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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연재 『단군민족의 명인들』(마지막 회)

천강홍의장군 곽재우

프레스아리랑 | 기사입력 2023/03/06 [09:46]

도서연재 『단군민족의 명인들』(마지막 회)

천강홍의장군 곽재우

프레스아리랑 | 입력 : 2023/03/06 [09:46]

39)천강홍의장군 곽재우 

 

16세기말엽 일본침략자들에 의하여 강요된 7년간의 임진조국전쟁은 우리 인민에게 있어서 실로 그 류례를 찾아보기 힘든 어려운 싸움이였다. 봉건통치배들의 부패무능과 학정으로 하여 국력은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졌다.

비겁하고 무능한 통치배들은 전쟁이 터지자 남먼저 보따리를 싸들고 줄행랑을 놓았다.

이러한 때 나라와 겨레의 존엄과 운명을 지켜 항전에 일떠선것은 우리의 애국적인민들이였다.

그들의 투쟁열의에서 힘을 얻고 일부 애국적인 량반관료들도 정의의 창검을 들고나섰으니 그들가운데는 천강홍의장군(하늘이 내려보낸 붉은 옷 입은 장군이라는 뜻) 곽재우도 있었다.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터지자 령남지방에서 제일먼저 의병을 일으키고 왜적을 격멸소탕하여 전쟁의 승리에 이바지하였다.

곽재우(1552-1617년)는 의병을 일으킨 후 곧 돌격장으로 임명되고 1592년 10월에는 형조 정장, 1593년에는 성주목사, 경상우도 조방장으로, 1597년에는 경상좌도 방어사로서 적들의 침입을 물리치고 나라와 겨레의 안전을 지켜내는데 크게 기여한 애국명장이다.

전쟁에 이바지한 명장으로서 해전에서 리순신을 꼽는다면 륙전에서는 곽재우를 첫 손가락에 꼽고있다. 그는 뛰여난 지략과 용맹을 지니고 의병부대를 능숙하게 지휘통솔함으로써 여러차례의 싸움을 승리에로 이끌고 락동강 서쪽에로의 적들의 침입을 저지파탄시키는데서 큰 역할을 하였다.

1592년 4월중순 어느 날, 마을의 널직한 공지에 수십명의 군중이 모여있었다. 그들의 앞에 주먹을 불끈 쥐고 수레우에 우뚝 서서 열변을 토하는 사나이.

《지금 적들이 접근해오고있으니 이대로 내버려둔다면 우리의 부모처자들은 모두 적들의 먹이감으로 되여버리고 말것이다. 이 마을에는 젊은이가 수백명이나 있다. 만약 모두가 단합하여 남강의 솥나루에서 적을 막는다면 마을을 지켜낼수 있을것이다. 어째서 싸움도 해보지 않고 죽음을 기다릴수 있으랴!》

그의 말은 마디마디 모여선 군중의 흉벽을 세차게 두드렸다.

《왜적을 치고 나라를 구원하자!》

사람들은 주먹을 휘두르고 농쟁기를 번쩍 추켜들며 적극 호응해나섰다.

그 모습을 둘러보며 승리의 신심을 가다듬는 사나이, 그가 바로 의주목사, 황해도 감사 등을 지낸 곽월의 아들인 곽재우였다. 그의 자는 계수, 호는 망우당이라고 불렀다.

그는 젊어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기고 여러 병서들도 읽었다고 한다. 34살때 과거시험에서 떨어진 후 벼슬길을 단념하고 고향인 의령의 외진 마을에서 40이 넘도록 글을 읽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고향에 내려온 후 아무것도 하는 일없이 밀려다니며 술놀이만 하기때문에 그의 안해가 앞으로 전란이 있을것이니 지금부터 좋은 사람들과 사귀면서 무술도 익히여 싸움준비를 하게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부지깽이도 뛴다는 농번기라 농사일에 바쁜 나날을 보내던 곽재우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되였다. 1592년 4월 13일 일본침략군 수십만이 불시에 우리 나라에 쳐들어왔다는것이였다. 적들은 벌써 여러 성들을 함락시키고 의령을 가까이하고있다는것이다. 전투준비가 부족하였던 관군은 별로 저항도 못해보고 무너졌으며 지방관리들은 전선으로 나간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모두 도망쳐버리였다.

의령은 무방비상태로 되여버렸다.

곽재우는 참을수 없었다. 그는 곧 자기 집 종 10여명으로 의병대를 뭇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피난길에 오르려던 동리 장정들을 불러모으고 자기가 지은 격서를 랑독하여 그들의 심장에 의분의 불을 질렀던것이다.

60여명(70여명이라고도 한다.)이 곽재우를 따라나섰다. 그는 자기 집재산을 다 내여 무기와 군량을 조달하였고 그의 안해는 미리 준비하고있었던듯 곁에서 남편의 일을 적극 도와주었다.

곽재우는 크게 일판을 벌려보고싶었으나 병력이 너무도 부족하였다.

곽재우는 비슬산에 있는 농민군을 찾아갔다. 량반가문의 출신인 그에게 있어서 《초적》(통치배들이 농민군을 모독하여 부른 말)들과 손잡는것은 위험을 동반하는 일이 아닐수 없었다. 후에 그것때문에 초적의 한무리라는 혐의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곽재우는 부패무능한 통치배들이 아니라 천대받고 억압받던 그들의 심장에 애국의 더운 피가 흐르고있다고 믿고있었으며 꼭 손을 잡을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 길에 올랐던것이다.

애국의 심장은 언제나 하나의 숨결로 이어지기마련이다. 농민군은 곽재우의 합동제의에 선뜻 응하였다. 곽재우의병대의 빠른 기동과 견결성 등은 그 대오에 농민군이 참가하였다는 사실과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다.

곽재우는 초계고을의 빈 성안에 들어가 무기와 군량을 가져다 력량을 강화하였다.

곽재우는 의병투쟁에 나서며 붉은 철직(무관복)을 입고 검은 투구를 썼으며 허리에는 긴 칼을 찼다. 이렇게 차리고 나서니 평시에는 호인답던 그 모습이 가뭇없이 사라지고 사랑과 증오로 가슴불태우는 엄엄한 장군의 기상으로 부각되였다.

그가 의병을 일으킨 날은 1592년 4월 21일(20일, 24일 설도 있다.)로서 전쟁이 일어난지 아흐레만이였다. 관군이 계속 퇴각만 하고있을 때 처음으로 되는 그의 의병대의 궐기에 대한 소식은 삽시에 전국 방방곡곡에로 퍼져가 인민들을 원쑤격멸에로 추동하였다.

곽재우는 의병대를 거느리고 먼저 솥나루와 함안으로 첫 출격을 하여 왜병 50여명을 죽이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청장년들이 곽재우의 휘하로 모여들었다.

곽재우의병대는 락동강류역에 출몰하면서 부산포에서 한성으로 날라가는 적 군수물자수송선들을 습격하였다.

6월 어느 날, 왜군 6번대의 적장 안고꾸지 에께이가 거느린 2,000여명의 왜적들이 전라도로 침입하기 위하여 가던중 길목인 솥나루에 이르렀다. 적장놈은 우선 척후를 내보내여 지형을 정찰하고 기본대오가 건늘수 있게 말뚝을 박아 표식해놓게 하였다.

적들의 흉책을 간파한 곽재우는 밤중에 부하들을 거느리고 그곳으로 가서 말뚝들을 전부 깊은 진창에다 옮겨 꽂아놓게 하였다. 그리고 매복진을 치고 적군이 도하하기를 기다렸다.

이튿날 새벽 적들은 멋모르고 기여들었다가 모조리 진탕에 빠져 허우적거리였다.

곽재우의 사격신호에 따라 의병들은 화살을 날렸는데 거의다가 백발백중하여 적들을 놀래웠다.

얼마후 적들이 보복을 한다고 하면서 대부대로 쳐들어왔다. 곽재우는 주력을 강 동쪽에 매복시키고 10여명의 날랜 장사를 선발하여 붉은 옷을 입고 흰말을 타게 하였다. 당시 곽재우는 붉은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다니였으므로 《홍의장군》으로 불리웠다.

《홍의장군》들은 적의 대군이 이르자 적진으로 육박하여 순식간에 여러명의 적을 찍어넘기고 바람같이 사라지군 하였다. 그때마다 적장놈은 《홍의장군》들의 자취를 따라 추격병을 파견하였다. 그리하여 기본부대의 력량은 많이 줄어들었고 추격병들은 모조리 소멸되였다.

유인기만전술에 속아넘어간 적들이 당황망조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고있을 때 의병들이 곽재우의 지휘밑에 일제히 북을 치며 돌격전을 벌리였다. 의병들은 적들을 강에 몰아넣고 무리죽음을 안겼다. 이 전투에서 얼마나 많은 적들이 뒈졌던지 너저분한 시체때문에 강물이 흐르지 못했다고 한다. 이 전투의 승리로 하여 이곳을 지나 전라도지방에 침입하려던 적들의 기도는 좌절되였다.

7월에 곽재우의병대는 현풍성을 공격하였다. 그때 하시바 히데가쯔의 9번대 11,300명이 락동강 동쪽 현풍, 창녕, 령산 등지에 나누어 주둔하여 락동강을 오르내리는 수송선단의 호위임무를 수행하고있었다.

현풍성의 적들은 곽재우의병대에 대한 소식을 들었던지라 성문을 굳게 닫고 저항하였다. 곽재우는 낮에는 북소리, 징소리, 나팔소리로, 밤에는 일제히 홰불을 올리는 방법으로 심리적공세를 가하였다. 마침내 적들은 성을 버리고 밤중에 창녕성으로 도망쳤으며 이어 그 성마저 버리고 령산성으로 달아뺐다. 하여 현풍, 창녕 두 읍성이 수복되였다.

곽재우의병대는 승리한 기세로 령산성을 공격하였다. 곽재우의 요청에 의하여 의령, 초계, 고령 등지의 의병들과 관군도 합세하였다. 아군의 3일간의 불같은 공격에 견딜수 없게 된 적들은 어둠을 타서 성주성으로 퇴각했다.

곽재우의병대를 중심으로 한 여러 의병부대들의 투쟁에 의하여 락동강좌안의 여러 고을들이 수복되고 적의 종심 주요교통로로 리용되던 우로 즉 김해-령산-창녕-현풍도로가 아군의 수중에 장악되였으며 락동강 서쪽에로의 적의 침입기도도 파탄되였다.

투쟁과정에 곽재우의병대는 2,000명의 큰 부대로 장성하였다.

곽재우의병대는 이후 마수원(창녕 서남 약 25리 지점의 포구)에서 매복습격작전을 벌려 략탈한 량곡과 재물을 싣고 강을 따라 내려오던 적선 40여척을 격파하고 많은 왜적들을 격멸하였다.

곽재우의병대는 1597년 7월 왜적들이 다시 쳐들어왔을 때에도 잘 싸웠다.

이때 경상도지방에 있던 관군과 의병들은 제각기 성을 맡아 지키였다. 도원수 권률의 부대는 공산성을, 곽재우의병대는 화왕성을 지키였다.

적의 륙군은 1차 침입때와는 다른 전략으로 나왔다. 수군과 협동하여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강점할 목적으로 락동강 서쪽으로 밀려왔다. 력량상 차이로 하여 여러 성들이 일시 적들의 손에 넘어갔다.

부대들의 군사행동을 감독하는 체찰사 리원익은 화왕성도 적의 포위속에서 유지하기 어려울것이니 철수하라고 권고하였다.

그러나 곽재우는 그 권고를 거절하면서 《당나라군사가 100만이였으나 고구려의 안시성군민들은 능히 막아냈다. 지금 여러 군들이 무너져 홀로 남았다고 하여 지켜내지 못하겠는가.》라고 장병들을 고무하며 성을 끝까지 지켜싸울 확고한 결심을 보이였다.

적들의 대군이 성밑까지 쳐들어왔을 때도 그는 평시와 같이 웃으며 《적들도 군사를 안다면 어찌 감히 덤벼들겠는가.》고 하면서 성을 굳게 지키라고만 하였다.

적의 괴수 가또 기요마사의 선봉군은 절벽우에 있는 조용한 성을 바라만 보며 감히 공격할념을 못하였다. 한주일만에 적들은 성을 포기하고 물러갔다. 그리하여 곽재우는 적은 력량을 가지고도 몇배나 되는 우세한 적과 맞서 화왕성을 지켜낼수 있었다.

그의 공적을 치하하여 당시 리호민이라는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였다.

 

  저 사람 홍의장군

  왜적 쫓기를 노루 쫓듯 하네

  나라 위해 목숨바치니

  그 어떤 충신인들

  그보다 더할손가

 

7년간의 임진조국전쟁과정에 곽재우가 진행한 군사정치활동들은 그가 병법에 밝고 뛰여난 지략과 무비의 용감성, 능숙한 조직자적수완과 고상한 풍모, 비겁한 통치배들에 대한 저주와 혐오감을 지닌 군사지휘관이였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곽재우는 선견지명의 안목을 지닌 군사전략가였다.

일본침략군과의 강화문제를 둘러싸고 론의가 분분할 때 곽재우가 취한 태도는 그에 대하여 잘 보여주고있다.

《대체로 강화라는것은 말은 다 같은 강화이지만 각기 다른 뜻을 가진 두가지 종류가 있소이다. 강화를 무조건 신뢰하고 준비를 안하는 자는 결국 망하고말것이고 강화를 하면서도 전력을 다하여 불의의 사태에 대처하는 자는 존속할수 있소이다.

적국을 견제하며 그의 감정을 늦추어주고 화근을 완화하는것도 강화이고 적을 방심하게 하고 침략을 못하게 하여 군사를 쉬게 하고 인민을 안정시키는것도 강화이옵니다. 그러므로 강화를 무조건적으로 반대하는것은 고집불통이라고 할수 있을것이나이다.

적에 대한 경각성을 견지하면서 강화를 말하는것은 아무런 잘못도 아니라고 생각하옵니다.》

이것은 그가 당시의 전국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내린 결론으로서 앞날을 내다본것이라고 할수 있었다. 사실 여러해 계속된 전쟁으로 우리 나라와 인민이 입은 피해도 적지 않았다. 때문에 교활한 적들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강화담판을 하면서 군대와 인민을 쉬우고 그 기간을 리용하여 군대를 재정비하고 무너진 성과 보루를 보수하며 군수물자를 저축하고 인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것이 중요하였다. 그러나 선조왕은 《한번 죽는것은 내 정녕 참을지라도 화의를 요구하는 말 듣고싶지 않노라. 어찌하여 간사한 말을 퍼뜨려 정의를 해치고 전군을 현혹시키는가》라는 시까지 지으며 강화를 결사반대하였다. 물론 이것은 당시 우리 인민들의 원쑤 왜적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을 그대로 반영한것이라고 할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형편에서 당장 왜적들과 싸움판을 벌려놓는것도 바람직한 일이 못되였다. 때문에 교활한 적들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면서 강화담판을 하고 그뒤에서 싸움준비를 갖출데 대한 곽재우의 강화에 대한 견해는 그가 전략적안목이 있는 군사가였다는것을 실증해주고있다.

곽재우는 변화무쌍한 전술과 능숙한 지휘로 적들을 제압한 책략가이며 작전가였다.

그가 쓴 전술에서 많이 찾아보게 되는것은 유인전과 매복전, 심리전으로 적을 분산마비시키고 소멸하는것이였다. 이것은 의병대가 적에 비하여 수적으로나 훈련정도에서 그리고 군사장비수준에서 매우 뒤떨어진 조건에서 정확한 전술적조치였다. 아군을 요해지에 배치하고 력량과 배치정형을 알지 못하게 하며 유인기만으로 적을 분산와해시키고 혼란에 빠지게 한 후에 공격하여 소멸하는 전법은 그야말로 성공적이였다. 호각을 부는 사람들을 부근 산중에 많이 배치해놓고 적이 나타나면 사방에서 그것을 불어대게 하여 적의 얼혼을 빼고 밤에는 사방에서 홰불을 올리고 함성을 질러 얼마 되지 않은 군사를 가지고도 천만의 대군이 있는것 같이 보여 적들을 기절초풍하게 만든 심리전은 당시 전쟁에서 찾아보기 힘든것이다.

이밖에도 곽재우는 기병에 의한 맹렬한 공격과 기동, 각개격파전술 등 림기응변적이며 변화무쌍한 전술로 련전련승을 이룩하였다.

곽재우는 지형지물에 밝고 그것을 잘 리용할줄 아는 군사가였다.

솥나루전투나 마수원전투 등 적지 않은 전투들이 다 그가 지형지물을 교묘하게 리용하여 벌린 싸움들이였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1593년 7월이후 전쟁은 일시 휴전기에 들어갔다. 이 기간 체찰사 리원익이 명나라군사들을 데리고 령남지방으로 이동하여올것을 곽재우에게 요구하였다.

이때 곽재우는 《지금 명나라군사들이 충청도지방에 주둔하고있는것은 범이 산에 있고 룡이 못속에 있는 격이옵니다. 그들이 만일 경상도지방으로 다 온다면 그것은 범이 산에서 내려온 격이고 룡이 물에서 나온것과 같은것》이라고 써보냈다.

지리도 적정도 모르는 명나라군사들이 경상도로 나오는것은 산속에 있어야 할 범이 산에서 내려오고 물속에 있어야 할 룡이 뭍으로 나오는것과 같이 어리석은짓이 아닐수 없었다. 하기에 리원익은 서한을 보고 《지금 나는 서한을 받아보고 저절로 무릎을 꿇었소. 우리 나라에 이와 같은 장수가 있을진대 무슨 걱정이 있겠소.》라고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곽재우는 군사가에게 있어서 필수불가결인 용감성과 고결한 성품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전투에서는 항상 대오의 앞장에 서서 호랑이와 같이 용맹하게 싸웠으며 부하들에 대해서도 극진히 돌봐주었다. 그는 자기 의복을 벗어 부하장병들에게 입혀주었고 처자의 의복을 벗겨서는 부하들의 처자들에게 입혀주었다. 그리고 의병들이 적의 포위속에 들거나 위기에 처하였을 때에는 언제나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그들을 구원해내고야 말았다.

장병들은 일심동체가 되여 싸웠고 곽재우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였다. 인민들은 곽재우의병대에 큰 기대를 걸고 때를 놓치지 않고 적정을 알려주고 물심량면으로 지원해주었다.

그는 또한 장병들에게 원쑤 왜적을 치는것이 그 어떤 명예나 보수를 바라서가 아니라 부모처자를 지키고 고향산천을 지키며 나라에 충성다하기 위해서라는것을 늘 강조하였고 실천적모범을 보였다.

당시 적지 않은 봉건관료배들은 자기들이 벤 적의 머리수를 가지고 공명과 출세의 길을 마련해보려고 하였다. 지어 원균이나 우복룡같은 자는 무고한 자기 겨레를 해치고 《공로》를 평가받으려 하였다. 하지만 곽재우는 애국의 일념으로 가슴불태우며 한놈의 적이라도 더 소멸하는데 주력하였고 그것을 자랑하거나 보고하는데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조정의 관료들조차도 곽재우는 《조정의 지시 하나 받지 않았지만 정예로운 군사를 모아가지고 그동안 적을 무찔러 죽인 수를 이루 다 적어낼수 없소이다. 심지어 목을 벤 왜적의 머리를 모조리 강물속에 처넣고 보고하지도 않았소이다. 그가 하는 일을 보면 옛 사람에 비겨봐도 부끄럽지 않으니 크게 표창하는것이 좋을것 같소이다.》라고 제의하였던것이다.

특히 곽재우는 나라를 배반한 반역자들은 물론 나라와 겨레의 운명은 안중에도 없이 일신의 안일과 영달을 위해 추악한 행위를 일삼는 비겁한 관료배들과도 비타협적인 투쟁을 벌렸다.

그는 령산에 사는 반역자 공위겸이라는 자를 체포하여 단호히 처단해버림으로써 배신자들에게 공포를 안겨주었다.

경상도관찰사 김수와의 견결한 투쟁은 불의를 증오한 그의 억센 기개를 잘 보여주었다. 이자는 왜적이 침입하여오자 질겁하여 산으로 도망쳤으며 합천군수 전형룡의 모해하는 말만 믿고 의병투쟁에 궐기한 곽재우에게 반역자의 혐의가 있다고 중상모해하였다.

곽재우도 이에 대하여 《애국과 반역은 세인이 판단할것이요, 옳고 그름은 공론이 결정할것이다.》라고 하면서 단호한 립장을 취하였다.

곽재우는 김수의 죄목을 10가지로 작성하여 꾸짖으면서 그의 목을 베겠다고 하였다. 겁에 질린 김수가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에게 곽재우를 불러다 타이르라고 하였다. 곽재우는 김성일의 앞에서도 자기의 처음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곽재우는 임금에게 아비도, 임금도 모르며 충성스럽지 못하고 효성스럽지 못하며 패하기 좋아하면서 적을 맞아들이는 자, 금관자를 잃고 도망친 대가리없는 송장귀신이라고 김수를 욕질하였다. 후에 김수가 산음현에 있다가 재우의 선봉대가 이미 가까이 왔다는것을 듣고는 함양으로 도망칠 때 말을 거꾸로 타고 달아나기까지 하였으므로 온 도안의 사람들이 죄다 비웃었다.

곽재우는 김수의 비장에게 《네가 김수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 죽이겠다.》고 위협하였고 김수는 임금에게 글을 올려 변명하면서 《신이 죽고 사는것은 달포사이에 달려있소이다.》라고 살려주기를 애걸하였다.

불의와 타협할줄 모르는 곽재우의 견결한 투쟁정신에 김수는 끝내 무릎을 꿇고말았다. 후에 조정에 소환되여 올라간 김수는 임금에게 《대체로 그 사람됨이 평범하지 않사옵니다.… 의병을 일으키는것도 남보다 제일먼저 하였나이다.… 의령과 삼가가 온전한것은 재우의 공적이나이다.》라고 정당한 평가를 하였다.

곽재우는 김수만이 아니라 고을원이나 변방장수가 도망쳤다는 말을 들으면 한사코 머리를 베려고 하였고 심지어 감사나 병사에게까지 불손한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곽재우가 인민들의 지지와 옹호를 받을수 있었던 요인의 하나가 바로 이런 비타협적인 투쟁정신이 있었기때문이다.

매 손가락으로 두드리느니 주먹으로 한번 치는것이 낫다는 말도 있다. 곽재우는 각지 의병들의 련합에 깊은 관심을 돌렸다. 김수는 《령남의 의병들은 각각 그 고을을 지킬뿐인가?》고 묻는 임금에게 《령남은 그렇지 않사옵니다. 통솔자가 있어서 때로는 적과 싸우기도 하고 때로는 요해지에서 길목을 차단하기도 하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경상도의병들이 련합하여 한사람의 지휘를 받으며 적을 공격하거나 중요한 길목을 막고 싸우며 부단한 기동전을 벌린 사실을 말해주고있다.

참으로 경상도백성들이 피해가 많지 않은것도, 전라도에로 적들이 쳐들어가지 못하고 리순신의 수군이 바다에서 마음놓고 싸울수 있은것도 곽재우의 역할을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다.

그때 정부군에는 수군의 리순신장군이 있고 의병부대에는 륙지의 곽재우장군이 있다는 말이 많이 류포되였다.

전후에 그는 국사는 안중에 없이 당파싸움에만 혈안이 되여 날뛰는 비렬한 통치배들을 극도로 증오하면서 임금에게 이렇게 제기하였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분발하여 착한 사람들을 가까이하고 간신들을 멀리하며 나라의 부흥을 꾀해야 한다는것을 깨달아야 하옵니다. 신도 역시 한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중흥을 도울가 하나이다. 그러나 지금 조정에서는 동서남북으로 당파가 있어 벼슬하는 자들은 자기의 패거리를 끌어당기고 다른 패거리들을 배척하면서 당파들이 서로 엉키여 시비하는것으로 날을 보내고있소이다. 이들은 나라의 형편이 위급한것도 백성들의 리해와 국가의 존망에 대하여서는 하등의 관심도 없나이다. 짐작컨대 이자들은 나라를 망하게 한 후에야 그칠것이 아닌가고 생각하오이다.》

그는 자기가 건의한 군사정치문제들이 하나도 실천되지 않자 나중에는 더러운 당파싸움에 침을 뱉고 벼슬을 그만 두고말았다.

그후 조정에서 여러 벼슬을 내리며 불렀으나 모두 사퇴하고 비슬산에 들어가 곡식을 전페하고 솔잎을 먹으며 지내다가 취산 창암에서 66살을 일기로 생을 마치였다.

리순신과 함께 임진조국전쟁의 승리의 서막을 열어놓은 곽재우.

참으로 그는 뛰여난 전략가, 전술가, 능숙한 조직지휘자, 출중한 무예와 용맹을 갖춘 용장이고 뚜렷한 전투공적을 세운 명장이며 단군민족의 슬기를 빛내인 애국자이다.

 

40)부고를 받고도 군영을 떠나지 않은 김응서 

 

김응서(1564-1624년)는 16세기말~17세기초 리조 14대왕 선조때 남북으로 쳐들어오는 외래침략자들을 물리치는 싸움에서 공로를 세운 애국명장이다. 그의 본관은 김해이며 그는 1564년 11월 7일 평안도 룡강에서 출생하였다.

김응서의 부친은 무과에 급제하여 군관으로 복무하였고 모친도 무관가정의 출신이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어려서부터 군사부문에 특별한 취미를 가지고있었다. 전해지는데 의하면 벌써 7~9살때부터 모래와 흙으로 성을 쌓고 나무가지를 꺾어서는 군대를 만들어 공방전을 벌리게 하는 등 군사놀이를 즐겨하였다. 13살때에는 전쟁에 관한 력사서적을 읽다가도 옛날 장군들중에 전쟁에서 패배한 대목에 이르면 문득 일어서서 《이렇게 하면 이겼을텐데.》 하며 군대를 지휘하고 적을 치는 시늉을 하였다고 한다.

후날 명장으로서의 그의 기질의 싹은 이렇게 어린시절부터 움트고있었던것이다.

그는 20살때 무과시험에 응시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되였으며 그해 12월에는 리진권관으로 임명되였다. 이때부터 조국방위를 위한 싸움에 한생을 바친 그의 투쟁의 년대기가 시작되였다.

무과시험과정은 물론 리진권관당시에 벌써 김응서는 군사지휘관으로서의 재능이 인정되였으며 엄격한 규률에 복종할줄 알고 청렴한 품성의 소유자라는것도 알려지게 되였다.

그는 두차례나 량반들의 행동을 규찰하는 임무를 받은 사헌부 감찰로 임명되였으나 얼마후 《문벌이 미천》하다는 리유로 두번 다 면직되였다. 이것은 그가 같은 량반중에서도 멸시와 천대를 받던 평안도출신이였기때문이다.

사헌부 감찰의 직책에서 해임된 김응서는 평안도지방에서 녀진인방어의 제일선을 담당한 벽동아이진만호로 임명되였다.

임지에 이른 그는 큰 아이성의 방어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하였다. 그는 정부관료들이 이 지방의 지형지세도 모르면서 책상머리에서 고안해내여 그려 내려보낸 축성도에 의거하지 않고 이곳의 자연지리적조건에 맞게 성을 쌓았으며 중요한 지점에는 벽돌을 구워 성벽을 더욱 높이 쌓아 그 방어력을 높이였다.

그의 축성기술에 대한 깊은 지식과 창발적인 사업태도는 정부에서 높이 평가되였으며 1590년에는 고산진 병마첨절제사로 등용되였다. 그는 거기에 가서도 북방으로부터의 녀진인의 침입을 성과적으로 막아내기 위한 군사실무적조치들을 취하였다.

1592년 임진조국전쟁이 발발하자 김응서는 인민들의 애국적열의에 무한히 고무되여 평양성탈환을 위한 작전에서 군사지휘관으로서의 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당시 그는 아버지의 병환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들었고 얼마후 부친이 사망하였다는 부고를 받았으나 군영을 떠나지 않았다. 1594년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부고를 받았을 때에도 그러하였다.

사실 김응서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 사회풍습에 따르면 용납될수 없는 일이였다. 유교도덕이 지배적이던 그때 부모가 사망하면 어떤 일이 있어도 3년상을 치르어야 하였고 자기가 《효자》라는것을 보여주자면 3년간 묘곁에서 금욕적인 생활을 하여야만 하였다. 효자라야만 충신으로 될수 있다는 론리에 따라서 이것이 당시 출세의 기본조건으로 되여있었다. 때문에 이러한 도덕관념대로 한다면 김응서는 응당 싸움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였다.

하지만 김응서는 군영을 떠나지 않았다.

수천수만의 무고한 조선사람들이 왜적들의 칼날밑에 원통하게 숨져가고있었고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린 이때 어찌 군영을 떠날수 있으랴. 사람들이 시비질을 해도 좋았고 높이 발탁되지 않아도 좋았다. 오직 나라의 안전을 지켜내고 겨레의 복수를 할수만 있다면 더 바랄것이 없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이 량반관료들의 눈에는 거슬리고 시비거리로 되였지만 군중은 그 일로 하여 더욱 그를 따르고 신뢰하게 되였다.

조정에서도 그의 소행을 군주에 대한 충의의 표시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였고 임금의 명의로 그에게 3년간의 수제를 중지할것을 명령하고 별장으로 임명하여 평양성탈환작전에 참가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조정안에서도 명장인 김응서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다는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열렬한 애국심과 원쑤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 용맹과 지략을 겸비한 김응서가 별장으로 임명된데 대하여 몹시 기뻐하면서 그의 휘하에서 싸울것을 탄원하여나섰다. 하여 그는 룡강, 강서, 상화, 증산 등 4개 지역 인민들로 편성된 부대를 거느리고 평양성 서부 20여개소에 군사거점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평양성을 나와서 인민들의 식량과 재물을 략탈하려고 시도하는 적들을 섬멸하면서 성안의 적들을 기갈과 추위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평양에 둥지를 튼 적들은 순안에 지휘부를 둔 체찰사 리원익이 지휘하는 아군주력부대에 의하여 북쪽길이 차단된데다가 김응서부대에 의하여 서부지역이 봉쇄되고 대동강방면에서는 수군장수 김억추의 수군에 의하여, 남부지역에서는 중화방면의 림중량의병부대에 의하여 포위되여 퇴로와 보급로까지 잃고 완전히 고립무원해지게 되였다.

1592년 8월 1일 평양성을 포위하고있던 아군부대들은 적들에 대한 일제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동안 거듭되는 전공으로 방어사로 승급한 김응서는 1만명의 군대를 지휘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명장으로서의 명성을 더욱 떨치게 되였다.

평양성탈환작전은 비록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적들은 밤이 아니면 감히 성밖에 나서지도 못하였다.

김응서는 평양성주변에 부대들을 매복시킨 후 의병부대들과의 긴밀한 협동작전밑에 성밖으로 기여나오는 적들을 모조리 잡아죽이는 한편 성안에 대한 정찰을 더욱 강화하게 하였다.

당시 적들은 아군의 포위환이 날로 강화되자 당황망조하여 평양성안의 민가를 털어서는 토굴을 만들고 여러곳에 방어시설들을 구축하고있었다. 때문에 앞으로 평양성탈환을 위해서는 치렬한 시가전을 예견하여야 하였으며 이를 위해 적들이 새로 구축한 토굴들과 참호들을 구체적으로 료해장악하는것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그는 정찰성원들을 성안에 파견하여 인민들과의 련계밑에 적들의 정황을 탐지하게 하는 한편 군사에 밝은 자신이 직접 확인해보기 위해 때때로 함구문, 보통문부근에 와서 적정을 정찰하였다.

한편 그는 적의 우두머리들을 죽이여 적진내부를 와해시키는데도 깊은 관심을 돌렸다. 특히 그는 적의 우두머리들을 죽이는 일을 자기가 직접 수행하기도 하였다. 애국명기 계월향의 도움으로 평양성안에 있던 한 악질적장놈을 처단한 이야기는 오늘도 사람들속에 전해지고있다. 계월향은 천한 기생의 몸이였지만 그의 가슴속에서는 조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원쑤에 대한 불타는 증오가 용암처럼 끓어번지고있었다. 그는 적장을 죽임으로써 부모형제의 원쑤를 갚을 굳은 결심을 품고 후퇴를 하지 않고 성안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연약한 자기 혼자의 힘으로써는 수많은 호위병을 거느리고있는 적장을 처단하고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하여 그는 김응서와 련계를 맺고 오빠로 속이여 그를 적장놈과 만나게 하였다.

계월향의 도움으로 김응서는 간악한 적장놈을 처단하였다. 탈출도중에 계월향은 애국의 더운 피를 뿌리며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였다.

김응서와 계월향에 의하여 단행된 적장놈처단에 대한 이야기는 수백년을 전해내려오며 우리 인민들의 가슴속에 나라와 겨레에 대한 사랑과 원쑤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심어주면서 원쑤격멸의 한길로 고무하였다.

적장이 뒈지자 적진에는 커다란 공포가 만연되였다. 성안이라고 안전한것도 못되였다. 언제 누가 또 죽겠는지 놈들은 제 그림자를 보고도 놀랄 지경으로 공포에 휩싸였다.

게다가 놈들은 식량과 소금의 부족, 추위속에 1592년의 엄혹한 겨울을 보내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러한 때 아군은 적에 대한 총공격준비를 갖추고있었다.

1593년 1월 7일 아군은 김응서가 거느린 부대를 선봉군으로 하여 평양성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김응서는 부대를 거느리고 서쪽과 남쪽에서 공격하였다.

적들이 성에 의지하여 악착하게 저항하는 조건에서 그는 적들을 성밖으로 끌어내여 족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소부대를 거느리고 고지에 올라 성벽의 적들을 맹렬히 공격하다가 마치 견디지 못하여 약간씩 후퇴하는 기미를 보이였다. 적들은 아군이 진짜 퇴각하는것으로 잘못 판단하고 고리문으로 나와 공격해왔다. 아군은 계속 지는척 하면서 적들을 더 많이, 더 멀리 끌어내였다.

적들이 성에서 멀리 나왔다는것을 확인한 후 김응서는 말머리를 돌리여 반격명령을 내리고 앞장에서 돌진하였다. 그리고 좌우측에 매복시켰던 주력부대가 일제히 반격을 가하였다. 그제서야 속았다는것을 안 적들이 성으로 도망쳐갔으나 급해맞은 성안의 적들이 성문을 닫는 바람에 성벽밑에서 몰살당하고말았다.

첫날 전투에서 김응서부대가 거둔 전과는 조선과 명나라군사를 크게 고무하였다.

이튿날 이른새벽부터 평양성탈환을 위한 전면공격이 개시되였다.

김응서와 리일이 거느린 아군부대들은 함구문으로부터 진공하여 성안의 적들에게 무리죽음을 주었다. 적들은 성안의 좁은 지역에 압착되여 건축물들과 성벽에 의거하여 저항하다가 밤이 되자 무수한 시체, 무기, 말들을 내버린채 대동강의 얼음을 타고 황급히 패주하였다.

평양성탈환전투는 임진조국전쟁에 떨쳐나선 장병들과 의병들, 애국적인민들을 크게 고무하였으며 이 전투에서 세운 공로로 하여 김응서는 첨지중추부사 겸 평안방어사로 등용되였다.

그후 패주하는 적들을 계속 추격하여 경상도지역에까지 이르자 8월에는 가선대부(종2품)의 품계로 올리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의 벼슬을 주었다.

문벌이 미천하다고 하여 사헌부 감찰의 직위도 안 주던 김응서에게 종2품의 품계를 주고 또 적이 몰켜있던 경상도 동남부에 대한 공격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역할을 담당할 경상우도의 병사로 등용한것은 그가 장병들속에서 신망이 높았고 용감하고 능숙한 지휘관이며 전술가였다는것을 잘 보여주고있다. 평안도의 한미한 무관출신으로서 30살에 이와 같은 높은 지위와 중책을 맡은 일은 왕조교체시를 제외하고는 리조 전기간을 통하여 찾아보기 힘들었다.

1597년 12월말부터 1월초까지 진행된 아군련합군의 울산 도산성포위공격전에서도 만일 김응서가 제기한 작전안대로 하였더라면 적을 소멸할수 있었을것이다. 이것은 후세저술가들 및 력사가들이 일치하게 인정하고있는것이다.

울산 도산성은 일본침략군의 가장 우익에 있는 거점이며 가또 기요마사의 관할이였다. 총 연장길이 1km 남짓한 이 성은 남쪽은 태화강에 림하여 배를 직접 성아래에 댈수도 있었다.

1597년 12월 22일 조선과 명나라련합군은 울산 도산성을 포위하였다.

일본침략군은 이날부터 다음해 1월 4일까지 비가 내리면 그것으로 입을 적시고 종이를 먹고, 말을 잡아먹고 추위로 얼어죽으면서도 저항하였다. 이때 가또는 너무 급하여 자살할 생각까지 하였다고 한다. 일본지원군이 오는 바람에 성안의 적들은 겨우 구원될수 있었다.

이때 김응서는 궁한 적들이 발악하는 조건에서 한 모퉁이를 열어주고 도중에 매복하였다가 빠져나가는 적들을 들이치면 모두 섬멸할수 있을것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안되면 적진와해공작을 강화하고 그것을 유일적으로 지도하여 도산성안의 적병사들을 모조리 투항시키고 적들이 분렬된 기회에 괴수들을 섬멸하자고 하였다. 하지만 그의 제의는 하나도 접수되지 않았다.

발악하는 적들에게 길을 틔워주어 살길을 열어주어야 저항을 줄일수 있다는것은 병서에도 있는것으로서 당시 적들의 발악이 악착한 조건에서 충분히 실현가능성이 있는것이였다. 그리고 적진와해공작을 강화하여 적내부를 분렬시키고 그다음에 적괴수들을 소멸하자는 제안도 타당한것이였다.

그러나 조선과 명나라의 장수들은 수적우세만 믿고 성을 완전히 포위해놓고 무모하게 공격만 하려고 하였으므로 의외로 적들의 강력한 저항을 초래하고 나중에는 원군의 도움으로 살아날수 있게 한것이다.

7년간의 임진조국전쟁과정에 무훈을 떨친 장수들을 론할 때 사람들은 흔히 해전에서는 리순신, 륙전에서는 곽재우와 권률, 김응서를 꼽고있다.

나라와 겨레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감정을 지니고있던 그는 전후에도 왜적의 재침위험이 가시지 않았을 때 경상, 전라, 충청도의 병사를 력임하면서 국방력을 강화하고 일본침략자들의 침략야욕을 분쇄하는데 기여하였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북방에서 녀진족의 침략위험이 증대되자 그는 1614년에 함남도병마절도사로, 그다음해에는 함북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였다.

그후 녀진족이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료양방면으로 진출하면서 우리 나라에도 침략의 마수를 뻗치자 1618년 조정에서는 김응서를 숭정대부의 품계로 올리고 평안도병마수군절도사 겸 녕변대도호부사로 임명하여 그에 대처하게 하였다.

1619년 명나라를 도와 신흥녀진족(후금)을 진압하기 위한 심하전역에 김응서는 조선군 부원수로 참전하였다가 포로되여 1624년 4월 18일 그곳에서 61살을 일기로 최후를 마쳤다.

김응서는 미천한 문벌과 통치배들의 훼방과 박해, 침략자들과의 간고한 투쟁속에서 순탄치 않은 인생행로를 걸어왔다. 하지만 그는 나라와 겨레에 대한 사랑으로 온넋을 불태우며 파란만장의 인생을 애국의 자욱자욱으로 수놓아왔다. 나라를 배반하는 역적들을 증오하고 원쑤를 미워한 그였기에 1613년에 박응서라는 자가 반란죄로 처단되자 이름을 김경서로 고치였다. 그자의 이름이 자기 이름자와 같다고 해서였다고 전해온다.

그도 인간인 이상 사업상에서는 일련의 결함들도 발로시켰다. 시시한 좌석순차를 놓고 명장인 고언백과 다툰것은 그중의 하나다.

 

그러나 그가 범한 결함들은 세운 공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기에 사람들은 수백년간 그를 잊지 못해하며 명장으로서의 그의 무훈담을 전해오는것이다.

 

  

 

41)실학의 선구자인 류형원 

 

리조봉건사회 전기간 지배적인 통치리념으로 되여있던 유교, 주자학의 교조주의를 반대하여 《실사구시의 학문》의 구호를 들고 합리적이며 현실적인 학문연구를 주장한 인물들이 등장하였다.

17세기에 새로 자기의 모습을 드러낸 이들을 실학파라고 하였다. 그들은 고전연구와 사회개혁을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태도로 진행하려고 하였고 우리 나라에서의 사회정책, 농학, 자연과학, 력사학, 지리학, 문학 등의 발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이들의 선두에는 류형원(호는 반계)이 서있었다.

류형원(1622-1673년)은 한성(서울)의 이름있는 한 량반가문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강의하고 정의를 사랑하는 훌륭한 품성으로 교양되였고 책읽기를 좋아하고 경전을 비롯한 수많은 서적들을 탐독하였다. 특히 그는 불의를 미워하고 그와는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가 15살 나던 해인 1636년에 있은 일이였다. 그때 류형원은 청나라의 침입을 당하여 조부모와 어머니, 고모를 모시고 피난가던 길에 산속에서 불의에 강도들과 맞다들게 되였다. 강도들은 류형원을 위협하면서 그의 부모들을 해치려고 하였다. 이때 그는 조금도 당황하거나 주저함이 없이 강도들을 막아나서면서 이렇게 꾸짖었다.

《이 세상에 부모가 없는 사람은 없을것이다. 자기 부모를 존경할줄 안다면 남의 부모도 존경하여야 할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내 부모를 놀라게 하지 말라. 만약에 물건이 탐나면 우리가 가지고가는 물건만은 다 가져가도 좋다.》

어린 소년의 담찬 기상과 사리정연한 말에 감동된 강도들은 머리를 떨구고 흩어져가버렸다고 한다.

이후 류형원의 사상과 리념은 이 이야기에 보이는 그의 행동과 맥락을 같이하고있다. 남의 물건을 빼앗으려던 강도들에 대한 그의 비판은 나라의 운명과 인민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추악한 당파싸움과 파렴치한 수탈로 날과 달을 보내던 봉건통치배들에 대한 증오로 이어졌다. 그는 학식으로 보나 인격으로 보나 명성이 자자하여 그 당시의 량반관료배들이 그와 사귀기를 원하였으나 애당초 대상하려고 하지 않았다.

류형원은 량반출신으로서 얼마든지 출세할수도 있었으나 이 길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당시 왕실의 외척들과 대신들이 류형원에게 벼슬을 주려고 추천하였으나 그는 모두 거절하고 32살때 마침내 서울을 떠나 전라북도 부안군 우반동이라는 해변가마을에 내려갔다. 서울에서 살기보다는 벽촌에서 농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생활을 체험하며 나라의 장래발전을 도모할수 있는 학문연구에 한생을 바치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이 그의 가슴속깊이에 자리잡고있었던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골에로의 길, 이것은 결코 현실도피가 아니라 새로운 진리탐구에로의 길이라고 할수 있었다.

그는 자기의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학문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그는 일본사무라이들이 강요한 임진전쟁의 후과로 생산력이 극도로 떨어지고 그자신이 1636년 청나라의 침략을 직접 체험하면서 공리공담적인 학문의 불필요함을 뼈저리게 느끼고있었다. 또 그가 두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당쟁에 관계되여 28살의 젊은 나이로 옥사한 비극을 체험한것도 그에게 부패한 정계와 인연을 끊고 새로운 진리를 탐구하는 길에 일생을 바치게 한 계기로 되였다.

그는 침식을 잊고 독서를 하였고 말을 타고 다닐 때에도 깊은 생각에 잠겨 말이 다른 길로 가는것조차 모르는 일까지도 종종 있군 하였다. 그는 밤에도 쉬지 않고 공부를 하였으며 매일 날이 저물면 《오늘도 헛되이 보냈구나. 학문은 무한한데 세월은 한정이 있으니 걱정이로다.》라고 하면서 늘 분초를 아껴 학문을 탐구하였다.

이 과정에 그는 천문, 지리, 수학, 음악, 언어, 력사, 철학, 정치, 경제, 군사, 의학, 문예, 도덕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에 걸치는 자기의 사상과 리론을 집대성한 백과전서적인 저서들을 집필하였다.

그는 관념론적인 주자학을 비판하여 《리기총론》, 《론학》, 《물리》, 《경설문답》, 《인심도심》, 《사단칠정》  등 철학적인 저작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종래에 사대주의자, 교조주의자들에 의하여 도외시되여온 조국의 력사와 언어를 해명한 《동사강목조례》, 《력사동국가고》, 《정음지남》 등을 집필하였다. 또한 외래침략자들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국방력을 강화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하여 국방대책과 군사학에 관한 《기효신서절요》, 《무경사서초》 등을 저술하고 국방상에 절실히 필요한 군사관계 서적들도 집필하였다. 그는 국내 각 지방들을 직접 답사하고 연구한데 기초하여 《기행일기》를 서술하였고 또 《여지지》, 《지리군서》 등도 집필하였다.

그의 글들은 뜨거운 애국심과 함께 우리 나라 사회정치, 경제제도 및 문화 등에 대한 그의 높은 식견과 판단에 기초한것으로서 상당히 애국적이며 과학적인것이였다. 또한 그가 벽촌에서 하층 인민들의 생활을 체험하면서 저술한것이기에 진보성도 가지고있었다. 그는 매 저서들에서 국가통치제도와 인민생활의 밑뿌리를 파헤치며 개혁을 주장하였다.

류형원의 철학사상은 비교적 유물론적인 립장에 서있었다. 그의 주요 저서인 《반계수록》은 그의 이러한 립장을 증명해주는 문헌이기도 하였다.

류형원은 당시 철학사상에서 론의되였던 리와 기의 문제에 대한 자기의 유물론적인 견해를 이렇게 밝혔다. 《천하의 리는 만물을 통하여 나타나며 물이 없이는 그 리는 나타날바가 없다.》 이것은 동시에 물질과 법칙과의 관계가 서로 분리할수 없는것이라는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철학의 기본문제에 대한 이러한 진보적립장과 견해로부터 출발하여 그는 철학상의 제반 문제들을 기본적으로 정당하게 해명하였다. 즉 그의 인심, 도심, 사단, 칠정 등의 학설들은 리, 기에 대한 유물론적견해로부터 출발하고있다. 때문에 《반계수록》의 서문을 쓴 오광운은 《그의 리론은 순수하고 정밀하며 심오하여 근세의 속된 선비들은 따를바가 아니였다. 여기에서 나는 리와 기가 서로 분리되여서는 안된다는것을 더욱 굳게 믿게 되였다.》고 그 과학성과 진보성에 대하여 밝히였다.

이처럼 그는 사물과 법칙은 호상 불가분리한것이라고 인정하였다.

류형원은 또한 사물의 부단한 운동과 변화발전, 그의 객관성을 주장하였으며 유물론적견해로부터 출발하여 공리공담과 비실재적인것, 체험하지 않은것에 대하여서는 어떠한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미신과 종교 등을 인정하지 않았을뿐아니라 그의 허황성과 나아가서는 사회발전의 기초로서의 생산력발전에 주는 막대한 해독성을 신랄하게 폭로비판하였으며 사주, 관상, 무당 등의 허위성도 폭로비판하였다. 이것은 다 그의 실학사상으로부터 나온것이였다.

류형원은 애국심과 인도주의로 일관된 사상에 기초하여 당시 봉건제도의 모순과 봉건적착취를 전면적으로 비판하였으며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인민들이 잘살수 있도록 통치제도를 개혁할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개혁사상에서 기본은 전제개혁안이였다.

그는 당시 봉건제도의 모든 죄악의 근원이 토지를 봉건지주들이 소유하고있는데 있다고 보고 전면적인 비판을 가하였다. 그는 토지가 봉건지주들의 독점적인 사적소유로 되여있기때문에 농민들은 토지를 가지지 못하고 그 결과 농민들은 지주의 토지에 얽매여 각종 착취를 당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토지에 대한 지주들의 사적소유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농민들의 농노적상태를 폭로하고 깊은 동정을 보내였으며 인민들을 이러한 처지로부터 벗어나게 할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부익부, 빈익빈의 세상이다.》라고 비난하고 농사짓는 자가 땅을 가진다는 원칙에 기초하여 토지개혁안을 제출하였다. 그는 농민들이 모두 능력에 맞게 토지를 리용할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공전제(봉건적국유제)》를 실시할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사적소유와 매매가 없고 능력과 필요에 따라서만 자유롭고 균등하게 리용할수 있는 공전제의 실시만이 정치경제상의 모든 모순을 제거할수 있다고 인정하였다.

류형원은 토지를 공전으로 한 다음에는 일정한 제도와 절차에 따라 토지를 나누어 경작하도록 할것을 제기하면서 분배안을 내놓았다. 여기서 봉건관료배들에게 토지를 주자고 한 약점이 있으나 그의 기본사상은 토지는 농민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하자는것이였다.

류형원은 또 농업, 수공업 등 생산력을 발전시킬데 대해서도 깊이 연구하고 합리적인 방도들도 내놓았다. 수리관개시설을 정비확장할데 대한 문제, 경작방법을 개선할데 대한 문제, 산과 하천을 합리적으로 리용할데 대한 문제, 농기구를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게 개량하여 적용할데 대한 문제, 그밖에 농사절기, 비료, 제초, 목축, 과수 등 문제, 수륙교통을 발전시킬데 대한 문제, 금속화페의 류통문제 등 여러 분야에 걸치는 다방면적인 제안들을 제기하였다.

토지제도의 개혁, 경제관계의 개혁에 토대하여 류형원은 정치, 법률, 교육, 국가제도와 기구, 군대제도 등을 모두 대대적으로 개혁할것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류형원은 우리 나라 사상발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실학사상의 선구자적역할을 한 학자의 한사람으로서 그 이후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류형원은 우리 나라의 력대 사상가들가운데서 경제문제에 가장 조예가 깊었고 또 합리적인 견해들을 많이 제기한 학자의 한사람이였다.

류형원의 애국적이며 진보적인 개혁사상은 당시 통치계급에게는 접수되지 못하였다. 때문에 그의 저작은 즉시로 발표되지 못하였고 그의 사상자체도 묵살당하였다. 그의 사상은 그가 죽은 후 18세기에 와서 실학사상가들에 의하여 소생되여 계승발전되였으며 세상에 알려지게 되였다.

박지원(1737-1805년)은 《허생전》에서 《류형원은 한나라의 경제를 능히 운영할수 있는 대인재인데 지금 속절없이 바다가에서 늙는다.》고 하였고 리익(1681-1763년)은 《리조건국이래 수백년간에 시무를 아는 사람은 오직 리률곡과 류반계뿐인데 리률곡의 제안은 그 대부분을 실행할수 있는것이였으나 반계의 경우에는 근본적으로 개혁하려 하였으며 참으로 그 뜻이 크다.》고 하였다. 참으로 정당한 평가라고 할수 있다.

류형원은 일생 겸손하고 소박하게 생활하였다. 원래 그는 상당한 토지와 재산을 가지고있었으나 생활에서 몹시 검박하여 고기로 만든 음식이나 비단옷을 사양하였다. 그는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귀천을 가리지 않고 진심으로 대하였다.》는 말도 전해진다.

류형원은 나라의 방위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자기가 직접 그 모범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벽촌에 살면서 깊은 연구를 거듭하여 구조가 견고하고 편리한 큰 배를 네댓척 만들어 자기 집 앞바다에 띄우고 그 성능을 시험하였다. 그는 하루에 수백리 달릴수 있는 준마를 기르고 좋은 활과 총 수십자루를 장만하여 동리사람들과 같이 기마훈련을 하고 그들에게 사격술을 가르쳐주었다. 결과 그가 살던 우반동포수의 이름은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류형원자신의 계급적출신과 당시 력사발전의 제한성, 도달된 과학과 지식발전수준 등의 제한성으로 하여 그의 사상에는 적지 않은 결함들이 있었으나 그 시기 리조봉건사회발전의 요구, 인민의 지향과 리익을 어느 정도 정당하게 반영한것으로 하여, 또 봉건제도에 대한 비판과 폭로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적모순을 깨닫고 계몽각성되게 한것으로 하여 그의 사상과 리념은 진보적이며 애국적인것이라고 할수 있었다.

 

후세 실학사상가들은 류형원의 사상을 기초로 하여 그것을 발전시킴으로써 실학을 풍부히 전개해나갔으며 이런 의미에서 그는 실학파의 선구자의 한사람이라고 할수 있었다.

 

 

 

42)《갑신정변》의 조직자 김옥균 

 

우리 나라에서의 첫 부르죠아개혁운동가이며 1882년 《갑신정변》의 조직자인 김옥균, 오래동안 봉건제도의 암흑속에 신음하던 조선을 문명개화의 길로 이끌고저 애국의 더운 심장을 끓이던 그를 단군의 자랑스러운 후손으로 돌이켜보는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김옥균(1851-1894년)은 충청남도 공주에서 몰락한 량반인 김병태의 맏아들로 출생하였다. 그의 자는 백온, 호는 고우, 고균이며 본은 안동이다.

김옥균은 어려서부터 학식과 재주가 뛰여났고 아량이 있고 붙임성도 좋아서 마을사람들속에서 장차 반드시 큰일을 할 인재로 평가되였다. 그는 시문에 능하였고 글씨와 그림에도 재주가 비상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가 《룡룡(龍)》자를 쓰면 룡이 하늘로 올라가는것 같고 《범호(虎)》자를 쓰면 범이 산중 수림속에서 뛰는것 같았다고 말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그는 6살때인 1856년 가을에 오촌인 김병기의 양아들이 되여 서울로 올라와 10살때까지 글공부를 하였다. 11~15살사이에 강릉부사로 임명된 오촌을 따라 강릉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김옥균이 나서자라던 19세기후반기는 우리 나라 봉건사회가 바야흐로 붕괴되여가던 시기로서 봉건통치자들의 부패상이 날로 강화되고 인민들의 생활이 더욱 령락되였으며 일본침략자들을 비롯한 유미자본주의침략세력들이 우리 나라를 먹어보려고 침략의 마수를 뻗치고있던 시기였다.

뛰여난 재능과 남다른 감수성을 지닌 김옥균은 서울장안에서 세도정치의 페해와 량반관료들의 부패상을 체험하고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운명을 목격하면서 부패무능한 통치배들을 몰아내고 나라와 겨레의 운명을 구원할 굳은 결의를 가다듬게 되였다. 특히 1866년 미제침략선 《셔먼》호의 침입과 그후 프랑스군함의 침공사건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김옥균의 진보적이며 애국적인 사상의 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영향을 준것은 실학사상과 박규수, 류홍기를 비롯한 당시 선진인사들의 사상이였다.

김옥균은 뛰여난 실학사상가였던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며 리조정부의 고관으로서 젊은 량반들속에서 인망이 높던 박규수(1807-1876년)를 통하여 실학자들의 저서들을 비밀리에 얻어보고 큰 사상적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집에 문객으로 드나들던 청년들과도 교제하면서 자신의 식견을 높여나가게 되였다.

김옥균은 20살 전후한 시기부터는 당시 개화사상의 주창자였던 중인출신 지식인 류홍기와 교제하면서 그의 사상적영향을 강하게 받게 되였다. 류홍기는 《문명개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동지를 규합하던중 서울 북촌에서 김옥균을 처음 알게 되고 그와 담화하면서 그의 재능을 인정하였으며 세계각국의 력사와 지리서적들 기타 신서적들을 읽게 하면서 자주 만나 세계의 대세를 설명해주고 국정개혁의 필요성을 력설하였다.

김옥균은 외교관으로서 중국에 왕래하며 근대서양문물과 세계정세에 밝은 오경석과 친우인 류대치의 영향을 받으면서 실학사상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점차 새로운 시대의 요구를 반영한 새로운 사상인 개화사상에로 나아가게 되였다.

김옥균은 개화사상을 품게 되면서 집권자들의 반동적보수정책을 반대하여 적극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개화사상을 품고 대원군의 보수적인 쇄국정책을 적극 반대한 리유로 강릉부사로 있던 오촌 김병기는 파면당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김옥균은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고 더욱 적극적인 활동에 나섰다. 그는 1872년 과거에 장원급제한 후 홍문관 교리, 사간원 정원, 승정원 우부승지 등의 벼슬을 력임하면서 관료로 있던 동료들속에서 자기와 뜻을 같이할 사람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자기와 뜻을 같이할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면 그 신분여하에 구애되지 않았다. 어느 절간에서 심부름하던 아이가 총명한것을 보고 일본까지 데리고 간것은 그 대표적실례의 하나이다. 그는 홍영식, 박영교를 비롯한 혁신관료들과 봉건유생들, 군인들, 상업자본가들, 《천민》들, 왕의 측근자들인 환관과 궁녀 등 각계층을 망라하여 1870년대초 개화파를 형성하였다.

개화파는 자기의 비밀조직인 《충의계》를 뭇고 나라의 근대화를 실현하기 위한 국정개혁활동을 힘있게 벌려나갔다. 그 준비사업으로서 자기의 세력을 확대하여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사업을 적극 벌리는 한편 계몽서적인 《기화근사》를 써서 개화사상을 보급선전하였다. 그리고 국왕과 정부안의 혁신관료들을 추동하는 방법으로 국가기구도 점차 개조해나갔다. 1880년 12월 국내외의 정치와 군사관계사무를 총체적으로 관할할 권한을 가진 통리기무아문을 창설하게 하였으며 1881년에는 5영을 2영으로 개편하고 별기군을 내오게 하였다. 또한 개화파계렬의 청년들로 외국에 류학과 실습을 보내여 근대적지식을 배워오도록 하였다.

김옥균은 이미 근대적개혁을 수행한 나라들의 정형을 료해하기 위하여 1870년대말에 자기의 벗인 리동인을 일본에 보내여 여러해에 걸쳐 그 나라의 형편을 조사연구하게 하였다. 그리고 1881년 12월에는 자기가 직접 일본에 파견되는 조선사신을 따라가서 그 나라의 국가기구와 경제문화형편을 자세히 살피였고 당시 일본의 이름난 정치활동가들과 만나 세계정세와 동방정세에 대하여 토론도 하였고 조선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은근히 타진해보기도 하였다. 일본에 대한 현지료해이후 김옥균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반드시 우리 나라에서도 근대적인 개혁을 실시해야 하겠다는것을 더욱 굳게 결심하게 되였다. 동시에 조선에서의 부르죠아개혁의 실현을 위하여 일본세력을 리용할수 있다는 생각도 가지게 되였다.

김옥균은 일본에 머물러있는 기간 한주에 한번씩 그곳에 배우러 와있던 우리 사관학생들을 만나 그들앞에서 조선에서의 부르죠아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그들을 애국주의사상으로 교양하였다. 그는 천하의 만국이 다 독립하였는데 우리 나라만이 청나라의 혹심한 간섭하에 놓여있으니 하루바삐 청나라세력을 몰아내야 한다는것과 그를 몰아내지 않고는 독립이란 있을수도 없으며 생각할수도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나라의 자주독립과 부강발전을 위하여서는 시급히 국정개혁을 단행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그들의 애국심을 불러일으켰다.

1882년 군인폭동이후 김옥균은 부르죠아개혁활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벌려나갔다. 이무렵 그는 통상교섭사무아문 참의, 리조참의, 호조참판 등의 직책에 있으면서 개화파성원들을 이끌었다.

김옥균은 수구파들이 아직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있는 조건에서 국왕을 설복하여 움직이게 하는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별입시의 자격을 얻어 국왕을 자주 만나 밖으로는 청나라의 내정간섭을 배격하고 안으로는 시급히 국정을 개혁하여 부강발전을 도모하여야만 오늘의 복잡한 세계정세에 대처하여 나라의 자주적지위를 확고히 보장할수 있다는것을 해설하였다.

김옥균은 1883년 봄에 국왕을 설복하여 량반, 중인, 상인출신의 유능한 청년 61명을 선발해서 일본에 파견하여 새 문물제도를 배우게 하였다. 1882년 7월에 나라의 모든 문제를 토의결정하는 협의제기관인 동시에 사실상의 최고권력기관이였던 기무처가 조직된데 이어 새로운 신문, 서적출판사업을 맡아보는 박문국이 설치되였다. 1883년 10월부터는 박문국에서 처음으로 되는 근대적신문 《한성순보》가 발간되였는데 이것은 당시 인민들이 세계의 정세를 알고 국내의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는데서 큰 역할을 하였다.

김옥균은 동료들이 차지하고있는 관직을 리용하여 우선 서울에서부터 경순국, 치도국 등을 설치하여 경찰제도와 도로, 토목사업에 대한 개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개화파의 개혁활동은 수구파들의 방해책동으로 난관에 봉착하게 되였다. 수구파들은 개화파들이 수도에 있는것이 위험하다고 인정하고 1883년 여름에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의 요인들을 지방과 국외로 내보내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때 김옥균은 동남제도 개척사 겸관 포경사로 임명되였다.

김옥균은 락심하지 않고 오히려 이 지위를 리용하여 동남 여러 섬들의 개척사업과 동해안의 포경사업을 발전시키며 이 리권을 리용하여 개혁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개화파들에 대한 수구파들의 박해는 1883년말경부터 더욱 로골적으로 감행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성원들은 자기들의 뜻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수구파를 타도하고 정권을 장악하는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였다.

바로 이러한 시기 국내외정세는 개화파들에게 유리하게 전변되여갔다. 1884년 봄에 청나라정부내에서 정변이 일어난것과 관련하여 민씨일파의 정치적적수인 대원군의 귀국설이 나돌아 수구파를 불안속에 몰아넣었다. 또한 청나라와 프랑스간의 전쟁에서 청나라군이 계속되는 패전을 당하고 이로 말미암아 수구파정권에 대한 청나라의 《지원》도 약화되게 되였다.

김옥균과 개화파성원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이때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성원들은 좋은 기회를 리용하여 사전준비를 철저히 갖추고 특히 우리 나라의 기본 로력대중이였던 농민들을 수구파반동세력을 반대하는 싸움에로 불러일으키기 위한 준비를 갖추어야 하였었다. 그런데 개화파들이 우로부터의 정변을 서두른것은 그들의 계급적제한성의 발로로서 큰 실수가 아닐수 없었다.

김옥균은 우선 각지에 분산되여있던 동료들과 일본에 류학중인 사관학교 학생들을 모두 서울에 집결시켜 정변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하도록 준비시켰다. 한편으로는 국왕을 자주 만나 국정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국왕을 움직이려고 하였다.

김옥균은 또한 청나라가 수구파를 적극 지지하고있는 조건에서 청나라와 일본간의 모순을 리용하여 일본군대를 정변에 인입시킬 공작을 하여 성공하였다. 이것은 가능한 일이기도 하였지만 조선에서의 부르죠아개혁의 성공을 바라지 않는 일본이 배신적립장을 취할수 있으리라는것을 예견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것은 커다란 실책이였다.

김옥균은 구체적인 행동계획을 세운 후 1884년 10월 17일 홍영식이 총판이 되여 신축된 우정국준공축하연을 계기로 동료들과 함께 정변을 일으켰다. 이날 밤 김옥균은 홍영식 등 동료들과 함께 국왕 고종을 자기들에게 빼돌리고 민태호, 민영목, 조녕하 등 수구파대신들을 처단함으로써 수구파정권을 뒤집어엎었다. 이것이 바로 력사에 유명한 《갑신정변》이였다.

개화파는 곧 새 정부를 구성하고 10월 18일에 전국에 공포하였다. 이어 그들은 새 정부의 정강토의사업에 착수하였다. 김옥균이 구상하여온 부르죠아개혁방침에 기초하여 정강초안이 작성되였으며 국왕의 승인을 받아 10월 19일 아침에 공포되고 서울시내 각곳에 나붙었다.

새 정부가 채택한 14개 조로 된 정강은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근대적인 국가 및 사회경제제도를 창설할것을 목적한것으로서 부르죠아적 및 애국적성격을 가진 정부강령이였다. 정강의 부르죠아적성격은 봉건사회를 점차 자본주의사회로 변혁시킬 사명을 담당할 국가권력과 그 기관들의 창설을 예견한것, 봉건사회태내에서 장성한 생산력발전을 봉건적질곡으로부터 해방시켜 국가권력을 공간으로 그것을 급속히 장성시킬 방책들을 예견한것, 자본주의생산과 관련된 상품류통의 실현에 적응하는 소유관계와 법률적, 정신적 및 사회적질서를 수립할것을 예견한데서 명백히 찾아보게 된다.

정강의 반침략적인 애국적성격은 독립국가로서의 존엄과 체면을 손상시키는 과거의 외교관계의 모든 관례들을 청산하고 평등과 호혜의 원칙에서 국가관계를 맺을것을 예견한것, 나라의 국방력을 강화하며 근대적군대를 건설하여 민족적자주권을 무력으로 담보할것을 예견한것 등에서 표현되였다.

그러나 정강은 개화파성원들의 계급적제한성으로부터 부르죠아개혁의 기본내용으로 되여야 할 토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 등의 제약성도 드러내였다.

이러한 제약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 력사발전의 합법칙적요구를 반영하여 근대 우리 나라 발전의 방향을 밝혀주었다는데 새 정부정강의 중요한 력사적의의가 있다.

하지만 새 정부는 수구파잔당들의 준동과 청나라침략군대의 간섭, 일본군대의 배신행위로 인하여 10월 19일에 붕괴되고말았다. 김옥균을 비롯한 일부 개화파성원들은 앞날을 기약하고 인천방향으로 몸을 피하였으며 홍영식과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적들에게 무참히 살해되였다.

우리 나라에서의 첫 부르죠아개혁운동이였던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끝나고말았으나 김옥균은 투쟁을 멈추지 않았으며 그 지도사상으로 된 개화사상은 이후 부르죠아개혁운동을 추동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김옥균은 일본의 배신행위에 격분을 금치 못하면서도 앞으로의 투쟁을 위하여 일시 일본으로 몸을 피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후 일본에서 그의 활동은 순탄치 않았다.

수구파일당은 김옥균을 해치려고 갖은 모략을 다하였고 일본반동정부는 망명한 그가 나라의 근대화를 위한 활동을 벌리지 못하도록 각방으로 악랄한 책동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속에서도 김옥균은 조금도 주저하거나 물러섬이 없이 자기의 초지를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갑신정변》을 총화한 《갑신일록》을 집필하여 세상에 내놓았고 국내와 비밀리에 련계를 가지고 부르죠아개혁기운을 조성하기 위한 투쟁을 벌리였다.

김옥균은 조선과 일본, 청나라의 반동통치배들이 공모결탁하여 망명중의 개화파들을 살해하려고 내아문 주사 지운영을 자객으로 일본에 침투시킨 사건이 드러나게 되자 이 사건을 세상에 폭로하고 적들의 책동을 제압하기 위하여 1888년 6월 조선국왕과 청나라의 리홍장에게 편지를 보내였다. 한편으로 그는 부르죠아개혁수행에 필요한 자금을 해결하기 위한 활동도 벌리였다.

그러나 그의 정치활동은 걸음걸음 내외반동들의 방해책동이 뒤따르는 속에서 진행되였다. 그는 1886년 7월까지 일본의 도꾜에 있다가 일본반동지배층의 책동으로 그해 8월부터 1888년초까지 태평양의 절해고도인 오가사하라섬에, 그후 1893년까지는 혹가이도에 강제추방되여 사실상 연금생활을 강요당하였다.

김옥균은 원쑤들의 집요한 방해책동이 계속되는 일본땅에서는 도저히 자기의 정치활동을 계속해나갈수 없다고 생각하고 1894년 2월 상해로 갔다.

허나 그는 거기서 원쑤들의 검은 마수가 자기를 기다리고있을줄은 미처 다 몰랐다. 김옥균이 활동무대를 청나라로 옮긴다는 정보를 입수한 리조 수구파반동정부는 개혁운동의 중심인물이며 갑신정변의 조직자인 김옥균을 제거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자객을 상해로 파견하였던것이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옥균은 상해에 도착한 다음날인 2월 22일 일본인려관인 《동화향행》에 려장을 풀고 새로운 투쟁의지를 가다듬고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리조정부가 파견한 자객 홍종우가 나타났다. 이 비렬한은 김옥균의 가슴에 총탄을 쏘아박았다.

44살, 애국의 더운 피로 심장을 불태우며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부르죠아개혁활동에 심혼을 바쳐온 김옥균은 내외반동들의 비렬한 책동에 의하여 한창나이에 아까운 인생을 끝맺게 되였다.

리조봉건통치배들은 그를 살해한것으로도 모자라 그의 시체를 청나라정부로부터 넘겨받아 양화진에서 3월 14일에 참형을 가하는 악행을 저질렀다.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갔지만 그의 일생은 결코 헛된것이 아니였다. 그의 뜻은 그후 1894년 갑오농민전쟁에 사상적영향을 주었고 혁신관료들인 김홍집, 어윤중에 의하여 계승되여 1894년 부르죠아개혁을 통하여 일시 빛을 보게 되였다.

 

나라와 겨레를 위해 바친 생이 의의깊기에 그의 이름은 오늘도 사람들의 기억속에 오래도록 남아있는것이다.

 

  



43)갑오농민전쟁의 지휘자 전봉준 

 

19세기말엽에 이르러 우리 나라는 부패무능한 봉건통치배들의 사대매국행위와 일본을 비롯한 유미자본주의렬강들의 계속되는 침략과 간섭으로 하여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되였다.

바로 이러한 때 나라와 겨레의 운명을 구원하고저 정의의 기발을 높이 추켜들고 력사의 부름앞에 한몸 서슴없이 내세운 단군의 장한 후손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1894년 갑오농민전쟁의 지휘자 전봉준이였다. 전라도 고부에서 지펴진 한점의 불꽃은 그의 지휘밑에 료원의 불길처럼 타번져 우리 나라 민족운동사에서 가장 대규모적이고 가장 견결하였던 반침략반봉건투쟁으로 력사에 기록되게 되였다.

원쑤들이 그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던 전봉준(1854-1895년), 그의 자는 명숙, 호는 해몽이다.

그의 출생지와 관련하여서는 세가지 설이 전해지고있다. 그가 전라도 전주태생으로서 어려서 태인현 감산면으로 이주하였다는 설과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당촌부락에서 출생하였다는 설, 정읍군 리평면 조소리(옛 고부군 궁동면)에서 태여났다는 설이다.

이 세가지 설가운데서 전주출생설은 후기 전주인사들이 만들어낸 설로 생각된다. 그리고 고창읍 죽림리 당촌출생설은 옛날 당촌에 20여호의 전씨마을이 있었고 갑오농민전쟁때 동학농민군의 두목들이 많이 배출되였다는 옛날 늙은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전봉준과 밀접한 연고가 있는 곳인것만은 틀림없다. 또 리평면 조소리설은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또는 전승록)이 고부군 향교의 장의였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그들의 선대로부터 대대로 살아온 곳이라는것이 분명하다. 어쨌든 전봉준의 출생지와 관련하여서는 아직 확정된것이 없고 앞으로의 연구성과를 기다릴수밖에 없다.

전봉준의 본관은 천안 전씨로서 그 시조는 전악이다. 그는 고려 개국공신으로서 삼사좌복야를 지냈으며 천안군으로 봉해졌으므로 그 후손들을 천안 전씨라고 한다. 그 후손가운데 대표적인물로서는 전신, 전상의, 전동흘 등이 유명하다. 또 근대에 들어와서는 전봉준이 이름을 떨치였다.

전신은 고려 충숙왕(1314-1330;1332-1339년)때 진현관 대제학, 동지밀직사사를 지냈으며 전상의는 1603년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1627년 《정묘호란》때 구성부사로 평안도병마절도사 남이흥, 안주목사 김준과 함께 안주성을 지키다가 순절했다. 그리고 전동흘은 효종(1650-1659년)때 무과에 급제하고 특히 용병에 능하여 리상진, 소두산과 함께 《3걸》이라고 불리웠으며 현종(1660-1674년)때 7도 병마절도사를 지내고 숙종(1675-1720년)때에는 총융사 훈련대장을 력임하였다. 이밖에도 천안 전씨후손가운데는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순절한 전몽성(현감)이 있다.

이처럼 대대로 무로써 많은 공을 세운 가문에서 태여난 전봉준이였기에 농민군의 재능있는 지휘관으로서 명성을 떨칠수 있은것이다.

전봉준은 체구가 자그마하였기때문에 녹두라는 별명이 붙었고 후날에는 녹두장군으로 불리우게 되였다. 이 녹두장군이 바로 가문의 전통을 이어 군사적재능으로 세상을 들었다 놓았으니 그 일대기를 여기에 펼쳐보자.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의협심이 강한 사람으로서 고부군수의 탐오한 행위에 격분하여 폭동을 일으켰다가 잡혀 피살되였다고 한다. 다른 설에 의하면 백성들의 소송대표가 되여 군수에게 항소하다가 붙잡혀 죽었다고도 한다.

어쨌든 이런 애국적가문의 전통과 의로운 인사인 아버지의 영향하에서 전봉준은 애국에 살고 불의에 항거하는 정의의 인간으로 성장하게 되였다.

비범한 재능과 학구적인 정열을 지녔던 전봉준은 어려서부터 동년배들가운데서 뛰여났다. 그는 벌써 1859년 6살때 서당에 들어가 글공부를 하였으며 13살때에는 《백구시》라는 한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래웠다.

 

  모래불을 고향삼아 마음껏 노닐고

  눈같이 흰나래 가는 다리로 맑은 가을날 홀로 섰구나

  부슬부슬 찬비속에 홀로 꿈꾸고

  때때로 고기잡이 가고나면 언덕에 노니네

  많고많은 물가의 바위 낯이 익었고

  얼마나 많이 풍상을 겪었던지 머리도 희였구나

  마시고 좋으며 쉴새없으나 지내하지 않으리니

  강호의 어족들아 깊이 근심 말아라

 

전봉준은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기 전 1890년경에 동학에 입도하고 그후 곧 고부접주가 되였다. 그는 고부군 궁동면 양교리(정읍군 리평면 장내리 조소리)에 거처를 정하고 훈장노릇을 하면서 동료들을 규합하였다. 그는 생활을 검박하게 하였고 집은 가난하여 6명가족이 조반석죽의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1893년에 들어서며 고부군 농민들의 원성은 높아갔다. 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에 더는 견딜수 없었기때문이였다.

전봉준은 후에 폭동을 일으키게 된 동기를 묻는 법정진술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때 고부군수가 지나치게 거두어들인것이 몇만냥이여서 백성들의 원한이 컸기때문에 일을 일으켰다.》

이어 그는 조병갑의 착취행위를 낱낱이 까밝히고 《백성들이 원망하는고로 백성을 위해 해를 제거하려고 기병하였다.》고 자기의 기병동기를 명백히 밝혔다.

1893년 11월과 12월 전봉준은 두차례에 걸쳐 농민들을 대표하여 군청에 찾아가 항의문을 제출하려다가 쫓겨나기도 하였다.

전봉준은 한편으로 봉건적학정을 반대하여 거사할 준비를 착실히 갖추어나갔다. 그 준비사업의 일단을 보여주는 《사발통문》이 최근에 발견되였다. 이 《사발통문》은 1893년 11월로 날자가 기록되여있고 사발식으로 둥글게 그린 원형안에 전봉준, 송대화, 최경선 등 20명의 서명이 있다. 그에 의하면 백성들은 곳곳에 모여 《났네 났어, 란리가 났어. 에이 참, 잘 되였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사람이나 어디 남아있겠나.》 하며 기회가 오기만 기다렸다. 이때 도인(동학교도)들은 선후책을 토의결정하기 위하여 고부서부 죽산리 송두호집에 도소를 정하고 매일 모여 행동방향을 결정하였다. 토의결정된 내용을 보면 첫째로,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하며 둘째로,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하며 셋째로, 군수에게 아첨하며 인민을 침탈한 탐욕스런 아전들을 징계하며 전주영을 함락하고 수도로 곧바로 진격한다는것이였다. 마지막에 군사적재능이 있는 령도자를 추천한다고 되여있다.

이로부터 알수 있는것처럼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교도들은 인민들의 항거분위기에 편승하여 봉건정부를 공격대상으로 한 대규모의 농민전쟁을 기병직전에 벌써 설계하고있었다.

자그마한 키에 과묵한 성격의 소유자인 전봉준. 그는 이 썩어빠진 사회를 그대로 두고서는 고부군안의 농민들만이 아니라 전체 조선민족을 살릴수 없고 나라를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구원할수 없다는것을 절감하고있었다.

1894년, 제 명을 다 산 봉건사회의 밑뿌리를 뒤흔들어놓고 우리 조국을 감히 넘보는 침략의 무리들에게 조선민족의 애국적기개를 시위한 갑오농민전쟁이 벌어지고 그 영향하에 갑오개혁이 실시된 거창한 해, 근대 민족운동사에 피의 교훈을 남긴 그 의의깊은 해가 계명산천에 서서히 밝아왔다.

새해초부터 전봉준의 거처로는 두세명의 낯선 방문자들이 때없이 찾아들었다. 전봉준은 동학교도이며 벗들인 정익서, 김도삼 등과 의논하여 민페를 바로잡는 의로운 기치를 들고 고부군청을 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동학의 포, 접조직망을 통하여 많은 동료들을 규합해갔다. 당시 농민들의 련대를 실현하기 위하여 의거할수 있는것은 동학조직망뿐이였던것이다.

폭동준비가 완료되자 전봉준은 비장한 결심을 가다듬고 부모의 묘를 찾아가 고별의 인사를 올리였다.

1894년 1월 10일 새벽 첫 닭이 울자 때를 기다리고있던 동학교도들과 농민들은 흰 수건을 머리에 동이고 괭이나 죽창을 들고 마항시장으로 모여들었다.

전봉준은 그 전날 밤 태인 주산리에 사는 접주 최경선의 집에서 동학교도인 장정 300명을 모아가지고 그밤으로 30리 되는 마항시장으로 달려와 그곳 감나무밑에서 대기하고있었다.

전봉준은 총을 가진 부하들을 사방에 세워 망을 보도록 하고 큰소리로 《어린아이, 녀자, 로약자들은 물러가라!》고 명령한 다음 조병갑의 불법탐학을 일일이 까밝히고 그의  죄를 다스리자고 호소하였다. 조병갑의 폭정에 시달리던 군중들은 열렬한 박수로 여기에 호응하였다.

농민군은 전봉준의 지시에 따라 두길로 나뉘여 고부읍을 향하여 노도와 같이 진격하였다. 그들은 도중에 있는 대밭에서 많은 죽창을 만들어 기세를 올렸다.

농민군은 3문으로 쳐들어가 고부읍성을 점령하고 전봉준의 지시에 따라 감옥을 파괴하여 갇혀있던 인민들을 석방하고 무기고를 털어 무장을 강화한 후 관리와 아전들을 모두 잡아다 문초하였다. 그리고 비법적으로 략탈해간 수세미를 농민들에게 반환하게 하고 백성들의 원망의 대상이 되여온 만석보도 파괴해버렸다.

전봉준은 고부읍안팎에 군영을 설치하였는데 농민군의 《진영이 정숙하고 호령이 명백하여 다른 민란군과는 달랐다.》고 한다.

전봉준은 폭동의 성과를 확대하기 위한 조직사업을 면밀하게 짜고들었다. 그리하여 이 폭동은 갑오농민전쟁으로의 확대발전을 위한 도약대가 되였다. 이무렵 인민들속에서는 이런 노래가 나돌았다.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 가보리

 

여기서 《가보세》는 《갑오세》 즉 《갑오년(1894년)》을, 《을미적》은 《을미년(1895년)》을, 《병신》은 《병신년(1896년)》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이 투쟁을 꾸물거리며 병신년까지 끌지 말고 갑오년에 끝장을 내야 한다는것, 이를 위해 국민이 총 궐기를 해야 한다는 사상이 담겨져있다.

폭동의 성과는 확대되여 1월 14일현재 농민군에 가담한 촌락은 15개 촌에 달하고 봉기군수는 1만여명으로 늘어나게 되였다.

1월 17일, 전봉준은 농민군의 주력부대를 마항시장으로 이동시키고 일부를 고부읍에 남겼다. 같은 날 무장의 접주인 농민군의 부장 손화중은 수천명을 거느리고 태인, 부안 등지를 공격하여 페정을 철페하고 관리들이 비법적으로 략탈한 재산을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농민들의 지지환영속에 폭동의 불길은 각지로 퍼져갔다.

전봉준은 마항시장에서 농민군을 개편하고 서울에까지 올라가 임금에게 사태의 진상을 말하고 병력으로 대항하면 맞서싸우자고 하면서 이런 기개없이 거사했다면 무익한것이라고 하는 강경파에게 아직은 정부의 태도를 지켜보면서 전국각지에서 동료를 규합하여 힘을 합친 후 여유있게 대처하자고 달래였다.

전봉준은 전라감영에서 은밀히 파견한 50명의 군사를 모조리 체포처형하고 1월 25일 백산으로 진지를 옮겼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비결에 의하면 《고부 백산은 가히 만민을 살릴수 있다.》고 전해내려오는 곳이였다고 한다.

급보를 받은 리조정부는 2월 15일 고부군수 조병갑과 전라도감사 김문현을 처벌한 후 장흥부사 리용태를 안핵사로 임명하여 이 폭동을 진압하게 하였다.

그후 새로 고부군수로 부임한 박원명의 효유로 고부에 남아있던 잔존부대는 흩어져돌아갔으나 백산의 주력부대는 정부의 태도를 관망하면서 군세를 유지하고있었다.

그런데 후에 내려온 리용태는 군졸들을 여러 마을에 나누어보내여 모든 죄를 농민들에게 들씌우며 남자들은 닥치는대로 구타하고 물고기꿰듯 묶어 끌어갔으며 남자들이 없을 때에는 부녀자들을 죽이고 가옥들을 불태워버리는 등 갖은 악행을 다 저질렀다. 그리고 제놈은 전주 한벽당에서 기생들을 끼고 향락에 취해있었다.

농민들의 분노는 나날이 고조되였다.

사태를 지켜보고있던 전봉준은 썩어빠진 이 제도를 개혁하지 않으면 《보국안민》, 《광제창생》의 동학리념은 물론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원하고 백성들을 잘살게 해보려던 자기의 초지를 실현시킬수 없음을 절감하게 되였다.

그는 이웃고을의 동학접주들과 련계를 취하면서 《보국안민》, 《광제창생》을 위해 다시 총 궐기할것을 호소하  였다.

한편 3월 1일, 농민군은 줄포의 세곡창고를 습격하고 2개월분의 군량을 확보하였다. 고부를 다시 점령한 농민군은 안핵사 리용태를 추방하였고 태인에서 봉기한 농민군은 현감 리면주를 체포한 후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하고 고부 백산으로 향하였다.

3월 21일, 전봉준은 호남창의 대장소의 명의로 투쟁의 목적을 밝히는 격문을 발표하였다.

《우리가 정의를 위하여 여기에 이른것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데 있지 않고 백성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우에다 두려고 하는것이다. 안으로는 악질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려고 한다. 량반과 부자들앞에서 고통받는 민중들과 방백과 고을원의 밑에 굴욕을 받는 아전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들이다.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에 일떠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돌이킬수 없을것이다.》

이 격문은 농민을 비롯한 피압박피착취근로대중은 물론 지방의 하층관리인 아전들까지도 투쟁에 합류할것을 호소함으로써 극소수 반동적인 량반관료배들을 고립시킬것을 목적하고있다. 격문은 인민대중의 반침략반봉건적투쟁의지를 반영하고있는것으로 하여 광범한 인민대중을 농민전쟁에 참가시키는데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3월 25일, 군중의 추천에 의하여 전봉준이 총대장이 되고 손화중, 김개남이 부대장격인 총관령으로, 김덕명, 오시영이 총참모로, 최경선이 령솔장으로, 송희옥, 정백현이 비서로 되였다.

전봉준은 부대를 편성하고 네가지로 된 행동방침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첫째로,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가축을 죽이지 말며, 둘째로, 효성과 충성을 다하여 세상을 구원하고 백성을 편안케 할것이며, 셋째로, 왜놈과 서양오랑캐를 내몰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으며, 넷째로, 군사를 몰아 서울에 쳐들어가 특권량반들을 없애치운다는것이였다.

백산에서 발표된 격문과 농민군의 행동방침은 농민군이 봉건통치배들과 외래침략세력을 격멸하고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내며 인민들을 도탄에서 구원하기 위한 정의의 애국전쟁을 선포한 엄숙한 선언이였다.

이 투쟁에 호응하여 전국각지에서 각계각층 인민들이 농민군의 《보국안민》의 기치아래 모여들었다. 그들가운데는 장흥의 80여살 난 늙은이도 순천의 14살 난 소년도 있었다. 이때의 상황에 대하여 기록에서는 《촌마다 포가 설치되고 기발을 들고 서로 호응하였다.》고 전하고있다.

농민군의 봉기소식과 함께 그 지휘자 전봉준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들도 널리 전해졌다.

《전대장은 참말로 영웅이요. 이인으로서 신출귀몰의 재주가 있고 바람을 타고 구름을 휘여잡는 묘술이 있으며 천하의 장사요 세상에 없는 영웅이라 총검에 맞아도 죽지 않으며 총구멍에서 물이 나오게 하는 법술이 있어 조화가 비상하더라.》

당시 백산은 흰옷을 입은 농민군천지였는데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라는 말이 널리 퍼졌다. 이것은 서면 모두가 흰옷을 입었기때문에 백산이 되고 앉으면 모두 참대창을 들었기때문에 죽산이 된다는 소리이다. 이처럼 농민군의 기세는 대단하였다.

한편 농민군이 궐기하여 부안, 금구를 점령하였다는 급보를 받은 전라감사 김문현은 영장 리경호, 김달관, 리광양, 리재섭, 송봉수 등에게 지시하여 전주영군사와 보부상의 혼성부대(전주영 제1대대 500명, 제2대대 300명, 보부상 별동부대 800명)를 거느리고 농민군을 치게 하였다. 리광양 등은 정읍을 거쳐 백산에서 부안으로 통하는 도로로 진출하였으나 4월 6일 도교산에 집결한 농민군의 반격에 의하여 황토현(고부에서 20리)에서 격멸되였다. 이 싸움은 전봉준의 군사적재능을 과시한 대표적전투들가운데 하나이다.

사실 이때 관군은 수적으로 농민군보다 적었지만 잘 훈련되고 무장장비도 좋았다. 적의 장점과 약점, 농민군의 장점과 약점을 타산한 전봉준은 유인전술로 적을 소멸하기로 결심하고 주력부대를 두승산계곡 시목리로 이동시켰다. 그는 이곳의 유리한 지형을 리용하여 두승산 동쪽계곡에서 관군을 격멸하기로 계획한것이다.

농민군은 황토현으로 관군을 유인하고 거짓 패하여 시목리로 철수하면서 매복하였다. 4월 6일 관군은 황토현에 도착하였다. 농민군은 곧 관군을 습격하려고 하였으나 전봉준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황토현을 사자봉(獅子峰)이라고도 하였는데 농민군은 사자(死者)와 통하니 여기는 관군의 시체를 묻을 곳이라고 하여 만만한 투지에 넘쳐있었다.

이날 밤, 보부상으로 가장한 농민군은 관군의 진중에 깊숙이 들어가 동태를 살펴 본부에 보고하였다. 관군은 보부상으로 보초를 세워놓고 술과 고기를 진탕치듯 먹어대고 밤이 깊어서는 모두 곯아떨어졌다.

전봉준은 바로 이때야말로 승패를 결정할 좋은 시각으로 간주하고 농민군에 공격명령을 내렸다. 7일 새벽 농민군은 어둠을 타서 조용히 두개 대로 나뉘여 관군의 영을 습격하였다. 불의의 습격으로 관군은 대참패를 당하고 780명의 병력과 많은 군사장비를 잃었다.

이 싸움에는 농민군만이 아니라 관군의 무자비한 재물략탈과 부녀겁탈, 살인행위에 불만을 품은 촌민들까지 적극 호응하였다.

이 싸움을 통하여 리조정부는 당황망조해지고 농민군의 사기는 부쩍 오르게 되였다. 황토현싸움의 승리에 대한 소식은 전국각지로 퍼져가고 앞으로 조선은 전봉준의 손에 달렸고 세상은 농민군의 세상으로 될것이라는 풍설도 돌았다.

승리의 개가높이 농민군은 곧바로 정읍으로 쳐들어갔다. 이것은 전봉준이 곧 전주를 점령하기 위하여 취한 작전적조치였다. 그런데 4월 5일 군산에 상륙한 리조정부가 파견한 량호초토사 홍계훈이 4월 7일에 전주로 입성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화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라도 서해안지방의 여러 군, 현으로 방향을 돌리게 되였다.

4월 8일 흥덕읍을, 4월 9일에는 무장현으로 진입하면서 농민군대오는 1만여명으로 장성하고 무장장비는 《혹 갑주를 갖추고 각자 총과 창 가졌다.》고 할 정도로 강화되였다.

전봉준은 무장읍밖의 30리 되는 곳에 있는 호산봉에 진을 치고 직접 창의문을 지어 《의로운 기발을 쳐들고 보국안민을 위해 생사를 판가리》할 맹세를 굳게 다지며 인민들에게 투쟁에 떨쳐나설것을 호소하였다.

전봉준은 농민군을 거느리고 4월 13일 령광군을, 17일에는 함평현을 점령하였다.

농민군의 맹렬한 진격으로 전라도 남부지방의 여러 고을이 농민군의 수중에 장악되자 호남지방은 순식간에 농민전쟁의 불길에 휩싸이게 되였다.

농민전쟁의 불길은 충청도지방에도 급속히 파급되여 공주, 청산, 옥천, 문의, 보은, 목천, 토성 등 군, 현을 휩쓸었다. 봉건정부의 지방통치는 마비상태에 빠졌다.

전주감영에 둥지를 틀고있던 홍계훈은 증원병을 요구하면서 외국군대를 청해오자고 계속 애걸하는 매국배족행위를 감행하였다.

농민전쟁의 확대에 당황망조한 봉건정부는 군사적대책과 함께 일련의 회유기만조치들도 취하였다.

농민군은 4월 23일 장성군 월평장 황룡촌에서 대포와 기관포까지 갖춘 잘 무장된 관군의 불의습격을 저지시키고 반공격으로 섬멸적타격을 가하였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대관 리학승을 비롯한 수많은 정부군을 살상하고 대포 2문과 각종 무기, 탄약을 대량적으로 로획하였다.

농민군은 기세충천하여 4월말 호남지방에서의 봉건통치의 아성인 전주를 공격하였다. 이때 전주성은 거의나 무방비상태에 있었다. 전주감영군대는 이미 궤멸된 상태였고 홍계훈이 거느린 정부군은 장성전투에서 섬멸적타격을 받고 패잔병들은 금구계선에 주저앉아있었다. 그리고 정부가 급파한 증원군은 미처 도착하지 못한 상태이고 전라감사 김문현이 철직된 후 신임감사 김학진은 아직 부임하지 않은 상태이므로 전주감영의 통치기능은 혼란상태에 있었다.

농민군이 노린것은 바로 적들의 이러한 약점이였다.

4월 27일, 농민군은 로획한 포를 발사하는것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단숨에 성을 점령하였다.

전봉준은 지휘처를 선화당에 정하고 성의 방비대책을 취하는 한편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 악질관리들과 부호들을 징벌하며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빈민들을 구제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전주점령은 농민전쟁이 개시된 이후 농민군이 거둔 가장 큰 성과로서 농민군의 위력을 과시하고 봉건정부에 심대한 정치군사적타격을 주었다.

전봉준은 전주성밖의 완산에 진지를 차지한 정부군이 무차별적인 총포사격으로 가옥과 력사적인 건물들을 파괴하자 이에 항의하면서 5월 1일과 3일 두차례에 걸쳐 반돌격전을 벌리게 하였다. 대담한 두차례의 출격으로 적들에게 준 타격은 심대하였으나 농민군도 500여명이라는 손실을 보게 되였다. 그러나 농민군의 투쟁의지는 더욱 굳세여졌다. 할수없이 홍계훈은 국왕의 명령인 《륜음》이나 《효유문》 같은것을 내돌리며 투항을 설교하고 농민군내부를 와해시켜보려고 하였다.

전주점령직후인 4월 30일 국왕을 우두머리로 하는 친청사대주의자들은 일부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세개에게 청나라군의 출병을 공식요청하는 매국배족행위를 감행하였다.

한편 조선침략야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때를 기다리던 일본침략자들은 일본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밑에 우리 나라에 침략무력을 대대적으로 들이밀었다.

전봉준은 나라와 민족앞에 조성된 엄중한 정세와 농민군자체의 형편을 고려하여 전주성을 주동적으로 내놓아야 한다고 인정하였다. 외국군대의 간섭으로 망국의 위험을 조성한 범죄의 장본인은 매국배족적인 봉건통치배들이였지만 놈들을 반대하는 전쟁을 계속한다면 외래침략세력에 어부지리를 줄수 있었다. 그리고 농민군은 두차례의 출격과 놈들의 계속되는 총포사격으로 일정한 손실을 당하였다.

한편 전봉준이 이러한 결심을 내리게 된것은 봉건정부가 페정개혁을 실시할것이며 농민군에 대한 《죄》를 묻지 않겠다고 약속한것과 관련되여있었다.

민족적위기를 하루빨리 타개하려는 농민군의 정당한 립장과 일시적양보로써 숨돌릴 시간을 얻으려는 봉건통치배들의 교활한 책동은 그 목적과 의도에서 상반되는것이였지만 화의는 급속히 성사되였다.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지휘부는 홍계훈에게 앞으로 시행할 14개 조로 된 개혁안을 제기하고 접수시켰다. 이 개혁안에는 환곡, 전세착취를 규정대로 하고 악질관리들을 철직시키고 지방관리들의 비법행위를 제거하고 협잡으로 농민들을 착취하던 상인들의 활동을 제한하는 등 당시 인민들이 생활상 절박한 요구로 제기하던 내용들이 들어있었다.

전봉준은 농민군을 전주에서 철수시킨 후 봉건정부와 협의된 페정개혁안의 실시를 통제하고 감독할 사명을 지닌 농민대표기관으로서의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렸다.

전라감사 김학진은 전봉준에게 감사가 정무를 보는 《선화당》을 내주고 자기는 그 부속건물인 《등청각》을 쓰는것과 같은 호의도 베풀었다.

전주화의후 전라도 53개 군, 현에는 집강소가 설치되였으나 라주, 남원, 운봉에는 처음에 고을원들의 반대로 설치되지 못하였었다. 전봉준은 최경선에게 군사 3,000명을 주어 라주를 공격점령하게 하였으나 성과가 없자 부하 몇명만 거느리고 찾아갔다. 그는 주저함이 없이 동문으로 들어가 목사의 관사에 이르렀다. 관속들이 크게 놀라고 목사는 당황하여 일어서며 《손님은 어떤 사람이요?》 하고 물었다.

전봉준은 《나는 동학군 대장 전봉준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목사가 당황하여 말을 못하자 전봉준은 《주관은 괴이하게 생각지 말라. 군도 조선사람이요, 나도 또한 조선사람이다. 조선사람으로 조선사람 대하기를 어찌 이와 같이 섭섭하게 하는가! 지금 우리 나라는 외세가 독한 손을 내밀어 침략을 꾀하고있고 국정은 나날이 그릇되여가니 나라의 존망이 목전에 다달으고있는데 군은 아오, 모르오. 어서 빨리 꿈에서 깨여나오!》고 큰소리로 추상같이 웨쳤다.

목사는 전봉준의 름름한 기상과 담력에 기가 질려 머리를 떨구고 그의 말을 듣기만 하였다. 그는 전봉준의 집강소설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에 수긍하였다.

이처럼 전봉준의 대담한 유세로 견고한 라주성은 한사람의 사상자도 내지 않고 농민군의 수중에 장악되게 되였다. 이것은 라주와 남원, 운봉을 장악하던 때에 있은 한가지 사실에 불과하다.

전봉준은 이렇게 페정개혁의 철저한 실시를 위해 한몸의 위험도 마다하지 않고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던것이다.

집강소는 단결과 신분적차별의 페지, 수탈자들의 처벌, 각종 잡세와 채무의 제거, 관리등용에서 지방과 문벌의 차별페지, 대토지소유의 제한 등의 내용이 담긴 이전의 14개 조를 정리한 12개 조의 개혁강령을 제시하고 그 실현을 위해 투쟁하였다. 집강소가 제기한 페정개혁안은 반침략반봉건적내용으로 일관되였으나 아직 그것은 부르죠아적사회정치제도를 세울데 대한 문제는 제기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개혁강령은 이후 혁신관료들이 진행한 1894년 부르죠아개혁을 추동하는 강력한 원동력으로 되였다.

집강소는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묵은 채무관계를 없앴으며 지방관청과 민간에 남아있던 무기를 회수하여 농민군의 장비를 보강하고 반동관료들과 악질지주, 부호들의 반항으로부터 집강소를 보위하기 위한 수성군을 조직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일련의 제한성은 있으나 집강소의 활동과 그의 개혁강령은 반침략반봉건투쟁이 종전보다 한단계 심화되였다는것을 보여주었다. 사회발전의 질곡으로부터 봉건제도를 무너뜨리는 투쟁이 농민대중에 의해서 줄기차게 심화될수 있은것은 그들이 투쟁과정에 각성되고 김옥균의 개화파의 사상적영향을 받게 된 사정과 관련되여있었다. 당시 《희생된 김옥균의 혼이 폭동자들가운데 나타났고 또한 지금까지 무적의 대군을 지휘하고있다.》는 말이 국외에까지 퍼지고있었던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였다.

농민군이 바라던것과는 달리 사태는 더욱 엄중해졌다. 간악한 일제는 농민군의 정화로 출병구실이 없어지자 무력을 동원하여 왕궁을 습격하고 리조봉건정부를 가로타고앉아 조선군대의 무장을 해제시켰으며 중일전쟁을 도발하고 국토를 황페화시켰으며 전쟁수행에 필요한 인적 및 물적자원들을 마구 략탈하였다. 부패무능한 봉건통치배들은 일제의 만행에 항거할 대신 그에 투항굴종하였다.

전봉준은 사태의 엄중성을 절감하고 또다시 거족적인 투쟁을 벌릴것을 결심하였다.

9월 12∼13일 전주북쪽 삼계(전라북도 완주군)에서는 동학의 남접(호남의 동학)과 북접(호중<충청북도>이북의 동학)사이에 회의가 열렸다. 남접의 주전론과 북접 상층부의 화평론이 대립되기는 하였으나 회의에서는 농민군의 재궐기가 결정되고 전주로부터 공주-서울에로의 진격로가 결정되였다.

전봉준은 최시형의 영향하에 있는 북접과의 화해를 이룩하는 한편 무기를 장만하고 각계각층 민중을 보국안민의 기치아래 묶어세우기 위한 활동을 벌리였다.

충청도 청산에는 각지에서 모여온 10만의 군중이 집결하였다.

농민군은 10월중순 론산에서 《경병(중앙군-인용자)과 영병(지방군-인용자)에게 고하고 인민들에게 알리노라》라는 호소문을 발표하여 동족끼리 싸울것이 아니라 조선을 식민지화하려고 기여든 일제침략자를 내몰기 위해 싸울것을 호소하였다. 이와 함께 《일인에게 보내는 경고문》을 발표하여 일제의 죄행을 폭로규탄하고 조선에서 당장 침략의 마수를 떼고 제 소굴로 돌아갈것을 엄숙히 경고하였다. 그리고 《박제순에게 보내는 경고문》도 발표하여 박제순을 비롯한 매국역적들의 죄행을 폭로규탄하면서 그들이 민족반역행위를 걷어치우지 않으면 엄벌을 면치 못할것이라고 선포하였다.

농민군에는 농민들만이 아니라 애국적인 량반, 유생들, 아전들, 관군의 병사들도 참가하였다.

전투준비를 끝낸 농민군주력부대는 전봉준의 지휘밑에 10월 21일 론산을 출발하여 진격을 개시하였다.

10월 23일, 농민군은 리인전투에서 일제침략군과 관군을 격파하고 이어 공주를 완전포위에 넣었다.

농민군은 공주에 몰려든 일본침략군 주력부대와 관군의 선봉부대에 대한 주동적인 공격으로 넘어갔다. 농민군은 공주의 산과 들을 덮으며 맹렬히 공격하였으나 대포와 신식무기로 무장하고 유리한 지형을 차지한 일제침략군의 저항으로 성공하지 못하고 출발지점인 경천점으로 되돌아왔다.

11월 8일, 농민군은 무너미와 리인에 도사리고있던 관군을 격파하고 11월 9일 공주를 공격하였다. 이후 농민군의 공주공격전에 대하여 당시 《관보》에서는 농민군이 《산마루에 주런이 서서 일시에 총을 쏘고 또 등으로 올라 총을 쏘는데 이렇게 하기를 40∼50차 하니 시체가 본산에 찼다.》라고 전하고있다.

농민군의 이러한 투쟁은 안팎의 계급적 및 민족적원쑤들에 대한 증오의 표시였고 나라와 겨레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애국심의 발현이였다.

그러나 사태는 점점 농민군에 불리해져갔다. 적들의 발악적인 공세로 많은 손실을 당한 농민군은 차후의 투쟁을 계획하며 전면적인 후퇴를 하였다.

전봉준은 싸움에서 비록 패하였으나 뜻을 꺾지 않고 다시 일떠설 준비를 갖추면서 서울의 형편을 알기 위해 상경하려고 하였다. 그는 11월 28일 몇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정읍 립암산성을 거쳐 갈재를 넘어 순창 흥복산속의 피로리(쌍치면 금성리)에 있는 이전 부하 김경천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자는 길가주막으로 안내하여 저녁밥을 시킨 후 기다리게 해놓고 전주퇴교 한신현에게 밀고하였다.

갑자기 포위된 속에서 그는 탈출을 시도하다가 놈들에게 붙잡히게 되였다. 그날은 12월 2일 밤이였다.

전봉준이 서울로 압송되자 리조정부는 농민군이 서울로 침입하여 구출할 우려가 있다고 두려워하면서 그를 일본공사관에 구금시켰다. 이때 일본공사는 그의 재능을 아껴 저들의 심복인물로 만들려고 꾀하며 각방으로 달랬으나 그는 놈들을 상대하지도 않았고 놈들에게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전봉준은 5차의 심문을 받았다. 체포될 때 다리를 상하여 법정으로 출입할 때는 가마를 타고 다녔다.

법관은 갖은 악형과 달콤한 유혹으로 그를 굴복시키려 하였으나 그의 의지를 꺾을수 없었다.

《너는 나의 적이요, 나는 너의 적이다. 내가 너희를 쳐없애고 나라일을 바로잡으려다가 도리여 너희 손에 잡혔으니 너희는 나를 죽일뿐이요, 다른 말은 묻지 말라. 내 적의 손에 죽을지언정 적의 법의 적용은 받지 않을것이다.》

전봉준은 이렇게 근엄하게 웨치고 아예 입을 닫아버리고말았다.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김방서 등 농민군의 다른 두령들도 모두 나라일을 바로잡으려는것이 전쟁을 일으킨 본의였다고 진술할뿐이였다.

전봉준이 일본인병원에서 상한 다리를 치료받고있을 때 일본인들은 그에게 이렇게 권유하였다.

《그대의 죄상은 일본법률로 말하면 상당한 국사범이기는 하지만 사형에까지는 미치지 않게 할수도 있으니 일본인 변호사에게 위탁하여 재판해보는것이 좋을것이다. 또 일본정부의 량해를 얻어 살길을 구하는것이 어떤가?》

전봉준은 이에 대해 《구구한 생명을 위하여 살길을 구함은 나의 본의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그들의 제의를 일축하였다.

그는 1895년 3월 29일 동료들인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한과 함께 교수형을 받았다.

교수대앞에서 법관이 《가족에게 할말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전봉준은 《나는 다른 말은 없다. 나를 죽일진대 종로네거리에서 나의 목을 베여 오가는 사람들에게 내 피를 뿌려주는것이 옳거늘 어찌하여 컴컴한 적굴에서 조용히 죽이느냐.》고 꾸짖었다.

그는 교수대앞에서 《나라 위한 붉은 마음 누가 알아주리오.》라는 마지막시를 남기고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41살이였다.

이처럼 그는 마지막까지 자기의 뜻을 꺾지 않고 애국의 일편단심을 나라에 바쳤다. 하기에 사람들은 애국에 바쳐진 그의 길지 않은 생을 뜨겁게 회억하며 그에 대한 가지가지 전설과 이야기, 노래를 엮어 청사에 그의 업적을 길이 전하였다. 그가운데 파랑새민요는 사람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지던 노래이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말아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여기서 파랑새는 청나라군사를, 녹두는 전봉준을 가리키며 청포장사는 대중을 의미하는것으로 해석되고있다. 노래의 뜻은 새떼처럼 밀려드는 청나라군사들은 참다못해 일어난 농민군을 진압하려 말라, 농민군의 지휘자 전봉준이 쓰러지면 또다시 착취와 빈궁속에 헤매여야 한다는것이다.

이 노래를 통하여 알수 있는것은 당시 인민들이 전봉준을 희망의 상징으로 떠받들고있었다는것이다. 전국각지의 인민들이 그를 신뢰하고있었다는것은 다른 지방에서 얼마간씩 변형되기는 하였지만 파랑새노래가 널리 불리워진 사실을 통하여 알수 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깝죽깝죽 잘 논다만

  녹두꽃을 떨구고서

  청포장수 부지깽이

  맛이 좋다 어서 가라

  (원주지방)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잎에 앉은 새야

  녹두잎이 까딱하면

  너 죽을줄 왜 모르니

  (평양지방)

 

《인내천》, 《보국안민》, 《광제창생》의 기치를 들고 투쟁에 용약 나섰던 녹두장군 전봉준은 가슴에 품었던 원대한 포부를 실현하지 못하고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단군민족의 슬기와 용맹을 빛내인 그의 애국적장거는 그가 최후의 순간에남긴 유언시와 더불어 력사에 길이 전해질것이다.

 

  때가 오니 천지도 모두 힘을 합쳐주더니

  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어쩔수 없고나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함이 허물될리 없거늘

 

  나라 위한 붉은 마음 누가 알아주리오

 

                                                 -연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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