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발해의 강역을 최대로 넓힌 대인수
793년 3월 4일 3대 문왕 대흠무가 죽은 후에 계승자문제를 둘러싸고 복잡해졌던 정국은 794년 6대 강왕 대숭린(대흠무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손자라고도 한다.)의 통치기간에 약간 안정되였다. 그러나 808년에 강왕이 죽은 후 그의 아들들인 원유, 언의, 명충이 줄지어 왕위에 오르며 복잡한 정국을 또다시 연출하였다. 통치배들은 정권쟁탈에만 광분하면서 나라의 안정과 발전에는 거의 주의를 돌리지 않았다. 이를 틈타 발해에 복속되였던 북쪽의 여러 족속들이 발해에서 떨어져나가려고 시도하였다. 쏠라닥거리는 이족들을 진압하고 령토완정과 번영을 이룩하는가 아니면 이대로 주저앉고마는가, 진보와 쇠퇴의 갈림길에서 나라와 겨레의 운명을 걸머지고 한 사나이가 나섰다. 옛 기록에는 그가 타고난 모습이 총명하고 덕은 신과 같으며 재능은 문무를 겸비하였으니 곧 태조(대조영)의 풍채를 소유했다고 전해지고있다. 그의 이름은 대인수(817-830년), 죽은 후에 받은 시호는 선왕이였다. 그의 증조부는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의 동생이였던 반안군왕 대야발이다. 대야발은 뛰여난 문인, 력사가로서 옛 조선의 사기를 적은 《단기고사》를 재편찬하는데 공적을 세웠다. 그는 후손들에게 그 책을 남기며 조상의 땅을 모두 되찾을것을 부탁하였었다. 그의 뜻대로 력대 발해임금들은 동, 서, 남, 북으로 조상의 땅을 수복하며 령토를 넓혀나갔다. 그런데 그 땅에 이주하여와서 살던 이족들이 발해의 통치층내부가 평온치 못한 기회를 타서 그의 통제하에서 벗어나보려고 하였던것이다. 이러한 때 발해국의 운명을 맡아안고 대인수가 열번째로 왕위에 오르게 되였다. 《짐은 기필코 대발해를 천하에 우뚝 솟게 하리로다.》 정양궁에서 등극하는 날에 대인수는 이와 같이 자기의 굳은 결심을 표명하고 년호를 《건흥》으로 정하였다. 그는 첫 사업으로 군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중앙군 및 지방군부대들을 강화하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부들에는 절도사들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호전적인 거란과 대치한 부여부와 같이 특별히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요충지들에는 정예부대들을 배치하였다. 곳곳에서 성들을 신축, 수축하는 사업들이 벌어지고 장성을 쌓는 역사들도 진행되였다. 수군무력도 증대되였다. 파손된 배들과 벌레먹어 못쓰게 된 배들에 대한 수선작업이 벌어지는 동시에 한번에 100여명씩 승선하고 많은 군사장비들을 적재할수 있는 대형전선들도 건조되였다. 대인수는 유학의 침습으로 점차 사라져가는 고구려이래의 상무의 기풍을 되살리는데도 힘을 넣었다. 그는 온 나라 백성들이 군사를 중시하도록 하는데서 무술체육에 특별한 관심을 돌렸다. 발해에서 장려된 무술체육의 하나는 격구였다. 격구는 말을 타고 달리며 공을 치는 놀이로서 말타기능력이 반드시 보통말을 타는것보다 더 능하여야 할수 있는것으로 되여있었다. 그러므로 무술을 련마하는데는 격구보다 더 좋은것이 없다고 하였다. 후세사람들도 격구야말로 유희를 통하여 전투를 연습하는것이라고 여기며 격구를 즐기였다. 격구가 온 나라에 퍼지자 너도나도 거기에 몸을 잠그게 되였고 큰 규모의 《구마지회》(격구대회)도 성황리에 열리군 하였다. 한편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술체육도 적극 장려하였다. 무술체육의 장려는 세사람이 모이면 범 한마리를 능히 당해낸다고 하던 발해사람들의 용맹과 담력에 만부부당지용의 나래를 달아주었다. 대인수는 토지제도도 변혁하였다. 어지러운 국내형편과 이족들의 빈번한 침입략탈행위, 관리들의 수탈행위로 말미암아 토지와 류리되여 생활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농민들에게 일정하게 안정된 생활을 약속해줌으로써 그들을 돌아오게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러한 불충분한 토지제도나마 농민들에게 환상을 조성함으로써 그들을 토지에 얽어매여놓게 하였으며 생산의 발전을 추동하고 국가적축적을 늘이고 군량미도 충분히 확보할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준비에 기초하여 대인수는 정예군사를 거느리고 발해에 복종하지 않고 또 눈치를 보아가며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북방 여러 종족들에 대한 토벌을 단행하였다. 대인수의 지략과 담력, 발해군의 용맹에 기가 질린 북방의 제 종족들은 모두 무릎걸음으로 기여들어와 항복서를 바쳤다. 그리하여 흑수말갈부족들은 모두 발해에 완전귀속되게 되였다. 력사기록에는 대인수가 《해북의 제부를 토벌하고 령토를 크게 넓히는데 공이 있었다.》고 기록되여있다. 대인수는 참으로 광활한 령토를 개척하였다. 서쪽은 료하계선까지, 동쪽은 동해, 북쪽은 제야강 상류로부터 오호쯔크해를 련결한 계선까지 차지하였다. 이제 남은것은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여 조상전래의 옛땅을 전부 합쳐 하나로 하는 일뿐이다. 옛 문헌에는 대인수가 《남으로 신라를 공격하여 령토를 넓히고 새로 군, 읍을 설치하였다.》고 기록되여있다. 또한 신라가 발해의 맹공격에 대처하기 위하여 826년에 한산주이북의 백성 1만명을 동원하여 패강장성 300리를 쌓았다고 전하고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발해가 조상전래의 땅을 하나로 합치기 위하여 신라에 대한 부단한 공격을 진행하여 그 북변의 적지 않은 지역을 차지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대인수는 발해의 령토가 넓어지고 각이한 지리대와 기후대에 속하는 지역들이 생겨남에 따라 해당 지역의 특성에 맞는 생업을 장려하게 하였다. 이것은 한편으로 지역간의 상업거래를 촉진시켰다. 주변의 당나라나 거란 등 나라와 족속들은 말할것도 없고 멀리 아라비아의 상인들까지 발해에 들어와 교역활동을 벌리였다. 대인수는 특히 발해의 상인들이 사신왕래의 명목으로 일본에 적극 진출하게 함으로써 일본의 경제발전을 자극하고 문화발전에도 영향을 주었다. 823년 고정태를 사두로 하는 발해사신단일행이 일본에 갔을 때 우대신 후지와라노 오쯔구는 발해사람들이 손님이 아니라 상인들이라고 하면서 아우성을 쳤고 825년에 고승조일행이 일본에 갔을 때에도 그들은 발해사람들을 수도에 들어가게 하는 경우 나라재정을 고갈시킨다고 우는소리를 하였다. 발해사신단의 교역활동은 그 규모에 있어서 대단히 방대한것이였다. 그러한 속에서 미개하였던 일본의 경제는 눈을 뜨게 되였으며 문화적으로도 개명하게 되였다. 대인수가 821년에 파견한 왕문구를 사두로 하는 발해사절단은 훌륭한 시편들을 창작하여 일본문단을 놀래웠으며 특히 격구를 보급함으로써 깊은 감명을 남기였다. 왕문구 등이 출연한 격구를 보고 일본임금 차아는 《이른 봄 타구(격구)를 보며》라는 시까지 지어가며 감탄하였다. 또한 격구동작을 하면서 4~6명으로 이루어진 무용수들이 춤을 출 때 연주하는 악곡이 《타구악》으로 명명되여 궁중에서 경마, 말타고 활쏘기 등의 행사가 진행될 때마다 연주되였다. 그후에 말을 타지 않고 공을 치는 아이들의 유희로 되였는데 그 경우에는 구장, 구타(깃쬬)라고 불리우며 정월놀음으로 널리 보급되였다. 대인수는 어디까지나 통치계급의 리익의 대변자로서 그의 궁극적목적은 왕의 전제권을 더욱 강화하고 자기의 통치지반을 공고히 하며 착취계급의 권익을 옹호하자는데 있었다. 하지만 대인수는 10여년간의 통치기간에 발해의 국력을 강화함으로써 령토완정을 이룩하고 나라의 대외적권위를 높이는데 이바지한 재능있는 정치가, 군사통수이며 민족사에 자기의 자취를 뚜렷이 남긴 단군의 자랑스러운 후손이였다.
19) 대발해국을 세운 고영창
해동성국의 위용을 자랑하던 발해는 926년 국내의 통치위기가 심각해진 기회를 틈타 40만의 대군으로 쳐들어온 거란침략자들에 의하여 자기 존재를 끝마치게 되였다. 그러나 발해유민들은 불타는 애국심을 안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투쟁에 나섰다. 그 투쟁은 근 200년간 줄기차게 벌어졌다. 그 과정에 정안국과 오사성발해국, 흥료국 등 발해의 계승국들이 련이어 세워져 굽히지 않는 민족의 기개를 남김없이 과시하였다. 여기서 이야기하게 되는 대발해국도 그가운데 하나이다. 발해가 멸망한 때로부터 근 200년만에 발해의 계승국으로 세워져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더욱 억세여지는 우리 민족의 기개를 만천하에 시위한 대발해국의 수립은 발해유민들의 고국수복투쟁의 마지막총화였고 귀감이였다. 이 대발해국의 창시자가 바로 고영창(?-1116년)이다. 고영창의 고씨는 고구려의 왕족성씨이며 옛 발해국안에서는 왕족인 대씨 다음가는 귀족성씨로서 발해우성(큰 귀족성씨 고, 장, 양, 두, 오, 리)가운데서 첫자리를 차지하고있었다. 옛 기록에는 료나라(거란)의 정치가 날로 부패해져 금나라(녀진)의 아골타가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였으나 그것을 막을수 없었다고 한다. 이때 발해유민출신인 고영창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전하고있다. 고영창이 폭동을 일으키기 전야에 료나라의 정치정세에서는 급격한 변화들이 일어나고있었다. 거란의 봉건통치질서가 문란해지고 통치배들이 부패타락해가면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거란인들과 주변종족들사이의 모순이 극도로 첨예화되였다. 거란임금 천조는 사냥에만 미쳐돌아가고 관료배들은 저들의 안일사치를 위해 백성들과 여러 주변 종족들에게 무거운 부담과 고역을 들씌우고있었다. 곳곳에서 백성들이 폭동에 궐기하고 여러 종족들내부에서 독립기운이 날로 높아가고있었다. 료나라의 파국을 앞당겨온것은 녀진인들의 침입과 거란안의 다른 민족, 종족들의 반거란항전이였다. 녀진족은 옛 발해국에 복속되였던 흑수말갈에서 갈라져나온 종족으로서 옛 문헌들에서는 그 시조가 고려사람이였다고 전하고있다. 녀진인들은 세력이 커지자 고려의 동북부지역에서도 고려인민들의 생명재산을 침해하며 략탈과 파괴를 자행하고있었다. 그리하여 고려봉건정부는 1107년에 윤관을 원수로, 오연총을 부원수로 임명하여 17만의 대병력으로 녀진을 정벌하였다. 녀진족들은 강력한 타격을 받고도 계속 자기의 력량을 확대해나갔다. 1102년에 자기 형의 뒤를 이어 녀진족의 우두머리로 된 아골타(후에 민으로 고침. 세조의 둘째 아들이며 녀진 완안부사람)는 23살때 내란을 평정하고 녀진족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113년에 녀진족의 최고통솔자인 도발극렬이 되였으며 린근의 부락들을 통일하고 점차 료나라에로 진공할 준비를 서둘렀다. 그때 녀진이 동원할수 있는 병력이란 겨우 수천명에 불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골타는 거란의 취약성을 간파하고 1114년에 당시 아직 백수십만명의 대군을 가지고있던 거란에 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해나섰다. 금나라군은 여러 전투들에서 전과를 올리였다. 아골타는 다른 민족, 종족들을 회유하기 위해 전투후에 도망치는 자들을 쫓지 않도록 하고 투항해왔거나 포로되였다가 다시 달아나는 자들에 대해서도 죄를 주지 말며 추장들은 종전대로 추장을 시키고 일반백성들도 저들이 편리한대로 거처를 정하고 살게 해주도록 하였다. 특히 발해유민들에 대해서는 더 《점잖게》 대해주며 포로된 량복, 압달라 등 그들의 상층으로 하여금 여러 지방 발해유민들에게 아골타의 《관대성》을 선전하게 하였다. 군사적성과에 병행하여 실시된 이러한 회유책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녀진에 투항하게 만들었으며 거란군의 사기를 저락시키고 료나라의 붕괴를 촉진시켰다. 무너져가는 거란의 운명을 지켜보고있던 발해유민들은 바로 지금이야말로 고국회복을 위한 성전에 떨쳐나설 때임을 간파하였다. 1115년 2월 발해인장군 고욕은 요주(오늘의 내몽골 적봉)에서 거란강점자들을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요주는 거란의 상경도에 속하는 한개 주로서 옛 발해국의 멸망당시 거란강점자들에 의하여 강제이주당한 발해유민들로 구성된 주였으며 거란의 여러 주들가운데서 발해유민들이 가장 많이 살고있는 주들의 하나였다. 이 주의 군대는 광의군이라고 하였고 행정적으로는 장락, 림하, 안민 등 3개 현을 관할하고있었는데 그 군대와 주민의 대부분은 발해유민들이였다. 고욕의 원래 지위가 무엇이였으며 그때 요주사람들이 고욕을 왕으로 내세우면서 나라이름을 무엇이라고 하였는지 다 기록에서 빠져 알수 없다. 그러나 고욕이 일정한 벼슬을 가지고 짧은 시일안에 많은 사람들을 동원할수 있는 지위에 있었던 사람으로 보인다. 요주 발해유민들의 투쟁에는 요주뿐아니라 거란 상경도관하에 포함되여있는 16개의 두하군주가운데 일부 두하군주의 발해유민들도 참가하여 그 총수는 보병, 기병 합하여 3만여명에 달하였다. 당황해난 거란왕정에서는 소사불류에게 많은 병력을 주어 발해유민들의 폭동부터 진압하게 하였다. 자기들의 심장부에서 일어난 폭동이여서 어지간히 공포를 느꼈던것이다. 그러나 요주 발해유민들의 영용한 항전에 부딪쳐 소사불류는 4월에 진행된 전투에서 대참패를 당하였다. 이렇게 되자 거란통치배들은 남면부부서 소도소알을 도통(총사령관)으로 삼아 《토벌》하게 하였다. 소도소알 역시 5월에 진행된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였다. 교활한 소도소알은 악랄한 술책을 써서 6월에 대왕 고욕과 그 주요부하들을 불러들여 모두 붙잡아죽이고 전면적공세를 취하였다. 지휘관을 잃은 발해유민들은 용감하게 싸웠으나 일단 물러서지 않으면 안되였다. 지휘관들의 경각성이 무딘탓으로 하여 폭동은 비록 실패하였으나 요주 발해유민들의 투쟁은 계속되였다. 요주폭동군을 일시적으로 진압한 거란군은 12월에 서진하는 금나라군대에 맞섰으나 호보답강의 전투에서 또다시 대참패를 당하였다. 이러한 속에 발해유민들의 애국전통이 빛나게 과시된 자랑스러운 해 1116년의 새날이 푸름푸름 밝아오고있었다. 1116년 정월 초하루. 어둠속을 누비며 10여명의 젊은이들이 동경류수부로 접근해가고있었다. 두 젊은이가 극에 기대여서서 끄덕끄덕 졸고있는 파수병에게 비호같이 달려들어 해제꼈다. 그들을 지켜보고있던 다른 젊은이들이 가볍게 몸을 날려 담을 넘었다. 모든것은 순간에 벌어진 일이였다. 젊은이들가운데 가장 나이들어보이는 다부진 사나이가 대청아래서 졸고있는 수직아전에게 다가갔다. 그가 바로 이번 폭동을 조직하고 류수 소보선을 처단하는것으로 폭동의 봉화를 지필 계획밑에 직접 10명의 날파람있는 젊은이들을 데리고 류수부의 담을 넘은 무용마군의 비장(지휘관)이며 발해승봉관인 고영창이였다. 그는 수직아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깨웠다. 몸을 흠칫 떨며 잠에서 깨여난 아전의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날이 선 비수를 본 아전은 턱을 덜덜 떨며 찍소리도 내지 못하였다. 《무서워 말아. 그래, 안에 류수가 있는가?》 《이-있소이다.》 《그에게 말해. 밖에 군변이 일었으니 속히 나와 조처해주십사고 말이야.》 온몸을 사시나무떨듯 하며 일어난 아전이 안에 대고 영창이 가르쳐준대로 일렀다. 그때 방에서 설을 즐기러 찾아온 발해인들인 호부사 대공정, 부류수 고청명(고청신이라고도 한다.)과 더불어 술잔을 기울이던 소보선은 군변이란 소리에 놀라 몸을 일으켰다. 취한 몸을 가까스로 움직여 동헌으로 나온 그는 자기앞에 서있는 고영창을 보자 골살을 찌프리며 역증을 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밖에 군변이 일어 류수를 모셔가려고 왔소.》 《뭣이?!》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것을 눈치챈 소보선이 몸을 돌리려는 순간에 좌우켠에서 젊은이들이 달려들며 그를 결박지워 꿇어앉혔다. 《이 무슨 짓들인고?》 《닥쳐라. 천하에 악귀같은 놈! 네놈이 저지른 악행을 아직 모른단 말이냐. 이 땅의 주인은 우리 발해사람들이다. 네놈이 발해사람들에게 조세를 과중하게 들씌우고 쩍하면 악형을 가하였으니 그 대가가 어떤것인지 알게 하자는것이다. 다른 종족들과 불화를 조성시켜 또 얼마나 많은 발해사람들을 죽게 하였느냐. 그래도 네 정녕 살기를 바란단 말이냐? 너의 학정으로, 너의 간교한 술책으로 쓰러져간 발해사람들의 원한을 담아 너를 극형에 처한다.》 고영창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한 젊은이가 비수를 놈의 가슴에 깊숙이 박았다. 《안에 있는 놈들을 모조리 쳐죽여라!》 영창의 명령에 따라 젊은이들은 내실로 뛰여들었다. 하지만 일이 글러진것을 눈치챈 대공정과 고청명은 들었던 잔을 내던지고 뒤문으로 뺑소니를 쳤다. 방에는 그들이 데리고 놀던 기생들과 악공들만이 사색이 되여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걸하고있었다. 뒤따라 들어온 고영창은 대공정과 고청명의 도망으로 조용히 해제끼려던 당초의 계획이 틀려졌음을 느꼈다. 아닐세라 온 성안이 들끓기 시작하였다. 고영창을 비롯한 습격조원들은 다음 행동계획을 약정하고 헤여졌다. 대공정은 사건이 발생하자 즉시 류수의 사업을 림시로 맡고 부류수 고청명과 함께 군사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발해유민들이 응하지 않자 한족, 해족들을 불러모았는데 한 1,000여명가량 되였다. 오래동안 거란통치배들에게 붙어 관료생활을 해온 대공정은 동족을 해치는 짓도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사건이 발생한 다음날 대공정은 류수를 죽인 악당들을 잡는다는 미명하에 발해유민들의 집을 몽땅 수색하였으며 젊은 사람들, 좀 의심스럽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모조리 잡아죽이였다. 잠간사이에 숱한 발해유민들이 희생되였다. 료양성의 발해유민들은 이자의 만행에 극도로 분개하였으며 온 성이 복수의 일념으로 불탔다. 이날 밤으로 성안의 여러 병영들과 관청, 주택지구들에 화재가 일어났고 거란인 악질관리들에 대한 처단이 시작되였다. 1월 3일, 고영창이 이끄는 백초곡 발해무용마군의 부대가 수산문(성의 서남문)쪽으로 육박하여와서 성안의 해족, 한족으로 무어진 군대와 대치하여 일대 결전의 태세를 취하였다. 대공정은 성문루에 올라가 돌아설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폭동군은 이에 응하지 않고 더욱 기세를 올리면서 함화로써 오히려 적들에게 투항을 권고하였다. 1월 5일 밤, 성안의 발해유민들은 여러곳에서 불을 지피고 성밖의 군대와 호응하면서 수비군을 제끼고 성문을 활짝 열어 발해무용마군이 쳐들어오도록 하였다. 발해무용마군의 기병들이 공격해들어와 거리들에 진을 치고 적들과 격렬한 시가전을 벌렸다. 결국 해족, 한족으로 무어진 부대는 괴멸되였고 대공정, 고청명 등은 휘하의 잔병 100여명만을 거느리고 서문을 탈출하였다. 동경료양성이 적들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후 짧은 기간에 료동지방 50여개 주의 발해유민들이 폭동군에 적극 호응해나섰다. 이러한 성과에 토대하여 고영창은 발해유민들의 세기적숙원을 담아 대발해국(대원이라고도 전해짐.)을 선포하고 년호를 륭기(응순으로도 전해짐.)로 정하였다. 발해유민들은 이번 폭동을 조직지휘한 고영창을 대발해국의 《황제》로 내세웠다. 고영창은 기병소부대들을 여러 주, 현에 나누어보내여 그곳 인민들과 힘을 합쳐 악질통치배들과 부자놈들을 처단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나누어주게 하였다. 이때 거란, 해족악질관리들과 일부 다른 족속들은 저들이 발해유민들에게 못되게 놀았던 전날의 죄과가 두려워 가족을 거느리고 도망쳐버렸다. 일부 거란인관리들가운데는 거란의 장래에 기대를 걸지 않으면서 료나라를 배반하고 자진하여 대발해국편에 와붙는자들도 있었다. 그리하여 대발해국의 국력은 급속히 장성되여갔다. 그의 수하에 집결된 군대는 잠간사이에 8,000명으로 늘어났다. 고려에서 안북도호부 《아전》의 명목으로 토산물과 공문서를 가지고 동경에 가서 윤언순, 서방, 리덕윤 등 여러 사신들이 오래 체류하고있는 리유를 탐지하도록 파견한 교서랑 정량직은 대발해국의 위세가 대단한것을 보고 고영창에게 고려를 대표하는 사신으로서의 례절을 차리였다. 그리고 고려국을 대표하여 대발해국의 황제에게 국가의 공문서와 토산물을 드린다고 하면서 료나라 동경류수에게 보낸것을 고영창에게 바쳤다. 정량직이 자신을 《신 아무개》라고 하면서 이러한 거짓말을 한것은 동족의 나라인 발해의 계승국이 다시 선것이 기뻐서 국가를 대표하여 인정해주고싶었기때문이였을것이다. 고영창은 동족의 나라인 고려가 자기를 인정해준데 대하여 매우 기뻐하면서 보수를 톡톡하게 주었다. 고영창은 인재들을 더 많이 쟁취하는데도 힘을 넣었다. 그는 발해유민으로서 당시 인재로 알려져있던 로극충, 왕정, 고정 등 거란의 지배하에서 벼슬을 한 자들에게 대발해국의 벼슬을 주며 불렀다. 그러나 로극충은 비겁하게도 달아나 금나라 원군왕 알로에게 투항하였다. 선조들이 옛 발해국과 료나라에서 벼슬한 배신자가문의 왕정은 그 전통을 이으려는듯 여러가지 구실을 붙여가며 응하지 않았고 고정은 마지 못해 응하였다. 고영창은 광주의 후개와 련계를 가지고 그들의 력량을 인입하기 위한 사업도 벌렸다. 한편 이족들을 쟁취하기 위하여 갈소관에 사람을 보내여 설복하였다. 갈소관의 녀진인들은 고영창의 군사가 강한것을 두려워하여 응하려고 하였으나 금나라시조의 혈통인 호십문이라는 자는 이를 거절하고 자기 족속들을 불러 도망칠것을 모의하였다. 고영창은 이 소식을 듣고 즉시 타격을 가하게 하였다. 타희산아래에서 대발해국군의 맹공격을 받은 호십문은 겨우 제 목숨만 건져가지고 금나라 장수 철개에게로 달아나 투항하였다. 고영창의 봉기소식을 들은 거란통치배들은 금나라의 공격으로 전전긍긍해있는 판에 발해유민들의 폭동까지 일어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다가 소을설, 고흥순 등을 보내여 투항을 권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고영창과 그의 대발해국은 이를 일축해버리고 항전기세를 더욱 높이였다. 거란통치배들은 윤1월 4일에 소한가노, 장림에게 대발해국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한 대답이런듯 윤1월 23일에 광주의 발해군이 반란을 일으키고 고영창의 대발해국에 편승하였다. 결국 심주만을 내놓고 동경도의 모든 주, 현들이 고영창의 대발해국에 합류해나섰다. 장림은 료동지역에 이르러 직업이 없이 떠돌아다니는 자들과 해족, 한족 전호(대부분은 포로로 잡혀와서 거란인 관료 및 기타 주민들의 노복으로 되여있던 자)들가운데서 씩씩한 자들을 골라 《토벌》군을 보충하였다. 그리하여 그 수는 짧은 시일안에 2만명으로 늘어났다. 대발해국군은 교활한 수법으로 심주로 들어간 거란 《토벌》군과 심주와 그 일대에서 10여일동안에 30여차례의 싸움을 벌려 적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일단 료양성으로 돌아온 대발해국군은 태자하를 사이에 두고 적들과 대치하였다. 적장 장림은 수적우세를 믿고 사람을 보내여 투항을 설교하였다. 고영창은 조성된 정세에 대처하여 달불야, 표합 등을 금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여 지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그리고 정예기병을 선발하여 잘 무장시켜 적의 익측을 타격하게 하였다. 대발해국군은 먼저 도하해온 안덕주의군이라는 적의 《정예》부대를 물리쳤으며 철기 500명은 상류쪽에서 도하하여 적주력의 익측을 엄습하였다. 된타격을 받은 적들은 뒤로 물러섰다. 수세에 빠진 적들은 3일동안이나 악착스레 강을 건느려고 시도했으나 대발해국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목적을 실현하지 못하였다. 대부분의 적병들은 사기가 저락되고 대부대의 식량을 보충할수 없게 되자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밤마다 몰래 심주성을 향해 뿔뿔이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마지막대오가 퇴각하려던 밤에 발해기병이 용감한 추격전을 벌려 수천명을 소멸하였는데 이때 건장하고 걸음이 빠른 자들만 겨우 살아 심주성으로 도망쳐갔다고 한다. 한편 달불야, 표합이 가지고간 고영창의 국서를 본 아골타는 못마땅해하면서 동경은 자기네 금나라와 가까운 곳인데 고영창이 이에 웅거해서 참람되게 황제를 칭했으니 옳지 않다, 자기에게 귀속되면 왕으로 책봉하여줄수 있다, 금나라사람 호돌고가 모반하여 료나라에 들어갔다가 지금 동경에 의탁했다고 하니 돌려보내주면 좋겠다는 내용의 국서를 보내도록 하였다. 녀진사신 호사보와 함께 돌아온 달불야에게서 아골타의 국서를 받아본 고영창은 몹시 분개하였다. 《어찌 이렇듯 무례할수 있단 말이냐. 그도 황제요, 짐도 황제이다. 원래 녀진은 옛 발해국의 속민이였다. 지금 힘이 커졌다 해서 옛 정리를 잊을수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 발해사람들을 많이 략취하여 저들의 수하에 부리고있는데 참으로 분개할 일이다. 옛날 발해와 녀진이 힘을 합쳐 거란태조 아보기와 싸웠던것처럼 지금도 우리는 공동의 적 거란을 반대하여 합쳐야 한다.》 고영창은 열변을 토하며 금나라사신 호사보앞에서 그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을 발해사람들의 기개를 시위하였다. 고영창의 강의한 의지를 알게 된 호사보는 지금은 공동의 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그의 제의에 리해를 표시하였다. 그런데 금나라를 하대하면서 모든 발해인들을 돌려보내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다시 받아본 아골타는 극도로 분개하였다. 저들에게 투항한 발해인 대약사노를 고영창의 사신 달불야와 함께 보내여 고영창을 달래게 하는 한편 대부대의 《토벌》군을 편성하였다. 1116년 4월 2일, 알로를 총대장으로 하고 도모를 부대장으로 하는 정예부대는 거란의 동방성들을 공격하면서 심주로 육박하였다. 금나라군은 익퇴하(오늘의 이통하)연안의 소산성에서 거란군을 격파하고 심주성에서 병력을 수습하여 대발해국을 공격할 준비를 갖추고있던 장림의 거란《토벌》군을 소멸하였다. 심주성을 함락시킨 후 금나라군 대장 알로는 포찰, 적고내의 부대, 함주군도통 알로고의 부대와 련합하여 고영창의 대발해국을 칠 준비를 서둘렀다. 이때 대발해국은 시련을 겪고있었다. 광주의 후개가 거느린 발해폭동군은 고영창의 지시로 1115년 6월에 고욕이 피살된 후 계속 저항해오던 요주 발해군과 련계를 맺었다. 거란통치배들을 반대하여 적극적인 투쟁을 벌리던 그들은 장가노의 거란인 반란세력과 련계를 가지고 공주를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등 전과도 거두었다. 그러나 사태가 돌변하여 후개는 3월에 천주에서 잡히였고 4월 10일에는 거란인 반란두목 장가노가 패하였으며 11일에는 요주 발해군이 진압당하였다. 여러 종족들이 망해가는 거란에 등을 돌려대고 금나라에 가붙음으로써 외부의 동맹군을 잃은 고영창의 대발해국은 점점 더 고립무원한 처지에 놓이게 되였다. 그리고 장림의 《토벌》군과의 여러차례 전투에서 일정한 손실을 보았다. 고영창은 적들의 세력을 일단 저지시켜놓고 준비를 갖추기 위해 자기가 가장 신임하는 가노탁자를 시켜 금도장 1개, 은패 50개 그리고 거짓번국이 되겠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주어 알로에게 갖다주게 하였다. 알로는 이것을 믿고 호사보, 철팔을 답례사신으로 보냈다. 적들의 공격이 늦춰진 기회를 타서 고영창은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고 수성기재들을 보강하며 활과 화살, 창검들을 더 많이 만들어내는 등 일련의 수비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장현소, 고정, 달불야 등 비겁한 배신자들이 고영창을 잡아가지고 금나라에 항복할 흉계를 꾸미고있었다. 금나라군이 강점한 심주성에는 고정의 늙은 에미가 있었다. 고정은 배신자들의 도움으로 밤에 몰래 성을 넘어 심주성으로 달아나 금나라군에 투항하였다. 배신자 고정은 곧바로 알로를 찾아가 《고영창이 항복하겠다고 한것은 진짜가 아니라 거짓입니다. 왕사(금나라군대를 가리킴.)가 쳐들어오는것을 지연시키고 그동안 준비를 갖추려고 하는 술책일뿐입니다.》라고 고해바쳤다. 비로소 깨달은 알로는 금나라군에 료양성을 향해 총공격할것을 명령하였다. 고영창은 이에 격분하여 답례사신으로 와있던 호사보와 철팔을 처형하여 조리돌리며 굽히지 않을 의지를 표명하였다. 노예로 사느냐, 아니면 영웅으로 죽느냐 하는 생사를 판가리하는 싸움에 전체 대발해국군민이 떨쳐나섰다. 두 나라군대는 옥리활수(태자하의 딴 이름)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다. 대발해국군의 저항으로 금나라군은 쉽게 도하를 실현할수 없었다. 그런데 이때 로극충을 비롯한 배신자들이 길잡이가 되여 옥리활수를 건늘수 있는 곳으로 적군을 안내하였다. 정녕 한명의 배신자는 천명의 원쑤보다 더 위험하였다. 그런데 그곳은 감탕이여서 적들은 무서워 주춤거렸다. 적장 도모(아골타의 배다른 동생)가 자기 소속부대를 거느리고 앞장에 서서 진펄을 건넜다. 그제서야 적의 전군이 일제히 진펄을 건느게 되였다. 위급한 정황속에서 고영창은 성안의 전체 군민을 항전에 불러일으켰다. 대발해국군은 수산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적들에게 된타격을 안기였다. 휴식을 위해 성으로 돌아오던 고영창과 대발해국군은 뜻밖의 정황에 부딪치게 되였다. 성문은 굳게 닫겨져있고 성우에서는 화살이 비발치듯 쏟아져내리고있었던것이다. 순간 아연해졌던 고영창은 정신을 가다듬고 성우에 대고 소리쳤다. 《어느 놈이 이따위짓을 하느냐. 어서 성문을 열지 못할가?!》 얼마후 문루에 장현소와 륙가 등 배신자들이 나타났다. 《고영창, 네가 참람되게 <황제>를 칭하고 우리를 헛되이 죽이려들다니.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이놈, 내 너를 박대하지 않았거늘 어이하여 오늘 이같이 분수없이 노는고?》 《여러말 말아. 난 이미 금국에 항복하기로 결심했다. 네가 아무리 날구뛰여도 금국은 당해내지 못한다.》 《너는 발해사람이 아니란 말이냐?》 《나는 고구려사람이 될수도 있고 발해사람이 될수도 있으며 료나라사람이 될수도 있고 대발해국사람이 될수도 있다. 필요하다면 금나라사람도 되는거지.》 《너절한 배신자, 저놈을 쳐라!》 대발해국군인들은 격분하여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성우에는 부녀자들과 아이들이 결박된채로 나타났다. 대발해국군인들은 순간 그 자리에 굳어졌다. 《자, 어서 공격하라. 성안의 너희 처자들을 우리가 이렇게 잘 보호해주고있다. 그러나 공격하는 경우에 그들을 모두 죽여버릴것이다. 고영창, 너의 처자도 은승과 노선가가 붙잡아다 여기에 세웠으니 어서 올려다보아라. 흐흐…》 장현소의 징그러운 웃음소리에 이어 《금나라군대다-》라는 후군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할수없이 고영창은 앞으로 다시 일떠설 결의를 가다듬으며 기병 5,000명을 거느리고 장송도(비자와동쪽의 장산도)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뜻을 실현하지 못하고 금나라에 투항한 달불야를 비롯한 배신자들의 모략에 걸려 가노 탁자와 함께 적들에게 붙잡혀 그 자리에서 처형되였다. 이렇게 되여 고영창의 대발해국은 다섯달만에 자기의 존재를 끝마치게 되였다. 고영창은 비록 배신자들에 의해 비참한 운명을 마쳤으나 그의 부하들은 앞으로의 투쟁을 위하여 장송도로 들어갔다.
단군의 옛 땅에 대발해국을 다시 일떠세우고 민족의 존엄과 기개를 떨치려던 고영창은 자기의 숙원을 이루지 못하고 최후를 마쳤으나 천만년세월이 흘러도 굽히지 않는 우리 민족의 애국의 넋을 만천하에 과시한것으로 하여 청사에 길이 그 이름을 남기게 된것이다.
20) 청해진대사 장보고
반만년 우리 민족사에 자기의 흔적을 뚜렷이 남긴 인물들가운데는 장보고도 있다. 그는 신라사람으로서 서해와 남해를 이어주는 요충지인 조음도(오늘의 전라남도 완도)에 강력한 수군기지-청해진을 꾸려 제해권을 장악하고 당나라해적들의 략탈행위로부터 겨레의 안전을 지켜내였다. 장보고(?-841년)의 이름은 궁복, 궁파라고도 하였는데 아마도 그것은 아이적 이름이였던것 같다. 그는 고향과 가계를 잘 알수 없는 사람이였다고 하니 수수한 평민출신이였던것 같다. 신라에서 살던 그의 부모는 일찌기 살길을 찾아 바다건너 산설고 물선 당나라로 갔다. 당나라에서 성장한 장보고는 조선반도와의 해상교통의 요충지이고 당시 신라사람들이 많이 거류한 등주에 살면서 많은 돈을 모았다. 그는 그 돈으로 문등현 청녕향 적산촌(산동반도 동남 석성만부근)에 적산법화원(적산원 또는 신라원이라고도 한다.)이라는 절간을 세웠다. 이 절간에는 기본재산으로서 년수확 500석의 전장이 있었고 약 30명정도의 승니(신라인)가 상주하고있었다. 법화원은 당나라에 거주하던 신라사람들의 정신적안식처이자 집합장소, 신라본국과의 련락장소로 되였다. 30살때 장보고는 서주(강소성)로 가서 무령군절도사군영의 소장이 되였다. 무령군은 805년 3월에 서주절도사관하 부대의 이름을 고친것이며 소장은 중견급무관벼슬이였다. 당나라의 동남방에 위치한 서주에서는 당시 왕지흥이 무령군의 병권을 장악하고 만만치 않은 번진(봉건군벌)세력으로 자기 존재를 유지하고있었다. 때는 820년대였다. 장보고에게는 10살 아래인 정년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정년은 장보고를 형으로 부르면서 따랐다. 장보고와 정년은 다같이 수영을 잘하였고 말타고 창을 쓰는데서는 당시 당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쌍벽을 이룬 두사람의 용맹을 비교해보면 나이가 아래인 정년이 우세하였다. 하지만 장보고는 그대로 나이가 많다는 리유로 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비록 무예에서는 서로 양보하려 하지 않았지만 이역에서 같은 겨레라는 혈연적친근감으로 하여 심한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막역한 벗이 되였다. 810년대후반기부터 신라의 서해안에서는 당나라해적들이 출몰하면서 상선들을 습격하고 략탈하였을뿐아니라 지어 백성들을 붙잡아다가 당나라의 등주와 래주를 비롯한 바다가고을들에 노비로 팔아먹었다. 당나라해적들의 이러한 행위는 82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우심해졌다. 해적들의 만행은 당나라 동부지역에 살던 신라이주민들의 불만을 야기시켰으며 이 일대의 당나라관리들로 하여금 일정한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신라통치배들도 서해안에 출몰하는 당나라해적들의 준동을 저지시키기 위하여 822년에 김주필을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해적들에게 잡혀갔던 신라사람들의 귀향을 보장해줄데 대한 신라사신의 요구를 당나라임금 목종은 마지 못해 접수하였으나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는 못하였다. 바다가고을들을 돌아보는 과정에 동포들의 비참한 정상을 목격한 장보고의 가슴은 쓰리였다. 한편 그의 가슴속에서는 하루빨리 이러한 비극을 끝장내야 하겠다는 생각이 불같이 타올랐다. 귀국한 장보고는 828년 4월(흥덕왕 3년)에 왕궁에 들어가 국왕에게 이렇게 제기하였다. 《소신이 당나라땅을 돌아다녀보니 우리 나라 사람들을 노비로 부려먹고있었소이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신에게 조음도에 진을 꾸리도록 하여주신다면 소신은 해적들이 우리 백성들을 붙잡아서 서쪽으로 끌어가지 못하게 하겠소이다.》 조음도(완도)는 조선서해와 남해의 경계선에 있는 섬으로서 두 바다를 련결하는 기본통로에 위치하고있는 군사요충지였다. 여기에 수군기지를 꾸리면 서해와 남해에 출몰하는 당나라의 해적들과 일본해적들을 제압하고 제해권을 장악할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곳을 중심기지로 하여 수군활동을 벌리는것은 당시로서는 가장 적당한 군사적조치라고 할수 있었다. 하기에 옛 문헌인 《삼국사기》에도 조음도는 신라해로의 요충이라고 하였던것이다. 이러한 요충지에 수군기지를 꾸리겠다고 한것은 장보고가 지형지물에 밝고 바다실정을 잘 아는 장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그의 제의는 그대로 접수되였다. 신라 흥덕왕은 장보고에게 군사 1만명을 주고 조음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지키게 하였으며 그를 대사(장관벼슬)로 임명하였다. 장보고는 리창진, 최훈 등 여러명의 무관들과 함께 조음도의 백성들을 불러일으켜 짧은 시일안에 이 섬에 튼튼한 해군기지를 꾸리였다. 그는 우선 크고 견고한 싸움배를 많이 무어내고 수군병정들을 키워냈다. 장보고는 강력한 수군함대에 의거하여 서해와 남해해상에서 맹렬한 군사활동을 벌림으로써 인차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였다. 청해진설치후 해상에서 우리 사람들을 노비로 매매하는 일이 없어지게 되였고 835년부터는 서남해안에서 당나라해적들의 략탈행위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였다. 그리하여 신라의 대외적권위는 더욱 높아지고 대외무역도 활발히 전개되였다. 그의 활동에 의하여 신라선박뿐아니라 당나라, 일본상선들의 항행상 안전도 보장되게 하였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꾸리고 그에 의거하여 활동을 벌려나가는 과정에 방대한 군사력을 키우고 840년부터는 청해진의 배들을 리용하여 당나라 및 일본과의 중개무역도 진행하여 많은 재부를 축적하였다. 장보고는 일약 서해와 남해의 제해권과 무역권을 다 틀어쥔 수군장수, 대무역상인으로 동방 각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청해진의 세력이 커지자 장보고는 권력욕에 사로잡혀 왕실내부의 권력다툼에까지 끼여들었다. 836년 왕위쟁탈전에서 패한 왕족 김우징이 이듬해 8월 청해진으로 도망쳐와서 지원을 요청하자 장보고는 자기에게 와서 의탁하고있던 정년에게 5,000명의 군사를 주면서 도와주게 하였다. 민애왕을 살해하고 김우징(신무왕)을 왕으로 올려세우는데서 세운 《공로》로 하여 장보고는 839년초 국왕으로부터 《감의군사》칭호와 2,000호의 《식실봉》을 받았으며 그해 8월에는 새로 즉위한 신무왕의 아들 문성왕으로부터 또다시 《진해장군》칭호를 받았다. 장보고는 나아가서 신라왕실의 외척이 되여 부귀영화를 누려보려고 꾀하면서 자기 딸을 왕비로 들여보내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가 바다사람이라고 멸시하는 신라귀족관료들의 완강한 반대로 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반란을 일으켰다. 신라왕조는 장보고의 세력이 매우 강대한데 겁을 먹고 토벌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841년 11월 신라왕실은 장보고와 이미 안면이 있던 무주별가 염장을 파견하여 그를 살해하게 하였다. 그리고 군대를 동원하여 그 부하들의 반항을 진압하였다. 신라통치배들은 반란진압후에도 장보고의 부하들과 청해진백성들이 신라왕정의 탄압을 반대하여 계속 여러가지 형태로 저항하자 851년 2월 청해진을 페지하였다. 그리고 그 백성들을 벽골군(전라북도 김제)으로 이주시켰다. 신라봉건통치배들의 권력다툼과 배타적인 골품제도의 후과로 청해진이 해산됨으로써 신라의 수군은 또다시 쇠퇴되고 나라의 해상방어는 약화되였다. 청해진은 거의 24년간 강대한 수군기지로서 당나라해적들의 략탈행위를 종식시킴으로써 신라의 수군력을 강화하고 나라의 대외적권위를 높이는데 기여하였다.
청해진대사 장보고는 비록 권력욕에 사로잡혀 비참한 운명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였으나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신라수군을 강화하고 해적들의 행위를 근절시킴으로써 겨레의 안전을 보장하고 민족사에 자기의 이름을 남겼다.
21) 첫 통일국가를 세운 왕건
왕건은 발해유민들과 그 남부지역의 일부 그리고 후기신라말기에 생겨난 후삼국을 통일하여 우리 나라에서의 첫 통일국가인 고려를 세운 시조왕이다. 동족의 나라들을 하나로 통합하려던 고구려의 지향은 고려에 의하여 실현되였다. 왕건(877-943년)의 자는 약천이며 아버지는 룡건(후에 왕륭으로 고침), 어머니는 한씨이다. 그의 먼 조상은 백두산일대에서 살았다고 한다. 왕건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지혜가 있었고 이마의 뼈는 둥글고 턱은 모나며 얼굴이 널직하였으며 기상이 뛰여나고 음성이 웅장하였으며 세상을 건질 도량이 있었다고 한다. 왕건의 나이 17살이 되였을 때 동리산(전라남도 공성에 있는 산이름)에 있는 후기신라의 유명한 중인 도선이 찾아왔다. 그는 《삼국 말세의 백성들은 당신이 구제하여줄것을 기다리고있다.》고 하면서 나서기를 권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왕건에게 군대를 지휘하고 진을 치는 법, 유리한 지형과 적당한 시기를 선택하는 법, 산천의 형세를 바라보아 감통보우(소위 천시, 지리 등 초인간적신비력을 통해서 사람의 사업을 돕는다는것)하는 리치를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후기신라말기 봉건적착취와 신분적억압이 증대되고 통치질서가 문란해지면서 곳곳에서 인민들이 투쟁에 궐기하고 그 기회를 타서 정치적야심가들이 등장하여 세력을 확대하고있었다. 견훤은 옛 백제땅을 차지하고 900년에 후백제를 세웠고 궁예는 옛 고구려의 남부지역을 차지하고 901년에 고려(후고구려)를 세움으로써 후기신라의 령역안에는 3개의 봉건국가가 있게 되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 나라 력사에서의 《후삼국》이다. 894~895년사이에 궁예가 세력을 확장하고 《군(임금)》을 자칭하던 때에 송악군의 사찬으로 있던 왕륭이 왕건을 데리고와서 그에게 투항하였다. 궁예는 기뻐하며 금성(철원군이라고 한 기록도 있다.)태수로 삼았다. 왕륭은 궁예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대왕께서 만약에 조선, 숙신, 변한지역에서 임금노릇을 하려면 먼저 송악에 성을 쌓고 신의 맏아들(왕건을 말함.)을 그 성주로 삼는것이 좋을듯 하옵니다.》 궁예는 왕륭의 말을 쫓았다. 철원은 사면이 막히고 지형이 험하기는 하지만 강이 없어서 운수가 곤난한 점이 있었다. 그대신 송악군(개성)은 오늘의 한강 북쪽의 이름난 고을이며 산수가 아름다운 곳이였다. 궁예는 왕건으로 하여금 송악의 남쪽에 발어참성을 쌓게 하고 이어 그를 성주로 삼았다. 이때 그의 나이는 20살이였다. 이렇게 그의 정치적생애가 시작되였다. 왕건은 궁예의 부하장수가 되여 후백제 견훤과의 여러차례의 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그는 해전에 능한 수군장수로서 명성을 떨쳤다. 왕건은 궁예의 정권에서 계속 벼슬이 올라 913년에는 파진찬으로 관등이 높아지고 시중이 되여 지위가 백관의 우두머리로 되였다. 918년 6월 14일 왕건은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궁예를 내쫓고 다음날에 포정전에서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라고 하고 년호를 천수로 정하였다. 그 이후 왕건의 군사활동은 성공과 실패가 엇바뀌였다. 왕건은 용맹하고 군사적재능이 있는 견훤에게 빈번히 패하군 하였다. 그러나 934년은 왕건에게 있어서 통일에로의 결정적인 전환의 계기가 마련된 해였다. 그해 7월 발해국의 마지막임금 대인선이 거란의 도읍에 끌려간 조건에서 발해국을 대표하는 임금이라고도 할수 있는 태자 대광현이 수만명의 관료, 군인, 백성들을 거느리고 귀화하여왔다. 그 기쁨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왕건은 934년 9월 20일 운주(충청남도 홍주)싸움에서 견훤을 크게 격파하고 큰 승리를 이룩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후백제의 웅진이북 30여성이 스스로 항복하여왔다. 더 큰 기쁨은 뒤에 있었다. 935년 3월에 왕건을 몹시도 괴롭히던 용장 견훤이 후계자문제를 잘못 처리한것으로 하여 아들들에게 밀려났다가 6월에 고려로 투항해온것이다. 왕건은 너무 기뻐 환영식을 요란하게 벌려놓고 견훤을 맞이하였으며 그를 상부라고 부르고 그의 품계를 백관의 우에 있게 하였다. 11월에는 신라왕 김부가 대세의 흐름을 따라 고려에 귀순하였다. 왕건은 936년 9월에 후백제에 대한 마지막공격작전을 벌려 승리하였다. 그리하여 고려는 우리 나라 력사에서 후삼국만이 아니라 발해까지도 포섭한 첫 통일국가로 등장하게 되였다. 첫 통일국가의 군주로 된 그의 기쁨은 그해에 개태사를 세우게 된 동기에 력력히 비껴있다. 기록에 의하면 936년에 왕건은 백제를 쳐서 크게 이기여 차지하고 하내 30여군과 발해국사람들이 모두 귀순하니 해당 기관에 명령하여 개태사를 짓게 하고 직접 발원하는 글을 지었다고 한다. 그는 절간이 있는 산이름을 《천호》라고 하고 절이름은 《개태》라고 짓게 하였는데 부처님의 위력으로 비호를 받고 하늘의 힘으로 부지하기 위해서라고 그 리유를 밝혔다. 천호사에는 왕건의 진전(화상)이 있다고 한다. 그런즉 왕건은 나라를 통일하여 그 군주가 된 기쁨과 그 나라가 부처님과 하느님의 힘과 위력으로 오래 부강하기를 바라 이 절간을 세웠다는것이다. 생의 절반이상을 전장에서 흘러보낸 왕건. 자기의 피와 땀으로 또 수많은 명신, 명장들과 백성들의 피의 대가로 이루어진 민족의 번영의 기초였기에 그처럼 그는 통일을 기뻐하며 영원하기를 바라마지 않았으리라. 그러면 어떻게 되여 왕건은 강대한 적수들을 꺾고 승리하여 국토의 통일이라는 거창한 위업을 이룩할수 있었던가. 한마디로 그의 성공의 비결은 정치군사전략을 잘 세우고 그것을 일관하게 관철한데 있다. 918년에 궁예를 몰아내고 정권의 자리에 들어앉은 후 왕건은 자기의 정치군사전략을 본격적으로 실현하는 길에 들어섰다. 그의 총적인 전략적목표는 강대한 통일국가를 세우는것이였다. 이 목적을 실현하는데서 무엇보다도 평양을 중시하였다. 918년 6월에 집권한 왕건은 석달후인 9월 26일에 여러 신하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하였다. 《평양 옛 도읍이 황페화된지는 비록 오래지만 고적은 아직 남아있다. 그런데 가시넝쿨이 무성하여 번인(녀진인)들이 거기서 수렵을 하고있으며 또 수렵을 계기로 변방고을들을 침략하여 피해가 크다. 마땅히 백성들을 옮기여 거기서 살게 함으로써 국가의 변방을 공고히 하여 백세의 리익이 되도록 하여야 할것이다.》 평양은 원래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제후국인 《고려후국》의 관할하에 있었다. 발해말기 혼란된 정치정세속에서 평양과 그 주변지역들에서 련속 일어나는 인민들의 반봉건적진출로 하여 《고려후국》의 통치권은 평양일대에까지 미치지 못하게 되였다. 왕건은 력사적으로 평양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회복함으로써 고구려를 계승한 정통국가로서의 명분을 밝히며 더 많은 사람들을 자기 주위에 끌어당기려고 하였다. 왕건은 평양을 대도호부로 하고 사촌동생 왕식렴으로 하여금 수비하게 하였다. 왕건은 평양을 서경(서쪽의 수도라는 뜻)으로 부르면서 거의 해마다 어떤 해에는 두차례씩 순행하였다. 그리고 탑과 종묘의 초상들가운데 훼손된것을 전부 수복하게 하고 성을 쌓으며 여러 군, 현사람들을 이주시키는 조치들도 취하였다. 926년 북방에 있던 고구려의 계승국인 발해가 존재를 끝마친 후 왕건의 북방중시정책은 더욱 적극화되였다. 932년 5월 왕건은 자기가 그토록 평양을 중시하는 리유에 대하여 이렇게 밝혔다. 《최근에 서경을 복구하고 백성을 옮기며 그곳을 충실히 한것은 그 지방 지력에 의거하여 삼한을 평정하고 수도를 장차 여기에 두려 해서이다.》 왕건은 서경건설과 함께 대동강이북지역에 성을 쌓기 위한 사업을 함께 밀고나갔다. 거란에 의하여 빼앗긴 옛 고구려, 발해의 땅까지도 포함하여 강대한 통일국가를 세우려는 그의 전략은 성공하였다. 많은 발해유민들이 고려로 찾아왔는데 기록에 의하면 《온 나라 사람들이 서로 이끌고 고려에로 찾아들어왔다.》고 한다. 평양을 중시한 왕건은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이라고도 할수 있는 《훈요 10조》에서 《서경은 수덕이 순조로와 우리 나라 지맥의 근본으로 되여있으니 만대 왕업의 기지이다. 마땅히 춘하추동 사시절의 중간달에 국왕은 거기에 가서 100일이상 체류함으로써 왕실의 안녕을 도모하게 할것이다.》라고 밝혔던것이다. 후에 고려 26대임금인 충선왕은 태조 왕건이 루차 서도(평양)에 행차하고 북변을 직접 순시한 뜻은 동명의 옛땅을 자기 집안의 옛 물건처럼 여기고 반드시 차지하려고 한것이니 이를 어찌 닭이나 잡고 오리나 옭으려는데 그치려고 한것이였겠는가고 하였다. 충선왕의 이 말은 태조 왕건이 신라(닭)에서 일어난 후삼국을 통일하고 령토를 압록강(오리)까지 넓히려는데만이 아니라 고구려동명왕이 세우고 발해가 이었던 조상전래의 땅을 대대로 전해오는 《옛 물건》처럼 여기고 반드시 되찾으려는 목적을 가지고있었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이러한 정확한 전략적목표를 내세우고있었기에 그는 발해태자 대광현에게서 주권을 이양받고 많은 발해주민들까지 포섭함으로써 고구려의 계승국 발해까지도 포함한 첫 통일국가를 세울수 있었던것이다.
이처럼 왕건은 선견지명있는 전략을 세우고 뛰여난 군사적재능으로 일관성있게 그것을 관철함으로써 나라와 겨레의 통일을 실현하고 민족사에 뚜렷이 자기 이름을 남겼다.
22) 대담하고 능란한 외교로 강적을 몰아낸 서희
서희(942-998년)는 내의령이였던 서필의 아들로서 어렸을 때의 이름은 렴윤이였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였는데 그와 관련하여 이런 일화가 전해온다. 서희의 할아버지인 서신일이 시골에서 살고있을 때였다. 하루는 사슴 한마리가 신일이 있는 곳으로 달려오는것이였다. 신일은 이상하게 여기며 사슴의 아래우를 훑었다. 사슴의 몸에 화살이 박혀있는것을 발견한 그는 그것을 뽑아주고 숨겨놓았다. 얼마후에 사냥군이 헐레벌떡 달려와 화살에 맞은 사슴을 보지 못했는가고 물었다. 신일은 보지 못했다고 시치미를 뗐다. 사냥군은 헛물을 켜고 돌아갔다. 그날 밤 신일의 꿈에 신인이 나타나 사의를 표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사슴은 나의 아들이였는데 그대의 덕택으로 죽지 않았소. 앞으로 당신의 자손들은 대대로 재상이나 대신의 높은 벼슬을 하게 될것이요.》 과연 그의 말대로 서필, 서희, 서눌 등이 대대로 재상이 되였다. 서희는 960년에 18살로서 과거에 급제한 후 차례를 뛰여넘어 광평 원외랑벼슬에 임명되였으며 나중에는 내의시랑으로 승급하였다. 972년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명성을 떨치였다. 983년에 좌승을 거쳐 병관어사로 임명되였고 그후 내사시랑(성종때에 내의시랑으로 개칭함.)으로 전임되였다. 그는 엄정하고 성실하였다고 한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큰 공적은 993년에 있은 거란의 1차 침입때 적들의 약점을 간파하고 대담하게 적진에 들어가 능숙한 외교전으로 적들의 강도적요구를 물리치고 국경밖으로 몰아낸것이다. 992년 12월 거란임금 성종은 고려가 고분고분하지 않는다고 하여 동경류수 소손녕(이름은 항덕, 자는 손녕, 임금의 사위)으로 하여금 고려를 치게 하였다. 소손녕이란 자는 담력이 있고 모략에 능하였다고 한다. 이자는 침략준비를 갖춘데 기초하여 다음해 8월경에 침략을 개시하였다. 이미 그해 5월부터 녀진인들이 거란의 침략음모를 고려정부에 알려왔지만 고려봉건정부는 거짓보고로 생각하고 그에 대한 방비를 하지 않고있었다. 불의의 사변을 당한 고려봉건정부에서는 여러 도에 병마제정사를 파견하였다. 10월에는 내사시랑 서희를 중군사로, 시중 박량유를 상군사로, 문하시랑 최량을 하군사로 각각 임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북계(평안북도지방)에 가서 적을 막게 하였다. 윤10월에는 고려임금 성종자신이 직접 방어를 지휘하기 위하여 서경을 거쳐 안북부(안주)에 주둔하였다. 적들이 봉산군을 점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고려 성종은 되돌아섰으며 서희는 군대를 거느리고 진격하였다. 서희가 봉산을 구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은 소손녕은 저들이 이미 고구려의 옛땅을 차지하였는데 고려가 저희네 강토를 점령하고있으므로 찾으러 왔다느니, 저들이 천하를 통일하였는데 귀순하지 않으므로 소탕하러 왔다느니 하는 잡다한 말을 퍼뜨리게 하였다. 이것을 통하여 서희는 오히려 적들의 약점을 간파하였으며 왕에게 《그들과 화의할수 있는 조짐이 보인다.》고 하였다. 성종(982-997년)은 감찰 사헌차 례빈소경 리몽전을 거란침략군의 병영에 보내여 적들의 의도를 타진해보게 하였다. 소손녕은 저희 군사 80만이 도착하였다고 허장성세하면서 빨리 국왕과 신하들이 와서 항복할것만을 재촉하였다. 리몽전이 그 리유를 묻자 소손녕은 고려에서 백성들을 돌보지 않으므로 천벌을 주러 왔다는 희떠운 소리를 줴쳤다. 이것을 통하여 서희는 적들이 싸우기를 꺼리고있다는 약점을 포착하였다. 그것은 적들이 큰소리를 치면서 저들의 군세를 과장하고 고려의 항복만을 재촉하는 사실을 보아도 잘 알수 있는 일이였다. 병법에도 적의 사신이 말을 겸손하게 하면서 전투준비를 일층 강화함은 진공을 기도하기때문이요, 말을 강경하게 하면서 전진할 기세를 보임은 퇴각을 준비하기때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떤 관료는 임금은 수도로 돌아가고 대신 한명으로 하여금 군대를 인솔하고 투항을 청하자고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자는 서경이북의 땅을 적에게 넘겨주고 황주로부터 절령에 이르는 계선을 국경으로 정하자는 얼토당토않는 의견을 제기하기까지 하였다. 성종은 땅을 떼여주자는 의견에 찬동할 생각으로 서경창고에 두었던 쌀을 통털어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고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하였다. 그러고도 오히려 많은 쌀이 창고에 남았으므로 성종은 이 쌀이 적들의 군량으로 될가봐 념려하며 대동강에 버리도록 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서희는 임금에게 간곡히 간하였다. 《식량이 넉넉하면 성을 능히 지킬수 있고 싸움에서 승리할수도 있사옵니다. 전쟁의 승패는 강하고 약한데만 달린것이 아니라 적의 약점을 잘 알고 행동하면 승리할수 있소이다.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쌀을 버리려고 하시나이까.》 성종은 서희의 의견을 옳게 여기고 그것을 중지하게 하였다. 서희는 임금의 마음이 돌아섰다는것을 깨닫고 적들의 약점에 대해서 밝혔다. 그는 적들의 의도는 고려가 생녀진을 몰아내고 쌓은 가주, 송성 두개 성을 탈취하려는데 불과하며 고구려의 옛 땅을 찾겠다고 주장하고있으나 사실은 고려야말로 고구려의 계승국이므로 명분이 서지 않는데다가 고려군이 천험의 요새인 청천강을 계선으로 하여 철통같은 방어진을 치고있으므로 몹시 두려워하고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서희는 《지금 적들의 병력이 성대한것만을 보고 갑자기 서경이북을 떼여준다면 이것은 옳바른 계책이 아니옵니다. 뿐만아니라 삼각산(지금의 서울)이북은 모두 고구려의 옛 강토인데 그들이 한없는 욕심으로 끝없이 강요한다고 해서 다 주겠소이까. 하물며 국토를 떼여 적에게 준다는것은 만세의 치욕이옵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수도로 돌아가시고 저희들로 하여금 적과 한번 판가리싸움을 하게 하신후에 다시 론의하여도 늦지 않을것이옵니다.》라고 자기의 굳은 결심을 표명하였다. 전 민관어사 리지백도 국토를 떼여주자고 한 자들을 통절히 규탄하며 거란군과 맞서 싸울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성종은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게 되였다. 소손녕은 고려에 항복을 요구한 후 오래동안 소식이 없게 되자 군사적압력을 가하여 고려를 굴복시키려고 청천강을 건너 안주 서남쪽 65리 지점에 있는 안융진을 불의에 공격하였다. 적들은 안융진이 고려방어선의 가장 약한 지점이라고 타산하였던것이다. 그러나 중랑장 대도수(고려에 넘어온 발해왕족의 후손)가 지휘하는 고려방어군의 용감한 항전에 부딪쳐 여지없이 패하여 사기를 잃고말았다. 소손녕은 무모하게 압력을 가하려다 병사들을 잃고 더는 싸우려 하지 못하고 다시 항복을 재촉하였다. 서희는 적들과의 담판시기가 성숙되였음을 느꼈다. 소손녕은 화통사로 파견된 합문사인 장영을 돌려보내면서 다른 대신을 보내라고 요구하였다. 성종이 군신들을 모아놓고 《누가 거란영문으로 가서 언변으로써 적병을 물리치고 만대의 공을 세우겠는가?》고 물었으나 아무도 응답하며 나서는 자가 없었다. 생사를 기약하기 어려운 그 일에 선뜻 나서기 두려웠던것이다. 서희가 비장한 결의를 가다듬으며 일어났다. 《신이 불민하오나 감히 왕명을 받들겠소이다.》 성종은 너무 기뻐서 강가에까지 나가서 그의 손을 잡고 전송하였다. 서희는 말을 타고 소손녕이 있는 군영으로 가면서 생각을 굴리였다. 소손녕은 송나라군과 여러번 싸워 이겼으므로 코대가 높고 고집이 셀것이니 먼저 기세를 꺾어놓은 다음에 담판에 림해야 할것이였다. 서희가 예측한바와 같이 담판에 림하는 소손녕의 태도는 오만무례하였다. 《나는 큰 나라의 대신이니 고려사신은 응당 뜰아래서 절을 하여야 한다.》 《신하가 임금에게 대할 때 당하에서 절하는것은 례법에 있는 일이나 량국의 대신들이 대면하는 좌석에서는 그런 례법이 있을수 없소.》 서희는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소손녕이 고집하자 서희는 더욱 강경하게 맞섰다. 서희는 숙소로 돌아와 자리에 누워서 까딱 움직이지 않았다. 소손녕은 서희의 비범한 인품과 사리정연한 말에 탄복하여 황급히 사람을 보내여 그가 요구하는 례식절차를 승낙한다는것을 전하였다. 고려대신의 체모를 지키려는 이러한 강경한 태도는 칼과 창을 든 수많은 적병들이 우글거리는 적진중에서 취해진것이였다. 그러니 서희에게 드리워졌던 위험이 얼마나 큰것인가를 능히 짐작할수 있다. 하지만 서희는 적들의 약점을 틀어쥐고 배심있게 적들과 맞서 이겼던것이다. 두 나라 대표는 례식을 마친 후 곧 담판을 시작하였다. 령토에 관한 문제가 첫 의정으로 제기되였다. 소손녕은 담판에서 고려는 신라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땅은 거란의 소유이다, 그런데 고려는 거란땅인 고구려의 옛땅을 차지하고있으니 대동강이북의 땅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서희는 그 말을 듣고 사리정연하게 반박하였다. 《우리 나라는 고구려의 계승자이다. 그러므로 나라이름도 고려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 경계를 따진다면 귀국의 동경(료양)까지도 고려의 령토가 되여야 하는데 고구려의 령토를 또 내놓으라는것이 무슨 말인가.》 력사적인 사실을 정확히 밝혀가며 말하는 서희의 반박에 소손녕은 드디여 말문이 막히고말았다. 두번째는 두 나라의 국교에 관한 문제였다. 소손녕은 《고려가 륙지로 린접해있는 우리 거란과는 국교를 가지지 않고 바다를 건너 먼 송나라와 화친하는것은 고려가 거란을 깔보는 태도이다. 이때문에 우리 임금이 군사를 일으킨것이다.》라고 시비하였다. 이에 대하여 서희는 즉석에서 반박하였다. 《압록강안팎의 우리 지경에 녀진인들이 살고있으면서 우리의 길목을 막고있기에 거란과 통하지 못하고 바다건너 송나라와 통하는것이요. 고려가 녀진인들을 몰아내고 우리의 옛 땅에 요새를 구축하고 도로를 개통하면 거란과 통교하지 않을 까닭이 없는것이요.》 서희는 소손녕에게 녀진인들을 몰아내고 우리의 수백리 옛 땅을 찾겠다는 고려의 립장을 명백히 밝히고 그것이 거란과의 국교를 맺는 전제조건으로 된다는것을 인정시키였다. 고려의 령토확장을 거란과의 국교문제와 기묘하게 결부시킨 서희의 능란한 외교적수완앞에 말문이 막힌 소손녕은 자기 임금에게 이 사실을 그대로 보고하였다. 거란임금은 고려가 장차 녀진인들을 몰아내고 통로를 개척한 다음 거란과 통교할것이라고 믿고 군사를 거두어가지고 돌아올것을 명령하였다. 이리하여 7일간 격렬하게 진행된 거란침략군과의 담판은 고려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소손녕은 담판을 끝내면서 서희를 위하여 연회를 베풀겠다는것을 제의하였다. 서희는 그것을 부드럽게 사양하며 말하였다. 《지금 우리 나라에서 귀국이 대군을 출동하였으므로 모두 손에 무기를 들고 떨쳐나서서 싸움준비로 긴장한 나날을 보내고있는 때에 어찌 내가 잔치하고 즐기겠는가.》 그러나 소손녕은 《두 나라 대신이 서로 만났는데 어찌 친목하는 례식이 없을수 있겠는가.》고 하면서 서희를 연회장으로 이끌어갔다. 소손녕이 굳이 간청하므로 서희는 륭숭한 대접을 받으며 즐겁게 지냈다. 소손녕은 담판초기의 오만무례하던 태도를 버리고 서희를 깍듯이 존대하였으며 작별하는 시각이 되자 락타 10필, 말 100필, 양 1,000마리, 비단 500필을 선물로 주었다. 고려가 적들과의 담판에서 승리하고 전리품이라고도 할수 있는 이런 례물까지 받을수 있은것은 993년 윤10월 안융진전투에서 승리하여 침공하는 적들의 예기를 꺾어놓은 다음에 강화담판을 진행하였기때문이다. 안융진전투승리와 그에 의거한 서희의 대담하고 능란한 외교는 거란침략자들을 물리칠수 있었던 요인이였다. 994년 평장사로 된 서희는 고려군을 이끌고 녀진인들을 몰아내고 장흥(태천), 귀화 두 진과 곽주(곽산), 구주(구성) 두 고을에, 다음해에는 선주(선천), 맹주(맹산) 두 고을에 성을 쌓아 서북면 국경지대의 방어를 일층 강화하였다.
이처럼 서희는 뛰여난 군사적재능과 대담하고 능란한 외교로 적들의 침략을 물리치고 강토를 수호하였을뿐아니라 녀진인들을 몰아내고 옛 고구려땅을 수복하는데 공로를 세운 단군의 후손이다.
23) 작고도 큰 사람 강감찬
강감찬(948-1031년)의 처음 이름은 은천이며 금주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궁진은 태조를 도와 건국에 공을 세웠으므로 삼한벽상공신으로 되였다. 강감찬의 출생과 관련하여 이런 이야기가 전해온다. 외국의 어느 한 사신이 밤중에 시흥군으로 들어올무렵에 큰 별이 어떤 집에 떨어지는것을 보고 사람을 보내여 찾아본즉 마침 그 집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었다. 이 말을 듣고 사신이 마음속으로 신기하게 여기고 그 아이를 데려다가 양육했는데 그가 바로 강감찬이였다고 한다. 강감찬이 재상이 된 후에 송나라 사신이 그를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아래자리로 물러나서 절하며 《문곡성(별이름)이 오래동안 보이지 않더니 여기 와서 있고나.》라고 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강감찬은 작고 용모도 보잘것 없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신통한 지략이 많았다고 한다. 강감찬은 성종때에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벼슬이 여러번 올라 례부시랑, 국자제주, 한림학사, 승지, 좌산기상시, 중추사, 리부상서를 거쳐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강감찬은 1010년과 1018년 거란의 2차, 3차 침입때 거란의 수십만 침략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수호하는데 결정적역할을 한 애국명장이다. 강감찬이 상대로 한 적은 강한 기동력을 가진 기병이였다. 적들은 빠른 기동력을 리용하여 속전속결을 노리였다. 때문에 타격력이 강하였다. 이러한 적과의 싸움에서는 예봉을 꺾어놓음으로써 적들이 의거하는 수단을 무력하게 만들어놓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1010년과 1018년 두차례의 반거란전쟁은 예봉을 꺾어 적의 기병을 소멸한 강감찬의 신묘한 전법들을 잘 보여주고있다. 1010년 11월 16일 거란임금 성종은 강조의 정변을 계기로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던 끝에 직접 40만의 침략군을 끌고 고려로 쳐들어왔다. 고려군은 적들의 침략기도에 대처하여 적의 압록강도하장을 틀어쥐고 배후를 위협하면서 통주계선에서 결정적타격을 주어 청천강이북지대에서 최종적으로 소멸하기로 계획하였다. 첫 전투는 고려의 관문요새인 흥화진에서 벌어졌다. 흥화진방어자들은 도순검사 양규의 지휘밑에 용감히 싸워 성을 지켜냈다. 적들은 할수없이 성을 견제하여 퇴로를 보장할 목적으로 린주(의주군) 남쪽 무로대에 20만의 병력을 떨구지 않으면 안되였다. 계속 남하하는 적의 예봉을 꺾어놓기 위하여 고려군 총 지휘자 강조는 창칼을 꽂아 만든 검차라는 장애물을 일선에 배치해놓았다. 그런데 강조는 첫 승리에 만족하여 전투지휘를 태공함으로써 돌이킬수 없는 과오를 저질렀다. 적들은 통주계선방어진을 돌파하고 계속 남하하였다. 일부 대신들속에서는 항복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강감찬만은 투항을 반대하였다. 《오늘의 사변을 발생시킨 죄는 강조에게 있으니 걱정할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힘에 부친 전쟁이니 마땅히 적의 예봉을 피하였다가 천천히 회복할 방도를 강구합시다.》 이렇게 자기의 립장을 밝힌 강감찬은 왕에게 계책을 제기하였다. 우선 적들이 노리는것은 임금을 사로잡아 항복을 받아내자는것이므로 국왕과 고려정부는 일시 피난하며 그 시간을 얻기 위하여 거짓으로 항복을 제의한다, 한편 청야전술로 적들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음으로써 적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게 한다, 요긴한 길목들을 막고 험한 지형에 의거하여 보루를 더 높이 쌓아 굳게 지킴으로써 적들의 예봉을 꺾고 퇴각하기를 기다려 추격전을 조직하여 섬멸한다. 강감찬의 제의는 국왕의 승인을 받았다. 고려정부의 거짓 강화제안에 접한 거란군은 어리둥절해져 주춤거렸다. 이미 적지 않은 손실을 당하였던지라 거의 모든 장수들속에서는 그에 만족하여 퇴군하자는 제의까지 나왔다. 이때 통주에서 고려군 주력을 격파하는데 《큰 기여》를 한 야률오질만은 고려왕이 《한번 싸움에 패하여 강화를 요구하니 이것은 계교가 아닌지 의심스러울뿐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였다가 그들의 간계에 빠질가봐 두려우니 그 세력이 힘이 다하기를 기다려 굴복시켜 받아들이는것도 늦지는 않을것입니다.》라고 하면서 힘으로 굴복시킬것을 주장하였다. 적들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고려정부는 개경을 떠나 일단 광주로 피난하였다. 거란침략군은 1011년 1월 1일 고려의 수도 개경을 점령하여 대묘, 궁궐, 민가들을 모조리 소각하며 략탈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적들은 고려군의 청야전술에 걸려들어 굶주림에 시달리고 추위에 허덕이게 되였다. 그리고 곳곳에서 고려군이 적들에게 타격을 주었다. 한편 적의 병영에 사신으로 간 하공진일행은 임금이 간 곳을 묻는 거란추격부대에 강남으로 갔는데 어디 있는지는 모른다, 강남은 대단히 먼 곳이라 몇만리나 되는지 모르겠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적들은 고려왕의 행적을 찾을길 없는데다가 피해상황은 더욱 커져 할수없이 추격을 단념하고 돌아섰다. 개경에 침입하였던 적들은 11일만에 총 퇴각을 개시하였다. 적들이 패주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사정에 대하여 적측 기록에서는 《순(고려 현종왕)은 과연 달아나고 청야전술로 얻는것이 없는데다가 그 군사들이 요지를 막고 험한데 의거하고 보루를 지키니 공격하였으나 항복시키지 못하였》기때문이라고 전하고있다. 고려의 군민들은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여 강력한 타격을 주었다. 고려군은 구주, 무로대, 리수, 여리참, 애전 등 싸움들에서 적 수만명을 섬멸하였다. 거란군은 고려군의 여러 장수들의 강한 반격에 봉착하고 또 말과 락타는 피로하고 병들었으며 군복과 병기를 다 잃어버리였으므로 압록강을 건너 퇴각하게 되였다. 이때 고려군은 적이 강을 반쯤 건늘 때 후군을 맹렬히 추격하여 수많은 적을 물속에 처넣었다. 이처럼 강감찬이 내놓은 정확한 전술은 전쟁의 최후승리를 이룩하는데서 결정적작용을 하였다. 만일 비겁하고 무능한 대신들의 주장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투항하였다면 나라의 자주권을 고수하지 못하는것은 물론 력사에 영원한 수치를 남겼을지도 모른다. 당시 형편에서 강감찬이 내놓은 방책은 전쟁을 고려의 승리로 결속지을수 있게 하였다. 강감찬은 1018년 거란의 제3차 침략을 물리치는 싸움도 직접 책임지고 승리에로 이끌었다. 거란장수 소배압(자 한은)이 10만의 정예기병을 끌고 고려를 침략한다는 소식에 접한 고려정부는 1018년 12월에 급히 방어대책을 강구하였다. 이미 거란의 침략위협에 대처하여 10월에 서북면 행영도통사로 파견되여가있던 평장사 강감찬을 상원수로,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로 하여 방어군이 편성되였다. 그들이 거느린 고려방어군의 수는 20만 8,300명이였다. 강감찬은 녕주에 지휘부를 두고 관문요새인 흥화진에까지 방어진을 폈다. 강감찬의 계획은 적의 정예기병의 예봉을 애초에 꺾어놓는것이였다. 강감찬은 지세를 살펴보고나서 흥화진창고에 있는 소가죽을 있는대로 다 가져오게 하여 긴 바줄로 련결시키였다. 그리고 삼교천상류의 한복판에 말뚝을 박고 그에 의지해 꿰맨 소가죽으로 물이 흐르지 못하게 막아놓았다. 《소가죽제방》에 의하여 물이 불어나기 시작했고 소가죽제방우에는 큰 저수지가 생겨났다. 한편 강을 따라 골짜기와 나무숲에 1만 2,000명의 기병을 매복시키였다. 1018년 12월 10일 드디여 거란장수 소배압의 지휘밑에 10만명의 거란기병이 흥화진을 공격하여왔다. 소배압이라는 자는 993년 거란군의 제1차 침략전쟁당시 침략군대장이였던 소손녕의 형이였다. 소배압은 1010년 거란군의 제2차 침략때에 북부재상으로서 임금 성종을 따라 고려를 침략하였었다. 개경을 점령하고 크게 략탈하도록 한 자가 바로 이자였다. 제법 지략이 많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다고 자부하던 이자는 자기의 적수가 어떤 사람들인지 아직 모르고있었다. 놈들은 2차 침입때 당한 수치를 어떻게 하나 만회하고 기어코 고려의 항복을 받아내려는 어리석은 망상을 하고있었다. 전번 침입때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흥화진에서의 싸움을 피하고 곧바로 고려수도를 향하여 진격할 예정이였다. 거란군은 흥화진에 이르자 일시에 성을 공격하는척 하면서 삼교천을 건너 앞으로 진격하여나아갔다. 전투를 회피하려는 적들에게 전투를 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는것도 중요한 전법에 속한다. 삼교천하류는 거란군사들의 웨침소리, 말울음소리로 들끓었다. 강감찬은 적의 군사가 강 한복판에 들어섰을 때 일제히 소가죽제방을 터뜨리게 하였다. 저수지처럼 고여있던 큰물이 일시에 밀려내려오자 키를 넘는 물사태가 강복판에 들어섰던 거란군사들을 그대로 삼켜버렸다. 강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겨우 죽음을 면한 적들이 기슭에 올라 대오도 정비하기 전에 매복했던 1만 2,000명의 고려기병이 놈들을 덮쳤다. 일제히 활을 쏜 다음 맹렬한 기세로 접근한 고려기병의 칼날이 번뜩이는 곳마다에 거란기병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목이 뚝뚝 떨어졌다. 거란기병은 혼비백산하여 병장기들을 버린채 도망치기에 급급하였다. 첫 전투에서의 승리는 거란기병의 예봉을 꺾어놓고 고려군이 싸움의 주도권을 쥐게 하는데 큰 작용을 하였다. 적장 소배압은 첫 전투에서 고려군의 수공전과 매복공격에 걸려 패하자 자기들의 전통적인 전투방법인 벌판에서의 결전을 회피하고 속전속결을 꾀하면서 태천-녕변-개천 등 서북면 산간지대를 통과하여 곧바로 개경을 향해 쳐들어갔다. 돌변한 정세하에서 강감찬은 곧 그에 맞는 전술을 세웠다. 그는 부원수 강민첨으로 하여금 1만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다가 기회를 보아 적의 뒤를 엄습하도록 하였다. 보통 진격하는 군대의 후위는 전위보다 약한것이 특징이다. 앞에 전투력이 강한 부대를 배치하여야 적의 저항을 분쇄하고 진격의 속도를 보장할수 있기때문이다. 반대로 퇴각하는 군대의 후위에는 전위보다 강한 부대를 배치하는데 그래야 적의 추격을 막고 퇴각을 성과적으로 실현할수 있기때문이다. 강감찬은 이러한 점을 노리고 추격을 조직하였는데 그의 예측은 면바로 들어가 맞았다. 부원수 강민첨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적군을 추격하다가 자주 래구산(평안남도 평성시)에서 적군의 뒤를 습격하여 수많은 적병을 살상하였다. 시랑 조원이 거느리는 고려군도 평양을 에돌아 강동을 거쳐 개경에 가려는 거란침략자들을 마탄(평양시 승호구역 봉도리)에서 맞받아 싸워 1만명이나 살상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련속되는 타격에 소배압은 몹시 초조해났다. 최후의 한판에 운명을 걸고 밑천을 깡그리 내대듯이 소배압은 상원, 수안을 거쳐 개경을 향하여 진격하는 최후의 발악을 감행하였다. 이때 적들의 기도를 미리 간파하고 세운 시기적절한 대책에 의하여 개경의 방비는 철통같이 강화되였다. 강감찬은 병마판관 김종현으로 하여금 1만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밤낮으로 행군하여 개경에 들어가 지키도록 하였으며 동북면병마사도 3,000여명의 정병을 개경에 보내였다. 그리고 철저한 청야수성전술을 써서 개경주위의 100리안팎의 주민들을 성안에 옮기고 한알의 낟알도 남겨두지 않게 하였으며 우물을 모조리 메워버렸다. 물 한방울, 낟알 한알, 마초 한단 얻을수 없게 된 적들은 극도로 피로하였으며 적장 소배압은 그만 공포에 떨었다. 소배압은 마지막시도로 300명의 척후병을 금교역(황해북도 개풍군)에 파견하였으나 고려군의 야습에 의하여 전멸되였다. 그이상 더 견딜수 없게 된 거란침략군은 마침내 총 퇴각을 개시하였다. 적들이 도망치기 시작하자 개경방어를 지원하던 병마판관 김종현의 부대는 곧 추격으로 넘어가 적들에게 쉴 짬을 주지 않고 놈들의 행군서렬을 위협하면서 뒤꼬리를 바싹 물었다. 퇴각하는 거란군에 대한 첫 타격전은 련주(개천)와 위주(녕변)사이에서 벌어졌다. 적들이 쫓겨가는 길목을 지키고있던 강감찬은 1월 23일 침략군을 불의에 기습하여 500여명을 순식간에 소멸하였다. 강감찬은 방어군주력을 구주(평안북도 구성)계선에 집결시키고 철통같은 포위진을 쳤다. 적들은 고려군의 주력과 전투한적이 아직 없었으므로 일정한 력량은 유지하고있었다. 하지만 여러차례의 전투에서 패하여 사기가 없어지고 고려군의 청야전술에 걸려들어 전투력이 심히 떨어진 상태였다. 1019년 2월 1일 구주벌판에서 거란침략군을 물리치는 대포위전이 벌어졌다. 싸움은 처음부터 치렬하였다. 적들은 어떻게 하나 포위를 뚫으려고 그중 전투력이 강한 부대를 북쪽에 집중하였다. 막바지에 이른 적들도 기를 쓰며 출로를 열려고 하였다. 이때 김종현의 부대가 도착하여 합세하였다. 게다가 갑자기 바람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와 고려군의 사기는 더욱 고조되였다. 고려군이 이 기세를 타서 맹렬히 공격하자 된타격을 받은 거란군은 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강감찬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적들을 추격하게 하였다. 석천을 건너 반령에 이르는 길우에 적들의 시체가 널리였고 생포한 인원과 로획한 말, 락타, 갑옷과 투구, 병기 등은 이루 다 헤아릴수 없을 정도였다. 풍부한 지략과 용맹을 뽐내던 소배압은 갑옷을 벗어던지고 엎드려 기여 달아났다. 적병으로서 살아 돌아간 자는 겨우 수천명에 불과하였다. 옛 기록에 의하면 《거란군은 지금까지 이렇게 비참한 패배를 당해본 례가 없었다.》고 한다. 거란왕은 이 소식을 듣고 노발대발하면서 사람을 보내여 소배압을 책망하였다. 《네가 적을 얕잡아보고 경솔하게 깊이 들어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낯으로 나를 대하려는가? 내 너의 얼굴가죽을 벗긴 후에 죽이겠노라.》 소배압은 패전책임을 지고 파멸되였다. 70살의 백전로장 강감찬은 승전고를 울리며 개선하였다. 고려임금 현종은 너무 기뻐 영파역에까지 마중나가 개선대오를 맞이하였다. 강감찬은 임금으로부터 《분에 넘치는 우대》를 받았다. 그는 사망하기 전까지 여러차례 높은 관작과 공신칭호를 받으며 임금들의 총애를 독차지하였다. 그는 총애가 커지고 관작이 높아갈수록 더욱 자신을 다잡고 나라일에 힘썼다. 그는 평상시에는 해지고 때묻은 의복을 입고있어서 누구나 그를 보통사람으로밖에 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일단 엄숙한 태도로 조정에 나아가서 국사를 처리하며 국책을 결정하는 마당에서는 당당한 국가의 중신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당시에 풍년이 계속되고 백성들이 생활에 안착하여 나라가 평온한것을 사람들은 강감찬의 공덕으로 이루어진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강감찬은 벼슬을 내놓고 들어와서도 나라방비를 근심하면서 수도에 성곽이 없으니 큰 외성을 축조하자고 건의하였다. 임금은 그 건의를 접수하여 왕가도로 하여금 축조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는 벼슬을 내놓고 성 남쪽의 별장에서 살면서 《락도교거집》과 《구선집》을 저술하였다. 체모로 보면 자그마하고 볼품이 없었으나 나라와 겨레를 위해 후세에 길이 남을 큰 공적을 쌓은 강감찬, 강대한 적기병의 전략전술적특성과 약점을 옳게 파악한데 기초하여 수공과 매복습격, 추격, 청야전술 등 적의 예봉을 꺾어 격파하는 전략전술로 두차례의 전쟁을 승리적으로 결속짓게 함으로써 나라와 겨레의 안전을 지켜낸 그의 공적은 민족사에 자랑스럽게 새겨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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