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9성을 개척한 윤관
조상의 땅을 모두 되찾는것은 고려사람들의 한결같은 념원이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고구려, 발해의 옛땅을 회복하는것을 숙원으로 간직하고 그를 위한 필요한 정치, 군사적조치들을 취하였다. 태조의 유언이기도 한 조상의 땅 수복을 위하여 고려정부는 12세기초엽 단호한 군사적조치를 강구하였다. 그것이 바로 우리 나라 동북지역에 들어와 살던 녀진인들을 몰아내고 9개의 성을 설치한 윤관의 대규모군사원정이였다. 윤관(?-1111년)은 파평현사람으로서 자를 동현이라고 한다. 그의 고조인 윤신달은 태조 왕건을 도와 삼한 공신칭호를 받았으며 아버지 윤집형은 검교 소부소감벼슬을 지냈다. 윤관은 고려의 전성시대라고 하던 문종(1047-1083년)통치년간에 과거에 급제하여 습유 보궐을 지냈고 숙종 (1096-1105년)때에 여러번 승급하여 동궁 시강학사, 어사대부, 리부상서, 한림학사, 승지로 임명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장상이 된 후 신중에 있을 때에도 항상 경서를 가지고다니였다고 하는 윤관. 그의 가장 큰 공적은 조상의 땅을 회복하기 위한 성스럽고 준엄한 싸움에 한몸을 기꺼이 내대여 동북지역에 9개의 성을 설치하는 전과를 거둔것이다. 윤관이 구축대상으로 삼았던 녀진은 말갈의 한 갈래로서 고구려, 발해때 그의 주민의 일부를 이루고있었다. 926년 발해멸망후 거란족이 세운 료나라에 순종하느냐 순종하지 않느냐에 따라 녀진은 숙녀진과 생녀진으로 불리웠다. 녀진인들은 산림이나 골짜기를 따라가며 여기저기에 흩어져 부락을 형성하고 수렵이나 어로를 기본생업으로 하여 살아갔다. 일부 녀진인들은 고려에 귀순하여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았고 일부는 고려의 변경을 로략하며 배신행위를 하기도 하였다. 11세기 녀진인들의 생활에서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통치자의 선조가 고려사람(혹은 고려에 살다가 녀진지역으로 이주한 녀진사람이라고도 한다.)이라고 하는 완안부녀진이 강대해지기 시작하였다. 이 부족은 원래 녀진 여러 부가운데서 제일 락후하였는데 11세기초엽에 이르러 석로(소조)가 추장이 되면서 이웃부락들을 겸병하여 부락련맹을 형성하며 강대해지기 시작한것이다. 오고내(경조)때에 이르러 완안부녀진은 더욱 강화되였다. 완안부를 중심으로 한 부락련맹은 더욱 강대하고 공고한것으로 되여갔다. 핵리발(세조)때와 파라숙(숙종), 영가(목종)때 완안부녀진의 세력범위는 더욱 넓어졌다. 이렇게 11세기중엽부터 말엽까지 녀진 각 부족의 통일과 부락련맹의 공고발전, 완안부를 핵심으로 한 군사련맹의 형성과 발전이 이루어지게 되였다. 오아속(강종 1103-1113년)이 추장으로 되여 그 기세가 더욱 횡포해지기 시작하였다. 산골짜기를 따라 류동하면서 고려의 서북일대와 함경도일대까지 들어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며 살아오던 녀진인들은 점차 세력이 커지자 변경을 소란시키며 함부로 날뛰였다. 녀진추장 오아속이 다른 부락의 부내로와 분쟁이 일어 병력을 동원하여 공격하면서 국경계선에까지 와서 주둔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고려정부는 림간을 보내여 국경을 수비하게 하였으나 그의 무모한 행위로 패하여 녀진인들은 승전한 기세로 정주 선덕관의 성에까지 침입하여 살인략탈을 자행하였다. 그리하여 림간 대신 윤관을 동북면 행영도통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윤관은 적을 공격하여 30여명을 죽였으나 고려군이 입은 피해도 적지 않아 일단 강화를 체결하고 각기 퇴군하였다. 이 싸움을 통하여 윤관이 깨달은것은 적기병과 대적하려면 우리도 강한 기병을 가져야 한다는것이였다. 고려군이 큰 성과없이 돌아오자 숙종왕은 몹시 노하였다. 《원컨대 신명께서는 은근한 도움을 내려주시여 적을 소탕하게 하여주신다면 그곳에 절을 창건하오리다.》 녀진을 정벌하고 조상의 땅을 수복하려는 숙종왕의 결심은 더욱 굳어졌다. 그후 참지정사 판 상서 형부사 겸 태자 빈객으로 임명되였을 때 윤관은 왕에게 이렇게 아뢰였다. 《신이 보건대 적의 세력이 강하여 무슨 변을 일으킬지 예측하기 어렵사옵니다. 그런즉 병졸과 군관을 휴식시켜 후날에 대비해야 할것이옵니다. 또한 신이 전날에 패전한 원인은 적들은 말을 탔고 우리는 보행으로 대전한데 있사옵니다.》 고려정부는 녀진에 대처하기 위한 군사적조치를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유명한 윤관의 별무반이 편성된것이 바로 이때였다. 그것은 문, 무의 산관, 서리들로부터 상인사환군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과 주, 부, 군, 현에서 말을 기르는 사람 모두를 신기군에 편입시키고 말이 없는 자는 신보군에 소속시키는것이였다. 그리고 조탕(돌격대), 경궁(활쏘는 병종), 정노(쇠뇌부대), 발화(화공부대) 등의 병종을 편성하였는데 20살이상의 남자로서 과거공부를 하지 않은 청년들은 모두 신보군에 배속시키고 무반과 각 진, 부에 속한 군인들은 사철 계속 군사훈련을 시키며 중들을 선발하여 항마군을 조직하였다. 한편으로 군량을 축적하여 재차 진공할것을 계획하였다. 윤관의 벼슬은 중서시랑 평장사로 승급하였다. 그러나 녀진에 대한 원정을 준비하던중에 숙종왕의 상사를 당하였다. 원정은 일시 중지되였다. 1107년 국경경비군관으로부터 급보가 올라왔다. 녀진이 강해져서 국경도시들에 자주 침입하고있으며 추장이 바가지 하나를 갈가마귀꼬리에 달아 각 부락으로 돌리면서 대사를 의논하고있으니 심중을 알길이 없다는것이였다. 예종왕은 이 급보를 받고 중광전의 불감속에 두었던 숙종왕의 발원문을 가져다가 량부 대신들에게 보이게 하였다. 대신들은 그 글을 읽고 모두 눈물을 흘리며 《선황께서 남기신 뜻이 이같이 절절하신데 어찌 적에 대한 복수를 잊을수 있으리까.》라고 결의를 표명하였다. 그리고 이어 《선황의 뜻을 이어 녀진을 토벌할것을 청원하나이다.》라고 상소하였다. 예종왕은 우물쭈물하면서 결심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후 점을 쳐보고 《길한 점괘》가 나오자 출병을 결정하였다. 윤관이 원수로, 지 추밀원사 오연총이 부원수로 임명되였다. 윤관은 왕앞에서 서약하였다. 《신이 일찌기 선황(숙종왕)의 밀지(비밀지령)를 받았고 지금 다시 페하의 엄명을 받았으니 어찌 감히 3군을 통솔하고 적의 보루를 격파하여 우리 강토를 개척하고 지난날의 치욕을 씻지 않으리까.》 윤관은 가슴속결의를 가다듬으며 성공을 의심하는 오연총을 꾸짖었다. 《당신이나 내가 아니면 누가 능히 죽음의 땅으로 가서 나라의 치욕을 씻을수 있단 말이요. 국책이 이미 결정되였으니 무엇을 의아쩍어하겠소.》 예종왕은 유구한 고도 서경(평양)에 가서 위봉루에 올라 장수의 권한의 징표인 부월을 수여하였다. 윤관은 동부지방으로 가서 군대를 장춘역에 집결시켰는데 대략 17만명의 대군이였다. 그는 원정에 앞서 고라를 비롯한 400여명의 녀진추장들을 유인하여 처단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것은 녀진의 지휘체계를 마비시키고 혼란시키기 위한 원정의 서막작전이였다. 이어 고려군은 원정을 개시하였다. 이리하여 1107년 윤관의 유명한 동북지방원정이 단행되였다. 윤관은 고려원정군을 좌, 중, 우의 3군으로 편성하였다. 3군의 총 병력수는 11만 4, 400명이고 여기에 총지휘관인 윤관이 직접 거느린 5만 3, 000명과 수군 2, 600명이 있었다. 12월 14일 윤관이 군대를 거느리고 동부의 장성을 넘어 대내파지촌을 지나 동북으로 행진해나갈 때 군세가 매우 성대하여 이것을 본 녀진인들은 모두 도망치고말았다. 고려원정군은 동음성에 의거하여 저항하는 적들을 맹렬히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다음날인 15일 오후 석성에 도달한 원정군은 녀진족이 투항을 거부하며 발악하는 조건에서 좌군과 윤관의 휘하 대군이 합세하여 격전을 벌려 적들을 섬멸하였다. 이 석성전투는 고려군의 진격을 저지시키고 사태를 역전시켜보려던 완안부녀진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준 섬멸전으로서 그후 고려군의 진격에 유리한 국면을 열어놓은 의의있는 전투였다. 고려원정군은 계속 진격하여 이위동에 집결한 적들을 들이치고 역습해오는 적들과 치렬한 싸움을 벌려 1,200명을 죽이는 전과를 거두었다. 사실 이 이위동전투는 힘겨운 싸움이였다. 이위동 즉 이위계는 병목과 같은 요해처(병항)가 있는 곳으로서 천험의 요새였다. 오늘날의 마천령병항인 이 천험의 요해지에 웅거하여 저항하는 적들을 물리치고 승리할수 있은것은 조상의 땅을 기어이 되찾으려는 고려의 애국적장병들의 희생적투쟁의 결과였다. 중군병마사 좌복야 김한충이 거느린 중군은 고사한 등 35개 촌락을 격파하여 380명의 적을 죽이고 230명을 포로하였으며 우군병마사 병부상서 김덕진이 거느린 우군은 광탄 등 32개 촌락을 격파하여 적 290명을 죽이고 300명을 포로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좌군병마사 좌상시 문관이 거느린 좌군은 심곤 등 31개 촌락을 격파하여 적 250명을 죽이였다. 그리고 윤관은 휘하 부대를 거느리고 대내파지 등 37개 촌락을 격파하여 2,120명을 죽이고 500명을 포로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원정군의 일부 부대는 멀리 두만강이북 공험성, 선춘령까지 진격하였으며 오늘의 간도지방에서 반격해오는 완안부녀진군과 격전을 벌렸다. 이처럼 고려원정군은 12월 14일 출병을 개시한이래 고려 동북방의 장성계선에까지 침입한 완안부녀진군을 쳐몰아내면서 북으로 진격하여 이해말에는 갈라전지역 즉 오늘의 함흥계선으로부터 두만강이북 간도지방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원정군 총지휘관 윤관은 전과를 종합하여 조정에 보고하는 한편 새로 차지한 지역을 공고히 하고 국경선을 획정하는 사업들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윤관은 몽라골령아래에 950간의 성곽을 쌓고 영주라고 하고 화곳령아래에는 992간의 성곽을 쌓아 웅주라고 하였으며 오림금촌에는 774간의 성을 쌓아 복주라고 하고 궁한이촌에는 670간의 성을 쌓아 길주라고 하였다. 이것은 윤관이 새로 개척한 지역에 제일 먼저 쌓은 4개의 성(영주, 웅주, 복주, 길주)으로서 그때는 1107년 12월 말이였다. 완안부 추장 오아속은 련속되는 패배에 기가 질려 싸울 생각을 못하였다. 그런데 군대를 다시 발동시키지 않으면 갈라전지역을 회복할수 없다는 아골타(후의 금나라 태조)의 강력한 주장에 의하여 오아속은 할수없이 1108년 1월초 말새를 두목으로 하는 10개의 대부대를 편성하여 갈라전에 다시 투입하였다. 그리하여 두만강이북 공험성, 선춘령(공험성은 오늘의 동녕현성근방에 있었다고 보이며 선춘령은 로흑산이라고 비정되고있다.)까지 진출하였던 원정군의 한 부대는 완안부녀진군의 편대인 훈단이 거느린 적들과 목리문전, 갈라수(해란강) 등지에서 치렬한 싸움을 벌렸다. 1월 14일에는 가한촌 병항에서, 26일에는 영주성에서 고려군과 적 대군과의 격전이 벌어졌다. 영주성싸움에서 고려군은 2만여명의 적을 물리치는 전과를 거두었다. 윤관은 적들의 침입이 본격화되는 조건에서 이를 타개할 목적밑에 여러 장수들을 인솔하고 중성대도독부(길주)로 갔다. 중성대도독부에서 장수들의 회합이 있은 후 윤관은 방비를 한층 더 강화하기 위하여 1108년 2월초에 두만강이북의 공험진과 길주이남의 함주에 성을 쌓게 하였다. 그리고 공험진, 선춘령에는 비석을 세워 고려의 경계임을 명백히 하였다. 윤관은 아들 언순을 시켜 정부에 이러한 사실을 전하면서 축하하는 글을 올리였다. 《페하의 성덕이 천지와 같이 장하시여 정의의 군사가 이미 오랑캐를 평정하고 장병들이 환희에 들끓고있사옵니다.》 이렇게 시작된 글에서는 녀진인들이 고려의 은혜를 입어왔으나 점차 승냥이같은 탐욕으로 반심을 품고 로략질을 일삼으니 선대황제(숙종왕)가 분노하여 정벌하려 하였고 페하(예종왕)께서 그 뜻을 이어 기회를 보아가며 준비하다가 비로소 출병을 명령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윤관은 원정군이 거둔 전과를 개괄하고나서 이렇게 계속하였다. 《예로부터 사람들이 이 땅을 얻고저 하면서도 얻지 못하고있던것을 이제 하늘이 우리에게 주어 차지하게 되였으니 우로는 선조들의 령혼에 감사를 드릴만 한 경사요 아래로는 우리 나라의 여러해 쌓인 치욕을 씻어버린 대승리였나이다.…》 윤관은 축하글의 마지막부분에서 고려군의 승리는 옛날 제왕들이 거둔 승리에 비길수 없는 대승리로서 력사에 이 사적을 기록하여 영원히 후세에 빛내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윤관은 림언에게 지시하여 영주의 관청벽에 이번 원정사적을 남기게 하였다. 거기에는 녀진은 본래 고구려의 한 부락으로서 개마산 동편에 모여살면서 대대로 우리 나라에 조공하여왔고 선대왕들의 깊은 은혜를 입어왔는데 일조에 배반하였으므로 정벌하였다는것, 죽인 적이 6, 000여명이고 항복한 자가 5만여명이며 점령한 지역은 면적이 사방 300리이고 동쪽은 큰 바다, 서북쪽은 개마산이며 이곳은 원래 고 구려의 령토로서 오늘날 되찾은것은 천명이라는것, 새로 설치한 6개 성에 방어사를 두고 정호를 배치한다는 등의 내용이 들어있었다. 이것은 당시 고려사람들이 옛 고구려의 강역을 되찾은데 대하여 응당한것으로 강조하면서 몹시 기뻐하였으며 그곳을 영원히 나라의 령토로 지켜가기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세웠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적들은 1108년 2월 11일 영주성에서의 패배를 만회해보려고 각종 병차까지 동원하여 웅주성을 포위공격해왔다. 웅주성을 지키고있던 고려군은 일제히 4개 성문을 열고나가 싸워 수많은 적들을 살상포로하고 병차 50여량, 중차 200여량을 비롯한 많은 무기무장을 로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웅주성에서 퇴각한 적들은 이해 3월말에 다시 영주성에 침입하여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이곳을 지키던 고려군의 맹렬한 반공격을 받아 수많은 주검을 남기고 북쪽으로 도망쳤다. 이 시기 고려군은 영주, 웅주성에 의거하여 대병력으로 침입해오는 적들을 일단 격퇴하였으나 적들의 발악이 계속될것을 예견하여 이미 수복한 판도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여야 하였다. 그런데 넓은 지역에 축성한 6개 성 호상간에는 거리가 멀고 서로 지원하기가 어려웠던것만큼 이 6개 성을 가지고서는 적의 준동을 성과적으로 물리칠수 없었다. 윤관은 이러한 실정을 고려하여 1108년 3월 평융진과 통태진을 새로 설치하고 성이 없던 의주(덕원)에 성을 쌓았다. 그리하여 되찾은 동북부의 넓은 판도에는 9개 성이 완전히 갖추어지게 되였다. 이것을 《북계 9성》이라고 하였다. 새로 설치한 9개 성들에 남쪽지방 인민들을 이주시켜 수복한 지역을 공고히 하기 위한 사업도 진행되였다. 이 지역에 이주된 호구수는 도합 6,466정호(6만 9,000호라는 기록도 있는데 원래 계획되였던 수자였다고 보인다.)였다. 고려정부는 윤관의 공로를 평가하여 추충좌리 평융척지공신칭호와 문하시중 판 상서 리부사 지군국중사의 관직을 수여하였다. 그후 1109년 4월 완안부녀진은 사현을 파견하여 정화를 요청하였고 같은 해 6월에는 뇨불, 사현 등을 파견하여 이렇게 맹세하였다. 《옛날 우리 태사 영가가 일찌기 말하기를 우리 조상은 큰나라(고려)로부터 나와 자손에 이르기까지 의가 맞아 귀속되여왔습니다. 지금 태사 오아속 역시 큰나라를 부모의 나라로 삼아왔습니다. 최근 궁한촌사람들이 스스로 나쁜짓을 하였는데 그것은 태사가 지휘하여 한것이 아닙니다. 고려에서 변경을 침범한 죄를 토벌한 후 다시 통교를 허락하여 우리는 그것을 믿고 조공을 끊지 않았습니다. … 9개 성을 쌓으니 외로운 백성들은 의탁할 곳이 없게 되였습니다. 때문에 태사가 우리들을 파견하여 옛 땅을 되돌려주도록 요청하게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불쌍히 여겨 9개 성을 반환해주어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해주면 우리들은 하늘에 맹세하건대 대대손손 공손히 공물을 바치며 감히 귀국의 변경에 기와쪼각하나 던지는 일이 없게 하겠습니다.》 고려정부는 녀진인들의 맹세를 믿고 9개 성을 돌려주었다. 그러나 다시한번 고려앞에 자기의 서약을 공포하는 의식을 진행하도록 하였다. 같은 해 7월 고려정부는 문관을 파견하여 서약의식을 시찰하게 하였다. 녀진인들은 함주문밖에 높은 단을 설치하고 《지금부터 나쁜 마음을 먹지 않고 대대로 조공을 바치며 이 맹세를 어기는 경우에는 멸망할것이다.》라는 맹세를 《하늘》앞에 다지였다. 녀진인들은 이 맹약을 지키였다. 그후 완안부녀진은 세력을 확대하여 중국 북방의 광활한 지역을 차지하고 《금》나라를 세웠지만 고려에 대해서 큰 마찰은 일으키지 않았다. 그리고 동북지방에서도 비교적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였다. 봉건통치제도의 문란과 군사력의 상대적약화 등 원인으로 하여 새로 개척한 9개 성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한것은 고려봉건정부의 큰 실책이였다. 그러나 윤관이 조상의 땅을 되찾을 굳은 결심을 품고 힘겨운 싸움을 벌리며 넓은 지역을 수복하고 9개 성을 설치한것은 큰 의의를 가지였다. 이후 고려와 리조초기에 걸쳐 조상의 옛 땅을 수복하기 위한 사업은 윤관이 9성을 설치하고 공험진, 선춘령에 《고려지경》이라는 비석을 세워 경계를 삼은 사실을 근거로 하였다. 1109년 2월 고려정부는 료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갈라전에 9성을 설치하고 이 지역이 고려경내에 속한다는것을 통고하였으며 고려말 철령위문제를 둘러싸고 명나라와의 관계가 복잡해졌을 때 고려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여 《공험진까지는 자고로 우리 나라 땅이다.》라고 단호하게 선포하였다. 그리고 간도지방 녀진인들을 귀순시키기 위하여 이곳에 보낸 방문에서 《속빈, 실적면, 몽골, 개양, 실린, 팔린, 안돈, 압란, 희라올, 올리인, 고리한, 로벌, 올적개지역은 본래 우리 나라 공험진경내에 속한것이다.》라고 강조하였다. 리조초기 6진개척때 세종왕은 함길도도절제사 김종서에게 《동북지방의 공험진을 경계로 삼았다고 전해온지 오래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선춘참에 윤관이 세운 비석이 있다고 하는데 선춘참이 어느 방면에 있으며 그 비문이 어떠한지 사람을 파견하여 찾아보게 할것이다.》라고 지시하였다. 이처럼 윤관의 9성 설치는 조상의 땅을 되찾기 위한 성스러운 사업이였고 후대들에게 전해준 애국적인 사적이였다. 9성을 일시 양보해주었다고 하여 강토를 포기한것이 아니였다. 윤관의 공적은 지워버릴수도 말살될수도 없는 너무도 큰 자욱을 남겼다. 하기에 예종왕은 윤관 등이 명목이 서지 않는 병력을 함부로 동원하여 군대를 패전시키고 국가에 손해를 끼친 죄를 용서할수 없으니 감옥에 가두자고 떠들어대는 자들을 타이르며 전투에는 승패가 있기마련이라고 하였다. 간관들의 계속되는 탄핵으로 관직과 공신칭호만 삭탈하였다가 인차 수 태보 문하시중 판 병부사 관직과 상주국훈위를 주며 《백리의 국토를 넓히고 9성을 쌓아 국가의 오랜 치욕을 갚았으니 그대의 공로야말로 크다고 할만하다.》고 격려해주었다. 윤관은 새로운 군부대를 조직하여 원정을 지휘하고 9성을 설치함으로써 조상의 땅을 되찾고 고수하기 위한 투쟁에 공헌한것으로 하여 민족사에 길이 그 이름을 남기고있는것이다. ※ 기록에 의하면 윤관이 세운 비석의 4면에는 글이 있었는데 녀진인들이 그 글자를 깎아버렸다. 후세사람들이 그 비석을 발굴해보니 《고려지경》이라는 네글자가 있었다고 한다.
25) 많은 공을 세우고도 자랑할줄 모른 김취려
김취려(?-1234년)는 언양사람으로서 아버지 김부는 례부시랑벼슬을 하였다. 음직으로 벼슬길에 올라 정위로부터 동궁위를 거쳐 여러번 승급되였다. 후에 장군으로 임명되여 동북지역을 관리하였으며 이어 대장군으로 등용되였다. 그후 변경요새지대를 관리하였는데 변경주민들이 그를 존경하였다고 한다. 그는 키가 여섯자 반이나 되는 장신이였으며 수염이 길어 배를 지났으므로 례복을 입을 때에는 반드시 시녀 두명으로 하여금 수염을 좌우로 갈라들게 한 후에 띠를 매군 하였다. 그의 명성은 거란 유종(나머지무리)의 침략을 물리치는 전투과정을 통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1206년 오논강류역의 유목귀족의 아들인 테무친(칭기스한)이 몽골국가를 세우고 북부중국을 점령하자 녀진족이 세운 금나라는 급속히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1211년 금나라의 북변천호였던 거란인 야률류가는 반란을 일으키고 거란족을 규합하여 1213년에 《대료수국》을 세웠다. 10여만의 대군을 가지고있던 야률류가는 같은 해 12월에 포선만노가 거느린 금나라의 토벌군을 쳐부시였다. 이어 다시 토벌하러 온 금나라의 좌부원수 이라도의 10만군사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수도를 농안으로부터 함평(개원)으로 옮기였다. 한편 야률류가에 의하여 격파된 포선만노는 금나라를 배반하고 1215년 10월에 동경(료양)을 차지하고 《대진국》을 세웠다. 그후 거란귀족내에서 발생한 권력다툼에 의하여 야률류가는 정권을 빼앗기고 칭기스한에게 투항하였다. 이어 야률류가는 몽골군대를 끌고와서 《대료수국》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9만명에 달하는 《대료수국》의 거란유민들은 류가가 끌고온 몽골군대에게 쫓기여 압록강북쪽에까지 밀려내려왔다. 이때 거란인들은 감국 걸노와 행 원수 아아가 지휘하고있었다. 이들은 토벌을 피하여 1216년에 굶주린 맹수마냥 고려땅으로 기여들었는데 목적은 식량을 략탈하여 주린 배를 채우고 그다음은 고려의 땅 어느 한모퉁이를 강점하고 살자는것이였다. 거란인들의 침입에 의하여 고려는 일부 령토를 강점당할 엄중한 정세하에 놓이게 되였으며 인민들은 애써 수확한 열매를 송두리채 빼앗기게 되였다. 이때 고려는 거란인들이 침습했다는 급보를 받고 상장군 로원순을 중군병마사로, 상장군 오응부를 우군병마사로, 대장군 김취려를 후군병마사로 하는 3군을 편성하여 서북면으로 출동시키였다. 3군은 조양진, 련주, 구주 등지에서 여러차례 싸워 침략군에게 큰 참패를 안기였다. 그러자 적들은 그이상 분산작전을 하지 못하고 개평역에 병력을 집중하였다. 하여 고려군 주력은 더 전진하지 못하게 되였다. 우군은 서산기슭에 자리잡고 중군은 평지에서 적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 약간 퇴각하여 독산에 주둔하였다. 불리한 형세를 만회하지 않으면 완전히 피동에 빠질 위험이 조성될수도 있었다. 적의 포위망은 시시각각 좁혀지고있었다. 이때 김취려는 결연히 칼을 빼들고 말에 올라 장군 기존성과 함께 적들속으로 공격해들어갔다. 겁에 질린 적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포위망은 헝클어지게 되였다. 그 기세로 적을 추격하여 개평역을 지나자 역 북쪽에 매복하였던 적들이 내달아 중군을 맹렬히 공격해왔다. 김취려는 군사를 이끌고 재빨리 반돌격에로 넘어가 적들을 물리쳤다. 이 개평역전투의 승리는 무비의 용감성으로 포위망을 뚫고 주동을 쟁취한 다음 그것을 확고히 견지한 결과에 이룩된것이였다. 그런데 그날 밤 중군병마사 로원순은 중군이 적들의 공격을 받은데 겁을 먹고 소극적인 전투방책을 김취려에게 제기하였다. 《적은 다수요 우리는 소수일뿐아니라 우군도 아직 도착하지 않은 형편이며 출발할 때 3일분의 군량밖에 가지지 못한것을 이미 다 소비하였으니 연주성(개천)으로 후퇴하여 후방의 원조를 기다리는것이 좋지 않을가?》 이것은 애써 쟁취한 주동을 다시 잃는다는것을 의미하였다. 김취려는 그것을 허용할수 없었다. 《아군이 여러번 승리하여 투지가 오히려 왕성하니 한번 더 싸운 후에 다시 의논하는것이 좋겠소이다.》 적들은 묵장벌판에 진을 치고있었는데 아직은 기세가 왕성하였다. 김취려가 장수 문비와 함께 적진을 가로 잘라놓으니 돌진하는 곳마다 적병들이 쓰러졌으며 세번 싸워 세번 다 이기는 큰 승리를 달성하였다. 그런데 이 격전에서 김취려의 맏아들이 애석하게도 전사하였다. 그러나 김취려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김취려는 부대를 거느리고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여 수천명의 적을 살상하였다. 급해맞은 적들은 부녀들과 아이들을 버리고 달아났다. 고려군이 연주를 지날 때에 적의 후속부대가 또 우리 국경안으로 들어온다는 정보를 듣고 전군과 중군은 먼저 박주(평안북도 박천)로 돌아가고 김취려는 치중(식량과 마초)부대를 보위하면서 천천히 행군하였다. 사현포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적군이 습격하여왔다. 김취려가 중군과 전군에 급보로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그들은 자기 안전만을 생각하여 구원하지 않았다. 김취려는 홀로 힘껏 싸워서 적을 물리치고 끝내 수송부대를 보호하여 박주에 이르렀다. 로원순은 서문밖에까지 나와 영접하면서 《갑자기 강적을 만났는데 적의 기세를 꺾었으므로 짐을 운반하는 병사들로 하여금 자그마한 손실도 없게 하였으니 이것은 당신의 힘이다.》라고 치하하고 마상에서 술을 부어 축배를 들었다. 량군의 장병들과 여러 고을의 백성들이 모두 절하며 인사를 드렸다. 《이번 적의 강점지에서 강적과 맞서 싸우는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개평, 묵장, 향산, 원림의 여러 전투에서 후군이 매번 선봉으로 싸웠으며 적은 병력으로 매번 대군을 격파하여 우리같은 사람의 생명을 보존케 하여주니 그 은덕에 보답할길이 없어 오직 장군께 축수를 드릴뿐입니다.》 1217년 2월 3만명의 거란군이 장성을 넘어 정주(정평)계선으로 쳐들어왔다. 이때 김취려는 금오위 상장군으로 임명되였다. 고려정부는 5군을 편성하여 적을 막게 하였으나 안주 태조탄에서 패하여 물러섰다. 김취려는 형세를 역전시켜보려고 문비, 인겸 등 장수들과 함께 칼을 휘두르며 용감히 싸웠다. 하지만 인겸은 전사하고 김취려는 심한 부상을 입게 되였다. 다시 조직된 5군이 전과가 없게 되자 무신집권자 최충헌은 최원세대신 김취려를 전군병마사로 임명할것을 제의하였다. 하여 김취려는 부상당한 몸이 추설 사이없이 다시 전장에 나섰다. 고려의 전군과 우군은 양근, 지평에서 적군과 여러번 싸워 승리하고 많은 전리품을 로획하였다. 고려군이 황려현 법천사까지 적을 추격하고 독점으로 옮겨 류숙할 때 중군병마사 최원세는 김취려에게 《래일 행군할 길이 두갈래인데 어느 편으로 가야 하겠소?》라고 물었다. 김취려는 《군대를 나누어서 좌우의 팔과 같이 서로 호응하면서 행군하는것이 좋지 않겠소이까.》라고 대답해주었다. 고려군은 김취려의 제의대로 두갈래길로 행군하여 맥곡에서 량군이 합세하여 적과 싸워 300여명을 살상하고 제주의 개울가까지 추격하였다. 이때 적의 시체가 개울물을 덮으며 내려갔다고 한다. 분산과 집중으로 적을 소멸한 이 전투는 김취려의 군사적재능을 잘 보여주었다. 이후 중군병마사 최원세는 김취려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꼭 그와 협의하여 군사를 쓰군 하였다. 3일후 고려군은 적을 추격하여 박달고개에 이르렀다. 이때 동남도 가발병마사인 대장군 임보도 증원병을 거느리고 와서 합세하였다. 중군병마사 최원세는 두루 지형을 돌아보고나서 김취려에게 자기 의견을 제기하였다. 《령마루터기는 대군이 머무를 곳이 못되니 산아래로 내려가는것이 어떻소?》 김취려가 반대하였다. 《전술상으로 보면 인심의 단결이 귀중한것은 물론이나 지형의 유리함도 경시할수 없소이다. 만약 적들이 먼저 이 고개를 점령하고 우리가 그밑에 있게 되면 아무리 원숭이같이 민첩한 군대라도 통과할수 없을것이어늘 하물며 인간으로서 어떻게 통과하겠소이까.》 그리하여 고려군은 령마루에서 숙영하게 되였다. 이튿날 동틀무렵에 적군이 령 남쪽으로 진출하여 먼저 수만명의 병력을 나누어 령 좌우고지로 올라오면서 그 고지를 점령하려고 하였다. 김취려가 장군 신덕위, 리극인으로 하여금 좌측을 담당하고 최준문, 주공예로 하여금 우측을 담당하게 하며 자신은 중간에서 북을 울리면서 지휘하니 군사들은 유리한 고지에 의거하여 결사적으로 싸웠다. 고려군이 적들을 내려다보고 함성을 지르면서 앞을 다투어 돌격하니 적군은 크게 패하여 로약자들과 부녀들, 병기와 수송기재 등을 내버리고 모두 도망쳤다. 적들은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하여 남으로 진공할 계획을 포기하고 모두 동쪽으로 달아났다. 박달령전투승리를 계기로 김취려의 위신과 신망은 더욱 높아졌다. 부하들과 병졸들은 항상 전투지휘를 옳게 하여 승리에로 이끌어주는 그의 지휘를 받으려고 원하였다. 승리한 기세로 적을 추격하여 명주(강릉) 대관령에 이르니 적들은 이미 함주(함흥)를 거쳐 녀진지역으로 도망친뒤였다. 김취려는 방어주력을 거느리고 흥원진으로 옮겨가서 주둔하였다. 그러던중 예주 주천에서 갑자기 병에 걸렸으므로 부하들이 후방에 가서 치료하기를 권하였다. 하지만 김취려는 결연히 반대하였다. 《차라리 변경의 귀신이 될지언정 어찌 집안에서 편안히 있기를 원하겠는가!》 이 말을 들은 부하들과 병졸들은 김취려의 높은 애국심과 헌신성에 탄복하였다. 장성밖으로 도망쳤던 거란침략자들은 1217년 11월에 또다시 떼를 지어 고려에 기여들었다. 고려정부는 수 사공 조충을 서북면 원수로, 김취려를 병마사로 하여 5군을 편성하였다. 고려군은 파괴와 략탈을 일삼는 무리들에게 곡주(곡산), 숙주(숙천) 등지에서 여러차례 타격을 주었다. 급해맞은 적 주력은 강동성으로 밀려들었다. 고려군도 거란군을 치기 위해 강동성을 포위하고 성밖에 진을 쳤다. 이해 12월 몽골군 1만명과 동진군 2만명이 거란군을 친다는 구실밑에 강동성으로 달려들었다. 새로 쳐들어온 위험한 세력인 몽골군과 동진국 군대들이 거란침략군을 격멸한후 어떻게 나오겠는가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김취려는 몽골, 동진군 장수와의 관계에서 먼저 주동을 쟁취하여 그들의 군대를 거란침략군을 격멸하는데 효과적으로 리용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래야만 거란군을 손쉽게 격멸할뿐아니라 작전이 끝난 후 몽골과 동진국 군대를 곧 물러가도록 할수 있기때문이였다. 몽골군 장수 합진은 앞으로 고려군과 협동작전문제를 토의할 장수를 보내달라는것과 함께 군량을 요구하였다. 누구든 고려측 대표로 몽골진영으로 가야만 했으나 횡포한 몽골군영으로 가겠다고 선뜻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김취려는 조충에게 《나라의 중대사를 놓고 사양하지 않는것이 신하된 자의 도리라고 할수 있소이다. 제가 가서 그 일을 맡아하겠소이다.》라고 제기하였다. 조충은 그의 애국심과 헌신성에 감동되였으나 군사실무에 밝은 그를 위험한 곳에 선뜻 보낼수 없었다. 그것은 고려군의 운명과도 관계되는 문제였던것이다. 《군중의 모든 일을 공에게 의지하고있는데 공이 가면 어찌하오?》 하지만 김취려의 결심을 돌려세울수 없었다. 이듬해에 김취려는 지병마사인 한광연을 비롯한 10명의 장군과 정예부대를 거느리고 몽골진영으로 갔다. 그가 도착하자 몽골장수 합진은 영문앞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그를 맞이했다. 《귀국이 우리와 동맹을 맺으려면 먼저 몽골임금에게 절하고 다음은 동진국 임금에게 절해야 하오.》 《하늘엔 태양이 두개 있지 않고 백성에겐 두 임금이 없는 법인데 어찌 두 임금이 있을수 있겠소.》 김취려의 도도하고 사리정연한 주장앞에 말문이 막힌데다가 김취려장군의 장대한 몸매, 위엄있는 긴 수염, 불이 이는듯 한 눈길에 위압되여 합진은 그이상 부당한 요구를 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긴장한 분위기는 풀려지고 협동작전문제는 순조롭게 해결되였다. 합진은 김취려의 인품에 끌리고 자기보다 10살이상이나 우인것을 알고는 형님으로 깍듯이 존대하였다. 며칠후 고려군 원수 조충이 찾아왔는데 그가 김취려의 상급일뿐아니라 그보다 나이가 우이라는 말을 듣고 합진은 그를 큰형님으로 대우하였다. 당시 남의 나라를 침략하여 파멸시키거나 복종시키는 법만을 알고있던 몽골장수에게 이와 같은 충격적인 일이 생겨난것은 력사적으로 고려가 침략자를 물리친 강한 나라로 알려졌을뿐만아니라 김취려의 름름한 기상과 위엄있는 태도에 압도당하였기때문이다. 1219년 1월 강동성을 탈취하는 협동작전은 성과적으로 실현되여 드디여 5만명의 거란군은 성밖으로 나와 항복하였다. 고려군은 그 우두머리 100여명의 목을 자르고 나머지는 고려땅에 남아서 살게 하였는데 거란인들이 모여사는 곳을 《거란장》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김취려는 거란침략자와의 싸움에서 시종 주동을 틀어쥐고 싸웠기에 승리를 이룩할수 있었다. 1219년 10월 의주별장 한순, 랑장 다지 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고려봉건정부에서는 추밀원 부사 리극서로 중군을 거느리게 하고 리적유로 후군을, 김취려로 하여금 우군을 거느리고 반란군을 토벌하게 하였다. 다음해에는 김취려를 추밀원 부사로 임명하고 리극서와 교체하여 중군을 지휘하게 하였다. 바빠맞은 한순 등은 금나라의 우가하에게 투항하였다. 우가하는 한순, 다지 두명을 유인하여 죽인 후 그들의 머리를 고려 수도로 보내여왔다. 3군의 장수들은 당시 역적들의 반란에 가담한 여러 성들에 대하여 죄를 줄것을 정부에 요청하였다. 이때 김취려는 그 요청을 반대하였다. 《옛날책에 이르기를 <그 괴수를 섬멸하거든 협박에 의하여 가담한 자는 죄주지 말라!>고 하였다. 대군이 이르는 곳에는 료원의 불길과 같아서 죄없는 백성들도 재난을 많이 당하고있거늘 하물며 거란의 침략으로 인하여 관동(강원도)지방이 페허로 되였는데 이제 또 우리 군대를 내놓아 나라의 울타리인 변방의 성을 허물어버리는것이 옳은가? 나머지 사람들은 일체 죄를 묻지 말라!》 그리고 관리들을 의주로 파견하여 피난민들을 안착시키게 하였다. 이처럼 김취려는 적을, 원쑤를 많이 만들지 않는것이 나라를 무사하게 하며 승리할수 있는 방책으로 됨을 잘 알고있는 장수였다. 김취려가 거란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싸우던 시기는 가장 곤난한 때였다. 고려의무병제의 와해로 군사의 징집이 매우 어려운데다가 그때 정권을 장악하고있던 무신집권자 최충헌은 자신의 신변과 권력을 지키기 위하여 정예한 군사들은 모두 자기 사병부대에 넣고 이 부대는 전선에 출동시키지도 않고있었다. 이러한 때 장수로 된 김취려는 검소하고 또 정직하며 충절과 의리를 신조로 삼았으며 군대를 통솔함에 있어서는 명령이 엄격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군사들이 인민들의 재물을 침범하는것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술이 생기면 잔을 가져다가 병졸들과 함께 골고루 나누어 마시였기때문에 병사들은 그의 명령이라면 목숨을 내대고 집행하였던것이다. 김취려는 또한 강동전투에서의 공로를 다 조충에게 넘겨주었다. 그리하여 김취려는 장병들의 신망을 얻을수 있었으며 이것이 그에게 승리를 가져다준 비결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그는 전쟁터에 나서서 적군과 싸울 때에는 신기한 전술을 많이 써서 큰 공을 이루었지만 한번도 그런 공적을 자랑한적이 없었다고 한다.
김취려는 그후 추밀원사, 병부상서, 참지정사, 시중 등 고위관직을 지내였다. 그는 재상으로 된 후에는 정직하게 하부를 통솔하였으므로 부하들이 감히 그를 기만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26) 림기응변의 전술로 성을 사수한 박서
정황이 수시로 변하는 전투행정에서 그때그때의 사정과 형편을 보아가며 그에 맞게 대응하는것은 전투의 승리를 담보하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된다. 박서가 지휘한 구주성방어전투는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중세 수성전의 모범의 하나로 된다. 박서는 죽주사람이며 그의 생존년대와 가계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전해지는것이 없다. 다만 그가 고려 23대왕 고종(1214-1259년)때에 활약한 사람이였다는것뿐이다. 1227년 10월 칭기스한이 죽고 그의 아들 오고타이가 임금으로 되자 그는 1231년 8월 살례탑으로 하여금 수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침범하게 하였다. 몽골통치배들의 침략목적은 고려의 령토를 점령하고 인민들을 노예화하며 그 재부를 강탈하자는데 있었다. 몽골침략군의 기본주력은 압록강을 건너 서경을 향하여 진격하였고 일부 부대는 구주성을 목표로 물밀듯이 쳐들어왔다. 이때 구주성안에는 서북면 병마사 박서의 지휘밑에 정주분도장군 김경손, 삭주분도장군 김중온 그리고 삭주, 정주, 위주, 태주의 고을원들이 군대를 거느리고 모여와있었다. 박서는 김중온으로 하여금 성의 동쪽을 담당하게 하고 김경손은 성 남쪽을, 도호별초와 위주, 태주의 별초 250여명은 동, 서, 남쪽으로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성의 방어배치를 통해서도 박서의 군사적재능을 엿볼수 있다. 그는 말을 탄 기병이 공격하기 어려운 동면에는 겁기가 있고 군무에 밝지 못한 김중온을 배치하고 적들의 공격이 집중될수 있다고 본 남면에 용맹하고 지략이 있는 김경손을 세웠다. 그의 예측대로 적들은 후에 남문을 집중공격하였다. 박서는 첫 전투에서 침략군의 예봉을 꺾어놓고 방어군의 사기를 북돋아주는것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김경손에게 그 임무를 주었다. 김경손은 12명의 용사들을 거느리고 남문을 집중공격해오는 침략군을 맞받아 돌진하였다. 그는 적의 선두에서 검정말을 타고오는 적장을 단 한대의 화살로 쏘아맞히고 용사들과 함께 한바탕 적진을 휘몰아쳤다. 그는 팔에 화살이 박혀 피가 흘렀으나 북치는 손을 잠시도 멈추지 않고 결사대원들을 고무하였다. 4~5차례의 싸움끝에 적들은 물러갔다. 김경손은 대오를 정돈한 후 기세충천하여 성으로 돌아왔다. 박서는 돌격대원들을 뜨겁게 맞아주었다. 12명 용사들의 투쟁모습에서 성안 군민들은 큰 힘을 얻었다. 그들은 반드시 싸워이길 결사의 각오만 가진다면 그 어떤 강적도 물리칠수 있다는 신심을 가지게 되였다. 얼마후 적들은 첫 전투에서 패전한 복수를 하려는듯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몽골침략군은 구주성을 여러겹으로 포위하고 밤낮으로 서, 남, 북문을 공격하였다. 성안의 고려군사들은 완강히 방어하다가 이따금 반돌격으로 적군을 격퇴하였다. 당황한 몽골군은 생포한 위주부사 박문창을 성안으로 들여보내여 항복을 권유해보았다. 박서는 박문창의 머리를 단칼에 베여 성밖으로 내던졌다. 악에 받친 몽골침략군은 정예군사 300명을 선발하여 북문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박서는 방어군을 지휘하여 이를 물리쳤다. 이렇게 구주성공방전은 밤낮없이 계속되였다. 몽골침략군은 이번에는 초목을 쌓은 차를 굴리면서 진공하였다. 성문을 불사르려는것이였다. 박서는 지체없이 포차로써 끓는 쇠물을 쏟아부어 쌓은 풀을 불태워버리게 하였다. 몽골침략군은 황급히 퇴각하였다. 몽골군은 루차(화살과 돌을 막을수 있게 한 공성기재)와 대상(루차를 좀 간단히 한것)을 만들어 그것을 소가죽으로 싼 다음 그안에 졸병들을 넣어가지고 성밑으로 바싹 접근하여 지하도를 팠다. 박서는 성밑으로 구멍을 뚫고 쇠물을 쏟아부어 루차를 불사르고 땅을 꺼지게 하여 지하도를 파던 몽골군 30여명을 깔려죽게 하였다. 또 마른 짚에 불을 붙여 대상을 불태우니 적들은 혼란에 빠져 뿔뿔이 달아났다. 몽골군은 다시 대포차 15문을 가지고 성의 남쪽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그러자 박서는 성우에 루대를 쌓고 포차를 쏘아 돌을 날려 쳐물리쳤다. 몽골군은 금나라와의 여러차례 전투에서 공성방법을 체득하였고 여러 종류의 공성기재도 가지고있었다. 몽골군은 기름으로 장작을 적시여 쌓아놓고 불을 질러 성을 공격하였다. 박서는 거기에 물을 끼얹게 하였는데 그러자 불은 더욱 성하였다. 곧 진흙을 물에 타서 던지게 해서야 불이 꺼지였다. 몽골군은 이번에는 또 수레에 풀을 싣고와서 불을 질러 초루(성문우에 있는 높은 루 즉 망을 보는 곳)를 공격하였다. 박서는 미리 이곳에 물을 준비하였다가 끼얹게 하였다. 불길은 곧 사그라지고말았다. 몽골군은 성을 포위한지 30일동안 갖은 방법을 다하여 공격하였으나 박서는 그때마다 그에 맞는 방법으로 막아냈다. 그리하여 몽골침략군은 막대한 유생력량의 피해를 보고 포위를 풀고 달아나면서 《이 성은 적은 군사로써 큰 적을 대적하니 하늘이 돕는바요, 사람의 힘이 아니다.》라고 비명을 질렀다. 이와 같이 몽골군은 한달동안이나 성을 포위하고 모든 수단을 다하여 공격하였으나 박서가 구주성군민들을 지휘하여 림기응변의 전술로 막아냄으로써 부득이 퇴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렇게 구주성의 제1차 방어전은 고려군의 승리로 끝났다. 1231년 10월하순부터 구주성군민들의 제2차 방어전이 벌어졌다. 몽골침략군은 안북성(안주)에서 우리 방어군과 전투를 진행하면서 동시에 구주성에 대한 공격을 또다시 개시하였다. 몽골침략군은 서북면 여러 지방에 널려진 군사들을 전부 긁어모아가지고 달려들었다. 몽골군이 포차 30문을 배치하고 돌을 날려 성벽 50간을 파괴하자 박서는 즉시로 이를 수축하게 하고 또 굵은 쇠줄로 묶어놓게 하였으므로 몽골침략군은 다시는 공격하지 못하였다. 이때를 틈타서 박서는 군사를 거느리고 반공격전을 벌려 큰 승리를 거두었다. 성밖에 나와 대전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던 몽골침략군은 대항도 못하고 피동에 빠져 유생력량의 큰 손실만을 보았다. 12월초에 살례탑은 개경정부에 강화를 제기하면서 구주성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감행하였다. 몽골침략군은 다시 대포차로써 구주성을 공격하였다. 박서도 이에 대항하여 포차를 쏘아 돌을 날리여 적병들을 수많이 쳐죽였다. 몽골침략군은 부득이 퇴각하여 목책을 세우고 방어를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살례탑은 할수없이 통사 지의심과 학록 강우창을 보내여 회안공 정의 편지를 가지고 와서 항복하라고 요구하였으나 박서는 거절하였다. 살례탑이 다시 사람을 보내여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박서의 결심을 돌려세울수 없었다. 몽골침략군이 이번에는 운제를 만들어 공격하자 박서는 대우포(큰 날을 가진 무기)로써 요격하여 모조리 쳐부셨다. 후에 고려와 몽골사이에 강화가 체결된 후 70살 가까이 나는 몽골의 한 장수는 성밖에 이르러 성벽과 기재를 돌아보고 감탄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15살에 군인이 된 후 천하의 성지에 대한 공격전을 다 보았으나 이와 같이 공격을 받으면서도 끝내 항복하지 않는것은 본 일이 없다. 성안의 장수들은 후날 반드시 장상이 될것이다.》 박서가 지휘하는 고려군은 수성전에서 시종일관 주동을 틀어쥐고 림기응변하여 싸웠으며 첫 전투에서 승리하여 침략군의 예기를 꺾어놓아 그들을 피동에 몰아넣을수 있었다. 특히 몽골침략군이 예견하지 못했던 때에 불의에 성밖으로 나와 여러번 놈들을 타격한것은 넓은 초원전투에서 주동을 쟁취하고 마음대로 싸울수 있었던 몽골기병을 궁지에 몰아넣을수 있었다. 박서의 지휘밑에 진행된 구주성방어전투의 승리는 침략자들에게 큰 타격을 주고 그후 계속되는 몽골의 침략을 반대하는 고려인민들의 투쟁을 크게 고무하였다. 몽골과의 강화에 항의하여 벼슬을 내놓고 고향에 내려갔던 박서는 그후 문하평장사로 되였다.
27) 노비문서를 불사른 김윤후
전쟁에서 결정적역할을 하는것은 어디까지나 사람, 인민대중이다. 생사를 판가리하는 싸움에서 인민대중의 무궁무진한 힘을 조직동원할줄 아는 장수만이 참된 명장이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승려출신의 김윤후, 바로 그는 그런 장수들중의 한 사람이였다. 그의 생존년대와 가문에 대해서는 전해지는것이 없다. 다만 그가 고려 23대왕 고종때 사람으로서 일찌기 승려로 되여 백현원이라는 자그마한 절에 있었다는 기록만이 있다. 당시 고려는 세계의 많은 지역을 점령하고 위세를 떨치던 몽골의 거듭되는 침입을 물리치며 나라의 주권을 사수하기 위한 가렬처절한 싸움을 벌리고있었다. 1232년 7월 고려봉건정부는 수도를 개경으로부터 강화도에로 옮기였다. 이것은 해전에는 무능한 몽골침략군의 약점을 리용하여 수도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고려정부가 강화도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몽골임금 오고타이는 1232년 8월에 살례탑을 시켜 다시 고려를 침략하게 하였다. 살례탑은 몽골침략군을 끌고 압록강을 건너서자 곧바로 개경에 덤벼들었다. 당시 개경에는 류수병마사가 거느리는 수천명의 관군과 노비들을 비롯하여 강화도에 들어가지 못한 인민들이 남아있었다. 개경의 군민들은 포위공격하는 침략자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성을 끝까지 지켜냈다. 살례탑은 개경을 점령하고 이어 강화도를 점령하려던 초기의 침략계획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계속 밀고내려갔다. 그러던중 살례탑은 광주성(경기도)군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게 되였다. 광주성군민들은 완강한 방어를 하다가 기회만 있으면 성밖으로 나가 몽골군을 기습하기도 하였다. 침략을 단념하지 않은 살례탑은 계속 남하하여 처인성(오늘의 경기도 룡인)에 이르렀다. 처인성은 수주에 속하였던 부곡으로서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일반 군, 현의 량인보다 더 천대를 받았다. 처인성인민들은 침략자가 쳐들어오자 자발적으로 대오를 편성하여 용감히 싸웠다. 살례탑은 자그마한 처인성을 깔보고 접어들었으나 처인성인민들의 완강한 항거에 의하여 성이 쉽게 함락될수 없음을 깨닫고 성밖 산중에서 잠시 휴식하기로 하였다. 백현원에 있던 김윤후는 몽골침략자들이 쳐들어오자 잠시 처인성으로 피난하였다. 항상 원쑤들에 대한 불타는 증오심을 간직하고 무술을 익히고 병서를 터득해온 그는 처인성의 군민들과 함께 싸우며 어떻게 하면 적장 살례탑을 쏴죽이겠는가 하는 생각을 굴리고있었다. 아무리 흉포한 몽골침략군이라고 해도 적장이 없고 보면 대가리없는 뱀이 될것이라는것은 불보듯 명백하였다. 그러나 좀처럼 기회가 차례지지 않았다. 어느 날 이른 아침 적장 살례탑은 부하 3~4명을 데리고 성을 향해 천천히 말을 몰아오고있었다. 싸움터에서 일생을 보내면서 야전, 공성전을 수다하게 겪어본 살례탑은 도대체 이 자그마한 성이 무엇을 가지고 대군과 맞서는지 리해할수 없었던것이다. 살례탑은 성에 다가와 토성을 살폈다. 김윤후는 속으로 쾌재를 올렸다. 이거야말로 하늘이 주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겠는가. 김윤후는 성가퀴에 몸을 숨기고 화살을 날렸다. 화살은 면바로 살례탑의 얼굴에 박히였다. 살례탑은 외마디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나떨어졌다. 천만뜻밖에 지휘자를 잃은 몽골군은 갈팡질팡하다가 황급히 침략군을 거두어가지고 본국으로 내빼고말았다. 1232년 몽골침략군을 물리친 공로는 승려 김윤후의것이였다. 봉건정부는 그에게 무관가운데서 가장 높은 벼슬인 상장군을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전투할 때에 나는 활이나 화살도 가지고있지 않았는데 어떻게 귀한 상을 받겠소이까.》 하며 극구 사양하였다. 고려에 침공하여 항복을 받아내려던 몽골침략자들의 목적은 이번에도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몽골통치배들은 그후에도 고려를 정복하기 위하여 침공을 계속하였다. 1235년에 적장 당고의 지휘하에 제3차 침입을, 1247년 적장 아모간의 인솔하에 제4차 침입을, 1253년 적장 야굴의 지휘하에 제5차 침입을, 1254~1255년 적장 차라대의 지휘하에 제6차 침입을 감행하였다. 포악한 침략군의 말발굽이 닿는 모든 곳이 재더미로 변하고 륙지의 인민들은 싸우다 죽고 굶어서 죽는 눈뜨고 볼수 없는 참상이 빚어지고있을 때 무신집권자 최우는 인민들의 항전을 조직하지 않고 부화방탕한 생활만을 일삼았다. 엄혹한 시련속에서도 고려인민들의 항전은 계속되였다. 고려인민들은 국가적인 방어군이 편성되지 않은 극히 불리한 조건에서도 수십수백명에 지나지 않는 적은 인원으로 맹렬한 습격전을 벌려 몽골침략군을 타격하였으며 호상련계도 없는 고립무원한 형편에서도 수많은 산성들에 의거하여 침략군을 타격하였다. 그 대표적인 전투가 충주성방어전투였다. 1253년 10월 적장 야굴은 침략군의 주력을 거느리고 충주산성을 포위하였다. 이때 충주산성 방호별감으로 되여 산성방어를 책임진 장수는 몽골군의 2차 침략때 적장 살례탑을 쏘아죽인 김윤후였다. 충주성군민들은 용기백배하여 그의 지휘밑에 충주성을 고수하기 위한 싸움에 한사람같이 일떠섰다. 적장 살례탑을 쏘아죽인 명장의 지휘밑에 싸운다는 긍지가 군민들의 사기를 크게 고무하였던것이다. 충주성군민들은 적 주력의 포위공격을 70여일간이나 물리치면서 용감히 싸웠다. 하지만 성안에는 식량이 거의나 떨어진 상태였다. 김윤후의 근심은 컸다. 이 성을 지키지 못한다면 성내 군민들은 몽땅 도륙당할것이였다. 이미 몽골침략군은 여러 지역을 침략하면서 저들에게 완강히 저항한 성들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살륙전을 감행하였다는것을 그도 잘 알고있었던것이다. 성을 잃으면 피해를 당할것은 비단 충주성사람들뿐이 아니였다. 놈들의 발길이 미치는 곳마다에서 수많은 우리 사람들이 억울하게 숨지고 략탈을 당할것이였다. 그러면 어떻게 할것인가. 믿을것은 대중밖에 없었다. 병사들만이 아니라 관노를 포함하여 성안의 모든 인민들을 투쟁에로 불러일으켜야 하였다. 그는 이미 성이 위험에 처하자 팔을 부르걷고 달려나와 용맹을 떨치던 노비들을 보며 느낀바가 컸었다. 그들을 더욱 분발시키자면… 김윤후의 눈길은 관노의 명부에서 멎었다. 위험한 일이다. 죽음도 각오해야 할 위험한 일이였다. 수백년동안 내려오는 노비제도는 그 누구도 건드릴수 없었다. 정부가 월권행위를 한 그를 용서할수 있겠는가. 김윤후는 도리머리하였다. 성을 지키고 백성을 살리며 나라를 보존할수만 있다면 내 한목숨이 무엇이랴. 김윤후는 결심하였다. 그는 곧 군인들과 노비들을 모이게 하였다. 《모두 내 말을 들으라. 누구든지 힘을 다 바쳐 싸우는 사람에게는 귀천의 차별이 없이 벼슬과 작위를 줄것이다. 너희들은 내 말을 의심하지 말라!》 김윤후는 손에 들었던 관노(관가에 속한 노비)를 등록한 명부를 불에 태웠다. 그것을 목격하고서야 누군들 김윤후의 말을 믿지 않으랴. 모여선 군중의 가슴은 격정으로 설레였다. 특히 노비들이 받은 충격은 누구보다 컸다. 김윤후는 또 로획한 소와 말들을 나누어주었다. 대중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듯 높았다. 온 성이 한덩어리가 되여 결사의 각오를 가지고 침략자와 맞서싸웠다. 몽골침략군은 충주성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퇴각하였다. 충주성은 고수되고 남방인민들은 침략의 위험을 가시게 되였다. 충주성방어전투의 승리, 이것은 전적으로 성안의 군민대중 특히는 자유를 갈망하는 노비들과 같은 천민들이 결사적으로 싸운 결과였다. 바로 노비문서를 불살라 대중의 투쟁열의를 더욱 고조시킴으로써 성을 지켜낸 김윤후이야말로 재능있는 군사가였다. 고려봉건정부는 위기일발의 순간에 최후의 결심으로 최상의 성과를 이룩한 김윤후의 공적을 평가하여 감문위 상장군의 벼슬을 주었다. 그리고 기타 군공이 있는 사람에게는 관노와 백정(자기 소유의 경작지가 적거나 없어서 평시에는 군인으로 되지 못하고 유사시에만 군인으로 되는 농민)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공로에 따라 벼슬을 주었다. 그후 김윤후는 동북면 병마사를 거쳐 수 사공 우복야로 있다가 벼슬을 그만두었다.
이처럼 김윤후는 적의 2차 침입때는 적장 살례탑을 쏘아죽이고 5차 침입때에는 노비문서를 불사르는 용단을 내려 대중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적들의 두차례의 침입을 격퇴하는데 크게 기여한 민족의 장한 아들들가운데 한 사람이다.
28) 삼별초의 항전을 지휘한 배중손과 김통정
배중손과 김통정은 13세기 몽골침략자들에 대하여 투항주의적립장을 취하던 봉건통치배들을 반대하는 인민들과 군인들의 투쟁기세에 편승하여 삼별초군을 거느리고 투쟁에 나섰던 고려의 장수들이다. 배중손(?-1271년)은 고려 24대왕 원종(1260-1274년)때에 장군벼슬을 지내던 장수이다. 그는 국왕과 봉건정부가 반몽립장을 견결하게 취하던 무신집권자 림유무를 제거한 후 1270년 5월 23일 수도를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다시 옮길것을 공포하자 삼별초를 불러일으켜 이를 결사적으로 반대하였다. 5월 29일, 원종왕은 개경환도를 반대하고 창고를 털며 기세를 올리는 삼별초군인들의 굳은 결심을 움직일수 없게 되자 장군 김지저를 보내여 삼별초를 해산하고 그 명부를 빼앗아오게 하였다. 삼별초는 3개의 별초부대인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을 가리킨 말로써 별초란 특별히 선발한 군대라는 뜻이였다. 삼별초는 주로 피압박인민의 출신으로 이루어진 봉건국가의 무력으로서 여기에는 몽골침략자들을 반대하는 립장에 서있었던 무신들의 세력이 강하게 침투되여있었다. 또한 삼별초는 30여년간 몽골침략자들을 반대하는 격렬한 싸움을 통하여 단련된 군대였다. 해산명령을 받은 삼별초는 굴하지 않고 폭동으로 대답하였다. 6월 1일, 삼별초는 장군 배중손, 야별초 지유 로영희의 지휘밑에 폭동을 일으켰다. 배중손 등은 사람들을 거리로 파견하여 《몽골의 대병이 이르러 인민들을 살륙하고있는데 나라를 도우려는 자들은 모두 격구장으로 모이라!》고 웨치게 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금강고라는 무기고를 헤치고 무기를 꺼내여 무장하고 성에 의거하여 수비를 강화했다. 삼별초항전군은 개경에로 도망치려는 량반관료들의 탈출기도를 누르고 항전참가를 거부한 관료들과 몽골침략자들이 파견한 중들을 거리에서 처단함으로써 외래침략자와 그와 결탁한 자들을 용서치 않으려는 단호한 립장을 보여주었다. 배중손과 로영희는 항전군을 데리고 기세를 올리면서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내세우고 새 정부를 구성하였다. 이것은 조직적인 항전을 벌리려는 그들의 전략적의도를 보여준것이였다. 배중손은 투쟁기지를 진도에로 옮길것을 결심하였다. 그것은 지난 시기의 경험으로 보아 강화도가 바다싸움에 무능한 몽골침략군과 싸우는데는 유리하였지만 원종을 비롯한 강화도의 비밀을 잘 알고있는 개경정부가 적들과 결탁한 조건에서 군사전략상의 의의가 적어졌기때문이였다. 또한 강화도가 개경과 불과 40리밖에 안되므로 항전지휘부에 들어앉은 관료들의 불안과 동요를 막아내기 곤난하다고 생각하였기때문이였다. 진도는 군사전략상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수도인 개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고 물살이 급한 울돌목(명량해협)을 사이에 두고있으므로 개경정부의 군대와 몽골침략군의 공격을 막는데 유리하였다. 또 진도는 남해와 서해의 여러 섬들을 장악하고 륙지인민들을 투쟁에로 불러일으키며 해상전을 틀어쥐고 봉건정부의 조세운반로를 봉쇄하는 등 륙지와 바다를 활무대로 하여 적극적인 항전을 벌리는데서도 매우 유리하였다. 항전군은 1,000여척의 배에 나누어타고 기세드높이 강화도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갔다. 개경정부는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황급히 《추격부대》를 편성하였다. 6월 13일에 김방경이 거느리는 60여명의 개경정부군과 1,000여명의 몽골침략군은 경기도 남양앞바다의 령흥도에 항전군이 머물러있는것을 보고 그 위력에 겁을 먹고 싸워보지도 못한채 도망쳤다. 1270년 8월 19일 항전군은 무사히 진도에 도착하여 새로운 항전기지를 꾸리였다. 그들은 곧 룡장성을 새로 쌓고 궁궐을 크게 지어 하나의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였다. 한편으로 전라도일대를 제압하기 위한 눈부신 활동을 벌리였다.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여 싸움에 일떠설것을 호소하였으며 각 지방관리들에게 삼별초의 활동을 방해하는 자는 처단당하리라는것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전라도관찰사에게 공문을 보내여 수탈한 곡식을 진도에 가져올것을 요구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진도로 모여들었다. 지어 어떤 관리들은 찾아와 인사를 올리였다. 항전군의 세력은 매우 커졌다. 《전라도 토적사》가 되여 삼별초와 싸우려고 라주까지 기여들었던 신사전은 싸워보지도 않고 개경으로 도망쳤다. 금주(경상남도 김해)고을원인 리주 역시 달아뺐다. 이것은 항전군의 세력이 경상도일대까지 미치고있었음을 보여주는것이였다. 배중손은 9월초부터 서남해연안의 여러 고을들에 대한 본격적인 상륙작전을 벌리였다. 뭍에 오른 항전군은 먼저 장흥부를 공격하여 20여명의 정부군을 소멸하고 많은 무기와 식량을 로획하였다. 이어 라주를 공격하면서 일부 군사로 전주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때 라주부사 박부는 항복할 생각까지 하였다고 한다. 고려정부군의 지휘관인 추토사 김방경은 몽골침략군 우두머리 아해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삼견원에 주둔하여 진도를 건너다보면서 진을 치게 되였다. 이때 정부군이나 몽골침략군은 거듭되는 패배로 하여 심히 위축되여있었다. 배중손은 적들의 이러한 심리를 리용하여 심리적공세를 가하기로 하였다. 그는 바다가에 선박들과 군함들을 쭉 늘여세우고 배우에 무서운 짐승그림을 그려 덮게 하였다. 그러한 배들이 바다를 덮을듯 많고 그 무서운 짐승그림들은 물우에 비치여 얼른거리며 마치 살아움직이는듯 싶었다. 배가 움직일 때에는 그 그림들이 어찌나 날아다니는것 같이 빨리 움직이는지 공포를 더해주었다. 정부군과 몽골침략군은 항전군이 맹수부대까지 가지고있다고 벌벌 떨었다. 그들과 힘으로 겨룬다는것은 어리석은 일이였다. 배중손은 적들이 겁에 질려있는것을 포착하고 주동적으로 먼저 북을 울리고 고함을 치면서 돌격하게 하였다. 정부군측은 매번 패하면서도 《명장》 김방경의 통솔밑에 근근히 견디여내고있었다. 배중손은 적들사이에 쐐기를 박아 리간시키는 작전을 설계하였다. 병법에도 친하면 리간시키라 하였으니 지금 적들은 한때 적수가 되여 맞서 싸우던 고려군과 몽골침략군의 련합이므로 능히 리간이 가능하다고 타산하였다. 더구나 몽골측 적장들은 힘내기밖에 모르는 무지한 자들이라 능히 성사될수 있었다. 배중손은 반남현(라주)사람인 홍찬과 홍기에게 임무를 주어 적들에게 파견하였다. 그들은 곧바로 몽골침략군 우두머리 아해를 찾아가 《김방경과 공유 등은 비밀리에 반적(삼별초항전군을 모욕하여 부르던 말)과 서로 내통하고있다 하옵니다.》라고 말해주었다. 아해는 깜짝 놀랐다. 그러지 않아도 고려사람들이 저들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고 또 이번 변란도 저들에게 끝까지 항전할 목적으로 일으키지 않았던가. 그들이 모두 고려의 유명한 장수들로서 서로 함께 복무한 전적이 있으니 몽골을 반대하여 내통할수 있는것이다. 아해는 김방경과 공유 등 고려정부군의 장수들을 붙잡아다 가두고 다로가치에게 공문을 띄웠다. 다로가치는 그들을 호송하게 하고 참지정사 채정을 김방경의 대신으로 임명하였다. 아해는 김방경을 철쇄로 얽어매게 하고 50명의 병졸로 하여금 개경까지 압송해가게 하였다. 후에 김방경은 사건이 해명되여 다시 임명되여 내려왔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두 나라 군대들사이는 더욱 벌어지게 되였고 고려군장병들은 몽골침략군을 질시하고 그들의 무지를 비웃게 되였다. 한편 항전군은 시간을 얻어 싸움준비를 갖추고 목적한 사업들을 추진시키게 되였다. 11월에 배중손은 남해상의 중요한 군사기지인 제주도(탐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만약 제주도를 점령하지 않으면 앞뒤로 공격받을 위험이 있었다. 그리고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있으므로 불리하면 인차 옮겨가 항전을 계속할수 있었다. 고려 개경정부측도 제주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안찰사 권단으로 하여금 대책을 취하게 하였다. 권단은 령암부사 김수에게 군사 200명을 주어 제주도를 지키게 하고 장군 고여림에게 70명을 주어 그뒤를 따르게 하였다. 배중손이 파견한 항전군은 정부군을 격파하고 제주도를 차지하였다. 개경정부에서는 급해맞아 원외랑 박천주를 진도에 사신으로 보내여 항복할것을 권고하였다. 하지만 배중손은 단호히 거부하였다. 1270년 12월 22일 정부군측은 진도항전군에 대한 모험적인 공격을 단행하였다. 진도항전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듯 높았고 진세는 매우 정연하였다. 배중손은 모든 배들에 기치들을 수많이 매달게 하였고 바다가 끓어번지듯 징소리와 북소리를 요란하게 울려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그리고 성우에서도 북을 울리고 소리를 웨치도록 하였다. 몽골침략군 장수 아해는 겁에 질려 배에서 내려 라주로 퇴각하려고 하였다. 단독으로 공격에 나섰던 김방경은 죽을 고비에서 겨우 구원되였다. 싸움은 항전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듬해 고려정부에서는 안세정과 공유가 김방경을 돕지 않았다고 하여 파직시켰으며 원나라정부도 아해를 파직시키고 흔도를 그 대신으로 임명하였다. 고려정부에서는 다시 박천주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투항을 권고하였다. 배중손은 그에게 벽파정에서 연회를 차려주게 하고 위로하면서 의심을 풀고 마음놓고 즐기게 하였다. 그사이에 몰래 병선 20척을 보내여 관군을 습격하여 배 한척을 빼앗고 90여명을 살상하였다. 그리고 박천주만 돌려보내고 함께 갔던 객사 두원외는 억류하였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왔던 《조서》는 돌려보내였다. 항전군의 투쟁소식은 곳곳에 전해져 사람들이 투쟁에 궐기하였다. 1271년 1월 밀성군사람들인 방보, 계련, 박공, 박경순, 박경기 등이 군내 사람들을 모아 장차 진도와 호응하려고 하면서 부사 리이를 죽이고 군, 현들에 통첩을 보내며 기세를 올렸다. 그로부터 한주일후에는 개경의 관노들인 숭겸, 공덕 등이 동료들을 모아 몽골침략자인 다로가치와 봉건통치배들을 죽이고 진도로 가려는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 2월 7일에는 대부도인민들이 숭겸 등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폭동을 일으켜 성에 들어와 략탈을 일삼던 몽골침략군 6명을 쳐죽이였다. 폭동들은 모두 실패하였지만 각지의 인민들에게 고무적힘을 주었다. 1271년 2월에 몽골침략군은 또다시 사람을 보내여 항복할것을 요구하였다. 배중손은 몽골침략군이 철수하면 적들이 요구하는 교섭에 응하겠다고 통보하였다. 그러면서 오히려 적장 흔도가 진도를 《방문》할것을 요구하면서 놈들의 간교한 술책을 야유하였다. 배중손의 지휘밑에 항전군은 1271년 2월 장흥부(전라남도 장흥)와 조양현(전라남도 보성군)을 습격하여 여러척의 전함을 불사르고 수많은 물자를 로획하였다. 3월에는 합포(경상남도 마산시)를 습격하여 감무를 포로하였다. 이어 동래, 금주를 공격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에 대하여 기록에는 《지금 역적(항전군을 모역하여 부른 말)들이 날로 성하여 그 피해가 경상도의 금주, 밀성에까지 미치였고 게다가 또 남해, 창선, 거제, 합포, 진도 등 해변부락에서는 모두다 습격략탈을 당하였기때문에 일체 곡물징발사업은 보장하기 힘들게 되였다. 경상도, 전라도의 공물과 부세는 다 륙상운수로 나르지 못하고 반드시 바다로 운반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역적들이 거점으로 삼고있는 진도는 해상수로의 목구멍과 같은 요충지인 까닭에 래왕하는 선박들은 그곳으로 통과시킬수 없다.》고 원종왕이 개탄한 사실이 전해지고있다. 항전군은 남해, 창선 등 30여개 섬들을 장악하고 전라도, 경상도연안의 여러곳을 드나들면서 남해안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고 몽골의 일본침략계획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해상교통로를 봉쇄하고 고려정부의 조세운반에 엄중한 장애를 조성하였던것이다. 개경정부군과 몽골침략군은 1271년 5월 수천명의 병력과 100여척의 함선을 동원하여 공격해왔다. 김방경과 흔도는 중군을 거느리고 곧바로 벽파정으로 진입하였다. 좌군은 장항(노루목)으로부터, 우군은 동면으로부터 공격하였다. 배중손은 이에 대처하여 적군의 우두머리들이 있는 중군을 집중공격하게 하였다. 적의 좌군이 먼저 섬에 올라 불을 지르며 협공하였다. 배중손은 적을 견제하면서 적의 우군을 공격하였다. 우군은 격파되여 중군이 있는 곳으로 밀려갔다. 항전군은 적군의 배 2척을 로획하고 배에 탔던 적들을 모조리 섬멸하였다. 하지만 중과부적으로 항전군은 패하였으며 배중손도 자기의 생을 마쳤다. 배중손의 실책은 방비를 소홀히 한것이였다. 그는 여러차례 관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자 자만도취하여 관군을 경시하고 방비를 하지 않고있었던것이다. 그리고 항전군지휘부안에 있을수 있는 동요와 간첩활동을 제때에 적발하지 못하였다. 항전군에는 리보, 안방열, 지계방, 강위보, 김지숙, 송숙, 임굉 등 상장군, 대장군, 장군 등의 장수들이 잡혀와있었다. 김지숙이라는 자는 장군으로서 강화도에서 빠져나갈 길이 없게 되자 물에 몸을 던진것을 항전군이 구원해준 자였다. 진도에서 배중손과 항전지휘자들은 그를 죽이려 하였지만 왕으로 앉힌 승화후 왕온이 놓아주게 하고 임무를 맡겼었다. 그는 몸을 항전군에 담그고있으면서도 몰래 항전군의 정황을 두차례나 정부군측에 알려주었다. 정부군측은 그의 자료에 기초하여 항전군의 적지 않은 력량과 함선들이 남해연안 여러 지역에 나가 싸우고있는 기회를 타서 우세한 력량으로 불의의 공격을 가해왔던것이다. 항전군은 끝까지 싸울 결의를 가다듬으며 김통정의 지휘밑에 제2의 투쟁기지로 꾸려놓았던 제주도로 들어갔다. 남해현일대에서 활동하던 류존혁은 80여척의 함선을 거느리고 그뒤를 따랐다. 김통정(?-1273년)은 제주도(탐라)에 내성과 외성을 쌓고 험준한 지세를 리용하여 방비를 강화하게 하였다. 그리고 개경정부의 앞잡이노릇을 하던 왕자 등을 내쫓고 제주도인민들을 투쟁에 적극 인입시켰다. 김통정은 먼저 남해의 추자도, 거제도, 서해의 흑산도를 비롯한 여러 섬들을 장악하여 그곳을 해상에서 기동작전을 벌릴수 있는 전초기지로 삼았다. 새로운 투쟁기지를 확보한 후 김통정은 1272년 봄부터 또다시 투쟁을 조직하였다. 3월부터 6월사이에 회령현(전라남도 장흥군), 대포(전라북도 정읍군), 탐진(전라남도 강진군)을 습격하여 적들을 살상포로하고 조세운반선 수십척을 나포하였다. 그들의 줄기찬 활동으로 바다가지역은 쓸쓸할 정도였다고 한다. 김통정은 한편으로 사람들을 파견하여 적들의 동태를 살피게 하였다. 개경정부는 합문부사 금훈을 초유사로 임명하고 산원 리정과 함께 항복을 권고하는 문서를 가지고 제주도로 가게 하였다. 4월 15일에 떠난 금훈일행은 역풍에 밀려 보마도에 정박하였다가 김희취, 오인봉, 전우 등 항전군장수들이 탄 배 4척을 만나 모두 잡혔다. 김희취 등은 제주도에 가서 김통정에게 보고하고 금훈일행을 끌고 추자도에 와서 구류하고 감시하면서 회답이 오기를 기다렸다. 통정에게서 회보가 오자 김희취 등은 《너희들이 일찌기 사람을 진도에 보내여 우리를 꾀여 우리의 마음을 해이하게 하고는 대군을 이끌고 공격하여 패전케 하였다. 생각컨대 부모처자라는것은 인정상 가장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는 사람들인데 이미 모두다 랍치하여 몰고갔으니 이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원한이 골수에 사무치게 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제 또 우리들을 전멸시키려고 여기에 와서 꾀임수를 쓰려 하는것이다. 너희들은 원래 응당 모두 죽여야 할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이번의 이 일에 대한 우리의 뜻을 누가 가서 전달하겠는가. 그러므로 너희들을 놓아보내니 그리 알라!》라고 꾸짖었다. 그리고 썩고 파괴된 작은 배 한척과 늙은 배군 한사람을 주면서 항복권고문을 되돌려주었다 이것은 제주도에 집결해있던 항전군모두의 심정을 대변한 말로써 그들이 끝까지 싸울 결의를 피력한것이였다. 고려정부에서는 항전군이 조금도 항복하려는 생각이 없다는것을 알고 원나라에 지원을 애걸하였다. 김통정은 11척의 싸움배에 군사 390명을 나누어 싣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조세운반선을 빼앗으며 바다가 주, 현들을 공격하여 함락시킬 계획을 세웠다. 김통정은 항전군으로 하여금 바다에서 적극적인 해상기동작전을 벌리게 하였다. 하여 항전군은 중부조선의 서해안까지 진출하여 개경의 통치배들을 전률하게 하였다. 9월에 항전군은 고란도를 공격하여 병선 6척을 불사르고 조선관(배만드는것을 감독하는 관리)인 흥주부사 리행검과 결성, 람포의 감무를 사로잡아갔다. 11월에 김통정은 대담한 해상기동작전으로 적들의 면전인 안남도호부(경기도 부천시)를 기습하여 공유를 사로잡게 하였으며 몽골침략군의 일본침략거점인 합포를 다시 습격하여 전함 20척을 불사르고 몽골침략군 4명을 사로잡았다. 항전군의 한 부대는 거제현을 공격하여 병선 3척을 불사르고 현령을 사로잡아갔다. 김통정이 파견한 한 선대는 북상하여 경기앞바다에 있는 령흥도에까지 진출하였다. 그들은 그 일대를 돌면서 통치배들에게 위협을 주었다. 1273년 1월 10척으로 이루어진 한 부대는 락안군을 공격하였다. 항전군은 다시 합포를 공격하여 병선 32척을 불사르고 몽골침략군 병졸 10여명을 살상하였다. 항전군 소부대의 해상기동작전으로 바다가지방은 들끓게 되였으며 기습범위는 경기에까지 확대되였고 도로가 제대로 통하지 못하게 되였다. 적들은 할수없이 다시 회유책에 매달렸다. 1272년 8월 김통정의 조카 김찬, 리소와 장군 오인절의 친족인 오환, 오문, 오백 등 5명을 보내여 투항을 권고하게 하였다. 김통정은 김찬은 남기고 나머지는 다 죽여버림으로써 끝까지 항거할 굳은 결심을 표명하였다. 고려정부는 이것을 매우 우려하면서 1273년 2월에 김방경에게 《토벌》을 명령하였다. 김방경은 흔도, 홍다구 등이 인솔한 몽골침략군과 련합하여 1만여명의 병력을 160척의 병선에 나누어싣고 제주도를 공격하였다. 김통정은 바위들사이에 복병을 배치하였다가 함성을 올리면서 일제히 내달아 중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공방전이 계속되던 끝에 정부군은 제주도에 상륙하였다. 항전군은 최후의 거점인 내성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형세가 불리해졌으므로 다른 곳으로 옮길 계획을 하였다. 그런데 한 변절자가 비밀을 넘겨주었다. 김통정은 최후까지 싸울 결의를 가다듬으며 70여명을 거느리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적들이 포위환을 좁히자 김통정은 자결하였다. 끝까지 항거하던 장수 김혁정, 리기 등 70여명은 모두 체포되여 죽었다. 삼별초항전군의 투쟁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안팎의 원쑤들을 다같이 반대하여 3년이라는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된 조직적인 투쟁으로서 고려력사에서 일찌기 류례를 볼수 없는 높은 형태의 투쟁이였다. 삼별초항전군의 투쟁은 외래침략자들과는 끝까지 맞서 싸우려는 우리 인민의 불굴의 기개를 과시하고 몽골침략자들의 일본원정준비 및 송나라침략에 큰 타격을 주었다. 삼별초항전을 지휘한 배중손과 김통정은 견결한 투쟁정신과 불타는 애국심을 지니고 최후의 순간까지 원쑤들과 맞서 싸웠다. 고려왕자신도 제주도의 항전군은 실로 《토벌》하기 어려웠기때문에 몽골에까지 응원부대를 청하지 않으면 안되였다고 자인하였던것이다.
심리전과 맹공격의 배합, 리간책, 령활한 해상기동작전 등 여러가지 군사전법들에 의거하여 3년간 치렬하게 벌어진 삼별초항전군의 투쟁사실은 그 지휘자들인 배중손, 김통정의 이름과 나란히 력사에 길이 남아 전해지고있다.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삶과 문학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