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민족수난기의 대중가요들을 더듬어
민족수난기의 가요는 대중가요(류행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류행가라고 하는것은 말그대로 사람들속에 널리 불리워 지면서 류행된 노래를 의미한다. 류행가라는 쟝르가 생겨난것은 1920년대말엽과 1930년대초에 이르러 우리 나라에 여러 레코드회사들이 설립되여 제작되는 음판들이 상업적성격을 띠고 제각기 쟝르를 류행가라고 표기하였기때문에 생겨난 어휘이다. 대중가요, 즉 류행가가 이 시기 사람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졌던것은 일제의 기반밑에서 신음하는 우리 민족의 수난과 그 생활감정들이 반영되여있기때문이다. 민족수난기에 널리 불리워진 류행가는 다섯가지로 세분화하여 구분해볼수 있다.
1) 애향가들을 더듬어
민족수난기에 창작된 애향가들에는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하게 반영되여있다. 그 시기 애향가로서의 첫 작품은 《잃어진 고향》이며 이 작품이 류행가로서의 첫 작품에 속한다. 윤시정 작사, 작곡인 이 노래는 1925년에 발행된 《관북월간》 3호에 수자악보로 실린 작품이다. 이 시기 계몽잡지의 하나였던 《관북월간》은 1925년 1월에 창간되여 5호까지 발행하고는 일제의 탄압으로 하여 페간되였다. 《관북월간》 3호에 실린 《잃어진 고향》은 함경남북도를 비롯한 관북지방사람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지다가 점차 전국적판도로 보급되였다.
이 작품은 꿈결에도 그립던 고향을 찾아오니 나서자란 정든 옛집은 헐리였고 오동나무 한그루만 외로이 서있는 잃어진 고향을 취급대상으로 하고있다. 그러나 주인공의 눈앞에 펼쳐진 페허의 고향집은 순수한 비감으로만 머물러있는것이 아니라 정다운 이웃집과 배나무 서있던 복순이네집을 비롯한 추억을 통하여 애향과 조국애가 은은하게 안겨든다. 1930년대초에 고복수의 노래로 《오케》레코드에 취입된 김릉인 작사, 손목인 작곡인 《타향살이(타향)》는 이 시기에 널리 불리워진 애향가이다.
우에서 지적한 두 작품들을 통해서도 알수 있는바와 같이 이 시기에 창작된 애향가들을 불러보느라면 고향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함께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감정이 이어 진다. 이밖에도 애향가에 속하는 작품들은 남인수의 노래로 《오케》레코드에 취입된 박영호 작사, 문호월 작곡인 《천리타향》, 리란영, 리봉룡의 노래로 《오케》레코드에 취입된 박영호 작사, 김해송(김송규) 작곡인 《고향은 부른다》를 비롯하여 많은 애향가들이 창작되여 불리워졌다. 아래에 고운봉의 노래로 《태평》레코드에 취입된 유도순 작사, 전기현 작곡인 《아들의 하소》를 끌어온다.
이 노래는 가요극 《아들의 하소》의 주제가이기때문에 이 작품의 줄거리가 반영되여있다. 창작된 초기에는 《버린 고향》으로 제명을 달았다가 공연도중에 《아들의 하소》로 고쳤다고 한다. 우리 민족이 일제의 착취밑에서 시달리고있던 수난기에는 여러 형태의 애향가들이 불리워졌는데 조령출 작사, 리면상 작곡인 《연자방아》도 널리 불리워졌으며 중국 동북지방에서 창작되여 국내에로 보급된 《애향》도 민간에서 애창되 였다. 1993년 3월 21일 작가 조령출에 의하면 《애향》이란 노래는 중국의 동북지방에서 살던 청년들이 집체작으로 연극 《애향》을 창작하여 공연한바가 있는데 그 주제가라고 하 였다. 그런가 하면 최동오 작사에다 누군가가 곡을 달아 부른것이 민간에 류행되였다는 설도 있으나 오늘에 와서 사실여부를 확인할길이 없다. 아무튼 《애향》은 중국 동북지방에서 창작되여 널리 불리워지면서 국내에도 보급된 노래라는것은 부인할수 없다. 아래에 《애향》의 가사를 끌어온다.
일제의 기반밑에서 신음하던 때 조국을 떠나온 실향민들의 심정이 절절하게 안겨오는 이 노래와 함께 고복수의 노래로 《오케》레코드에 취입된 조용곤 작사, 문호월 작곡인 《사향애가》도 이 시기에 널리 불리워졌다.
이 시기에 이러한 애향가는 수많이 창작되여 불리워졌다. 남인수의 노래로 《오케》레코드에 취입된 《어머님 안심하소서》는 민간에서 남녀로소 할것없이 널리 애창되였던 작품이다. 이 노래는 어머님생각과 고향생각이 함께 깃들어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집을 떠나온 아들이 어머니에게 보내는 노래 편지라고도 할수 있다. 어머니와 작별하던 추억을 편지식으로 엮어나가면서 낮이면 땅을 파는 농군이 되고 밤이면 글을 쓰는 선비로서 아들의 마음을 담아 《어머님 안심하소서》를 매 절마다 강조하고있다. 이 작품에 애향적인 내용을 기본주선으로 담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에 대한 추억속에 고향도 은은히 안겨들고있다. 《어머님 안심하소서》와 함께 백년설의 노래로 《오케》레코드에 취입된 조령출(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인 《고향설》은 1940년대에 창작된 대표적인 애향가의 하나였다. 일제의 등쌀에 고향땅에서는 도저히 살래야 살수가 없어 산설고 물설은 타국땅으로 내몰린 실향민들, 그들은 이국땅에서 눈이 내릴 때 그것이 고향에 내리는 눈으로 감수되군 하였다. 아래에 《고향설》의 가사를 적어본다.
깊은 밤 소리없이 내리는 눈을 맞으며 향수에 젖어드는 마음을 누를길 없어 고향을 애타게 불러보며 추억의 시어들에 선률을 태워 부르던 애향가! 이 노래의 가사를 쓴 작가 조령출은 1941년에 《오케》레코드회사의 가요인들을 이끌고 중국 동북지방인 룡정에서 첫눈을 맞으면서 체험한 감정을 시어로 엮어나갔고 작곡가 김해송(김송규)은 선률을 달아놓았다. 이렇게 즉흥적으로 창작된 이 가요작품은 가수 백년설이 몇번 시창을 해보다 자신의 독창곡으로 선정하였다. 이날 중국 룡정의 공연무대에 백년설이 독창을 부르기 위하여 나서자 소개자는 《오늘 머나먼 이국땅 룡정에 와서 첫눈을 맞고보니 송이송이 내리는 눈이 고향에 내리는 눈으로 안겨와서 그 감정을 즉흥적으로 담아 지은 노래를 불러드리겠습니다.》라고 소개하였다. 백년설은 소개자의 말이 끝나자 자신이 무대에 나가 실수할가 두려워 악보를 펼쳐들고 보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무대에 나서는 가수로서는 도저히 용납될수 없는 일이였고 창피스러운 일이였으나 관객들은 이 노래가 오늘 즉흥적으로 창작되였기때문이라고 생각하였고 노래에 실린 애향의 감정이 절절하게 안겨와서 폭풍같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날의 공연에서 백년설은 거듭되는 관객들의 요청으로 《고향설》을 두세번 반복해 부르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 이튿날 룡정의 극장광고에는 《룡정에서 <오케>레코드회사 가요인들이 창작한 명곡, 명가수 백년설 출연》이라고 소개되고 《고향설》의 가사가 실려있어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수첩에 적어가기도 하였다. … 이 노래를 부른 가수 백년설은 《태평》레코드회사의 전속가수로 음판을 통해 널리 알려졌는데 1940년에 《오케》레코드회사로 전속을 옮겨왔다.
-조령출의 수기집 《수난의 가요들과 나의 가사작품》에서 취록-
이 시기 백란아의 노래로 《태평》레코드에 취입된 김영일 작사, 김교성 작곡인 《찔레꽃》은 정서적인 애향가로 사람들속에 널리 불리워졌다. 이 노래는 《태평》레코드회사의 가요인들이 중국지방을 순회하면서 할빈에서 공연하던 과정에 창작된 노래다. 1940년대초에 이르러 민간에 급격히 류행되였던 애향가 《찔레꽃》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이 노래의 가사 2절의 1행에서 원작은 《노래하던 새 동무》였는데 후에 출판하면서 《내 동무》로 시어를 다듬었다. 그리고 2절의 가사 2행에는 《철의 객점 북두성》이란 시어가 있다. 철의 객점이란 철따라 음식을 만들어 파는 매점을 의미하며 북두성은 부엌에서 일하는 하녀이다.
이상에서 더듬어본것처럼 애향가는 이국과 타향객지에 나와 살고있는 우리 겨레의 마음들에 고향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애족의 사상감정을 심어주기때문에 이 시기 사람들속에서 널리 류행되였다.
2) 비가와 련정비가들을 더듬어
류행가라고 하는 종류에는 비가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비가라고 할 때 그것은 슬픈 노래를 의미한다. 민족의 수난기에 우리 인민들의 지배적인 감정은 나라를 잃은 슬픔이였다. 그렇기때문에 이 슬픔은 속절없이 눈물로 시드는 염세관이나 체념, 비관이 아니였다. 나라를 잃은것으로 하여 마음이 젖어들었던 우리 민족의 사상감정과 그 생활을 반영한 비가들에는 애민, 애족의 바탕이 있었으니 《황성옛터》는 이 시기에 창작된 대표적인 비가의 하나였다.
필자는 주체86(1997)년에 발행된 《민족수난기의 가요들을 더듬어》에서 이 노래의 창작경위에 대하여 상세하게 밝힌바 있다. 그후 문학예술출판사에서는 주체88(1999)년에 이 도서에 근거하여 《계몽기가요선곡집》을 출판하였는데 이 도서에도 《황성옛터》에 대한 창작경위가 실려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간단히 지적한다. 《황성옛터》의 작곡가 전수린은 개성이 고향이다. 그 는 열네살부터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작곡수업을 하였는 데 1925년경에 처음으로 창작한 작품이 《사양의 비도》 이다. 사양의 비도라고 하면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지는 슬픈 도시란 뜻인데 이 노래도 잃어진 조국에 대한 슬픈 감정을 담은 작품이다. 《황성옛터》는 1927년에 배천려관에서 창작되였다. 그 시기 연극단체인 《취성좌》의 녀배우 리애리수가 연극을 공연하던 막간에 나와 이 노래를 부르군 하여 일약 명가수로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1920년대후반기에 이르러 《취성좌》가 공연하는 극장들에는 《연극공연의 막간에 명가수 리애리수양이 독창에 출연, 명곡 <황성의 적(황성옛터)>외에 여러 곡》이라고 광고하여 관객들은 연극공연보다도 리애리수의 노래를 듣기 위하여 찾아오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이보다 앞서 《토월회》라고 하는 극단에서는 녀가수 윤심덕을 배출시켰다. 《황성옛터》의 작사자인 왕평과 작곡가 전수린은 고려의 옛성터였던 만월대를 생각하면서 거치른 성의 발자취란 뜻으로 거칠《황》자에 재《성》, 발자취《적》자를 달아서 곡명을 《황성의 적》이라고 하였다가 후에 《황성옛터》로 고쳤다. 이 노래가 창작된 이후 1930년대초에 이르러 리애리수의 노래로 《빅타》레코드에 취입되였다. 음판에 취입된 곡명은 《황성의 적》이였다. 이 시기 《빅타》의 음판을 통해 이 노래가 민간에 급격히 류행되자 일제는 《금곡령》을 내렸다. 그 리유는 이 노래에 담겨진 구슬픈 감정이 조선사람들로 하여금 반일로, 애국으로 승화될수 있다고 생각되였기때문이였다. 그후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곡명을 《황성옛터》로 고쳤으나 가사에 문제가 있다고 트집을 걸기때문에 《빅타》레코드회사에서는 기악곡을 만들어 경음악으로 음판에 취입하기도 하였다. 그 시기 《오케》레코드회사 사장인 리철은 이 곡을 자신의 트롬본독주곡으로 선택하여 무대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일제의 탄압속에서도 이 노래의 예술적생명력은 시들지 않았으며 우리 겨레는 《황성옛터》를 마음의 벗으로 부르면서 망국의 설음맺힌 한을 달래이군 하였다. 이 시기에 류행된 비가들에는 《황성옛터》와 함께 리란영의 노래로 《오케》레코드에 취입된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인 《목포의 눈물》도 널리 류행되였다.
1930년대초에 민간에 널리 류행되였던 이 노래는 님을 못 잊어하는 한 녀인의 련정적비감을 통하여 조국애가 은은히 안겨들고있다. 이 노래의 1절에서 삼학도란 시어는 목포의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을 이르는 말이다. 지금은 이 섬이 뭍으로 변했지만 광복이전에는 바다가운데 있었다. 삼학도는 바위로 되여있으며 리조시기에는 시인들이 이곳에 올라 시상을 고르며 노래를 엮던 승지였다. 특히 삼학도에 올라 해 뜨는 일출경과 달 뜨는 월출경을 바라보는 경치는 서해남단의 제일경이라고 하였다. 그러던것이 지금에 와서 뭍으로 변해서 옛말과 노래로만 전해올 뿐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절경을 안고있는 목포는 일제가 강점한 이후부터 리별의 목포, 눈물의 목포로 되여버렸다. 이 노래의 2절에서 《삼백년 원한품은 로적봉밑에》라고 한것은 16세기 임진조국전쟁과 관련되여있다. 전해오는 기록들에 의하면 임진조국전쟁시기에 이 봉우리에다 벼짚을 덮어 로적가리처럼 보이게 한 다음 적들을 그곳으로 유인해다놓고 포위전을 벌려 섬멸하였다 하여 로적봉이란 이름이 붙게 되였다고 한다. 련정가요형식으로 엮어진 이 노래에서 《유달산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라고 한것은 조국이 그리워 우는 마음을 님이라는 시어로 형상하 였다. 2절 가사의 시어에서 영산강이라고 한것은 전라남도 담양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물줄기가 광산, 라주, 함평, 무안 등 호남벌을 굽이굽이 누비면서 목포의 앞바다인 청호로 흘러 드는 강을 의미한다. 유달산과 영산강을 련정적비유의 시어로 선택하고 거기에 조국의 그리움을 님으로 묘사하였다. 1930년대초에 이르러 비가는 주로 련정적내용을 담고있는것이 많다. 이 시기 《목포의 눈물》과 함께 고복수의 노래로 《오케》레코드에 취입된 박영호 작사, 손목인 작곡인 《짝사랑》도 널리 불리워졌다.
그 시기 정서적비가로 널리 불리워진 《짝사랑》은 련정적비가이면서도 잃어진 조국에 대한 사랑이 은은히 깔려있다. 선률이 정서적으로 흐르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처량한 감정이 안겨드는 이 노래는 이 시기 주로 청춘남녀들속에서 널리 애창되였다. 1930년대에 이르러 《목포의 눈물》, 《짝사랑》과 더불어 남인수의 노래로 《오케》레코드에 취입된 리부풍 작사, 박시춘 작곡인 《애수의 소야곡》과 《물방아사랑》도 널리 류행되였던 련정비가이다. 우에서 더듬어본 《목포의 눈물》과 《짝사랑》은 시어와 선률의 밑바탕에 잃어진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은은히 담고있다면 《애수의 소야곡》과 《물방아사랑》은 순수한 련정적비가이다. 아래에 《애수의 소야곡》의 가사를 끌어온다.
※ 이 노래는 3절 2행에서 《모두가 흘러가면 덧없건만은》으로 불리워지고 출판되기도 하였으나 《오케걸작집》에 남인수의 노래로 취입된것이 옳다고 생각되여 그 시어를 선택하여 기록하였다.
은은하면서도 애조를 타고 흐르는 《애수의 소야곡》은 처음에 남인수의 노래로 《시에론》레코드에 취입되였던 《눈물의 해협》이였다. 그러던것을 후에 가사를 다듬고 곡명을 《애수의 소야곡》으로 고쳐서 남인수의 노래로 《오케》레코드에 취입된 후 이 노래가 민간에 널리 불리워졌으며 특히 녀성들속에서 애창되였다. 이 노래는 어디론가 멀리 떠나간 애인을 안타까이 기다리는 녀인의 소박한 순정을 담고있다. 정처도 없이, 기약도 없이 떠나간 님이련만은 행여나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인내력과 그 마음을 담고있는것으로 하여 그 시기 녀성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진 애창곡이였으며 기타곡이기도 하 였다. 이외에도 련정비가들로서는 《칠석날》, 《기다리는 마음》 등 수없이 많은 노래들이 창작되여 불리워졌지만 김정구의 노래로 《오케》레코드에 취입된 한명천 작사, 김용호 개사, 리시우 작곡인 《눈물 젖은 두만강》이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수 있다.
민족의 수난기에 창작된 련정가요들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에 속하는 《눈물 젖은 두만강》은 떠나간 님을 못 잊어 하는 추억의 노래로 되여있으나 사람들은 이 노래를 흔히 잃어진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불렀다. 조국이 그리울 때도 이 노래를 불렀고 님이 그리울 때도 이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가 창작된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필자는 이 이야기를 주체86(1997)년에 발행된 《민족수난기의 가요를 더듬어》에 상세하게 소개한바 있으며 그후 주체88(1999)년 문학예술출판사에서 발행한 《계몽기가요선곡집》에도 이 작품을 실으면서 같은 내용을 실었다. 아래에 그 내용을 함추려 소개한다.
1930년대중엽 극단 《예원좌》는 중국 동북지대로 순회공연을 떠났다. 룡정에서부터 공연이 시작되였는데 일이 될 때라 《동아일보》 북지지국에 근무하는 한 청년을 알게 되여 그의 안내를 받으며 여러곳에서 공연하다가 도문의 한 려관에서 려장을 풀게 되였다. 이 려관은 조선사람이 경영하고있었는데 《동아일보》 북지지국에 근무하는 청년과 려관주인은 잘 아는 사이였다. 때는 가을철이라 려관 뒤마당에는 두그루의 단풍나무가 서있었는데 한 나무는 심홍색으로 물들어있었고 다른 나무는 누런 금빛이였다. 배우들은 집을 떠난지가 오래되여 고향생각이 나서 이윽토록 단풍나무를 바라보고있는데 려관주인은 단풍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 단풍나무로 말하면 내가 고국땅을 떠나올 때 떠가지고 온 나무웨다. 빨갛게 물든것은 홍풍이고 누렇게 물든것은 금풍이웨다. 내가 고향을 떠나올 때는 3.1운동이 일어난 기미년 추파월이였지요. 그때 어린 단풍나무 몇그루를 떠가지고 두만강을 건너와 심었는데 이렇게 두그루만 살아 남아서 년년이 이때가 되면 제법 가을맛을 안겨주군 합니다.》 바로 그날 밤 리시우는 《추억》이라는 주제로 곡상을 골라잡기 위하여 사색을 더듬고있는데 옆방에서 난데없는 한 녀인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리시우는 려관집주인을 통해 알아보니 그 녀인의 남편은 만주(당시 중국의 동북지방)에 와서 반일투쟁을 하다가 일제에게 체포되였던것이다. 녀인은 이 소식을 전해듣고 두만강을 건너와 남편이 갇혀있는 형무소를 찾아가니 그는 이미 총살된 뒤였다. 공연집단이 도착한 이날은 바로 남편의 생일날이였다. 녀인은 려관방에서 조용히 술이나 한잔 부어놓으려고 하였는데 려관집주인은 이것을 알고 제물을 차려들고 왔던것이다. 려관집주인과 녀인의 남편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려관집주인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동아일보》 북지지국에 근무하는 청년과 리시우는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되였다. 그 이튿날 그 청년은 시상이 떠올라 그 감정을 시어로 엮어나갔는데 그가 다름아닌 한명천이란 청년이였다. 리시우는 그의 즉흥시에다 선률을 달아서 장월성이란 소녀배우가 나가서 이 노래를 부르도록 하였다. 그런데 객석에서는 난데없는 박수가 터져나왔고 거듭되는 재청으로 하여 장월성은 다시 이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안되였다. 성악을 전문으로 수업한 배우도 아닌 나어린 화술배우가 부른 이 노래는 그가 노래를 잘 불러서가 아니라 담고있는 내용이 사람들을 감동시켰기때문이다. 그후 공연집단과 함께 서울로 돌아온 작곡가 리시우는 시인 김용호에게 가사를 다듬어달라고 부탁하여 도문에서 장월성이 불렀던 가사는 1절과 후렴인 《그리운 내 님이여/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와 3절에서 《님 가신 이 언덕에 단풍이 물들고/ 눈물진 두만강》이란 시어만이 남게 되였다.
-1930년대중엽 극단 《예원좌》의 배우였던 장월성의 구술에서(1973년 5월 29일)-
1930년대후반기에 이르러 비가들은 조락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콜럼비아》, 《빅타》, 《태평》, 《오케》를 비롯한 각 레코드회사들이 경쟁적으로 음판들을 제작하여 노래가 상품화되다보니 사람들의 사상정서를 밝게 정화시켜 주어야 할 음악의 사명감에서 벗어나 무의미한 슬픔을 담고 있었기때문이였다. 인간생활에서 존재하는 슬픔이 다 예술로서의 취급대상으로는 될수 없다. 예술에서의 슬픔은 그것이 사회적으로 일반화될수 있어야 하며 《황성옛터》나 《목포의 눈물》, 《눈물 젖은 두만강》과 같이 취급대상의 비감이 예술적으로 승화될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시기 《선창》, 《리원애곡》, 《일자일루》, 《천리정처》, 《항구의 선술집》 등 많은 비가들이 무의미한 슬픔으로 하여 사람들을 감동시킬수 없었고 대중의 마음의 벗으로 될수 없었다. 특히 이 시기에 이르러 음악이 레코드를 통해 상품화되다 보니 가요의 예술적경지에 대해서는 더 말할것도 없었고 1930년대초와 중엽에 비하여 퇴보하는감이 들었다. 또한 이 시기는 창작지도기관이 없었고 따라서 음악을 건전하게 발전시켜나갈수 있는 협의기구조차도 없었다. 그렇기때문에 각 레코드회사들에서는 음악의 사상예술성과 사람들에게 음악을 통한 정서적교양에 대해서는 고 려도 없이 저저마다 음판들을 제작하여 상품으로 판매하 였다. 그러다보니 비가들중에는 무의미한 슬픔과 애수, 영탄 등으로 사람들에게 해독적작용을 놀수 있는 작품들도 있 었다. 1930년대후반기에 이르러 무의미한 슬픔을 담은 노래들은 사람들속에서 잘 불리워지지도 않았고 레코드가 제작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팔리지도 않았기때문에 각 레코드회사들에서는 자금난에 닥들여 아우성들이였다. 레코드를 사가는 사람들은 축음기를 통해 노래를 들어보고 귀맛이 당기고 부를만 한 노래라고 생각되여야 사가군 하였다. 1930년대후반기에 이르러 비가들이 조락되기 시작하였다고 아우성친것은 노래가 도식화되였기때문이다. 음의 하행진행에서 《씨, 라, 화, 미》나 《도, 미, 도, 씨, 라》와 같은 음조들이 자주 반복되면서 지어는 이 노래가 저 노래같고 저 노래가 이 노래와도 같은 류사성도 없지 않아 사람들속에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이것은 일제의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검열계》의 강요에 의하여 선률을 그렇게 끌지 않으면 《통과》될수 없었던 사정과 관련된다. 이 시기 이러한 진통속에서 각 레코드회사들은 새로운 맛을 줄수 있는 노래들을 창작하기 위하여 고심하고있었다. 이러한 모지름속에서 장세정의 노래로 《오케》레코드에 취입된 박영호 작사, 김해송(김송규) 작곡인 《련락선은 떠난다》가 창작되여 사람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졌다.
※ 이 노래의 가사 1절의 2행에서 《눈물젖은 손수건》은 레코드에 취입된 시어인데 이보다 앞서 백년설의 노래로 《태평》레코드에 취입된 《님 떠난 부두》에도 같은 시어가 있다. 그 시기 작가 박영호는 수많은 가사를 쓰다보니 《눈물젖은 손수건》이란 시어를 다른 작품에도 썼다는것을 몰랐던것 같다. 후에 백년설에 의하여 이 문제가 제기되자 작가는 《리별 슬픈 밤부두》로 고쳤다. 그후 가수 장세정은 무대에 나가 이 노래를 부를 때 《리별 슬픈 밤부두》로 부르군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속에서는 《리별 슬픈 밤부두》로 불렀는가 하면 《눈물젖은 손수건》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필자는 여기에 작가가 고쳐놓은것을 옮겼다. 1930년대후반기에 이르러 《련락선은 떠난다》가 사람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진것은 일제의 강점으로 하여 초래되는 청춘남녀들의 리별을 진실하게 반영하였기때문이다. 이 시기에 이르러 각 레코드회사는 탄식조의 도식적인 비가로는 기업을 운영해나갈수 없다고 생각하여 저저마다 특색있는 작품들을 내놓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 제일 골머리를 앓고있던 《빅타》레코드회사는 《포리톨》의 전속작곡가였던 리면상으로 작곡진영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리규남(림헌익)의 노래로 취입된 조령출(리가실) 작사, 리면상(리운정) 작곡인 《진주라 천리길》을 세상에 내놓았는데 이 작품이 이 시기 《빅타》레코드회사의 대표작으로 되였다. 아래에 《진주라 천리길》의 가사를 옮겨본다.
이 노래의 선률을 잘 엮어나간 리면상은 《포리톨》레코드회사에서 주로 민요조의 노래를 창작하였다. 대중가요(류행가)는 이 작품이 처음이였다. 회사측에서는 이 노래가 성과작으로 될수 있다고 생각하여 다른 노래들에 비하여 음판제작을 세배나 더 많이 하였지만 며칠사이에 다 팔리였다. 그리하여 파산에 직면하였던 위기를 면할수 있었다. 이 노래가 그 시기 사람들속에서 널리 애창되였던것은 진주에 와서 사는 리향민들의 생활감정과 그 심정이 반영되여 있었기때문이였다. 진주는 16세기 임진왜란때에 적아간의 치렬한 혈전이 벌어졌고 여러차례에 걸치는 방어전이 계속된 곳이다. 이 방어전에서 의병장인 김천일과 진주방어사인 최경회와 황진 등을 비롯한 수많은 군사들과 의병들이 용감하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진주의 곳곳에는 적들의 시체가 쌓이고 남강은 물이 아니라 피가 흘렀다고 한다. 더우기 진주의 촉석루에서 남강으로 내려서면 의기 론개가 적장놈의 목을 끌어안고 강물에다 몸을 던져 순절한 바위가 있다. 진주의 서장대나 북장대는 이 시기에 생겨난 이름이다. 그러나 이 땅을 지켜 싸운 선조들의 애국의 넋이 꽃피여 나지 못하고 일제의 식민지로 된것을 생각하는 이곳 주민들은 분한이 터져와 견딜수 없었다. 그 시기 진주에 사는 사람들의 이러한 마음을 달래여줄수 있는 노래가 창작되지 못하였고 설사 창작된다 할지라도 일제의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검열》을 통과할수 없었기때문에 그러한 가요가 있을리 만무하였다. 그래서 《진주라 천리길》이 이곳에 온 리향민들의 마음을 달래여줄수 있는 유일한 노래로 되였고 그것이 진주에 사는 사람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지면서 전국적판도로 류행되였다. 이 노래가 나온 이후 진주의 촉석루는 리별의 촉석루, 탄식의 촉석루, 눈물의 촉석루로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이 고장에서 살다가 더는 살래야 살수가 없어서 타향객지로 떠나는 사람들은 달밤이면 촉석루에 올라 교교히 흐르는 남강을 바라보며 이 노래를 부르고야 떠나갔고 이 고장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도 달밤이면 이곳에 올라 이 노래를 부르며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서글픈 심사를 달래군 하였다. 그런가 하면 이곳에 왔다가는 나그네도 촉석루에 올라 《진주라 천리길》을 불러보고야 갈길을 갔다고 한다. 그리고 진주에 와보지 못한 사람들도 이 노래를 부르며 진주라는 지명과 촉석루를 알게 되였다. 1930년대후반기에 이르러 비가는 생기없는 화초와도 같이 시들고있었지만 몇몇 비가들이 창작되여 그 명맥을 이어갔으니 《집 없는 천사》도 스쳐지날수 없는 노래다. 남인수의 노래로 《오케》레코드에 취입된 조령출(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인 《집 없는 천사》는 그 시기 광범한 대중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졌다.
조령출(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인 이 노래는 처음에 《빅타》레코드회사의 전속가수였던 리규남(림헌익)이 먼저 무대에서 불렀다. 후에 《오케》레코드회사의 인기가수인 남인수도 불렀다. 두 인기가수가 다같이 이 노래를 부르게 된것은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 이 시기 《오케》레코드회사의 전속작곡가인 박시춘이 리규남을 아는지라 우연히 길가에서 만나 자기네 회사로 오라고 하였다. 리규남은 자기가 《빅타》로 옮긴지 얼마 안되기때문에 좀 두고보자고 하였다. 그러면서 좋은 곡을 쓴것이 있으면 달라고 하였다. 박시춘은 리규남이가 실력있는 가수인지라 그의 부탁을 쾌히 수락하였다. 그로부터 며칠후 박시춘은 리규남을 찾아가 자신이 작곡한 《집 없는 천사》를 넘겨주었다. 리규남은 악보를 받아들고 몇번 시창을 해보더니 마음에 들어 흡족해하였다. 이 시기 리규남은 레코드취입과 무대출연을 병진해나갔는데 먼저 동양극장에서 진행되는 《빅타》가요인들의 공연에서 이 노래를 독창으로 부르고 후에 레코드취입을 하겠다고 하였다. 박시춘은 그의 실력을 잘 아는지라 편곡한 악보도 넘겨 주었다. 그로부터 며칠후 동양극장에서는 《빅타》레코드회사 가요인들의 공연이 진행되였는데 리규남은 《집 없는 천사》와 《진주라 천리길》을 불러 관객들의 절찬을 받았다. 한편 이 소식을 알게 된 《오케》레코드회사에서는 박시춘을 불러다놓고 노발대발하였다. 《오케》레코드회사에서 이렇게 나오게 된것은 《빅타》 레코드회사가 창작력량을 강화하기 위하여 애를 쓰고있던 때라 작가와 작곡가들을 빼앗길것 같아 우려되였기때문이였다. 《오케》레코드회사측에서는 자신의 전속작가와 작곡가들이 창작한 작품이니만치 우리가 주인이 되여야 한다는 립장에서 남인수도 이 노래를 무대에서 부르도록 하였다. 이렇게 되여 한 작품을 놓고 두 가수가 경쟁을 하다싶이 하였다. 리규남(림헌익)은 시원한 소리로 노래를 잘 불렀고 남인수는 고음계의 가수로 두 가수가 각기 자기 실력들을 발휘하였다. 그후 《빅타》레코드회사에서 《집 없는 천사》를 레코드에 취입하려고 할 때에 《오케》레코드회사측에서는 자기네 전속작가와 작곡가가 창작한 작품이니만치 레코드취입만은 절대로 양보할수 없다고 항의하여 결국 《집 없는 천사》는 남인수의 노래로 《오케》레코드에 취입되였다.
-조령출의 수기집 《수난의 가요들과 나의 가사작품》에서 취록-
이 시기 많은 비가들이 창작되였지만 이 노래는 눈물로 마음이 젖어들기만 하는 무의미한 가요가 아니다. 조국에 대한 사랑을 어머님의 옛사랑으로 비유하면서 설음맺힌 가슴속에 희망이 있고 고생속에 행복이 온다는 신심과 락관이 맥맥히 흐르는것으로 하여 사람들은 이 노래를 마음의 벗으로 삼고 불러왔던것이다. 《집 없는 천사》와 함께 남인수의 노래로 《오케》레코드 에 취입된 《울며 헤진 부산항》도 널리 불리워진 비가 이다.
이 노래는 곡명이 말해주듯 리별의 부산항을 취급대상으로 하고있다. 일제의 강점으로 하여 살길을 잃고 방랑하던 우리 민족은 조상전래로 물려오던 기름진 문전옥답을 일본침략자들의 《산업건설》에 빼앗기고 고향땅에서는 살수가 없어서 산설고 물설은 남북만주로 떠나갔거나 아니면 부산에서 일본 시모노세끼로 가는 《관부련락선》을 타고 낯설은 이국의 광산이나 탄광지대로 내몰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 시기 《관부련락선》을 타고 부산항을 떠나 오륙도를 지날 때면 누구나 할것없이 울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다고 한다. 고향을 떠나 정처없이 타국땅으로 떠나가는 실향민들은 더 말할것도 없었고 단기려행을 떠나는 경우에도 조국을 떠난다는 생각과 나라를 잃은 식민지민족이라는 생각이 들어 두눈에도 뜨거운 이슬이 맺혀 흘렀다. 그래서 부산항을 눈물의 항도라고 하였다. 검푸른 파도와 한가로이 날아예는 갈매기를 보아도 서글픈 감정만이 안겨들었고 하늘에 떠도는 구름과 석양빛 노을마저도 처량하게만 안겨들군 하였다. 특히 출발을 알리는 배고동소리가 울릴 때 련락선 란간머리에 매달려 울며 불며 오열하는 녀인들과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하다가 슬그머니 돌아서서 옷고름으로 젖어드는 눈시울을 닦는 녀인들을 볼 때면 리별을 당하지 않는 사람들도 가슴이 터져와 견딜수 없었다. 《울며 헤진 부산항》에는 고국을 떠나 일본으로 내몰리는 실향민들의 설음이 반영되여있다. 이 시기 백년설의 노래로 《태평》레코드에 취입된 고려성(조경환) 작사, 리재호 작곡인 《나그네설음》도 대표적인 비가에 속한다.
슬프게 흐르면서도 그 슬픔이 비감으로 좌절되지 않고 미약하고 소극적이나마 애국적감정으로 이어질수 있는 바탕이 깔려있었기때문에 《나그네설음》도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속을 전류처럼 흐르면서 민간에 널리 불리워졌다. 이외에도 《두만강 배사공》, 《봄잃은 락동강》, 《눈물의 국경》, 《쓸쓸한 려관방》, 《청춘극장》 등 지적해야 할 작품들은 많으나 우에서 언급한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이 노래들에 깔린 슬픔은 그 시기 우리 민족의 감정을 반영한것으로 하여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속을 흐르면서 류행되였다. 이상에서 더듬어본 비가들과 련정비가들은 민족의 수난기에 사람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진 노래들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사람들속에서 지탄을 받으며 랭대를 받아왔던 련정가요들도 있다. 랭대를 받던 련정가요
1930년대중엽과 말엽, 1940년대초에 이르러 《애수의 소야곡》, 《꽃이 핍니다》, 《련락선은 떠난다》, 《망향초사랑》, 《알뜰한 당신》, 《순정의 달밤》, 《코스모스탄식》 등이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는 수많은 련정가요들이 창작되였으나 그 노래들은 사람들속에서 불리워지지 못한채 존재를 마치군 하였다. 남녀간의 사랑이 예술로서의 취급대상이 되자면 노래에 담고있는 내용이 고결하고 사람들에게 주는 인식교양적가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시기 대부분의 련정가요들은 그렇지 못하였다. 아래에 1920년대말엽의 노래로 추정되는 왕평 작사, 가천정 작곡인 《님을 두고 가는 나를》의 가사를 례로 든다.
가요는 사람들이 공감될수 있는 문제의 발견이 있어야 하며 사회적으로 일반화될수 있는 호소력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노래는 작사자와 작곡가의 사색과 탐구가 없었기때문에 주제가 분명치 못한 형상의 빈곤을 초래하였다고 본다. 이 노래와 함께 리고범 작사, 전수린 작곡인 《버리지 말아요》도 이와 다를바 없는 작품이다.
우에서 례를 든 《님을 두고 가는 나를》, 《버리지 말아요》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수 있는 문제를 담지 못하였고 따라서 사람들이 스스로 노래에 마음이 끌려 애창될수 있는 예술적감동력이 없었기때문에 세상에 나오자마자 《비속한 가요》, 《너절한 가요》라고 랭대를 받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밖에도 박승훈 작사, 백파 작곡인 《그대 그립다》와 박루월 작사, 김탄포 작곡인 《사랑을 찾아서》, 김유영 작사, 송포 작곡인 《사랑의 노래(愛의 歌)》, 유도순 작사, 김탄포 작곡인 《야강애곡》 등 수많은 련정가요들이 창작되였으나 사람들의 쓰디쓴 랭소를 받다가 자취를 감추지 않으면 안되였다. 여기에 박루월 작사, 김탄포 작곡인 《사랑을 찾아서》를 더 례로 든다.
이 노래도 음악의 옷을 입고 세상에 태여나기는 하였지만 차라리 없느니보다 못한 가요여서 누구도 부르는 사람들이 없었다. 사랑이라는것이 아이들의 장난도 아니고 마음이 오고가면서 검은머리가 파뿌리되도록 운명을 같이하는 자주적인간의 일생에 관한 문제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담지 못하고 《이곳으로 피하여 오세요》, 《어서빨리 돌아와주세요》 등으로 시어들을 엮어나가면서 의의있는 문제를 담지 못하였기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에게 역겨운감을 줄뿐이였다. 이 시기 박루월은 《사랑을 찾아서》, 《청춘의 노래》, 《춘희》, 《봄날의 애수》, 《가을의 황혼》, 《무란루주》, 《몬파리》, 《마론레스코》 등 수많은 련정가요의 가사를 썼고 여기에 작곡가들이 선률을 달아놓았지만 어느 한 작품도 사람들속에서 애창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리고범도 수많은 련정가요의 가사들을 쓴 작가의 한사람인데 생명력을 지니고 전해오는 작품은 불과 몇몇밖에 되지 않는다. 아래에 리고범 작사, 백파 작곡인 《처녀 십팔세》의 가사를 적어본다.
이 노래는 우선 가사부터가 시가문학으로서의 이목구비를 갖추지 못하였기때문에 작곡가의 수고가 깃든 선률도 함께 잡초마냥 시들어버리지 않을수 없었다. 여기에 리고범 작사, 김월신 작곡인 《열여섯살 풋사랑》을 더 례로 든다.
이 노래의 작사자인 리고범은 많은 시가문학을 남겨놓은 작가의 한사람인데 어쩌면 이렇게 사회의 비본질적인 문제에 관심이 돌려졌고 열여섯살 소녀에게 비난의 시조(視照)가 돌려졌을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에서 이미 언급한바 있는 《처녀 십팔세》도 리고범 작사라는것을 놓고볼 때 이 작가는 왜 굳이 처녀들을 증오시하면서 야유나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는지 알수가 없다. 그리고 과부도 리고범의 가사에서 취급대상으로 되고있는데 그중에서 백파 작곡인 《모던서울》을 더 살펴보기로 하자.
녀성들의 인격을 무시하는 이런 노래를 녀성들이 부르기 만무하며 오히려 작사자와 작곡가들에 대한 비난을 야기시킬뿐이다. 가요란 문제성있는 주제를 돌출해내야 시대의 반영으로서의 음악의 사명에 이바지할수 있다. 그런데 《처녀 십팔세》, 《열여섯살 풋사랑》, 《모던서울》은 취급대상자체가 사회현실을 외면하고 비본질적인 세태를 엮어놓았을뿐이다. 그리고 사랑을 통해 인간의 고결한 정신세계와 인격이 존중되지 못하고 인간문제를 다루는데서 너무 경솔하였기때문이다. 이상에서 보는바와 같이 사람들의 생활에 반려되여야 할 련정가요는 이러저러한 편향을 범하면서 진통을 겪다가 1930년대중엽에 리부풍 작사, 박시춘 작곡인 《애수의 소야곡》과 박영호(처녀림) 작사, 김해송 작곡인 《망향초사랑》, 조령출(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인 《코스모스탄식》, 박영호 작사, 김해송 작곡인 《련락선은 떠난다》, 박영호 작사, 박시춘 작곡인 《물방아사랑》, 조령출(조명암) 작사, 전수린 작곡인 《알뜰한 당신》, 유도순 작사, 리룡준 작곡인 《순정의 달밤》 등 많은 련정가요들이 창작되여 민간에 널리 불리워지면서 사람들은 점차적으로 련정가요들에 대한 인식을 바로가지게 되였다. 그러나 사람들속에서 랭대를 받아온 련정가요, 가요로서의 예술적품격을 갖추지 못하고 비속하고 진부한감을 안겨 주는 련정가요들로 하여 1920년대말엽과 1930년대초의 대중가요계는 사람들의 인식측면에서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3) 서정적인 가요들을 더듬어
이 시기 류행가라고 하는 종류에는 서정적인 노래들도 있었다. 비가들이 범람하던 시기에 눈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감정을 밝게 정화시켜나가려는 시도에서 창작된 작품들이다. 이러한 가요들중에서 첫손에 꼽아야 할 작품은 남인수의 노래로 《오케》레코드에 취입된 조령출(조명암) 작사, 리봉룡 작곡인 《락화류수》이다.
이 노래의 가사에서 《새파란 잔디 얽어지은 맹세》라는 시어는 옛날에 아이들이 무슨 약속이나 언약을 하는 경우에 잔디를 뽑아서 그것을 엮으면서 《꼭 약속을 지키자》, 《변하지 말자》 등의 맹세를 다지군 하였던 세태적인 풍속에서 생겨난 말이다. 이 노래의 3절에서 《영춘화》라는 어휘는 개나리꽃을 의미한다. 《락화류수》는 비가들이 음단의 주류를 이루다싶이 하고 있을 때 서정적인 가요들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창작된 작품이다. 작가와 작곡가는 이 노래를 무도곡으로 널리 리용될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고심하던 끝에 창작하였다. 이 시기 우리 인민들은 곡절 많고 파란 많은 인간고해의 진창길을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라고 표현하였다. 1930년대말엽과 1940년대초에 이르러 비가에 권태를 느낀 사람들은 이 노래가 창작되자 널리 불렀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이 노래는 왕왕 다른 《락화류수》로 혼돈을 가져오기도 한다. 이 노래와는 다른 곡명의 《락화류수》들도 있어서 작품을 혼돈하기 쉽다. 1927년에 제작된 무성영화 《락화류수》의 주제가의 곡명도 《락화류수》이다.
이 작품은 조령출(조명암) 작사, 리봉룡 작곡인 《락화류수》와 혼돈을 가져 오기때문에 《강남달》로 고쳐서 출판하고있다. 이밖에도 김상배 작사, 리시우 작곡인 《락화류수》도 있다.
이 노래는 극단 《예원좌》가 중국에 건너가 순회공연을 하면서 룡정에서 창작한 작품인데 우에서 지적한 두 《락화류수》처럼 널리 불리워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노래를 아는 사람도 있을수 있어서 《해란강락화류수》로 곡명을 고쳤다. 이외에도 《락화류수목로》, 《락화류수호텔》도 있으나 혼돈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이 노래가 창작된 때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남조선에서는 조령출(조명암) 작사, 리봉룡 작곡인 《락화류수》를 전후부터 못 부르게 《금곡》시켰다. 작가가 공화국북반부로 입북하였다 하여 지난 시기 남조선당국자들은 《금곡령》을 내리고 출판도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부득불 가요집을 출판하는 경우에 조령출(조명암) 작사를 《김근 작사》로 이름을 바꾸어 출판하 였다. 민족의 수난기에 류행가라고 하였던 대중가요에는 백란 아의 노래로 《태평》레코드에 취입된 박영호(처녀림) 작 사, 리재호 작곡인 《망향초사랑》도 서정적인 가요의 하나였다.
※ 이 노래의 1절 3행에 《고동은 울어도》란 시어는 《도라는 울어도》였던것을 다듬은것이다. 《도라》란 어휘는 사람의 이름이였음.
이 노래가 창작되여 음판에 취입된 후 사람들속에서 급격히 류행되자 영화 《반도의 봄》의 창조집단에서는 주제가로 리용하였다. 밝은 음조로 흐르는 이 노래는 《고동은 울어도 나는야 웃는다》, 《리별은 슬퍼도 나는야 웃는다》, 《노래는 슬퍼도 나는야 웃는다》와 같이 일제의 강점으로 인하여 초래된 우리 민족의 슬픔을 웃음으로 극복해나가려는 의지가 담겨 져 새로운 맛을 주었고 3절의 마지막행에서 《어둠실린 이 강산에 희망은 밝으리》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어 사람들은 이 노래를 벗삼아 불러왔던것이다. 이 노래와 함께 1930년대초에 창작된 리면상 작사, 작곡인 《들국화》도 서정적인 가요의 하나이다.
이 노래는 1930년대초에 채규엽이 《콜럼비아》레코드에 취입하였으나 일제는 이 작품에 《금곡령》을 내리고 상점에 나간 레코드들을 모두 압수하여 깨버렸던것이다. 일제의 《조선총독부》학무국이 이 작품을 문제시하였던것은 가사의 시어때문이였다. 그 시기 변함없이 애국의 한마음을 지니고 묵묵히 민족의 얼과 지조를 지켜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수정에다 비기며 일제의 탄압도 두려워하지 않는 높은 절개를 《오상국화》로 비유하여 왔다. 오상국화란 서리에 거만한 국화란 뜻인데 들국화를 이르는 말이였다. 일제는 이 노래의 가사에 《맑고 푸른 하늘이 너의 넋이냐/락엽지는 산과 들에 웃음 덮어라》고 한 시어와 2절에서 《수정처럼 맑음이 너의 얼이냐/락엽지는 이 가을에 기쁨 덮어라》를 문제시하였던것이다. 《들국화》도 꼭같은 곡명이 있어서 혼돈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고운봉의 노래로 《콜럼비아》레코드에 취입된 성경진 작사, 손목인 작곡인 《들국화》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이 두 작품은 조령출(조명암) 작사, 리봉룡 작곡인 《락화류수》와 무성영화 《락화류수》의 주제가인 《락화류수》처럼 대중적으로 널리 불리워지지는 않았기때문에 곡명을 고치지는 않았다. 우에서 지적한 노래들과 함께 박향림의 노래로 《오케》레코드에 취입된 조령출(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인 《코스모스탄식》도 정서적인 작품의 하나였다. 이 노래는 청춘남녀간의 리별을 취급대상으로 하고있으나 눈물과 슬픔이 아니라 웃으며 헤여지던 때를 추억하면서 선률이 은은하고 정서적으로 흐르기때문에 널리 불리워졌다.
이 노래는 눈물로 헤여지는 련정비가가 아니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 사람들의 감정은 눈물보다도 밝은 앞날을 지향하였기때문에 울면서 헤여지는 사랑보다도 웃으며 헤여지는 밝은 색조의 작품이 마음에 들어 널리 애창되였다. 이밖에도 서정적인 가요들은 여러 작품들이 있으나 우에서 지적한 작품들이 사람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진 대표작이라 할수 있다.
4) 겨레의 약동을 담아보려고 시도하였던 대중가요들
우리 민족은 일제에게 나라를 잃은 엄청난 슬픔으로 눈물도 많이 흘렸다. 그러다보니 설음맺힌 겨레의 마음에 반려되여온 노래들도 대부분 눈물로 젖어든 음률들이였다. 그러나 1930년대후반기에 이르러서는 드디여 슬픔에서 깨여나 눈물을 웃음과 랑만으로, 힘과 용기로 바꾸려는 시도가 맥맥히 굽이쳐흘렀다. 1939년에 남인수의 노래로 《오케》레코드에 취입된 《감격시대》와 김정구의 취입인 《바다의 교향시》가 이러한 시도에서 창작된 작품이다. 아래에 《감격시대》의 가사를 끌어온다.
박력있는 선률로 이어지는 《감격시대》는 락관과 희망에 넘쳐 휘파람을 불며 가자라고 하는 랑만적호소와 자신의 힘으로 앞날을 개척해나가기 위하여 힘차게 노를 저어가는 행운의 배길, 새파란 잔디가 피여나는 희망의 대자연과 봄동산 등 시어의 취급대상이 씨원스럽고 약동적이다. 이 노래는 《오케》레코드회사 가요인들이 중국 동북지대로 순회공연을 하는 과정에 일제와 맞서 항일혁명투쟁을 승리에로 이끌어나가시는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이시며 위대한 수령이신 이 시기 《감격시대》와 함께 김정구의 노래로 《오케》레코드에 취입된 조령출(조명암) 작사, 손목인 작곡인 《바다의 교향시》도 비가에서 탈피하고 겨레의 약동을 담아보려 시도하였던 작품이다. 《바다의 교향시》는 김릉인 작사로 자주 혼돈을 가져 오는데 그의 시 《바다의 교향시》는 전혀 다른 내용 이다. 강해인 작사, 박시춘 작곡인 《감격시대》와 조령출(조명암) 작사, 손목인 작곡인 《바다의 교향시》는 예술가요로 구분하여야 하나 그 시기 《오케》음판에는 류행가로 쟝르를 달았기때문에 대중가요에서 더듬어보게 된다. 아래에 《바다의 교향시》의 가사를 끌어온다.
비가의 류형에서 탈피하기 위하여 시도하면서 창작된 《바다의 교향시》는 《감격시대》와는 달리 뚜렷한 문제의 제시는 없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을 받고있던 시기에 기백있고 용용한 감을 주는 가요가 창작되였다는것은 의의가 있다고 본다. 이 노래보다 앞서 1936년에 창작된 《콜럼비아》레코드회사 문예부의 집체 작사, 작곡인 《마라손제패가》는 자랑스러운 우리 겨레의 노래였다. 채규엽의 노래로 《콜럼비아》레코드에 취입된 이 작품은 1936년 도이췰란드 베를린에서 진행된 세계마라손경기대회에서 1등의 영예를 지닌 손기정과 3등을 한 남승룡을 취급대상으로 선택하였다.
이 작품은 1936년 세계마라손경기대회에서 1등을 한 손기정과 3등을 한 남승룡을 축하하여 창작된 노래지만 세월이 흘러가도 시들지 않고 우리 인민들속에서 긍지높이 불리워 졌다. 이밖에도 고운봉의 노래로 《오케》레코드에 취입된 유도순 작사, 한상기 작곡인 《통군정》과 남인수의 노래로 《오케》레코드에 취입된 조령출(조명암) 작사, 손목인 작곡인 《청춘일기》를 비롯하여 많은 가요작품들이 창작되여 불리워졌지만 여기에 《처녀합창》을 더 례로 든다. 장세정의 노래로 《오케》레코드에 취입된 박원 작사, 김해송(김송규) 작곡인 《처녀합창》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1930년대후반기와 1940년대초에 이르러서는 눈물과 리별의 련정가요가 아니라 생기있고 박력있는 청신한 노래들을 시도하여 창작한 작품들도 적지 않다. 그렇다고 하여 매 작품들이 다 완미스럽다는것은 아니다. 하지만 비가들로 마음이 젖어들고있을 때 이를 탈피한 작품들도 창작되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미약하나마 이러한 노래들도 우리 민족의 문화계몽에 이바지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자못 크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노래들이 일제의 탄압으로 하여 왕성하게 창작되지 못하였다. 1940년대초에 이르러 가요인들은 주로 중국의 동북지대로 순회공연을 하면서 이 과정에 몇몇 가요들이 창작되여 간신히 대중가요의 명맥을 이어왔다.
5) 가요극, 가극, 연극, 영화의 주제가들을 더듬어
류행가(대중가요)라고 하는 쟝르에는 가요극, 가극, 연극, 영화의 주제가들도 있다. 이러한 극예술작품들과 영화의 주제가로서는 1926년에 제작된 무성영화 라운규 작 라운규 연출인 《아리랑》의 주제가 《신아리랑》이 민간에 널리 보급되였으며 이보다 앞서 1925년에 제작된 무성영화 《장한몽》의 주제가 《장한몽》이 류행가라는 쟝르가 아직 풍미하기 이전의 공간을 타고 민간에 불리워졌다.
1925년에 제작된 무성영화 《장한몽》은 일본작가 오자끼 고오요오가 쓴 《곤지끼야사》라는 소설을 조일제(조중환)가 우리 나라의 립지조건과 풍습에 맞게 개작한 작품이다. 일본소설 《곤지끼야사》와 《장한몽》을 읽어보면 개작이 아니라 새롭게 창작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시기 조일제의 이 번안윤색소설을 극단 문수성에서 1913년에 연극으로 각색하여 공연한 이후에 무성영화로 제작하였다. 이 영화는 리수일과 심순애가 서로 사랑하다가 심순애의 마음이 변하여 돈 많은 은행지배인 김중배에게 시집을 간다. 그후 심순애가 시일이 흐르면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리수일과 사랑하는 내용을 담고있다. 우에서 더듬어본 무성영화 《장한몽》의 주제가 《장한몽》의 가사는 이러한 내용을 담고있으며 선률은 창가풍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신작가요가 창가 이외에는 별로 없었던 시기 1927년에 제작된 무성영화 《세 동무》의 주제가 《세 동무》가 민간에 불리워지기도 하였다.
이 영화의 대본과 연출, 작사와 작곡은 서정 김영환이며 주제가를 부른 가수는 이 작품의 주인공으로 출연하였던 김련실이다. 그후 김련실은 이 노래를 《콜럼비아》레코드에 취입하였다. 무성영화 《세 동무》는 1927년에 제작되여 1928년 1월에 단성사에서 처음으로 상영되였다. 이 시기 영화의 주제가로서는 1927년 여름에 제작된 무성영화 《락화류수》의 주제가 《락화류수(강남달)》가 널리 불리워졌으나 이미 우에서 더듬고 넘어왔기때문에 더 언급하지 않는다. 1927년에 무성영화 《락화류수》와 때를 같이 하여 제작 된 심훈 작 심훈 연출인 무성영화 《먼동이 틀 때》의 주제가인 민요조의 노래 《먼동이 터온다》도 민간에 불리워졌다.
이 영화는 그 시기 인기배우였으며 인기가수의 한사람이였던 강홍식이 주인공으로 출연하였으며 음판에 이 노래를 취입한것도 그였다. 무성영화 《먼동이 틀 때》가 창작된 후 1928년에는 무성영화 《류랑》의 주제가 《류랑가》가 민간에서 불리워졌다.
무성영화 《류랑》은 영진이란 청년이 10년간 객지에서 고생하다가 부모동생이 그리워 고향을 찾아온다. 그러나 나서 자란 정든 집은 헐리였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살길을 찾아 북간도로 떠나고 없었다. 그는 거처할 곳이 없어서 이웃집에 살던 순이라는 처녀네 집에 머물면서 이 마을 야학을 지도한다. 그러던 어느 날 순이가 이 마을의 지주이며 부호인 김병조의 첩으로 팔리워 가게 되자 자살하려는것을 구원하고 그와 함께 북간도로 떠나간다. 영진이와 순이, 두 남녀가 마을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성벽을 넘어 험한 오솔길에 오르자 지주 김병조의 하인들이 달려든다. 영진은 그들과 사생결단으로 치렬한 격투끝에 순이와 함께 눈물겨운 리향의 길을 떠나면서 《류랑가》를 부른다. 이 노래에는 무성영화 《류랑》의 줄거리가 함축되여있다. 이 영화의 대본은 김영팔 작이고 연출은 김유영이다. 해설과 작사, 작곡은 서정 김영환이며 노래를 부른 가수는 리애리수이다. 리애리수는 《황성옛터》를 부른 가수였고 《류랑가》를 《콜럼비아》레코드에도 취입하였다. 무성영화 《류랑》이 세상에 나온 이후 1929년에는 무성영화 《젊은이들의 노래》가 제작되고 주제가 《젊은이들의 노래》도 한때 민간에 류행되였다.
무성영화 《젊은이의 노래》의 대본과 연출은 서정 김영환이며 해설과 주제가의 가사, 작곡도 서정 김영환이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진보적연극단체였던 《토월회》의 녀배우 석금성이다. 무성영화의 주제가는 노래를 잘 부르는 변사나 아니면 가수가 직접 육성으로 부르다가 1929년경부터 레코드에 취입하여 전축이나 축음기의 음로에다 증폭장치를 하였다. 그리하여 순수 육성으로만 부르던 주제가는 기계적수단 으로 해결하였다. 그러나 1936년 유성영화(토오키)가 도입되기전까지는 영화의 장면을 변사가 육성으로 해결하였 고 배우들의 대사들도 변사를 통하여 관객들에게 전달되였다. 무성영화 《젊은이들의 노래》의 주제가 《젊은이들의 노래》는 석금성이 《콜럼비아》레코드에 취입하였는데 이것이 기계적수단으로 주제가를 해결한 첫 영화였다. 그 이후 1930년대중엽에 이르러 우리 나라에도 유성영화(토오키)의 도입이 적극적으로 시도되면서 무성영화의 주제가들과 변사의 해설들을 레코드에 취입하여 유산들이 남게 되였다. 그 시기 인기배우였던 석금성은 작가 최로사의 어머니이다. 석금성은 광복이전에 《토월회》, 《취성좌》, 《연극사》, 《미나도좌》 등 여러 연극단체들에서 주역으로 출연하였던 인기배우였다. 그는 여러 무성영화의 주제가들을 음판에 취입하였고 1930년경에 김안서(김억) 작사 전기현 작곡인 《옛 생각》을 《콜럼비아》레코드에 취입하였다. 무성영화 《젊은이들의 노래》가 세상에 나와 민간에 류행 되고있을 때인 1932년에는 무성영화 《개화당의문》이 제작되여 그 주제가인 《젊은 김옥균》도 민간에 널리 불리워졌다. 이 영화의 대본과 연출은 라운규이며 주제가의 가사도 그의 작이다. 작곡은 김영환이며 영화의 해설은 변사였던 박창원이였고 노래도 그가 불렀다.
무성영화 《개화당의문》은 19세기말 김옥균의 갑신정변을 취급한 영화였다. 이 영화가 제작되자 일제의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검열》이라는 탄압수단을 동원하여 필림을 상당한 정도로 잘라버리는 악착한짓을 하였다. 그리하여 수많은 장면들이 삭제되여 심하게 상처를 입은 영화가 단성사에서 상영되였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의 개화의 뜻을 잘 알고있었으며 일제의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검열》로 하여 심한 부상을 입었다는것도 알고있어서 눈물을 흘리며 관람하였다고 한다. 무성영화 《개화당의문》과 때를 같이하여 1932년에 제작된 《방아타령》의 주제가 《방아타령》도 스쳐지날수 없는 노래다.
1932년 《신흥프로덕션》에서 제작한 이 영화는 리조말엽 어느 한 고을에서 리조봉건통치배들의 전횡을 반대하여 민간에서 란이 일어난 내용을 취급하고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반봉건투쟁에 참가하여 수십년간 정배살이를 하고 돌아온 주인공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대신 무모하고 허무한짓이였다는것을 주제로 하고있다. 그렇지만 민요조로 이어지는 주제가만은 고향땅을 떠나지 말고 정든 이웃들과 함께 살자는 내용으로 하여 신민요로 불리워졌다. 서상필의 영화해설과 함께 강석연의 노래로 《콜럼비아》레코드에 취입된 이 작품은 작사자와 작곡가가 밝혀져있지 않다. 일부 기록들에 의하면 《방아타령》을 김동환 작사, 안기영 작곡으로 밝히고있다. 1936년에 이르러 우리 나라에는 뒤늦게야 유성영화(토오키)가 도입되여 《춘향전》과 《아리랑 3편》의 대사가 필림 에 록음된이래 《노래조선》을 비롯한 여러 영화들에 배우들의 대사와 주제가가 직접 필림에 취입되였으나 오늘에 와서는 찾을길이 없다. 이 시기 영화와 연극, 가극, 가요극 등의 주제가들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극단 청춘좌에서 공연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주제가 《홍도야 울지 말아》이다. 림선규 작, 홍해성 연출인 이 연극은 1930년대를 대표하는 작품이며 주제가 《홍도야 울지 말아》는 사람들속에서 널리 애창되였다.
《홍도야 울지 말아》는 연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전편의 주제가이다. 이 연극은 림선규작이고 《콜럼비아》레코드에 김영춘의 노래로 취입된 가요작품의 작사는 리고범이며 작곡은 김준영이다. 이 연극의 후편의 주제가는 연극의 제명대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이다. 심련옥의 노래로 《콜럼비아》레코드에 취입된 이 작품의 작사와 작곡은 우와 같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1937년에 동양극장에서 공연된 림선규 작 홍해성 연출인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주제가가 널리 불리워진데 이어 1940년대초에 이르러 《태평》레코드회사 가요인들이 공연한 가요극 《직녀성》의 주제가 《직녀성》도 많이 불리워졌다. 가요극 대본과 가사는 박영호(처녀림)이였고 작곡은 김교성이다. 이 시기에 가요극이라 하면 가극과 같은것이 아니라 간단한 극적줄거리에다 대사와 행동과 노래가 배합되는 작품이였다. 가요극 《직녀성》의 주인공은 백란아였으며 레코드취입도 백란아였다. 이 작품은 원작이 음판에 취입된이래 가요극을 개작공연하면서 가사가 달라지기도 하였다. 원작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개작되여 불리워진 가사는 다음과 같다.
이렇게 가요극의 주제가들이 이 시기에 류행가의 옷을 입고 불리워지는 속에 가요극 《직녀성》보다 앞서 1938년에는 가요극 《락동강》의 주제가 《락동강 칠백리》와 《록수청산》의 주제가 《록수청산》이 불리워졌다. 운치있는 민요조의 노래 《락동강 칠백리》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아래에 가요극 《록수청산》의 주제가인 민요조의 노래 《록수청산》의 가사를 적어본다.
우에서 례를 든 《락동강 칠백리》, 《록수청산》과 함께 같은 해에 제작된 유성영화(토오키) 《애련송》의 주제가인 《애련송》도 사람들속에서 애창되였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문예봉과 리백수였고 대본과 연출은 김유영이다. 가사는 극작가이며 연출가였던 서항석이였고 작곡은 홍란파이다. 노래를 부른 가수는 박향림이였으며 후에 《콜럼비아》레코드에도 취입되였다. 이 시기 영화 《복지만리》의 주제가 《대지의 항구》도 사람들의 추억속에 남아있는 노래다.
1940년에 제작된 이 영화의 주제가 《대지의 항구》가 사람들속에서 불리워졌던것은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기때문이였다. 영화 《복지만리》는 《고려영화회사》에서 일제의 《조선총독부》의 지령에 의하여 《만주영화협의회》와의 합작 제1회작품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일제의 《황국신민화》, 《동양평화》, 《만주락토건설》을 주제로 하여 제작하라는 이른바 일제의 지령에 의해 만들어졌다. 1940년에 이르러 일제는 1937년에 일으킨 중일전쟁을 결속하지 못한채 《아시아의 맹주》, 《대동아공영권》을 꿈 꾸면서 태평양전쟁준비에 열을 올리고있었다. 이 시기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중국에서 조선사람들과 중국사람들의 반일의 기치를 제일 무서워하였다. 일본침략자들은 조중인민들사이에 오해와 불신, 대립과 갈등관계를 조성하기 위하여 민족리간책동을 집요하게 추구하고있었다. 1940년경에 이르러 일제는 조선사람들이 사는 집단부락에 《비적》들이 많다고 외곡선전하였으며 저들이 마치도 중국인민들의 복리와 행복을 지켜주는 《구세군》, 《구세주》라는 가면을 쓰고 나섰다. 일제는 《고려영화회사》에 일본을 미화하는 이러한 영화를 만들라고 하였으나 창조집단은 이에 순응하지 않고 조선인민들과 중국인민들간에 대립이 아니라 화친을 주제로 하는 작품을 만들었던것이다. 이 영화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에서 막벌이로동을 하던 4명의 조선청년들이 민족적멸시와 천대를 받다 못하여 자기들의 고향인 무산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들에게 고향은 없는것이나 다름이 없었고 어디에 가나 일제의 착취로 하여 합당한 일자리가 없었다. 그들은 하는수없이 마음에 없는 목재소에 입직하여 산판로동을 해보았지만 함바집 식비조차도 물수 없는 형편에서 굶주림을 면할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네명의 청년들은 중국의 동북지방에 살기 좋은 《락토》를 건설한다는 일제의 기만선전에 속아 목재소를 탈출하여 그곳으로 갔으나 거기에도 그들이 살아나갈수 있는 생의 터전은 없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한가닥 희망을 안고 일제가 《락토건설》을 떠드는 조선인집단부락건설에 나선다. 이 시기 일제가 조선인집단부락건설을 강요하여나섰던것은 저들의 《감시》와 《치안유지》에 유리하였기때문이며 반일운동을 막아내자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중국지방에 와서 사는 조선사람들은 아무데도 거처할 곳이 없어서 집단부락건설에 강제적으로 내몰린다. 그들의 힘겨운 로동으로 드디여 집단부락건설이 완공되고 이곳에다 살림을 펴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중국인집단부락사람들이 총과 칼, 창을 들고 조선인집단부락을 향해 쳐들어오고있었다. 일제의 민족리간책동으로 인하여 조선인부락을 비적집단으로 오해하고있었기때문이였다. 이 위기의 순간에 강은은 수습책을 생각한다. 그는 두 민족사이에 빚어지는 이 위기를 미연에 막기 위하여 힘들게 건설한 부락에다 불을 지른다. 이때 홰불을 켜들고 조선인집단부락을 치려고 달려왔던 중국인부락사람들은 난데 없는 화재가 일어나자 어리둥절해 한다. 강은은 그들을 향해 나서서 《여러분! 조선사람들과 중국사람들은 하등의 싸울 근거가 없습니다. 우리는 당신들과 싸울 의향이 없습니다. 서로 싸울것이 아니라 화친하여 사이좋게 지냅시다!》라고 한다. 그가 거듭 이 말을 강조하는 사이에 불길이 온 마을에 타번지기 시작하자 중국인부락사람들은 총과 칼, 창을 놓고 불을 끄는데 협력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조선인부락의 재화를 구제한다. 다음날 아침 마을사람들은 불탄 자리에서 강은의 시체를 발견한다. 그는 죽음으로 이 충돌을 막으려 하였던것이다. 강은의 희생을 목격한 중국인부락사람들은 조선사람들과 대립할것이 아니라 화친하여 서로 사이좋게 지내기로 결의하고 화재를 입은 집들을 복구하는데 적극 도와나선다.
이 영화의 창조집단은 일제의 강요에 순응하는척 하면서 조중인민의 화친을 주제로 한 영화를 만들어냈던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제작한 연출가 전창근은 일제의 경찰에 체포되여 감옥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전창근은 중국 무창대학출신이며 한때 김구가 운영하던 삼일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었다. 그는 민족주의자로서 일제경찰의 《요주의인물》로 등록되여있었다. 그런데 영화 《복지만리》를 제놈들의 뜻대로 만들지 않았기때문에 이것을 구실로 그를 체포하였다. 이 영화를 만든 연출가가 일제경찰에 체포되였다는 소문이 퍼지자 주제가 《대지의 항구》와 《복지만리》가 사람들속에서 널리 애창되였다. 영화의 제명을 그대로 곡명에 옮긴 《복지만리》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이밖에도 노래와 무용이 배합된 가요극 《락화삼천》의 주제가 《락화삼천》도 민간에 널리 류행되였던 노래다.
김정구가 주역으로 출연한 가요극 《락화삼천》의 대본과 작사는 조령출(조명암)이며 작곡은 김해송이다. 주제가는 후에 김정구의 노래로 《오케》레코드에 취입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가요극 《락화삼천》은 다른 주제가도 있다. 곡명이 《꿈꾸는 백마강》으로 되여있는 이 노래는 주인공의 친구역으로 등장한 리인권이 불렀고 작곡은 림근식이였으며 작사는 조령출이다. 가요극 《락화삼천》은 대사와 행동과 무용이 배합되여있는데 이 주제가의 앞에는 대사가 있다.
1930년대말엽과 1940년대초에 이르러 많은 가요극의 주제가들이 음판에 취입되여 불리워졌다. 이무렵에 가극의 주제가들이 어지럽던 음단에 청신하게 고결한 맛을 안겨주었다. 이 시기 대표적인 가극의 주제가는 《금강산팔선녀(견우직녀)》이다. 1939년과 1940년에 이르러 《빅타》레코드회사는 류행가풍을 피하고 예술가요의 품격을 갖춘 작품들을 창작하기 위하여 고심하였다. 가극 《금강산팔선녀(견우직녀)》의 주제가는 리면상과 안기영의 작곡들이다. 그중에서 설의식 작사, 안기영 작곡인 《진주담의 노래》, 《환우곡》은 이미 예술가요편에서 언급하였기때문에 여기서는 설의식 작사, 리면상 작곡인 《직녀의 노래》를 적어본다.
이상에서 더듬어본바와 같이 일제의 착취밑에서 시달리던 민족의 수난기에는 영화, 연극, 가요극, 가극의 주제가들이 신민요 또는 류행가, 예술가요의 종류로 불리워지기도 하였다. 우에서도 이미 언급하였지만 민족수난기가요의 범주에는 동요, 예술가요, 신민요, 류행가 등이 모두 포괄되며 이러한 노래들이 미약하나마 우리 민족의 애국문화계몽사업에 이바지하여 왔다. × ×
일제의 착취밑에서 겨우 명맥을 이어오던 가요계는 1940년부터 그 생명력을 유지해나갈수 없었고 가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기 위하여 창작에 열을 올렸으나 그것은 실천에로 옮겨질수 없었다. 1936년 8월 7대 《조선총독》으로 기여든 미나미 지로는 조선사람들에 대한 탄압책동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는 1937년 4월에 《조선문예회》를 조작한 이후 친일적인 문학예술작품창작을 강요하였으며 이것을 낮은 단계로부터 점차 높은 단계로 나사못을 조이도록 하였다. 이러한 탄압속에서 각 레코드회사는 용의주도하게 탄압을 피하면서 각종 가요들을 음판에 취입하였으나 올가미는 점점 조여들기 시작하였다. 1937년 7월 7일 일제의 침략책동으로 인하여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조선총독》으로 기여든 미나미 지로는 조선의 예술인들을 《황군위문공연》에 내몰려고 하였다. 그러나 각 연극단체들과 영화회사, 레코드회사들에서는 《작품이 준비되지 않았다.》, 《중견배우들이 앓고있는중이여서 현재로는 동원불가능하다.》는 구실로 이를 회피하였다. 다만 1938년에 악명 높은 《조선총독부》의 강요에 따라 《조선영화회사》의 명칭으로 《군용렬차》가 제작되였고 1939년에는 방한기 연출, 독은기의 주역인 《승리의 뜰》, 리익 연출인 《국기밑에서 나는 죽으리》가 제작되였을따름이다. 이렇듯 1930년대후반기는 일제가 일으킨 중일전쟁의 어지러운 광풍으로 일제의 파쑈폭압이 더욱 강화되였고 《내선일체》의 구호밑에 1940년에는 조선사람의 이름을 일본이름으로 고치는 《창씨개명》까지 강요당하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 각 레코드회사들에서는 노래를 취입하는 경우 조선말로 1절을 부르고 다음은 일본말로 불러야 하였으며 2절을 부르고는 3절을 더 부를수 없었다. 이렇게 음판을 제작하여 레코드상점에 내가면 구매자들이 들어보고 일본말 노래가 나오기때문에 사가지 않았다. 우리 인민들은 이 시기에도 반일감정이 높았기때문이다. 그리하여 레코드회사들에서는 가수가 일본말을 못한다는 구실을 대고 남인수의 취입판인 《울며 헤진 부산항》과 《어머님 안심하소서》, 백년설의 취입판인 《나그네설음》, 백란아의 취입판인 《아리랑랑랑》 등을 제작하였다. 1941년에 이르러 일제는 아시아의 패권을 노리면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전시체계확립》을 강요해나섰으며 조선의 청장년들을 강제로 침략전쟁에 내몰았다. 그런가 하면 길가는 처녀들과 젊은 녀인들을 강제로 랍치하여 일본군 성노예로 끌어갔으며 조선말대신 일본말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영화회사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조선영화회사》라는 어용단체를 만들고 배우들을 강제로 내몰아 《지원병》과 《기미또 보꾸(너와 나)》라는 영화를 만들도록 강요하였으며 작가들과 작곡가들에게 총칼을 휘둘러대며 《군가》들을 창작하라고 강박하였다. 이 시기에 일부 연극단체들과 각 레코드회사의 가요인들은 소편대를 무어가지고 중국에서 사는 조선인부락들을 찾아 순회공연의 길에 올랐다. 이를테면 몸빼기였다고 할수 있는데 이들을 가리켜 《방랑극단》, 《방랑의 가요인》들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풍진을 겪으면서 중국의 동북지방들에서 순회공연의 나날들에 창작된것이 박향림이 부른 박영호(처녀림) 작사, 리룡준 작곡인 《이국의 등불》이다. 아래에 《이국의 등불》의 가사를 끌어온다.
아래에 백년설이 부른 유도순 작사, 전기현 작곡인 《제3류랑극단》을 더 례로 든다.
우에서 지적한 두 작품은 신세타령에 지나지 않으나 1940년대초에 중국 동북지방에서의 방랑생활을 반영하였다. 이 작품외에도 백년설이 부른 박영호 작사, 전기현 작곡인 《류랑극단》이란 곡명도 있었다. 그런데 류랑극단이면 류랑극단이지 왜 하필이면 《제3류랑극단》이라고 곡명을 달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에서 더듬어본 노래의 곡명을 《제3류랑극단》이라고 하였던것은 그 시기 이러한 방랑극단이 많았기때문에 조직된 순서대로 《1류랑극단》, 《2류랑극단》, 《3류랑극단》, 《4류랑극단》 이런 식으로 명칭을 달았다. 우에서 더듬어본 작품들 이외에도 박영호(처녀림) 작사, 손목인 작곡인 《류랑선》, 《류랑마차》, 리란영과 리봉룡이 부른 박영호(처녀림) 작사, 김해송 작곡인 《고향은 부른다》 등 많은 노래들이 창작되여 해외에서나마 간신히 가요계의 명맥을 이어오다가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러므로 오늘에 와서 광복전 가요들을 더듬어볼 때 1930년대말엽과 1940년대초에 이르러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받아왔던 시대상을 알고 평가하여야 할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이 시기의 작품들을 지내 허무적으로 대할수 있다.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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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호, 민족수난기, 애향가, 관북월간, 고복수, 백년설, 조령출, 손목인, 영춘화 관련기사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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