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무장을 위하여
리봉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령도밑에 동만에서 항일유격대가 조직되기 시작한 첫시기인 1932년봄 나는 훈춘현 성구에서 공작하다가 금구에 갔다. 금구는 훈춘현 경신향지구의 지하당조직구였다. 당시 간도지방에서 조선농민들이 일제와 지주를 반대하여 일으킨 추수투쟁(1931년), 춘황투쟁(1932년)은 원쑤들에게 인민들의 단결된 힘을 보여주었으며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 투쟁들이 있은 이후 원쑤들의 탄압은 더욱 심하였다. 그리하여 이 지구에서도 많은 간부들과 선진적인 농민들이 체포학살되여 당조직과 군중단체조직들이 한때 파괴상태에 이르렀었다. 그러나 혁명성이 강한 군중적지반을 가지고있으므로 내가 이 지구에 간지 한달이 지난후에는 벌써 경신향 37개중 34개에서 당 및 군중단체조직이 거의다 복구되였다.
당시 그 지방에서 혁명투쟁의 중심지는 오두포였는데 저녁때면 아동단원들이 혁명가요를 공개적으로 부르면서 다닐 정도로 대중들의 혁명기세가 높았다.
이때 놈들은 자기들의 주구인 자위단을 내세우려고 했으나 우리 조직이 강한곳에서는 친일세력도 맥을 쓰지 못하였다.
경신향에서 각종 혁명조직들이 지부에 이르기까지 다 나왔을 때에 상급기관에서는 무장대오를 조직하기 위하여 무기를 자체로 획득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무장한 일제를 반대하여 싸우려면 오직 손에 무장을 들어야만 하였다. 이러한 지시는 가장 정당한것이였고 이 소식을 들은 우리는 대단히 기뻐했다.
사실 그 당시에는 매일같이 아무곳에서는 누가 경찰놈을 까부시고 총을 빼앗았다, 또 아무데서는 녀성들과 아동들이 총을 빼앗았다는 소문이 퍼지였다. 무기를 얻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도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를 더욱 흥분시켰다. 조직의 지시를 받고 나는 무장있는 장소를 비밀리에 조사하여 보고할것을 하부의 당지부들에 전달하였다.
각 지부들에서는 곧 통신이 들어왔다.
통신을 종합하여보니 무기는 경신향에만도 20여정이나 되였다.
《이 무기들을 다 로획하여야 하겠는데 어떻게 할것인가?》
우리들에게는 한자루의 무기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혁명성이 강한 청년들이 있었다.
나는 안길, 맹춘, 김두칠동무들과 비밀리에 회의를 가지였다. 회의에서는 원쑤들로부터 무기를 빼앗기 위한 임무를 어떻게 실천할것인가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이런 공작은 아직 누구도 해본 경험이 없었으나 모두들 그 20여정의 무기를 다 로획하자고 결의를 하였다.
우리들은 우선 세관놈의 《칠성자》(권총이름)부터 빼앗기 시작하는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지었다. 그러나 맨주먹만 가지고 총있는 놈에게 달려들수는 없었으므로 세관놈을 위협할수 있는 가짜무기라도 만들어가지고 가자는 의견이 나왔다. 나는 김두칠동무에게 나무로 권총 한자루, 장총 네자루를 만들 과업을 주었다. 그는 손재주가 있어서 그런것을 잘 만들수 있었기때문이다. 두칠동무는 밤을 새우면서 나무를 깎아 목총을 만들었는데 검댕이까지 칠하여놓으니 얼핏 보기에는 진짜총과 같았다.
《권총》은 내가 가지고 《장총》들은 다른 동무들이 각각 나누어가지였다.
* *
1932년 6월(음력)초에 우리들 5명은 목총을 가지고 벌등으로 향하였다. 그날은 어스름한 달밤이였다.
우리들은 첫 무장공작을 나가는것만큼 흥분되였다. 가짜총을 가지고 원쑤와 정면으로 맞다들어 무장을 빼앗는다는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였다. 그러나 우리는 목숨을 내걸고라도 무기를 기어코 빼앗을 각오였다. 그리하여 처음에 모두들 지나치게 긴장하였으나 안길동무는 매우 침착했다. 그날 저녁 무장획득에서 가장 중요한 책임은 안길동무가 맡았다. 그것은 안길동무가 패기있고 또 중국말도 잘하였기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무기를 꼭 빼앗고야말 결심을 굳게 하였다. 벌등에 도착하니 세관놈의 집은 모두 잠든 모양으로 불을 끄고 잠잠하였다.
안길동무가 뒤창문쪽에 서고 나는 부엌문입구에 섰다. 다른 동무들도 각가 창문이 있는곳에 다가섰다. 그때 함께 간것은 안길동무외에 그의 사촌동생 안상호동무, 맹춘동무, 김두칠동무들이였다.
우리들이 자기맡은 위치에서 대기하고있을 때 안길동무가 《꼼짝말라!》하고 벽력같이 소리쳤다.
세관놈은 불의의 습격에 놀라 일어났다. 어두운 방안에서 두리번거리던 그놈은 창문마다 들이민 《총》끝을 보고는 깜짝 놀라 사시나무 떨듯 하며 손을 쳐들었다.
당황한 그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무엇이 요구되오?》하고 겨우 말하였다. 안길동무는 《총만 내놓으면 목숨은 살려준다.》하고 엄하게 말하였다.
겁에 질린 세관놈은 엉거주춤하여 권총을 뒤문으로 내여밀었다. 조선으로 드나드는 인민들의 주머니를 강도처럼 털어먹으며 일제놈들에게 붙어서 사는 세관놈은 그 더러운 목숨이 끊어지는것이 무서워 벌벌 떨고있었다. 나는 《칠성자》를 목제《권총》과 바꿔쥐고 부엌으로 들어가며 그놈에게 불을 켜라고 하였다. 세관놈이 불을 켠 다음 로획한 권총을 내들고 《네놈에게 총이 더 있을터인데 있는대로 다 내놓으라.》고 하였다. 그놈의 가족들은 무릎을 꿇고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걸하였다.
그자는 총은 더 없지만 탄알은 좀 있다고 하면서 탄알 일곱알을 내놓았다.
이렇게 하여 첫 무장공작에서 성공하였다. 동무들은 대단히 기뻐하였다. 그후부터 우리들에게는 자신이 생기고 더욱 용기가 났다.
벌등세관이 습격당하였다는 소식이 일제놈들에게 알려지면 놈들은 가만히 있지 않을것이며 적들이 발광하면 우리는 계획한 무기를 전부 얻을수 없을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될수 있는대로 빨리 서둘러서 단시일내에 20여정의 무기를 완전히 탈취해내야 하였다.
다음날에는 사막봉 지주집을 습격하기로 하였다. 이 지주는 성이 왕가인데 본래는 토비노릇을 하던자로서 돈도 많고 이전에 백파놈들에게서 사들였던 무기를 몇자루 가지고있었다. 우리는 해떨어질 무렵에 쏘중국경선에 바싹 붙어서 사막봉으로 갔다. 지주집에 당도하니 날은 어두워졌고 달빛은 구름에 가리워져 어스름했다. 밖에 보초를 세우고 안길동무, 맹춘동무와 함께 나는 집에 들어가 주인을 찾았다.
《우리는 자위단에 있는 사람들이요, 어디 갔다 오는 길인데 저녁이나 좀 해줄수 없겠소?》하고 말하였다.
그러니 지주놈은 어서 들어오라고 하였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면서 그놈과 담판할 계획이였다. 지주놈은 우리가 정말 자위단인줄만 알고 밥상에다 술까지 받쳐서 들여왔다.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안길동무와 맹춘동무가 번갈아 통역을 하였다.
얼마간 있다가 나는 지주놈에게 《우리는 공산당원들이요. 당신네 집에 총이 있다는데 그 총을 내놓소.》하고 말하였다.
《만약 그 총을 우리에게 주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왜놈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것이요. 그렇게 되면 왜놈들은 그 총으로 중국사람들을 죽일것이니 내놓아야 하오. 우리는 그 총으로 일제놈들을 잡아야 하겠소.》
교활한 지주놈은 총이 없다고 하였다.
《우리는 총이 있다는것을 알고왔소.》하고 나는 말하였다.
그러나 지주놈은 끝내 없다고 고집하였다.
《만일 총이 나오면 가만두지 않겠소.》하고 위협하면서 우리는 지주놈을 도망치지 못하게 묶어놓았다.
고간에 들어가보니 총 세자루가 나타났는데 퉁포(구식보총의 일종)와 사냥총들이였다. 우리는 그 총을 들고나와서 《네놈은 소작인의 피땀을 빨아먹으며 일제에게 아부하는 인민의 원쑤다.》하고 그놈을 윽박아놓고 돌아왔다.
이렇게 이틀저녁 련달아 우리들이 총있는 놈들을 습격하게 되자 《공산당무장대들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지였다.
이 소문은 우리들 공작에 불리한 점도 있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유리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총을 가지고있는 놈들의 일부는 겁을 집어먹고 두말없이 총을 내주어야 무사하겠다고 생각하게까지 되였기때문이다. 그리하여 다음날 구사평 지주집에 갔을 때 우리가 일제놈들을 반대하여 싸우는 사람이란것을 잘 선전하였더니 그 지주는 《베르단》(한발씩 장탄하고 쏘는 구식보총)한정을 내여주었다. 나흘째 저녁에는 사두포에 있는 지주집으로 갔다.
이렇게 우리는 매일밤을 꼬박 새며 위험을 무릅쓰고 원쑤들의 총을 빼앗는 한편 조직을 통하여 계속 총있는곳을 알아내기에 애썼다. 사막봉에서 온 통신에 의하면 지주 왕가놈에게는 본래 총이 일곱정이 있었는데 아직도 좋은 총이 남아있다는것이였다.
우리는 다시 그놈에게로 떠나기로 하였다. 이번에는 완전히 자위단으로 가장하여 회색복장을 입고 자위단모자를 쓰고 곤봉을 꽁무니에 찼다.
당시 이 지방의 자위단놈들은 조직초기여서 무기를 가지고있지 못했다.
우리는 대낮에 사막봉 지주놈의 집으로 갔다.
《자위단》이 오는것을 보자 지주놈은 반갑게 맞이하여주었다.
우리는 자위단놈들처럼 호기등등하여 지주놈에게 문죄하는 투로 들이댔다.
《당신은 지난 초엿새날에 공산당이 와서 총을 가져갔다는것을 왜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소?》
그놈은 이러쿵저러쿵 긴 변명을 늘어놓았다.
《여보 령감! 당신집에 총이 아직 남아있다는데 우리에게 내놓소. 령감이 그 총을 가지고있으면 또 공산당이 와서 빼앗아갈것이 아니요?》하고 나는 을러멨다.
《령감이 총을 내놓지 않는걸 보니 공산당과 내통하여 그들에게 또 주자는 심보지?》하고 을러댔다.
그랬더니 지주놈은 벌벌 떨면서 고간밑지하실에 총이 있다고 고백하였다. 바로 전번에 총이 있던 그밑에 지하실이 있었는데 거기에 독일제싸창과 아식보총이 있었다.
* *
우리들은 이와같은 방법으로 그후 계속 무기를 빼앗았다. 그리하여 그해 여름 도합 25정의 총을 로획하여 경신향에서는 유격대 한개 중대를 조직하였는데 그때 중대장으로는 박진영동무가 임명되였다.
우리는 이렇듯 원쑤들의 무장을 빼앗아 자체로 무장하였다. 이리하여 인민의 지지를 받으며 그들과 한덩어리가 되여 싸운 결과 유격대는 창, 혹은 퉁포, 양포 등 초기의 락후한 무기로부터 점차 발전된 무기와 기관총까지 가지고 이르는곳마다에서 일제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싸웠던 것이다.
24. 길은 하나이다
주도일
1931년 가을, 내가 13살때였다. 하루는 우리 집으로 낯모를 청년 4명이 찾아왔다. 그들은 나의 형들과 무엇인가 토의하더니 그중 한 청년만 남고 나머지 청년들은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날부터 우리 집에 남은 청년은 고방에 들어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마반산골짜기에 외따로 있는 우리 집에는 그때까지만 하여도 찾아오는 사람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한적한 골짜기에서 소먹이 하나밖에 모르고 자라온 나는 호기심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청년이 들어있는 고방문앞에서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청년이 하고있는 일을 알고싶었다.
어느날 저녁이였다. 일찌기 소먹이를 끝마치고 돌아온 나는 우연히 고방문앞에서 청년과 마주쳤다. 나는 청년이 이끄는대로 고방으로 들어갔다. 석유냄새가 코를 찔렀다. 희미한 등잔불빛에 종이뭉테기들이 보였다. 청년은 삐라(그것이 삐라란것을 나는 후에야 알았다.)를 찍고있었던것이다.
《소먹이기가 싫지 않느냐?》
청년은 자기곁으로 나를 끌어앉히면서 이렇게 물었다. 나는 소먹이기가 싫다고 솔직히 말했다.
《넌 13살이나 되는데 학교도 못가니 참 안됐구나. 그러나 인제 학교에 갈 때가 올것이다.》학교에 대한 말이 나왔을 때 나는 우리 집에서 부치는 땅임자의 아들을 생각하게 되였다.
언젠가 그놈의 집으로 소를 끌고갔을 때 나와 동갑인 그애는 《학교도 못가는 바보야. 소달구지나 끌고다니는 바보야.》하고 나를 놀려주는것이였다. 만약 그때 지주가 곁에 없었던들 나는 그 애의 목을 비틀어놓았을것이다. 분통이 가슴에 치밀어오르면서도 나는 좋은 옷을 입고 가방을 메고 학교에 다니는 그 애를 얼마나 부러워하였던가!
그러던 내가 학교로 갈수 있다니… 나는 기쁨에 못이겨 청년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아저씨, 언제면 학교로 갈수 있어요?》
《음 그건말이다. 일제놈들과 너의 집 땅임자와 같은 지주놈들을 때려부시면 된다. 그놈들은 우리를 못살게구는 나쁜 놈들이다.》
나는 일제놈들과 지주놈들때문에 소먹이는 일만 하고있으며 학교도 못가고있다는것을 알았을 때 불같은 적개심이 가슴속에 치밀어올랐다.
이때로부터 나는 희미하게나마 원쑤란 무엇인가를 알게 되였다.
그후 나는 청년과 자주 만났다. 나는 청년의 말을 한마디도 놓칠세라 명심해들었다. 그 말은 어린 나의 가슴에 꺼질줄 모르는 불길을 지펴놓았다.
밤이면 우리 집에는 혁명적인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회의도 하고 삐라도 날라갔다. 삐라는 아래부락 지주네집 대문짝에도 나붙었고 일제놈병영 담벽에도 붙었다. 나는 청년들속에 섞여 삐라도 붙였고 비밀련락도 다녔다.
나는 그것이 원쑤를 쳐부시는 길이라는것을 생각했을 때 무한히 기뻤고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청년이 온지 꼭 한해가 된 1932년 가을이였다.
하루는 지주들이 살고있는 아래부락에서 한 청년이 우리 집으로 뛰여올라왔다. 그는 형님들을 만나자 다급히 말했다.
《곧 피하우. 앞잡이들이 우리를 일러바쳤소. 적들이 여기로 올라올것이요.》
고방에 있던 청년과 형님들은 등사기를 안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집에는 나와 어머니가 남았을뿐이였다.
그날저녁 어둠이 마반산골짜기를 뒤덮기 시작할무렵 일제장교놈을 선두로 한 10여명의 위만군놈들이 우리 집으로 달려들었다. 놈들은 우리들을 보자 다짜고짜로 형들이 간곳을 대라고 을러멨다. 그러나 형들이 간곳은 모르기도 하거니와 설마 안다고 하여도 누가 대주겠는가!
우리는 모른다고 내뻗쳤다. 말로써는 굴복시킬수 없다는것을 안 놈들은 드디여 매를 치기 시작했다. 나는 더 참지 못하여 어머니를 때리려고 서두르는 적의 팔에 매달렸다. 그놈은 내 허리를 발로 찼다. 그래도 나는 그놈의 팔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모진 매도 끝끝내 우리의 입을 열지는 못하였다. 적들은 가장집물을 짓부시면서 집안을 온통 뒤집어놓았다. 그러나 단서가 나올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허탕을 친 놈들은 초조하게 집안팎을 돌아치더니 마당에 쌓인 나무단을 집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불을 달아놓았다. 초가집은 삽시간에 무서운 화염속에 싸여버렸다. 룡마루가 떨어지고 지붕이 타내려앉는것을 보고야 놈들은 너털웃음을 치면서 물러갔다.
우리는 알몸뚱이만 남게 되였다. 어머니는 허리에 상처까지 입었다.
원쑤는 내가 생각해오던것보다 비할바없이 악랄하였다. 그놈들은 인간의 탈을 쓴 야수였다.
분통이 치밀어오른 나는 미친 사람처럼 맴돌아쳤다. 그놈들을 몽땅 잡아치울수 있는 위력한 힘을 가지지 못한것이 여간만 안타깝지 않았다.
나는 타버린 집터에 림시초막을 짓고 어머니를 간호했다. 그리고 채 거두어들이지 못한 곡식들을 날라들였다. 그러면서 형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 그들이 돌아오면 원쑤를 쳐부실 좋은 방도가 나오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며칠을 기다려도 형들도 청년들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는 뜻하지 않은 소식에 접하였다. 둘째형과 우리집 고방에 있던 청년이 적들에게 체포되여 총살을 당하였고 맏형과 셋째형은 유격근거지로 들어갔다는것이였다. 집을 불살랐고 가장집물을 태워버린 원쑤들은 사랑하는 나의 형과 그 청년의 목숨마저 빼앗아갔다. 나는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에서 소리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자 그만 참지 못하여 울음을 터뜨리였다.
그러자 어머니는 내 어깨를 쓰다듬어주면서 말하는것이였다.
《도일아, 울지 말아. 인젠 우리도 네 형들을 따라가야 하겠다. 이 골안에서 더는 살수 없게 됐다.》
어머니는 병석에서 일어났다. 나도 눈물을 씻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더 무엇을 기다리겠는가. 형들도 오지 않고 집도 없어진 이 마반산골짜기에서 우리는 떠나야 했다. 비록 어머니는 몸에 상처를 입었고 나는 14살의 어린 몸이지만 우리의 생명재산을 마음대로 빼앗아가는 원쑤들을 어찌 보고만 있겠는가!
나는 그길로 어머니와 함께 연길현 왕우구유격구로 들어갔다. 유격근거지에서의 간고하고 긴장된 생활은 나의 사상정치적각성을 비상히 촉진시켜주었다. 나는 아동단에 입단하여 부지런히 배웠고 부지런히 일하였다. 나의 소원은 단 하나 어서 커서 적을 무찌르는 유격대원이 되는 그것이였다.
그러나 1933년 겨울, 나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도전에 적들은 또다시 왕우구유격구로 쳐들어왔다. 우리는 부득불 사방대의 밀림속으로 옮겨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추위와 기아 그리고 병마와 싸우면서 우리 모자는 이해 겨울을 밀림속 나무밑에서 지냈다. 어떠한 모진 고난도 원쑤격멸의 일념에 불타오른 우리 두 모자의 투지를 꺾을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후 처창즈에서 병마와 싸우던 어머니는 《쌀…쌀밥 한숟가락만 먹어봤으면 병이 낫겠다.》고 되뇌이면서 앓더니 더 지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왜놈들과 싸우던 맏형과 셋째형마저 전사하였던것이다.
간악한 원쑤들은 나에게서 어머니도 형들도 모두 빼앗아갔다.
그러나 나는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칼이면 칼, 몽둥이면 몽둥이, 그 어느것이나 마구 잡아쥐고 찌르고 때리고 또 찔러도 속시원치 않을 그 악독한 원쑤를 눈앞에 두고 어찌 눈물을 흘릴수 있겠는가!
내 나이는 비록 어리였으나 가슴의 원한은 너무도 컸다.
활화산처럼 솟구쳐오르는 적개심을 안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내눈앞에는 내가 만나본 항일유격대의 긴 행군대렬이 떠올랐다. 그리고 대렬선두에서 나아가시는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의 거룩한 모습이 보였다. 인자하시고 너그럽고 영명하신 그 모습 ㅡ 일찌기 그이에 대한 이야기만 들어도 승리의 신심으로 가슴이 부풀어오르던 내가 아니였던가!
아! 그이. 조선인민의 념원과 투지를 한몸에 지니시고 민족해방의 성스러운 무장투쟁을 령도하시는 김일성장군님께서 가까이 계신다.
(더는 기다릴수 없다. 원쑤를 치러나가자. 하루속히 유격대로 들어가자. 그것은 나의 어머니와 형들의 원쑤를 갚는 길일뿐만아니라 착취받고 압박받는 모든 인민들의 원한을 풀어주는 길이다.)
나는 그길로 김일성장군님의 항일유격대에 입대할것을 결심하였다.
이리하여 나와 함께 20여명의 고아들이 유격대에 입대할것을 결의해나섰다. 나어린 소년소녀들의 대렬은 유격대를 찾아떠났다.
눈내린 산길은 험하였고 식량은 떨어졌다. 적들은 도처에서 우리를 위협했다. 우리의 길은 처음부터 간고했다. 그러나 어떠한 모진 곤난도 우리의 투지를 꺾을수는 없었다. 마침내 우리는 20여일의 어려운 고생끝에 한시도 잊을수 없던 유격대를 만났다.
나어린 우리들의 굳은 결의에 감동된 유격대원들은 저마다 우리를 붙안고 놓지 않았다. 나는 미더운 그들의 가슴에 안겼을 때 지나온 고통이 일시에 날아나버리는것 같았다.
《여기가 나의 집이다. 인제 나도 무장을 들고 원쑤와 싸울수 있게 됐다!》나는 솟구쳐오르는 흥분과 기쁨을 가라앉힐수가 없었다. 나는 이 위력한 대오속에서 목숨바쳐 싸우리라고 굳게 결의했다. 이렇게 하여 나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령도하시는 영광스러운 항일유격대의 한 성원으로 되였던것이다.
나는 그후 이 영광스러운 대오에서 원쑤에게 섬멸적타격을 줄 때마다 내가 택한 그 길이 얼마나 정당하였는가를 재삼 느끼군 하였다.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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