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빨치산참가자들의 회상기1』 마지막 회분 25, 26, 27장을 함께 연재합니다. 다음은 『항일빨치산참가자들의 회상기2』를 연재합니다.
25. 소년유격대원들
림춘추
내가 독립려단과 함께 북만을 떠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계시는 압록강연안의 림강현사령부에 도착한것은 1937년 8월이였다.
그때 어느 산봉우리우에서 사령관동지를 다시 만나뵈옵던 날의 감격과 그 시기에 바로 그이의 보살핌속에서 배우며 자라던 소년중대 대원들의 용감한 활동모습을 나는 영원히 잊을수 없다.(소년중대는 그후 해산되여 일부는 사령부의 전령병으로 남았고 대부분은 각기 본부대에 배치되여 활동하였다.) 당시 수십명의 성원을 이루고있던 그들은 모두가 15살안팎의 소년들이였다.
그들의 대부분은 자기의 부모를 원쑤들에게 잃은 혁명렬사의 유자녀들이였으며 그중에는 불타는 애국심을 안고 사랑하는 부모형제의 곁을 떠나 혁명대렬을 찾아온 소년들도 있었다.
그들은 벌써 7~8살때부터 자기들의 부모와 동네의 애국적인 선배들로부터 혁명적영향을 받아왔으며 파쑈일제에 의하여 자기의 부모형제들과 동네어른들이 억울하게 붙잡혀 학살되는것을 보았었다. 고향을 떠나 싸움의 길에 나선 그들을 김일성동지께서는 친부모의 마음으로 사랑하시였다.
혁명의 품속에서 자란 어린 애국자들은 사령관동지의 극진한 사랑과 지도밑에 혁명사상으로 교양되였으며 민족적긍지감과 원쑤들에 대한 불타는 증오심으로 교양되고 단련되였다.
그들은 비록 어린 소년들이였으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원쑤를 미워하는 마음은 불처럼 뜨거웠고 싸움에서도 용감하고 대담하였다. 그들은 당당한 혁명투사로 성장되여갔다. 그들은 로대원들에 못지 않게 신중하였으며 용감하였다.
1938년 여름에 있은 일이다.
화전현지방에서 어린 대원들인 전문섭, 리을설, 리두익 등 세 동무들이 련락을 가다가 매복한 적들의 불의의 습격을 당하게 되였다.
놈들이 발사하는 탄환은 머리우를 앵앵거리며 지나갔다. 탄환이 날아오는 정형을 보아 적의 수자는 그리 많지 않음을 알수 있었다.
전문섭동무는 돌연히 소리높이 웨쳤다.
《제1중대는 좌측으로, 제2중대는 우측으로 돌격!》
이 구령과 동시에 3명의 소년전투원들은 일제히 목갑총(모젤)으로 적을 향하여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그러자 놈들의 총소리는 더 들려오지 않았다. 전문섭동무의 웨치는 소리를 듣고는 우리 부대가 대부대이며 그 대부대의 척후인줄로 생각한 수십명의 적들은 황급히 도망치고말았다.
소년유격대원들이 이와 같이 용감하게 싸운 례들은 적지 않았다. 그들은 또한 고도의 혁명적경각성을 높이도록 교양받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어버이이시고 스승이시며 사령관이신 김일성동지의 신변을 보위하기 위하여 자기들의 희생적정신과 애국적열정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던것이다.
사령부를 보위하는 소년유격대원들의 고도의 혁명적경각성과 자기들이 맡은 임무에 대한 무한한 충실성은 우리 혁명에 미칠수 있었던 뜻하지 않은 손실을 미연에 방지함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적들은 항상 우리 혁명의 사령부를 해치려고 온갖 간악한 방법을 다 썼다.
1938년 겨울 어느날, 세명의 농민이 소금 서말과 성냥 20여갑을 가지고 우리의 사령부가 있는곳으로 찾아온 일이 있었다.
그들은 말하기를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주야분투하시는 당신들이 제일 곤난해하는 소금과 성냥을 가져왔으니 비록 적은 물건이나마 받아달라는것이였다. 사실 우리들에게는 소금과 성냥이 대단히 그리웠다. 일제놈들은 성냥이 우리들 손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인민들이 매호당 한갑씩밖에는 더 사지 못하도록 통제하였던것이다. 또한 소금은 우리들의 가장 귀중한 반찬이였으나 일제놈들의 가혹한 봉쇄로 말미암아 제때에 해결할수 없었다. 이리하여 소금, 성냥 같은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금보다도 더 귀중한 물품의 하나로 되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물품을 가져온 사람들을 무경각하게 대할수는 없었다. 이날 경각성높은 소년유격대원들은 소금과 성냥을 가지고온 사람들을 잘 살펴보았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에 의하여 교양되고 육성된 그들은 농민들이 한꺼번에 수십갑의 성냥과 서말이나 되는 소금을 가져왔다는것이 첫째 수상한 일로 생각되였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태도라든가 행동이 진심으로 찾아온 애국적농민들 같지 않았다.
어린 대원들은 이상과 같은 자기들의 의견을 사령관동지께 일일이 보고하였다. 그이께서는 모든것을 예측하시고 어린 대원들에게 처리방법을 자세히 가르쳐주시였다. 그후 어린 대원들은 그이의 가르침대로 그들이 가지고온 소금을 먼저 그들이 먹게 하였다. 그들은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먹었다.
아니나다를가 몇시간후에 소금을 먹은 그들은 모진 배앓이와 함께 설사를 하였다. 신음하는 그들을 구급료법으로서 강심제주사와 설하게 하는 약을 써서 생명을 구원한 다음 조사하여보니 농민으로 가장한 한놈은 일제의 주구였으며 두명은 강제와 위협에 못이기여 끌려온자들이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잘 깨우쳐 돌려보내고 악질주구는 처단하였다.
이와 같이 소년혁명가들은 조선소년들의 총명성과 용감성 그리고 혁명적경각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한편 소년으로서의 천진란만한 장난도 가끔 하였다.
소년중대에 있다가 경위중대에 편입된 리두익동무는 1938년 11월 어느날, 산봉우리우에 올라가서 보초를 서고있었다.
마침 이때에 보초선앞으로 큰 노루 한마리가 껑충껑충 뛰여오고있었다.
그는 요즘 고기도 몹시 바른데 하여튼 잡아서 사령관동지께 대접도 하고 그다음 자기들도 좀 먹는것이 어느모로 보든지 좋은것으로 생각하고 쥐였던 기병총구를 노루의 이마에 겨누면서 총탁을 어깨에 든든히 붙이였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 다음 방아쇠를 당기였다.
《땅!》소리와 함께 노루는 명중되여 그 자리에 늘어졌다. 그런데 노루를 잡아놓고보니 뒤일이 사실 걱정이였다.
한편 지휘부에서는 보초선에서 들려오는 총소리에 적이 온줄로만 알고 장막들을 한쪽으로 거두고있었으며 녀성동무들은 강냉이를 삶고있던 대야들을 재빨리 거두어 짐을 꾸리고있었다.
소대장 강위룡동무가 보초선으로 뛰여왔다. 그는 그냥 보초선에서 요지부동으로 서있었다.
《웬일이요. 오발을 하였는가?》
리두익동무는 한참동안 머뭇거리고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저걸 잡았습니다.》
소대장은 옆에 쓰러져있는 송아지만큼이나 큰 노루를 보고 그만 어이없어서 서있었다. 노루는 사령부로 운반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사실의 전말을 들으시고나서 얼굴에 웃음을 담으시였다. 그리고 리두익동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며 말씀하시였다.
동무가 노루를 잡아서 여러 동지들과 함께 먹게 된것은 나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동무는 군사규률을 위반하였다. 그러므로 노루는 동무가 잡았으니 노루가죽은 동무에게 주겠으나 규률을 지키지 않았으니 처벌을 받아야 되겠다.
그는 각 중대를 돌아다니면서 군사규률을 위반하였다는 자기비판을 하였고 다시는 규률을 위반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다지였다.
계속되는 원쑤와의 전투생활을 통하여 이 천진란만한 소년유격대원들은 불요불굴의 투사로 자라났다.
승리만을 믿었고 비관과 실망을 모르는 그들은 오직 혁명적락관주의자로 단련되여갔다.
나는 이 한편의 글로써 조선혁명에 크게 이바지한 소년유격대원들의 영웅적인 업적을 다 이야기할수는 없다.
단지 그때의 소년유격대원들을 회상하면서 그들이 로대원들 못지 않게 조국광복을 위한 투쟁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는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26. 연길현 남류수하자전투
조도언
1933년 11월초에 연길유격대지휘부는 지방공작원으로부터 긴요한 정보를 접수하였다.
정보에 의하면 산간벽지에 자리잡은 남류수하자 산판로동자들이 벌써 두달씩이나 임금을 받지 못하고있다는것이였다. 임금을 제대로 받는다 하여도 살아나가기가 어려웠는데 그것마저 받지 못한 로동자들의 생활은 극도로 궁지에 빠져있었다. 로동자들은 산판으로 오르내릴 기력조차 없어졌다. 그리하여 그들은 일을 그만 두고 산판경영주에게 임금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보안경찰대》놈들의 등을 믿는 경영주놈은 임금을 지불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로동자들은 마침내 경영주놈을 항거하여 일어났다.
이렇게 되자 20명의 《보안경찰대》놈들은 다 허물어져가는 귀틀집으로 싸다니면서 총칼로 로동자들을 위협하여 산판으로 내몰았다.
그놈들은 무기 20정을 가지고있었다.
이 정보는 우리 유격대지휘부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우선 인간백정들인 《보안경찰대》놈들을 소멸함으로써 그곳 산판로동자들의 어려운 처지를 해결해주어야 했고 뼈에 사무친 그들의 원한을 풀어주어야 하였다. 그것은 우리 유격대의 숭고한 임무였다.
그리고 당시의 형편에서 20정이라는 적의 좋은 무기를 빼앗는다는것도 중요한 문제였다.
1932~1933년 당시에 있어서 우리 유격대가 사용하던 무기는 대체로 토퉁이나 양포와 같은 구식무기였으며 그 수량도 매우 적었다. 그런데다가 유격대의 대오는 나날이 확대되여갔다. 이러한 형편에서 우리 유격대앞에는 더 많은 무기, 더 좋은 무기를 갖추어야 할 과업이 나서고있었던것이다.
그리하여 연길유격대지휘부는 남류수하자습격전투를 계획하였다.
지휘부는 습격전투를 계획함에 있어서 종전과는 달리 새로운 방법을 택하게 되였다. 종전에는 주로 적은 력량을 동원하여 소수의 적을 상대로 싸웠다면 이번에는 우리의 력량이 어느정도 강화된 조건에서 좀더 많은 적을 대담하게 습격할데 대한 전투계획을 수립하였다.
11월 4일 저녁무렵, 최현동지를 습격대장으로 하는 40명의 아군습격대는 유격근거지인 연길현 삼도만을 출발하여 남류수하자로 향했다.
우리 습격대가 삼도만-명월구간 대도로를 따라 행군하다가 소명월구로 통하는 곁골에 들어선것은 날이 저물어서였다.
우리는 어둠을 뚫고 험한 골짜기들을 행군했다.
우리가 목적지인 남류수하자부락어귀에 당도했을 때는 벌써 밤이 깊었었다.
습격대는 부락 한옆에 자리잡은 《보안경찰대》병실북쪽으로 돌아가서 나지막한 언덕배기주변에 머물렀다. 우리는 여기서 적병실의 정황을 살폈다.
적병실은 서남간으로 앉은 집이였다.
그리고 병실두리에는 전호가 굴설되여있었다.
얼마후 나는 최현동지로부터 전투임무를 받았다. 습격대가 행동을 개시하기전에 적병실안에 연길폭탄을 던지라는것이였다. 그것은 우선 적을 당황망조하게 한다음 아군주력이 일제사격을 가하면서 적의 전호를 먼저 점령하자는 계획이였다.
이것은 야간습격은 불의에 집행하여야 하며 행동에서 어떠한 복잡성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유격전술의 원칙에 립각한것이였다. 만일 이렇게 하지 않고 아군주력이 보병총사격부터 한다면 적들은 집벽이나 병실주변의 전호에 의지하여 대항할 우려가 있었던것이다. 그러면 전투는 복잡해질것이고 우리에게 불리할것이였다.
나는 작탄 2개를 몸에 지니고 언덕배기를 기여내려 적병실을 향해 포복전진하였다. 한참 기여가니 나의 눈앞에는 병실 중창문이 희미하게 바라보였다. 그것을 쏘아보는 나의 가슴은 적개심에 불탔다.
(저속에 원쑤들이 들어있다. 저놈들을 쳐부셔야 한다. 원한많은 인민의 이름으로서!)
나는 폭탄심지에 불을 달자 중창문을 향해 힘껏 던졌다. 창문이 번쩍 하더니 요란한 폭음이 일어났다. 뒤이어 부락을 뒤엎는듯한 일제사격총성이 터지였다. 언덕배기에 매복하고있던 아군주력의 집중사격이 개시된것이다. 작탄의 첫폭음은 아군주력의 일제사격신호이기도 하였다.
나는 폭탄을 던지자마자 병실주위에 굴설된 전호속으로 뛰여들었다. 아군의 총탄은 나의 머리우를 지나서 병실로 집중되였다. 나는 전호속에 엎디여 《됐구나!》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아군주력의 위력한 사격은 계속되였다. 그리고 언덕배기쪽에서 병실을 향하여 돌격해오는 우리 동무들의 발자국소리가 들리였다.
아닌밤중에 불벼락을 맞은 저주로운 《보안경찰대》놈들은 황급히 총을 쥐고 밖으로 뛰쳐나오며 불질을 하다가 쓰러지군 하였다. 적병실은 삽시에 수라장이 되고말았다.
우리 동무들은 모두 적병실주변의 전호를 차지하였다. 나는 전호를 따라 적병실남쪽으로 갔다. 거기서 나는 두번째의 폭탄을 아우성치는 놈들 복판에 던지였다. 굉장한 폭음과 함께 놈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섬멸전의 순간이 흘렀다.
이때 전호근처로 한놈이 비실비실 게걸음질쳐나오다가 배를 그러안고 나자빠졌다. 폭탄파편에 복부를 얻어맞은 모양이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람 같지 않은 검은것이 나있는곳으로 다가오는것이였다. 나는 가슴이 서늘하였다. 아무리 자세히 보아도 사람 같지 않은 둥그스레한 검은것이였다.
이때 금속깨지는 새된 소리가 나더니 그 검은것이 땅에 푹 고꾸라지였다. 알고본즉 급해맞은 《보안경찰대》한놈이 병실부엌에 걸려있던 군대용쇠가마를 머리에 뒤집어쓰고나오다가 불벼락을 맞은것이였다.
나는 전호속에서 구호를 웨쳤다.
《요창 뿌요밍!》(총만 내놓으면 목숨을 살려준다는 뜻)
그러자 놈들은 총 쥔 손을 머리우로 꼿꼿이 추켜올리며 목숨만 살려달라고 급한 소리를 질렀다.
이때 적병실주변의 전호를 차지했던 우리 습격대가 병실에 뛰여들었다. 우리는 적들의 무기를 전부 해제하였다.
보병총이 18정, 권총이 2정 모두 20정이였고 상당한 량의 탄알도 있었다.
사살된 적은 6명이였고 나머지 놈들은 거의 부상을 당했다.
우리는 살아남은 적들에게 일본놈들의 개가 되여 로동자들에게 행패를 부리지 말고 고향에 돌아가서 농사를 지으라고 선전하였다.
우리가 남류수하자에서 떠나려고 할 때 어둠속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이곳 산판로동자들이였다. 헐벗고 굶주리던 로동자들은 우리를 알아보자 막 부둥켜안고 환성을 올렸다.
그들은 왜놈들의 지옥살이에서 영원히 벗어나기라도 한듯이 기뻐 어쩔줄을 몰라하였다. 그 얼굴들을 바라보는 우리 유격대원들은 저 로동자들과 전체 조선인민의 해방을 위하여 끝까지 싸우리라는 결의를 더욱 굳게 다지였던것이다.
귀로에 들어선 우리 유격대가 산속을 한창 행군해가는데 멀리서 새벽닭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남류수하자에서의 승리는 실로 그곳 산판로동자들뿐만아니라 린근부락 인민들에게까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였다. 인민들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령도하시는 우리 유격대를 깊이 신뢰하게 되였고 더욱 적극적으로 원호하여주었다.
이 전투가 있은 뒤로부터 남류수하자의 《보안경찰대》놈들은 함부로 산판로동자들에게 행패를 부리지 못하게 되였다. 그리고 그놈들에게서 탈취한 20정의 좋은 무기는 우리 유격대를 강화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으로 되었다.
27. 생명을 걸고
림춘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령도하신 항일유격대가 일정한 무장력량으로 장성발전되기까지에는 허다한 난관들을 극복해야 하였다.
그중에서도 무장획득사업은 가장 큰 난관이였다.
이것은 초기 왕청현에서의 무장획득투쟁을 보아도 잘 알수 있는 사실이다.
1932년 8월에 이르러 왕청현유격대는 보병총 60여정과 약간의 권총을 소유한 70여명의 무장대오로 장성되였다. 보병총 60여정, 물론 이것은 많지 못한 무장이다. 그러나 보병총 한정이 오늘의 기관총 몇정 맞잡이로 귀중하였던 당시에 있어서 이것은 얼마나 위력한것이였던가! 실로 이 무기 한정은 수십수백정의 새로운 무기를 낳았고 이렇게 새끼를 친 무기들은 침략에 날뛰는 왜놈들의 머리우에 복수의 불벼락을 들씌웠던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한정의 무기를 위하여 모든 힘과 지혜와 지어는 생명까지 바쳤다.
보병총 60여정을 얻기전까지 우리가 가지고있은 무기란 도끼와 낫, 창과 곤봉 등과 같은 원시적인 무기뿐이였다. 이것을 가지고는 신식무기로 장비된 왜놈들을 마음대로 섬멸해치울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무장획득사업을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로 제기하시였다.
이 중대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곳곳에서 피어린 투쟁이 벌어졌다.
1932년 1월 15일, 김철동지가 책임진 10여명의 동지들은 왕청현 대감자 《공안국》을 기습하여 토퉁 7정을 탈취하였다.
적수공권으로 토퉁 7정이나 탈취해낸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왕청현유격대의 무기획득투쟁에서 처음으로 되는 승리였다. 이 승리에 고무된 동지들은 그후 더욱 용감하게 무기탈취투쟁에 나섰다.
그리하여 그들은 얼마후에 또 왕청현 석현자위단을 기습하여 보병총 10여정을 빼앗아냈다.
무장획득투쟁은 고조에 달하였다. 이 투쟁에는 비단 유격대뿐만아니라 조직의 영향하에 있는 지방청소년들, 지어는 환갑을 넘은 로인들까지 참가하였다.
당시 왕청현 석현에 살고있는 오태희로인은 왕청현 제5구(가야허를 중심으로 한 혁명구)당책임서기였던 아들 오중화동지에게서 무장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평소에 서로 속을 주고받으며 가장 가깝게 지내던 로인들로 《무기공작조》를 조직하였다. 여기에는 오태희로인 형제들과 강봉세, 김석환, 오영삼, 최관세, 오봉삼 등 로인들이 망라되였다.
《무기공작조》는 곳곳에서 은밀히 무기탈취의 기회를 탐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강봉세로인이 두루마기자락을 휘날리면서 오태희로인을 찾아왔다.
《방금전에 석현경찰서에서 장총을 멘 자위단원 한놈과 칼을 찬 순사 한놈이 장골로 떠났소. 그놈들은 저녁녘에 고개길을 넘어 석현으로 돌아온다우.》
오태희로인은 보고를 받자 시렁에 감춰두었던 《밥상다리권총》을 꺼냈다. 그것은 이런 기회에 쓰려고 그가 만들어두었던 나무권총이였다. 꼬부라진 밥상다리 아래부분을 잘라서 검은칠까지 한 그것은 제법 권총과 같았다.
허리춤에 《권총》을 감춘 오태희로인은 장골로 통하는 고개길 가둑나무숲속에 매복하였다.
저녁녘이 거의 될무렵 보병총을 멘 자위단원놈을 앞세운 순사놈이 고개길에 나타났다.
오태희로인은 재빨리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권총》을 꺼냈다.
한잔 얼근하게 처먹은 놈들은 마치 산보나 하듯이 느릿느릿 올라오고있었다. 적들이 바로 눈앞에 다가왔을 때 오태희로인은 가둑나무숲에서 뛰쳐나와 자위단원놈의 가슴팍에 《권총》을 들이댔다.
《꼼짝말아라. 움직이면 쏜다!》
뒤따르던 순사놈은 《권총》을 보자 넋을 잃고 꽁무니를 뺐다. 홀로 남은 자위단원놈은 부들부들 떨면서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걸하였다.
오태희로인은 그놈에게서 무기와 탄알을 빼앗자 《나는 항일유격대원이다. 앞으로 또 왜놈의 개질을 하면 그냥 두지 않을테다.》하고 오금을 박아놓은 다음 그놈을 돌려보냈다. 자위단원놈은 정말 로인을 유격대원인줄로만 안 모양이였다.
로인들의 《무기공작조》는 그후에도 2정의 보병총을 유격대에 보냈다.
이와 같이 유격대와 인민들의 피어린 투쟁속에서 60여정의 무기를 획득하게 된 왕청현유격대는 그후 마록구고개길에서 구분대의 집단적력량으로 이동하는 적을 치고 무장을 탈취하였다.
그것은 1932년 초가을이였다. 왕청현 백초구에서 위만군 맹영부대가 대황구쪽으로 이동한다는 정보가 유격대에 들어왔다.
김철중대장은 대원 40여명을 인솔하고 적을 앞질러 남하마탕 마록구고개길에 당도하였다. 김철동지는 길좌우켠 고지의 유리한 지형지물을 리용하여 대원들을 매복시켰다. 그리고 길아래웃쪽에 방차대를 배치하였다.
이 전투에는 유격대뿐만아니라 《도수대》도 참가하였다. 《도수대》란 무기없이 맨 주먹만 가진 대란 말인데 여기에는 적위대와 돌격대원들중에서 가장 용감한 청년들이 망라되였다. 그들은 무기만 있으면 그 즉석에서 유격대원이 될수 있는 우수한 청년들이였다.
또한 이 전투에는 작탄만 가진 대도 참가하였다. 이 대들은 모두다 무기가 부족한 까닭에 구성된것이였다. 그러기에 적의 무장을 빼앗아내야 하겠다는 절박한 념원은 전투참가자들의 매 가슴마다에서 불타고있었다.
유격대가 길좌우켠에 매복한지 얼마후에 적들이 나타났다. 유격대원들은 무기를 단단히 틀어잡고 적들의 일거일동을 주시하였다. 《도수대》원들은 저마다 손아귀에 돌멩이들을 쥐고있었다.
60명가량의 적들이 길게 행렬을 지어 고개길을 올라오고있었다. 그뒤에는 우마차들이 따라섰는데 거기에도 적들이 섞여있었다.
유격대원들은 적의 선두부대를 그냥 통과시켰다. 그것은 적아간의 력량대비로 보아 선두부대보다 우마차들속에 섞인 적들을 습격하기가 알맞춤하였기때문이였다.
선두부대의 적들이 지나간후 얼마되지 않아서 우마차행렬이 매복선내에 들어섰다.
김철중대장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한놈의 적을 겨누어 첫발을 쐈다. 그것을 신호로 길좌우켠에서 일제사격이 벌어졌다. 작탄도 여기저기서 터졌다. 눈깜박할 사이에 10여명의 적들이 쓰러졌다. 불의의 타격에 조우한 나머지 적들은 살길을 찾아 황급히 돌아쳤다. 그러나 일부 적들은 우마차밑에 숨어서 대항하기 시작했다.
이때 유격대원들은 저마다 구호를 웨쳤다.
《손을 들어라. 그러면 생명을 구한다!》
《우리는 무기를 요구하지 생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유격대의 위력에 압도당한 적들은 탄띠를 풀어 무기에 걸자 그것을 머리우에 받쳐들고 항복하기 시작했다. 유격대원들과 《도수대》원들이 날래게 달려들어 그놈들의 무장을 해제하였다.
어떤 놈들은 우리 《도수대》원들이 무기를 받아쥔후 손에 쥐였던 돌멩이를 길바닥에 내던지자 흠칫 놀라 몸을 움츠러뜨렸다. 그러나 그것이 터지지 않는 돌멩이라는것을 알았을 때 적들은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크게 벌린 입을 한동안 다물줄을 몰랐다.
우리의 매복선앞을 통과한 적의 선두부대놈들은 총소리를 듣고 되돌아서 대항하려고 서둘렀으나 방차대의 사격을 받자 황급히 도망치고말았다. 적들은 유격대의 력량이 대단히 많은줄로 생각한 모양이였다.
이렇게 적들의 무장을 성과적으로 탈취하고있을 때였다.
우마차밑에 숨어서 대항하던 일부 적들은 정황이 불리하게 되자 더욱 발악적으로 사격을 하였다.
김철중대장은 몇몇 대원들과 함께 발악하는 적들에게 맹렬한 불벼락을 들씌웠다. 적의 화력을 한곳에 집중시킴으로써 놈들의 무장을 해제하는 대원들의 활동을 용이하게 하려는것이였다.
그런데 이때에 화력전을 전개하고있던 김철중대장이 적의 흉탄에 가슴을 맞았다. 치명상을 입은 김철중대장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대원들은 그를 업고 재빨리 철수하였다.
이날 김철중대장은 전투를 지휘하면서 자신이 4정의 무기를 탈취하였던것이다. 그는 얼마가지 못하고 전우들의 품속에서 눈을 감고말았다. 숨을 거두는 마지막순간 그는 자기를 둘러싼 미더운 전우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슬퍼마우. 내 한몸이 죽는것은 아무 일도 아니우. 다만 나는 이 무기들이 우리 혁명에 도움을 줄걸 생각하니 퍽 기쁘오.》
그러나 사랑하는 중대장을 잃은 대원들의 심정이야 어떠하였으랴! 혁명승리를 위해선 모든것을 바쳐싸운 중대장을 적의 흉탄에 빼앗긴 그들은 치밀어오르는 분노에 가슴을 떨었다. 그들은 피로써 탈취한 무기를 가지고 오직 혁명승리를 위하여 더욱 완강히 싸워나아갈 굳은 결의를 다질뿐이였다.
이날 마록구에서의 매복전투에서 유격대는 적 10여명을 살상하고 10여명을 생포하였으며 마레샹(구식보병총의 일종)13정과 칠성자 1정, 탄알 1만여발을 로획하였다.
승리한 유격대는 왕청현 요영구로 돌아왔다.
이리하여 1932년가을에 벌써 왕청현유격대는 무장한 대원만도 90여명으로 장성되였으며 기타를 합하면 100여명의 무장대오로 되였다. 그후 왕청현유격대는 더욱 많은 무기를 획득하였으며 더욱 강력한 대오로 장성되였다.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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