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불굴의 투사
림 춘 추
1938년 11월 조선인민혁명군 간부회의가 있은 직후의 일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전략적방침을 받들고 사령부관하 각 부대들은 새로운 투쟁의 길에 나섰다.
경위련대 련대장 리동학동지는 300명의 전사들과 지휘원들을 거느리고 기지를 출발하였다.
확고한 승리의 신심을 가지고 험산준령을 넘어 강행군을 계속하던 그들이 화전현 류수하자근방 밀림에서 숙영하게 된것은 행군개시 며칠후인 11월 30일이였다.
전사들과 지휘원들은 모두 동원되여 깊은 눈을 쳐내고 림시 류숙할 장소를 마련한 다음 장막을 쳤다. 잠시후 장막안에는 불이 피여나고 대원들은 긴 행군의 피로를 풀기 시작하였다. 무기소제도 끝내고 통강냉이를 삶은것으로 저녁식사도 끝낸 다음 하루밤을 푹 쉬려고 할 때 정찰소대로부터 갑자기 적정을 알려왔다.
아군이 주둔하고있는곳에서 약 15리 지점에 1,500여명의 적 대부대가 숙영준비를 하고있다는것이였다. 그리고 그놈들은 아군의 행적을 탐지하기 위하여 산지사방에 흩어져다니는 《정예》의 기동부대라는것이다.
만약 그대로 날이 밝는다면 적 대부대의 정면공격을 받게 될것이고 그렇다고 미리 피하자니 여러날동안 강행군에서 피로한 대원들을 이끌고 다시 행군을 계속하기도 곤난한 일이였다.
리동학련대장은 침착하게 생각하였다. (유격전의 일반적원칙이란 적을 불의에 기습하여 적들로하여금 시간성을 상실케 하고 아군의 주도권을 보장함으로써 적들이 속수무책하게 된다음 섬멸하여버리는것이다. 적들에게 있을수 있는 온갖 약점을 충분히 리용한다면 손쉽게 보다 큰 승리를 달성할수 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친히 키우신 유능한 지휘관의 한사람인 리동학련대장은 항상 그이의 가르치심에 충실했고 이날도 위급한 사태를 신속히 해결할뿐만아니라 오히려 적들에게 섬멸적타격을 줄수 있는 령활한 전술을 생각해내였다.
(불의의 야습으로 적들에게 선손을 쓰자.)
그는 춥고 어두운 밤에 험한 지형지물을 잘 리용하여 은밀히 적들속에 들어가 놈들의 대오를 혼란시킨후 제놈들끼리 서로 싸우게 하시던 위대한 수령님의 전략전술대로 싸우려 하였던것이다.
그는 우선 민첩하고 대담한 마진우동무 등 20여명의 대원들을 선발하여 경기관총과 기타 간편한 무장을 휴대한 두개의 습격조를 조직하고 나머지 대원들은 그곳에서 휴식을 계속하도록 하였다.
련대장은 기습조를 인솔하고 자신이 직접 적진깊이 돌입하였다.
이러한 아군습격조의 행동을 적들은 알아볼수 없었다.
어둡고 추운 밤이요 깊은 골짜기 울창한 수림속인데다가 군복과 무장까지 적들의것과 동일하게 차렸을뿐만아니라 너무도 태연히 걸어들어갔으므로 적의 보초는 군호조차 묻지 않았다.
얼마후 적지휘부근처에 돌입한 아군습격조원들은 순식간에 유리한 지형을 선택하고 기관총과 보총으로 각곳에 널려있는 적들의 숙영장소와 지휘부천막 등에다 맹렬한 사격을 퍼부었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적들은 아군이 저들의 진안에 있는줄은 모르고 급히 숙영지밖으로 달려나가더니 사격방향도 없이 무질서하게 란사했다.
적들은 비명을 올리면서 무리로 쓰러져갔고 마침내는 적아를 구별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내뛰면서 저희들끼리 총질을 하는 등 대혼란을 일으켰다.
이런속에서 기관총, 보총을 든 수십명의 적병이 아군습격조원들이 매복하고있는 지점으로 달려나오고있었다.
사격을 멈추고 적들의 동정을 살피고있던 마진우동무가 련대장에게 알리면서 경기관총을 겨누었다.
《잠시 더 기다리오. 그놈들이 우리를 발견한건 아니요. 적당한 엄페장소를 찾느라고 뛰여다니는것 같소. 좀더 접근시켰다가 잡으면 무기도 손쉽게 로획할수 있을것이요.》
이러는사이에 적들은 더 가까이 다가오고있었다. 마진우동무는 침착하게 적들을 겨누며 명령을 기다렸다.
멀찌감치에 있는 우등불빛에 놈들의 얼굴이 나타나보이게 되자 련대장은 사격명령을 내렸다. 때를 놓치지 않고 마진우동무 등은 맹렬한 사격으로 순식간에 적 수십명을 또 쓸어눕혔다. 그리고 경기관총 2정을 비롯한 많은 무기를 로획하였다.
얼마동안 이렇게 싸우면서 적을 혼란에 빠뜨리고 맞싸움을 시키던 아군습격조원들은 시간이 되였으므로 제때에 빠져나와 예비집합지점에 도착하였다.
아군이 빠져나온후에도 적들은 그대로 장시간 저희들끼리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날이 밝을무렵에야 놈들은 서로 총질을 멈추고 부상자들과 시체들을 끌고 급히 도망쳐버렸다.
그리고 그날(12월 1일) 아침 9시경에 적비행기 2대가 날아와서 아군방향에다 발악적인 저공사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이때 박성철, 김인묵중대장들은 적기에 대한 맹렬한 집중사격을 명령하였다. 여기에서 또다시 경기관총명수들과 보총저격수들은 발광적으로 덤벼드는 적기에 대하여 맹렬한 집중사격을 퍼부어 적기 1대를 격상시키고 다른 1대를 격추하였다. 격추된 적비행기는 아군상공에서 한쪽날개를 격파당하고 약 20리지점에 가서 흉악한 기체를 땅에 처박고 불타버렸다.
이곳에서 진행된 하루밤, 하루낮전투에서 아군은 비행기를 비롯한 적전투기재에 막대한 손실을 준외에 500여명의 적을 살상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전투에서 아깝게도 1명의 전사자와 15명의 부상자를 내였다.
* *
나는 당시 지방당공작임무를 받고가는도중에 이 전투에 참가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우선 전투에서 부상당한 위급한 환자들을 치료하여주게 되였다. 물론 내가 의사는 아니였지만 어렸을 때에 의술을 약간 배웠던것만큼 의사가 없는 조건에서 군의관을 겸하고 환자들을 치료하기도 하였다.
나는 이날 중상자와 경상자를 각기 20리지점에 분리하여 밀영을 정하였다. 밀영이라고는 하지만 소나무밀림가운데 관목으로 만든 장막을 치고 그밖에 소나무가지를 덮어서 낮이면 적기에 발견되지 않게 방지하고 밤이면 우등불을 피웠다가 날이 밝기전에 꺼버림으로써 적의 정탐이나 방지하는 정도였다. 이러한곳에서 나는 그들을 치료하게 되였는데 중환자라 해도 2~3일에 한번씩밖에는 돌아볼수 없었다.
그것은 적의 감시와 정탐활동이 심한 조건에서 더우기 흰눈이 내려덮인 산길을 헤치고 자주 다닌다는것은 밀영의 위치가 적들에게 드러날 위험성이 있었기때문이다.
며칠후 마진우동무도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이 병원에 들어오게 되였다.
마진우동무는 왼쪽팔에 심한 창상을 받은데다 바른쪽 팔은 상박골관통총상으로 완전골절되였고 대정맥까지 끊어져서 아주 위독한 상태였으며 또한 혹한속에서 발가락 5개는 완전히 동상을 당하였다. 내가 그를 찾아갔을 때에 그는 심한 고통을 참느라고 눈을 꾹 감고 땀을 흘리고있었다. 잘 살펴보니 그의 팔과 발가락은 자르지 않으면 안될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그자리에서 즉시 손을 대기는 곤난했다. 나는 우선 그에게 지혈과 멸균소독을 하는 등으로 외부치료만 해주고는 팔과 발가락을 잘라야 되겠다는 말은 차마 입밖에 내지 못하였다.
(어떻게 자르지 않고는 고칠수 없을가?)
그의 옆을 떠나면서 나는 또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 생각이 부질없는것임을 즉시 뉘우쳤다.
나는 급히 되돌아서서 그를 찾아갔다. 그리고 팔과 발가락을 절단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다는것을 말했다.
사실 이 몇마디 말을 하는 그 짧은 순간이 나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나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신음속에서 내 말을 듣고있던 마진우동무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오른팔을 잘라버리면 죽은 목숨이 아닙니까.》
그러면서 눈을 감는 그의 숨결은 높아졌다. 잠시후 그는 다시 눈을 뜨고 말을 계속했다.
《내가 팔을 자르면 앞으로 기관총수는 고사하고 보총도 쏠수 없고 수류탄도 던질수 없지 않습니까. 일제강도놈들을 더 잡지 못하고 내가 살아있다면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나는 조선사람이고 유격대원인데 계속 적과 싸워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게서 팔을 떼내면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그는 따지듯이 나에게 반문하는것이였다.
《동무의 말이 물론 옳고 혁명투사다운 말이요.》하고 나는 그를 설복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팔은 이미 맥박이 끊어졌고 썩어들기 시작하였다. 만약 그대로 두면 생명이 위험하다. 이것을 알면서 어떻게 묵과할수 있겠는가.
《혁명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최후의 피한방울까지도 서슴없이 바치는것, 이것은 우리들의 고상한 혁명적의지이다. 허나 부닥친 환경과 앞에 있을 일을 랭정히 생각하지 않고 흥분하며 팔하나를 아끼다가 귀중한 생명전부를 잃어버리는것은 그릇된 생각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혁명은 총창과 수류탄으로 적을 잡는데만 있는것이 아니다. 팔이 없이도 동무가 앞으로 해야할 일은 많다. 동무의 생명은 동무자신에게보다도 우리 혁명을 위하여 더욱 귀중한것이다. 그런데 동무가 자포자기하는데서 생명까지 버린다면 이는 혁명가로서 우리 인민과 우리 혁명앞에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내 말을 묵묵히 듣고있던 그는 갑자기 나의 무릎에 머리를 비비며 울음을 터뜨렸다.
《제 생명이 그렇게도 귀중하겠습니까. 다만 팔을 자르고도 혁명을 위하여 싸울수 있다면 … 어떠한 고통도 참을수 있습니다.》
나는 그가 흥분하지 않도록 타이르고 수술에 착수하였다.
불완전한 수술도구로써 극도로 쇠약한 중상자를 수술한다는것은 부상자와 의사사이에 어떠한 고통과 위험도 무릅쓰고 살아야 하며 살려내야 한다는 강한 정신력과 책임감이 일치하지 않고는 해낼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망설일 때는 아니였다. 나는 그자리에서 그의 팔을 절단했다. 수술을 끝마친 뒤에 나는 그의 가슴우에 손을 얹어보았다.
모진 고통을 참으며 입을 다물고 누워있던 그는 비로소 눈을 뜨고 후ㅡ하고 숨을 내쉬더니 약간 몸을 움직일뿐 아무런 말도 없이 조용히 눈을 감는것이였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어서 몸을 좀 쉬십시오.》
이때 나는 어떻게 대답을 했던지 모른다. 나는 그의 가슴에서 손을 떼고 그의 모포를 잘 덮어주었다.
《고맙소!》
고통을 모르는듯이 태연히 누워있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나는 이렇게 입속말을 했다. 사실 그때 이러한 말보다 더 적당한 말을 찾아낼수 없었다.
며칠후에 나는 그의 동상당한 발가락 5개와 왼손가락 몇개를 또 절단하였는데 그때는 그가 오히려 나를 설복하는 형편이였다.
《너무 섭섭해하지 마십시오. 내 팔과 다리가 전부 없어진대도 나는 비관은 하지 않을겁니다. 물론 일시적고통이 어렵고 또 앞으로 부자연스럽기는 하겠지만 … 그러나 지금처럼 나를 돌봐주고 함께 싸우는 동무들속에서 살게만 된다면 나는 아무 근심이 없습니다. 내가 이번까지 살아난것을 생각하니 아마도 나는 혁명의 성공을 보고 광복된 조국에서 모든 인민들이 행복하게 사는것을 꼭 볼것 같습니다. 물론 나보다 몇배나 몇십배 더 어려운 고통과 죽을 곤경을 뚫고나온 동무들이 허다하지만 나도 13번이나 〈이제는 꼭 죽었구나.〉하고 생각하였다가도 다시 살아나군 했답니다. 그중에서도 종파주의자들의 손아귀에 걸려서 겨우 죽을 고비를 면하고 혁명대렬에서 다시 싸우게 된 일은 참으로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그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33년 여름 어느날 마진우동무는 《민생단원》이라는 반혁명분자의 혐의를 받고 체포되였다.
당시 동만에서는 일부 종파분자들에 의하여 반《민생단》투쟁이 그릇되게 진행되였다. 그리하여 혁명대오를 내부로부터 와해시키려는 일제의 리간책동에 빠져 일부 견실한 혁명동지들도 《민생단》에 가담하였다는 《리유》로 모해, 암살, 고문을 당하였다.
지금이나 그때나 할것없이 종파주의자들은 자기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하여 《혁명가》의 탈을 쓰고 혁명을 말살하기에 온갖 수단과 악행을 가리지 않았다.
마진우동무는 당시의 소감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반혁명종파주의자들은 나를 터무니없이 〈반혁명분자〉로 규정하고 체포하였습니다. 나는 억울하게 루명을 쓰고 살해당할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기가 막혔습니다. 그러나 나는 떳떳하였지요. 글쎄 내가 어떻게 혁명을 배반한단 말입니까? 나는 내량심에 꺼리낌이 없었고 견실한 우리 동지들이 나를 믿어주리라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비관실망하며 자포자기해서는 안된다. 죽어도 혁명을 위해서 죽고 살아도 혁명을 위하여 살아야 하며 끝까지 견결히 싸워야 한다는 자각과 용기가 불길처럼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혁명적절개를 끝까지 지킬것을 굳게 결심하였다. 그리고 그는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밤이 되기전에 밖으로 끌려나와 산길을 걷게 되였다.
《이때 내가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그들이 끄는대로 가기만 하면 죽을것이 뻔했으니까요. 죽는것이 무서운것이 아니라 종파분자들에 의하여 〈민생단원〉으로 몰려죽는것이 억울하였지요. 나는 내가 이미 생각한대로 죽음을 무릅쓰고 내뛰였습니다. 어디까지 어떻게 얼마나 뛰였는지 알수 없었습니다. 뛰다가는 쓰러지고 쓰러졌다가는 일어나면서 산을 하나 넘고나니 그만 날이 캄캄해졌습니다.》
그는 산속에서 밤이 새도록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울기도 하였다.
(아니다. 나는 다시 유격대로 돌아가야 한다. 대렬내에 잠입한 몇몇 해독분자때문에 내가 유격대에서 떠난다면 종파분자들은 정말 나를 《반혁명분자》라고 할것이다. 이제 내가 다시 돌아가도 그들은 물론 나를 죽일것이다. 그러나 혁명을 위해 나선 몸이 혁명대렬을 떠나서는 살수 없다. 죽어도 다시 대오로 돌아가야 한다. 가서 떳떳이 내 량심을 토로하고 싸워보자!)
이렇게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한 그는 (죽을바에는 적들과 싸워서 총한자루라도 더 빼앗아내고 혁명을 위해 죽자!)하는 생각이 불현듯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그길로 산아래에 있는 적의 자위단실을 향해 달려내려갔다. 그리고 오랜 고생끝에 그자들에게서 끝내 5련발 보병총 두자루를 빼앗아가지고 얼마후 삼도만유격대를 다시 찾아왔다.
《물론 나는 유격대에 돌아와서도 종파분자들의 손에 걸리면 죽을것은 뻔한 일이였지요. 그러나 그당시 5련발 보병총 한자루면 유격대원들은 왜놈들의 경기관총 맞잡이로 쓰던 때니까 죽어도 피값은 한셈이니 다소 유한이 풀리는것 같았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나는 놀랐습니다. 종파분자들은 이미 타격을 받은 뒤여서 이때에는 진정으로 나를 믿고 사랑해주던 동지들이 나를 부둥켜안고 우는것이였습니다. 〈누가 너를 [민생단]이라고 하며 체포했느냐.〉, 〈하여간 네가 돌아와서 우리를 만났으니 반갑다! 기쁘다.〉하고 모두들 그러안고 울며 환성을 지르던 그 일을 나는 잊을수 없습니다. 내가 혁명동지들을 다시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였겠습니까.》
이렇게 천신만고를 겪은 마진우동무는 그후 위대한 수령님의 령솔밑에 있는 경위련대 기관총수로, 소대장으로 되였으며 수령님과 전체 동무들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우수한 유격대원으로 자랐다. 그는 소탕하전투를 비롯한 수많은 전투들에서 경기관총명수로 위훈을 떨쳤고 이번 류수하자전투에 이르기까지 무려 수백명의 적을 살상하였으며 적기를 격추한 동무였다.
그는 수술후에도 늘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비록 한팔을 절단하였고 발가락과 손가락 몇개를 잃었지만 나는 살아서 혁명을 계속하며 혁명의 승리를 보리라고 생각하니 기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동지들속에 있다고 생각하니 행복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 그의 한쪽팔을 보는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약도 없고 량식도 해결되지 않아서 그를 대하기가 더욱 가슴아팠다. 통강냉이 몇알씩으로 겨우 끼니를 에워가며 3개월간 치료받은 그는 겨우 발을 옮겨디딜수 있게 되였다.
나는 그를 데리고 약 10여리되는곳에 이동하여 다른 환자들과 함께 지냈다. 내가 그곳을 떠날 준비를 할 때였다.
깊은 밀림속 양지쪽에는 겨우내 덮인 눈이 녹아내렸고 가래나무싹이 움트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어느날 9시경에 적《토벌대》200여명이 우리들의 야전병원인 이 밀영을 불의에 습격하여왔다. 우리는 적들의 기관총사격을 피하면서 요행 사경을 면하였다.
나는 그를 업으려 하였으나 그는 한사코 내 손을 뿌리치면서 껑충껑충 앞을 달려 수림속을 빠져나가는것이였다.
우리가 그날밤 어느 산속에서 밤을 새우게 되였을 때에 그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조선에는 꽃이 만발할테지요.》
《그럼, 여기보다 퍽 따뜻하고 꽃나무들도 많지.》
이렇게 말을 하던 나는 그만 목이 메였다. 이렇게 천진하고 순박한 동무! 상한 몸으로 적의 불의습격을 받았으나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고 이제와서는 통강냉이조차도 먹지 못하고있으나 그 모든 곤경과 굶주림을 이겨내며 조국의 봄을 그리워하고있는 혁명동지에 대하여 내가 무슨 말로 더 이야기할수 있었으랴.
《혁명투쟁과정에서 어떠한 난관과 곤경속에 빠지더라도 비관실망하지 않고 락천적으로 끝까지 싸워야 한다. 일본제국주의강도들을 타도할 때까지 건전한 사상과 불같은 투지로 싸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마진우동무의 생각이였고 행동의 지침이였다.
그는 방금 피여나는 꽃처럼 젊고 건장한 체격의 소유자로부터 심한 불구자로 되였으나 그후에도 의연히 동지들앞에서 항상 쾌활하였고 자기 힘이 미치는 일이라면 명령여부를 가리지 않고 솔선 나서서 동지들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전보다도 더욱 학습에 열중하였다. 왼손글씨를 능란하게 쓰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내눈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10. 림강현 외차구전투
박 성 철
외차구전투는 내가 참가한 수많은 전투중에서 가장 간고한 전투중의 하나이다.
이는 바로 하싼호사건(속칭 장고봉사건)에서 참패를 당한 일제가 수십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우리 항일유격대를 《완전소탕》한다고 호언장담하던 때였다. 그러므로 적들의 발악은 심하였고 우리들의 행동은 곤난하였다.
이것은 벌써 오래전의 일이다. 그때의 그 모든 일을 지금에 와서 세세히 기억할수 없으며 또한 그때 함께 싸운 동지들의 수많은 영웅적위훈들에 대하여 개개의 례를 다 들수 없는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여기서 이야기하려는 외차구전투에서도 다만 내가 기억하는 몇가지만을 전하는데 불과한것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전략적계획에 의하여 우리 부대는 1938년 봄부터 집안, 통화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38년 10월에는 림강에 있는 부대들과 련합하여 대부대로써 도발적행동에 날뛰는 적의 후방을 교란하며 더욱 큰 타격을 주기 위하여 다시 림강밀림으로 돌아오게 되였다.
그동안에 우리는 수십, 수백차례의 가렬한 전투를 진행하였으며 매 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하였다. 그중 통화를 중심으로 한 집안현 대황구지구에서의 한개 실례만 들더라도 불과 500명밖에 되지 않는 우리들은 적 1개련대(2,000여명)를 대부분 섬멸, 포로하고 기관총, 보총 등(1,100여정)을 로획하는 승리를 쟁취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의 작전계획을 성과적으로 수행하였으며 일제침략자들의 중국본토에 대한 침공을 분쇄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던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투승리들이 어떠한 간난신고속에서, 어떠한 투쟁으로 이루어졌는가.
외차구전투직전만 하더라도 우리는 30일간이나 힘에 겨운 적들과의 가렬한 싸움속에서 밤낮없는 행군을 계속하였다. 적들은 무려 수만명이나 되는 병력과 비행대까지 동원하여가지고 불과 500명밖에 안되는 아군부대를 《포위섬멸》할 작정이였던것이다. 게다가 여러날째 식량을 보장받지 못한 아군부대의 전체 전사들과 지휘관들은 극도로 쇠약하여갔다. 참으로 중중첩첩한 적들속에서 2중3중의 간난신고를 극복해나가는 악전고투의 나날이 계속되였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의 명령대로 도처에서 수많은 적들을 격파분쇄하고 다시 그이께서 계시는 주력부대를 찾아가게 되였으니 그 기쁨과 희망은 무엇으로도 비길수 없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이제 어떤 새로운 전투임무를 주시려는지…》
가슴에 벅차오르는 그리움과 무한한 신심은 모든 간난신고와 악전고투속에서도 우리를 승리에로 이끌었다.
《어서 한걸음이라도 더 빨리 적들을 무찔러나가자!》
《림강은 이제 얼마남지 않았다. 더욱더 용감하게 싸워나가자!》
자신이나 동무들을 서로서로 이렇게 고무하면서 우리는 계속 싸우고 계속 행군하였다.
외차구전투는 바로 이러한 행군과정에서 첩첩히 둘러싼 적들의 포위를 돌파하고 끝내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게 되는 간고한 전투였다.
적들은 우리가 외차구골안에 들어서기 전날에 이미 비행대를 동원하였다. 비행기에서는 거듭 《투항하라!》는 삐라를 뿌렸다.
삐라에는 우리들이 통과해야 할 외차구일대의 지형을 그려놓고 14개 련대나 되는 적들이 우리를 《기다리고》있다고 《위협》을 했다. 이는 실로 적들이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포위작전》이였던것이다. 우리도 《포위》만은 인정하였다. 사실 어느 쪽을 보나 적들은 겹겹이 우리를 둘러싸며 나타났다.
시시각각으로 조여들며 으르렁대는 야수들처럼 들끓는 원쑤들의 함성은 그대로 숨이 막힐 지경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는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였다. 유격투쟁 그자체가 벌써 넓은 지역에 배치되여있는 적들속에서 진행되는 투쟁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때문에 적들의 《포위》를 두려워하랴. 우리의 생각은 바로 이러했다.
명령대로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계시는 림강으로 가야 하며 림강으로 가자면 어차피 외차구골안의 적들을 격파해야 한다는 이 확고한 일념이 우리를 한덩어리로 묶어세웠다.
가렬한 전투는 계속되였고 해질무렵에야 우리는 외차구골안에 들어서서 한편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휴식장소를 정하게 되였다.
외차구지형은 골짜기 한가운데 나지막한 봉우리가 있고 동북쪽은 약간 펑퍼짐한 령마루이며 동남쪽은 깎아지른듯한 절벽이 둘러있었다. 그리고 어느곳을 둘러보아도 큰 나무라고는 없고 쑥대와 새초, 돌뿐이였다.
골안복판에 있는 낮은 봉우리에 기관총중대를 중심으로 수십명의 보초를 배치하고 부대전원이 휴식을 시작했다. 이러한 때에 적들은 그 부근에서 1만여명의 자위단과 반동주구들을 더 동원하여 우리를 사방으로 한겹 더 포위했다. 모두 합하면 2만~3만명의 적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겹겹이 성을 쌓은셈이였다.
이러한 속에서 하루밤이 깊어갔다. 적들은 날이 밝기전부터 기관총을 란사하기 시작했고 또다시 비행기를 동원했다. 비행기는 공중에서 아군의 동향을 정찰하여 지상에 있는 적들에게 알리는 한편 사격을 지휘했고 직접 기총사격을 퍼붓기도 했다. 동시에 적들은 점점 더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투항하라!》는 삐라를 계속 뿌렸다.
이때 아군은 3개 대오로 나뉘여가지고 일부는 방어를 하면서 일부는 깎아지른듯한 동남쪽벼랑으로 기여오르고있었다.
적들은 벼랑우에서 내리쏘고 우리는 벼랑아래서 올려쏘면서 벼랑우를 향해 계속 한걸음한걸음 기여올랐다.
이렇게 한 고지를 빼앗으면 또 다음고지에 적이 있었다. 게다가 적의 비행기들은 계속 머리우를 감돌며 삐라를 뿌리고 기총사격을 퍼부었으며 폭탄까지 투하하였다.
이럴 때에 우리들의 앞병풍같이 생긴 바위우에서 흰기를 두르는 적들이 보였다. 그들은 위만군이였는데 비행기가 저희들에게 폭탄을 떨어뜨릴가봐 신호를 하는것이였다.
그들이 서있는곳은 우리가 기여오르는곳에서 불과 50~60m쯤 되는 벼랑우였다. 동시에 우측릉선에서 중기를 쏘며 달려드는 왜놈들과 산아래쪽에서 추격해오르는 왜놈들이 죽기내기로 덤벼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머리우에 위만군을 두고 돌아섰다. 옆릉선에서 사격하는 왜놈들과 산아래쪽에서 기여오르는 왜놈들을 대항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되였기때문이다.
이렇게 되고보니 적탄은 머리우에 쏟아지고 앞에서도 뒤에서도 그리고 바른쪽이나 왼쪽 어디서나 비발치듯 날아왔다.
아군은 참으로 위급한 처지에 빠졌다. 지휘부에서는 잠시 전진을 멈추고 진지를 꾸리면서 방어전을 하며 최후의 한사람까지 싸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명령그대로 아군은 전체가 한덩어리로 되여 전후좌우 사방으로 맹렬한 반격을 가하였다.
당시 우리 제3련대의 련대장인 박선봉동지도 직접 보총을 잡고 싸웠다. 그는 보총 2개를 놓고 련락병에게 탄알을 재우게 하면서 계속 사격을 하였는데 그의 명사격에 의하여 쓰러진 적만하여도 80여명이나 되였다.
이와 같이 전부대의 기관총, 보총의 맹렬한 사격은 잠시동안에 적들을 무리로 쓸어눕혔다.
그러나 수량상으로 워낙 많은 적들은 쓰러지면서도 계속 그뒤를 이어 달려들었다. 그리고 어느 사이엔가 위만군들이 있는 벼랑우에서도 왜놈들이 시누렇게 내려왔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등뒤였다.
이때 박선봉련대장은 나를 향하여 소리쳤다.
《1중대는 고지우의 적을 맡으라! 아래쪽의 적은 내가 맡을테다!》
이리하여 우리는 3번째로 달려드는 적들을 전후좌우에 두고 맹렬한 불을 뿜었다.
이렇게 가렬한 전투가 진행되고있을 때였다. 나의 옆에서 싸우던 련락병 김익현동무가 다급히 소리쳤다.
《중대장동무, 련대장동무가 희생됐습니다.》
이말을 듣자 나의 가슴은 그 어떤 예리한 쇠끝에 박히운듯 숨이 꽉 막혔다. 나는 저도모르게 벌떡 일어나며 련대장동무가 있던곳을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희생된 련대장을 업은 동무들이 골짜기아래로 내려간 뒤였고 왜놈들과 육박전을 하는 동무들도 이제는 골짜기아래로 내려밀리고있었다. 그리고 이미 련대장이 싸우던 부근에는 얼마나 되는지 짐작조차 할수 없는 왜놈들이 이리떼처럼 시누런 대가리를 맞비비며 기여오르고있었다.
《저놈들을 모조리 잡아라!》
나는 그만 목이 꽉 메도록 이렇게 웨치면서 기여오르는 적들을 향해 총을 쏘아댔다. 중대전우들도 일제히 맹렬한 불을 뿜었다. 얼마간 이렇게 싸우고있을 때였다.
우리가 있는 건너편 릉선(중간릉선)에서 우리들에게 급히 퇴각하라는 신호가 왔다. 그리고 그 릉선에서는 우리의 기관총수들이 우리 중대앞에 있는 적들을 겨누고있는것이 얼핏 보였다.
나는 대원들을 데리고 홈채기로 급히 뛰여내려서 지휘부가 있는 건너편 릉선으로 달렸다. 이때 아군 기관총수들이 우리에게로 달려드는 적들을 향해 맹렬한 화력을 집중했다. 적들은 그야말로 삼대 쓰러지듯 했다.
이윽고 해가 졌다. 해가 지자 적들은 더 달려들지 못하고 사방에 불을 피웠다. 약 5m간격에 하나씩 피운 우등불무지는 거의 20리주변을 빙둘러 불바다를 이루었다. 이렇게 하여 놈들은 우리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고 며칠이라도 지내면서 아군이 투항하기를 기다릴 태세를 취하였다.
총소리한방 들리지 않는 외차구골안에는 사방에서 놈들의 전호파는 소리와 인공장애물을 만드는 도끼소리, 메질소리가 소란했다. 그리고 저희들끼리 계속 신호를 주고받는 소리와 순찰대놈들이 악을 쓰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이렇듯 첩첩한 포위속을 돌파하자면 결사전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지휘관들의 회의가 소집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되였다.
… 다시 날이 밝을 때까지 우리가 여기 있을수는 없다. 우리는 오늘밤중으로 적들의 포위선을 뚫고나가야 한다.
우리가 살아서 림강으로 가느냐 여기서 전멸하느냐 하는 중대한 문제는 우리들의 투쟁여하에 달렸다.…
《어느 중대가 돌격대의 선봉이 되여 적들의 포위선을 뚫어헤치고 부대의 퇴로를 개척하겠는가!》
나는 이때 우리 중대에 그 임무를 맡겨달라고 선뜻 말하려하였으나 너무도 중대한 임무였으므로 감히 입밖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느 중대에 이 영광스러운 선봉중대의 임무가 맡겨지는가 하고 초조한 심정으로 좌우를 둘러보았다.
아니 그것은 나하나뿐만이 아니였다. 김인묵, 지병학, 문봉상 등 어느 지휘원들이나 다 불이 튀는듯한 눈길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는 저도모르는 사이에 성큼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가까운곳에 적들이 있다는것조차도 잊어버릴 지경으로 큰소리로 말했다.
《우리 중대에 그 임무를 맡겨주십시오.》
막상 이렇게 말을 하고나니 속이 시원하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거운 책임감에서였다.
이때 다른 지휘원들도 나와 거의동시에 앞으로 나서며 저마다 자기 중대에 그 임무를 맡겨달라는것이였다. 나의 마음은 또 초조해졌다.
그러나 어둠속으로 한사람한사람씩 더듬어보면 지휘관의 빛나는 눈길이 나에게서 멈춰졌고 《좋소! 제1중대가 이 임무를 집행하시오.》하고 쾌히 승낙을 하였을 때 나는 헤아릴수 없는 감격으로 하여 가슴이 뜨거워지고 목이 꽉 메여올랐다.
부대에는 인차 돌격조가 조직되였다.
마지막결사전을 각오한 나는 전체 대원들(이때 나의 중대에는 대원이 60명뿐이였다.)에게 배낭에있는 사품을 일체 소각해버리게 했다. 그리고 보병총에는 날창을 꽂고 탄환은 6발씩(한발은 장탄하였다.) 재우게 했다. 이 탄알을 다 쏘면 다음 탄알을 재울 짬도 없겠으니 그대로 육박전을 전개할 결심이였다.
수류탄을 모두 앞에 차게 하였다. 그리고 나는 자꾸만 흥분해지는 마음을 누르면서 《침착하자. 그리고 우리 부대 전체 동무들이 모두다 무사히 나가도록 적들의 포위선을 기어이 뚫고헤치자.》하고 몇번이나 자신을 고무했다. 동시에 대원들에게 우리가 결사전을 각오해야 할데 대하여서와 끝까지 침착하고 용감하게 싸우자는것을 강조했다. 그러자 모두들 다음과 같은 자기들의 결의를 표명했다.
《우리가 죽더라도 우리의 조국이 광복되고 우리의 후대들이 새 사회에서 자유와 행복을 누린다면 더 바랄것이 없습니다. 승리를 확신하면서 돌격선으로 나가겠습니다.》
이윽고 행동을 개시하라는 신호가 내렸다.
돌파구로 향할 때에 중대앞에는 보총수 2명을 세우고 그 다음에 기관총수 2명을 세운 다음 포복전진을 하였다.
앞에서 보총소리가 나면 전중대가 돌격할 작정이였다.
우리뒤에 다른 구분대들이 따라 서고 지휘부 바로 뒤에서 주력부대들이 행동했다.
우리들은 계속 산벼랑을 가로지르면서 적들의 불무지와 불무지사이를 목표로 하고 기여나갔다. 이렇게 얼마를 기여가던 우리는 마침내 적들의 불무지가까이에 이르렀다. 불무지마다 수십명씩의 적들이 총을 들고서서 경비를 서고있었다. 그중에도 우리 중대가 나아가는 정면에 있는 불무지에는 비교적 인원수가 더 많았고 장교놈들도 몇몇이 보였다.(후에 안 일이지만 이것은 적의 제2련대 지휘부였다.) 나는 그 불무지를 정면으로 습격한다면 그 부근에 있는 다른 불무지의 적들도 우리에게 쏠릴것이며 그사이에 아군이 빠져나갈수 있다는것을 생각하게 되였다.
그래서 불무지와 불무지사이를 뚫으려던 생각을 버리고 정면으로 적의 불무지를 습격소탕하기로 하였다.
이럴 때에 적들도 우리를 발견했다.
《누구냐?》하고 적들이 고함을 치자마자 우리는 일제히 불을 뿜으며 계속 밀고들어갔다.
정면의 적들이 불속에 거꾸러지고 좌우에 있던 적들이 혼란에 빠졌을 때에 우리들은 적들의 경기관총 2정을 로획하여가지고 더욱더 맹렬한 불을 뿜었다. 이바람에 그 부근에 있던 적들은 달려들 생각을 하지 못하고 우물거리고있거나 혹은 숨어버리기까지 하였다.
이틈에 우리들은 동남쪽령마루를 점령하고 아군부대의 퇴로를 엄호했다.
그런데 우리가 고지를 내려설 때에 대렬뒤를 따르던 지휘부와 일부 동무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때의 안타깝고 기막히던 심정이란 참으로 잊혀지지 않는다.
결사적으로 적들의 첩첩한 포위선을 뚫고 부대의 퇴로를 열었는데 지휘부가 못나왔으면 우리만 살아서는 무엇하랴 하는 생각이였다.
나는 중대를 되돌려세웠다.
바로 이때였다.
벌판쪽 수림지대에서 귀익은 나팔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틀림없이 우리의 지휘부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후에 안 일이지만 지휘부는 적들이 우리 중대에 쏠리는 틈을 리용하여 헤쳐진 공간으로 급히 탈출하였고 수림주변에 있는 적들을 물리쳤다. 그리고 우리가 고지를 내려설 때에는 그 고지 후면에 있는 적들을 계속 공격함으로써 우리를 엄호하여주었던것이다. 그러다가 우리가 다시 고지로 오르는 순간에 나팔로 신호를 하였던것이다.
지휘부와 기본부대동무들을 만난 우리는 계속 싸울 준비를 하면서 급히 행군을 시작했다.
어두운 밤이라 적들은 우리를 추격할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방심하지 않았으며 더욱 행군속도를 가했다.
이튿날 날이 밝아서야 적의 비행기가 또다시 떠올라서 아군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미친듯이 날아돌았다. 그러나 이때에는 이미 아군이 4개의 대오로 나뉘여가지고 적들의 추격을 예상하면서 림강부근 깊은 수림속으로 들어선지 오래된 때였으므로 놈들이 우리를 발견할수 없었다.
그 다음날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계시는 림강밀영지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당시 제1군장이였던 양정우동지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외차구포위돌파전투에서 만약 박선봉, 박성철, 지병학, 김인묵, 문봉상동지들과 전체 전사들의 인내성있고 헌신적이며 대담한 돌격이 아니였더라면 우리 부대 500명은 섬멸을 당하였을지도 모른다.
참으로 조선동지들의 영웅성과 불요불굴의 투지를 항상 배워야 하겠다.》
이렇게 전체 우리 대원들과 지휘관들에게 격려와 치하를 하였다. 물론 과거에도 그랬지만 양정우동지는 외차구전투를 통하여 조선혁명가들의 불굴의 투지에 대하여 감탄하였던것이다. 이 전투에서 적들은 3,000여명의 손실을 보았다.
이렇듯 우리는 외차구전투를 통하여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이끄시는 항일유격대의 불패성과 강대한 위력을 거듭 시위하였다.
동시에 이 전투에서 조선혁명가들의 영예를 다시한번 시위하였다.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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