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또다시 압록강을 건너서
김성국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이신 김일성동지께서는 몽강현 남패자에서부터 장백현 북대정자까지의 그 헤아릴수 없는 고난의 행군이 끝났을 때에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우리는 자기의 성스러운 투쟁에서 또하나의 뜻깊은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번 행군과정에서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준 거기에만 있는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어떠한 곤난도 이겨내는 우리의 불굴의 투지와 혁명을 위하여 하나로 뭉친 단결된 힘이 얼마나 크고 강대한것인가를 다시한번 널리 시위한데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끝까지 간직해야 할 귀중한 우리의 밑천입니다.
사실 우리가 걸어온 길은 험난하고 간고했다. 그러면서도 그 길은 영광스러운 길이였다.
적들은 종국적으로 우리를 《섬멸》한다고 자기들의 총력량을 기울여 끈질긴 추격과 겹겹의 포위로써 그리고 지역별 《소탕전》등 각이한 전술로써 악착하게 덤벼들었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들이 장백산맥의 깊은 산속에서 《얼어죽었다.》느니, 《공산군은 이번 토벌에 섬멸되였다.》느니 하고 떠들어댔다.
그러나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의 령도를 따라 그이의 주위에 한사람같이 뭉쳐 승리의 전진을 계속하고있었다.
하루에도 몇차례씩 집요하게 달려드는 적들과의 가렬한 전투, 모진 추위와 굶주림, 그속에서 배낭을 털어모은 한홉의 미시가루마저 대원들을 생각하시여 고루 나누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뜨거운 사랑과 고무에 우리 대원들은 새로운 힘이 솟구쳤으며 그이께서 가리키시는 길을 따라 전진 또 전진하였다.
이리하여 우리는 자신들의 혁명적투지와 강의성을 검열하는 그 간고한 전투와 행군의 시련을 이겨냈고 마침내 목적지인 장백현 북대정자에 도착하였던것이다.
우리가 한겨울동안 간고한 행군을 계속하던 때 장백지구와 국내의 혁명정세도 또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었다.
그것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선인민혁명군의 주력부대를 거느리시고 일시 장백지구를 떠나셨던 1937년 말경에 일제의 간악한 탄압이 강화되였고 이로 인하여 조국광복회원들과 조선민족해방동맹산하의 수많은 동지들이 검거된 사실이다.
바로 이러한 정세하에서 1939년 봄 북대정자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간부회의가 소집되였다. 이 회의에서 제시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전략적방침에 따라 우리는 국내의 무산지구에로 진출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전략적방침은 국내에 조선인민혁명군이 진출하여 오만한 원쑤들에게 새로운 타격을 줌으로써 우리 조선인민혁명군이 건재하여 싸우고있다는것을 동포들에게 알려주며 또한 적의 탄압에 시달리는 혁명조직들에 생기를 북돋아주고 다시 추켜세우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그이의 현명한 방침에 따라 우리는 그해 승리의 5.1절명절을 쇤 감격도 새로이 위대한 수령님의 친솔밑에 5월 15일 원쑤격멸의 기세드높이 조국땅을 향하여 장백현 곰의골밀영을 떠났다.
우리 대렬이 장백현 24도구부근에 이르자 그이께서는 정찰조를 파견하시여 적정을 더 구체적으로 장악하신 다음 18일에 압록강을 감쪽같이 건느도록 하시였다.
참으로 그때의 감격을 무엇으로 다 표현할수 있으랴.
자나깨나 한시도 잊어본 일이 없는 어머니조국의 품에 안긴 우리는 벅차오르는 감격에 가슴이 후더워졌다.
그동안 몇백번 부닥친 어려운 고비를 이겨내고 혁명의 길에 굳건히 서서 조국의 땅을 다시 밟게 된 우리들은 우리와 함께 이 자리에 있지 못한 수많은 전우들을 생각하여 더욱더 뜨거운 결의를 다지였다. 그리하여 저마다 조국산천의 흐뭇한 냄새가 풍기는 흙을 움켜쥐였고 맑은 물속에서 속돌을 골라 배낭에 넣으면서 더욱 용감히 싸울것을 맹세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녀대원들이 꺾어드린 탐스럽게 핀 진달래를 받아드시고 향기를 맡으시면서 《조선의 진달래는 볼수록 아름답소!》하시며 감격과 흥분에 싸인 우리들을 바라보시였다.
그리고 어린 대원이였던 리오송동무에게 《이 강이 무슨 강인지 아오?》하고 물으셨다.
나서 처음 조국땅을 밟아보는 오송동무는 압록강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번 들어왔지만 한번도 본 일이 없어 잠시 머뭇거리다가 《압록강이 아닙니까?》하고 말씀드리자 그이께서는 자못 감개무량하신듯 《옳소, 이 강이 바로 조선의 압록강이요.》라고 말씀하시였다.
이국땅에서 나서 어머니의 품이란 모르고 자란 오송동무는 조국땅에 들어서자 어머니의 품에라도 안긴것만 같아서 그이께 《이제는 여기서 다시 돌아가지 않겠지요?》하고 엉뚱한 질문을 하였다.
그러자 그이께서는 웃으시면서 《우리는 조국땅에 영원히 돌아오기 위해서 아마 되돌아가야 할것 같소.》라고 말씀하시였다.
우리는 이곳에서 휴식을 한다음 산등성이를 타고 청봉기슭에 당도했다.
청봉에서의 숙영의 밤은 실로 뜻깊고 흥겨웠었다.
우리는 활활 타오르는 우등불가에 둘러앉아 밤이 깊도록 조국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으며 적을 통쾌하게 때려부실 결의들을 새롭게 다지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위대한 수령님의 지시에 의하여 나무껍질을 벗기고 《조선청년들, 속히 달려나와서 항일전에 힘있게 참가하자》, 《일본의 파시스트군벌을 때려부시자》등의 구호를 썼다.
우리는 심장으로 새긴 이 구호의 매 글자가 우리 부모형제들에게 새로운 힘을 북돋아줄 정의의 웨침소리로 전해질 생각으로하여 한없이 기뻤다.
그리고 그것을 쳐다보며 나는 먼 타향에서 아버지,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서 부치고 어서 빨리 받아보아주었으면 하고 바라는듯한 그런 심정으로 한참이나 서있던 일이 지금도 어제일처럼 선하다.
우리는 건창과 베개봉에서 각각 숙영하고 그 이튿날 삼지연쪽으로 행군하였다. 우리는 삼지연기슭에서 휴식하면서 점심을 먹었다.
못가에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앞으로 100리가량은 물이 없으니 미리 준비들을 잘하라고 하시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맑고 시원한 삼지연물을 량껏 마시고 물통에도 가득 채워넣었다. 조국의 산과 물이 한없이 정다웁기만 하여 대원들은 마치 어린애들처럼 물을 손으로 끼얹으며 즐기였다.
식사가 끝난후 만단의 전투준비를 갖춘 대렬은 대낮에 갑산으로부터 무산으로 통하는 《갑무경비도로》를 걸었다.
적이 우글거리고있는 그런 조건하에서 심산속이면 또 몰라도 적이 닦아놓은 경비도로를 따라 대낮에 행군한다는것은 상상하기 어려운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밀림속을 헤치고나간다면 무산지구에로의 진출이 지연될뿐만아니라 그속에서 오래 지체하면 좁은 지역에서 적에게 포위될 위험성이 있는것이다.
이러한것을 예견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적들이 우리가 밀림속에 있는줄만 알고 도로에는 주의를 적게 돌리리라는것과 설사 도로에서 적과 조우한다 하더라도 놈들을 능히 격파할수 있는 강대한 력량이 우리에게 있다는것을 타산하시고 대도로행군을 하기로 하셨던것이다.
적들이 국경을 《경비》하겠다고 닦아놓고 검열을 마치려고 금방 비로 쓸어놓은 길로 바로 그 적들을 치러간다는것은 참으로 통쾌한 일이였다. 우리는 힘든줄도 두려운줄도 모르고 보무당당히 걸어나갔다.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의 친솔밑에 행군한다는것으로하여 마음이 든든했고 어떠한 원쑤도 무찌를 자신이 만만했다.
무포에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간부들의 회의를 소집하시고 구체적인 전투명령을 내리신다음 이번 싸움의 승산에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22일 우리들은 그이의 뒤를 따라 사기충천하여 무산지구를 향해 발걸음을 다그쳤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예정된 계획에 따라서 도중에서 일부 력량을 삼수평방향과 무포쪽에 보내여 붉은바위쪽과 혜산, 무포방향에서 오는 적을 막아낼 방차대의 임무를 주시였다. 그리고 대홍단벌 중심에 있는 까치봉에도 보초대를 파견하시였다.
이렇게 하신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력부대를 친솔하시고 대홍단벌을 횡단하여 국사당부근에 이르시였다. 이 기동전술은 적으로 하여금 미처 손을 쓸 겨를을 주지 않을 목적밑에 취해진 그이의 대담한 조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국사당부근에서 부대가 두개방향으로 행동하도록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8련대와 경위중대를 친솔하시고 신사동쪽으로 진출하시였다.
오중흡동지가 지휘하는 7련대는 신개척에 있는 일제의 독점자본인 《북선제지》계렬의 목재작업소와 들쭉회사를 공격하고 그곳에 있는 적들을 감쪽같이 소탕해버릴 임무를 받았다.
이 첫날 전투에서 신개척에 진출한 7련대는 한방의 총도 쏘지 않고 20여명의 《산림보호대》놈들과 일본인《십장》들을 몽땅 생포했다. 로동자들을 악착스럽게 부려먹으며 우쭐대던 놈들은 우리 조선인민혁명군앞에서는 벌벌 떨면서 벙어리처럼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우리는 사전에 적의 신호조직을 알아내고 행동했던것이다.
이리하여 대원들은 한시간이내에 두지바위로부터 신개척에 이르는 15리나 되는 로은산지구일대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목재작업소창고에는 조선사람의 피땀으로 이루어진 식량과 피복, 기타물자들이 쌓여있었다.
인민들은 굶주리고있는데 놈들의 창고에서는 쌀이 썩고있었다.
우리는 적들의 창고에서 로획한 막대한 량의 식량을 인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인민들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당신들을 도와야 할 우리가 이처럼 도움을 받다니. … 우리는 죽어도 김일성장군님부대를 잊지 못하겠소.》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이날밤 군중들속에서 연설도 하고 그들과 함께 오락회도 가지였다.
이때 사령부는 신사동에 있었는데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일대의 목재로동자들과 함께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시였다.
그이께서는 일본제국주의는 반드시 멸망한다는것을 해설하시고 당신들이 왜 피땀을 흘리면서 일을 하여도 헐벗고 굶주려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일본제국주의자들때문이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힘을 합해 일제놈들과 싸워야 한다는 내용의 말씀을 하시였다. 그리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런 이야기도 하시였다.
《당신들의 자제들을 잘 교양하고 열심히 가르쳐서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자가 되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자제들에게 조선글과 조선말을 꾸준히 가르쳐주십시오.》
이렇게 간곡히 말씀하신다음 옆에 있는 나어린 전령병을 가리키시면서 《이 소년은 부모도 없고 어린 나이지만 유격대에 들어와서 글도 한자두자 배우고 조국을 사랑하는 정신을 배워서 지금은 글도 잘 읽게 되였고 이처럼 나라를 위하여 용감하게 싸우고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이와 같은 말씀에 로동자들은 시간가는줄을 몰랐다. 밤이 이슥해서 돌아가는 그들의 눈에는 이슬이 맺히였었다.
일제놈들에게 억눌리고 짓밟히던 두메의 마을은 유격대를 맞이하자 명절날처럼 들끓었다.
《우리 김장군님은 백두산이 낳은 장수이신데 천기를 환히 내다보시며 축지법을 써 산을 주름잡아 다니신다우.》
《그러니 … 왜놈들이 망할 날도 얼마남지 않았지.》 로동자들은 이런 말을 신이 나서 주고받군 했다. 그들은 귀밀쌀을 모아 국수를 누른다, 우리의 도중식사를 마련하려고 주먹밥을 만든다 하며 밤늦도록 서둘렀다.
우리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는 이날밤 자정이 넘어 대홍단벌 국사당부근으로 철수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신개척과 아래두지바위에 진출했던 부대들의 도착을 기다리시면서 창평방향에서 올수 있는 적의 추격을 예견하시고 먼저 도착한 부대들에 만단의 전투준비를 갖추게 하시였다.
그러던차에 그이의 명철하신 예견대로 23일 아침 중무기를 갖춘 일제수비대놈들과 경찰대놈들 수백명이 철갑모를 번쩍이면서 신개척에 진격했던 아군부대의 뒤를 따라오고있었다.
그리하여 대홍단벌에서는 적아간에 치렬한 조우전이 벌어지게 되였다.
이 광경을 바라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즉시 사격명령을 내리셨다. 그러자 아군의 기관총과 보총들이 일제히 맹렬한 불을 뿜었다.
한편 그이의 명령에 의하여 경위중대장이였던 오백룡동지는 일부 력량을 지휘하여 동쪽으로 신속히 우회하여 적에게 측면공격을 가하였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적의 전투서렬은 뒤죽박죽이 되였다.
이날 전투에서 우리 유격대는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련속 나타나는 적을 모조리 격파했다.
당황한 적들의 일부는 유곡방향으로 도주하다가 마침 그쪽으로부터 올라오는 다른 일대의 적수비대와 맞다들자 저희들끼리 맞총질을 하는 추태까지 부리였다.
대홍단벌에서 승리한 우리 항일유격대는 두만강을 건너 올기강방향으로 이동했다.
대홍단벌에서 패배한 적들은 급기야 19사단의 일부 병력까지 동원하여 수백명의 응원군을 파견하였으나 어찌도 혼이 난 놈들인지 국사당근처에서 우물거릴뿐 감히 추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우리가 두만강을 건너설무렵에야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두만강을 건너선 우리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는 6월에 화룡현 올기강에서 일본 《지도관》놈이 인솔한 위만군 200여명을 몰살시킨후 그 상류에 밀영을 짓고 일시 휴식을 하게 되였다.
장기간에 걸친 련속되는 가렬한 전투후에 가지게 되는 이 시간을 우리는 그 어느때보다도 귀중하게 그리고 뜻깊게 보냈다.
우리는 다음에 닥쳐올 전투를 보다 큰 승리로 맞이하기 위하여, 우리의 종국적승리의 시각을 보다 앞당기기 위하여 우리의 력량을 더욱 튼튼히 갖추기에 힘썼다.
18. 총검의 숲을 헤치고 국내에로
박성철
1935년 봄까지 우리 부대는 계속 연길현 신선동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하였다.
이 시기 적들은 자기 주력부대를 총집중하여 동만의 우리 유격대를 전멸하려고 밤낮으로 근거지를 공격하기에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 동만 각현의 어느 근거지에서나 무장은 물론 수적으로도 우세한 적과의 가렬처절한 전투를 련일 거듭하였다. 게다가 극도의 식량난을 비롯한 이루 헤아릴수 없는 간고한 시련을 겪고있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반《민생단》투쟁에서 범한 좌경적오유의 후과는 매우 뼈저린것이였다.
이와 같은 정세하에서 유격근거지를 계속 고수한다는것은 적과의 투쟁에서 완전히 피동에 빠질 위험이 있었을뿐만아니라 유격근거지들이 적의 포위속에서 각개격파당할수도 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이러한 정세를 통찰하시고 1935년 봄 다홍왜와 요영구에서 있은 회의들에서 반《민생단》투쟁의 착오를 시정하고 혁명력량을 더욱 단합할데 대하여 그리고 유격근거지를 해산하고 무장투쟁을 보다 광활한 지역에로 확대강화할데 대한 현명한 전략적방침을 천명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이 방침에 따라 드디여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남만과 북만 그리고 조선국내에로 진출하는 등 종횡무진 그 활동범위를 확대하게 되였다.
이런 때에 우리들은 신선동에서 처창즈로 옮겨왔고 거기에서 바로 국내진출에 대한 임무를 사령부로부터 받았다.
우리가 맡은 국내공작의 주요임무는 우선 국내에 진출하여 일제통치의 암흑속에서 신음하는 조선인민에게 조선은 살아있으며 조선은 반드시 광복된다는 필승의 신념을 안겨주는것이였다.
그리고 국내의 인민들과 련계를 맺을수 있다면 자리를 잡고 도시와 농촌들에 혁명단체들을 조직하며 사령부와의 정상적인 련계하에 소수의 적들은 소멸하면서 기동성있게 군사행동과 정치사업을 배합하는것이였다.
우리들은 당시의 국내형편으로 보아 이 과업을 결코 쉽게 해결할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일제는 북부국경지대에다가 4㎞에 하나씩 포대를 쌓고 또 주재소마당에 돌담으로 역시 포대를 구축하였다. 뿐만아니라 국내지역에 경찰망을 확장하고 심지어는 산림간수들마저 훈련시켜 산간벽지의 독립가옥까지 감시망에 넣고있었다.
그야말로 북부국경지대는 물론 전조선천지가 적들의 보루와 경찰서로 얽어놓아 총검의 숲을 이루고있었다.
이러한 정황하에서 조선국내에 조선인민혁명군이 진출한다는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총검의 숲을 헤치고 국내에로 진출하는것을 더없는 영광으로 생각했다.
1935년 5월초순이라고 기억된다.
국내공작의 성원으로 3중대에서 중대장 황해룡동무와 정일권동무, 2중대에서는 내가 선출되였고 그리고 풍산일대의 지리에 밝은 재경이라는 동무도 선출되였다. 그밖에 선출된 많은 동무들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들은 곧 출발준비를 갖추었다.
선전문건으로 《전체 조선형제자매들에게 보내는 격문》, 《전조선동포들은 일어나라!》등의 삐라와 선전화들과 《혁명이란 무엇인가?》, 《공산주의란 무엇인가?》, 《착취란 무엇인가?》, 《계급이란 무엇인가?》등 소책자를 준비하였다. 소책자는 주로 청년들에게 줄것을 예견하였다. 그밖에 변장할수 있는 의복류, 식량을 비롯하여 공작임무에 따라 각이한 무기 등 만단의 준비를 갖추고 중대장 황해룡동무의 인솔하에 출발하였다.
조국으로 간다! 피눈물을 흘리면서 고국땅을 떠나 타국만리를 정처없이 헤매여다니면서 일제원쑤를 쳐부시겠다고 밤낮으로 결의를 다지며 의분의 목소리를 높이던 우리가 지금은 영예로운 조선인민혁명군대원으로서 조국으로 진군하는것이다.
전우들의 붉은 피가 스며있는 무기를 몸에 지니고 조국으로 향하는 우리들의 가슴은 높뛰였다.
첫 목표지점은 무산방향이였다. 우리들은 수림지대로 은밀히 행군하였다.
약 5일간이나 걸려서 우리들은 두만강류역에 다달았다.
강건너는 조국땅이였다.
우리들은 한참이나 어둠속에 잠겨있는 조국산천을 바라보았다.
몇해를 떨어져살면서 보지못하던 어머니를 눈앞에 보는것 같았다.
우리는 눈물이 핑 돌았다. 두만강의 물결은 소란스럽게 설레이며 소리를 내여 흘렀다.
우리들은 옷을 입은채 물에 뛰여들었다. 얼마쯤 물살을 가로질러 키를 넘는 물속을 돌파하고나니 다행히도 그 다음부터는 머리가 솟아나고 물결은 가슴아래로 휘감았다.
차디찬 두만강의 물결과 싸우면서 무산쪽 대안에 올라붙었을 때 우리의 몸은 얼음속에 잠겼다나온것처럼 와들와들 떨리였다.
우리들은 무기를 정비하고 경계선을 돌파하였다.
《여기서부터는 결사전이다. 탄알을 허비하지 말라. 덤비지 말고 앞사람에게 붙어서라. 떨어지지 말라.》
중대장의 말은 추위에 떨리면서도 엄격하였다.
언덕우에 올라서니 자동차길이 나졌다. 그리고 멀리 전기불이 가물거렸다. 어떤 동무가 그곳이 무산이라고 말했다. 알고보니 무산 15리 못미친곳에 도달한것이였다. 개짖는 소리도 들리였다.
우리는 우선 이 근방의 산간부락에 있다는 장면장네집으로 향하였다.
우리들은 산하나를 넘어 장면장의 집에 들어갔다. 왜 그런지 밤에 보기에도 면장집치고는 매우 초라한것을 직감했다. 주인을 찾으니 이윽해서 방안에 불이 켜지고 주인이 나왔다.
《이 집이 장면장집이 틀림없지요.》
주인은 어안이 벙벙하여 얼마동안은 아무 말도 못하다가 《13년전에 면장을 했습지요.》라고 대답했다.
방안을 들여다보니 아닌게아니라 한심했다. 가장집물이란 보잘것 없었다. 주인의 옷차림이나 이부자리를 보아도 그것은 더우기 어이없었다.
(일제에게 아부하여 면장을 지낸 신세가 이 꼴이 되였으니 장차 놈들의 착취에 시달림을 겪어오는 인민들의 신세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렇게 생각할 때 가슴이 뭉클하여지는것을 느끼였다.
면장집에 들려서 몸을 녹일겸 식량을 비롯하여 앞으로의 행동에 필요한것들을 마련하자던노릇이 결국 수포로 돌아간셈이다.
기왕 정체가 폭로된 이상 우리는 이 집에서 얼마간 휴식한다음 마을의 농민들을 비밀리에 모아다가 선전사업을 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물에 젖은 무기를 소제하고 주인집에 부탁하여 불을 피워서 옷과 신을 말리웠다. 얼마후 주변 농민들이 모여들었다. 정일권동무가 그들앞에 나서서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일제의 간악한 침략정책을 폭로하면서 왜 조선사람이 자기 나라를 빼앗기고 오늘과 같이 암흑천지에서 피눈물나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는가에 대하여 말하였다. 또한 그는 조선인민은 절대로 망국노가 되여서는 안되며 일제를 타도하고 자기 조국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것을 이야기하였다.
지치고 헐벗은 마을사람들은 우리들을 눈여겨 바라보기만 하더니 우리들의 손목을 붙잡고 감격어린 어조로 《나라찾는 일에 얼마나 수고를 합니까.》라고 목이 메여 말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끄시는 조선인민혁명군에 자기들의 모든 기대와 희망을 걸고있다고들 말했다.
우리들은 가지고간 선전자료들을 대상에 따라서 나누어주었다. 마을사람들은 누구나 할것없이 그것들을 소중히 품속깊이 간직하는것이였다.
선전공작을 끝낸 우리들은 적의 추격을 예견하고 두만강연안쪽을 향하여 흔적을 내면서 걸어갔다. 이렇게 하여 일단 적의 눈을 딴데로 돌리게 한다음 우리들은 슬쩍 종적을 감추고 다시금 국내에로 숨어들면서 적정을 살펴보았다.
정찰에 의하면 적들은 라남 19사단의 일부와 회령, 무산 등지의 수비대까지 동원하여 두만강연안에다 50m 간격으로 경비를 세우는 한편 우리의 종적을 찾아내려고 경찰들과 합세하여 농민들을 강제동원하고 짐을 지운다, 소를 끌어낸다 야단법석이라는것이였다. 이것은 놈들이 대포위선을 칠 때면 탄약, 기타 물자들을 나르기 위해 흔히 하는짓이여서 우리들은 적의 기도를 능히 짐작할수 있었다.
깊은 산속에 스며든 우리는 적정에 대처하여 긴급히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는 분산전술로써 활동할것이 결정되였다.
이리하여 3개의 소조를 편성하고 각기 행동하였다.
중대장 황해룡, 정일권, 재경 그리고 나 이렇게 4명의 조는 그곳을 떠나 풍산골로 행군하였다.
다른 2개 소조는 회령, 청진과 혜산, 갑산 등의 방향으로 떠났다.
얼마간 행군하였을 때 회령쪽으로 가는 조방향에서 갑자기 총성이 들려왔다. 그 총소리는 기관총사격소리까지 섞여서 사뭇 소란스러웠다. 우리는 그 조가 적과 조우하였음을 알았다.
우리는 적의 포위에 들지 않도록 수림속을 급히 내달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서편 혜산방향으로 가는 조쪽에서도 총성이 들려왔다. 거기에서도 적과 조우전이 벌어진것임이 틀림없었다.
우리들은 급히 산중턱을 탔다.
캄캄한 밤에 험준한 산허리를 손더듬으로 그것도 적들의 턱밑으로 기여넘는다는것은 백병전을 하기보다 몇곱절 힘들었다.
밤새도록 간것이 제굽이를 자꾸 돌아서 겨우 10리를 가나마나 했다. 날이 밝자 사방을 살펴보니 포위선은 벗어났으나 앞산 장대에는 적들이 욱실거리고 아침밥을 짓는지 연기가 피여오르고있었다.
우리들은 어디든지 몸을 숨겨야 했다. 적들을 코앞에 놓고 어디다가 몸을 숨길것인가. 우리들은 나무사이를 기여가다가 가랑잎이 쌓인 웅뎅이를 발견하였다. 그 가랑잎은 아마 수십년이나 묵었던지 웅뎅이를 헤치고보니 축축히 썩어있었다. 그러나 그우에 겹겹이 쌓인 가랑잎은 말라있었다.
중대장의 지시로 우리들은 곰이 땅굴로 들어가듯이 그 가랑잎속을 파고들었다. 얼굴까지 다 들씌워놓아도 공기가 통해서 답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걱정스러운것은 놈들이 군견을 끌고다니면서 냄새를 맡게 하면 야단이였다.
그러나 요행 날이 어슬어슬할 때까지 놈들은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고말았다.
우리들은 적들이 낮에 수색할 때에는 숨고 밤에 놈들이 잘 때에는 행동을 했다.
우리는 밤사이에 산을 둘씩이나 넘었다. 그후부터는 적을 볼수 없는 수림으로 길을 걷게 되였다. 모름지기 적과의 거리는 30~40리정도 되였다. 그런데 문제는 식량이였다. 아무리 식량이 곤난하여도 함부로 민가에 들어갈수 없는것이 안타까왔다. 놈들은 어떠한 산중독립가옥이라도 다 감시를 붙이고있었다.
우리들은 다시 걸음을 다그쳐서 그 이튿날 점심때가 되여서 백암방향이라고 짐작되는 지점에 당도하였다.
우리들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아보지 못한 심심산골안으로 들어서게 되였다. 발걸음이 빠르다고 해서 내가 선두에 섰다. 우리들은 가다가 굶주린 배를 그러안고 잠시 쉬게 되였다. 나는 쉬면서 무심히 앞에 있는 늙은 소나무에 눈이 가자 《저게 뭔가?》하고 소리쳤다.
그것은 소나무가지에 매여달려있는 머리채였고 그 밑에는 사람의 뼈가 소복이 쌓였는데 녀자의 고무신도 여기 한짝 저기 한짝씩 널려있었다.
《범한테 물리여왔을가? 아니면 어떻게 된 사연일가?》
《이러한 심산에서 왜 녀자가 목을 매였을가?》
《가난한 살림에 쪼들려서 자살을 한게지.》
이렇게 말들을 주고받는사이에 우리의 담화는 어느덧 삶과 죽음에 대한 심각한 문제에로 넘어갔다.
(일제놈의 학정밑에서 더는 살아갈수 없어 스스로 목을 매고죽은 사람이 이 이름모를 아낙네 혼자뿐이겠는가.
조국땅은 눈물과 굶주림과 죽음의 장막이 드리워있는것이니 이 장막을 우리가 걷어야 한다.
이 녀성처럼 이렇게 보람없이 죽을 필요야 어디 있는가.
우리는 어디까지나 혁명의 길에서 살고 죽어도 혁명의 길에서 죽어야 한다.
자기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성전에서 최후를 마친다는것, 이이상 고귀하고 보람있는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지금 적의 총검의 숲을 헤치며 우리의 길을 개척하기 위하여 나아가고있다.
어떠한 난관이 있어도 우리는 헛되게 죽을수 없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 다짐했다.
우리는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힘을 내여 다시금 앞길을 재촉했다.
풍산골입구에만 들어서면 재경동무의 누이가 살고있기때문에(그것도 10년전에 살았다는것인데…)그곳에 발붙일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두 재경동무를 따랐다.
이윽해서 우리들은 높은 고지에 나섰다. 백암의 분수령에 오른것으로 짐작되였다.
우리들은 어느한 산중턱을 걸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재경동무가 《물방아다!》하고 환성을 올리였다. 그 물방아가 낯이 익다는것이다.
우리들은 산옆으로 붙어서 인가에 접근하였다. 그런데 10년전에 이곳에서 살던 재경동무의 누이가 아직도 사는지 그것이 문제였다.
얼마후 재경동무는 어떤 아낙네가 물동이를 이고 샘터에서 올라오는것을 보고 《틀림없다. 물동이를 이고 한손으로 앞머리 물을 뿌리는 맵시가 여전하다.》하고 좋아했다.
우리들은 바삐 배낭속에서 신사복을 꺼내여 침을 발라서 펴입게 하고 구두며 넥타이를 재경동무에게 신기고 매주고 했다. 모자도 구겨진것을 당겨서 펴가지고 씌워주었다. 우리들은 얼싸한 신사가 된 재경동무를 산아래로 내려보내였다.
이렇게 되고보니 희망은 날개를 돋쳐 그럴듯한 계획이 자꾸 떠올랐다.
《발붙일 곳이 생겼구나.》
《비밀을 지키게 하고 근거지로 삼자.》
《여기를 근거지로 삼고 신사복을 입은 다음 거리를 마음대로 나들어보자.》
《청년들을 교양해서 유격대원으로도 받자.》
이렇게 앞으로의 계획을 의논하고있는데 20분도 못되여서 재경동무가 되돌아왔다.
재경동무는 누이를 만나기는 하였으나 순사놈들이 집집에 들어있으므로 행동하기가 곤난하다는것을 말하면서 누이가 준 밥과 소금을 내놓았다.
중대장은 《저놈들을 잡는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앞으로 우리의 행동에 불리할수 있다. 그러므로 인내성있게 적들이 돌아가기를 기다려서 될수만 있으면 이곳에 발을 붙이는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이튿날 날이 밝자 우리는 재경동무에게 또다시 신사복을 입혀서 매부가 달구지를 몰고올수 있는 장소에 보냈다. 그러나 그날도 일이 시원치 않았다.
매부를 만난 재경동무는 식량을 부탁하였는데 그는 경찰들이 달구지짐까지 샅샅이 들추어내므로 식량을 실어내기가 힘들다고 하면서 《아니 글쎄, 이런 산골에 그런 신사복을 입고 나타나면 어떡하느냐.》고 걱정을 했다 한다.
국내에서는 신사복만 입으면 자산계급이나 주구로 알고 적들이 주목을 돌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우리의 타산이 들어맞지 않았다. 별수없이 우리들은 동리 앞산에 숨어서 사흘이나 굶다싶이 하면서 적들을 감시하였다. 그런데 적들은 철수는커녕 더욱더 증강해왔다. 여기서 풍산골목재소가 50리라고 했다. 자리는 좋으나 형편이 그렇지 못하니 어찌할수 없었다. 이대로 눌러앉아서 적이 물러가기를 기다리다가는 굶어죽고말것이다. 뿐만아니라 여기서 지체한다는것은 우리의 비밀활동이 로출될 우려도 있는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목재소로 발판을 옮기기로 정한 다음 급히 떠났다.
막상 떠나고보니 며칠을 굶은지라 힘이 부쳐서 고개를 둘도 못넘은채 해가 넘어가버렸다.
소금 두숟가락이 유일한 식량이였다.
북부지대는 5월이라지만 산중벽지엔 아직도 눈이 남아있고 산채들이 움도 트지 않았었다. 우리들은 말라빠진 버섯을 기여다니며 뜯어다가 여러번 끓여서 독을 뺀다음 소금을 쳐서먹었다. 헌데 먹은지 얼마되지 않아 우리는 모두가 설사를 만났다. 버섯에 독이 있었던 모양이다. 굶은데다가 설사까지 만나고보니 기운이 다 빠지고 움직이기조차 힘들게 되였다. 오랜 시간 고통을 겪고나니 물먹은 솜처럼 늘어지고말았다. 이대로 산중에서 병들어 누워있을수는 없었다.
우리들은 억지로 일어나앉았다. (걸어야 한다!)스스로가 자기에게 명령을 내렸다.
우리들은 골짜기로 들어서서 인가쪽으로 가까이 갔다. 거기는 목재소사람들이 사는 고장이였다.
마을아래로는 철길이 나있었다. 우리들은 서로도와 부축하면서 인가 200m 가까이까지 접근하였다.
열려진 문안에는 불이 켜있고 누런옷을 입은것들이 앉아있었다. 적이였다.
(저놈들을 쳐없애고 식량을 해결할것인가. 그러나 우리가 너무 지친 몸이니 서뿔리 행동할수는 없다.)
우리는 토의끝에 하루를 더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놈들은 다음날도 가지 않았다.
(인제는 할수 없다. 적과 결사전을 해야 한다. 더는 기다릴수 없다.)
우리들은 싸울것을 결심하고 어둡기를 기다려 적이 있는 집으로 기여갔다.
중대장은 탄알을 골라 재우게 했다.
우리들은 서로 다리를 주물러 신경을 풀고 강물을 마신다음 더 접근해갔다.
저녁무렵이라 적들은 밥을 먹으러 모여들었다. 우리들은 적들을 감시하면서 물홈채기로하여 한발한발 접근해들어갔다. 약 30분이나 걸려서 집앞으로 다가가서 열려진 방안을 보니 금방까지 있었던 적들이 온데간데 없었다. 우리들은 잠시 주춤거리고있는데 집안에서 주인인듯한 사람이 나왔다. 우리는 그를 불러세우고 물었다.
《놈들이 다 어딜 갔소?》
《금방 4륜밀차를 타고갔쉐다.》
그 집주인은 우리를 미처 유격대로 알지 못하고 천연스럽게 대답했다. 우리는 집주인에게 우리가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것과 굶은 사유를 알려주고 죽을 쑤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주인은 그 소리를 듣자 반색을 하더니 우리에게 다가와서 그러면 당신들이 김일성장군님부대의 어른들이 아니냐고 은근히 물었다. 그렇다고하니 그는 곧 우리의 손을 잡고 방안으로 안내했다.
우리들은 주인에게 일제의 간악한 침략정책과 조국의 광복에 대하여 상세히 말해주면서 원쑤들에게서 얼마나 학대를 받아가며 사는가고 이야기하였다.
주인은 떨리고 분이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조선사람치고 왜놈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왜놈이 원쑤라는것은 산천초목도 다 알고있쉐다. 당신네들은 참 훌륭한분들이오그려.》
주인은 옆집에도 귀띔하여 비밀을 지킬것을 부탁하고 죽을 쑤었다.
우리들은 멀겋게 쓴 죽을 마시였다.
조국땅에 들어와 이런 따뜻하고 지성어린 음식을 받고보니 눈물이 돌았다.
(인민들은 우리 조선인민혁명군을 자기의 혈육처럼 여겨준다. 이 굽히지 않는 민족의 의지를, 힘의 원천을 일제놈들이 제아무리 발악한다해도 누를수 없는것이다.)
우리들은 그만 죽에 취하여 쓰러져 혼곤히 잠이 들었다. 한밤중에 깨여보니 주인은 벌써 주근주근하게 밥을 지어놓고 기다리고있었다.
우리들은 서로가 굶었던 배에 많이 먹지 말라고 권유하면서도 밥이 꿀처럼 달아서 어느덧 숟가락이 연신 올라갔다.
식사가 끝난후 집주인에게서 상세한 적정을 들었다.
후에 알고보니 주인은 래일아침 자기 식구들이 먹을 식량으로 우리를 대접했던것이였다.
우리는 주인에게 사례를 하고 목재소 서기의 집을 안내해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들은 집주인의 안내로 목재소 서기의 집을 찾아가서 금고와 창고를 열라고 했다.
우리들은 창고문을 열고 모포, 식량, 소금, 군용밥통, 간장 등을 로획하였다.
로획한 물건들은 목재소주변의 인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우리에게 밥을 지어준 주인집에는 쌀을 주었다.
그런 다음 주민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고 선전사업을 했다.
생활에 쪼들리고 일제의 억압에 신음하던 이 궁벽한 마을의 주민들은 무장한 우리들을 보자 말보다도 우선 눈물이 앞서서 우리의 손을 마주잡고 소리없이 눈믈을 흘리였다. 우리들은 조국의 산천이 쩡쩡 울리도록 목청껏 웨쳤다.
《우리가 누구때문에 못살게 되였는가. 우리는 왜 망국노의 쓰라린 생활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싸워야 한다. 우리에게는 강력한 무장력인 조선인민혁명군이 있다. 당신들이, 조선인민들이 누구나 다 흠모하는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신다. 김일성장군님께서 조선인민혁명군을 지휘하고계신다. 이러한 혁명군이 있는한 조선은 반드시 일제를 쳐부시고 제나라를 다시 찾을것이다. 다같이 힘을 합쳐 일어나라. 만일 일제강도놈이 없고 여러분들이 이 나라의 주인이라면 누가 당신네들을 이렇게 마소처럼 부리겠는가. 모두 일어나라. 청년들은 피끓는 청춘을 반일항쟁에 바치라. 김일성장군님께서 령도하시는 우리의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들어와 원쑤격멸의 길에 나서라.》
모여왔던 사람들은 《김일성장군! 김일성장군!》하며 여기저기에서 물결치듯 하였으며 경탄의 정을 금치 못해하였다.
우리들은 가지고간 소책자들과 선전문들을 그들에게 나누어주면서 《불씨를 뿌리시오. 혁명의 불씨를 뿌리십시오.》라고 말하였다.
물론 이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된것은 아니다. 그러나 많지 않은 이 시간을 가지고도 조선인민의 가슴속에 영원히 꺼지지 않을 혁명의 불씨를 안겨주기에는 충분했다.
(이제 이 불씨들이 활활 타번지면서 크나큰 화산으로 변할것이 아닌가.)
우리들은 인민들이 피해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가 간 뒤에 경찰서에 보고하라고 일러주고 차후작전을 위하여 일단 철수하였다.
우리들은 수림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가 다시 철길로 나와 4륜밀차를 타고 언덕진 선로를 단숨에 30리가량 벗어져나왔다. 그리고나서 타고온 4륜밀차를 골짜기에 들어메친 다음 아무도 모르게 은페해놓았다.
우리는 다시 산으로 올랐다.
우리의 앞길에는 첩첩 난관이 가로놓여있다. 그러나 이 난관은 반드시 돌파하여야 하는것이다. 혁명의 길은 평탄하지 않다. 이루 헤아릴수 없는 난관이 가로놓인 험준한 길이다. 그러나 이 혁명의 길은 인간으로서 가장 고귀한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는 그러한 의로운 길인 것이다.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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