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연재】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 (4)
3. 어버이의 사랑
리 오 송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간고한 항일무장투쟁시기에 부모형제들을 원쑤들에게 빼앗기고 유격대오에 들어온 나어린 전사들을 극진히 사랑하여주시고 보살피시며 혁명전사로 키워주셨다.
당시 사령부에서 주로 내부련락임무를 수행하던 전령병들은 거의다 부모를 잃은 어린 고아들로서 위대한 수령님의 세심한 지도를 받으면서 혁명전사로 성장하였다.
내가 항일유격대에 들어가 위대한 수령님을 처음 만나뵈옵게 된것은 1938년 봄이였다.
그때 그이께서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면서 부대로 찾아오게 된 경로에 대하여 차근차근 물으시였다. 당시 겨우 12살이였던 나는 부모님앞에서처럼 지난 일들을 빠짐없이 세세히 말씀드렸다. 처창즈유격근거지에서 아버지가 굶어돌아가실 때 내손을 붙잡고 어린 누이동생을 데리고 내도산으로 찾아가라고 하던 일이며 그후 내가 6살난 누이동생을 데리고 내도산으로 찾아가던 도중에 지방공작 나갔다가 부상당한 누나를 우연히 만나 그에게 녀동생을 맡기고 혼자 내도산으로 간 일이며 그후 누나와 녀동생이 내도산으로 가다가 굶어죽었다는 사실을 인편에 들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울먹거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의 말을 다 들으시고나서 조용히 나를 끌어당겨 안아주시였다. 나는 그때 위대한 수령님의 눈시울에 눈물이 맺힌것을 보자 참고참던 설음이 한꺼번에 터져서 그만 그이의 품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울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송이는 반드시 앞으로 부모형제들을 빼앗은 원쑤 일제놈들을 쳐부시고 나라의 기둥이 될 훌륭한 사람이 되여야 한다.》라고 나를 고무하여주셨고 앞날에 대한 희망을 안겨주셨다.
나는 이때부터 그이의 따뜻한 슬하에서 자랐다. 그동안의 많은 일들을 나는 여기에 다 적을수는 없다. 다만 나의 기억에서 언제나 잊혀지지 않는 한가지 사실에 대해서만 회상하려 한다.
내가 13살나던 1939년 가을, 안도현 어느 수림속에서 우리 부대가 숙영하던 때의 일이였다. 우리 전령병들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거처하실 천막을 치고 그이께서 돌아오실 때를 기다리고있었다.
그러나 숙영하는 각 부대들을 돌아보시러 나가신 그이께서는 밤이 퍼그나 깊었어도 좀처럼 돌아오시지 않았다.
그이께서 안계시는 천막안은 텅 빈것만 같았다.
《왜 안오실가?》
《이제 돌아오실거야.》
《그러다 또 먼저번처럼 어느 련대지휘부에서 주무시면 어쩌나?》
위대한 수령님께서 돌아오시기를 기다리던 나머지 우리들은 초조한 마음으로 천막밖을 들락날락하면서 안정하지 못하고있었다.
《그럼 어디 계시나 내가 알아오겠소.》하고 나는 성급히 밖으로 뛰여나갔다.
어두컴컴한 수림속은 잠든듯이 고요하였다. 나는 여기저기에 피워놓은 불무지곁에서 모두 곤히 잠든 대원들이 깨여날가 두려워 발소리를 죽여가며 수림속을 걸어갔다.
가실만한 곳을 다 찾아봐도 그이께서는 계시지 않았다. 그사이에 혹시나 천막에로 돌아오시지 않았을가 하여 나는 다시 천막쪽으로 발길을 돌리였다.
늦은가을, 북방의 깊은 수림속의 밤공기는 추위를 느낄 정도로 몹시 찼다. 대원들은 땅에 떨어진 나무잎들을 긁어모아 이불마냥 몸에 덮고 잠들고있었다.
나는 잠든 동무들의 사이를 조심조심 걸으며 맞은편 수림속으로 갔다.
나는 거기에서 허리를 굽히시고 흩어진 나무잎들을 모아서 잠든 대원들을 덮어주고계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모습을 보았다.
《우리에게 있는 모포를 가져오시오.》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곁에 서있던 전령병에게 나직이 말씀하시였다.
《모포는… 사령관동지의것밖에 없습니다.》
전령병은 고집스럽게 그 자리를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천막이면 충분하오. 이 동무는 감기에 걸렸으니 든든히 덮어줘야겠소. 어서 가져오시오.》
인자하시고도 엄격하신 그이의 말씀에 못이겨 전령병은 더는 아무 말도 못하고 사령부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다시 허리를 굽히시고 나무잎을 모으시는 그이의 모습이 불무지의 불빛속에서 조용히 움직이고있었다. 잠든 대원들의 얼굴을 내려다보시며 빙긋이 웃음을 띠우신 그이의 모습을 나는 똑똑히 알아볼수 있었다.
잠든 대원들을 하나하나 돌아보시며 찬이슬을 막아주기 위해 흩어진 나무잎들을 쓸어모으고계시던 위대한 수령님의 그 자애로운 모습을 나는 긴 세월이 지난 오늘에도 잊을수 없다.
그뿐이랴. 감기든 대원을 알아두셨다가 오직 한장밖에 없는 자신의 모포까지 가져다 덮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뜨거운 사랑을 어찌 다만 한 대원에 대한 사랑으로만 설명할수 있으며 친어버이의 사랑인들 이보다 더하랴. 이 사랑을 받으면서 나는 그이의 전사로 자라나는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다시한번 느꼈다.
나는 마음속깊이 이렇게 다짐했다.
(사령관동지께서 가리키시는 길에서 오직 혁명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싸움으로써 이 바다보다 깊고 하늘보다 높은 은정에 보답하리라…)
나는 천막을 향하여 재빨리 발길을 옮겼다.
이윽고 위대한 수령님께서 돌아오시였다.
《왜 아직 자지들 않고있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천막에 들어서시자 우리를 돌아보시며 이렇게 물으시였다.
우리는 얼른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있었다. 그이께서 주무셔야 하겠는데 단 한장의 모포마저 감기에 걸린 대원에게 덮어주시였으므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고있을뿐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의 심정을 곧 헤아리시고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모포가 없이도 춥지 않게 잘수 있소. 걱정말고 자 이리로 와서 내옆에 다들 누우시오. 서로 몸을 의지하고 자면 그만이요.》
모포가 있을 때에도 그이께서는 혼자 덮으시지 않으시였다. 그이의 간곡한 말씀에 못이겨 언제나 우리는 그이의 량옆에서 한장의 모포를 함께 덮고자군 하였다.
이렇게 우리는 마치 어린시절에 아버지, 어머니품안에 안기여 단란하게 자라듯이 어버이수령 김일성동지의 자애로운 품에서, 그이의 따뜻한 손길에서 자랐다.
오늘 우리의 어린이들과 청년들도 바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그 넓고 깊으며 따뜻한 사랑속에서 자라고있으며 그이께서 가리키시고 이끌어주시는 혁명투쟁의 길에서 보람차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4. 간삼봉전투를 회상하여
최 현
항일무장투쟁시기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지휘밑에 진행된 수많은 전투들가운데서도 1937년 6월 30일에 있은 간삼봉전투는 바로 몇해전 일마냥 나의 머리에 생생히 떠오른다.
보천보전투가 있기 얼마전 우리 제4사부대들은 두만강을 건너 무산지구에 진출하여 일제군경놈들에게 타격을 주었다.
우리들의 이와 같은 국내진출은 1937년 3월 양목정자밀영에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친히 주신 전투과업수행과 관련되여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 이미 국내진출에 대한 전략적계획을 제시하시고 우리 부대를 무산지구로 진출하게 하시였다.
이와 함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이 국내에 진출하면 일제놈들이 더 발악적으로 덤벼들것을 미리 타산하시고 놈들을 격파하기 위하여 제2사부대와 제4사부대로 하여금 곰의골밀영에 집결할것을 지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주신 전투임무를 훌륭히 수행하고 그렇듯 흠모하여마지않던 그이의 곁으로 간다고 생각하니 자연히 우리의 발길은 가벼워지고 마음은 벌써 멀리 곰의골밀영에 가있었다.
우리들이 목적지에 도착한것은 6월하순이였다. 밀영에 도착하던 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친히 밀영어귀까지 나오시여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시였다.
밀영지에 도착한 이튿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지도밑에 제6사, 제4사 제2사부대의 지휘간부들의 회의가 있었다.
나는 이 회의를 통하여 보천보전투에서 패배의 쓴맛을 본 적들이 참패를 만회하고저 《대토벌》을 작전하고있다는것과 바로 그렇기때문에 우리가 이미 얻은 승리에 자만하지 말고 놈들의 발악적인 기도를 분쇄하기 위하여 력량을 집결해가지고 적극적인 방어태세를 갖추어야 한다는것을 잘 알게 되였다.
회의가 끝난 후 2~3일이 지나서 밀영에 집결된 각 부대에는 출발명령이 하달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친솔밑에 600여명의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는 서강고원 간삼봉지역에 도착하였다.
당시 일제는 보천보전투에서 당한 참패를 만회하기 위한 소위 《대토벌》을 서둘렀다.
중국동북에 주둔하고있는 부대들로써는 도저히 조선인민혁명군에 맞설수 없다는것을 보천보와 구시산전투를 비롯한 수많은 전투들을 통하여 톡톡히 맛본 일제는 라남 제19사단소속 함흥 74련대의 2,000여명의 정규군을 동원하였다.
일제의 주구인 김석원이란자가 인솔한 74련대는 근 100대에 가까운 트럭에 나누어타고 혜산과 신갈파를 거쳐 압록강을 건넜다.
김석원은 혜산에서 《대일본제국군인의 전투적기개를 보여준다.》고 호통을 치면서 조선인민혁명군을 뒤따라 간삼봉방향으로 행동을 개시하였다. 간삼봉은 바다속의 섬과도 같이 태고밀림이 우거진 평평한 고원지대에 솟아있는 3개의 봉우리로 되여있다. 6월 30일 새벽 사령부는 보초로부터 적이 나타났다는 신호를 받았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곧 간삼봉지역에서 적을 섬멸할 구체적인 전투계획을 세우시고 산아래 경사진 릉선에 각각 부대들을 배치하시였다.
우리 제4사부대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지휘하고계시는 고지가 동쪽으로 바라보이는 손등같이 생긴 밋밋한 밀림지대 릉선 서남방향에 진지를 차지하였다.
그리하여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령활한 지휘밑에 적을 삽시간에 섬멸할수 있는 전투진이 간삼봉일대에 펼쳐졌다.
6월 30일, 이날은 구름이 낮게 드리우고 짙은 안개가 밀림을 뒤덮고있었다.
날이 훤히 밝기 시작했을 때 보초대가 매복한 곳에서 기관총소리가 자지러지게 산골짝을 뒤흔들었다. 이어 보초대가 적을 쓸어눕히면서 돌아왔다. 보초대가 있던 곳을 빼앗기면 아군의 전투행동은 매우 불리하게 된다. 안개를 리용하여 기여든 적들의 선발대가 코앞에 다가오고있었다. 정세는 위급하였다.
뒤로 물러설수도 없었으며 다만 적을 족쳐야만 했다. 지체하지 않고 나는 돌격명령을 내렸다. 대원들은 온 산이 떠나갈듯이 함성을 지르며 적진으로 육박하였다. 놈들은 혼비백산하여 뒤로 도망쳤다. 이 돌격에서 우리는 보초대가 차지했던 지점을 다시 찾았다. 이때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정황을 알아보시기 위하여 우리 련대로 련락병을 보내시였다.
나는 그 련락병을 통하여 정황을 보고하고 이미 차지한 진지를 고수할 결심을 말씀드렸다.
잠시 골짜기가 조용해지자 정면 숲속에서 푸른 신호탄이 올랐다. 우리는 사령부에서 지시한대로 놈들과 같은 색의 신호탄을 올렸다. 그러자 적들은 공격신호탄인줄 알았는지 이쪽저쪽에서 신호탄을 올리고 눈먼 사격을 시작하였다.
적들의 진공로를 혼란시키려던 우리의 기도는 들어맞았다. 또한 사방에서 오르는 신호탄으로 하여 우리는 적들의 배치정형과 동태를 손금보듯이 꿰들수 있었다.
놈들은 어리석게도 3개 방향으로 이른바 포위진을 치면서 우리를 공격하고있었다.
적들은 제법 돌격소리를 지르면서 총창을 들고 덤벼들었다. 우리는 달려드는놈들에게 명중탄을 퍼부었다.
제6사부대가 차지한 진지에서도 백열전이 벌어지고있었다. 강을 건너 등판을 오르기만 하면 놈들은 우리 총에 맞아 쓰러졌다. 기껏해야 사격거리가 200~300m내외라 명중률은 대단히 좋았다.
무리로 쓰러지는놈들을 본 우리 대원들의 전투사기는 하늘을 찌를듯 높았다.
그러나 적들도 만만치 않았다. 놈들은 죽어자빠진 제편의 시체를 넘어 아득바득 기여들었다.
어떤 때는 썩어 넘어진 진대나무를 사이에 두고 창격전까지 하지 않으면 안될만큼 치렬한 격전이 벌어졌다.
그럴수록 적에 대한 대원들의 증오는 열화같이 불탔고 싸움에서 그들은 용감무쌍하였다.
《바로 네놈들이 우리의 조국산천을 강탈하고 부모형제를 못살게 구는 원쑤들이다. 어디 복수의 불벼락을 받아봐라.》
녀성유격대원 허성숙동무는 이렇게 웨치며 놈들에게 명중탄을 퍼부었고 그리하여 수많은 적들을 쓸어눕혔다.
총을 한방도 쏴보지 못한 신대원 김윤경동무까지도 이날 유격대원들의 용감무쌍한 투쟁에 고무되면서 수많은 일본군놈들에게 명중탄을 안겼다.
예상치 못했던 대실패를 만회해보려고 놈들은 동쪽강기슭에 배치하였던 병력까지 돌려세워 제6사부대와 제4사부대 정면에 투입했다.
이러한 정황을 판단하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시 대원을 우리에게 보내시여 진지를 끝까지 고수할데 대한 구체적인 지시를 주시였다.
나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그때까지 네번째로 만나뵙기는 했으나 이렇게 그이께서 직접 지휘하시는 큰 전투에 참가한것은 처음이였다. 더우기 직접 그이께서 3번이나 사람을 보내주시고 고무해주시는데서 더욱 힘을 얻고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싸울것을 다짐하였다.
새벽에 시작된 전투는 한낮이 되면서 더욱 치렬하여졌다. 부대 우익을 담당한 제2중대에서는 악전고투하고있었다. 나는 응원소대를 거느리고 제2중대쪽으로 갔다. 제2중대를 한창 지휘하고있을 때 나팔수인 김자린동무가 나를 불렀다.
《련대장동지, 저 맞은편 숲속을 보십시오.》하는것이였다.
그가 가리키는곳에서는 누런 군복을 입은 적들이 한군데 몰켜서서 우물거리고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일본도가 흔들리는것이 장교놈들이 분명했다.
나는 적탄통을 재우고 한방 쐈다. 맞은편 숲에 불이 일더니 몇놈인가 쓰러지는것이 보였다. 또 한방 갈겼다. 그러자 거기에서 우물거리던놈들이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기승을 부리며 발악하던 놈들은 자기들의 지휘관이 죽은것을 보자 뒤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우리들은 놈들의 등뒤에 명중탄을 퍼부었다.
위기에 처했던 제2중대는 구원되였다. 내리덮인 구름장에서 비방울이 떨어지더니 얼마 가지 않아 비는 억수로 퍼부었다.
전투는 비내리는 가운데서 더욱 치렬하게 전개되였으며 적들은 계속 쓰러졌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탁월한 작전계획과 침착하고 령활하신 전투지휘에 의하여 놈들의 《삼면포위공격》기도는 완전히 분쇄되였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전개된 전투에서 적들은 된타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당황한 나머지 살아남은놈들은 무기와 배낭을 모조리 내던지고 달아났다.
그러니 골짜기에 무데기로 쌓인 시체를 끌고가는데 대하여서는 엄두도 낼수 없었다.
전투정황을 살피시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전체 부대에 이미 지정한 집결장소로 철수할것을 명령하시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는 《대토벌》을 꿈꾸던 함흥 제74련대의 유생력량 1,500여명을 살상하였다.
후에 안 일이지만 이날 적장교 김석원은 왼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고 간신히 도망쳤다.
호언장담하면서 함흥역을 떠난 제74련대는 1937년 7월 얼마 안되는놈들만이 백골상자를 목에 메고 함흥역에 내렸다.
지금도 간삼봉부근일대에 사는 인민들속에서는 그때 일본놈부대가 몽땅 녹아난 가지가지의 이야기가 전하여지고있다.
당시 일제는 항일유격대에 의하여 섬멸당한 시체가 너무나도 많았으므로 몸뚱이는 내버리고 머리만 떼여서 실어갔다 한다.
놈들은 목딴것만을 운반하기 위하여 장백현에서 농민들의 달구지를 강제로 동원했다.
그때 동원된 농민들이 뻔히 알면서도 한놈에게 《이 마대안에 든것이 무엇인가.》하고 물었더니 그놈은 《호박》이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있다.
간삼봉전투의 대승리는 조선인민혁명군을 조직하시고 그를 강철의 혁명군으로 육성단련하고 항상 승리에로 이끄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탁월한 전략전술과 령활한 령군술을 다시한번 세상에 똑똑히 보여주었다.
보천보전투의 련속이라고 볼수 있는 이 전투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령도하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불패의 위력을 남김없이 시위하였으며 조선인민에게 승리의 신심을 더 굳게 하여주었다.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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