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안도현 대전자전투
최 현
동만 여러 현에 유격근거지가 창설되고 항일무장투쟁이 더욱 강화됨에 따라 적들은 유격근거지를 없애버리려고 발광하였다. 적들은 각처에 집단부락을 설치하여 유격대와 인민들간의 혈연적련계를 끊어버리려고 갖은 흉책을 다했다. 그리하여 놈들은 1933~1934년에는 련일 대병력을 동원하여 유격근거지에 대한 발악적인 《토벌》을 감행하여왔다. 이러한 결과에 우리는 근거지의 일부 구역을 내여놓게 되였다.
그러나 적들의 어떠한 발악도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우리 항일유격대를 굴복시킬수는 없었다. 우리의 무장대오는 가렬한 전투과정을 통하여 초기보다 비할바없이 강대해졌다.
이러한 형편에서 유격대앞에는 협소한 지역에 머물러있으면서 공격해오는 적을 격파하는 방어만 진행할것이 아니라 종전보다 활동범위를 넓혀서 기동적으로 적극적인 유격투쟁을 전개할 과업이 나섰다.
이를 위하여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1934년 봄 동북방향으로는 라자구지방에, 서남방향으로는 안도현방면에 진출할 계획을 세우시였다. 이때 왕청, 연길, 화룡 등 여러 현에서 활동하던 유격대에서 선발된 동무들로 편성된 조선인민혁명군 독립련대는 안도현지방에 진출하여 유격근거지를 창설할 임무를 맡았었다.
우리는 연길현 삼도만지구에 집결하였다. 거기서 새군복과 무장을 갖추고 출발할 날을 기다렸다. 그러던중 5월하순 어느날 드디여 행군명령이 내렸다. 우리는 붉은 기발을 휘날리며 유격대행진곡 나팔소리에 맞추어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지나가는 두메의 밭에서는 농민들이 일손을 멈추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누데기옷을 걸친 그들은 축력이 없어 소처럼 멍에를 메고 밭을 갈고있었다. 이런 참담한 광경을 볼 때마다 우리들의 가슴은 원쑤에 대한 격분으로 떨렸다. 농민들은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서 손을 흔들었다. 도목구, 신선동을 지나서는 밀림이 우거진 안도땅이였다. 깊은 산간에도 간혹 가다가 마을이 있었다.
우리는 이 산간부락에 들렸을 때에도 언제나 그러했던바와 같이 군중규률을 철저히 지키면서 인민들을 적극 도와주고 그들에게 승리의 신심을 북돋아주는 선전사업을 진행하였다.
우리가 안도현 처창즈에 도착하니 거기에는 이미 왕청현과 화룡현유격대에서 선발된 대원들이 와있었다. 각 현유격대는 여기서 손을 마주잡았다. 우리가 주둔한 지대에서 멀지 않은곳에 있는 대전자에는 위만군들이 둥지를 틀고있었다. 이 지방에 근거지를 만들려면 바로 대전자에 있는 적들을 소멸해야 하였다.
그런데 당시 처창즈근방에는 약 2천여명의 구국군부대들이 있었다. 이들은 말로는 일제침략군과 위만군을 반대하여싸운다고 했으나 정치적각성이 미약하고 실지 적과 잘 싸우지도 못했다.
조선인민혁명군 지휘부에서는 이 구국군부대들에 정치공작원을 보내여 그들로 하여금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에서 우리와 함께 싸우도록 설복하였다.
이러한 결과 그들을 우리 편에 인입할수 있었다.
이것은 항일무장투쟁에서 유격대의 주위에 광범한 반일무장력량을 결속시키며 구국군부대를 적극 인입할데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에 근거하여 취하여진 조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구국군부대와의 련합작전수행에서 몸소 훌륭한 모범을 보여주시였는바 그것이 바로 1933년 가을에 진행된 동녕현성전투였다.
그이께서는 친히 대원들을 인솔하고 구국군부대에 찾아가시여 그들을 반일전선에로 인입하여 련합작전을 훌륭히 실현하시였다. 동녕현성전투에서 유격대는 큰 전과를 거두었으며 구국군부대들에게 정치, 군사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영향에 의하여 우리 독립련대도 구국군인입공작에서 성과를 거둘수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 부대는 대전자에 있는 적들을 공격함에 있어서 구국군부대와 련합작전을 하게 되였다.
안도현 북부 산지대의 중심지인 대전자에 당시 8백여호의 중국인 주민들이 거주하고있었는데 안도현성에 본거를 둔 위만군 600여명이 이곳을 강점하고있었다. 대전자는 고동하를 중심으로 동서로 갈라져있었다. 거리의 중심은 서쪽이였고 거기에는 적들의 병영과 포대가 있었다.
아군지휘부에서는 수리날전으로 대전자를 해방하고 그곳에 주둔할 계획이였다. 이 전투에는 조선인민혁명군 150여명과 구국군 800여명이 동원되였다.
우리는 대전자의 북쪽 약 30리지점에 있는 이합호에서 출발하여 대전자에 접근했다.
1934년 6월초순 어느날 밤 2시경 아군은 드디여 적들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산굽이를 돌아 동쪽시내에 돌입한 아군은 불의에 적들에게 맹렬한 사격을 하였다.
원쑤들의 탄압하에 신음하던 암흑의 거리는 깊은 잠에서 깼다. 총성은 거리를 뒤흔들었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적들은 당황하여 어쩔바를 몰라하였다. 적들은 10여명의 사상자를 내자 동쪽시내를 버리고 서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서쪽시내에로 도주한 적들은 성벽과 포대에 의거하여 완강한 저항을 시도했다. 적아간에는 치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는사이에 날이 훤히 밝았다.
우리가 점령한 동쪽시내에는 의지하여 싸울만한 진지가 없을뿐만아니라 전투가 낮까지 계속되면 주민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줄수 있었다.
이러한 정황을 고려하여 아군지휘부에서는 동쪽시내에서 일단 부대를 철수하였다.
첫날 전투에서 화룡현유격대의 녀대원 장정숙동무가 전사했다. 장정숙동무는 나어린 처녀대원이였다.
그는 돌격명령이 내리자 다른 대원들과 함께 대렬의 앞장에서 적들에게 육박하면서 명중사격을 가하였다. 그러던중 그는 적탄에 맞았다. 순간 몸을 휘청거리며 앞으로 쓰러진 그는 온몸의 힘을 모으며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일어나 원쑤들을 향해 계속 사격했다.
적을 소탕한 그는 심한 출혈로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동지들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는 마지막순간 이렇게 말했다. 《동무들과 같이 혁명대렬에서 끝까지 싸우지 못하는것이 분합니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혁명이 승리하여 동무들이 광복된 조국땅으로 돌아가리라는것을 굳게 믿습니다. 모두 잘 싸워주세요.》 그리고 그는 《조선독립 만세!》, 《조선혁명 만세!》를 부르며 숨을 거두었다. 전우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고 원쑤에 대한 불타는 증오로 백배천배 복수할 굳은 결의를 다지였다.
다음날 밤 아군부대는 다시 행동을 개시하였다. 우리는 동북쪽으로부터 적의 본거지인 서쪽시내에 강력한 타격을 주어 그를 점령한 다음 동쪽시내까지 장악할 계획이였다. 인민혁명군부대는 서쪽시내의 동쪽병영과 포대를 점령하고 구국군은 서쪽병영과 포대를 점령할 임무를 맡았다.
아군은 대전자시내 동북쪽 약 3km지점에서 은밀히 강을 건너 서쪽시내 가까이에 있는 고려성에 도착했다. 고려성에서 대전자시내에 접근한 우리 인민혁명군부대는 성밑으로 하여 동쪽에 있는 적병영가까이에 갔다. 부대의 돌격에 앞서 작탄수들이 먼저 적병영에 작탄을 던졌다. 요란한 폭음과 함께 적병영 한모퉁이가 공중에 날아올랐다.
전체 대원들이 적들을 향하여 맹렬한 집중사격을 가했다. 뒤이어 돌격나팔소리와 함께 함성을 올리며 적진에 돌입하였다. 당황한 적들은 지하포대에 들어가 대항했다. 그러나 놈들은 아군의 위력앞에 견딜수 없음을 타산하고 지하포대에서 빠져나와 동쪽시내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미처 도망치지 못한 놈들은 두손을 들고 부들부들 떨었다.
이렇게 하여 인민혁명군부대는 동쪽병영과 포대를 완전히 점령했다. 일부 병력은 강을 넘어가는 적을 추격하였다. 적들은 물에 들어가 허우적거리며 연거퍼 쓰러졌다. 강물로는 원쑤들의 시체가 너저분히 떠내려갔다. 이때에 구국군들은 아직 서쪽병영을 점령하지 못하고있었으므로 인민혁명군의 일부는 그들을 지원했다.
인민혁명군의 지원에 구국군부대는 새힘을 얻었다. 그리하여 아군부대는 서쪽시내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이윽고 날이 밝았다. 원쑤들의 병영에서는 그때까지 연기가 무럭무럭 오르고있었다. 이날 전투에서 적들은 80여명이 살상되였다. 그런데 패주한 적들이 몰켜든 동쪽시내에서는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으며 총소리가 간단없이 났다.
동쪽시내를 빨리 해방시켜야만 하였다. 아군은 대렬을 정돈한후 돌격대를 조직하여 밤 10시에 동쪽시내를 점령하였다. 이리하여 대전자는 완전히 해방되였다.
우리 정치공작원들은 대전자시내 인민들에게 조중인민의 공동의 원쑤는 일본놈들이라는것과 조선인민과 중국인민이 이와 같이 가난하고 무권리한것도 일본놈들때문이요, 우리를 리간시키려는것도 그놈들이라는것을 해설하면서 일제를 반대하는 공동투쟁에 궐기할것을 호소했다.
자유를 찾은 거리는 활기를 띠였고 사람들의 얼굴마다에는 기쁨이 넘쳐흘렀다. 인민들은 모든 성의를 다하여 우리를 원조했다.
대전자의 방어를 위하여 아군은 대전자남쪽 대사하방향에 독립련대 2중대와 구국군부대 100여명을 배치했다. 주력부대는 대전자를 해방한후 안도, 돈화현간의 적의 요새지인 다푸챠허로 진공했다. 대전자에는 많지 않은 대원들과 부상병들만이 남아있었다.
대전자가 아군에게 점령된후 약 한달이 지나서 적들은 이곳을 탈환하려고 대사하방향으로부터 대병력으로 공격하여왔다.
놈들은 박격포의 엄호하에 발악적인 공격을 했다. 적아간의 력량은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정황은 우리에게 불리하게 되였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도 당황함이 없이 완강한 방어로 적들을 쓸어눕혔다. 대전자를 사수할것을 결의한 유격대원들의 용감한 투쟁은 퇴각하자고 하던 구국군들을 고무했다. 이미 동쪽시내를 점령한 적들은 아군진지에 맹렬한 포사격을 하여왔다. 우리는 감시병만 남기고 지하포대에 들어가 은페하였다가는 포사격이 뜸해지면 다시 밖에 나와 싸웠다.
이렇게 몇번 거듭하였는지 몰랐다. 전투는 하루종일 계속되였다. 어느덧 밤이 되였으나 싸움은 그치지 않았다.
적들은 수적우세를 믿고 아군의 병영쪽으로 몰려왔다. 긴박한 순간이였다. 이때에 한 유격대원이 적들이 몰려오는쪽을 향하여 《제4중대는 가운데로! 제5중대는 좌로! 제6중대는 우로!…》하면서 놈들을 기만하여 크게 구령을 쳤다.
이와 동시에 전체 동무들이 적들의 무리복판에 일제사격을 가했다. 적들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렇게 되자 적들은 할수없이 퇴각하고말았다.
이틀, 사흘, 나흘… 간고한 전투의 나날은 계속되였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까지 싸울 굳은 결의를 다진 우리는 조금도 굴함없이 계속 싸웠다. 적탄은 비발치듯 쏟아졌다. 그속에서도 인민들은 식사를 날라주며 전호를 굴설하는 등 일심단결하여 우리를 도왔다. 우세한 적들의 집요한 공격으로 인하여 우리는 고려성방향에 진지를 이동하였다.
적아간에 판가리싸움이 벌어진지 벌써 13일이나 되였다. 전투는 날이 갈수록 더욱 가렬해졌다. 이때 우리가 보낸 통신을 받고 다푸챠허쪽에 진군하였던 아군의 일부 부대가 증원하여왔다. 지원부대의 우렁찬 나팔소리가 적진에까지 울려퍼지였다. 우리는 아군력량의 증강을 시위했다.
전투가 벌어진지 16일만이였다. 우리는 또 돌격대를 조직하여 동쪽시내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련이어 그 남쪽고지의 적진지를 후면으로부터 돌격했다. 질풍같이 돌진하는 돌격대의 위력에 질겁한 적들은 여기저기다 저주로운 시체를 버리고 무질서하게 도주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놈들을 계속 추격하며 쓸어눕혔다. 이 마지막날 전투에서만도 적들은 100여명의 손실을 보았다.
이리하여 전투는 우리의 승리로 끝났다. 대전자의 거리에는 다시 새 생활이 시작되였다. 이곳 인민들은 우리에 대하여 경탄하면서 《뾰족모자가 제일이다.》라고 하였다. 당시 조선인민혁명군은 쏘련국경경비대가 쓰던 모자와 같은 모자를 통일적으로 만들어썼는데 그 모양을 보고 뾰족모자라고 하였다. 그들의 이 순박한 말속에는 유격대에 대한 깊은 신뢰와 지지의 정이 스며있었다.
그들은 성의를 다해 전투승리를 축하했다. 이 전투후 우리는 그해 9월까지 대전자에 주둔하였다.
대전자전투의 승리는 안도지방으로 유격근거지를 확대함에 있어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였으며 조중인민들간의 전투적우의와 친선단결을 강화하며 이 지방 구국군부대와의 공동투쟁을 더욱 강화할수 있게 하였다.
안도현지방에 진출한 조선인민혁명군은 대전자, 대사하북방 다푸챠허를 련결하는 광활한 지대를 장악하였다.
이리하여 처창즈를 중심으로 한 안도북부지대에 유격근거지가 창설되였다.
18. 인민의것이라면
손 종 준
1941년 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제시하신 방침에 따라 소부대활동을 벌리던 때의 일이다.
김일동지가 지휘하는 우리 소부대성원은 모두 12명이였는데 3월중순부터 약 50여일간을 얼마안되는 수수쌀로 생활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하루 한사람앞에 두숟가락의 수수쌀이 차례졌을뿐이였다.
일제군경놈들은 항일무장투쟁의 초시기부터 감옥이나 다름없는 집단부락을 만들고 주변에 산재한 부락의 농민들을 여기에 몰아넣음으로써 우리 유격대와 인민들과의 련계를 끊어버리려 하였다.
일제강점의 말기에 이르러서 일제의 이러한 책동은 더욱더 악랄성을 띠게 되였다. 사정이 이렇게 되고보니 우리는 식량을 얻기가 매우 곤난하였다.
당시 우리 소부대의 기본임무는 적의 통치구역안에서 지하공작을 수행하는것이였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식량을 해결하기 위하여 내놓고 적들을 습격할수도 없는 일이였다. 그리고 우리는 일정한 기간 이 지역을 근거지로하여 공작하여야 했다.
우리들이 아껴먹던 수수쌀마저 다 떨어져버렸다. 어느날 몇명의 대원들은 김일동지의 지시에 의하여 식량을 마련하기 위하여 근거지를 떠났다. 그날은 음력 5월 4일 아침이였다. 좁은 골짜기를 밑에 두고 산릉선을 타고내려가던 우리는 골짜기에서 가늘게 피여오르는 연기를 발견하였다. 우리는 나무가지들을 헤치며 연기나는쪽을 내려다보았다. 골짜기에는 7채의 집이 산재해있었다. 웃골짜기에 4채, 아래골짜기에 3채가 들어앉은 이 집들은 전부터 비여있는 집들이였는데 산아래턱에 바싹 붙어있는 한채의 집에서만은 연기가 피여오르고있었다.
우리들은 서로 바라보며 이런 말을 했다.
《저 집에는 사람이 살고있으니 저 집사람들을 통해서 식량을 얻을수 있을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될수록 주간행동을 피하던 때였으므로 밤이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해가 떨어지자 우리는 산을 내려 연기가 피여오르던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웬일일가? 이 집 역시 텅 비여있었다.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건 물론이고 방에는 아무런 가장집물도 없었고 부엌에 역시 그릇하나 없었다. 마당도 반반하였다. 역시 오래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빈 집이였다. 그러나 부엌아궁이에는 불을 땐 흔적이 남아있었다. 아무래도 집주인이 가까이 있을것만 같았다. 이 집주인은 자기 집이 그리워 집단부락에서 빠져나왔을는지 모른다.
우리는 이 집주변에 여기저기 흩어져앉았다. 그동안 풀잎따위로 요기를 해온 때여서 우리는 몹시 시장기를 느꼈다. 우리는 집주인을 좀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나는 주변을 더 살펴볼 생각으로 골짜기내가로 나갔다. 내가를 오르내리며 인적을 살피던 나는 주춤서서 개울건너편에 눈초리를 돌렸다. 그곳에는 아름드리나무 한그루가 서있었는데 밑둥에서 한길쯤 올라가서는 세갈래로 가지를 뻗고있었다. 초생달빛은 그 갈라진 세 가지짬을 어렴풋이 비쳐주고있었다. 바로 거기에 둥그런 무엇이 얹혀있었다.
나는 곧 개울을 건너가서 나무우를 쳐다보았다. 세가닥 나무가지짬에 얹힌것은 석유통이였다. 석유통우에는 삿갓이 덮여있었다. 나는 나무앞으로 다가서서 삿갓을 들고 통속을 들여다보았다. 그속에는 흰쌀이 가득 들어있었다. 나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나는 곧 김일동지에게로 달려가서 사실을 보고한후 두 동무를 데리고가서 그 쌀통을 날라왔다.
우리는 무척 배가 고팠다. 그렇지만 주인을 만나지 못한 때이므로 그 쌀에 손을 대지 않았다.
우리는 골짜기와 산등성이로 다니며 주인의 자취를 찾았다. 그러나 허사였다.
끝끝내 주인을 찾을수 없게 된 우리는 심중하게 토의를 했다. 주인을 찾아낼수 없는 쌀을 그냥 처분할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더 기다릴것인가를 론의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공작을 위해서 우선 그 쌀로 밥을 지어먹기로 했다. 이날저녁에 우리는 오래간만에 흰쌀밥을 먹었다. 그리고 근거지에 남은 동무들에게도 쌀을 보내였다.
그 이튿날 대원들이 공작을 나간뒤 우리 몇몇은 이곳에 남아서 주민들을 만나려고 애를 썼다. 그들을 찾아서 여기저기로 돌아다니였으나 종시 련계를 가질수 없었고 뜻하지 않게 감자움 하나를 발견하였다. 상당히 큰 감자움이였다. 우리는 이 감자움에서 많은 감자를 파내여 근거지로 운반하였는데 그것은 우리 소부대의 식량해결에 큰 도움을 주었다.
우리 소부대는 이미 3개월나마 곰의골근거지에 묵고있는터이였다. 얼마후 이곳에서 우리들의 공작임무는 끝났다. 우리가 이곳을 떠나야 할 때가 되였다.
그런데 이때 우리에게는 인민들의 쌀과 감자값을 어떻게 갚겠는가 하는것이 문제로 되였다.
여러가지로 토의하던 끝에 김일동지가 이렇게 말하였다.
《어느때고 주인들은 집으로 올것이요. 그러니까 부락골짜기에 내려가있다가 그들을 만나게 되면 전후사정을 말하고 쌀과 감자값을 갚는것이 좋겠소.》
그래서 나와 몇동무들이 골짜기로 내려갔다. 꼬박 나흘을 기다렸으나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김일동지에게로 가서 쌀과 감자값을 그것들이 있던 그 장소에 넣어두고 떠나가자는 의견을 제기했다.
김일동지는 이렇게 말하였다.
《며칠만 더 기다려봅시다. 내 생각에는 이 골짜기주민들이 집단부락에 강제로 끌려간것이 틀림없소. 그러니까 이곳 주민들은 자기들이 살던 이 골짜기를 그리워할것이요. 그들은 놈들의 눈을 피해서 이곳으로 찾아와서는 몰래 밭을 가꾸는것 같소. 수리날도 지났으니까 그들은 곧 올거요.》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자기 위치로 흩어져서 골짜기를 굽어보며 이제나저제나 하고 다시 사흘을 기다렸다. 그러나 주민들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김일동지에게로 가서 의견을 제기했다.
《이레를 기다려도 주민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쌀이나 감자가 있던곳에 그 값을 넣어두고 가는것이 어떻습니까? 돈만 있으면 그들은 어떻게서든지 쌀을 살수 있지 않겠습니까.》
김일동지는 한참동안 생각하다가 아쉬운 어조로 말하였다.
《그렇게 합시다.》
우리는 쌀값과 감자값을 석유통과 감자움에 잘 넣어두고 골짜기를 떠났다.
김일동지는 그곳을 떠나면서 직접 주민들을 만나지 못한것을 그후에도 두고두고 말하였다.
이렇듯 어떠한 간고한 환경에서도 우리는 인민의 생명재산을 귀중히 여겨야 한다고 하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가르치심대로 행동하였다.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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