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산전막의 로인
윤태홍
1940년겨울 동녕현에서 있은 일이다.
대원 몇명을 데리고 부대를 떠나서 임무를 수행하던 나는 부대의 행방을 잃게 되였다.
그것은 적들의 《토벌》에 대처하여 부대가 갑자기 이동해버렸기때문이였다.
그후 우리는 부대를 찾아서 산속을 헤매게 되였고 여러날동안 위험에 빠졌던 일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식량도 떨어지고 탄알도 몇발 남지 않게 되였다. 게다가 우리들가운데는 환자까지 생겼으므로 적들을 습격하여 탄알을 보충하거나 식량을 구한다는것은 생각조차 할수 없는 처지였다. 또한 놈들의 경비와 단속이 극심하였으므로 집단부락에 있는 주민들을 통해서 식량을 구입하던것마저 막혀버리고말았다.
하루는 요행 집단부락밖으로 나온 나무군을 만나서 돈을 주고 사정해본 일도 있었으나 여러날이 지나도록 약속한 장소에서 종시 그를 만날수 없었다.
이러한 사정은 우리로 하여금 말할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하였다.
어디다 의탁할곳없는 환자를 서로 업거나 이끌면서 우리는 계속 깊은 눈속을 헤쳐나가는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우리는 십여일간이나 음식구경을 못한채 부대를 찾아 눈보라치는 험산준령을 넘어다니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우리는 산속에서 사냥군들이 림시로 거처하다가 내려간듯한 자그마한 산전막 하나를 만나게 되였고 여기서 한되가량이나 되는 쌀과 한통의 성냥을 발견하였다.
이때의 반가움이란 체험한 사람이 아니고는 짐작조차도 못할것이다.
며칠째 잠도 자지 못하고 눈과 마른 나무잎을 비벼먹으면서 무인지경 심산속을 헤매던 우리였으므로 이 쌀과 성냥이 어떤 사람의것인지 어떻게 되여 이곳에 있게 되였는지조차도 깊이 생각해볼 여지없이 우선 밥을 지어 나누어먹었다.
《혹시 적들이 독약이라도 섞은게 아닌가?》하는 의심도 있었으나 그만큼 끓는 물에 여러번 정히 씻고 손질을 해서 지은 밥이므로 오히려 맛있게 먹었다.
오래간만에 더운 밥을 먹은후 얼마간 깊은 잠을 자고난 우리는 이 산전막과 쌀 그리고 성냥에 대하여 토론도 해보았다. 그러나 종시 그 까닭을 알수 없었다.
우리는 산전막을 련락장소로 정한 다음 두패로 나뉘여 다시 부대를 찾아떠났다.
떠날 때에 우리는 쌀주머니속에다 사례의 뜻으로 돈을 대신 넣어서 본시 매달렸던 자리에 매달아놓았다.
그후 여러날동안을 두고 우리는 녕안부근 백여리안팎산속을 누비듯이 헤맸다. 그러나 부대의 행처는 여전히 찾지 못하고 적《토벌대》를 피하여 다니다가 다시 산전막으로 오게 되였다.
점심때가 훨씬 지났을 무렵이였다.
마지막골짜기를 넘어서서 발자국을 덮으며 산전막으로 접근하던 나는 뜻밖에도 머리 흰 로인한분을 만났다.
이때 그 로인은 위만군복을 입고 권총을 찬 나를 보자 깜짝 놀라는 기색이였고 무엇인지 손에 들고있던것을 급히 눈구뎅이속에 묻어버리는것이였다.
(정탐군인가?…)
(우리편 사람인가?…)
로인과 시선이 마주치는 짧은 순간 이러한 두가지 생각이 내 머리속에 번뜩이였다.
그러나 나는 인차 그 로인이 《좋은 사람이다.…》하는 인상을 가지게 되였다.
우선 그 몸차림이 그랬고 그 얼굴표정이 그랬다.
위만군복을 입고 권총을 찬 나의 아래우를 훑어보는 로인의 눈에서는 인차 공포의 빛이 사라지고 점차로 날카로운 증오의 빛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놀라지 마십시오. 로인님. 우리는 위만군이 아니라 유격대입니다.》
나는 오래동안 겪어온 유격대생활체험을 통하여 그가 틀림없이 일제놈들을 미워하는 좋은 로인이라고 인정하면서 이렇게 내 신분을 밝혔다.
그러나 로인은 반신반의하면서 나를 더욱 찬찬히 보았다.
《유격대라니요?… 김장군부대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김일성장군님이 령도하시는 조선인민혁명군입니다.》
나는 로인에게 공손히 대답했다.
그러자 로인의 눈에는 눈물이 핑그르 돌았다.
《얼마나들 고생을 하슈… 이 늙은게 애쓴 보람으로 끝내 당신들을 만나는구려…》하고는 내손목을 덥석 잡았다. 로인은 산아래 약 30리지점에 있는 주가툰부근 집단부락에서 사는 사냥군 류가라고 자기를 소개하였다.
그러면서 로인은 방금 우리를 보았을 때에 눈구뎅이속에 파묻었던것을 찾아헤쳤다.
그속에서는 바로 며칠전에 우리가 산전막에서 발견한것과 꼭같은 쌀주머니와 성냥한통이 나타났다.
나는 더 놀라운 생각으로 머리 흰 로인과 그 쌀주머니를 번갈아보았다.
참으로 나에게는 이미 낯익은 쌀주머니였다. … 우리들이 눈길에서 굶주려 쓰러질 때에 우리를 다시 일쿼세워준것이나 다름없는 쌀주머니가 아닌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할 때에 로인은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우리를 산전막안으로 들어가자고 하였다.
《나는 참 놀랐수다. …당신들이 위만군복을 입고 갑자기 눈앞에 나타날 때엔 〈이젠 죽었구나.〉하는 생각보다도 먼저 〈김일성장군부대가 우리 마을에 오는것을 더는 보지 못하게 되는구나.…〉하는 생각이 앞섰구려… 3년전에도 김장군께서 친솔하시는 군대어른들이 우리 마을에도 오셨댔소. … 그때는 이런 옷을 입지 않으셨길래 나는 더 놀랐구려.…》하면서 로인은 산전막에 쌀과 성냥을 가져오게 된 경위를 이야기하였다.
그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 3년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친솔하시는 일부 부대가 이 지방에서도 일제놈들을 쳐부시고 많은 부락들을 해방시킨 일이 있었다.
그때 이 로인이 살던 부락도 바로 이 부대에 의하여 해방된 마을중의 하나였다.
그 당시 사단 후방부 책임자로 있던 동무가 이 지방 인민들과 깊은 련계를 맺고 사업하였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그가 인솔한 우리 련대가 이 지방으로 오게 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지방인민들은 모두들 《김일성장군부대가 또 왔으니까 반드시 일제놈들과 위만군놈들을 쳐부시고 마을을 해방시켜주리라.》는 굳은 신심들을 갖게 되였다. 그들은 각 방면으로 유격대가 있는곳을 알아보려고 애를 썼고 유격대를 맞이할 준비까지 하고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일제놈들은 《공산군이 모두 산속에서 굶어죽는다.》는 등의 허위선전으로서 인민들로 하여금 유격대를 믿고 바라지 못하게 하려하였으며 《산속에서 헤매는 공산군을 발견하면 즉시 알리라. 그러면 막대한 〈상금〉을 준다. 만일 이를 거역하는자는 모두 총살한다.》고 떠들면서 갖은 악행을 다하였다.
그러나 유격대를 자기 혈육처럼 생각하고 위하는 인민들은 일제놈들의 발악이 심하면 심할수록 더욱더 놈들의 눈을 피해가며 유격대를 만나고싶어했으며 단 한줌의 쌀과 소금이라도 더 빨리 전하려고 애를 썼다. 일제놈들의 감시와 탄압이 혹심한 집단부락안에서도 그들은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서로 모여앉아 의논들을 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적들에게 알려져서 여러사람이 붙잡혀갔고 부락안에 있는 농민들은 얼마되지 않는 식량마저 적들에게 강탈당하고말았다.
이러한 때에 부락의 한 농민이 나무를 하러 나왔다가 유격대원(나)을 만나고 쌀을 사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유격대의 부탁을 받은 그 농민은 부락안으로 들어간지 이틀후에 쌀 닷되를 구해가지고 다시 토성을 넘어나오다가 적들에게 붙들려갔는데 그후에 종시 돌아오지 못했다는것이다.…
로인이 여기까지 이야기했을 때에 나는 내가 쌀을 사달라고 부탁한 그 농민의 얼굴이 생각나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나는 로인에게 그 농민의 생긴 모습과 이름을 물었으나 로인은 《…그런 사람이 어디 그 사람뿐인가요. 우리 김장군부대를 도와주고 왜놈들이 어서 망하기를 바라며 싸운 사람들을 다 기억하려면 하늘의 별을 세기보다도 힘들거우다.…》하고 굳이 그 농민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로인의 두눈에 눈물이 어리는것을 본 나는 해가 저물어가고 눈보라가 날리는 산전막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로인도 잠시 시선을 돌렸다가 얼굴을 문대면서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일제놈들과 위만군 그리고 자위단놈들은 그후부터 더욱더 집단부락출입에 대하여 혹심한 감시와 단속을 하였다. 자기들의 승인을 받고 나오는 나무군들에게도 하루의 량식으로 밀가루빵 넉냥이상은 절대로 가지고 나올수 없게 하였다.
이러한 조건하에서도 부락사람들은 유격대를 만나기 위하여서와 쌀을 내오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하러 나올 때에 말목태에 쌀을 넣어가지고 나오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말여물통 밑바닥을 2중으로 만들고 그 사이에다가 약간씩의 쌀이나 수수, 강냉이 등을 넣어가지고 오기도 했다. 이렇게 내다가는 저마다 일정한 장소에 감춰놓고 김일성장군부대를 만나려고 애를 썼다.
이러한 가운데서 류로인이 생각해낸것이 바로 산전막이였다. 그는 《옛날부터 사냥군들은 산전막에 쌀과 불을 떨구지 않았다.》는 자기 선조들의 말을 기억해낸것이다. 산속에서 길을 잃은 사냥군이나 나그네들이 가까운 산전막을 찾아왔다가 주인이 없더라도 춥고 배고픈것을 면하고 생명의 구원을 받게 된다는것이였다.
류로인은 그간에 일제놈들때문에 먹을것이 없어서 지켜오지못하던 《이 좋은 일을 이제부터라도 계속 한다면 우선 산속에서 굶어죽게 됐다고 일제놈들이 떠드는 유격대에게 다문 얼마라도 쌀을 줄수 있을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였던것이다.
그래서 로인은 60이 넘은 늙은 몸으로 다시 사냥군(족제비잡이)노릇을 시작하게 되였고 5일분 식량을 가지고 집단부락밖으로 나왔다. 그 5일분 식량(한되반)에서 반되는 로인이 5일간 식량으로 하고 나머지 한되는 산전막에 매달아두었던것이다.…
이날은 두번째 나왔던 길에 우리를 만나게 되였다고 했다.
《…참으로 영영 잃었던 사람을 다시 만난것 같이 반갑소. …왜놈들의 수작이 언제나 개수작인줄은 뻔히 알면서도 정작 그런 말이라도 듣고보니 참으로 마음이 불안했지요.》라고 하면서 류로인은 인자하고 정정한 시선으로 우리를 마주보았다. 로인을 마주보는 나의 가슴에는 새로운 감격과 새힘이 용솟았다. 참으로 그 어떤 말로 이렇듯 깊고 깊은 인민들의 사랑과 지지에 대하여 이야기하랴.
《로인님 꼭 믿어주십시오. 그리고 부락에 가시거든 빠짐없이 전해주십시오. 김일성장군님의 령도를 받는 우리들이 있는한 왜놈들이 만주나 조선에서 더는 살아견디지 못할것입니다. 로인님이 계신 부락도 반드시 해방시키겠습니다.》
류로인과 헤여진 우리는 그후에 부대를 만났으며 일제놈들과 계속 싸워 린근부락들을 해방시켰고 로인이 《생지옥살이》를 한다던 주가툰의 집단부락도 해방시켰다.
그러나 나는 그후 공작임무가 바뀌여져서 류로인을 직접 만나지 못하였지만 전우들을 통해서 부락이 해방될 때에도 류로인은 여전히 정정하더라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쌀을 내다주려던 농민이 바로 류로인의 둘째아들이였다는것도 그후에 가서야 알게 되였다.
지난날 이렇듯 김일성장군님 항일유격대가 인민들로부터 받아온 절대적인 지지와 육친적인 사랑에 대한 실례를 일일이 들자면 참으로 수천권의 책을 묶어도 다 묶지 못할것이다.
바로 이것은 우리들이 그때나 오늘이나 항상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하신 교시를 충실히 실천한데 있는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인민을 떠나서는 살수 없었고 죽어도 인민을 위해 죽고 살아도 인민의 사랑속에서 길이 살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일관되였던 것이다.
10. 피어린 투쟁속에서
박영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령도밑에 항일유격대가 조직되던 초시기의 일을 회상할 때마다 나의 눈앞에는 적의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 용감히 싸운 동지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적수공권으로 시작한 무기획득과정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였다.
우리는 처음에 호미와 낫과 창으로써 혹은 《고추폭탄》과 빨래망방이로 적의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 과정의 곤난을 어찌 다 일일이 말할수 있으랴!
총 한자루를 빼앗기 위해 목숨을 바쳐싸운 동지들이 많다.
우리는 실로 모든 무기를 피로써 빼앗았고 목숨과 바꾸었다. 우리가 가진 어느 총 한자루, 어느 칼 한자루에 우리 동지들의 고귀한 피가 스며있지 않은것이 없었다.
나는 처음에 화룡현 유격대에서 투쟁하였는데 당시 여기서도 수많은 동지들이 무기를 빼앗기 위해 피어린 투쟁을 전개하였다.
여기서 이야기하려는것은 그 많은 사실들중의 몇가지 실례에 지나지 않는다.
1932년 음력 5월에 있은 일이다.
리동일동지를 비롯한 20명의 유격대 및 적위대, 소년선봉대원들은 대낮에 두만강연안 선구에 나가 그곳 《공안국》을 습격하여 적의 무기를 탈취할것을 계획하였다.
그들에게는 보병총 4정과 권총 4정밖에 없었으므로 무기를 가지지 못한 동지들은 흩어져서 망을 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보병총을 가진 동지들은 그들의 퇴각로인 《노루골어귀》에 매복하고 권총대만 적《공안국》에 들어가기로 계획하였다.
도중에 그들은 천장(묘를 옮기는것)하러 가는 사람들로 가장하였다.
베두루마기에 베감투를 쓴 리동일동지며 상주로 가장한 동지들이 앞장에 서고 그뒤에 천장하는 백골을 든것으로 가장하여 보병총 네자루를 가마니에 싸서 맞든 동지들이 따라서고 그 뒤를 삽이며 곡괭이를 메고 농민차림을 한 동지들이 따랐다.
《노루골어귀》에서 보병총을 가진 4명과 갈라진 권총대 4명은 곧장 《공안국》으로 향하였다.
마침 노리고간 점심시간이 된지라 흩어졌던 경찰놈들이 저마다 무기를 가지고 《공안국》으로 모여들었다.
한 동지는 밖에서 보초를 서고 두 동지는 베감투를 쓰고 베두루마기를 입은 리동일동지를 앞장에 세우고 《공안국》안으로 들어갔다.
적들은 아직 점심전이였는데 캉(중국식온돌방)우에서 투전놀음을 하고있었다.
경관 한놈이 리동일동지를 보자 왜 왔느냐고 소래기를 쳤다.
리동일동지는 얼른 《청목동에 사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제사를 지내기 위해 소를 잡겠는데 허가를 해주십시오.》하고 말했다.
그러자 경관놈은 《소를 잡다니? 그건 안돼, 돼지나 잡아.》하고 건방진 말투로 지껄이였다.
리동일동지는 일부러 난처한 기색을 얼굴에 나타내며 《사정》을 이야기했다.
《돼지를 가지고는 곤난합니다. 우리 집은 부자집이고 해서 손님이 많을것인데 아무래도 소를 잡아야 합니다.》
이러면서 리동일동지는 《공안국》내부를 다 살핀 다음 불의에 권총을 내들었다. 그러자 다른 두 동지도 권총을 빼여들었다. 일부 적들이 달려드는 바람에 싸움이 벌어지고 한놈 쏘아눕히기도 했지만 원래 무장탈취가 기본목적인지라 리동일동지는 적들을 향해 웨쳤다.
《우리는 무기가 필요하지 너희들의 목숨은 필요없다.》
그러자 적들은 항복해나섰다.
이리하여 그들은 이날 보병총 8정, 권총 1정, 탄알 400여발, 군복 20여벌에 군도, 군모까지 로획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때로부터 리동일동지는 《베감투》라는 별호로 불리우게 되였다.
그후 이해 8월에는 리동일동지를 비롯한 3명의 동지들이 달구지군으로 가장하고 회경시내에 들어가 중국인지주의 보병총 1정과 권총 1정을 빼앗았으며 그곳 자위단을 습격하여 보병총 5정을 로획하였다.
뿐만아니라 그들은 그해여름 석마동의 악질지주 최창익을 처단하고 권총 2정과 보병총 3정을 탈취하였다.
이와 같이 리동일동지는 초기의 무장획득투쟁시기에 헌신적으로 활동한 훌륭한 투사였다.
또한 장금진동지는 몇명의 적위대원을 데리고 칼과 창으로써 일본헌병의 무기를 탈취하였다. 그는 원래 룡정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장동에서 살다가 대립자에 왔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
장금진동지는 한때 룡정에서 학생운동을 지도했다. 그런데 그것이 폭로되여 체포령이 내렸다. 학교를 그만둔 그는 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바쁜 고비를 넘긴후 자기 집이 있는 장동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적들의 수색이 너무도 심하여 그는 집에 붙어있을수 없었다.
그래 산에서 찬이슬을 맞으며 밤을 새우군 하였다. 그는 어렸을 때 부모를 따라 정든 고향땅을 떠나던 일이며 적들이 조선농민들을 억울하게 학살하던 일, 혁명조직에 참가하여 사업하던 일, 룡정에서 밤중에 맨발로 피하여오던 일 등 지난날의 일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치였다. 이런 일을 생각하니 원쑤에 대한 치솟는 분노를 참을수 없었다.
그는 곧 부락청년들과 비밀리에 련계를 맺었다. 그리고 산에서 자면서 혁명사업을 계속하였다.
그가 하루아침 병석에 있는 어머니를 보기 위하여 집에 내려왔을 때였다. 갑자기 문밖에서 군견이 짖어대는 소리와 소란스러운 발자국소리가 났다.
적들이 그를 체포하러 온것이였다.
어머니는 아들의 신상이 위험함을 알자 병석에서 일어나 부뚜막의 가마를 들고 그밑에 아들을 숨게 하였다.
어머니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만약의 경우를 결심하고 가마목에 식칼을 감춰두고는 아침을 짓는척 가마를 부시였다.
집안에 뛰여든 경찰놈들은 방안을 샅샅이 뒤지며 수라장으로 만들었으나 끝내 그를 찾지 못했다. 경찰놈들은 결국 허탕을 치고 돌아가버렸다.
적들의 발악이 심할수록 장금진동지의 적개심과 투지는 더욱 굳어져갔다.
자기가 나아갈 길이 어떤 길이라는것을 더욱 똑똑히 인식한 그는 마침내 장동을 떠나게 되였다.
그때 어머니는 아들에게 《얘 금진아! 내 걱정일랑 말고 나라를 찾기 위해 싸워라. 한번 내디딘 걸음은 중간에서 멈추지 말고 끝까지 걸어야 한다.》고 하였다.
어머니의 말은 아들의 결심을 더욱 굳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장금진동지는 그후 대립자지구의 당조직에서 적위대대장으로 사업하게 되였던것이다.
그때는 1932년초였다. 칼과 창을 준비한 그는 어느날 5명의 대원들을 데리고 대립자에서 금곡으로 넘어가는 솔바장령으로 향하였다. 이들은 전날 반일회원들로부터 대립자에 있는 일본헌병 3놈이 이날 오후 금곡지방으로 간다는 정보를 받았던것이다.
경찰놈들때문에 큰길로는 갈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산을 타고갔다.
때마침 봄철이라 훈훈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무들에는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오고있었다.
그들은 들먹이는 가슴으로 산길을 걸었다.
장금진동지는 솔바장령 마루턱에 다달으자 전우들을 둘러보며 《어떻소? 이 고개마루가?》하고 물었다.
그러자 전우들은 《거 대낮에 범잡을데로구만.》 《한바탕 해볼만한곳인데…》하고 저마다 그의 의견에 동의하는 의사를 표시했다.
장금진동지는 고개마루 길옆 나무숲속에 대원들을 매복시켰다.
그는 이미 이 부근에 남몰래 와서 자리를 봐두었던것이다. 그들은 여기서 적이 오기를 하루종일 기다렸다.
어느덧 해는 서산으로 뉘엿뉘엿 기울어졌다. 그들은 몹시 안타까왔다.
초조한 시간을 보내는데 마침 령길에 3놈의 일본헌병이 나타났다.
그놈들은 모두 권총과 군도를 차고있었다.
장금진동지는 전우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모두 몹시 긴장되여있었다.
적들은 점점 가까이 왔다.
드디여 헌병놈들은 적위대원들이 매복한 지점에 이르렀다. 이때 장금진동지는 《이놈들, 움쭉말라!》고 소리를 지르며 선참 길로 뛰여내려갔다. 그러자 모두 《와!》함성을 지르며 적들에게 달려들었다.
숲속에서 불의에 6명의 장정이 칼과 창을 들고 달려드는 바람에 넋을 잃은 적들은 처음에는 어쩔바를 몰라하였다.
그러나 원래 교활한 놈들이라 적들은 인차 적위대원들이 총을 가지고있지 못한것을 눈치차리자 두놈은 들고뛰기 시작하였다. 이틈에 나머지 한놈이 권총을 뽑아들었다. 순간 적위대원들은 번개같이 달려들어 그 헌병놈을 찔러눕히고 권총 1정과 군도를 빼앗아냈다.
이렇게 원쑤들에게서 탈취한 무장을 기초로 하여 화룡현에서는 30여명의 대원들로 유격대가 조직되였다.
그러나 이것은 첫걸음에 지나지 않았다.
아직도 우리들중에는 총이 없어 칼만 찼거나 그것도 없는 동지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무장을 위한 투쟁은 계속 전개되였다.
무장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에는 유격대원들뿐만아니라 당의 영향하에 있는 지방인민들도 참가하였다. 그리하여 우리의 무장은 날로 강화되였다.
두만강변의 개산툰 사미구판에서 건만골로 가는 길에는 강이 하나 있다.
이 강가는 건만골마을녀성들의 빨래터였다. 하루는 이 강기슭에서 20살안팎의 두 녀성이 빨래를 하고있었다. 그들은 부녀회원 박수환동지와 김수복동지였다.
그런데 이날 그들이 여기로 나온 목적은 다른데 있었다. 두 녀성은 자기들의 지혜와 힘을 합쳐 적의 무기를 빼앗을 계획이였다.
보통때는 그리 깊지 않던 물도 이때는 여름철이여서 퍽 불어났다.
강에는 널판지다리가 있었는데 며칠 전날밤 그들은 일부러 그것을 무너뜨려놓았다.
그들이 한창 빨래를 하고있을 때였다. 그들의 맞은켠 강건너에 사미구판경찰서 순사 한놈이 나타났다. 경찰놈은 총을 메고 건만골로 오는 길이였다.
두 녀성은 슬금슬금 그놈의 동정을 살펴보았다.
그놈은 강에 다리가 없는것을 보자 무어라고 투덜거리더니 빨래하는 두 녀성에게 《어이! 이리 좀 와!》하고 거만한 태도로 손짓을 하였다.
그래도 그들은 못들은척 하였다.
경찰놈은 재차 소리쳤다.
《못들었는가? 빨리빨리 건너와!》
두 녀성은 막상 맞다들고보니 가슴이 다듬이질을 했다.
그러나 경찰놈이 하는 꼴을 보아서는 그자리에 그냥 있을수 없을뿐더러 이미 결심한바가 있으므로 강을 건너 그놈의 앞으로 가까이갔다. 손에 빨래방망이와 헌옷가지를 쥔 채…
경찰놈은 그들을 번갈아보며 히죽이 이발을 드러내놓더니 키가 큰 수환동지에게 《나 좀 업어!》하고 말하였다.
당시 경찰이나 자위단놈들은 도랑물도 뛰여넘기 힘들면 그 부근에 있는 사람을 붙잡아 업어넘게 했다.
수환동지는 잠시 주저하였다. 경찰놈은 빨리 업으라고 독촉하였다.
수환동지는 그놈을 업고 강에 들어섰다. 수복동지는 옆에서 부축하였다.
강한복판에 들어섰을 때 수환동지는 팔의 힘을 탁 풀었다. 경찰놈은 발이 물에 젖는다고 호통질을 쳤다. 수환동지는 다시 그놈을 춰올렸으나 한두걸음 나가다가 또 팔을 늦췄다.
그래도 경찰놈은 아무 눈치도 못차리고 발을 물에 적시지 않으려고만 했다.
(몇발자국 더 나가면 물이 얕아진다. 더 주저하면 기회를 놓치고 만다.)
비상한 결심을 한 수환동지는 갑자기 경찰놈을 물한가운데에 빠뜨려놓았다. 두 녀성은 있는 힘을 다하여 물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놈을 빨래방망이로 때리고 총을 빼앗아냈다. 이것은 1932년 7월에 있은 일이다.
경찰놈의 총을 빼앗은 그들은 적들의 추격을 받아 몇끼를 굶으며 유격대를 찾아왔다.
유격대의 무장이 강화됨에 따라 그 투쟁규모는 더욱 커지였다.
그리하여 1933년 2월에는 30여명의 유격대원들이 일본군으로 가장하고 화룡현 합신촌의 지주 장보림의 자위단을 습격하여 보병총 19정과 권총 3정, 목갑총(모젤) 2정을 로획하였으며 또 악질토비의 무기 30여정을 로획하였다.
이처럼 피로써 쟁취한 한자루한자루의 무기는 더 많은 무기를 쟁취할수 있게 하였으며 그것은 우리 유격대를 더욱 강화발전시킬수 있는 무장적기초로 되였다.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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