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마지막항전의 지휘자 성기
여기서 이야기하게 되는 성기(? ― B. C. 108년)는 고조선(만조선, 아래에서는 만조선으로 표기한다.)말기의 대신으로서 한나라의 침략을 반대한 인민들의 마지막항전을 조직지휘하였다.
만조선과 한나라사이의 전쟁은 한나라통치자들의 끊임없는 령토팽창야욕에 의하여 일어난 침략과 반침략, 정의와 부정의의 전쟁이였다.
전쟁의 직접적동기로 된것은 B. C. 109년 만조선에 한나라의 사신으로 파견된 섭하라는 자가 조선의 비왕 장을 살해한 사건이였다. 국가의 존엄을 훼손한 이러한 도발행위에 강경히 대응하여 만조선정부가 료동군 동부도위소재지를 기습하고 섭하를 처단한것은 응당한 자위적조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조선에 대한 침략의 구실을 마련해보려고 꾀하던 한무제(B. C. 156―B. C. 87년)는 이것을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B. C. 109년 한무제 류철은 루선장군 양복으로 하여금 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제(산동반도)로부터 발해를 건너 공격하게 하였으며 좌장군 순체로 하여금 료동지방에서 출발하여 륙로로 침입하게 하였다.
한나라의 침략을 반대하여 싸운 B. C. 109-B. C. 108년 전쟁은 크게 4단계로 나누어볼수 있다. 첫째 단계는 한나라침략군의 수륙량면공격을 저지파탄시킨 시기이고 둘째 단계는 한나라와 강화교섭을 진행한 시기이며 셋째 단계는 한나라침략군의 왕검성(부수도)포위공격을 분쇄하기 위하여 싸운 시기이고 넷째 단계는 왕검성을 사수하기 위하여 최후결전을 벌린 시기이다.
전쟁 첫 단계에서 적아쌍방이 벌린 큰 격전은 패수(대릉하)계선에서 2차, 왕검성(중국 료녕성 개주시일대)밖에서 1차 있었다.
당시 한나라침략군의 전략적기도는 좌장군 순체의 륙군이 패수계선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료하하구에 도착하면 대기하고있던 양복의 수군과 합동하여 왕검성을 포위공격하는것이였다.
이에 대처하여 성기는 패수계선과 왕검성에 기본방어집단을 배치하고 패수계선에서 적의 공격을 좌절시킴으로써 적의 수륙병진기도를 분쇄하는 전략을 세웠다.
패수(대릉하)계선의 만조선방어군은 첫 전투에서 완강하게 싸워 좌장군 선봉부대의 공격을 물리치고 심대한 타격을 가하였다. 중국의 력사기록인 《한서》에서는 이때의 패전상황에 대하여 《좌장군의 졸정 다는 료동지방출신 군사들을 거느리고 먼저 공격하였으나 패하여 흩어지고 다는 도망쳐 돌아왔으므로 법에 따라 목을 베였다.》고 전하고있다.
만조선의 패수서군은 좌장군이 직접 거느린 한나라침략군을 또다시 격파하였다.
만조선의 방어군은 패수와 같은 자연의 험한 지형에 의거하여 방어전을 벌림으로써 한나라 륙군의 공격을 두차례나 좌절시키고 그들의 수륙병진기도를 분쇄하였다.
한편 양복은 좌장군 순체가 지휘한 륙군이 패하여 수륙군의 합동공격을 계획대로 실현시킬수 없게 되자 공명심에 들떠 단독으로 왕검성을 공격하였다. 그는 제 지방의 침략군병졸 7,000명을 거느리고 왕검성을 공격하다가 만조선군의 호된 반격에 부딪쳐 겨우 목숨을 건져가지고 산속으로 도망쳐 10여일이나 숨어있지 않으면 안되였다.
전쟁 첫 시기 한나라침략군의 륙군과 수군이 련속 패하자 한무제는 위산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강화교섭을 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전쟁은 두번째 단계인 일시적인 휴전기에 들어서게 되였다.
그러나 만조선군의 강경한 자세로 하여 강화담판은 막을 올리기도 전에 결렬되였고 한무제는 담판을 성립시키지 못한 죄로 위산을 처형하였다.
강화담판이 파탄된 후 전쟁은 세번째 단계에 들어섰다.
성기는 우거왕을 도와 한편으로는 부수도 왕검성을 고수하기 위한 방어전을 완강히 벌리도록 하였고 다른편으로는 적진내부에 알륵을 조성하기 위한 리간활동을 적극 벌리게 하였다.
강화담판결렬후 좌장군 순체부대는 패수(대릉하)중류지역으로 에돌아 올라가 만조선의 패수상군을 격파하고 남진하여 왕검성의 서북쪽을 포위하였다. 패잔병을 긁어모아 겨우 재편성된 양복의 부대는 왕검성 남쪽을 포위하였다.
적들은 발악적으로 성을 공격하였으나 만조선군민의 완강한 항전으로 하여 여러달동안 패전만 거듭하였다.
성기는 두 적장의 약점을 포착하고 리간책을 썼다.
좌장군 순체나 루선장군 양복은 다같이 흉노와 남월을 치는데서 《공》을 세웠고 《전투경험》도 가지고있는 자들이였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단독으로 먼저 왕검성을 점령하고 고조선을 멸망시킴으로써 명성을 떨쳐보려는 공명심이 꿈틀거리고있었다. 결국 이것으로 하여 두 적장사이에 불화가 조성되게 되였다.
한편 왕검성군사들에 의하여 큰 참패를 당한 양복의 부대에서 졸병들은 모두 싸움을 두려워하였고 장수들은 마음속으로 심히 부끄러워하였으며 포위만 하고 화친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적들의 이러한 약점을 꿰뚫어본 성기는 한편으로는 화친만을 원하는 양복과 몰래 첩자를 시켜 사사로이 관계를 가지게 하고 다른편으로는 좌장군 순체의 공격을 완강하게 물리쳤다. 어지간히 힘이 빠진 순체가 양복에게 함께 공격하자고 하였으나 양복은 강화교섭에만 기대를 걸고 그에 응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좌장군 순체 역시 사람을 시켜 만조선과 강화교섭을 이루어보려 하였으나 성기는 일방적으로 양복과만 관계를 맺도록 하였다. 이렇게 되자 좌장군은 지어 양복이 전에 군사를 잃은 죄가 있는데다가 지금 조선과 사사로이 관계를 가지고있으면서도 항복을 받아내지는 못하고있으니 반역하려는 계책이 있지 않는가고 의심할 지경까지 되였다. 한무제 역시 두 장수가 성을 포위하고도 사이가 벌어지고 뜻이 달라서 오래도록 결말을 짓지 못하고있다고 불평을 터놓았다.
이처럼 성기는 좌장군 순체와 루선장군 양복이 합동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왕검성방어에 유리한 국면을 마련하였던것이다.
화가 동한 한무제는 전국을 수습하기 위하여 제남태수 공손수를 새로 파견하였다. 그는 양복을 모해하는 순체의 말을 믿고 양복을 구속하였으며 그의 군대를 좌장군휘하에 편입시킴으로써 결국 적의 한쪽 날개는 꺾이우고 적들의 수륙병진계획도 파탄되게 되였다. 제남태수 공손수 역시 일을 잘못 처리한것으로 하여 죽음을 당했다.
양복의 부대까지 통합하고 군사지휘권을 독차지한 순체는 왕검성에 대한 총공격에로 넘어갔다. 그리하여 전쟁은 네번째 단계에 들어섰다.
성기는 애국적군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세우고 림기응변의 전술로 잘 꾸려진 성에 의거하여 적들의 공격을 걸음마다 짓부셔버렸다. 적아간의 치렬한 공방전은 B. C. 108년 여름까지 계속되였다.
싸움이 지속되자 신념이 없고 나약한 자들속에서 배신자가 생겨나게 되였다. 공포에 사로잡힌 조선상 로인, 상 한도(음), 장군 왕협과 같은 고위관료들은 비렬하게도 적진으로 넘어가 투항하였다. 니계상 참이라는 자는 자객을 시켜 우거왕을 살해하고 적들에게 투항하였다. 이때 왕자를 비롯한 일부 왕족들과 고위관리들도 그의 뒤를 따라 투항하였다.
귀족관료들의 배신행위로 하여 성은 위험에 처하였다. 하지만 왕검성방어자들은 동요하지 않고 성을 지켜 굴함없이 싸웠다.
뛰여난 군사적재능으로 전쟁승리에 기여한 대신 성기는 애국적군민들의 투쟁기세에서 힘을 얻고 그들을 묶어세워 마지막항전을 지휘하였다.
이때 적들에게 투항하였던 우거왕의 아들 장, 로인의 아들 최 등 비렬한 무리들은 좌장군 순체의 밀령을 받고 다시 성안에 침투하여 투항을 설교하는 한편 경계가 소홀한 틈을 타서 대신 성기를 암살하였다.
비록 성기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지만 그의 지휘밑에 만 조선인민들이 근 1년간 벌린 결사항전은 적들에게 큰 손실을 주고 고조선 전 지역을 병탄하려던 한무제의 침략야망을 꺾어버리였다.
적들의 패전상은 한무제가 전쟁에 동원시켰던 4명의 장수들가운데서 3명의 목을 자르고 나머지 한명도 장군의 벼슬을 떼여 평백성으로 만들어버린 사실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이때 량군 즉 륙군과 수군은 다 곤욕만 치르고 장졸들중에 표창을 받은 자는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적들에게 안긴 이러한 된 타격은 만조선인민들의 항전을 조직지휘한 성기의 공적과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다.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성기를 단군의 후손으로 떳떳이 내세우고 길이 그 이름을 전해가는것이다.
※ 고조선력사는 전조선, 후조선, 만조선의 3개 왕조시기로 구분하고있다. 만조선은 B. C. 194년경 만이 후조선을 정변의 방법으로 뒤집어엎고 세운 왕조이다.
4. 천년강대국 고구려의 건국시조 고주몽
우리 민족사에 천년강대국으로 가장 뚜렷한 자욱을 남긴 고구려.
고구려의 건국시조 고주몽은 과연 어떤 사람이였는가.
고주몽(B. C. 299-B. C. 259년, 혹은 B. C. 277-B. C. 259년)은 력사에 동명왕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그에게는 주몽외에 추모 혹은 중해라는 다른 이름이 있었다. 다른 건국시조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신비한 영웅설화가 있었다.
부여왕 해부루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금빛나는 개구리모양의 아이를 얻어 이름을 금와라고 하였다.
하루는 부루의 대신인 아란불이 왕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일전에 하느님이 나에게 내려와서 <장차 나의 자손으로 여기에 나라를 세우려 하니 너는 피하라. 동해가에 가섭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지고 농사가 잘되니 도읍을 정할만 하다>고 말했습니다.》
부루왕은 아란불의 권고대로 그쪽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이름을 동부여라고 하였다.
그 옛 수도에는 천제(하느님)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는 사람이 와서 도읍을 정하고 북부여라고 하였다. 머리에는 새깃 꽂은 관을 썼고 허리에는 룡광검을 찼다. 아침이면 정사를 듣고 저녁이면 하늘에 올라가니 세상사람들은 그를 《천왕랑》이라고 하였다.
그때 하백(강물을 맡아보는 어른)에게는 세 딸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아름다왔다.
웅심연가에 놀러 온 그들을 본 해모수는 경탄을 금치 못하였다.
《저 녀인들을 왕후로 맞는다면 아들을 볼수 있겠는데…》
그의 말을 들은 측근자중의 한 사람이 조용히 귀띔하였다.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궁전을 지어 녀자들이 방안에 들어오는것을 기다렸다가 문을 막아나서지 않소이까?》
해모수왕은 이를 옳게 여기고 말채찍으로 땅에 그림을 그렸다. 즉시에 구리로 만든 집이 생겨났다. 그안에 세 좌석을 마련하고 술동이를 두었더니 세 녀자가 서로 권하면서 마시고 몹시 취하였다. 해모수가 나타나 녀자들을 가로막으니 두 동생은 달아나고 맏이 류화만 남았다.
하백이 성을 내며 사람을 보내여 해모수를 추궁하게 하였다.
해모수는 류화와 함께 오룡거(다섯마리 룡이 끄는 수레)를 타고 하백의 궁전으로 갔다.
하백은 해모수를 시험해보고나서 정녕 천제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례를 갖추어 혼인을 맺어주었다.
하백은 딸을 하늘에 올려보내려고 해모수를 한껏 취하게 하고 가죽수레에 함께 넣어 오룡거에 실었다. 그런데 해모수는 오룡거가 물에서 나오기 전에 술에서 깨여나 류화의 황금비녀로 가죽수레를 뚫어 구멍을 내고 혼자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
하백은 집안망신을 시켰다면서 류화를 우발수가에 귀양보내였다.
한편 해부루왕이 죽고 그뒤를 이어 금와가 왕위에 올랐다.
금와왕은 우발수가에 나왔다가 류화를 보게 되였다. 그는 류화가 해모수의 안해라는 말을 듣고 별실에 두게 하였다.
해빛이 그를 따라가며 비쳐들더니 얼마후 임신하고 다섯되들이만 한 크기의 알 한개를 낳았다. 왕이 사람이 알을 낳았으니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며 개, 돼지에게 주게 하였으나 모두 먹지 않았다. 다시 길우에 버리니 소와 말이 피했고 들판에 버리니 새들이 날개로 덮어주었다.
금와왕은 다시 그 알을 쪼개게 하였으나 깨뜨릴수가 없었다. 할수없이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류화가 그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사내아이 하나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는데 골격과 풍채가 영특하고 기이하였다.
사내아이는 나이가 겨우 7살때 보통사람들과는 현저하게 차이났고 제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하였다. 부여사람들의 풍속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하였기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불렀다고 한다.
부여왕실에 몸을 담근 그의 성장은 매우 눈물겨웠다. 금와왕에게는 맏아들 대소를 비롯한 7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주몽의 재능을 시기하며 천대하였다.
한번은 사냥을 나가며 주몽에게는 화살 한대만 주었지만 그는 왕자들과 시중군 40여명이 겨우 사슴 한마리를 잡는 사이에 많은 사슴을 잡았다.
왕자들은 질투하던 나머지 주몽을 붙들어다 나무에 비끄러매놓고 그가 잡은 사슴들을 모조리 빼앗아갔다. 주몽은 나무를 뽑고 가버렸다.
금와왕의 맏아들 대소는 부왕에게 《주몽은 신기한 용맹을 가진 사람이여서 사람들이 남다르게 보니 일찍 처리하여 후환이 없게 해야 하옵니다.》라고 쏠라닥질을 하였다.
금와왕은 아직은 그를 죽이지 않고 말시중군을 시키면서 그 의도를 타진해보기로 하였다.
주몽은 분함을 이길수 없어 어느 날 어머니의 손목을 꼭 부여잡고 이렇게 말하였다.
《어머니, 나는 천제의 자손인데 어찌하여 남을 위해 말기르는 일이나 해야 하나이까. 제 남쪽으로 내려가 나라를 세워볼 뜻을 품고있는지 오래나 단지 어머니를 홀로 두고 갈수 없어 속을 썩이고있나이다.》
어머니 류화는 그윽한 눈에 정을 함뿍 싣고 말하였다.
《주몽아, 이것은 내가 밤낮으로 속을 썩이고있는바이다. 나라사람들이 장차 너를 해치려 하는데 어찌 고스란히 죽음을 당하겠느냐. 너의 재간과 지략을 가지고서라면 어데 간들 못할 일이 없다. 여기서 어물거리다가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멀리 가서 큰일을 하는것이 낫다.》
《어머니.》 주몽은 의외에도 어머니가 선선히 응낙하는 바람에 놀라움과 함께 미처 다 몰랐던 어머니의 새로운 모습을 느끼게 되였다.
류화는 그길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 듣자니 무사가 먼길을 가자면 반드시 날랜 말을 타야 한다더라. 내 능히 말을 고를줄 아느니라.》
류화는 말목장에 가서 긴 회초리로 뭇말들을 마구 후려갈겼다. 말들이 모두 놀라서 뛰는데 그가운데 붉은 말 한마리가 두길이나 되는 울타리를 뛰여넘었다.
주몽은 그 말을 붙들어 가만히 바늘을 말의 혀뿌리에 찔러놓았다. 그 말은 혀바닥이 아파서 심히 여위여갔다.
말목장을 돌아보던 금와왕은 여러 말들이 살찐것을 보고 기뻐하며 그 자리에서 주몽에게 여윈 말을 주었다. 주몽은 그 말을 받게 되자 곧 바늘을 뽑아내고 먹이를 많이 주어 원래의 모습으로 만들어놓았다.
주몽은 은밀히 친해두었던 벗인 오이, 마리, 협보와 함께 남쪽으로 도망갈 차비를 서둘렀다.
류화는 석별의 자리에서 《너는 이 어머니 한사람 생각만 하지 말라.》고 하면서 주몽의 등을 떠밀어보냈다.
주몽일행이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뒤에서는 부여의 기병들이 추격하여왔다. 엄호수가에 이르렀는데 그만 다리가 없었다. 주몽은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자이다. 오늘 도망을 가는데 추격자가 거의 따라오게 되였으니 어떻게 하면 좋은가?》라고 안타까이 소리쳤다.
이때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물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놓아주었던것이다.
주몽일행이 다리를 건너서자 물고기와 자라들은 다시 헤쳐졌다. 하여 부여의 추격기병들은 더 따라오지 못하고 돌아가고말았다.
주몽과 그 일행은 모둔곡이라는 곳에 와서 삼베옷, 검은옷, 마름옷(풀색옷)을 입은 재사, 무골, 묵거 세사람을 만나게 되였다. 주몽은 그들과 함께 졸본천에 이르러 땅이 기름지고 산천이 준엄함을 보고 도읍을 정하려 하였다.
주몽은 그 지방의 세력가이며 부자인 과부 소서노의 도움을 받으며 자기의 영향력을 강화하였고 아들이 없는 구려왕의 둘째 딸과 결혼하여 그의 사위로, 후계자로 되였다.
구려왕이 죽은 후 주몽이 그뒤를 이어 왕이 되였으며 나라이름을 고구려로 정하고 자기의 성도 고씨로 하였다. 때는 B. C. 277년.
우리 력사의 첫 봉건국가, 천년강대국으로 이름떨친 고구려의 건국과정을 보여주는 영웅설화는 이상과 같다.
설화에는 현실세계에서는 도저히 있을수 없는 허구들이 다분히 내포되여있다. 그러나 설화에는 일정하게 력사적사실도 반영되여있다.
주몽은 세력가의 집안출신이고 부여왕실에 적을 붙이고 있으면서 출중한 용력과 재능으로 하여 왕자들과 귀족관료들의 모해를 받아 한때 《천한》노릇도 하게 되였다. 그 과정에 그는 사회의 하층사람들과 사귀고 부여사회안의 심각한 계급적모순과 대립에 대해서도 알게 되였고 그로부터의 출로는 새로운 제도(봉건제도)를 세우는데 있다고 생각하게 되였다. 그는 남쪽으로 도망쳐 졸본천가의 한곳(과루부<계루부>의 변방)에 자리를 잡고 영향력을 시위하게 되였고 결국 구려왕의 눈에 들게 되고 후계자로 되게 되였다.
영웅설화로 그려볼수 있는 진실은 대체로 이러하다.
출중한 힘과 신비한 재능의 소유자인 고주몽.
우리 민족사에 그처럼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한페지를 남긴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이야말로 그의 신비한 영웅설화와 더불어 길이 전해져야 할 단군의 후손이다.
5. 유인기만전술로 적을 물리친 부분노
부분노는 고구려의 첫 시조왕인 고주몽과 2대왕인 유류왕(B. C. 259-B. C. 236년)을 섬긴 장군이다. 그의 생존년대와 관련된 정확한 자료는 문헌에 남아 전해지는것이 없다. 다만 그가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장수로서 고주몽때 장군이 되여 비류국을 복속시키고 행인국을 통합하는데서 그리고 유류왕때 선비국을 쳐서 복속시키는데서 공을 세웠다는 전설과 사실자료들만이 전해질뿐이다.
나라를 지켜낸 명장으로서 부분노의 군사적재능이 남김없이 과시된것은 유인기만전술로 선비국을 복속시킨 싸움이다.
선비족들은 원래 내몽골지방을 중심으로 유목생활을 하고있었는데 그 일부는 료하 동쪽지방에도 와있었다. 그들은 고구려 서북부의 산간지대에 험한 지세를 리용하여 성을 쌓고 기회만 있으면 고구려의 마을들에 달려들어 로략질을 일삼고있었다.
이것은 고구려에 있어서 큰 우환거리가 아닐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나라의 안전을 지켜 낼수 있겠는가.
B. C. 249년 4월 유류왕은 신하들과 대책을 토의하면서 《선비가 지세가 험한것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려 하지 않으며 정세가 유리하면 나와서 로략질을 하고 불리하면 들어앉아 지키므로 우리 나라에 걱정거리로 된다. 만일 누가 이를 꺾어내는 자가 있다면 과인이 장차 큰 상을 주겠노라.》고 하자 계하에서 백발의 로장 부분노가 나섰다.
유류왕은 선왕을 도와 창업에 큰 기여를 한 명장 부분노를 기대어린 시선으로 굽어보았다.
부분노는 말마디에 력점을 찍어가며 아뢰였다.
《선비는 험한 지세에 의거하고있고 굳건한 나라로서 사람들이 용감하고 우둔하여 힘으로써 싸우기는 어렵고 꾀로써 굽히기는 쉽소이다.》
이것은 부분노가 상대한 적을 깊이 파악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적을 알고 자기를 알아야 백번 싸워 위태롭지 않다.》는 말도 있듯이 적아를 잘 알아야 그에 맞게 구체적인 전투계획을 세우고 싸움의 종국적승리를 달성할수 있는것이다.
유류왕은 부분노의 의견에 머리를 끄덕여 긍정을 표시하며 대답을 재촉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느냐?》
부분노는 한숨 돌리고나서 말을 이었다.
《사람을 시켜 반간으로 적의 땅에 들어가서 거짓말로 우리 나라는 지역이 좁고 군사가 약하므로 겁이 나서 움직이지 못한다고 하면 선비가 반드시 우리를 만만히 여기여 수비를 하지 않을것입니다. 신이 그 틈을 타서 정병을 거느리고 지름길로 들어가 산림속에 숨어서 그 성을 노리고있겠습니다. 이때에 대왕께서 리병(피로하고 약한 군사)을 적들의 성 남쪽으로 출동시킨다면 적들은 반드시 성을 비우고 멀리 쫓아올것이라 이때 신은 정병을 거느리고 그들의 성으로 뛰여들어가고 대왕께서는 용감한 기병을 거느리고 그를 량쪽에서 공격하게 되면 곧 이길수 있을것입니다.》
부분노의 계책은 적들이 처한 형편과 성격상 특성, 기질적측면, 준비정도를 정확히 파악한데 기초한것으로써 첩자로 적을 마비시키고 유인매복과 량면협격전술로 소멸하는 정당하고 승리의 가능성이 높은 책략이였다.
부분노의 계책이 훌륭하다고 인정한 유류왕은 그대로 집행하게 하였다.
첩자는 곧 놈들속으로 침투하여 거짓말을 류포시켰다. 적들은 그 거짓말을 진짜로 믿고 고구려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하고 안일해졌다.
일은 부분노가 예견한대로 되여갔다.
적을 마비시키려던 초기의 목적이 달성된 조건에서 부분노는 다음단계의 작전에로 넘어갔다.
부분노는 《별동대》라고도 할수 있는 정예군사를 직접 거느리고 사이길로 들어가 산림속에 매복하였다. 그리고 왕에게 예정계획대로 추진시키도록 련락을 띄웠다.
유류왕은 《리병》을 파견하여 적들의 성 남쪽을 공격하게 하였다.
《리병》을 본 적들은 과연 랭소하면서 성문을 열고 의기양양하여 쳐나왔다.
때를 기다리고있던 부분노는 정예군사를 거느리고 빈 성으로 쳐들어갔다. 선비족의 웅거지, 악의 소굴은 이렇게 부분노의 책략에 의하여 손쉽게 점령당하였다.
그제서야 속았다는것을 깨달은 적들이 고구려유인대 《리병》에 대한 추격을 중지하고 되돌아서 공격해왔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부분노는 성에 의거하여 군사들을 지휘하며 기를 쓰고 달려드는 적들을 물리쳤다.
이긴 기세를 타서 유류왕이 직접 거느린 정예기병부대가 《리병》과 진을 바꾸어 전군이 되여 기치창검을 높이 들고 북을 울리면서 적들을 반격하였다. 앞뒤로 공격을 받게 된 선비군은 어찌할바를 몰라 헤덤비였다.
적들은 마침내 투항하여 속국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실로 선비족을 복속시키는 싸움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부분노의 책략에 의거하여 진행되고 승리한 전투였다.
선비족이 투항하여 고구려의 속국으로 된것은 고구려서북지방의 정세를 안정시키고 당시 고구려에 엇서나가던 부여를 견제하는데서 중요한 군사적의의를 가지였다.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싸움이 끝난 후에 유류왕이 그에게 상으로 식읍을 주려 하였을 때 부분노는 끝까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참으로 부분노는 뛰여난 군사적지략과 용맹, 청렴결백한 품성을 지닌 군사지휘관이며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내는데 이바지한 명장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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