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주체사상과의 대화
제 1장 주체사상의 창시와 전일적 체계를 갖춘 학설로의 심화발전
제2장 김일성주의의 견인력의 원천
나: 현시기 우주공간을 메우고 있는 인간의 메아리, 그것은 자주성의 외침이며 자주의 궤도를 따라 인류를 이끌어 나가는 자주사상, 김일성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이남의 일부 ML 론자들은 이것을 거부하고 있으며 최근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와 함께 그러한 거부의 주장을 더 강하게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김일성주의, 주체사상이 시대적 사조로 진보적 인류의 커다란 공감을 일으키고 있는 견인력의 원천에 대하여 집약적으로 논의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 김일성주의의 견인력을 부정하는 일부 ML론자들을 비판하면서 이남의 한 식자는 그들이 "...주체사상이 왜 물질적 힘을 획득했는지도 모른채... 단지 우연적으로 힘을 발휘한 것으로, 따라서 곧 사라질 힘 정도로서의 '물질적 힘'으로 인정하였다."(1)고 말하였습니다.
지난 시기 시대적 사조로서 100 여년간이나 노동계급과 근로민중의 변혁운동에서 향도이념으로 되었던 맑스-레닌주의도 국제적 연구조직이나 대륙별 연구조직을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맑스-레닌주의는 나라별로 되는 연구조직이나 연구소조와 같은 조직들로서 연구보급되고 확산되었을 뿐입니다.
김일성주의가 오늘 전례없는 규모와 속도로 급속히 보급확산되고 있는 것은 그 견인력에 바탕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상활동을 열심히 전개하고 있는 김정일총비서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셨습니다.
"주체사상은 세계인민들 속에서 커다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자주성을 지향하는 우리 시대의 역사적 운동을 힘있게 추동하고 있습니다."(2)
주체사상의 견인력은 바로 그 진수를 이루는 근본원리의 독창성과 우월성, 그 내용과 구성체계의 완벽성과 전일성, 사회변혁의 생활력있는 지침으로서의 그것의 혁명성과 현실성에 원천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민중이 신념으로 받아들인 시대의 지도이념을 허물 수 있는 힘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역사는 시대의 지도사상의 견인력을 막아보려고 책동하는 자들을 언제나 반역사적, 반민중적, 반혁명적 범죄자로 낙인하고 역사밖으로 몰아냈으며 오늘도 또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제 1절 사상의 진수를 이루는 근본원리의 독창성과 우월성
(1) 사람위주의 철학적 원리의 독창성
나: 김일성주의의 독창성과 우월성은 무엇보다도 그 진수를 이루는 주체사상의 독창성에 있으며 김일성주의는 인간위주의 철학적 원리에 기초하여 전개되고 체계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남의 일부 식자들과 ML 론자들은 사람 위주의 철학적 원리의 독창성을 옳게 보지 못하고 그릇되게 해석하고 부정하는 경향이 적지 않습니다. 그중에서 우선 일부 식자들이 사람위주의 철학적 원리는 평범한 진리이기 때문에 철학적 원리로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주: 사람들은 흔히 "진리는 간단하며 명백하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며 자신의 힘으로 자기운명을 개척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명백한 진리라 할 것입니다. 현대인치고 이 진리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진리라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세계관적 신념, 생활의 신조로 삼느냐 하는 데서는 문제성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체험하고 느끼는 "평범한 진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계관적 신념, 생활의 신조로 되는 진리는 그 어떤 "특수하고" "고급하며" "난해한" 것으로서 평범하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평범한 진리"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진리가 인간의 운명개척의 길을 명시하는 세계관적 원리임을 인식하고 자각할 때 그것을 신념, 신조로 삼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로 되지 않습니다. 세계관적 원리, 철학적 진리는 결코 인간의 생활밖에서 그 어떤 “절대적 진리"가 주입되어 정립되는 것이 아니며 철학자들이나 이해할 수 있는 난해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운명의 주인"이라는 진리가 가장 평범한 진리이고 지극히 간단하고 명백한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세계관적 원리, 운명개척의 길을 명시해주는 사상이론으로 정립되기까지는 2천여년의 철학사적 흐름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민중을 착취와 억압의 대상으로 삼고 민중의 몽매화에 이해관계를 가지는 착취계급의 계급적 이해관계와 그것을 옹호하는 착취제도, 종교신비주의, 관념론이 지배했던 사회역사적 조건, 그리고 민중의 요구와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참된 민중의 수령이 부재했던 조건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인간의 운명문제에 해답을 주는 위대한 진리를 모색하여 2천여년을 모대겨온 인류가 그것이 어떤 '천상의 세계’나 그 어떤 신비로운 힘이나 객관적 물질적 여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충격이 과연 어떠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이 가슴에 온 우주를 받아안은 것 같은 충격"이라 했고 어떤 사람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 같은 감격"이라 했고 또 어떤 철인은 "지구를 떠올릴 지렛대와 지지점을 발견한 충격"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주체사상의 진수가 바로 그 "평범한 진리," <인간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김일성주석께서는 다음과 같이 밝혀주시었습니다.
"주체사상은 결국 사람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라는 진리를 밝혀줍니다. 사람은 자기 운명의 주인이라는 것, 이것이 주체사상의 진수이며 여기에 주체사상의 혁명적 본질이 있습니다."(3)
한마디로 말하여, 주체사상의 진수는 인간의 운명의 주인은 인간자신이며 인간의 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인간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운명문제에 과학적인 해답을 준 주체사상의 진리입니다.
인간은 일정한 자연환경과 사회적 여건 속에서 살면서 자기 운명을 개척해 나갑니다. 인간의 운명개척 과정이란 결국 자기에게 유리하게 자연환경을 개조하고 사회적 여건을 변혁해 나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어떤 사회적 처지에 놓이게 되며 어떤 생활을 누리게 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이 얼마나 높으며 자연과 사회를 얼마나 자기에게 효율적으로 봉사하도록 개조변혁하느냐에 의하여 좌우됩니다.
나: 그런데 이남의 일부 식자들과 ML 론자들은 인간이 자연과 사회의 주인이라는 것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서울사범대학의 한 교수는 "인간이 과연 주인으로서 자연과 역사를 개조하고 복무하게 할 수 있느냐는 문제점이 제기된다. 자연에서 생성발전된 인간이 과연 얼마만큼 자연을 의식적으로 개조하고 봉사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는가 하는 점은 자연의 위대함과 인류의 자연에의 적응의 필요성을 생각할 때 명료해진다."(4)고 말하면서 그것은 단지 상징적인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주: 여기서 잠깐 "주인"이라는 말의 뜻을 음미해 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주인이라는 말을 여러가지로 씁니다. 소유관계, 즉 어떤 물건의 임자라는 뜻으로도 사용하며 신분관계, 즉 노예와 농노의 상전을 가리키는 뜻으로도 사용하며 어떤 일을 주관하는 사람을 가리키거나 손님의 반대말로도 사용합니다.
그러나 주체사상에서 주인이라는 개념은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을 표현하는 철학적 개념입니다. 인간은 세계를 개조하는 주인의 지위에 있으므로 자기 운명에 대해서도 주인으로 되며 인간은 세계를 개조변혁하는 데서 결정적 역할을 하므로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데서도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인간은 자연의 주인입니다. 자연은 인간에게 있어서 노동의 대상이며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물질적 원천입니다. 물론 인간도 자연의 발전의 일정한 단계에서 발생한 물질적 존재이며 자연필연성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가장 발전된 물질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존재입니다. 생물체는 자연환경에 개체를 순응시키는 방법으로만 생명을 유지보존할 수 있지만 인간은 자연을 개조하여 생활수단과 생활여건을 마련하여야만 생존하고 발전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자연의 필연성을 인식할 수 있고 그것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간단히 말하여, 인간은 자연에 순응하여 자기 자체를 변형시키는 방법으로 생존하며 발전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을 개조하여 자기에게 효율적으로 봉사시킴으로써 생존하며 발전하는 존재입니다. 여기에 자연의 주인이라는 말의 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식자들과 ML 론자들은 자연과 인간과의 상호관계의 근본특성을 외면 내지 회피하고 그것을 자연에 대한 지배정도에 관한 논의로 바꿔놓거나 혼동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자연환경에 순응해서 사는 존재냐 아니면 자연을 개조이용함으로써만 살 수 있는 존재냐 하는 것에 대한 철학적 해답을 외면 내지 회피하고 인간이 자연을 어느 만큼 지배하고 있는 존재냐, 일정단계에서 인간이 자연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로 전의시켜 혼동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자연의 지배의 폭과 심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본성상 자연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개조이용하면서 사는 존재냐 아니면 자연에 종속되어 순응하면서 사는 존재냐 하는 문제에 대한 철학적 해답입니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영역의 한계에 대해서 말한다면 역사발전의 일정한 단계에서 인간의 인식능력과 실천능력이 한계성을 띠는 것 만큼 한계적입니다. 그러나 인류역사의 영원한 발전 속에서 인간의 인식능력과 실천능력은 무한히 신장되며 인간은 끝없는 자기 발전과정에 무한대한 객관세계에 대한 지배영역과 심도를 한없이 확대해 나가면서 명실상부한 자연의 참다운 주인으로 군림해갑니다.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라는 원리는 역사발전의 어느 단계에서나 관계없이 인간은 자연을 개조하여 자기에게 복종시키면서 살아나가는 존재라는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은 또한 사회의 주인입니다. 인간은 사회를 떠나서는 살 수도 없고 발전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연의 운동과는 달리 사회역사적 운동은 인간의 운동, 즉 주체의 운동입니다. 사회관계가 인간의 생존과 발전을 위한 객관적 환경, 여건을 이룬다면 인간은 사회관계의 형성과 변혁의 담당자입니다. 이것은 사회관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사회관계를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인간이 사회의 주인이라는 것과 현실적으로 사회의 주인으로서의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구별되는 문제라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자가 인간과 사회와의 관계에서 인간의 지위에 관한 문제라면 후자는 사회체제의 성격에 관한 문제입니다.
인간은 자연의 주인, 사회의 주인이므로 마땅히 자기운명의 주인으로 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운명의 주인이라는 명제가 개체적 인간이 자기 운명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뜻(5)으로 해석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인류발전사와 주체사상에 대한 무지의 산물이라 하겠습니다.
역사발전의 일정단계에서 인간은 물론 주어진 자연환경과 역사적 여건에서 출생하여 그 영향밑에서 성장하며 발전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회적 존재인 인간(인간집단)은 결코 주어진 환경에 맹목적으로 순응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자기에게 보다 더 유리하게 그것을 하나하나 개선하면서 살아간다는 점입니다. 즉 역사발전의 일정한 단계의 인간은 자기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의 내용과 발전수준에 상응하게 사회적 처지와 생활여건을 개선해 나가면서 삽니다.
이세상 어디에도 인간의 운명을 책임지며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그 어떤 초자연적 존재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사회에는 민족, 민중의 운명을 손아귀에 들어쥐고 좌지우지하려는 '세력’이 있다는 것이 쉽게 발견됩니다. 그래서 인류는 그것을 역사의 법칙, 즉 정의와 진리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으로 확인하고 그것을 척결하고 순리에 맞게 정의와 진리대로 살 수 있는 정의사회를 실현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인간은 자기의 운명을 그 무엇에도 의탁하지 않으며 또 의탁할 데도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자신만이 자기운명을 책임질 수 있고 자기 손으로만 자기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습니다. 운명의 주인은 인간자신이라는 위대한 진리가 명시되었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우리들이 이 진리를 어떻게 대하며 운명문제에 대하는 입장과 자세가 어떤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이남의 민중에게는 민족의 자주권, 민중의 인권과 생존권을 유린하는 사회적 현실에 순종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단호한 항거, 변혁운동을 벌려 민족의 자주권을 되찾고 인권과 생존권이 최대로 존중시되고 전면적으로 보장되는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투쟁에 기꺼이 한몸바쳐 나설 것인가, 이렇게 문제가 제기될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인간의 운명문제에 해답을 주는 철학적 원리의 현실적 의의를 깊이 느끼게 된다고 봅니다.
나: 그런데 이남의 일부 식자들과 ML 론자들 속에서는 주체사상의 인간위주의 철학적 원리를 마치도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세계가 이루어지고 인간에 의하여 세계의 모든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해석하면서 그것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주: 그것은 주체사상을 잘 모르는 데서 나온 잘못된 해석입니다.
김정일총비서께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시었습니다.
"물질세계가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졌다거나 세계의 모든 변화발전이 사람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주체철학을 잘 모르는 데로부터 나온 것입니다."(6)
사람이 세계의 주인이라는 것은 세계가 사람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명시한 것이지 물질세계 자체가 사람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에는 그 어떤 시공간적 중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세계가 의식이나 관념이 아니라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물질에 의하여 통일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해명된 것이며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주체사상은 바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세계에서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 즉 물질세계가 누구에 의하여 지배되느냐 하는 새로운 문제에 해답을 준 것입니다. 또한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은 사람이 세계의 개조자이며 사람에 의하여 세계가 개조된다는 것이지 세계의 모든 변화가 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세계가 자체의 법칙에 의하여 변화발전한다는 것은 이미 해명된 것이며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주체사상은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인간이 물질세계의 운동법칙을 인식하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이용하여 물질세계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개조하여 봉사시켜나간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인간위주의 철학적 원리는 물질세계의 지배자, 개조자가 누구냐 하는 문제에 철학적 해답을 준 것이지 물질세계의 중심이 무엇이며 물질세계의 모든 변화발전이 다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규정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이해는 인간위주의 철학적 원리에 대한 심히 그릇된 해석입니다.
나: 이남의 일부 식자들과 ML 론자들은 주체사상을 "인간학주의,”(7) "유인론," "유아론”(8)이라고 하면서 관념론과 동열에서 해석하려고 합니다.
주: 그것은 주체사상에 대한 심히 왜곡된 해석입니다. 김정일총비서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습니다.
"주체사상은 사람중심의 새로운 철학사상입니다."(9)
주체사상이 사람위주의 철학사상이라는 것은 사람을 위주로 하여 세계에 대한 견해를 세우고 사람을 중심으로 세계에 대하는 관점과 입장을 밝힌 사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위주의 철학과 인간철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상호 아무런 인연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대립됩니다. 인간학주의는 인간을 구체적 사회역사적 존재가 아니라 추상적인 또는 생물학적인 존재로만 고찰하는 철학적 견해입니다. 그것은 포이엘바하에 의해 제창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을 창조하고 지배한다고 믿는 그 어떤 초자연적인 힘, 신의 존재를 설교하는 신학과 그것을 철학적으로 분석한 헤겔의 객관적 관념론철학을 반대하면서 자연과 인간만이 철학의 진정한 대상으로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로부터 포이엘바하는 자기의 철학을 인간의 본질을 해명하는 인간학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관념론과 종교적 견해를 비판하고 인간학을 제창하였지만 단순히 인간을 "인간일반”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으로, 생물학적인 것으로만 보면서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그는 인간사회의 본질과 착취사회의 계급적 모순, 계급투쟁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회적 진보의 원인을 종교의 변화에서 찾았으며 사회구성원들이 신이 없는 ‘사랑의 종교'에 기초하여 서로 연결될 때 사회적 진보가 이루어지고 사회악이 근절된다고 믿었습니다. 여기에 인간학주의의 비과학적이고 관념론적인 한계성이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인간학주의는 현대 부르조아철학에서 관념론적 인간철학으로 부활되었습니다. 현대 부르조아철학에서 관념론적 인간철학이 대량적으로 조작 유포된 것은 과학적 세계관을 반대하는 반동적 착취계급의 이해관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부르조아 관념론철학은 유물론을 반대하면서 사회역사 영역에 기생하여 관념론을 설교하였습니다. 맑스전 유물론철학은 자연현상을 유물론적으로 설명하면서도 사회역사 영역에서는 여전히 관념론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맑스주의 유물사관이 확립됨으로써 사회역사 영역에서 관념론이 더는 기생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현대 부르조아 관념론은 맑스주의에서 인간의 운명개척문제, 인간의 본성문제가 전면적으로 해명되지 못하고 인생관문제가 도외시 되었다고 판단하고 바로 인간문제에 매달려 맑스주의를 공격해 나섰습니다.
현대 부르조아철학의 실존주의, 실용주의, 사회심리학주의 등 주관관념론 철학은 바로 인간의 본성에 대한 관념론적 해석에 기초하여 인생론을 전개한 인간철학입니다. 김정일총비서께서는 다음과 같이 해명해주시었습니다.
"인간철학은 세계관을 주는 과학으로서의 철학의 본래의 사명을 부인하고 주로 인간이란 무엇이며 인생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를 논하는 하나의 인생철학입니다."(10)
인간철학은 사회적 존재인 인간을 사회적 관계와 단절시켜 순수 개체적 생물학적 존재로 고찰하면서 인간의 주관적 의식, 심리, 본능, 체험 등의 어느 하나를 인간의 본성으로 보면서 인간의 모든 활동이 주관적 의식, 심리, 본능 등에 의해 규정된다고 보는 주관관념론이며 순수 개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인생문제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체사상에서 인간문제는 순수 인간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에 관한 문제이며 인간위주의 철학적 원리는 단순히 인생관의 원리가 아니라 인간의 운명개척의 원리를 밝혀주는 세계관적 원리입니다.
인간위주의 주체철학을 인간철학과 같이 해석하는 것은 부르조아 인간철학의 본질, 사명과 주체철학의 본질, 사명의 근본적 차이를 모르거나 회피하는 그릇된 견해입니다. 인간위주의 주체철학적 원리, 즉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원리를 "유아론," "유인론”이라고 왜곡하는 것은 철학적 무지이거나 주체사상에 대한 의식적 왜곡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위주의 주체철학적 원리는 세계가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체의 발전법칙에 따라 운동발전한다는 유물변증법의 원리를 전제로 합니다. 관념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세계를 신비로운 존재로 본다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올 수 없으며 형이상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세계를 고정불변한 존재로 본다면 사람이 세계를 개조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위와 역할에 관한 문제는 세계의 시원문제가 해결된 전제위에서 제기되는 문제입니다. "유아론," "유인론"은 한마디로 말하여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주장하는 주관관념론입니다. 즉 세계의 실제적 존재는 '자아,’ ‘인간’ 뿐이며 다른 모든 것은 '자아’의 피조물, ‘인간’에 의해 파생되어 규정된다는 주관관념론입니다.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를 세계의 시원문제와 혼동시키거나 동일시하는 궤변에 기초하여 조작해 낸 것이 바로 주체사상이 ‘유아론,’ ‘유인론’이라는 주장입니다. 세계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을 밝힌 철학적 원리, 즉 인간은 세계에서 주인의 지위를 차지하고 세계의 개조변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원리, 따라서 인간운명의 주인은 인간자신이며 인간의 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인간자신에게 있다는 운명개척의 원리를 진수로 하고 그에 기초하여 전개되고 전일적으로 체계화된 사상이라는 바로 여기에 주체사상, 김일성주의의 독창성과 우월성이 있습니다.
(2) 사람위주의 철학적 원리와 사상사에서의 근본적 전환
나: 이남의 일부 식자들과 ML 론자들은 인간위주의 주체철학적 원리의 본질을 옳게 이해하지 못한 데로부터 주체사상의 창시가 인류사상사에서의 근본적 전환을 이룩한 위대한 혁명이라는 것을 부정하며 "맑스-레닌주의로부터의 일탈," “철학적 관념론으로의 후퇴"(11)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위주의 주체철학적 원리에 의한 사상사의 전환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요.
주: 인간위주의 철학적 원리를 "유물변증법에서의 일탈," "관념론에로의 후퇴"라는 논의의 부당성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지적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인간위주의 철학적 원리에 의한 사상사에서의 전환, 인간위주의 철학적 원리의 사상사적 의미에 대해서만 논의하겠습니다.
김정일총비서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습니다.
"주체사상이 사회적 인간에 대한 과학적 해명에 기초하여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철학적 원리를 천명한 것은 세계관에서 새로운 변혁을 가져오게 한 철학적 발견으로 됩니다."(12)
무엇보다 인간의 운명문제에 어떤 해답을 주었느냐 하는 시각에서 사상사를 분석해 보면 지난 시기의 모든 사상은 인간의 운명을 규정하는 요인을 인간밖에서 찾은 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객관적 관념론은 그 어떤 신비적인 정신적 실체인 '이데아’나 '절대이념'에 의하여, 주관적 관념론은 비실재적인 '초인’의 의지에 의하여, 선행 유물론은 인간밖의 ‘물질적 경제적 관계’에 의하여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보았습니다.
한편,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는 인간밖의 그 어떤 것에서 인간의 운명을 규정하는 요인을 찾던 사상사에 종지부를 찍고 인간의 운명을 규정하는 요인을 <인간자신>에게서 찾는 사상사의 새 기원을 열어놓았으며 사상사의 발전에서 근본적 전환을 이룩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상이론의 '틀’이라 할 수 있는 이론전개와 체계구성을 규정하는 철학적 원리의 시각에서 사상사를 분석해 보면 지난 시기의 모든 사상은 인간의 운명문제에 해답을 주는 원리가 아니라 세계의 <시원문제>에 이러저러한 해답을 주는 원리로부터 출발하여 전개되었습니다. 고대철학으로부터 맑스-레닌주의에 이르기까지 인류사상사는 세계의 시원문제를 밝히는 물질과 의식의 상호관계문제에 이러저러한 해답을 주는 원리로부터 출발하여 전개되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철학사상사에서도 인간의 운명문제를 논의하였지만 물질과 의식의 상호관계문제의 '틀’ 속에 종속시켜 인간의 운명문제를 해석하였습니다.
세계의 물질성의 해명은 인간의 운명문제를 해명하기 위한 하나의 전제에 불과합니다. 세계의 물질성과 함께 다른 모든 물질적 존재와 구별되는 사람의 <본질적 특성>이 해명되어야 비로소 세계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 인간의 운명개척의 근본원리를 해명할 수 있습니다. 세계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을 밝힌 사람위주의 철학적 원리는 세계의 물질성과 인간의 본질적 특성의 해명을 전제로 하며 그것을 자체 속에 포섭하고 있는 차원이 높은 원리이며 인간의 운명문제에 해답을 주어야 할 세계관의 본연의 사명에 맞는 과학적인 철학원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위주의 철학적 원리에 의하여 물질과 의식의 상호관계 문제에 해답을 주는 원리에 기초하여 전개되던 사상사에 종막이 내려지고 세계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지위와 역할에 해답을 주는 포괄적이고 차원이 높은 본연의 철학적 원리에 기초하여 전개되는 사상사의 새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사상사에서 근본적인 전환이 이룩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인간위주의 주체철학적 원리가 사상사에서 이룩한 전환의 성격적 시각에서 본다면 맑스-레닌주의의 창시가 인류사상사에서 이룩한 전환에 비할 바 없는 근본적 전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맑스주의의 창시는 사상사의 계급적 성격에서의 근본적 전환, 유물변증법에 기초한 과학적인 사상사의 시초를 열어놓은 사상사의 전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맑스주의의 창시에 의해 이룩된 사상사에서의 전환은 철학적 원리의 근본적인 개작, 철학 본연의 사명에 맞는 철학적 원리의 발견에 기초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맑스주의는 그 이전 유물론의 형이상학적 성격, 변증법의 신비주의적 성격을 초극하고 유물론과 변증법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켰으며 그것을 사회역사 연구에 적용하여 <유물사관>의 원리를 발견하였으며 경제연구에 적용하여 <잉여가치학설>을 발견하였습니다. 유물사관과 잉여가치학설은 역사발전의 객관적 합법칙성, 노동계급의 역사적 사명, 자본주의 멸망의 불가피성과 사회주의 승리의 필연성을 밝힌 맑스주의의 위대한 발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엥겔스는 맑스의 이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사상사에 기여한 맑스의 2대 발견이라고 하였으며 “한평생에 이러한 발견을 둘만 하면 충분한 것이다. 이러한 발견을 하나만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것이다 "(13)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맑스의 발견은 인간이 한생에 인류에게 기여할 수 있는 업적으로서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는 위대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실제적으로 수많은 사상가들과 과학자들이 인류에게 기여한다고 나름대로 노력하지만 이러한 발견 2개는 커녕 한개도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미 이룩한 발견조차 제대로 해석하고 올바르게 이용하지 못하여 인류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맑스의 공적은 인류의 영원할 미래시대에 이르기까지 기억되고 칭송되어야 할 위대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경제학과 역사학과 같은 개별과학에서의 발견이었으며 철학적 원리의 발견은 아니었습니다. 맑스주의의 창시에 의한 사상사에서의 전환은 어디까지나 물질과 의식의 상호 관계문제에 해답을 주는 원리에 기초한 사상사의 ‘틀’ 안에서 이룩된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닌주의는 맑스주의의 원리를 제국주의의 새로운 역사적 여건에 창조적으로 적용한 것이었습니다. 하기에 레닌주의를 정식화한 스탈린은 "나는 레닌이 맑스주의의 ‘옛' 원칙을 하나도 버리지 않은 것처럼 맑스주의에 그 어떤 ‘새 원칙’도 첨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14)고 하였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시기의 맑스주의라고 말하는 것이다."(15)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이것은 레닌주의도 맑스주의의 원리로부터 시발하여 전개된 것이며 철학적 원리의 새로운 발견에 기초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말하여 줍니다.
세계관의 본질과 사명에 맞는 본연의 철학적 원리인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의 발견은 과학의 한 분과에서의 발견이라 할 수 있는 유물사관의 원리나 잉여가치학설, 다윈의 진화론이나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원리에 비할 바 없습니다. 그것은 지난 시기 사상사와 과학문화사에서 이룩된 모든 발견을 합친 것보다도 더 위대한 근본적인 발견으로 됩니다. 말하자면 지난 시기의 모든 발견들을 시냇물과 같은 것이라면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의 발견은 대해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의 발견은 인류사상사와 노동계급의 혁명사상 발전에서 근본적인 전환, 위대한 혁명을 이룩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가 발견됨으로써 인류사상사는 물론이고 과학문화사에서 근본적 전환이 일어나고 인간의 자주성을 전면적으로 실현하여 주는 인류문명의 새로운 개화기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사상사에서 처음으로 인간의 운명개척의 길을 명시해주는 세계관의 본연의 철학적 원리를 발견하고 그에 기초하여 모든 이론을 전개하고 전일적으로 체계화하여 우리 시대의 지도사상, 지도이론, 지도방법을 정립한 바로 여기에 주체사상, 김일성주의의 독창성과 우월성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주
(1) “한국 사회변혁과 철학논쟁," 324 페이지
(2) 김정일, "주체사상에 대하여," 72 페이지
(3)"김일성 저작선집," 8 권, 473 페이지
(4) 대학신문, 1988 년 9월 5 일
(5) 위와 같은 신문
(6) 김정일, "주체철학의 이해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 4 페이지
(7) "한국 사회변혁과 철학논쟁." 15페이지 참조
(8) “주체철학 비판 1," 31 페이지 참조
(9) 김정일, "주체사상에 대하여, 9 페이지
(10) 김정일, "주체철학의 이해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에 대하,” 1 페이지
(11) "혁명의 철학," 6 페이지 참조
(12) 김정일, "주체사상에 대하여," 75 페이지
(13) “맑스.엥겔스 선집," 2권, 185 페이지
(14) "스탈린 선집," 2권, 361 페이지
(15) 위와 같은 책, 368 페이지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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