고 자랑하며 시 《샘물터에서》를 보여주었다.
이때 그의 어깨너머로 시줄을 읽어가던 윤승진이 날쌔게 김준도의 손에서 수첩을 나꿔채고 달아났다.
《준도동무, 시가 참 좋구만. 곡은 내가 붙이겠소.》
며칠후에 윤승진은 최로사의 시에 곡을 붙였다. 그리고 그것을 예술단의 중창으로 형상해보았다. 노래는 첫 공연에서부터 만사람들의 찬사를 받았다.
이렇게 되여 가요 《샘물터에서》는 온 나라에 보급되였으며 합창, 중창, 독창으로 불리워지게 되였다.
가사는 가요로 형상되자마자 인민군군인들과 인민들의 각별한 사랑속에 불리워졌을뿐만아니라 오늘도 전시가요들중의 우수한 대표작의 하나로 널리 알려져있다.
최로사는 그때의 심정을 자기의 자서전에 이렇게 남겼다.
《가사 <샘물터에서>는 처녀작으로서 내가 시인이 된 동기로 되였다.
준엄한 1950년 10월의 그 가을날에 병사수첩에 써놓은 습작품이였다.
가렬처절한 전쟁시기, 그것도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의 어려운 시기였으나 최고사령부를 찾아가는 우리의 마음은 기어이 승리한다는 신념으로 하여 다시금 펼쳐질 아름다운 래일에로 날고있었다.
그 신념은 어버이수령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이였다.
수령님만 계시면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는 억척불변의 의지가 마음의 기둥으로 되였기에 나어린 처녀병사였던 내가 군민일치를 주제로 하여 아름답고 락천적인 생활정서를 형상한 랑만성이 짙은 이 가사를 쓸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정말이지 지난 3년간의 조국해방전쟁은 최로사로 하여금 조국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체험하게 한 귀중한 나날들이였다.
하기에 그는 1989년에 창작한 노래 《조국이 귀중함을 깨달은것은》(설명순 작곡)에서 자기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던것이다.
조국이 귀중함을 내 진정 깨달은것은
정다운 고향집을 떠날 때였네
밀보리 불타는 언덕넘어
전선길 달려갈 때
아 사무쳐왔네
귀중한 어머니 내 조국
조국이 귀중함을 내 진정 깨달은것은
시련의 길을 걷던 그날이였네
별빛이 내리는 적후의 밤
장군님 그리울 때
아 사무쳐왔네
귀중한 어머니 내 조국
전화의 그 나날에 내 진정 깨달았기에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귀중해
언제나 내 마음 그날에 살며
조국을 받들어가리
아 받들어가리
귀중한 어머니 내 조국
참으로 인민을 위해 복무하고 인민을 위해 모든것을 다 바치는 고마운 혜택이 방방곡곡에 펼쳐지는 공화국의 현실은 그가 수많은 명가사들과 명시들을 창작할수 있게 한 비옥한 토양이였다.
처녀작 《샘물터에서》부터 시작하여 그가 자기의 인생에 남긴 수백편의 작품들은 거의나 인민의 세상에서 참된 복락을 누리며 주인으로서의 삶을 빛내여나가는 우리 인민들의 행복한 생활을 밝고 랑만적인 시형상에 담은것이였다.
최로사는 이러한 생활적인 바탕과 환경속에서 자기의 시적소재를 선택하였으며 그것을 풍만한 시어로 펼쳐보였다.
그는 1956년 봄, 모내기를 끝낸 기쁨을 안고 즐거운 휴식일을 보내고있는 청산벌농민들의 모습에 심취되여 가사 《그네뛰는 처녀》를 창작하였다.
최로사는 가사에서 민속놀이를 취급한 소재의 특성에 맞게 민족적인 색채가 짙은 생활세부와 시어들을 잘 탐구하였을뿐만아니라 조흥구 《에헤야》와 반복구 《즐거워라》, 《구름밖을 날아보자》 등을 효과적으로 리용하여 전통적인 4, 4조의 운률조성수법을 잘 살려씀으로써 밝고 락천적인 우리 인민들의 생활감정을 원만하게 표현하였다.
가사에 곡을 붙인 작곡가는 다름아닌 그의 남편인 김준도였다.
이 노래는 우리 인민의 민족적인 생활모습을 새로운 시대적미감에 맞게 훌륭하게 형상한것으로 하여 창작되자마자 인민들의 각별한 사랑속에 널리 불리워졌다.
금강산에서 휴양생활을 즐기는 근로자들속에서 함께 춤추고 노래부르던 그 기쁨을 노래한 《내 나라는 좋아라》를 비롯하여 인민의 념원이 그대로 꽃피고있는 우리 제도를 형상한 《우리가 제일일세》, 《축배를 들자》 등의 모든 노래들에서 그는 한결같이 내 조국의 현실에 대한 열렬한 공감과 인민의 진정한 행복이 넘쳐나는 생활에 대한 한없는 찬사의 메아리를 터쳤다.
이밖에도 그가 창작한 예술영화의 주제가들인 《안녕히 가세요 또 오세요》, 《정다워라 나의 일터여》, 《사랑의 요람》 등은 모두 밝고 명랑한 양상을 가진것으로 하여 우리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 노래로 불리우고있다.
시 《나무라지 마시라 사람들이여》, 노래 《새별》, 《사령부의 불빛이 비쳐주는 길》, 《조선의 행운》 등에서도 온 나라에 그늘없이 해빛을 뿌려 천만자식들을 한품에 안아 키워주고 내세워주는 고마운 어머니조국에 대한 뜨거운 감사와 오직 그 품에 자기의 운명을 전적으로 의탁하고 사는 우리 인민들의 긍지와 행복을 노래하였다.
최로사가 창작한 모든 작품들은 시인의 그 어떤 허구나 환상에 의한것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보고 듣고 느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것이였으며 우리 시대의 맥박과 숨결인 승리에 대한 락관성과 드높은 신심에서 발현된것이였다.
영원한 삶의 생명수
일찌기 한 철학가는 《좋은 예술가가 되는데는 4가지가 필요하다. 착한 심장, 예리한 눈, 가벼운 손 그리고 언제나 깨끗이 닦은 붓이다.》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최로사의 인생사는 그것을 부정하였다. 남다른 창작적재능과 주위세계를 감득할수 있는 밝은 눈을 가진 그였지만 남조선에서는 도저히 피워볼수 없는 꿈을 가진 그였다.
아버지와 고모도 모두 자기들의 후더운 심장에 문학예술을 안고있었지만 제 나라가 없는탓에 붓대는 꺾이여지고 예술의 넋은 짓밟혀 침략자들의 더러운 롱락물로밖에 되지 못하였다. 그들은 오직 인민을 하늘처럼 여기시고 인민을 위해 모든것을 다 바쳐가시는 어버이수령님의 품에 안겨서야 비로소 자기들의 념원을 이룰수 있었다.
아무리 좋은 종자도 불모의 땅에 떨어지면 싹트지 못하고 썩어버리게 된다.
사람들의 재능도 바로 그것을 귀중히 여겨주고 키워주며 내세워주는 다심한 사랑의 손길을 떠나서는 생각할수 없는것이다.
최로사가 10대의 어린 나이에 단행한 운명의 선택!
그것은 그의 삶에서 가장 큰 인생의 선택이였으며 태양의 따뜻한 손길에 이끌려 기름진 대지우에 한껏 뿌리를 박고 아름다운 꽃송이를 마음껏 피워 알찬 열매를 맺어가는 보람차고 격동적인 나날이였다. 자연계에는 사계절이 있지만 영원한 봄계절만을 아는 따사로운 품, 사회주의조국의 품이 있어 그는 오늘도 우리 인민들의 기억속에 영생하는 작가로 남아있는것이다.
사막의 이슬처럼 귀중한 존재가 되기를 바라던 부모들의 소원을 초월하여 샘물터의 영원한 생명수로 되여 자기의 생에 빛나는 자욱들을 아로새겨온 시인 최로사.
그의 인생은 인민의 운명을 끝까지 책임지고 보살펴주며 이끌어주는 위대한 어버이들의 손길을 떠나서는 생각할수 없는것이였다.
한생 붓대를 들고 창작의 길에서 탈선없이 살아온 최로사에게는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심장속에 안고 산 글발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1990년 12월 27일 위대한 장군님께서 조선문학창작사 전체 동지들에게 보내주신 친필서한이였다.
우리 당건설과 활동에서 영원한 동행자, 충실한 방조자, 훌륭한 조언자가 되기를 바란다는 크나큰 믿음과 신임이 담긴 그이의 친필은 시인의 높뛰는 심장에 활기를 더해주었다.
전시가요 《샘물터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창작생활은 말그대로 위대한 태양의 손길에 이끌려 문학을 배우며 자라 오늘날에는 영광의 단상에 올라선 나날들이였다. 그가 걸어온 자욱마다에는 위대한 수령님들의 뜨거운 사랑과 은정이 깃들어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1955년 6월말 어느 한 자리에서 노래《샘물터에서》는 참으로 좋은 노래라고, 전쟁시기 우리 인민군병사들과 인민들의 사랑을 받고 널리 불리운 노래였을뿐만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도 많이 불렀다고 하시며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샘물터에서》와 같은 노래를 전후복구건설을 하는 오늘도 많이 불러야 한다고 하시며 그래야 전쟁시기 우리 인민이 지니고있던 승리의 신심을 그대로 간직하고 힘을 낼수 있다고 교시하시였다.
한 처녀병사의 미숙한 습작시에서 작가적인 재능의 싹을 발견하시고 그것을 활짝 피워 온 세상에 빛내여주신 어버이수령님!
진정 그 사랑, 그 은정은 그대로 최로사의 육체에 피줄처럼 흘러들어 그의 심장을 드높은 창작적충동과 열정으로 높뛰게 한 힘의 원천이였다.
바로 그 믿음이 있었기에 대학을 졸업하고 어느 한 예술단에서 일하던 최로사는 남편과 함께 량강도의 현지작가로 파견되였을 때에도 창작의 나래를 더 활짝 펼수 있었다.
그는 도예술단의 작가로 있으면서 민족가극 《해빛을 안고》를 비롯하여 음악무용대본들과 수십편의 가사들을 창작하여 무대에 올렸다.
바로 이 나날에 최로사는 문학예술의 영재이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각별한 사랑과 보살피심속에 보람찬 창작생활을 수놓아가게 되였다.
1972년 6월초,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력사적인 보천보전투승리 35돐 기념행사준비사업을 현지에서 지도하시기 위하여 몸소 량강도를 찾으시였다. 행사의 전 과정을 세심히 지도하셔야 하는 그 바쁘신 속에서도 그이께서는 량강도예술인들이 준비하고있는 기념행사공연의 시연회를 보아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만면에 환한 웃음을 담으시고 공연장소에 들어서시자 창작가, 예술인들은 크나큰 감격과 기쁨으로 하여 설레이는 마음을 걷잡지 못하고 그이의 품에 매달렸다.
얼마나 뵈옵고싶던 그이이신가!
이날 공연무대에 올린 종목들중에는 최로사가 창작한 노래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있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가 창작한 여러편의 가사들을 일일이 보아주시며 못내 만족해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동행한 일군들에게 그가 여기에 와서도 이렇게 좋은 작품들을 계속 쓰고있는것을 보니 자신의 마음이 매우 기쁘다고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시연회가 끝나자 최로사에게 다가오시며 녀류시인동무, 참 오래간만입니다라고 하시며 그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였다.
최로사는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어떻게 나를 알아보실가?)
자기의 손을 꼭 잡으시고 자애로운 미소를 보내주시는 그이를 우러르느라니 위대한 어버이의 기억속에 산다는 무한한 행복감이 온몸을 감싸안았다.
최로사는 영광의 이 순간 자기가 그이께 뭐라고 말씀을 올려야 할지, 어떤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지 감감히 잊어버리고말았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그이의 앞에 나서면 자기의 인생을 따뜻한 품에 감싸안아 키워주고 소원대로 작가로 내세워주신 그 은정에 골백번 머리숙여 감사를 드려야 하겠다고 마음을 다진 그였다. 그런데 정작 이렇게 그이를 뵙고나니 꼭 친어머니의 품에 안긴것만 같아 격정의 눈물이 솟구치는것을 금할수 없었다.
사실 위대한 장군님께서 그를 알고계신것은 퍽 오래전부터였다. 최로사는 전후에 중앙예술단체의 소개자로 10여년간 활동한 경력을 가지고있었다.
장군님께서는 그때 그가 관중들로 하여금 문학예술의 사상예술성을 깊은 예술적감흥속에 받아안도록 하는데서 커다란 역할을 한것을 잊지 않으시고 소개는 그전에 최로사동무가 잘하였다고 감회깊이 회억하시였다.
노래 《샘물터에서》의 명가사를 쓴 이름있는 시인, 관중들의 심장을 틀어잡았던 인기있는 소개자…
오래전부터 심중에 새기고 깊은 관심을 돌리시였던 최로사였기에 그이께서는 그의 자그마한 창작성과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기뻐해주시며 그에게 더 큰 힘과 용기를 안겨주시는것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날 최로사가 현지에서 창작하고 그의 남편 김준도가 작곡을 한 《사령부의 불빛이 비쳐주는 길》을 들어주시고 그 노래를 만수대예술단 공연종목으로 정해주시였으며 그후에는 어버이수령님을 모시고 진행하는 뜻깊은 공연무대에서 공연하도록 하는 크나큰 영광을 안겨주시였다.
사령부의 귀틀집 불밝은 창가에
장군님은 이밤도 지새우시네
내 어이 밤길이라 지체하리까
천리라도 만리라도 떠나렵니다
아 천리라도 만리라도 떠나렵니다
사령부의 불빛이 비쳐주는 길
산악인들 바다인들 못 넘으리까
장군님의 전사로서 임무받은 몸
가시덤불 길이라도 두려우리까
아 가시덤불 길이라도 못 넘으리까
1968년에 창작한 이 가사에는 어버이수령님을 인생의 영원한 은인으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삶의 참된 진리로 새겨안고 끝까지 따르려는 우리 인민의 절절한 념원이 담겨져있었다.
이날 최로사는 자기가 안겨사는 조국의 품이 얼마나 넓고 따사로운가를 온몸으로 절감하게 되였다.
그러나 그는 날이 흐를수록 자신에게 얼마나 큰 영광이 차례지는지 다는 알지 못했다.
1976년 7월초 어느날이였다. 그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도의 책임일군과 함께 삼지연못가를 거니시며 최로사의 생활에 또다시 깊은 관심을 돌려주시였다.
당시 최로사는 마음속에 큰 상실의 아픔을 안고있었다. 곁에서 힘을 주고 용기를 주며 창작의 밤을 함께 패워가던 사랑하는 남편인 김준도가 불치의 병으로 사망하였던것이다.
일군으로부터 이 사실을 보고받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괴로운 표정으로 삼지연의 수면을 바라보시며 한동안 아무 말씀도 없으시였다.
이윽고 그이께서는 심중하신 어조로 일군에게 최로사동무는 열여덟살 어린 나이에 병사로 복무하였을뿐아니라 전쟁의 불길속에서 《샘물터에서》와 같은 명가사를 창작한 재능있고 공로있는 작가라고 하시며 앞으로 그의 사업과 생활을 잘 돌봐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인간과 생활에 대한 위대한 장군님의 뜨거운 사랑, 작가와 작품에 대한 그이의 자애로운 사랑이 세차게 맥박치는 말씀이였다.
참으로 최로사가 걸어온 인생의 갈피갈피에 흐르는 생의 활기는 그대로 은혜로운 어버이께서 부어주신 호흡이였으며 박동이였다.
그의 미흡한 작품을 귀중히 여겨주시고 부족점들을 하나하나 바로잡아주시며 시대의 명곡으로,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 작품으로 내세워주신 위대한 장군님의 손길을 떠나서 어찌 최로사의 운명에 대해 생각할수 있으랴.
1982년 4월의 어느 봄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10여년전에 창작된 예술영화 《새별》의 주제가 《새별》에 대하여 이야기하시였다.
주제가 《새별》은 최로사가 1966년에 창작한 작품이였다. 그러나 영화는 높아가는 인민들의 문화수준을 민감하게 반영하지 못한것으로 하여 상영되지 못했다.
그때부터 세월은 흘러 이제는 주제가의 가사를 쓴 작가나 작곡가의 기억에서도 그 노래가 희미하게 사라져가고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 노래에 대하여 상기하여주신것이였다.
그이께서는 이 노래는 가사도 좋고 곡도 좋은데 영화때문에 파묻혔다고 말씀하시며 못내 아쉬워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노래 《새별》을 조용히 불러보시고 아무래도 이 노래를 주제가로 한 예술영화를 다시 만들어야 하겠다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그이께서는 가사의 종자가 청춘의 사랑과 조국애인것만큼 영화가 잘될수 있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 노래의 종자는 2절에 집중적으로 형상되여있다고 하시며 친히 가사를 외워보시였다. 그것은 한자도 틀림없는 최로사의 가사였다.
일군들의 놀라움은 컸다. 온 방안은 격정의 파도로 설레였다.
가사의 구절구절을 세심히 훑어가시던 그이께서는 친히 몇구절을 수정가필하여주시고 곡도 두군데나 수정해주시였다.
저 하늘에 별들이 많고많아도
마음속에 빛나는 새별은 하나
별이여 비쳐다오 등대와 같이
우리 앞길 찬란히 비치여다오
원래 가사는 《밤새도록 비치는》으로 되여있었는데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마음속에 빛나는》으로 가필해주시였다. 그리고 《마음속에 그리운》으로 되여있던것을 《우리 앞길 찬란히》로 수정해주시였다. 또한 《우리 님에게》로 되여있던 2절 가사 마지막표현을 《나의 님에게》로 고쳐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세월의 흐름속에 영영 묻혀버릴번 했던 한편의 노래를 뜨거운 사랑으로 품어주시여 우리 시대 청춘들의 애정과 조국애의 감정을 하나로 이어주시였으며 청춘들의 사랑 그자체를 더욱 뜨겁게 승화시켜주시였다.
새별처럼 청춘을 빛내이자고
굳은 맹세 다지며 그대 떠났네
별이여 전해다오 나의 노래를
사무치게 그리운 나의 님에게
일군들은 위대한 장군님께서 지니신 비범한 문학적천품과 창작가들의 사색과 열정의 열매를 그처럼 귀중히 여기시는 그이의 뜨거운 사랑에 목메여 깊이 머리를 숙이였다.
이렇게 되여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뜨거운 손길에 의하여 10여년동안 묻혀있던 한편의 가사가 영화의 종자로, 주제가로 되여 우리 인민들이 즐겨 부르게 되였으며 새별처럼 밝은 빛을 뿌리게 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노래 《그네뛰는 처녀》를 기악협주곡으로, 관현악으로, 무용곡으로 다양하게 형상창조하도록 하여주시고 우리 나라 사회주의제도의 우월성과 우리 나라 명승들을 자랑하는 기록영화의 장면들과 무대예술작품들에 이 음악을 넣도록 하여주시였다.
최로사는 바로 그 사랑, 그 믿음을 가슴에 간직하고 그이의 문예정책을 받드는 길에서 언제나 조선로동당의 영원한 동행자, 충실한 방조자, 훌륭한 조언자로 살기 위해 피타는 창작활동을 벌렸다.
그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우리 인민들이 결혼식때 부를 좋은 노래가 없다고 걱정하시였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밤을 패워가며 가사 《축배를 들자》를 창작하였다.
그는 결혼식장에서 부르는 노래인것만큼 가사를 밝고 명랑하게 생활적으로, 통속적으로 쓰리라고 마음먹었다.
우리 세월 좋아 백년가약 좋아
축배 축배 축배를 들자
즉 최로사는 《우리 세월 좋아》라는 한구절에 우리 나라 사회주의제도에서 인민이 누리는 행복한 생활을 다 담고 이런 좋은 세상에서 백년가약을 맺는 청춘들이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내용을 다 담아보려고 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결혼식때 부를 노래가사를 생활적으로, 통속적으로 쓴데 대해서 평가해주시면서 생활적인 노래에도 사상성이 명백하게 형상되여야 한다고 하시며 후렴부분 가사를 수정가필해주시였다.
우리 세월 좋아 로동당이 좋아
축배 축배 축배를 들자
이 귀중한 가르치심을 받아안는 순간 최로사는 저도 모르게 《아!》 하고 탄성을 올리였다.
(내가 구가하자고 생각한것 즉 우리가 사는 로동당시대, 우리 사회주의제도에서 백년가약을 맺는 청춘남녀들에 대한 축하이자 이 행복을 안겨준 은혜로운 사랑의 품, 우리 조국에 대한 다함없는 칭송의 사상감정이 얼마나 빛나게 형상되였는가!)
최로사는 짧은 가사에서 《우리 세월 좋아》라는 시구이상 더 좋은 표현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위대한 장군님께서 가필해주신 시구 《로동당이 좋아》로 하여 가사는 다름아닌 우리 시대, 우리 사회주의제도에서 청춘들의 결혼을 축하하는 노래로서 그 사상예술적수준과 인식교양적의의가 비할바없이 높아지게 되였다.
2절과 3절의 가사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최로사는 2절 부분에서 《금딸이겠네》라고, 3절에서는 《사랑만은 오늘처럼 젊어있으리》라고 썼었다.
그러나 위대한 장군님께서 수정가필해주신 원고부분은 그의 가슴을 세차게 격동시켰다.
신랑신부 웃음꽃이 활짝 폈으니
첫아기는 틀림없이 옥동자라네
…
신랑신부 검은머리 백발되여도
변함없는 사랑속에 젊어있으리
…
노래가 완성되였을 때 최로사는 몇번이고 가슴속으로 이렇게 웨치고 웨쳤다.
《참으로 우리 장군님은 위대한 예술의 천재이시다!》
그는 천재적인 예지와 열화같은 사랑으로 평범한 시인이 창작한 한편의 노래가사까지 이처럼 훌륭히 완성시켜주신 위대한 장군님의 넓고도 깊은 사랑에 가슴이 벅차오름을 금할수 없었다.
정녕 이 세상 그 어디에도 비길데 없는 이런 믿음과 은정속에서 최로사는 작가로서의 영예를 더욱 빛내이게 되였다.
이렇듯 자애롭고 인자한 품에 안겨 만복을 누려가는 그였기에 어느해 정월초하루 남녘에 있는 어머니를 그리며 쓴 시 《내 어머니의 모습》에서 이렇게 자기의 심정을 노래하였다.
…
어머니슬하를 떠나
내 안긴 은혜로운 품
이 품속에서
내 어머니 그토록 주고파도 못 주던
만복을 한껏 누리며
내 어머니 그토록 바라시던
나의 소원 나의 희망 꽃으로 활짝 피여
영광으로 이어온 내 삶의 하루하루
…
평범한 시인을 주체예술의 화원에서 만발하는 천만가지 꽃중의 한송이 꽃으로 피워주시고 작가들과 작품들을 천금보다 더 귀중히 여기시며 아껴주시는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사랑은 세월과 더불어 더해만 갔다.
1986년 봄 최로사는 여러편의 가사들을 창작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때 그가 창작한 노래 《우리가 제일일세》를 들으시고 가사가 참으로 좋다고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그이의 말씀을 전달받은 최로사는 솟구쳐오르는 감격을 금할길 없었다. 친부모도 따르지 못할 다심한 사랑의 품속에서 받아안은 은정에 다소나마 보답했다는 그 기쁨을 어디에 비기겠는가.
그러나 한편 서글픈 감정이 갈마드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이 가사가 그이께 드릴수 있는 마지막가사로 되지 않겠는가 하는것이였다.
그는 이제 몇달만 있으면 년로보장으로 일을 그만둘 나이가 되는것이다.
(이대로 시단에서 떠난단 말인가! …)
괴롭고 허전한 마음을 안고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해 9월 어느날이였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감동적이고 현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꿈같은 현실이 그앞에 펼쳐졌다.
이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최로사동무는 일편단심 당을 받들어 창작생활을 해왔다고 하시면서 그를 평양에 소환하여 생의 말년까지 자기의 재능을 마음껏 꽃피울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최로사의 두볼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흘렀다. 가슴속에 소중히 간직하기만 했던 간절한 소원이 그이의 크나큰 믿음과 은정으로 이루어지게 되였으니 그때의 그 감격을 무엇이라고 표현할수 있으랴.
그뿐만이 아니였다.
온 가족이 함께 살도록 하여주신 위대한 장군님의 사랑에 의하여 그는 아들과 며느리, 딸까지 데리고 평양에 올라오게 되였다.
언제나 변함없는 믿음으로 내세워주시고 보살펴주시는 위대한 어버이의 손길에 떠받들려 최로사는 새로 지은 아빠트에 살림을 펴게 되였으며 청춘작가의 활력과 열정을 가지고 보람찬 창작의 나날을 보내게 되였다.
온갖 시름을 모두 가셔주고 천만가지 소원을 다 풀어주는 은혜로운 어버이품!
고목에도 꽃을 피울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시고 뜨거운 인간애로 품어주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사랑은 정녕 마를줄 모르는 샘줄기와도 같은것이였다.
1989년 3월 어느날 최로사는 만수대예술극장으로 급히 오라는 련락을 받게 되였다.
이날 그곳에서는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을 모시고 피바다가극단에서 출연하는 시와 음악무용공연이 진행되였다.
극장에 도착한 최로사에게 한 일군이 오늘 위대한 장군님을 모시고 진행하는 공연관람에 참가하게 되였다는것을 알려주었다.
얼마나 뵙고싶던 장군님이신가. 얼마나 흠모하고 그리워하던 그이이신가.
(정녕 무슨 말로 인사를 올리며 무슨 말로 감사의 정을 아뢰일가.)
최로사는 그이의 하늘같은 은정속에 사는 무상의 행복을 심장깊이 느끼며 그이께 올릴 말마디들을 고르고 또 골랐다.
이윽고 우렁찬 만세소리가 극장안을 뒤흔드는 속에 위대한 장군님께서 객석으로 들어서시였다.
만장의 환호에 태양과도 같이 환한 웃음을 지으시며 들어서시는 그이의 영상을 우러르며 최로사는 눈굽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걷잡을수 없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창작가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주시며 최로사에게로 다가가시였다. 그를 이윽토록 바라보시던 그이께서는 그의 이름을 정깊게 불러주시며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을 만나뵈옵는 크나큰 행복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체험하게 되는 그이의 위대한 포옹력과 감화력을 뜨겁게 절감한 최로사는 마음속으로 준비했던 인사도 미처 드리지 못한채 그이의 넓은 품에 얼굴을 묻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얼마후에야 겨우 마음을 진정한 그는 입을 열었으나 《위대한 장군님!》이라는 말만 몇번 아뢰였을뿐 다른 인사를 올리지 못하였다.
장내가 정돈되고 공연의 막이 올라서야 최로사는 운명의 어버이이신 그이께 감사의 인사말 한마디 제대로 올리지 못한 자신을 크게 질책하였다.
그날 공연이 끝난 후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휴계실에서 일군들과 창작가들을 다시금 만나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시인들쪽으로 자애로운 시선을 보내시며 시인들이 좋은 시와 가사를 많이 써서 우리 조국의 부강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있기때문에 자신께서는 높이 평가하고있다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동무들은 앞으로도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좋은 시와 가사를 많이 창작함으로써 당과 운명을 같이하는 참다운 동행자가 되여야 한다고 뜨겁게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최로사를 정겹게 바라보시며 가사 《샘물터에서》를 창작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좋은 가사를 많이 썼는데 앞으로도 창작사업을 잘하여야 하겠다는 크나큰 믿음과 사랑을 안겨주시였다.
여기에는 작가에게 영원히 빛나는 삶을 안겨주시고 생의 순간순간을 나라와 인민을 위해 값있게 바칠줄 아는 시대의 기수로 내세워주시려는 우리 장군님의 웅심깊은 뜻이 깃들어있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날 최로사의 시집을 출판하도록 은정깊은 사랑도 베풀어주시였다.
최로사는 크나큰 충격으로 하여 한동안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시집이라니?! …)
어제날 자기의 꿈과 희망을 꽃피우려고 했어도 침략자들의 군화발밑에서 싹도 틔워보지 못했던 그였다.
그런데 위대한 조국, 고마운 공화국의 품에서 문학을 배우고 오늘은 이렇듯 만사람들이 선망과 존경의 눈길로 바라보는 작가로 되였는데 자기의 이름으로 된 시집까지 낸다니 행복이면 이보다 더 큰 행복이 또 어데 있단 말인가.
위대한 품속에서 귀중한 정치적생명을 받아안고 참된 삶과 행복을 꽃피워온 보람찬 나날에 창작한 시편들을 한데 묶어 작가의 이름과 더불어 영원히 빛내여주시려는 어버이 그 사랑에 최로사는 무엇이라 감사의 인사를 올려야 할지 몰랐다.
겹쌓이는 흥분으로 하여 마음을 진정하지 못한 최로사는 《위대한 장군님! …》 하고는 더 말씀을 올리지 못하였다.
그이께서는 하많은 사연이 담긴 인사의 말을 뜨거운 눈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그의 심중을 깊이 헤아리시고 그가 받은 새 살림집에 대하여 물으시였다.
순간 최로사는 아무리 자애롭고 다정스러운 말을 고르고골라도 이 짤막한 말씀속에 소용돌이치는 그이의 뜨거운 사랑을 다 이야기하지 못할것이며 그 어떤 수백수천의 말을 합치고 합쳐도 그 말씀속에 담겨있는 은정의 세계를 다는 전하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 그이의 말씀속에는 작가와 작품, 인간과 생활에 대한 우리 장군님의 위대한 사랑이 하나로 응축되여있다는것을…
최로사는 뜨거운 격정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대답올렸다.
《정말 고맙습니다. …》
위대한 장군님께서 떠나신 다음에도 최로사는 어린애마냥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그냥 울었다. 그는 언제나 창작가들을 자신의 영원한 동행자로 굳게 믿어주시며 작가와 작품의 운명을 끝까지 빛내여주시려는 위대한 령도자의 그 사랑에 한생을 다 바쳐 기어이 보답하리라 굳게 마음 다졌다.
그후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최로사뿐만아니라 그의 가정에도 크나큰 사랑을 베풀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지방에서 재능있는 어린 학생들을 많이 키워낸 최로사의 남동생 최호섭을 만경대학생소년궁전 안무가로 일하도록 하여주시는 은정어린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다시는 예술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며 어린 딸자식을 공화국의 품으로 보낸 최로사의 어머니 석금성, 슬하에서 떠나간 아들딸들의 생사여부를 알수 없었던 그는 수십년동안 사찰들을 찾아 북으로 간 자식들이 무사하기를 빌고 빌었다고 한다.
그러던 1990년대초에 일본에 있는 친척을 찾아 도꾜로 갔던 석금성은 뜻밖에도 공화국에서 발행하는 신문과 잡지, 화보를 통하여 자기의 딸인 최로사가 위대한 수령님들의 보살피심속에 대학을 졸업하고 작가가 되였다는것과 아들인 최호섭이 안무가로 보람있는 삶을 누리고있는것을 제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되였다.
일본땅에 와서 뜻밖에 자식들의 소식을 알게 된 그는 자기의 아들딸들을 훌륭히 키워 작가, 예술인으로 내세워주신 위대한 수령님들의 자애로운 영상을 우러르며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또 올렸다.
그후 서울에 돌아온 그는 1995년 9월 사망하는 그날까지 하루빨리 조국이 통일되여 아들딸을 만나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기원했다고 한다.
세월이 갈수록 더해만 가는 친어버이의 사랑과 믿음은 그대로 최로사에게 끝없는 창작의 나래를 한껏 펼치게 하였다.
그는 그날의 감격을 안고 시 《나무라지 마시라 사람들이여》(1990년), 가사 《우리의 큰 명절》(1990년), 가사《오직 우리 당만 따르리》(1992년), 가사 《어머니들에 대한 생각》(1992년), 가사 《우린 승리자》(1993년), 가사 《아침도 좋아 저녁도 좋아》(1993년)를 비롯한 수많은 시들과 가사들을 창작하였다.
전화의 그 나날 포화속을 뚫고 부상병들을 치료하던 나어린 처녀병사의 처녀작 《샘물터에서》를 귀중히 여겨주시고 그의 인생말년에까지 온갖 육친의 정을 다 부어주신 위대한 장군님의 사랑은 정녕 끝이 없었다.
1991년 8월 중순 어느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최로사를 잊지 못하시여 또다시 그를 자신의 곁으로 불러주시였다.
한달음에 달려온 그를 반갑게 맞아주신 그이께서는 최로사동무가 보고싶어서 이렇게 불렀다고 하시며 그의 건강에 대해서까지 일일이 물어주시였다.
이날 장군님께서는 최로사동무는 열여덟나이에 처녀의 몸으로 전쟁시기 군대에 나가 싸웠을뿐아니라 그 전화속에서 전쟁승리에 크게 기여한 전시가요 《샘물터에서》를 쓴것은 대단히 큰 공로라고 치하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감격에 젖어있는 그에게 보천보전자악단에서 새로 창조한 노래도 들려주시며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당의 작가, 로동당의 작가가 되여야 한다는 크나큰 믿음을 부어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후 최로사에게 어버이수령님의 존함이 모셔진 선물시계를 표창해주시고 또 그를 전국지식인대회의 대표로 불러주시는 크나큰 영광을 안겨주시였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자신의 곁에 더 가까이 불러주시고 두터운 신임과 배려를 돌려주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따사로운 해빛아래 최로사는 인생의 황혼기를 모르고 언제나 포연속을 헤치던 처녀병사시절처럼 신심과 락관에 넘쳐 작품들을 창작할수 있었던것이다.
이것은 그가 1995년 2월에 창작한 가사 《조선의 행운》(안정호 작곡)을 두고서도 잘 알수 있다.
최로사는 그 노래의 창작계기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다.
《… 뜻밖에도 어버이수령님을 잃는 커다란 국상을 당하여 사람도 강산도 피눈물에 젖어있던 1994년을 보내고 새해 1995년을 맞이한 나의 뇌리에는 문뜩 솟구치는 하나의 시상이 있었다.
조선이 피눈물의 바다에 잠겨 영영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고 미제와 그 앞잡이들이 떠벌이고있을 때 우리 인민의 가슴속에서 용암처럼 솟구치는 힘은 과연 어디에서 분출하는것이였던가.
그것은 우리에게는 또 한분의 위대한 령도자이신 김정일장군님께서 계신다는 생각, 그이께서 어버이수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신념을 우리 인민의 가슴속에 깊이 심어주시여 생겨난 힘이 아닌가.
하여 대를 이어 누리는 수령복, 우리 조선민족만이 타고난 수령복을 노래하고싶었으며 그 정서를 비장하게가 아니라 랑만적으로 희망차게 노래하고싶어 창작한것이다.》
온 나라에 그늘없이 해빛을 뿌려
행복의 꽃 피우시는 김정일동지
아 뜨거운 사랑의
아 태양을 모심은
조선이 타고난 행운이라오
이 세상의 모든 풍파 다 막으시여
좋은 날만 펼치시는 김정일동지
아 천하를 비치는
아 태양을 모심은
조선이 타고난 행운이라오
나라마다 차례지는 영광이런가
사람마다 누리는 복이라던가
아 대대로 위대한
아 태양을 모심은
조선이 타고난 행운이라오
이 노래에는 위대한 장군님의 품에 안겨사는 행운을 지닌 시인의 복된 삶의 토로, 이 세상 그 어느 민족도 누리지 못하는 수령복, 태양복에 사는 복받은 우리 인민의 행복상이 자랑스럽게 구가되여있다.
1995년 5월초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최로사를 다시금 자신의 곁으로 불러주시였다. 그가 도착하기 전에 그이께서는 일군들에게 최로사동무는 전쟁에 참가한 처녀병사이며 전화속에서 전시가요를 썼고 또 어버이수령님을 모시고 진행하는 공연의 무대소개자로 조국의 존엄을 떨쳤다고 높이 평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그는 《그네뛰는 처녀》와 같은 명가사들을 많이 썼다고, 우리 당이 그 동무의 일생을 끝까지 잘 돌봐주어야 한다고 간곡히 말씀하시였다.
이윽고 최로사가 도착하자 그이께서는 그를 반갑게 맞아주시였다.
이날 장군님께서는 왕재산경음악단에서 새로 형상한 노래 《그네뛰는 처녀》를 그에게 들려주시였다.
커다란 감격에 휩싸여있는 그를 보시며 그이께서는 이 노래가 명가사, 명곡이라고 하시며 노래는 그렇게 랑만이 있어야 우리 인민이 좋아한다고 거듭거듭 치하해주시면서 그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위인상에 한없이 매혹된 그는 1998년 2월 남조선의 옛 학우들에게 보내는 편지 《장군님을 알면 래일이 보입니다》에서 이렇게 썼다.
《숙명녀고의 동창생 옛 학우들!
해외에서 학우들이 보낸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꼭 50년전, 비내리는 서울역두에서 눈물속에 헤여졌던 문학소녀 <종달새>, 이 최로사를 잊지 않고 편지들을 보내주어 고맙습니다.
학우들은 편지에서 김정일장군님을 만나뵈온 이 <종달새>를 축복하면서 장군님에 대해 알려달라고 부탁했지요.
그이께서는 저를 몇해어간에 다섯번이나 만나주셨답니다.
오늘은 장군님앞에서 제가 <울보>가 되였던 이야기만을 <통일신보>의 지면을 빌려 전해드리고저 합니다.
제가 지난해 만나본바이지만 우리 동창생들가운데는 동서방 대통령들의 관저를 드나들며 그들과 가까이 지낸다는 저명한 문필가도 있습니다. 그가 대통령들과 친한다면 그것은 직업상의무감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김정일장군님께 그토록 이끌리게 된것은 그이께서 민족의 령도자이시기에 앞서 다정다감한 인간이시라는 매혹에 있습니다.
그이의 미소는 봄날의 해빛처럼 따스하며 그이의 안광은 예지로 별빛처럼 빛납니다.
그이의 음성은 정서깊은 음악의 선률이 되여 이 마음의 금선을 튕기며 추억의 나래도 펴주고 미래에 대한 락관의 샘이 솟구치게도 합니다.
여러해전 어느 가을날, 장군님께서는 저를 만나주신 자리에서 좋은 가사들을 쓰느라고 수고가 많았다고 하시며 몸소 축배잔을 찧어주시였습니다. 저는 장군님의 은정이 너무도 고마워 인사의 말씀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감격의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이께서는 저를 보고 울보라고 하시며 어서 잔을 들어야 함께 잔을 들것이 아닌가, 동무가 <축배를 들자>는 노래도 지었는데 어서 들자고 다정히 말씀하시였습니다.
친오라버님 같으신 장군님의 후더운 인정이 저를 울보가 되게 한것입니다.
1995년 5월의 봄날에도 장군님께서는 여러 시간이나 저를 만나주시였습니다. 그이께서는 그해초에 제가 지은 노래 <조선의 행운>에 대해서 먼저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이께서는 1956년에 제가 가사를 쓴 민요 <그네뛰는 처녀>에 대하여 회고하시면서 그때 동무는 민족적색채가 짙은 랑만적인 노래로 인민들을 고무하더니 풍파많은 시련의 오늘에는 이렇게 신심에 찬 노래를 지었다고 분에 넘치는 말씀을 하시였습니다.
그러시면서 노래에서 자신을 태양으로 부르는것만은 지나치다고 하시면서 엄하게 나무람하시였습니다.
저는 뜨거운 눈물을 삼키며 마음속으로 그이께 아뢰였습니다. 남녘땅에서는 불행에 처했던 이 소녀에게 행운의 빛발이 어디서 비쳐왔습니까. 한편한편의 소박한 노래들을 다듬어 완성시켜주시고도 이 시인을 내세워주시며 겨레를 위해 붓을 들고 참답게 살도록 깨우쳐주신 장군님이 아니십니까.
동창생 여러분!
장군님께서 아무리 만류하시여도 그이는 제 인생의 태양이십니다.
한줄기의 해빛을 감수하고도 우주만물을 소생시키는 태양의 열도를 가늠할수 있는것이 아닙니까.
조선민족 그 누구이든 장군님을 만나뵈옵고나면 그이를 인생의 태양으로 확신하게 될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학우들! 어수선한 세상에서 자신과 자녀들의 장래가 걱정되거든 우리 장군님께 운명을 맡기십시오. 장군님을 알면 민족의 밝은 래일이 보입니다.
우리모두 인생의 태양, 민족의 태양 김정일장군님을 높이 모시고 따르는 길에서 통일조국의 봄을 마중해나갑시다. 1998년 2월 3일 평양에서.》
세상만물의 존재는 어디까지나 끝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최로사에게 돌려주신 장군님의 사랑에는 끝이 없었다.
그가 늙은 몸으로 집에서 창작생활을 하던 2000년 3월에는 일군들에게 최로사동무는 지난 시기 훌륭한 시와 가사를 많이 쓴 재능있는 작가라고 분에 넘치는 치하를 해주시고 그의 건강과 생활을 잘 돌봐주어야 한다고 당부하시며 귀중한 보약들과 선물들을 보내주시였다.
그러시고도 못다 주신 사랑이 있으신듯 전쟁로병시인인 그의 창작성과를 높이 평가하시여 2001년 4월에는 그에게 김일성상을 수여하도록 하여주시고 그가 일흔살이 되는 2002년 6월에는 생일상을 보내주시고 로력훈장까지 수여해주시였다.
로병시인을 언제나 잊지 않으시고 해마다 명절때면 사랑의 선물과 보약들을 보내주시고 전쟁시기 당한 부상자리가 도져 쓰러졌을 때에는 전문치료집단까지 무어주시여 그가 다시 일어서도록 하여주신분도 다름아닌 자애로운 어버이 김정일장군님이시였다.
뿐만아니라 그이께서는 2006년 12월 13일에는 자기를 품에 안아 키워준 삶의 요람인 우리 조국에 대한 고마움의 인사, 감격의 인사를 담아 최로사가 올린 편지를 친히 보아주시고 사랑의 친필을 보내주시는 크나큰 영광을 안겨주시였다.
이렇듯 뜨거운 사랑과 배려속에 자기의 한생을 살아온 최로사였기에 운명의 마지막순간까지도 위대한 장군님을 그리며 자기의 생을 마친것이였다.
2011년 3월 그가 사망했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못내 가슴아파하시면서 최로사의 장례식을 기관장으로 하도록 하시고 자신의 명의로 된 화환까지 보내주시였다.
돈과 권력이 판을 치는 남조선에 있었더라면 최로사의 재능과 그의 운명은 빛도 없이 초야에 묻히고말았을것이다.
하다면 그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영생의 언덕으로 올라서게 되였는가.
위대한 수령님들께서는 공화국의 품에 안긴 그의 운명의 보호자가 되시여 육친의 정보다 더 뜨겁고 자애깊은 사랑으로 그를 안아 키워주시고 영생의 언덕에 내세워주시였다.
참으로 최로사에게 돌려주신 위대한 수령님들의 사랑은 천만부모의 사랑을 다 합쳐도 따를수 없는 가장 뜨겁고 열렬한 어버이사랑이였다.
하기에 최로사는 생전에 《우리 당은 내 운명의 보호자, 우리 당의 사랑은 내 삶의 생명수! 그것이 아니였다면 나는 일찌기 기갈이 들어 풀끝의 이슬로 사라지고말았을것입니다.》라는 말을 자주 하였다.
자기의 운명을 품어주고 내세워주는 자애로운 어버이의 품이 있어 최로사는 처녀작 《샘물터에서》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명가사들과 명시들을 창작할수 있게 되였으며 우리 나라 주체적문학예술발전에 크게 이바지할수 있었다.
인생은 끝이 있어도 영원한 사랑과 믿음으로 영생의 절정에 내세워주시는 절세위인들의 숭고한 품속에서 그는 오늘도 자기가 창작한 명곡들과 더불어 인민들의 가슴속에 길이 살아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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