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사냥군로인들
김 명 숙
나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에 의하여 조직령도된 항일무장투쟁의 간고한 시기를 회상할 때마다 로야령에서 있은 일을 어제일과도 같이 회상하게 된다.
1940년 봄 련락이 끊어진 부대를 찾기 위하여 우리는 액목현밀영을 떠났다. 우리 일행은 환자들과 무기수리소 성원들 그리고 재봉대원인 나, 이렇게 모두 8명이였으며 리봉수동무가 대오를 책임지고있었다. 이 가운데는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여 팔을 자른 리국진동무와 대사하전투에서 부상당한 김룡권동무, 왕청유격대시기부터 무기수리소에서 일해온 박두경로인들이 있었다. 이런 성원들로 구성된 우리 대오가 적의 감시망을 뚫고 부대를 찾아낸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더구나 1940년도라고 하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수십만의 대병력을 풀어가지고 만주일대에서 항일무장력량을 《완전소멸》한다고 날뛰던 때였다.
행군길에 오른 우리 일행의 앞길에는 헤아릴수 없는 난관들이 날과 달을 더할수록 중첩되여갔다. 그러나 목숨이 붙어있는 한 우리의 집이며 대오인 부대를 찾아내야만 하였다.
우리가 녕안현과 왕청현 경계선인 로야령에 들어선것은 그해 7월경이였다. 아름드리나무들이 울창하게 들어선 수림속에서 우리는 휴식을 하였다. 우리는 모두 기진맥진하여 풀우에 드러누웠다. 벌써 근 4개월간이나 우리는 쉬지 않고 행군을 계속하고있었다. 그러나 부대의 행방과 거처지는 아직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었다. 이 4개월동안 풀잎과 산천어 그리고 개구리들로써 간신히 끼니를 이어온 우리들은 서로 몰라보리만큼 수척해졌다. 수염속에 가리운 전우들의 홀쪽해진 얼굴을 바라보는 나의 가슴은 미여질듯 아팠다. 이제라도 만약 쌀만 생긴다면 손을 걷고 달려들어 그들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드릴수 있으련만… 기진맥진해 누워있으면서도 나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지칠대로 지친 나머지 손가락하나 까닥할 생각을 못하고 누워있는 자신을 생각할 때 서글프기도 했다. 눕기만 하면 곧 잠속으로 끌려들어갔고 잠들기만 하면 어지러운 꿈에 시달렸다.
그러므로 땅에 눕기보다 일어나서 움직이는 편이 나았다. 아니 그보다도 혁명을 위해선 살아야 했고 살자면 풀이라도 뜯어먹고 기운을 돋구어 행군을 계속하며 부상자들을 구원해야겠다는 충격에서 나는 어지러움을 무릅쓰고 자리에서 일어나 풀을 뜯군 했다.
이렇게 며칠을 지냈다.
식량공작을 떠난 동무들은 그때까지 돌아오지 않았었다.
(어떻게 할것인가?)
말을 주고받을 기운조차 없는 우리가 묵묵히 생각에 잠겨있을 때였다. 나무그루에 기대앉아있던 봉수동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참, 그 로인이 지금도 이 산속에 있는지. 있기만 한다면…》하고 무슨 말을 더하려다 그만두었다.
이때 국진동무가 몸을 일으키며 《원장동무, 나도 지금 그 로인을 생각하고있던중입니다.》하고는 지난날 이 로야령산속에서 여러차례 만난 일이 있던 중국로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것이였다.
이때 나도 그들의 이야기에 차차 귀를 기울이게 되였다.
중국로인에 대한 이야기의 사연인즉 다음과 같은것이였다.
1937년 봄에 봉수동무는 5사 직속병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이 로야령산속에서 부상자들을 치료하고있었다.
그때 로야령산속에는 중국로인 1명이 살고있었는데 그는 오래전부터 유격대에 대한 적극적인 원호자였고 지방인민들과의 긴밀한 련계밑에 우리 부상자들에게 많은 원호물자들도 가져다주군 하였다.
1939년 4월에 부상당한 팔을 치료하고있던 리국진동무도 그 로인에게서 극진한 간호를 받은 일이 있었다.
우리는 잠시후에 그 로인을 찾아가보기로 하였다.
진대나무가 가로세로 자빠지고 해묵은 나무잎사귀들이 첩첩히 쌓인 깊은 밀림속 가시덤불길을 뚫고 부상자들을 부축해간다는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였다.
상당히 오랜 시간을 천신만고한 끝에 우리들은 중국로인의 귀틀집이 있었다는 산밑에 이르렀다.
그런데 봉수동무가 앞장을 서서 산마루를 향해 한참이나 올라갔지만 귀틀집도 보이지 않고 사람들이 다닌 흔적도 없었다.
내곁에서 걷고있던 룡권동무는 그만 무거운 한숨을 쉬면서 중얼거렸다.
《그 로인은 이 산속에서 떠나버린게 분명해. 이제 우린 다 죽었어.》
그렇게 락천적인 룡권동무마저 이렇게 실망하는걸 보게된 나는 맥이 탁 풀렸다. 단 몇걸음도 더 내디딜수 없이 그 자리에 쓰러질것만 같았다. 그리고 눈에서는 저도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혁명의 승리를 못보고 이 산속에서 쓰러지다니…》
그러자 룡권동무가 갑자기 입을 손으로 가리우며 킥킥 웃어댔다.
그제야 나는 룡권동무가 거짓한숨을 지었다는것을 알아차렸다.
《아, 저 동무의 롱에 또 걸려들었었구나.》
나는 전우들을 보기가 부끄러웠다.
그리고 속은것이 분하였다.
그러면서도 어느때나 락천적이고 롱담을 즐기는 룡권동무를 다시 보니 나의 마음도 즐거워지고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지는것 같았다.
이때 우리앞에서 걸어가던 봉수동무가 뒤에다 대고 손짓을 하며 나무그루뒤에 숨는것이였다. 우리도 재빨리 몸을 감추었다. 나는 정신을 바싹 가다듬고 앞을 자세히 내다보았다. 나무가 줄지어 늘어선 사이에 귀틀집 한채가 보였다. 나는 울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귀틀집을 주시했다. 귀틀집 바깥벽에는 렵총 3자루가 걸려있고 그 밑에선 우리쪽으로 등을 돌려댄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무엇인가 손질하고있었다.
봉수동무는 권총을 빼들고 서서 잠시 귀틀집 동정을 살피더니 숲속에서 살금살금 걸어나갔다. 귀틀집과 봉수동무의 거리가 한 10m가량으로 좁혀졌을 때였다. 귀틀집마당에 앉아있던 한사람이 갑자기 얼굴을 뒤로 돌리더니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벽에 걸린 렵총을 벗기려고 서둘렀다. 수염이 텁수룩한 그 사람은 60살이 훨씬 넘었으리라고 생각되는 로인이였다.
로인이 일어나는 바람에 함께 있던 두사람도 일어나며 몸을 돌렸다. 그들역시 수염투성이의 로인들이였다.
먼저 일어선 로인의 손이 렵총에 닿을가 말가 할 때였다. 봉수동무가 소리쳤다.
《로인님, 놀라지 마시우. 3년전에 로인님한테 신세를 지고갔던 원장입니다.》하고 봉수동무는 권총을 도로 집어넣으면서 로인의 앞으로 달려갔다. 로인은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봉수동무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아니 이게 누구요!》하고 기쁨과 놀라움이 뒤섞인 목소리로 웨치면서 팔을 벌리고 봉수동무에게로 마주 달려와서 그를 덥석 그러안았다.
숲속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있던 나는 그만 목이 콱 메였다. 그리고 어떻게 달려나갔는지 모르게 진대나무를 넘어뛰면서 귀틀집마당에 서있는 다른 한 로인을 부둥켜안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물론 그 로인을 만나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일제를 반대하여 싸우는 한길에 한뜻으로 맺어진 조선인민의 아들딸들인 우리와 중국인민인 그 로인들과는 이미 혈육의 정이 통하고있었다.
더우기 그 깊은 산속에서 만난 기쁨을 무엇으로 표현할수 있으랴.
나는 참으로 나의 집, 나의 아버지품에 안긴듯하여 흐르는 눈물로 로인의 가슴을 적시였다.
그 로인도 나의 등을 쓸어주면서 목이 멘 소리로 말을 했다.
《수고들했수다. 왜놈들때문에 모두 이렇게 고생들이지.…》
《아닙니다. 우리는 젊은 사람들이니 일없습니다. 아버지들이 고생하시지요.》
《자, 어서 여기들 앉아서 몸을 쉬며 이야기합시다.》하고 로인은 나를 귀틀막앞으로 부축해주었다. 이때 로인들은 한참 노루가죽을 벗기고있던중에 우리가 나타났던것이였다.
귀틀집에는 로인셋이 있었을뿐이였다. 여기저기에 짐승들의 가죽이 걸려있는것을 둘러보면서 나는 마치 자기 집으로 돌아온것 같은 포근한 느낌을 가질수 있었다.
귀틀집마당에 둘러앉은 우리들은 오래간만에 강낭떡이나마 음식다운 음식을 먹게 되였다.
로인들이 권하는 강낭떡그릇을 바라본 나는 그 푸근한 냄새를 맡기만 해도 벌써 정신이 드는것 같았다.
그러나 떡을 집어들던 나는 그만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손에 쥔 떡을 무릎우에 떨어뜨렸다.
우리와 함께 행군을 하다가 희생된 나어린 허근동무의 모습이 확 떠올랐기때문이였다.
그리고 그가 남긴 마지막말이 자꾸만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나를 건너다보던 그 락천적인 룡권동무까지도 벌써 내 심정을 짐작해서 그런지 그 어글어글한 눈망울에는 어느덧 맑은것이 어렸다.
4개월전에 있은 일이였다. 액목현을 떠날 때에 우리 일행중에는 허근이라는 나어린 동무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행군도중 녕안현에서 적비행기습격을 당하여 왼쪽다리에 관통상을 입었었다. 우리는 출혈이 심한 그에게 응급처치를 한다음 서로 번갈아업어가며 행군을 계속하였다. 한곳에 안착시키고 치료를 하지 못한데다가 식량이 없어 영양보충을 시키지 못하였으므로 그의 상처는 점점 악화되여갔다.
그를 업고걷는 동무나 그를 부축하여주고 간호하는 동무나 모두 자기들의 고통은 생각할사이도 없이 어떻게 하면 허근동무를 무사히 데려갈것인가 하는 일념에만 골똘했다.
그런데 한편 허근동무는 자기 상처에서 오는 고통보다도 전우들에게 끼치는 괴로움을 더 근심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간청하다싶이 우리에게 말하는것이였다.
《아무래도 난 더 견딜것 같지 않소. 나를 그만 끌고가우. 이이상 더는 괴롭히지 마우. 부탁이요.》 그러나 우리는 혁명동지인 그를 도중에 두고올수는 없었다. 우리는 그에게 타일렀다. 그리고 업히려고 하지 않는것을 억지로 둘쳐업고 또다시 걸음을 다그쳤다. 한 산골짜기에 이르자 우리는 산천어를 잡아서 그에게 끓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입에 떠넣은 물고기국물조차 모조리 토해버렸다. 그리고 차츰 정신을 잃었다.
그를 껴안고 손발을 주물러주며 안타깝게 타드는 입술을 추겨주는 우리의 가슴은 메여지는듯 하였다.
우리는 끝내 그를 구원하지 못하고 이름모를 산기슭에 묻고 돌아섰던것이다. 나뿐만아니라 허근동무를 생각하게 된 전우들은 더는 떡을 집지 못하고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인들은 왜 모두들 그러는가고 걱정을 하였다.
귀틀집에 도착한지 사흘만에야 식량공작을 나갔던 두 동무가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는 그들이 돌아오게 될 지점에 사람을 파견하고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갖은 방법을 다하여 집단부락안의 인민들과 련계를 취하려고하였으나 적들의 감시가 어찌도 심하였던지 끝내 적들에게 발각당하게 된 그들은 식량공작을 단념하고 돌아왔던것이다.
우리의 처지는 딱하게 되였다. 벌써 사흘동안이나 중국로인들의 식량만 먹어왔는데 크게 믿었던 그 식량공작마저 인젠 희망이 없게 되였으니 그동안 우리가 먹은것은 무엇으로 갚아주며 또 앞으로 무엇을 가지고 행군을 계속하겠는가. 그러지 않아도 이 사흘동안 우리는 중국로인들에게 신세를 지고있는것을 더없이 미안하게 생각하고있던차였다.
중국로인들은 거의 침식을 잊고 우리를 도와주었다. 그들은 이 사흘동안에만도 보통때는 잡기 힘들다는 사슴을 2마리나 잡아들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슴고기를 넣은 밀가루뜨더국을 배부르게 먹을수 있었다. 사슴고기뜨더국, 이런 음식을 상상이나 해보았겠는가. 우리는 로인들의 지성어린 원호에 그저 감격할뿐이였다.
로인들은 우리가 일손을 도와주려고 하면 굳이 만류하는것이였다. 그러나 우리는 로인들이 사냥을 나간후면 물도 길어오고 땔나무도 마련해놓군 하였다. 아무리 말려도 우리가 듣지 않으니까 로인들은 나중엔 성까지 내는것이였다.
《왜놈들을 쳐부시는 임자네들이 우리를 찾아온것만 해도 고마운데 어떻게 일까지 해주길 바라겠소. 어서 마음놓고 푹 쉬우다. 원기를 돋구어야 또 싸움터로 나가지 않겠수.》
그럴수록 우리의 마음은 더욱 괴로왔다. 우리는 그들몰래 행군계획을 토의하였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로인들에게 떠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로인들은 《임자네들이 떠나는건 군대일이니 우리가 어찌 막겠소. 그러나 하루만 더 있어주우다. 임자네들을 어찌 빈손으로야 떠나보내겠수.》하고 간청하다싶이 말했다. 우리는 선뜻 대답을 할수가 없었다. 그러자 로인들은 《무얼 감추겠소. 털어놓고말해서 우리에겐 식량이 떨어졌수다. 임자네들이 이 산속에서 나가면 또 식량이 어렵게 될것이니 여기서 마련해가지구 떠나야 하지 않겠소. 하니 좀 기다려주우다. 허마허즈쪽에 내려가 식량을 구해오리다.》하고 재차 말하는것이였다. 그러나 허마허즈부락까지는 멀기도 하였거니와 그곳으로 간다는것은 퍽 위험한 일이였다. 그것은 적들이 풀어놓은 개(특무)들이 무시로 싸다니고있었기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로인들이 부락으로 내려가는것을 만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았다.
《참, 임자네들이 왜 이러우. 아무리 위험해도 식량이야 구해와야 하지 않겠소. 집이나 지켜주우다. 우리는 갔다오리다.》
우리는 끝끝내 로인들의 주장에 지고야말았다. 세 로인은 곧 허마허즈를 향해 산을 내려갔다.
우리는 로인들을 떠나보낸후 잠시도 마음을 놓을수가 없었다. 우리의 종적을 뒤따르던 적들이 산기슭 어디엔가 꼭 숨어있는것만 같았다. 생명의 은인들인 로인들에게 불상사가 생겨서는 안되였다. 우리는 귀틀집주변경계를 더욱 강화하였다.
그런데 로인들이 떠난지 얼마되지 않아서였다. 귀틀집밖에서 보초를 서고있던 동무가 수림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는것을 알려왔다. 오랜 유격투쟁경험에 의하여 보초는 수림속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마른 나무가지들을 밟으며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사람들의 발자국소리라는것을 직감적으로 알아냈던것이다.
봉수동무와 룡권동무가 권총과 단도를 가지고 귀틀집후면으로 돌아서 수림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발자국소리가 나는 수림후면으로 돌 계획이였다. 귀틀집에 남은 우리들은 무장을 갖추고 바깥동정을 살피고있었다.
얼마안되여 귀틀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수림속에서 한방의 총소리가 났다. 나는 막 뛰여가보고 싶었으나 서뿔리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자 꾹 참고 견디였다. 반시간도 못돼서 봉수동무와 룡권동무가 돌아왔다. 그들은 특무 두놈을 처단해버렸다고 말했다.
우리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사냥군으로 가장한 특무놈들은 그날 이 귀틀집부근에 이르러 마침내 우리를 발견하게 되자 내부동정을 더 살피려고 수림속에서 어물거리고있었던것이다. 귀틀집을 살피는데 정신이 팔린 놈들은 후면으로부터 달려든 봉수동무의 단도에 맞아 한놈이 쓰러졌다. 그러자 나머지놈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원래 총소리를 내지 않고 해치우려던 봉수동무와 룡권동무는 사태가 이렇게 되자 도망치는 놈을 총으로 쏴눕혔던것이다.
《우리도 우리거니와 중국로인들이 더 혼날번 했소.》
우리는 특무들을 없애버린것을 모두 기뻐하였다.
다음날 새벽녘이였다. 수수쌀을 한짐씩 짊어진 로인들이 구슬땀을 흘리면서 귀틀집으로 돌아왔다.
《늦어져서 안됐수다. 그놈들의 감시가 어찌도 심한지… 할수없이 밤길을 내내 걸었수다.》
우리는 무어라고 대답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소박하고 지성어린 로인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우리는 다만 머리가 수그러질뿐이였다.
우리는 곧 길을 떠날 차비를 하였다.
로인들은 그 수수쌀을 전부 우리에게 내놓았다.
그러나 우리는 절반만 가지고 그곳을 떠났다.
《당신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참으로 기운이 나고 젊어지는것 같은게 꼭 좋은 세상을 보리라는 확신이 더 생기오.》
우리가 거듭 인사를 드리니 그 로인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우리들의 손을 차마 놓기 서운해하는것이였다. 올 때와는 달리 우리는 원기왕성한 걸음으로 산을 내렸다. 로인들은 우리가 수림속에 가리워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귀틀집마당에 서있었다. 그들의 소박하고도 미더운 얼굴들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그후 우리는 얼마되지 않아서 마침내 동녕현 이도하에서 우리 부대를 만나게 되였던것이다.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중국인민들의 뜨거운 원호, 이는 항일무장투쟁의 전행정을 통하여 시종일관하였다.
14. 배움의 첫걸음
오 백 룡
우리 속담에 《낳은 정보다 길러준 정이 더 크다.》는 말이 있다. 이는 참으로 뜻깊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의 깊은 사랑과 우리 인민을 오늘과 같은 행복의 길로 이끌어주신 그 위업은 그 어떤 말이나 글로도 다 표현할수 없다.
지난날 항일무장투쟁초기부터 그이께서는 우리들에게 조선혁명에 관한 전략전술을 가르쳐주셨으며 혁명적세계관의 넓은 안목을 키워주셨다.
위대한 수령님을 내가 처음 뵈온것은 1933년 초였다. 그때 안도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직하고 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왕청에 있는 우리 중대와 소대, 분대에가지 내려오시여 대원들을 만나셨으며 먹고입는것, 총을 쏘고 글을 배우고 정치토론을 하는것 등 모든것을 일일이 보살펴주시고 유격대를 조직사상적으로 강화할데 대한 방침을 제시하셨다.
그중에서도 지금껏 생생히 기억하고있는것은 다음과 같은 말씀이다.
우리 유격대는 다만 적과 싸우기만 하는 군대인것이 아니라 인민의 리익과 념원을 실현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공산주의투사가 되여야 하며 인민들을 혁명승리에로 불러일으키는 조직선전자로, 교양자로 되여야 합니다.
…
그런데 아직 우리들가운데는 일상 쓰는 우리의 글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배우지 않고는 맑스-레닌주의과학의 높고 위대한 봉우리에 올라설수 없습니다. 유격대원들도 투쟁하면서 배워야 하며 우선 우리 글부터 빨리 배워야 합니다.
사실 그 당시 우리 중대에만 하여도 자기 이름조차 옮겨적을줄 모르는 동무가 적지 않았다. 나역시 나이는 19살이였으나 극빈한 가정에서 글한자 배우지 못한 처지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을 듣게 되니 그때까지 배우지 못한것이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그이의 말씀대로 꼭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굳게 다지게 되였다.
그러면서 나의 마음 한구석에는 근심이 생겼다.
(대학에 가도 잘 배우지 못한다는 맑스-레닌주의를 우리가 어떻게 배우나. 20살이 가깝도록 글을 배우지 못한 내가 … 항차 적들과 싸우다나면 어느 여가에 글을 배우며 또 시간이 있다고한들 바위와 나무밖에 없는 첩첩한 산속에서 어떻게 종이나 연필을 구하겠는가.)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렇게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글은 돈있는 사람만이 배우거나 학교에 가야만 배우는것이 아니라 우리도 잘 배울수 있다고 하시였다. 그리고 그날로 우리 대원들에게 소책자를 나누어주시고 학습장을 매여주셨다.
대부분 동무들이 거의 그러했지만 나는 이때 처음으로 이런 책과 학습장을 가지게 되였다. 그런데 나의 감격에 더 새로운것은 학습장에다가 《오백룡》이라고 큼직하게 친히 써주신 그이의 글씨였다.
그리고 학습장의 첫장을 펼치니 거기에는 《가갸》에서부터 《하햐》에 이르기까지의 우리 글자와 《1》에서 《10》까지의 수자가 깨끗한 글씨로 적혀있었다.
나는 학습장을 받아들자 위대한 수령님께서 적어주신 그 글씨를 익혀가며 《오백룡》이라는 내 이름자를 몇번 거듭외우고 써보면서 가슴을 들먹이였다.
신발 한컬레 사서 신지 못하고 돌각담과 가시덤불밭을 맨발로 걸어다니던 나에게 옷과 신발을 주셨고 원쑤를 갚으라고 무기를 주셨으며 혁명가가 되기 위해 배우라고 책과 학습장까지 매주셨을뿐만아니라 친히 이름까지 써주신 그 크나큰 사랑을 나는 잊을수 없다.
한두사람도 아닌 수많은 유격대원들에게 그이께서는 어떻게 처음부터 그렇게도 깊고 인자하게 대하여주셨던지 우리는 그날저녁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글을 읽고 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후 우리는 주머니를 하나씩 만들었다.
그리고 산아래에 있는 강변에 내려가서 주머니에 모래를 넣어다가 땅에 펴놓고 나무가지로 글을 썼다. 사실 그때에 주신 그 학습장 한권이 얼마나 소중한것인지 오늘과 같이 넉넉한 환경에서 살거나 또는 그때 간고한 생활을 체험하여보지 못한 사람은 짐작하기 어려울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한자두자 익히게 되였으며 차차 재미가 나서 때로는 혼자있을 때에도 모래우에 손가락글을 쓰군 하였다.
겨울이면 행군을 하다가도 휴식시간에 모여앉아 눈우에 막대기로 글을 썼고 사격련습을 할 때에도 《가갸》, 《거겨》하고 장탄과 퇴탄을 하는 식으로 우리는 글을 외웠다.
어두운 수림속으로 행군할 때에는 앞동무의 배낭뒤등에다 큼직한 글을 쓴 흰 수건이나 천쪼박을 매달아놓고 따라가면서 입속으로 구구표도 외웠다. 이렇게 걷는 행군은 또한 힘도 덜들었고 앞동무의 배낭을 주의해보며 따라가야 하므로 거리와 행군속도도 자연히 잘 보장되였으며 뒤떨어질 념려가 없어서 좋았다.
이렇게 배운 글은 또한 좀체로 잊혀지지 않았다. 글공부에 점점 재미를 붙이고 열중하게 되니 때로는 밥을 굶고 행군하면서도 배고픈 생각마저 잊어버릴 때가 많았다.
그러나 적에 대한 경각성은 항상 높여야 했다. 말하자면 행군을 하면서도 글을 배워야 했고 글을 배우면서도 항상 적정을 감시하고 전투준비를 하는 등으로 학습과 훈련, 학습과 전투를 철저히 병행시켜야 했다. 혹 어떤 동무들은 글을 외우기에 열중하던 나머지 지휘관의 구령도 못듣고 선자리에서 글을 외우는 동무도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에 대하여 매우 엄격하셨다.
글을 외우기에 열중하는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글을 외우는데만 열중하여 적들속에서 싸운다는것을 잠시라도 잊고 혼자생각에 잠기거나 행동에서 일치성을 가져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산 학습이 못됩니다.
이렇게 어려운 행군이나 전투가 진행되고 학습과 훈련이 끝난뒤에도 그이께서는 대원들의 위생과 다음날 전투준비에 사소한 결함이라도 있으면 엄격히 타이르시고 일일이 보살펴주셨다.
그렇기때문에 발이 부르트거나 몸에 상처가 생긴 동무들이 그것을 숨길수 없었다.
강행군이 진행되던 어느날 휴식시간이였다. 대원들을 돌아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기관총수인 천동무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시였다. 그리고 천동무가 묵묵히 앉아있는것을 보시자 《동무는 집생각을 하는군!…》하고 말씀하시였다.
《예.》
천동무는 몸을 바로잡으면서 솔직히 말씀올렸다.
《그래! 어떻게 집생각을 해보았소.》하고 물으시며 그이께서는 그와 마주앉으시였다.
《글을 배우고보니 고향집에 편지를 쓰구싶은 생각이 났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천동무의 말을 들으시고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바로 그러한 생각이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러한 생각은 많이 할수록 좋은것입니다. 어머니의 품에서 어린아이를 떼여낼수 없는것처럼 그 무엇으로도 우리를 조국의 품에서 떼여낼수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며 그것을 찾기 위해 싸우고있습니까. … 비록 오늘은 우리가 적고 또 무장도 미약하지만 인민들이 모두다 우리를 믿고 우리와 함께 싸우게 될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투쟁이 인민을 위한것이고 정당한것이기때문입니다.
쏘련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수행될 때에도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무기를 가지고 싸운것은 아닙니다. 레닌동지와 그의 몇몇 전우들은 전체 쏘련인민들을 꾸준히 그리고 완강하게 짜리제도의 타도와 사회주의혁명승리의 위업에로 불러일으켰던것입니다. 우리도 조국을 광복하고 그러한 새 사회를 건설하자면 일제를 쳐부셔야 하며 일제를 쳐부시려면 간고한 투쟁을 계속 완강하게 전개해야 합니다.
혁명을 쉬운것으로, 조급히 수행할수 있는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적과 싸우기도전에 실패하는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더욱더 잘 배우고 자신이 인민을 위한 충복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우리가 자기갈길을 정확히 찾을수 없으며 인민과 떨어져서는 간난신고를 뚫고 승리에 도달할수 없습니다.
이렇게 그이께서는 우리에게 투쟁의 첫걸음부터 하나하나 가르쳐주셨다.
내가 입대한지 두달쯤 되는 어느날이였다. 그이께서는 그날 우리들을 모아놓고 이제는 글을 읽고 쓰게 되였으니 정치학습을 해야 하며 배운것을 가지고 인민들속에 들어가 선전하고 그들을 교양할줄 알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런데 우리가 선전을 한다고하여 누가 가르쳐준 말이나 적어들고나가서 류창하게 내려엮는 《연설쟁이》가 되여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선전하고 교양하는것은 우리자신의 《박식》을 자랑하거나 뽐내자는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맑스-레닌주의의 진리를 인민들에게 알려주며 우리 혁명의 승리를 위해서 일제를 반대하여 함께 싸우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인민들이 당하는 고통을 진실로 뼈아파하고 그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혁명승리를 위한 모든 문제를 마치 자기 부모형제들과 의논하듯 진지하게 토론해야 합니다.
그후부터 우리 신입대원들도 구대원들이나 지휘관들처럼 그이의 가르치심대로 적들을 소탕한 해방지역이나 기타 부락들에서 인민들에게 해설선전하고 그들을 교양하는 사업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이역시 쉬운것은 아니였다.
때로는 적의 앞잡이들이 인민들속에 끼여들어서 방해를 할 때도 있었고 또 주민들속에는 일제침략자들의 후환이 무서워서 동요하는 일부 락후한 층들도 있었다.
그리고 우리 동무들가운데서도 준비가 부족하거나 대상을 깊이 연구하지 못하고 서두르다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러한 동무들을 꾸준히 가르치시고 고무하여주셨다.
모든 일이 생각처럼 쉬운것은 아닙니다. 첫번에 잘되면 더욱 좋지만 한두번 하여보고 성과가 적다하여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혁명가의 품성이 아닙니다. 잘못을 통해서는 응당히 교훈을 찾고 한걸음 나아가 더 배우고 노력해서 고쳐야 합니다. 의사가 병을 고치는데도 환자의 성격, 체질, 년령, 성별, 직업 등을 고려하고 병을 보며 약을 짓는 법인데 혁명을 한다는 우리들이 자체준비를 잘하지 않고 대상을 깊이 고려함이 없이 나선다면 어떻게 좋은 결과를 바랄수 있겠습니까?
그러자면 역시 많이 배우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달밝은 밤이였다. 부대에는 휴식명령이 내렸다. 열심히 총을 닦으며 닥쳐올 전투를 생각하는 동무도 있고 고향이야기를 하거나 혹은 군데군데 모여앉아서 혁명가요를 부르는 동무들도 있었다.
이러한 때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들이 휴식하고있는 장소에 오셔서 대원들을 돌아보시다가 맞은편 산비탈에 서서 열심히 연설련습을 하고있는 동무에게로 가셨다.
그는 바로 《말재주가 적어서 선전사업을 못하겠으니 다른 임무를 맡겨달라.》고 조르던 동무였다. 이날도 그는 전투후에 부락인민들앞에서 선전사업을 했으나 역시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동무의 연설련습이 끝나기를 기다리시다가 《참 좋은 일입니다. 무엇이든지 하려고만 하면 그앞에는 산도 물러앉는 법입니다.》라고 하시면서 그 동무가 련습한 연설내용을 하나하나 시정해주시였다. 그리고나서 그이께서는 《그래 지금 동무가 하는 연설을 듣고 군중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것 같습니까?》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그 동무는 잠시 의아해하다가 《저… 저는 지금 수림을 향하여 련습을 해보았습니다.》라고 대답을 올렸다.
《옳습니다. 그거야 내가 왜 모르겠습니까. 나는 지금 동무의 연설을 듣는 대상인 군중들이 무엇을 생각하는가 그걸 묻는것입니다.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는가, 그들의 표정은 어떠한가, 듣고 감동하며 호응하는가 안하는가, 그것을 모르면 안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동무를 일깨워주셨다.
앞에 있는 나무들을 보면서 인민들을 생각해봅시다. 그들이 지금 어떠한 처지에 있는가, 누구에게 어떻게 고역을 당하고 탄압을 받으며 고문과 학살을 당하는가, 이것을 잘 알기만 하면 그들의 얼굴뿐만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곧 동무의 마음으로 될것입니다. 그러면 동무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중에는 로인들도 있고 젊은이들도 있습니다.
로동자, 농민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직업을 가진 사람이 있고 중국에서 오래산 사람도 있으며 조선에서 방금 쫓겨온 사람도 있고 끌려온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 유격대가 어떠한 군대인지도 잘 모르는 사람도 있고 적들의 허위선전에 넘어가서 우리를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혹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누구를 반대하여 싸우며 어떻게 승리하였는가를 직접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는 적들에게서 로획한 식량과 피복도 그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무엇부터 알려주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우리는 프로레타리아헤게모니를 쟁취해야 한다!》는 식으로 그들이 짐작조차도 못할 먼앞날의 일이나 또는 알아듣지도 못할 이야기를 할것이 아니라 그들이 직접 보고 느끼고 감격하는 그것부터 자세히 알려주어야 합니다.
일제가 어째서 나쁘고 우리 인민은 누구때문에 헐벗고 굶주리며, 어떻게 해야 조국을 찾아 잘살수 있는가, 우리 유격대원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며 누구를 위해 피흘려 싸우는가, 지금은 일제놈들에게 속아서 우리를 잘못 인식하는 사람들이라도 그가 자기 잘못을 깨닫고 우리를 지지하면서 우리와 함께 싸우려고만 하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어떻게 환영하는가, 이러한것들부터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들이 하는 선전이고 교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민을 가르친다고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인민에게서 항상 배워야 합니다. 자기자신이 배운것을 인민앞에서 검열받는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실성과 긴장성을 가지고 일할수 있고 잘못된것이나 부족한것도 스스로 발견할수 있습니다. 그래야 또 그것을 고칠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는 인민의 실정을 잘 알아야 할뿐만아니라 그들이 하는 일을 무엇이나 다 잘할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옷과 밥을 주는 근로자들에 대한 고마움과 로동이 얼마나 고귀한것인가를 모르며 사회가 누구의 힘에 의하여 어떻게 발전되는가를 모르게 됩니다.
이러한 각오와 준비가 없이 선전을 한다면 자기도 모르는 말을 하게 되고 혁명을 해도 신심을 가질수 없으며 결국 인민에게서 멀리 떨어지게 될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하나 배워나갔고 나도 그속에서 성장해갔다.
그후 1934년 봄 어느날이였다.
우리는 지방인민들로부터 당홰부락(왕청현소재지 동남쪽 신선동)에 일본장교놈이 지휘하는 위만군 한개부대가 증강하여왔다는 정보를 받았다.
우리들은 이 사실을 즉시로 상부에 보고하는 한편 급속히 적을 소멸하여 이 지구를 해방시키고 무기를 로획할 준비를 서둘렀다.
이때 위대한 수령님께서 우리 중대에 나오셨다. 우리들의 전투계획을 자세히 들으신 그이께서는 지휘관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전투사기가 높은것도 좋고 정보를 더 확인하기 위하여 적들내부로 정찰원들을 파견하려는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크고 중요한것을 잊고있습니다.
인민들을 믿고 인민들에게 의거하면서 사업을 옳게 하기만 한다면 전투는 더 쉬울수 있고 승리는 더 크리라는것을 타산하지 못하고있습니다. 이것은 실패할수 있는 전제입니다. 지금은 봄이고 밭갈이때여서 인민들은 거의다 성밖에 나와 일을 하는데 성안에 들어가 정찰을 한다는것은 위험도 하거니와 인민들의 진정한 목소리를 들을수 없으니 정확한 정찰을 할수도 없습니다.
어떻게 몇명의 정찰원이 그안에서 오래 살았고 적들의 탄압과 박해를 받아온 수많은 인민들만큼 적정을 알아낼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선 밭갈이하는 농민들을 찾아가서 바쁜 일손도 도와주며 정찰도 하고 싸움할 때에는 인민들을 어떻게 조직동원하겠는가 하는것을 잘 타산해보아야 합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이러한 교시를 실행한 결과 우리는 적들속에 들어가서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고도 예상외에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우리는 그때 아편 몇덩이를 적들에게 던져줌으로써 놈들끼리 서로 싸움질을 하게 하고 또한 그날은 소위 일본천황의 생일날인《명절》이여서 술과 아편에 취해넘어진 틈을 리용하여 놈들을 몽땅 소멸하고 120여정의 무기와 수많은 군수물자를 로획할수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 이 무기를 가지고 1개중대를 더 무장시켜 안도현과 무송현일대에서 싸우고있는 부대들에 새로운 력량을 증강하여주셨다.
그이의 가르치심을 명심한 우리는 항상 이와 같이 배우고 인민을 위해 일하며 인민들에게 튼튼히 의거하여 싸운다면 언제나 승리할수 있다는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였다.
길고 고난에 찬 혁명의 길에서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로 밝아온 영광찬란한 오늘까지도 이 길을 앞서 걸어오신 그이에 대한 감명깊고 영광스러운 이야기는 잊혀지지 않으며 그때를 회상할 때마다 그이에 대한 흠모의 정은 더욱 깊어진다.
그이께서는 오늘도 우리 혁명의 진두에 서계신다. 그때나 오늘이나 우리들의 사업을 현지에 나가 일일이 몸소 보살피시고 또한 밤이 깊도록 잠을 잊으시며 우리 인민을 행복과 번영의 길로 이끌어주신다.
그리고 그이께서는 항상 인민에게 무한히 충실한 충복이 되며 조국을 사랑하고 건설에 몸바쳐 싸우는 광범한 대중들속에 들어가 그들을 존중하고 도와주며 항상 그들속에서 당정책을 선전하고 교양하여야 한다고 오늘도 가르쳐주시고 몸소 모범을 보이시며 우리를 고무해주신다.
나는 그이를 우러러 지난날을 돌이켜보고 오늘을 생각할 때 휘황하고 영광스러운 우리 조국의 앞날을 명확히 내다본다.
오늘도 전체 인민은 그이께서 가리키시는 길을 따라 천리마의 대진군을 계속하고있는 것이다.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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