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난관을 뚫고
지경수
1940년 11월이였다.
당시 내가 속한 소부대는 동녕현 오배일대에서 지방인민들과 튼튼한 련계를 맺고 지하정치공작을 진행하고있었다.
이 시기 적들의 《토벌》은 극심하였다. 우리 부대가 활동을 전개하고있던 동녕, 녕안, 왕청현 등지에서는 적들의 대부대가 개떼처럼 싸다니면서 산과 부락을 샅샅이 훑고있었으며 지방인민들을 《통비자》라 하여 체포학살하고 부락들을 불살라버리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이리하여 지방인민들과의 련계는 차차 끊어져가고 식량조차 보충받을곳이 없게 되였다. 그러나 이러한 속에서도 우리의 소부대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인민들을 승리에로 불러일으키는 지방정치공작과 적에 대한 정찰사업을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어느날이였다. 우리 소부대는 맡겨진 임무를 끝내고 지휘부가 있는 녕안현 대화첨구로 이동하게 되였다.
이때 우리 소부대가 처한 정황은 각각으로 위험에 직면하였다.
우리 소부대성원은 전부 18명이였으며 개중에는 부상자와 환자들이 적지 않았다. 게다가 투쟁경험이 적은 신입대원들까지 7~8명이나 있었다.
이러한 력량으로 수백배에 달하는 적들과 싸울수도 없었으며 또한 적들과 정면충돌을 하는것은 우리 소부대의 임무가 아니였다. 어떻게 하여서라도 우리는 적들을 피하면서 지휘부를 찾아가서 수행한 임무와 동녕현일대의 적정에 대한 보고를 해야만 하였다.
우리 소부대는 행군을 시작했다. 나는 두명의 대원을 데리고 대렬앞에 서서나갔고 그뒤에는 군의외 몇동무가 4명의 환자를 업거나 부축하면서 따라섰다.
수림속에는 《토벌대》놈들이 싸다닌 발자국이 여기저기에 널려져있었다. 밤이 어두워지자 《토벌대》놈들은 사방에서 우등불을 피웠다.
우리들은 놈들의 우등불사이사이를 피해가면서 행군을 계속하였다. 이렇게 하면서 우리가 목릉현과 동녕현경에 있는 밀림지대에 들어선 어느날이였다.
쉬임없이 내리는 눈은 허리를 쳤고 몰아치는 눈보라는 걷는 사람들의 뺨을 사정없이 휘갈겨서 앞길을 살피기가 곤난하였다. 이러한 때였다. 우리앞에서 갑자기 《누구냐!》하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누구냐!》하고 나는 서슴없이 맞받아웨쳤다.
그러자 놈들은 무작정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이때 군의동무와 나는 불의에 조우한 적들을 대항하여 싸우면서 환자들과 신입대원들을 급히 후퇴시켰다. 그리고 우리를 뒤따르는 적들을 향하여 맹렬한 반격을 가하면서 후위를 담당한 우리들도 후퇴를 시작하였다.
가렬한 전투는 약 30분간이나 계속되였다. 어둠이 뒤덮이고 우리가 완강히 응전하게 되자 적들도 더는 추격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조우전은 세번이나 거듭되였다.
그러나 난관은 적과 전투를 자주 한다거나 굶주리는 그것뿐만이 아니였다. 령하30℃의 혹한이 계속되는 속에서 《쫄라병》(영양부족과 추위에서 오는 병으로서 사지가 가다들어 몸을 움직일수 없다.)환자들을 간호해야 하는 문제엿다. 그런데 약이나 죽은 고사하고 눈을 녹인 더운물 한모금조차 권할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될수 있는대로 《쫄라병》환자들을 계속 업고걸었으며 잠시 쉴 때에도 그들을 끼고 앉아서 자기 몸으로 그들의 몸을 녹여주거나 팔다리를 주물러주기에 노력하였다. 그중에서도 김만수동무는 행군 첫날부터 《쫄라병》이 생겨서 한걸음도 걸을수 없게 되였다. 그는 한사코 자기를 수림속에 남겨두고 가라고 하였다.
《나 하나때문에… 시간이 늦어지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우리는 환자들때문에 가끔 위험에 처하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하여 적들이 싸다니는 수림속에다 동지를 남겨둘수는 없었다. 군의동무와 오준옥동무는 그를 설복하여가면서 계속 업고 걸었다.
《잠시만 더 참소! 이제 대화첨구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그곳에 가면 몸을 녹일 장소도 있고 우리가 지난번에 묻어둔 식량도 있을거요.》
군의동무의 이 말은 비단 김만수동무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였다. 며칠째 낟알한알 먹어보지 못한채 끝모를 심산수림속으로 환자들을 업고가는 동무들을 고무하는 말이기도 했다.
차디찬 눈과 솔잎을 뜯어먹으면서 우리는 10여일만에 대화첨구근방 수림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토벌대》놈들은 여기에서도 산을 뒤졌으며 우리가 묻어두었던 식량을 파헤쳐갔고 작은 무쇠솥마저 파괴하여버렸다.
우리는 놈들이 파가다가 흘린 벼알을 주어모았다. 그것은 불과 한두줌을 넘지 못하였다.
밤이 어두워진뒤에 우리들은 눈을 파헤치고 마른 나무가지에 불을 달아놓고 깨여진 솥쪼각에 벼알을 닦았다. 여러날동안 차디찬 눈과 솔잎으로 끼니를 이어오던 때이라 벼알을 닦는 불기운과 고소한 냄새가 참을수 없이 속을 뒤집히게 하였다.
이때 군의동무와 오준옥동무는 거뭇거뭇하게 된 뜨거운 벼알을 손에 쥐고 비볐다. 그리고 그것을 또 다른 솥쪼각을 리용하여 가루를 냈으며 눈녹인 물에 다 풀었다. 그리고 그것을 환자들에게 약간씩 나누어마시게 하였다. 그런데 불과 한그릇을 넘지 못하는 미음은 네사람의 환자들이 골고루 입을 대고도 거의그대로 남았다. 김만수동무는 떨리는 손으로 미음그릇을 쥐고는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는 도로내놓았다. 몇번을 거듭 권했으나 그는 입을 다물고 거절했다. 귀중한 음식을 희망없는 자기에게 권하지 말고 다른 동무들이나 기운을 돋구게 하라는것이였다.
군의동무는 피기없는 그의 얼굴을 가슴아프게 들여다보다가 의리상으로 보아 어떻게 혁명동지를 뒤에 두고가느냐고 하면서 김만수동무의 손발을 주물러주고 가슴도 문질러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옆에 모여앉은 다른 동무들도 다 들을수 있는 말로 이야기를 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친솔하신 조선인민혁명군의 한 부대가 1938~1939년 겨울에 적들이 첩첩히 포위한속에서 하루에 10여차씩이나 전투를 하면서도 끝내 어려운 행군에서 승리한 이야기며 이른봄부터 가을까지 열달동안이나 밥구경을 제대로 못하였고 나중에는 풀뿌리, 나무껍질마저 없어졌을 때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싸워이긴 1935년 처창즈유격근거지인민들의 불굴의 투지 등을 상기시켰다. 그는 계속하여 혁명승리에 대한 확고한 신심을 가져야 한다는것과 《쫄라병》이나 굶주림쯤은 능히 극복할수 있는 난관이라는것을 일깨웠다.
다음날 우리들은 몇개의 조로 나뉘여져 지휘부를 찾아떠났다. 그 다음날도 찾았다. 그러나 몇십리주위를 찾았으나 수림속은 간곳마다 《토벌대》놈들이 미친개떼처럼 싸다닐뿐 지휘부를 만날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투쟁을 멈출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적들속에서 벗어나야 하며 지휘부를 찾고 임무를 보고해야만 하였다.
우리들은 또다시 적들속을 뚫고 밤을 새워가면서 대밀림지대를 걷고있었다. 환자들을 업고 신입대원들을 부축하면서 계속 걸었다. 아마도 5~6일은 걸은듯 하였다. 그러나 불과 몇십리를 걷지 못하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쫄라병》환자들의 증상은 시시각각으로 심하여졌고 신입대원들은 몇발자국씩 걷다가는 쓰러지군 하였다.
어떤 동무들은 단 하루만이라도 쉰 다음에 가자고 간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군의동무는 쉬지 말고 계속 걸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굶주리고 지친 몸이며 특히 《쫄라병》환자들이 혹한속에서 운동을 정지한다는것은 스스로 위험을 초래하는것이기때문이였다. 그리고 원쑤들이 우리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뒤따를수 있었다. 우리들은 혁명가들이다, 우리의 행군은 혁명을 위한 행군이다, 앞으로는 이보다 더 큰 난관도 있을수 있다, 우리들은 모든 난관을 뚫고 일제놈들과 싸워이겨야 한다, 우리들은 이렇게 서로 고무하며 산등성이로 해서 동쪽에 솟아있는 큰 고지를 향하여 올라가고있었다. 약 30분간 행군한듯 하였을 때 오준옥동무가 적들이 누렇게 산으로 기여오르고있는것을 보았다. 그는 《적이다!》하고 큰소리를 쳤다.
군의동무는 몇동무를 시켜서 《쫄라병》환자들을 부축하여 가게 하고 나와 오준옥동무를 불러 부대후위를 담당하라고 하였다.
적들은 우리가 후퇴하는 등성이와 량쪽골짜기에서 포위태세를 취하면서 악랄하게 달려들었다. 적과의 거리는 지척이였다. 적들은 달려들었다가는 우리의 강한 반격앞에서 쓰러지군 하였다.
우리들은 진대나무를 의지하여서 쏘고 또 얼마큼씩 가다가 숨어서는 쏘군 하였다. 이럴 때에 《쫄라병》이 심한 김만수동무는 자기때문에 부대의 전진이 지연되여 위험한 처지에 있음을 알고 동지의 잔등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는 우리의 손을 뿌리치며 앉은 자리에서 진대나무에 의지하여 싸창으로 달려드는 적과 싸웠다. 원쑤들은 김만수동무에게 투항하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유격대는 투항을 모른다고 웨치면서 달려드는 적들에게 련속 복수의 불벼락을 퍼부었다.
이런 때에 김만수동무는 우리에게 어서 그 자리를 떠나달라고 웨쳤다. 그러자 이 소리를 들은 적들은 만수동무에게 화력을 집중하였다.
《김만수동무를 구하라! 적들에게 죽음을 주라!》는 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났다. 수림속을 얼마쯤 빠져나갔던 신입대원동무들도 되돌아선것이다. 이 강력한 반격에 적들은 물러섰다.
이사이에 우리들은 서로 엄호해가면서 령마루에 올랐다. 우리들은 동쪽에 펼쳐져있는 무연한 활엽수림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우리의 용감한 전우 김만수동무는 여러곳에 부상까지 당하여 더욱 위급해졌다. 우리들은 그를 번갈아업으며 약속된 지점에 이르렀다. 얼마후에 뒤떨어졌던 동무들도 도착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오래 머무를수 없었다. 비록 적들의 포위에서는 벗어났으나 우리의 귀중한 전우인 김만수동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아니 그보다도 사업보고와 적정보고를 지휘부에 1분이라도 급히 전하여 적들에게 백배천배의 복수를 주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사소한 지체도 용납될수 없었다.
다시 행군을 시작한 우리들은 동녕현 2도구근방에서 끝내 부대지휘부를 만났다.
이렇게 우리는 중첩되는 난관을 뚫고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였다.
무엇이, 그 어떠한 힘이 우리들을 이 첩첩한 포위속에서 20여일씩 굶으면서 그리고 4명의 환자까지 업고 이끌면서 끝끝내 난관을 뚫게 하였는가!
그것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현명한 령도를 따르는 우리의 혁명위업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고한 신념, 억천만번 죽더라도 원쑤를 치자는 일념, 사랑하는 조국을 짓밟고 인민을 노예화하는 일제침략자들에 대한 참을수 없는 분노가 우리 가슴에 불타고있었기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아니였더라면 우리는 한걸음도 전진을 못했을것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20. 끝까지 싸워야 한다
손종준
안도성시에서 북서방향으로 큰길을 따라가면 대사하와 류수촌이 있다. 이곳에서 고동하를 따라 북동방향으로 가면 만보툰이란곳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다시 동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자그마한 내를 따라 골짜기로 들어가 울창한 수림을 뚫고 마천령을 넘어서 나지막한 산줄기들을 횡단하여 동쪽으로 빠지면 옛 유격근거지였던 처창즈골에 떨어지게 된다. 이 처창즈골을 중심에 두고 사방으로 밀림지대가 쭉 뻗어있다.
1940년 이른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친솔하신 조선인민혁명군부대들은 이 밀림에 의거하면서 적극적인 전투행동을 전개하여 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했다. 결과 동만에서도 《치안이 유지된다.》고 호언하던 놈들의 선전내막을 까밝히고 공포에 떨게 하는 반면에 인민들에게는 혁명승리에 대한 확신을 안겨주었다. 당시 우리는 거의 매일밤 하나씩의 집단부락을 습격하여 그곳에 주둔하고있는 적들을 소멸하였던것이다.
만보툰을 습격한것도 바로 이때의 일이다. 어느날 김일성동지께서는 오백룡련대장에게 만보툰에 둥지를 틀고있는 적경찰과 자위단을 습격소멸함으로써 적의 후방을 교란하며 식량을 로획할것을 명령하셨다.
명령을 받은 우리 련대는 수림속으로 행군을 계속하여 만보툰에서 남쪽으로 약 3km 떨어진 밀림속에 집결하였다. 이른아침 련대장동지는 만보툰의 서쪽과 동쪽고지에 망원초를 파견하였다.
망원초의 임무는 낮사이에 적의 병력이 만보툰에 증강되지나 않는가 하는것을 감시하는데 있었다.
련대장동지는 이미 인민들로부터 수집한 자료에 의하여 만보툰에 무장경관과 자위단 약 80명이 있다는것을 알고있었던것이다. 밤이 되였다. 망원초들의 보고에 의하면 낮사이에는 적들이 증강되지 않았다는것이다.
우리 련대는 집결지점을 떠나 만보툰에 접근하였다. 토성가까이에 접근하였을 때였다. 손태춘분대장과 나에게 성안에 은밀히 들어가 망원초들이 철수한후에 적의 《토벌대》가 증강되지 않았는가를 정찰하여오라는 명령이 하달되였다. 물론 이에 대한 계획은 전투계획당시에 수립되였던것이다. 손태춘분대장과 나는 다른 두명의 전우들과 함께 은밀히 성밑에 접근했다. 만보툰부락의 네귀에도 놈들의 높은 포대가 있었으나 우리들의 행동을 감촉하지 못하고있었다. 토성높이는 2m 남짓하였고 그우에는 4~5선의 철조망이 가설되여있었다. 우리와 함께 토성밑으로 온 전우들중에서 한 동무는 성벽에 의지하여 허리를 구부정하고 뻗쳐섰다. 우리는 그 동무의 허벅다리와 어깨를 딛고 철조망과 토성사이를 빠져 성안에 내려섰다. 그러자 토성밖에 있던 다른 한 동무가 성우에 올라와 반듯이 누웠다. 그가 누워있게 된것은 철조망때문에 서있을수도 없었거니와 우선 적들에게 발견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는 우리와 성외부와의 련락을 보장할 임무를 맡고있었던것이다. 우리가 성안에 들어선것은 밤 9시경이였다. 주위는 캄캄하고 고요하였다. 우리가 들어선곳은 사방 50m쯤 되는 공지였다. 손태춘동지와 나는 빠른 걸음으로 공지를 지난다음 한 집으로 찾아들어갔다. 당시 우리는 조직적인 련계를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우선 가까이에 있는 집에 들어갔던것이다. 모두가 불을 끄고 자고있었으므로 낮은 소리로 집안사람을 깨운 다음 부락에 《토벌대》가 들어왔는가를 물어보았다. 집주인은 어둠속에서 저녁때에 《토벌대》가 들어왔다고 대답하였다. 우리는 성밑에 다시 돌아와서 그우에 누워있는 동무에게 적《토벌대》가 들어왔다는것을 우선 련대장에게 보고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행동에 대한 련대장의 명령을 기다리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한번 더 적정을 확인하여보려고 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성 북쪽방향에서 호각소리가 나더니 그쪽으로부터 경찰과 자위단놈들이 우르르 달려나와 약 10m씩 간격을 두고 성벽에 쭉 배치되였다. 그리고는 이리저리 살피였다. 포대의 놈들도 전투준비를 하는듯 떠들썩하면서 사방에서 온통 야단이였다. 우리는 위험에 처하게 되였다. 순간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입대한후 4개월동안에 적진에서의 전투를 체험하지 못한 나는 겁이 더럭났다. 손태춘동지와 나는 적들이 배치된곳으로 빠져나갈것을 결심하고 성밑으로 은밀히 다가갔다. 이때 손태춘동지가 물홈에 빠져 첨벙하고 물소리를 내였다. 그러자 가까이에 있던 자위단 한놈이 《누구얏!》하고 고함을 질렀다. 분대장은 《나요.》하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그놈은 세번이나 연거퍼 누구냐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이때 버럭 큰소리로 《순찰대다. 왜 자꾸 묻는거야.》하고 대꾸하였다. 그러나 그놈은 계속 누구냐고 소리를 지르면서 우리쪽을 주시하고있었다. 이러는 사이에 다른 한놈이 그놈의 옆에 와서 뻗쳐섰다. 놈들은 우리의 행동을 눈치챈 모양이였다. 이때였다. 손태춘동지는 물홈에서 번쩍 올라서면서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힘차게 말하였다. 《이거 안되겠소. 선손을 쓰기요. 피값이라도 해야 될게 아니요.》 그리고는 적들에게로 몸을 돌리며 나를 보았다. 이때 분대장의 얼굴에는 비장한 결의가 어리여있었다.
분대장의 비장한 결의는 무언중 나의 가슴을 치며 죽는 한이 있더라도 놈들을 쳐부셔야 되겠다는 굳은 결의를 가다듬게 하였다. 이때 우리는 이미 주둔하고있는 무장경관과 자위단 그리고 저녁때에 들어왔다는 《토벌대》놈들을 상대로 하여 단둘이서 전투를 개시하기로 결심했던것이다. 분대장은 다시 《종준동무! 동무는 저〈누구냐〉고 하는 놈을 쏘시오. 나는 이쪽놈을 쏘겠소.》하면서 총을 겨누었다. 나도 겨누었다. 적들은 그때 우리와 10m쯤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발사순간 내가 사격한 놈은 그 자리에 푹 거꾸러졌다. 그런데 손태춘동지가 쏜놈이 죽어넘어지면서 《적이다.》하고 고함을 질렀다. 이리하여 적아간에는 치렬한 전투가 개시되였다. 우리는 동문쪽으로 뛰여가면서 성벽에 배치된 놈들과 앞에서 얼른거리는 놈들을 겨누어 련속사격을 했다. 놈들은 섰던 자리에 푹푹 거꾸러졌다. 그런데 어떤 놈들은 성벽이나 벽틈에 붙어서 집요하게 저항하였다. 우리는 맹렬한 화력으로 놈들을 한놈한놈 소멸하면서 동문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4명의 적은 우리가 당도한줄도 모르고 대문에 있는 총구로 밖을 향하여 사격하고있었다. 우리는 재빠른 동작으로 적들을 일시에 소멸하였다. 우리는 대문을 열고 밖을 향하여 소리쳤다.
《동무들! 문을 열었소. 여기로 들어오오.》
우리는 이때에야 성 남쪽의 포대들에서 저항하는 적들과 우리 부대간에 맹렬한 화력전투가 계속되고있는것을 알았다. 적아간의 총성은 만보툰부락을 뒤엎을듯 요란하였다. 성문을 개방한 잠시후 자위단 한놈이 우리를 자기의 동료인줄 알고 《탄피가 붙어서 큰일났다.》고 떠들면서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우리는 그놈을 감쪽같이 생포하였다. 우리는 이놈에게서 《토벌대》가 들어오지 않았다는것을 알았다. 적정을 확인한 우리는 성을 넘어왔을 때 처음 물어본놈에게 속히운것을 생각하니 분하기 짝이 없었다. 흐리터분한 소리로 대답하던 그놈이 좀 수상하다고 생각했더니 바로 그놈이야말로 저주받을 인민의 반역자임이 틀림없었다. 놈의 집에서 우리가 뛰여나온 얼마후 적들이 뛰여나온것으로 봐서도 그놈이 고발한것이 틀림없었다. 사실 일제놈들은 당시 밀정들을 주민들속에 잠입시키는 일이 적지 않았던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적을 앞에 두고 이 일만 처리할수 없었다.
손태춘동지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토벌대〉도 안들어왔는데 우리 둘이서 해봅세.》
나는 이에 선뜻 동의하였다. 사실 이때 우리 유격대원들은 경찰이나 자위단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것이다. 우리들은 대문을 열어놓은채로 경찰과 자위단놈들의 본부를 향하여 달려갔다. 여기에서도 6~7명의 적들이 우물거리고있었다. 우리는 그놈들을 향하여 명중사격을 퍼부었다. 5명이 죽어넘어지고 나머지는 성 북쪽으로 도망쳤다. 거리에서 아직도 우물거리고있는 적들이 있었으므로 우리는 그놈들을 소멸하기 위하여 거리로 뛰여나오면서 앞에 나타나는 적들을 향하여 련속 사격을 하였다. 우리가 얼마쯤 나왔을 때 남쪽포대에서는 적들의 사격이 잠잠해지고 사방에서 요란한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귀에 익은 말소리도 들려왔다.
우리 부대가 성안에 들어온것이였다. 손태춘동지와 나는 동무들쪽으로 막 뛰여갔다. 동무들은 우리들을 얼싸안고 《살았구나.》, 《잘 싸웠소.》하면서 기뻐 어쩔줄을 몰라했다.
우리들은 적들의 식량창고를 부시고 련대의 약 15일분 식량과 10여정의 보총과 많은 탄알들을 로획하여가지고 만보툰 동남쪽골짜기를 따라 밀림속으로 철수하였다. 살아남은 적들은 동산포대에 숨어서 퉁퉁 헛총질을 하고있었다.
행군하면서 손태춘동지와 나는 동무들에게서 이런 말들을 들었다.
《동무들이 성안에서 전투를 시작하였을 때 우리는 련대장동지의 명령으로 빨리 성안에 돌입하려고 하였소. 그런데 적들이 포대에서 완강히 저항하므로 일부 동무들은 포대의 적들과 싸우고 일부 동무들은 성에 구멍을 뚫는 작업을 하게 되였소. 한사람이 기여들어갈수 있을만한 구멍을 뚫고 우리는 그곳으로 성안에 들어갔소.》
* *
만보툰전투후에도 손태춘동지와 나는 오래동안 한부대에 있었다. 그는 때때로 그때를 회상하면서 《나는 그때 적들이 막 우리 주위에 모여들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가 나지 않았소. 그러나 다음순간 곤난한 환경에서도 굴하지 말고 끝까지 싸워야 하며 이렇게 함으로써만 승리를 쟁취할수 있다고 하시던 사령관동지의 말씀이 생각났소. 나는 바로 이 말씀대로 행동하였소.》하고 말하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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