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도서연재 『단군민족의 명인들』(3)

잉어로 강적은 물러가게 한 을두지

프레스아리랑 | 기사입력 2023/01/04 [20:50]

도서연재 『단군민족의 명인들』(3)

잉어로 강적은 물러가게 한 을두지

프레스아리랑 | 입력 : 2023/01/04 [20:50]

 

  © 프레스아리랑



 

 

6) 잉어로 강적을 물러가게 한 을두지 

 

아마도 사람들은 잉어 몇마리로 강적을 물리쳤다면 쉽게 믿으려 하지 않을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다.

너무도 믿어지지 않는 이 묘한 계책을 내놓은 사람은 고구려 8대임금인 대무신왕(18-44년)때의 재상 을두지이다. 그는 25년에 고구려에서 두번째 재상인 우보가 되였고 2년후인 27년에 첫째가는 재상인 좌보가 되였다.

을두지는 28년 7월에 한(후한)나라 침략군이 고구려에 쳐들어왔을 때 훌륭한 계책들을 내놓아 전쟁승리에 크게 기여하고 《출장입상》의 재능을 보여주어 후세에 그 이름을 남겼다.

28년 7월에 있은 고구려와 한(후한)나라사이의 전쟁은 자기 겨레의 옛 강토를 되찾으려고 시종일관 투쟁해오던 고구려와 어떻게 하나 그것을 저지시켜보려는 한나라사이에 벌어진 정의와 부정의, 침략과 반침략전쟁이였다.

28년 7월 한나라통치배들은 빼앗긴 동족의 땅을 되찾기 위한 고구려인민들의 정당한 투쟁을 《죄》로 몰아붙이면서 그에 대하여 《추궁》하려 한다는것을 침략의 구실로 삼았다.

(후한)의 《100만 대병(적들이 지나치게 과장하여 선전하였던것으로 보인다.)》은 일거에 변방의 여러 성들을 점령하고 전과를 확대해가고있었다.

당시 고구려는 령역을 부단히 확장하고 겨레의 옛땅을 모두 되찾으며 이에 따라 정연한 통치체제를 확립하는데 주력하고있었다. 이러한 형편에서 고구려측으로서는 한(후한)나라의 불의의 침공에 대처할 준비를 잘하지 못하고있은것으로 보인다.

적의 침입소식에 접한 대무신왕은 어전회의를 열고 대신들에게 맞받아 공격하는것이 옳은지, 아니면 지키는것이 유리한지에 대하여 의논에 붙였다.

우보 송옥구는 적들이 하늘리치에 거슬리고 사람의 도리에 어긋나는짓을 하고있으니 반드시 성과가 없을것이라고 하면서 험한 지세에 의거하여 불의의 습격으로 적을 물리칠것을 제기하였다.

물론 타당성은 있었다. 당시 고구려는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은 자연지리적조건을 가지고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험한 지형은 혼자서 길을 막고도 만명을 당해낼수 있는 천험의 요새라고 할수 있었다.

하지만 좌보 을두지의 생각은 달랐다.

《페하, 소수인 군대는 강하더라도 대군에게 포로되는것이옵니다. 신이 대왕의 군사와 한나라군사가 어느쪽이 많은가를 헤아려보았는데 꾀로써 칠수는 있을망정 힘으로 이길수는 없소이다.》

대무신왕은 그의 계책에 흥미를 보이였다.

물론 송옥구의 의견가운데 적정에 대한 판단은 비교적 정확하고 험한 지세를 리용하고 불의의 기습전을 조직하면서 맞받아 공격할데 대한 계책도 영 그른것은 아니였지만 만전의 계책은 못되였다. 비록 한(후한)나라 한개 변방군의 군력이라고 하더라도 당시의 력량대비로 보아 고구려군보다 강대하였던것만큼 이를 힘으로 이기기보다는 꾀로써 치는편이 더 나았던것이다.

《꾀로 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무신왕의 물음에 을두지는 자신심을 가지고 대답하였다.

《지금 한나라군사가 멀리 나와 싸우고있으니 그들의 서슬을 당해낼수 없소이다. 페하께서는 성문을 닫고 우리 군사를 튼튼히 하여 적들의 군사가 피로하여지기를 기다려서 나가 치는것이 옳을줄로 아뢰옵니다.》

이것은 청야수성전술로 적의 예봉을 꺾어놓고 그들이 피로하고 지치기를 기다려 반격하자는 책략이였다.

대무신왕은 을두지의 계책을 쓰기로 하였다.

임금은 모든 관료들과 수도안의 백성들, 군사들을 거느리고 수도방위성인 위나암성(지금의 중국 길림성 집안시 산성자산성)에 들어갔다.

적들은 기를 쓰고 성을 공격하였으나 수십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였다. 하지만 적들은 많은 손실을 입으면서도 성에 대한 포위를 풀지 않았다.

대무신왕은 몹시 초조해하였다. 고구려군도 적들의 맹공격을 막아 싸우면서 어지간히 지쳤던것이다.

대무신왕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을두지에게 물었다.

《형세가 더는 지킬수 없게 되였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페하, 한나라사람들은 우리의 암석지대에 물나는 샘이 없다 하여 오래동안 포위함으로써 우리들이 곤난해지기를 기다리는것이옵니다.》

《그래, 무슨 계책이 없는가?》

을두지는 일단 꾀로 시작한 싸움인것만큼 끝까지 꾀로 싸워 승리할것을 결심하였다.

《련못속에 있는 잉어를 좀 잡아서 물풀로 싸고 또한 맛좋은 술을 약간 구하여 한나라군사를 먹이는것이 좋겠소이다.》

적들은 고구려의 산성이 암석지대에 자리잡고있는것으로 하여 물원천이 없을것이며 설사 있다 해도 한여름에는 물소비량이 더욱 많을것이므로 이제는 다 말라버렸을것으로 생각하고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였다. 재능있는 고구려사람들은 산성을 쌓으면서 언제나 물원천을 확보하는데 깊은 주의를 돌리였다. 그것을 증명해주듯 옛성터에는 《음마지》, 《양어지》라는 저수지자리들도 남아있고 지금도 물이 솟아나오는 샘이 두곳에나 있다. 이 샘물들을 적당한 곳에 끌어가서 성안사람들의 물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여러개의 못을 만들었으리라는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오판하고있는 적들에게 성안에 물이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걸고있던 일루의 희망마저 허물어버리는것은 일종의 심리적공세라고 할수 있었다.

보통 깊고 큰못이나 강에서 서식하는 잉어를 성안에 있는 늪에서 잡은것임을 확인시켜주려는듯 물풀로 싸서 맛좋은 술까지 보냈으니 행여나 해서 가까스로 포위를 유지하고있던 적들이 어찌 놀라지 않을수 있으랴. 보급로가 절단되여 식량난을 겪고 한여름이라 땡볕아래서 기갈들고 지쳐있던 적들인지라 이러한 심리적공세의 효과는 더욱 큰것이였다.

모든것은 을두지가 예견한대로 되여갔다.

을두지는 다른 한편으로 우호적인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내게 하였다. 이것은 물러가고싶으나 《100만대병》을 끌고왔다가 패하여 물러가는 적들에게 퇴각의 구실을 만들어주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병법에도 한쪽 길을 틔워주어 퇴각할수 있게 해주어야 저항을 줄일수 있다고 하였으니 을두지의 계책은 도리에 맞는것이라고 할수 있었다.

적장은 《성안에 물이 있으니 졸연히 함락시킬수 없다.》 하여 고구려가 우호적인 태도로 나왔다는것을 퇴각의 구실로 삼아 군사를 끌고 황급히 물러가고말았다.

그리하여 28년에 고구려와 한(후한)침략자들사이에 벌어진 전쟁은 고구려인민들의 빛나는 승리로 끝났다.

침략군은 아무것도 얻어낼수 없었으며 고구려가 되찾은 지역들에 대해서는 더 시비를 걸수 없게 되였다. 여기에 이 전쟁의 승리가 가지는 중요한 의의가 있다.

참으로 명장 을두지는 청야수성전술과 심리적공세를 능숙하게 배합하여 대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지켜낸 재능있는 정치군사가였다.

 

7) 초대국상 명림답부 

 

《인생칠십 고래희》라는 말이 있다. 인생에 70살까지 살기도 쉽지 않다는 말일것이다.

하지만 력사에는 100살에 정계에 나서 정치를 하고 지어 말을 타고 대오의 앞장에서 삼척검을 휘두르며 전공을 세운 사람도 있으니 그가 바로 고구려의 명림답부이다.

명림답부(67-179년)는 11대 태조대왕(53-146년)과 12대 차대왕(146-165년), 13대 신대왕(165-179년)의 세 왕에게 복무한 고구려 연나부 명문귀족출신의 재상이다.

그는 100살을 바라보는 로년기에 차대왕의 그릇된 정사를 바로잡기 위하여 동료들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차대왕을 처단하고 산골에 숨어있던 그의 아우 백고를 왕(신대왕)으로 내세웠다.

166년에 신대왕은 최고벼슬인 좌보와 우보를 합쳐 국상제도를 내오고 명림답부를 초대국상으로 임명하였으며 그에게 중앙과 지방의 군사통수권을 위임하였다. 이것은 그가 군사실무에 매우 밝은 로장이였기때문이다.

명림답부의 군사적재능이 남김없이 과시된것은 172년 한(후한)나라 침략군을 물리친 싸움이였다. 이 싸움에서 명림답부는 섬멸전으로 청야수성전술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고구려의 군사적실권을 장악한 명림답부는 국내 여러 정치세력들의 단합에 힘쓰면서 옛 조선의 땅을 모두 수복하고 나라와 겨레의 안전을 수호하기 위한 군사활동을 부단히 조직전개하였다. 여기서 그는 선비족과 협력하고 고구려와 같은 겨레의 나라인 부여와의 협동작전에 각별한 주의를 돌렸다.

167년 봄 부여왕 부태가 지휘하는 2만명의 부여군이 현도군을 공격할 때 그를 적극 협력하게 하였고 168년 12월에는 선비군과 련합하여 한(후한)의 유주(하북성 북부일대), 병주(산서성일대)를 공격하였다.

유주와 병주를 공격당한 후한통치배들은 이듬해인 169년에 고구려를 반대하는 새 전쟁을 일으켰다. 도료장군 교현, 현도태수 경림은 자기 산하 무력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이때 명림답부를 위시로 한 고구려조정에서는 료동군과 현도군통치배들사이의 모순을 교묘하게 리용하면서 현도태수의 침공을 물리쳤다고 보인다.

169년의 침공에서 이렇다할 성과를 얻지 못하게 되자 후한통치배들은 새로운 침략계획을 작성하고 그 준비를 다그쳤다. 3년간의 준비를 마친 후 172년 11월 《강병》을 동원하여 고구려땅에 쳐들어왔다.

봉화가 전국각지에 타오르고 역졸들은 부지런히 박차를 가하고 채찍을 휘둘러대며 수도인 국내성으로 말을 몰아갔다.

당년 84살의 로왕인 신대왕은 채수염을 내리쓸며 신하들을 굽어보았다. 그의 수북한 긴 눈섭에 가리워진 크지 않은 두눈에는 나라를 침략한 원쑤들에 대한 증오로 가슴 불태우는 믿음직한 신하들의 모습이 언뜻언뜻 비껴갔다.

《그래, 한나라의 대병이 우리 나라를 침공해오니 공격과 방어에서 어느 편이 유리하겠는가?》

조회장이 술렁거리였다.

여러 신하들이 머리를 맞대고 무엇인가 수군덕거리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며 진지하게 론의하였다.

신대왕은 명림답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때 누구보다도 먼저 나서서 훌륭한 계책을 내놓아야 할 국상인 그는 머리를 짓수굿하고 상념에 잠겨있었다. 당년 106살의 로회한 저 사람은 과연 심중에 무엇을 묻어두고 침묵을 지키는가.

먼저 계하에 나선것은 다른 재상이였다.

《페하, 신 등은 한나라군사들이 수가 많은것을 믿고 우리를 업신여기니 맞받아나가서 치는것이 옳을가 하나이다.》

여러 대신들이 동감이라는듯 긍정하는 말들을 소곤소곤 주고받았다.

이에 힘을 얻은 그 재상은 약간 소리를 높여가며 자기의 계책을 내놓았다.

《우리가 나가서 싸우지 않으면 적들은 우리를 비겁하다고 여기고 자주 올것이요. 또한 우리 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으니 이야말로 한사람이 관문을 지켜도 만사람이 당하지 못한다는것이옵니다. 한나라군사가 아무리 수가 많더라도 우리에게 어떻게 할수 없을것이니 청컨대 군사를 출동하여 막아버리도록 하소서.》

신대왕은 헛기침을 깇었다.

신하들은 그 계책이 임금의 뜻에 부합되지 않았음을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물론 이 전략이 전혀 타당성이 없는것은 아니였지만 적아의 력량관계를 심중히 고려함이 없이 세워진것이라는것만은 명백하였다. 문제는 당시의 조건에서 적군이 오래동안 훈련된 《강병》이고 수량상 《대병》이라는데 있었다.

명림답부는 낮으나 힘있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페하, 나가서 싸워서는 안되옵니다.》

모두의 눈이 커졌다.

신대왕만은 수긍하는듯 머리를 끄덕이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웠다.

《그것은 무엇때문인가?》

《한나라는 크고 백성이 많으며 이제 강병으로 멀리 싸우러 오니 그 예봉을 당할수 없소이다. 또 군사가 많은 자는 싸워야 하고 군사가 적은 자는 지키는것이 옳으니 이것은 병가에서 흔히 있는 일이옵니다. 한나라사람들이 천리길에서 군량을 운반하며 오래동안 지탱할수 없을것이니 만약 우리가 해자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으며 곡식 한알없이 들판을 비워놓고 기다리게 되면 적들은 반드시 열흘이나 한달이 넘지 않아서 굶주리고 피곤하여 돌아갈것이옵니다. 이때 우리가 강한 군사로 육박하면 뜻대로 될수 있을것이옵니다.》

명림답부가 이처럼 청야수성전술을 발기할수 있은것은 그가 적아간의 력량관계와 적들의 전술상 의도를 깊이 파악하였기때문이다.

적들이 전쟁을 도발한것은 11월로서 겨울철이였다. 료동지역에서는 이때면 추위가 한창이였다.

병법에는 무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에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된다고 되여있는데 결코 이것을 모를리 없는 적들이 어째서 굳이 겨울에 침공날자를 정했는가. 그것은 적들이 속전속결을 노렸기때문이였다.

적들이 속전속결에서 노린 목적은 고구려의 대왕을 사로잡아 굴복시킴으로써 다른 성, 진들과 제후국들이 스스로 항복하게 하자는것이였다.

때문에 적들이 운명을 건 속전속결의 전략을 저지파탄시키는것이야말로 승리의 열쇠라고 할수 있었다.

그러면 적들의 속전속결전략을 파탄시키는 가장 좋은 방도는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청야수성전술, 해자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으며 곡식 한알없이 들판을 비워놓고 기다려 적들이 굶주리고 피곤하여 물러가게 하는 전술이였다.

적들이 속전속결로 나오는 조건에서 청야수성전술로 적을 오래 붙잡아둘수록 적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더우기 추위에 견딜수 없게 되여 반드시 전투능력을 상실하게 될것이였다. 그리고 적들을 깊이 끌어들일수록 적들에게 보급로가 더 멀어지게 할것이고 또한 기습전으로 그것마저 끊어놓으면 적들이 더는 지탱하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가게 할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병법에서 말하는 《승리의 조건》을 만드는것이였다.

신대왕은 명림답부의 계책을 전적으로 지지하였다.

신대왕은 한알의 낟알도 적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고 여러 군부대들로 하여금 적들의 치중부대를 습격하여 보급로를 끊어버리게 하였다.

그리고 성을 닫고 굳게 지킴으로써 한나라장수와 졸병들이 굶주려서 퇴각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였다.

명림답부는 계획대로 퇴각하는 적들에 대한 추격전을 조직하였다. 전투에서 중요한것은 적들을 다시는 추설수 없게 철저히 소멸하는것이였다.

명림답부는 추격전으로 적들을 섬멸하고 성스러운 이 땅을 침범한 자는 한놈도 살려보내지 않으려는 고구려사람들의 의지, 본때를 보여주리라 결심하였다.

그는 수천명의 정예기병으로 추격부대를 편성하고 자신이 그 선두에 섰다. 그때 그의 나이는 106살, 가슴에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애국심이 청춘의 힘과 활력을 되찾아주고 전진하는 대오의 맨 앞장에서 백발을 승리의 기발마냥 나붓기게 하였다.

명림답부의 지휘하에 고구려군은 좌원에서 《강병》, 《대병》이라고 큰소리치던 적들을 모조리 섬멸하였다. 이에 대하여 옛 문헌에서는 한나라군사가 크게 패하여 한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고 전하고있다.

물론 이전시기에도 을두지가 청야수성전술을 쓴 일이 있지만 그는 단지 적을 쫓아버리는데 머물렀다. 이것은 청야수성전술의 위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한것이라고 말할수 없다.

명림답부는 청야수성전술로 적을 굶주리고 피로케 하여 승리의 조건을 마련하고 퇴각하는 적들을 추격으로 섬멸소탕함으로써 전쟁의 목적수행에서 청야수성전술이 명실공히 그 의의를 나타낼수 있게 하였다는데 군사예술발전에 기여한 그의 공적이 있다.

력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명림답부는 역시 초대국상의 지위에 어울리는 군사적공적을 이룩한 장수라고 할수 있다.

 

후세에 우리 나라의 많은 명장들이 청야수성전술과 섬멸전을 배합하여 적들을 철저히 소탕하였는데 이것은 명림답부가 지휘한 좌원싸움의 심원한 영향이라고 말할수 있을것이다.

 

 

8) 초야에 묻혔던 재사 을파소

  

《때를 만나지 못하면 은퇴하고  때를 만나면 벼슬을 하는것은 선비의 떳떳한 도리이다.》

이것은 고구려 고국천왕(179-197년)때 재상이였던 을파소가 한 말이다.

을파소(?-203년)는 류리명왕(B. C. 19-A. D. 18년)때의 대신인 을소의 후손이다. 그는 강직한 성품과 재략을 지니고있었지만 당시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고향인 압록곡 좌물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있었다.

그때 정권은 연나부 귀족출신이며 왕후의 친척인 중외대부 패자 어비류와 평자 좌가려 등에 의하여 롱락되고있었다. 이자들은 왕후의 친척이랍시고 권세를 쓰면서 정책조정과 관리임명도 제 마음대로 하고 부패타락한 생활을 일삼고있었으며 그 자식들과 아우들도 아버지와 형들의 권세에 등대고 악행을 저지르고있었다. 그들은 남의 자녀를 략탈하여 자기의 노비로 만들었으며 남의 토지와 가옥을 함부로 빼앗았다.

좌가려일당의 횡포무도한 행위는 인민들의 원한의 과녁으로 되였으며 다른 부의 귀족들도 정권을 좌우지하면서 제멋대로 날뛰는 그자들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있었다.

고국천왕(이름은 남무)도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며 왕권을 침해하는 그들의 파렴치한 행위를 더이상 보고만 있을수 없었다.

고국천왕은 어비류, 좌가려일당을 제거하기로 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어비류일당은 반란을 일으킬 모의를 하였다.

191년 4월 어비류, 좌가려일당은 반란을 일으키고 수도를 공격해왔다.

고국천왕은 왕기(본래의 고구려 5부지역)안의 군사를 동원하여 반란을 진압하고 어비류와 좌가려 등 주범들은 처단하였으며 그들에게 추종한 무리들은 귀양을 보내였다.

이러한 세상돌아가는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을파소는 언제나와 같이 해뜨면 연장 메고 들판으로 나가고 해지면 소잔등에 달빛 싣고 돌아왔으며 식사를 끝낸 다음에는 어유등잔의 심지를 돋구어가며 부지런히 책을 읽었다.

누구도 태평스레 밭갈고 김매며 로력의 땀방울이 알알이 맺힌듯 탐스럽게 열린 벼이삭을 안고 어린애마냥 기뻐하는 그의 넓은 가슴에 과연 무엇이 깃들어있는지 알수 없었다. 번듯한 이마에 해박한 지식과 지혜를 묻어놓은 저 인상좋은 선비님은 질끈 동인 수건을 땀으로 적시며 한뉘 사래긴 이 땅과 인연을 맺으려나.

그의 처자들도 종들도 마을사람들도 풀길 없는 의문을 묻어둔채 그와 농부가를 주고받으며 걸싸게 일을 해제끼군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까치가 돌배나무에 앉아 어지러이 깍깍거리더니 중낮무렵이 되여 두 사나이가 나타났다.

《공의 성함을 을파소라고 하지 않소이까?》

절풍을 쓴 키 큰 사나이가 겸손한 태도를 취하며 존경심이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소이다.》 을파소는 의아한 눈길을 들며 대답했다.

《공께서는 어지를 받으시오이다.》

말이 떨어지자 을파소는 옷매무시를 바로하고 돗자리를 깔게 한 후 그우에 엎드렸다.

《서압록곡 좌물촌 사는 을파소는 들으라. 시국이 어지러우니 그대가 세상을 건질 재주를 가지고도 초야에 묻혀있으니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닐소냐. 이는 모두 짐이 밝지 못한탓이로다.

특별히 그대를 부르노니 그대는 인재를 그리는 짐의 뜻을 헤아려 거스르지 말지어다.》

을파소는 정중히 어지를 받고나서 두 사신을 방으로 안내하였다.

《루추하오나 안으로 들어가주시기를 바라나이다.》

《고맙소이다.》 사신들은 겸손한 태도를 흐트리지 않고 선선히 응했다. 고국천왕이 자기를 대신하여 가는 사신들에게 한없이 겸손한 모양을 보여 인재를 청하는 마음을 알게 하라고 한것이 분명하였다.

술이 두어순배 돌아간 후 을파소는 넌지시 까닭을 물었다.

절풍을 쓴 키 큰 사나이가 나직한 어조로 대답했다.

《얼마전에 연나부의 반란이 진압되였소이다.…》

어비류와 좌가려의 반란을 진압한 후 고국천왕은 이런 명령을 내리였다.

《최근에 벼슬은 정실에 의하여 주어지고 직위는 덕행에 의하여 승진되지 않으므로 해독이 백성들에게 미치고 우리 왕실을 동요시키고있으니 이것은 짐이 정사에 밝지 못한 탓이로다. 그대들 4부에 명령하노니 각각 자기 관하에 있는 현명한 자들을 천거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4부(과루부, 환나부, 관나부, 제나부)에서는 약속이나 한듯 하나같이 동부의 안류를 천거하였다.

왕은 안류를 불러 국정을 맡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안류는 벼슬을 사양하였다.

《어인 일인고?》 왕이 물었다.

《페하, 미천한 저는 용렬하고 어리석어서 진실로 중대한 나라일에 참여할수 없소이다. 서압록곡 좌물촌에 을파소라는 사람이 살고있사옵니다. 그는 류리왕때의 대신이였던 을소의 자손인데 성격이 굳세고 지혜가 깊으나 세상에 쓰이지 못하여 농사를 지어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고있소이다.

페하께서 만약 어진 사람을 얻어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실진대 반드시 이 사람을 쓰셔야 할것이옵니다.》

이렇게 되여 왕이 보낸 사신들이 이 한적한 골안에 찾아오게 되였던것이다.

사신들은 을파소에게 왕이 보내는 값진 례물들을 내놓았다.

《대왕께옵서는 물건으로 인재를 살수는 없지만 성의로 알고 받아달라고 하셨소이다.》

《성은이 망극하오이다.》

을파소는 인재를 위하는 왕의 성의에 감동되여 사신일행을 따라 왕궁으로 향했다.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불러 만나보고 몹시 기뻐하며 중외대부의 벼슬을 내리고 우태의 작위를 더해주었다.

《짐이 외람되게 선왕의 위업을 계승하여 신하들과 백성들의 웃자리에 앉았으나 덕이 박하고 재주가 없어서 사리에 어둡다. 선생이 재능과 총명을 감추고 곤궁하게 초야에 있은지 오래였는데 이제 나를 버리지 않고 마음을 돌리여왔으니 이는 비단 짐에게 다행으로 될뿐만아니라 나라와 백성의 복으로 되리로다. 그대의 가르침을 달게 받겠으니 마음을 다해주기를 바라오.》

을파소는 한동안 침묵하였다. 나라에 이바지하고싶은 생각은 간절하나 맡은 직위는 보잘것 없었다.

이윽고 그는 말문을 열었다.

《신은 우둔하여 감히 존엄하신 명령을 감당할수 없사오니 원컨대 페하께서는 현명한 사람을 택하여 높은 관직을 줌으로써 대업을 성취하소서.》

왕은 그의 의사를 짐작하였다. 일을 해보려고 해도 맡은 벼슬이 시원치 않다는 속대사였다.

왕은 을파소의 벼슬을 높여 나라의 첫째가는 재상인 국상으로 임명하였다.

을파소는 곧 사업에 착수하였다.

그는 근신들과 외척들을 정계에서 밀어내며 그들이 정사에 간섭하지 못하게 하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그러자 그자들은 을파소가 새로 등용되자마자 이전 대신들을 리간한다고 시비질하며 공개적으로 불만을 터놓았다.

그것을 알게 된 왕은 노하여 조서를 내렸다.

《귀한 자나 천한 자나 할것없이 국상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친족까지 멸할것이다!》

이 명령을 받아가지고 나온 을파소는 사람들에게 감동된 어조로 말했다.

《때를 만나지 못하면 은퇴하고 때를 만나면 벼슬을 하는것은 선비의 떳떳한 일이다. 이제 임금께서 나를 후의로 대해주시는데 어찌 다시 이전과 같이 은퇴할것을 생각하랴.》

을파소는 왕의 신임에 보답하기 위해 나라일에 지성을 바쳤다. 정치를 밝게 하고 상과 벌을 신중하게 하니 나라일이 잘되고 백성들의 생활도 안정되였다.

그해(191년) 10월 왕은 안류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일 그대의 한마디 말이 없었다면 짐이 을파소를 데리고 나라를 함께 다스리지 못하였을것이다. 이제 모든 사업이 정돈된것은 그대의 공로이다.》

그러면서 왕은 안류를 대사자로 임명하였다.

물론 을파소가 한 일은 봉건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였다. 하지만 그의 활동은 당시의 조건에서 귀족세력의 전횡을 막고 인민들의 반봉건적진출을 무마하며 국력을 강화하여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고 나라를 굳건히 지켜낼수 있게 하는데 기여하였다.

194년 한창 곡식이 여무는 여름철에 서리가 내려 곡식들이 죽고 흉년이 들었을 때 구제대책을 세우고 매해 봄 3월부터 7월까지 사이에 관가의 곡식을 내여 백성들의 식구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등있게 구제삼아 꾸어주었다가 10월에 가서 상환하게 하는 법규를 제정실시하게 한것도 을파소의 활동과 관련되여있다.

그리고 197년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복잡해진 고구려의 내정에 간섭하여 침략해온 공손도의 침략을 성과적으로 물리치고 198년 환도성을 쌓아 서북방면에로의 진출기지를 마련한것 등도 당시 국상으로서 왕의 다음가는 지위에 있던 을파소의 활동과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다.

 

이처럼 을파소는 고구려의 강화발전을 위해 큰 기여를 하고 민족사에 자기의 이름을 뚜렷이 남긴 재능있는 정치가였다.

 

                                                      (계속 이어집니다)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삶과 문학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