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도서연재 『단군민족의 명인들』(4)

미천한 왕자 을불

프레스아리랑 | 기사입력 2023/01/07 [11:34]

도서연재 『단군민족의 명인들』(4)

미천한 왕자 을불

프레스아리랑 | 입력 : 2023/01/07 [11:34]

9) 미천한 왕자 을불 

 

세상에는 왕자가 거지와 옷을 바꿔 입고 하바닥인생을 체험했다는 유명한 책도 있다.

하지만 우리 력사에는 왕자가 때국물이 흐르는 옷을 입고 간난신고를 겪으며 고행의 한 시절을 보낸 실재한 사실이 있다. 그 주인공은 고구려의 20대왕이였던 미천왕(300-331년) 을불이다.

력사에 폭군의 한사람으로 기록된 봉상왕(292-300년)은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하며 시기가 많았다. 그는 왕이 되자 삼촌인 안국군 달가가 공적이 있어 백성들속에 인망이 있다고 하여 의심하면서 당치않은 음모를 꾸며 살해하였다. 그리고 동생인 돌고가 딴마음을 가졌다고 하면서 아무 죄도 없는 그를 자살하게 하였다.

이렇게 되자 돌고의 아들 을불은 왕이 자기도 해칠수 있다고 생각하고 도망쳐 몸을 숨기였다.

고대광실에서 호의호식하던 왕자 을불의 고행의 시절은 이렇게 왕의 의심과 폭행으로 강요되였던것이다.

을불이 도망쳐 처음 몸을 맡긴 곳은 수실촌사람 음모의 집이였다. 을불은 그의 집에서 한쪼각 밥덩이를 얻어먹으며 머슴으로 눈물겨운 고역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음모는 고약하고 혹독한 부자였다. 을불의 정체를 모르는 그는 온종일 마당을 쓸어라, 밭일을 해라, 나무를 해라, 부채질을 해라, 다리를 주물러라 하며 숨쉴 틈을 주지 않았다. 지어 집옆에 있는 늪에서 밤마다 개구리가 소란스럽게 울어 잠을 잘수가 없다면서 밤새껏 돌멩이를 던져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였다.

고역의 날과 달은 흘러 1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고행속에서 연약하였던 을불은 얼굴이 검실검실하고 가슴이 쩍 버그러지고 팔과 다리가 억세여진 름름한 장부로 성장하였다.

그의 이런 성장의 모습을 보는지 못 보는지 음모의 학대는 여전하였다.

(더는 참을수 없다!)

을불은 단호히 악마의 소굴에서 뛰쳐나왔다.

그는 동촌사람인 재모를 알게 되고 그와 소금장사를 하게 되였다.

한번은 을불이 배를 타고 압록에 이르러 소금을 가지고 내려와 강 동쪽 사수촌사람의 집에 들린적이 있었다.

그 집의 로파가 소금을 청하여 한말가량 주었다. 로파가 더 달라고 하자 을불은 거절하였다.

로파를 불쌍히 여겨 한말을 그저 퍼줬는데 또 달라니 거기에 명줄을 건 나는 어떻게 살란 말인가.

을불이 로파의 청을 거절하자 그 로파는 앙심을 품고 몰래 소금짐속에 자기의 신발을 묻어두었다.

이것을 알리 없는 을불은 싸구려를 웨치며 마을을 돌았다.

그런데 얼마후에 로파가 따라와 다짜고짜로 그에게 매달려 행패를 부렸다.

《이 도적놈아, 내 신발을 내놓아라.》

《신발이라니, 무슨 신발말이요.》 아닌밤중에 홍두깨 내미는 격이라 을불은 아연해졌다.

《이놈, 아닌보살할테냐? 어서 그 짐을 보자!》

로파는 을불의 소금짐을 잡아벗겨 헤쳐보았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닐세라 신발이 나타났다.

아무리 변명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로파는 기고만장하여 을불을 끌고 압록성주에게로 갔다.

《허, 그놈 참 고약하다. 얘들아, 저 도적놈의 볼기를 매우 쳐라.》

이리하여 미천한 왕자는 도적 아닌 도적이 되여 형틀에 묶이게 되였다.

곤장이 떨어질 때마다 살점을 뜯어내고 피를 뿌렸다. 을불은 입술을 깨물며 피눈물을 삼켰다.

압록성주는 신값으로 소금을 빼앗아 로파에게 주고 운신을 제대로 못하는 을불을 알몸으로 내쫓았다.

을불은 또다시 빌어먹는 거러지신세가 되였다. 얼굴은 초췌해지고 옷은 람루해져 살이 다 드러났다.

한편 봉상왕은 사람을 여기저기에 파견하여 을불을 찾아 죽이게 하였다.

시시각각으로 죽음의 위협을 당하는 속에서도 을불은 어린시절부터 품어온 뜻을 버리지 않았다.

단군조선의 땅을 모두 되찾고 고구려를 강대국으로 천하에 우뚝 세우리라.

전설에 의하면 그는 류랑걸식의 나날 료동지역 산천의 요충지들과 도로의 멀고 가까움을 알기 위해 풀씨를 가지고 다니며 길가에 뿌리여 자기가 경과한 길들을 기억해두었다. 지금도 료동각지의 길가에는 을불의 이름과 음이 비슷한 《우글로》란 풀이 많다고 한다.

여러해의 류랑걸식은 을불에게 참으로 많은것을 알게 하여준 나날이기도 하였다.

그는 천대받고 억압받는 근로대중은 비록 먹을것도 입을것도 풍족치 않아도 서로 의좋게 살며 고난을 함께 나누는 한형제와 같음을 페부로 느끼였다. 그가 주린 창자를 부여잡고 길거리에 쓰러져있을 때 그를 업고 집으로 가 먹을것을 준것은 못 볼것을 봤다고 골살을 찌프리며 피해간 귀족들과 부호나부랭이들이 아니라 선량한 백성들이였다. 그가 찬비를 맞고 병에 걸렸을 때 밤을 새워가며 약을 구하여 달여준것도 백성들이였다.

백성들은 한말의 곡식도 한자의 베천도 나누면서도 어서빨리 선조의 옛땅을 모두 되찾고 고구려를 천하의 대국으로 만들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봉상왕을 비롯한 통치배들은 어떠하였던가.

흉년으로 백성들이 죽어가도 자주 궁실이나 화려하게 증축하는데 인력과 재력을 마구 퍼붓고 반항하는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지어는 이에 대하여 충고하는 국상 창조리 등 관료들에게도 위협을 가하며 전횡을 부렸다.

봉상왕9년(300년)의 어느 날 을불은 장에 내갈 가죽신을 만들고있었다. 그동안 그는 한 장공인에게서 가죽신 만드는 법을 배웠다. 눈썰미가 있는 그는 인차 그 법을 체득하였는데 그가 만든 신은 인기가 대단하였다. 지금도 을불이 류랑걸식하던 옛 고구려의 령역이 있던 만주지방에서는 가죽신을 가리켜 우불(을불의 딴 이름)의 이름자와 거의 비슷한 《우글로》라고 부른다고 한다.

마지막신발을 마무리하고 가죽부대에 넣어 등에 진 을불은 강건너편의 성시에 내다 팔기 위해 비류하기슭으로 나왔다.

그가 나루배에 올라앉아 떠날 시각을 기다리는데 한무리의 관리들이 밀려왔다.

그가운데 풍채좋은 한 관리가 을불을 주시해보았다. 얼굴은 비록 여위고 옷은 람루하지만 몸가짐은 여느 사람과 달랐다. 그 관리는 배우의 사람들을 내리우고 반색을 하며 을불에게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왕손께 문안드리오.》

을불은 당황하여 뒤걸음쳤다.

《아, 아니요, 왕손이라니. 난 왕손이란 사람이 아니요.》

《아니옵니다. 신은 왕궁에서 저하(왕자에 대한 존칭)를 몇번 뵈온적이 있소이다. 신은 동부사람 소우라고 하나이다. 지금 국왕이 무도하므로 국상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왕을 페할 일을 몰래 꾸미고있소이다. 그러면서 왕손이 절조가 있고 행동이 검박하고 인자하며 사람을 사랑하기때문에 조상의 유업을 능히 이을수 있다하여 일부러 북부사람 조불과 신 등을 보내여 받들어오게 하였소이다.》

을불은 의심을 가실수 없었다.

《나는 평민이요, 왕손이 아니니 다시 알아보소이다.》

소우는 진중한 낯빛으로 다시 간곡히 말하였다.

《지금 임금이 인심을 잃은지 오래여 진실로 나라의 주인이 될수 없기때문에 여러 신하들이 왕손을 몹시 간절하게 기다리고있으니 의심하지 말기를 바라나이다.》

소우 등의 이야기를 듣고 을불은 의심을 가시게 되였다. 그는 자기가 고추가였던 돌고의 아들 을불임을 털어놓았다.

소우일행은 몹시 기뻐하며 을불을 조맥 남쪽 어딘가에 숨겨놓았다.

그해 9월 국상 창조리는 후산 북쪽에서 사냥을 하는 왕을 따라갔다가 반정을 일으키고 봉상왕을 페위시켰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여 을불을 맞아다가 왕좌에 앉히고 옥새를 바쳤다.

봉상왕은 스스로 목을 매여 자결함으로써 죄많은 생을 마쳤다.

이렇게 되여 8년간 류랑걸식하며 고행의 시절을 보낸 미천한 왕자 을불은 고구려 20대 왕위에 오르게 되였다.

그는 자신이 백성들속에서 살며 그들의 생활을 많이 체험하여 느낀바가 있으므로 과중한 봉건적억압과 착취를 일부 늦춰주는 정책을 실시하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국내에 조성되였던 사회계급적모순을 어느 정도 완화시켰다.

그의 가장 큰 공적은 조상의 땅을 모두 되찾고 나라의 국력을 강화하기 위한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시킨것이다.

313~314년기간에 락랑군, 대방군의 침략세력을 구축하여 력대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세력의 음모책동의 한 소굴을 청산하였으며 315년에는 현도군지역을 차지하였다. 그리하여 한나라군이 B. C. 108년에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하였던 소위 《한4군》지역을 되찾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료동지역에 남은 침략세력의 마지막아성인 료동군을 소멸하기 위하여 자신이 직접 군사를 지휘하거나 혹은 장수를 파견하기도 하면서 《자주 군사를 보내여 료동을 공격》하였다.

그의 집권 30여년기간에 한나라에 강점되였던 고조선의 옛땅, 그의 선대 임금들이 그토록 찾으려고 애쓰던 조상의 땅이 많이 회복되게 되였다.

이것은 어려운 날에도 초지를 굽히지 않았던 그의 의지의 결실이였고 백성들과 험난한 생활을 함께 하며 난관을 맞받아나가는 억센 힘을 키운 결과이기도 하였다.

비록 그는 인민의 우에 군림한 봉건군주의 한사람이였지만 나라와 민족의 발전에 긍정적인 기여를 한것으로 하여 《미천한 왕자》의 일화와 더불어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아있는것이다.

 

  



10) 웅대한 포부를 지니고 강토를 넓힌 광개토왕

  

강대하였던 고구려의 위용을 시위하는듯 1,50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거연히 서있는 광개토왕릉비, 중국 길림성 집안시 태왕향에 있는 릉비는 높이가 6.34m로써 지금까지 동방에서 알려진 비석들가운데서는 가장 큰 축에 속한다. 비석은 고구려의 령토개척에서 특출한 공적을 세운 광개토왕의 업적에 어울리는 기념물이다.

고구려의 24대임금인 광개토왕은 적극적인 군사활동을 벌려 북쪽과 남쪽으로 령토를 확장하고 삼국통일의 확고한 토대를 마련하여놓았으며 외래침략세력을 물리치고 나라와 겨레의 안전을 지켜내는데 이바지하였다.

광개토왕(생존년대 374-412년, 재위 391-412년)의 정확한 시호는 국강상광개토지(경)평안호태(성)왕이며 이름은 담덕이다. 그의 시호가 보여주듯이 그는 18살밖에 안되는 애젊은 나이에 왕좌에 올랐으나 천성적으로 육체적준비가 좋고 출중한 무예와 뛰여난 지략을 소유하고있었다. 더우기 그는 어려서부터 삼국을 통일하고 고구려를 천하에 우뚝 내세울 큰뜻을 가지고있었다. 그는 391년에 즉위하여서부터 20여년의 통치기간에 수십차례의 군사작전을 조직하거나 직접 지휘하여 승리만을 기록한 불패의 군사통수로서의 명성을 남겼다.

광개토왕은 집권하여 나라의 정치적안정과 경제적발전을 이룩하는것을 첫 정책으로 내세웠다. 이것은 그가 정치와 경제가 군사력강화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깊이 인식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광개토왕릉비문에는 광개토왕때에 《나라가 부유하고 백성들이 은성하게 살았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잘되였다.》고 기록되여있다. 이것은 다소 과장된감이 없지 않지만 이 시기 경제발전이 적극 추진되여 나라의 물질적토대가 현저히 강화되였던 사실을 일정하게 반영하고있다고 할수 있다.

정치적안정과 튼튼한 경제적토대는 나라의 군사력을 더욱 강화할수 있게 하였다.

광개토왕은 강화된 국력에 의거하여 삼국통일과 령토완정을 위한 적극적인 군사활동에 나섰다.

그의 군사활동은 주로 령토개척을 위한 군사작전으로 특징지을수 있다. 하기에 비문에서는 위엄과 군사적공적이 사해를 덮었다고 전하고있는것이다.

광개토왕이 적대세력을 정벌하고 령토를 넓힌것을 보면 북쪽에서는 비려, 후연, 식신, 동부여를 정벌한것이고 남쪽에서는 신라를 속국으로 만들고 백제, 가라(가야), 왜를 친것이다.

광개토왕의 총적인 전략은 《선남후북》 즉 먼저 남방정세를 안정시킨 후 북쪽으로 진공방향을 돌리는것이였다. 당시의 조건에서 이것은 매우 정확하며 또 가능한것이였다.

남방에는 겨레의 나라들인 백제, 신라, 가야가 있었다. 그가운데서 가장 강한 국력으로 고구려의 남진을 막아나선 나라는 백제였다. 더우기 백제는 광개토왕이전시기의 여러 군사작전들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였고 21대 고국원왕(331-371년)은 백제군과의 싸움을 직접 지휘하다가 전사하였다.

따라서 남방에서 백제의 세력을 꺾어놓느냐 못 놓느냐 하는 문제는 국토통일성업을 이룩하는데서 초미의 과제로 나섰다. 게다가 391년에 이르러 백제는 고구려와 맞서기 위하여 손아래동맹자인 북규슈의 왜무력을 끌어들여 무장시키고 그들을 선봉대로 내세울 계략을 꾸미였다. 이것은 고구려에 있어서 간과할수 없는 사태발전이였다. 하기에 광개토왕은 통치 20여년간에 백제를 주요한 공격대상으로 정하고 즉위초부터 거의 해마다 백제를 공격하였다.

광개토왕이 백제의 전투력을 약화시키는데 힘을 넣은것은 또한 배후에 백제와 같은 세력이 강한 적수를 그대로 둬두면 고구려가 북방의 강적들과 대전할 때 백제가 그 틈을 노려 위험을 조성할수 있었기때문이였다.

광개토왕은 자기의 전략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전술적조치들도 강구하였다.

광개토왕이 중시한것은 백제의 동쪽에 있던 신라를 끌어당기는것이였다.

360년대에 백제는 가야, 왜세력을 자기 편으로 끌어당기는것과 함께 신라도 손아래동맹자로 만들었었다. 그러나 신라는 원래 가야, 왜의 소국들가운데서 많은 세력들과는 리해관계의 불일치로 하여 관계가 좋지 못하였다. 게다가 고구려가 료동지방에서 고조선의 옛땅을 되찾고 유주에까지 진출하는 큰 성과를 거두고 370년대중엽이후로는 강한 힘으로 남하하자 백제와의 동맹관계에 대해서는 큰 기대를 걸지 않게 되였다.

신라통치배들은 조성된 새로운 정세속에서 강대한 고구려에 붙는것이 더 유리할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광개토왕은 신라의 동향을 꿰뚫어본데 기초하여 그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인입하는 정책을 세우게 되였다. 그는 백제, 가야, 왜의 련합세력을 견제하는데서 신라가 차지하는 군사지리적위치를 중시하고 392년 봄에 사신을 파견하여 《신민》(속국으로 만들었다는 뜻)으로 삼았다. 그리고 신라를 정치, 군사적으로 각방으로 비호하고 원조해주었다. 400년에는 신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비밀계책》도 대주고 보병과 기병 5만명을 파견하여 백제, 가야, 왜련합세력을 격파하였다.

그때 광개토왕이 대주었다는 《비밀계책》은 영원히 흑막속에 묻혀있지만 당시의 정세와 후의 사실로 보아 그 내용의 하나는 언제 어디로 고구려군이 진출하겠으니 신라군은 대기하고있다가 함께 협격하여 물리치자는것일수 있었다.

광개토왕이 그때 신라에 군사를 파견하는 문제를 비밀에 붙이지 않을수 없은것은 북방정세와도 관련되였다. 그해 2월에 후연통치배들은 고구려가 《거만하다》고 하여 쳐들어와 적지 않은 지역을 점령하였던것이다. 이러한 형편에서도 광개토왕은 남방정세를 안정시키는데서 신라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인식하고 군사를 파견할 결단을 내렸던것이다. 북방정세가 복잡한 형편에서 많은 지원군의 파견은 철저히 비밀에 붙여져야 할것이였다.

이렇게 남방진출을 위한 유리한 조건을 마련한데 기초하여 광개토왕은 백제에 대한 부단한 공격작전을 벌려 392~395년사이에 백제북방의 요충지인 석현성, 관미성 등 10여개 성을 점령하였고 396년에는 수륙 두 방면으로 백제를 쳐서 그 수도에 육박함으로써 백제왕의 항복을 받고 58개 성 700개 촌을 차지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 나날에 뛰여난 지략과 통솔력을 지닌 군사통수로서의 군사적재능이 남김없이 발휘되였다.

광개토왕은 무엇보다도 백제의 전략적요충지를 장악하는데 주력하였다. 392년 10월 광개토왕이 지휘한 백제의 관미성공격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관미성은 백제 서북쪽의 요새로서 사면이 절벽이고 바다로 둘러막혀있었다. 이 성을 차지하느냐 못하느냐 하는데 따라 오늘날의 례성강방면으로의 백제군의 진출을 봉쇄하고 림진강하류지역을 제압하며 장차 한강을 건너설수 있는 요긴한 길목을 틀어쥐느냐 못쥐느냐 하는것이 결정되였다.

때문에 광개토왕은 7개 방향으로 군사를 나누어 20일동안이나 쉼없는 공격을 들이대여 기어이 성을 함락시키고야말았다.

관미성이 고구려의 수중에 장악되자 백제 아신왕(392-405년)은 393년 8월에 외삼촌이며 침착하고 굳세며 큰 지략이 있었다고 하는 진무에게 《관미성은 우리 나라 북쪽변경의 옷깃(관문)과 같은 요충지이다. 이제 그것이 고구려의 소유로 되였으니 이는 내가 뼈아프게 여기고 아깝게 생각하는바이다. 그대는 마땅히 애를 써서 수치를 씻어야 할것이다.》라고 하면서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가서 회복하게 하였다.

광개토왕의 군사적재능은 395년 8월 백제군을 거느리고 온 《명장》 진무와의 대결에서 남김없이 과시되였다.

그때 광개토왕이 거느린 군사는 7,000명밖에 안되였으며 백제군은 수만명이나 되였다.

광개토왕은 패수를 등지고 배수진을 치게 하였다. 이것은 군사들이 마음을 굳게 가지도록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고구려군사들은 광개토왕의 지휘밑에 하나가 열, 백을 당하는 기세로 용감하게 싸웠다. 그리하여 진무가 거느린 백제군은 크게 격파당하고 8,000명의 전사자를 내게 되였다.

배수진이 강한 적을 상대로 하는데서 좋은 전법이기는 하지만 어느 때나 성공을 가져다주는것이 아니라는것은 력사가 증명해주고있다.

광개토왕은 재능있는 군사가의 안목으로 적아의 사기, 훈련정도, 지휘관의 능력 등 준비상태를 꿰뚫어보고 배수진을 치게 하였으므로 승리할수 있었던것이다.

광개토왕은 강력한 수군함대를 건설하고 자기의 전략적목적실현에 능숙하게 써먹을줄 안 군사통수였다.

물론 이전에도 수군은 있었다. 허나 수군의 역할을 중시하고 그것을 여러가지 목적에 능동적으로 리용하였다는데 우리 나라 수군사발전에 기여한 광개토왕의 공적이 있는것이다.

수전병법에 매우 밝은 광개토왕은 항상 수군에 의한 적의 배후공격작전에 커다란 의의를 부여하였다.

396년에 그는 직접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고구려군은 먼저 륙지로 오늘의 림진강을 건너 백제의 여러 성들을 함락시켰으나 백제의 서북변에 총총히 배치된 요새들로 이루어진 성곽방위체계를 돌파한다는것이 쉬운 일은 아니였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수군함대를 출동시켜 오늘의 한강 이북의 백제전연의 후방을 들이치는 동시에 한강이남의 백제성들을 공격하였다. 하여 55~56개 성들을 함락시켰으나 백제는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광개토왕은 직접 수군을 이끌고 아리수(한강)도하작전을 지휘하여 백제의 수도 한성(남한성)으로 육박하여 승리를 달성하였다.

396년 전역에서 고구려가 큰 승리를 이룩하는데서 수군함대는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광개토왕은 404년에는 강력한 수군무력을 파견하여 멀리 2,000리길(료동반도에서 출발한다고 하면)을 돌아가 연군(당시의 연군은 오늘의 산해관 이서의 하북성 동북부)을 들이치고 후연침략자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이것은 그때까지의 전쟁력사에서는 보기 드문 정규수군에 의한 대규모의 해상원정, 해상기동작전이였다.

광개토왕은 동해에서도 여러차례의 해상원정으로 백제, 가야, 왜세력을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해주었다.

광개토왕은 수군무력을 강화하고 여러가지 병법을 활용하여 적함대를 요격하거나 조우전, 추격전을 조직하여 상대방의 수군을 격파하였다.

4세기말부터 5세기초까지의 고구려수군의 전투활동은 력사기록에 처음 나타나는 우리 나라에서의 해상공격작전으로서 력사적의의가 크다. 고구려의 수군은 발해와 서해(북부) 및 동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후연의 침략책동을 저지시키고 백제, 가야와 그의 조종을 받는 왜의 수군이 마음대로 날치지 못하게 함으로써 해상방위무력으로서의 자기의 사명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일단 남방정세를 안정시킨 광개토왕은 북방정벌에로 나아갔다.

395년에 광개토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의 변경을 계속 침범하던 거란의 필혈부(비려부)를 정벌하여 세 부락 600~700명을 격파하고 많은 소, 말, 양을 로획하였으며 남녀 500여명을 포로하고 그전에 랍치되였던 고구려사람 1만여명을 되찾아가지고 돌아오는 군사적전과를 거두었다.

이 싸움에서 광개토왕은 《출기불의》 즉 적이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기습진출하여 격파하는 전법을 썼다. 광개토왕은 이때 군사를 거느리고 에돌아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동쪽으로부터 불의의 기습을 단행하였던것이다.

북방정벌에서 광개토왕이 노린것은 싸움은 적게 하고 전과는 많이 거두는것이였다.

옛 병법에도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적군을 굴복시키나 싸우지 않으며 적의 성을 탈취하나 공격하지 않으며 적국을 멸망시키나 오래 끌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그의 책략은 옳은것이였다고 할수 있다.

광개토왕은 동부여정벌에서 군사작전과 정치공세를 적절히 배합하였다.

동부여는 286년에 모용외의 기습으로 일단 망한 부여(후부여, B. C. 2세기초-346년)의 왕족의 일부가 북옥저로 피난해 가서 세운 나라였다. 그들은 처음 고구려에 사대조공하였으나 점차 국력이 강해지자 모반하여 조공하지 않고 고구려에서 떨어져나가려고 하였다.

광개토왕은 410년에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였는데 동부여의 수도성(여성-위치는 알수 없음)을 향하여 진군하면서 도중에 있는 많은 성들을 함락시켰다. 비문에서는 이때의 상황에 대하여 《부여는 …(온)나라가 놀라서 복속하였다. … 왕의 은혜가 (부여땅에) 널리 퍼지였다. 이에 개선하여 귀환하였다. 또 그 나라에서 왕의 은덕을 사모하여…》라고 전하고있다. 이것은 광개토왕이 동부여를 정벌함에 있어서 군사적조치와 함께 《덕으로 다스리》는 유화책을 같이 썼다는것을 보여준다.

광개토왕은 이렇게 함으로써 적수를 적게 만들어 동부여정벌을 손쉽게 결속한것이다.

이처럼 광개토왕은 삼국통일위업을 추진시키고 고구려의 령역을 두배이상으로 확대하며 령토완정을 이룩함으로써 우리 나라 력사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광개토왕은 비록 봉건국왕이기는 하지만 젊은 가슴에 웅대한 포부를 지닌 유능한 정치가, 군사가로서 그 시호에 맞는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강대한 국가를 건설함으로써 고구려전성기의 시초를 열어놓았다.

길지 않은 한생을 강대한 고구려를 위한 웅대한 포부를 실현하는 군사활동에 바친 광개토왕의 생애를 전해주며 그의 릉비는 오늘도 서있으며 래일도 강국 고구려의 증견자로 거연히 솟아있을것이다.

 

  

 

11)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을 찾아간 을지문덕

  

을지문덕은 31대 영양왕(590-618년)때인 612년에 있은 고구려-수전쟁에서 명성을 떨친 애국명장이다.

을지문덕은 고구려군대와 인민을 이끌어 전쟁력사에 류례가 없는 수백만의 대군으로 쳐들어온 수양제의 침략군을 물리치고 나라와 겨레의 안전을 지켜내는데 이바지하였다.

612년 여름 어느 날 금빛찬란한 갑옷을 떨쳐입고 그리 크지 않은 배우에 몸을 실은 름름한 풍채의 한 로장이 있었다. 그가 바로 수나라의 9군 30여만 대군이 새로운 방면에 나타났다는 통보를 받고 강화담판을 위하여 압록수(오렬수, 오늘의 태자하)를 건너 적진을 찾아가는 을지문덕장군이였다.

저 멀리 남쪽하늘가를 바라다보는 그의 웅심깊은 두눈에 고구려의 장수로 성장해오던 잊지 못할 그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비껴가고있었다.

그의 집안래력은 자세하지 않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그는 오늘의 평안남도 증산군 석다산기슭의 어느 한 농가에서 출생하였다고 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고 검과 창쓰기에도 능하였으며 용력이 뛰여났다.

그의 이름은 벌써 열대여섯살때 전국에 소문났다.

어느 날 염전에서 일을 마치고 저녁무렵 집으로 돌아오던 그는 길 한복판에 송아지만한 짐승이 나타나 어물거리는것을 발견했다. 그 짐승이 하도 성가시게 구는 바람에 몽둥이로 후려치고 번쩍 들어 땅에 내동댕이쳐 죽였는데 후에 알고보니 호랑이였다는것이다. 지금도 석다산에 올라가면 을지문덕장군이 무술을 닦을 때 쓰던 돌집이 있고 그 집안에 돌로 된 책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석다산 맞은편에 솟은 산을 마우산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장군이 타고다니던 말이 나온 산이라고 전해온다.

성질이 침착하고 용맹스러우며 지혜와 재주가 있었고 글을 지을줄 알았다고 하는 을지문덕장군은 락랑벌사냥에서 뛰여난 무술을 보여주어 임금의 눈에 들고 장수가 되였으며 그후 전투마다에서 세운 공적으로 하여 여러번 승급하였다.

나라의 중신이 된 그는 수나라 300만 대군과의 생사를 판가름하는 결전을 책임진 장군으로 전쟁전반을 지휘통솔하고있었다.

을지문덕의 적수인 수양제는 남방의 진주 숙보를 치고 전국을 통일하는 싸움을 《지휘》한 전적을 가지고있는데 대하여 은근히 자부심을 가지고있었다.

음모적방법으로 왕좌를 차지한 수양제는 집권초기부터 《몰래 료동(고구려)을 취할 뜻》을 품고있었다. 수양제는 원흥사를 동래해구에 보내여 배만드는것을 감독하게 하는 등 전쟁준비를 미친듯이 벌리였다. 이때 관리들의 혹독한 채찍아래 부역나온 장정들은 잠시도 쉬지 못하고 주야 물속에서 일하였는데 허리아래에 구데기가 쓸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죽은 자는 10명중에 3, 4명이나 되였다고 한다. 수양제는 또한 나라의 부자들에게 군자금을 내게 하여 그것으로 군마 10만필을 조달하고 전국의 장정들을 출동시켰으며 병장기들을 정선하게 하였다. 그리고 산동, 하남에 큰물이 나 40여개 군을 휩쓸고 전염병이 나돌고 흉년까지 겹쳤으나 수양제는 백성들을 구제할 생각을 하지 않고 전쟁준비에만 내몰았다. 길가에 쓰러져 죽은 사람들이 수다하고 고역을 견딜수 없게 된 사람들은 《료동에 가서 헛된 죽음을 하지 말자》라는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산속에 들어가 농민폭동군이 되였다.

수양제는 《료동을 쳐서는 안되옵니다. 우리 군사는 반드시 공이 없을것이나이다.》라고 하면서 침략전쟁을 반대한 대신 경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612년 1월 24개 군단 113만 3,800명과 그의 두배나 되는 후방부대, 제가 직접 거느린 6개 군단, 수군 10만을 동원하여 고구려에 침략의 마수를 뻗쳤다.

300만의 침략군이 동원된 이 전쟁은 병력수, 군사기자재의 규모에 있어서 일찌기 있어보지 못한 가장 큰 규모의 전쟁이였다. 그것은 실로 고구려인민과 고구려국가의 생사존망을 판가리하는 심각한 싸움이였다.

고구려를 정복하고 고구려인민을 노예화하려던 적들의 기도는 시작부터 실패를 면치 못하였으며 전선은 료동성군민들의 결사항전으로 하여 료동계선에서 고착되게 되였다.

속이 안달아난 수양제는 정면돌파시도를 계속하는 한편 따로 우중문, 우문술을 우두머리로 하는 9군(9개 군단 30만 5,000명)을 편성하여 우회전술을 써서 고구려군의 전방사령부가 있는 《평양성》(환도성, 봉황성)을 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산동반도에서 대기하고있던 수군에게도 9군과 협동작전을 할데 대한 지시를 떨구었다.

고구려의 후방으로 깊이 뚫고들어갈 목적으로 조직했던 부대들인것만큼 사람이나 말은 각각 100일분의 식량, 사료를 가지고가게 되였고 게다가 갑옷, 창, 긴창, 천막, 침구 등을 가지고가야만 하였다. 그리하여 짐의 무게가 한사람당 알곡으로 환산해서 3석이상이나 되였으므로 도저히 등짐으로 운반할수 없었다. 6월말 7월초경에 회원진, 로하진에서 떠난 적 9군은 무거운 짐을 감당해낼수가 없어 군수품이나 식량을 버리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령에도 불구하고 숙영지마다에서 천막아래에 구뎅이를 파고 쌀과 물건들을 매몰해치웠다. 며칠이 못 가서 적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였고 압록수에 가닿기도 전에 량식이 떨어지고말았다.

바로 이러한 때 을지문덕은 적진으로 들어가게 되였던것이다.

그가 적진에 들어가겠다고 할 때 왕은 물론 대신들모두가 깜짝 놀랐다. 도대체 정신이 있는 소린가, 한나라의 운명을 두어깨에 걸머지고있는 장수가 그런 모험을 하다니,  더구나 적들은 을지문덕을 잡으려고 발악하고있지 않는가, 그런데 승냥이아구리에 스스로 뛰여든단 말인가.

임금과 신하들모두가 반대하였다.

을지문덕은 차근차근 그들을 설복하였다.

적을 알고 자기를 아는것은 병가에서 제일로 친다. 더우기 우리의 적은 대병이며 장수들은 용장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아닌가.

지금 수임금이 따로 군을 편성하여 우리 후방깊이 들여보냈으니 잘 준비된 적일수 있다. 9군의 준비정도와 사기의 높고낮음을 알아야 그에 맞게 대처할것이 아닌가.

을지문덕은 《강화담판》의 명분으로 가면 적들이 체면상 어쩌지 못할것이라고 하였다.

영양왕은 근심을 가시지 못하며 억지로 승낙하였다.

하여 을지문덕은 적진을 찾아가는 모험을 하게 되였던것이다. 고구려사람들모두가 그때 그의 운명을 두고 가슴 조이고있었다.

적진을 향해 가는 을지문덕만은 안색이 변함없고 거동이 태연하였다.

적지휘부로 가는 도중에 을지문덕은 적정을 손금보듯 알아낼수 있었다.

적들은 분명 굶주리고 지쳐있었다.

을지문덕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기의 운명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한 기색으로 적들의 지휘부에 나타난 을지문덕을 본 적장들은 아연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을지문덕의 명성은 이미 내외에 널리 알려져있었다.

하기에 수양제는 이미 우중문과 우문술에게 《만약 고원(영양왕의 이름)이나 문덕이 오면 반드시 사로잡으라.》고 《밀지》(비밀지시)를 내렸던것이다.

적장들은 을지문덕의 처리문제를 놓고 의견상이가 생겼다. 수양제의 밀지를 함께 받은 우중문과 우문술은 을지문덕을 잡자고 하였다. 하지만 임금의 특별임무를 받고 파견되여왔던 위무사 류사룡은 반대하였다. 그때 그가 어째서 이런 립장을 취하였는지 그에 대해서 전해지는것은 없다. 아마도 류사룡은 을지문덕의 위풍당당한 자세와 태연자약한 태도에 어지간히 위압되였던것 같다. 그리고 강화담판을 위해 온 사신을 잡는다는것은 대국의 체면에 어울리지 않으며 명분이 서지 않는다는 리유로 우중문과 우문술을 굳이 말렸을것이다.

우중문은 그의 말대로 놓아보내였으나 다시 후회하면서 사람을 보내여 배를 타고 돌아가는 을지문덕에게 《더 할 말이 있으니 다시 오라.》고 속이여 데려오게 하였다.

하지만 을지문덕은 적들의 속내를 빤히 들여다보고있었던지라 쓴 웃음을 지으며 유유히 강을 건너왔다.

참으로 어지간한 담력과 용맹이 아니고서는 생각도 할수 없는 을지문덕의 이러한 모험은 자기의 행동에 대한 자신심과 확신에서부터 단행된것이였다. 그러한 확신은 적장들의 성격와 심리상태, 그들사이의 모순관계를 꿰뚫어보고있었던데서 나온것이다.

당시 적군의 우두머리 우중문은 계교를 잘 쓰고 우문술 역시 지묘가 풍족하다고 하였다.  수양제가 애비를 죽이고 임금의 자리에까지 기여올라간데도 우문술의 《공적》이 크게 깃들어있었다. 그러니 우중문과 우문술은 서로 자기의 《재능》에 대해 자부하면서 서로를 시기하였고 임금의 총애가 두텁다는것을 등대고 서로 자기가 주도적역할을 해보려고 하였다. 류사룡은 그대로 임금이 특별히 파견한 《위무사》로서의 권위를 세워보려고 하였다. 그리고 많은 적장들이 임금이 우중문으로 하여금 여러 군을 지휘하게 한데 대해 《할수없이》 따르는 형편이였고 후에는 모두 죄를 중문에게 밀려고 하였던것이다.

하기에 우중문은 군량이 다 떨어졌으므로 돌아가자고 하는 우문술에게 《중문의 이번 행보가 굳이 공이 없을것이다.》고 하면서 그것은 옛적에 성공한 장수는 군중의 일을 혼자서 모두 결재하였는데 《지금은 사람마다 자기 생각이 있으니 어찌 적을 이길수 있겠는가.》고 울분을 터뜨렸던것이다.

을지문덕은 군사가의 예리한 안목으로 적정을 손금보듯 파악할수 있었다.

적들은 지쳐 있고 적장들은 예견했던대로 서로 질투한다.…

을지문덕은 청야수성전술과 유인전으로 적들을 더 깊숙이 끌어들이고 피로케 하여 소멸할 전술을 세웠다.

더 깊숙이 끌어들이고 더욱 지치게 하여 전투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하는것만이 아군의 손실을 줄이고 최대한 성과를 달성할수 있는 길이였다.

적들을 피로케 한다고 하여 무작정 뒤로 물러서는것은 상책이 아니였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자면 유인전을 해야 하였다.

을지문덕의 지시에 따라 고구려군사들은 압록수를 건너 공격해오는 적들과 한편으로는 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뒤로 물러났다. 적들은 하루에 7번을 싸워 다 이기게 되였다. 기세가 오른 적들은 어떤 천벌이 기다리는지도 모르고 주린 창자를 부여잡고 창을 질질 끌면서도 계속 기여들었다.

지모가 풍부하다고 하는 우문술자체도 고구려군의 련속되는 《패배》와 수나라군의 승리에 과신하게 되고 또 계속 전진할것을 주장하는 여러 장수들의 주장에 못 이겨 리성을 잃고 군사를 내몰아 깊숙이 파놓은 함정에로 한걸음 또 한걸음 접어들었다.

적들은 살수를 건너 평양성(북평양-환도성)앞 30리 밖에 이르러 산을 등지고 진을 쳤다.

유인전과 청야전술에 지칠대로 지친 적들에게 이제 더 험고한 평양성을 공격할 힘이 없었다. 적장들사이에 의견상이도 커졌다.

여러 장수들과 이전부터 퇴각을 주장하던 우문술은 총 지휘를 맡고있는 우중문이 10만의 군사를 끌고왔다가 성과없이 물러가면 어떻게 임금을 뵈옵겠는가고 하면서 꾹 눌러놓는 바람에 더 말을 못했지만 이제 와서는 더 참을수 없었다. 그는 9군장병들이 이미 지칠대로 지쳐 겨우 몸을 가누고 싸울 능력이 없는데다가 또 평양성이 험고하기때문에 함락시키는것은 힘에 부친 일이라고 하면서 퇴각을 주장하였다. 우중문자신도 할말이 없었다.

이때 고구려진영에서 을지문덕이 지은 시 한수가 전해졌다.

 

  신기한 술책은 천문을 꿰뚫었고

  기묘한 타산은 지리를 통했도다

  싸움에 이겨 공도 이미 높거니

  만족을 알고 그만둠이 어떠하리

 

마디마디 풍자와 조소로 일관된 을지문덕의 이 유명한 시는 그대로 창검이 되고 비수가 되여 적들의 페부에 파고들었다.

유명한 시 한수에 한껏 조롱을 당한 우중문과 적장들은 한편으로 을지문덕의 재능에 내심 탄복하여마지 않으며 패배를 인정하였다. 아마 그때 제발로 찾아왔던 을지문덕을 잡지 못한것을 두고 후회의 고배를 삼켰는지도 모른다.

적들은 7월 22일, 23일경부터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바야흐로 때가 왔다고 인정한 을지문덕은 고구려군에 추격명령을 내리고 여러곳에 매복진을 폈다. 적들은 고구려군이 사방에서 치자 방진을 짓고 저항해보려고 하였다. 적들은 간신히 살수(소자하)까지 도착하였다. 장마철이라 물이 상당히 불었다.

적들은 을지문덕이 바로 이 자연의 《함정》에서 적을 섬멸할 계책을 세우고 량쪽기슭에 수많은 고구려군사들을 매복시켜놓고있을줄은 꿈에도 몰랐다.

7월 24일 적 9군이 강을 건느기 시작하여 절반쯤 갔을 때 고구려군은 일제히 공격전을 벌리였다. 력사에 《살수대첩》(살수대승리)으로 기록된 이 전투에서 적들은 우둔위장군 신세움을 비롯하여 수십만의 장졸을 잃었다. 겨우 살아남아 도망치던 적들도 백석산에서 대기하고있던 고구려군의 100여겹이나 되는 포위진에 들어 섬멸적타격을 받았다. 추격전과 배합된 매복전, 포위섬멸전으로 하여 적군가운데 《압록수》(태자하)까지 돌아갈수 있었던 자는 말의 도움을 받은 기병 겨우 2,000여명뿐이였다. 수양제는 너무도 성이 나서 길길이 날뛰다가 우중문, 우문술 등 패전한 장수 100여명을 모조리 처벌하였다. 우중문은 여러 장수들이 모든 죄를 자기에게 들씌우자 고민하다가 병이 나 죽었다.

결국 이 싸움은 적우두머리들까지 포함하여 적 9군 30여만명을 섬멸한 빛나는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되였다.

이것은 동서고금의 중세력사에서 보기 드문 승리였다. 한개 전역에서 현대전도 아닌 중세기의 전쟁에서 그리고 장기적인 포위작전도 아니고 단 하루사이에 30여만이라는 많은 무력을 살상하였다는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다.

이것은 고구려군사들의 애국심과 용맹을 보여주는것과 함께 명장 을지문덕의 대담성과 용감성, 전략전술의 기묘성과 출중한 지휘통솔력에 대해 웅변적으로 말해주고있다.

이미 수나라군이 출병할 때 좌후위대장군으로 임명받고 남소도로 나오게 되여있던 수군장수 병부상서 단문진은 병을 만나 죽기 며칠전에 수양제에게 글을 올려 이렇게 경계했던적이 있다. 그는 고구려사람들이 《속임수가 많으니 깊이 생각하여 막아야 할것》이라고 하면서 수륙협동작전에 의하여 불의의 곳으로 나아가 평양을 엄습함으로써 왕을 항복시키는 속전속결만이 살길이라는것을 제의하였던것이다. 때늦게나마 깨달은 수양제가 9군을 편성하여 속전속결을 시도해보았지만 그 꿈도 물거품이 되고말았다.

을지문덕의 전법은 일찍부터 강대한 적을 상대로 싸워야 하였던 고구려인민들의 력사적투쟁경험을 총화한것이라고 할수 있다. 일찌기 을두지, 명림답부가 적용하고 발전시켰던 우수한 전법을 을지문덕은 더욱 높은 경지에서 활용하고 세계적인 모범을 마련한것이다.

하기에 《삼국사》의 저자 김부식은 《수양제의 료동전쟁은 군사를 출동시킨 규모에 있어서 전고에 없이 굉장하였지만 고구려는 한모퉁이에 있는 작은 나라로서 그를 막아 자기의 국토를 보전하였을뿐아니라 그 군을 거의다 없애버린것은 문덕 한사람의 힘이다.》라고 평하였다. 물론 과장된감이 없지 않지만 그만큼 전쟁에서 주도적역할을 한 을지문덕의 군사적재능과 우수한 전략전술에 대한 경탄으로부터 나온 말이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대담성과 용감성, 민첩성, 뛰여난 전략과 전술로 고구려군을 승리에로 이끌어 거대한 공적을 쌓은 을지문덕의 공적은 그가 적장 우중문에게 보낸 유명한 시와 더불어 후세에 길이 전해지고있다.

 

 

 

12) 이름난 애국명장 연개소문 

 

우리 나라 중세력사에는 명장으로 이름떨친 군주나 장수들이 적지 않다. 그가운데는 고구려말기 강대한 적과의 싸움에서 이름떨친 연개소문도 있다.

연개소문은 평화유지를 구실로 사대굴종적인 립장을 취하던 투항분자들을 제거하고 외적의 거듭되는 외교적 및 군사적위협과 무력침공을 단호히 물리치고 나라와 겨레의 안전을 수호하는데 기여하였다.

연개소문(?-666년)은 고구려의 서부 즉 연나부 귀족가문의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연태조, 할아버지는 자유, 증조할아버지는 광이라고 하며 그들은 대대로 고구려의 최고벼슬인 막리지를 하였다고 한다.

굽실굽실하고 윤기도는 멋진 수염을 드리운 뛰여난 용모의 사나이 연개소문은 름름하고 의젓한 풍채와 억센 기상의 소유자였으며 담력과 배짱이 있고 용맹하였으며 지략이 풍부하고 무예에 능하였다.

연개소문은 사람들을 놀래우는 비상한 총명과 무비의 용감성으로 하여 15살에 벌써 32대 영류왕(618-642년)의 측근신하가 되였다고 한다.

애국명장 연개소문은 나라의 자주권을 지키고 민족의 존엄을 고수하기 위해 지혜와 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하였고 맹렬한 군사활동을 벌리였다.

  

 

1. 맹수는 물어메치기 전에 허리를 낮추는 법 

 

연개소문은 좀처럼 남에게 굽어들기 싫어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러한 성격상 특성으로 하여 그는 영류왕과 그에 아부하는 대신들의 소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영류왕은 서쪽의 당나라(618-907년)가 수나라 말기 동란의 소용돌이속에서 강자로 군림하여 여러 할거세력들을 격파하고 전 중국땅을 통일하면서 점차 강대해지자 겁을 먹기 시작하였다.

그는 평화유지를 구실로 어떻게 해서라도 당나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보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당나라통치배들이 평화의 막뒤에서 고구려를 속국으로 만들 흉계를 꾸미고있다는것을 알지 못하였다.

626년에 자기 형인 태자 건성을 죽이고 애비를 밀어낸 당태종 리세민이 왕좌에 오르자 영류왕은 더욱 굴종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리세민이 당나라를 세우고 나라를 통일하기 위한 전역들에서 명장으로 이름떨치였음을 그도 알고있었던것이다.

당태종은 국내외정세가 안정되기 시작하자 동방에 대한 정책을 바꾸어 로골적인 간섭행위를 일삼았다. 그는 고구려, 백제, 신라사이의 모순과 대립, 충돌을 리용하여 외교적방법으로 내정간섭을 함으로써 어부지리를 얻으려고 하였다.

영류왕은 고구려가 남방을 공격하지 않게 해달라는 신라와 백제의 요청을 기회로 하여 외교적압력을 가해오는 당나라에 굴복하였다.

그리고 국가기밀에 속하는 지형을 그린 《봉역도》를 당나라에 보내주었으며 631년에는 전승기념물인 경관을 허물어버리라는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고구려인민들의 애국적기세에 찬물을 끼얹었다.

자료에 의하면 연개소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영류왕에게 당나라에 대하여 강경자세를 취할것을 제기하였다고 한다.

그는 나라와 겨레의 존엄을 훼손시킨 영류왕의 나약한 행위에 대하여 묵과할수 없었던것이다.

하지만 이런것으로 하여 연개소문은 영류왕과 그 측근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였다. 그들은 연개소문의 아버지 연태조가 죽자 응당 연개소문이 서부대인의 뒤를 이어야 하였으나 승낙하지 않았다.

나라를 파멸의 길로 이끌어가는 국왕과 그 일파를 무장정변으로 제거하려던 연개소문에게 있어서 이것은 예상밖의 일이였다. 이것은 그들이 연개소문을 의심하고있으며 그에게서 서부의 통솔권을 빼앗아 제거하려 한다는것을 보여주는것이였다.

연개소문의 지지자들은 모두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결심을 기다렸다.

그들은 절대로 남에게 머리숙일줄 모르는 연개소문에게 있어서 출로는 당장 정변을 일으키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  했다.

하지만 연개소문의 결심은 이와는 달랐다.

그들은 모두 《맹금이 덮치려 할 때는 깃을 접고 몸을 낮추며 맹수가 물어메치려 할 때는 허리를 낮추고 기여간다.》는 옛 사람들의 말을 되새겨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필요하다면 머리숙일줄도 알아야 한다는것이 연개소문의 립장이였다.

자기의 궁극적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작은것을 희생할줄도 아는것이 군사가의 떳떳한 도리이다.

연개소문은 국왕과 그 일파에게 자기의 행동이 잘못되였음을 빌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가 뢰물바리들을 싣고 대신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용서를 빌었다고도 한다.

그의 묘한 술책이 은을 내여선지 국왕은 그를 서부대인으로 임명하고 천리장성축조공사를 총 감독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후 연개소문이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안될 사건이 터졌다. 야사에는 고구려의 한해라장(해상순찰장교)이 당나라 간첩의 사명을 띠고 기여들었던 삼불제 《사신》의 이마에 연개소문의 이름으로 당태종을 모욕하는 글을 써보낸것이 발단으로 되였다고 한다.

당나라측의 항의에 전전긍긍하던 영류왕은 연개소문을 제거할 음모를 꾸몄는데 연개소문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선손을 썼다는것이다.

연개소문은 서부의 군사를 전부 모아 마치 검열하려는척 하면서 성 남쪽에 술과 음식을 차려놓고 모든 대인을 불러 함께 구경하자고 하고 그들이 오자 모조리 죽여버렸다.

이때 영류왕도 죽였다. 그리고 영류왕의 조카 보장을 왕으로 앉히고 자신은 막리지가 되여 국정을 장악하였다.

결국 연개소문이 머리를 조아리며 여러사람들에게 사죄하여 대인의 위를 잇고 서부의 군사를 확고히 장악한것은 은을 내였다. 이것은 연개소문의 《선발제인》 즉 먼저 선손을 써서 적을 제압하는 책략 등 여러가지 군사적재능도 보여주었다.

무릇 군사가는 기회를 기다릴줄도 알아야 하며 리용할줄도 알아야 한다. 이에 있어서 수단과 방법은 결코 문제로 되지 않는다.

  

2. 대결전의 준비 

 

연개소문의 무장정변은 고구려인민들의 지향에 맞게 나라의 자주권과 민족의 존엄을 지키는 중요한 정책전환의 계기로 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며 진보적인 정변이다.

연개소문의 무장정변후 고구려에서는 그 어떤 정치적혼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고구려인민과 군대의 절대다수는 자기 나라를 크게 내세우고 천년강대국으로서의 위용을 떨치게 하려는 연개소문을 적극 지지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 고구려를 침공할 생각을 하루도 하지 않은 날이 없었던 당태종(599-649년)만은 이것을 달가와하지 않았다.

당태종은 고구려를 저들의 《속국》으로 만들고 고구려인민을 노예화하며 금은재보를 략탈하려는 《꿈》을 가슴속깊이 묻어두고있었으며 수나라 수백만대군의 거듭되는 침입을 물리치고 사기등등하여 당나라도 발아래로 굽어보는 고구려를 기어이 복수하려고 벼르고있었다. 아마도 그때 그에게는 애국명장으로 내외에 널리 알려진 연개소문과 결판을 내여 《명장》으로서의 재능을 떨쳐보려는 검은 속심이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있었는지도 모른다.

당태종은 연개소문이 자기 임금을 죽이고 나라정사를 독판치고있다는 당치않은 구실을 걸고 고구려의 내정에 로골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당태종은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는 한편 외교적인 방법으로 고구려에 압력을 가해왔다.

연개소문은 곧 당나라의 침략에 대처하기 위한 정치, 군사적인 실무조치들을 강구하였다.

연개소문은 무엇보다도 서부국경지대를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의 이러한 전략은 《명장》이라고 일컫던 당태종의 전법에 대한 깊은 연구에 기초하여 세워진것이였다.

당태종은 수양제가 패전한 원인이 군량수송을 제대로 따라세우지 못하고 전방의 성들을 버리고 깊이 들어간데 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군량확보에 큰 관심을 돌리고 군량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소와 말, 양을 많이 모아들이게 하였으며 공성기재들을 직접 선택하면서 고구려전방의 성들을 모두 격파하고 마음놓고 전진할 계획을 세웠다.

서부국경지대의 강화는 연개소문의 궁극적인 전략적목적달성과 중요하게 관련되여있었다.

적들을 서북방 방어계선에 붙잡아두고 시간을 끌다가 일정한 시기 즉 군량이 떨어지고 적들의 사기가 저락되며 날이 추워지기 시작할 때를 기다려 적의 배후에 진격하여 보급로와 퇴각로를 차단하고 앞뒤에서 량면공격으로 적을 섬멸하는것, 바로 이것이 연개소문의 총적인 전략적목표였다.

연개소문은 서북방어계선을 강화하기 위하여 성, 진들의 성벽을 수축하고 해자를 깊이 파며 군수물자를 확보하게 하였다.

또한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였다. 명장인 양만춘을 안시성주로 그대로 임명한 사실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연개소문은 서북방 방어성들을 강화하면서 수도로 오는 길에 배치된 전략적방어거점들도 강화하며 수도성을 신축하는 사업도 전개하였다.

연개소문은 다음으로 당나라와의 대결전때 후방의 근심을 덜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다.

고구려후방의 근심이라고 하면 남방에서 백제와 신라에 의한 위협이였고 북방에서 흑수말갈의 준동이였다.

연개소문이 주되는 관심을 돌린것은 남방정세였다. 두개 전선을 펴는것은 고구려에 불리하였다.

남방정세를 안정시켜 후방의 근심을 덜자면 백제와 신라를 다 끌어당겨 세 나라의 화목을 도모하는것이였으나 당시 그것은 실현불가능한 일이였다. 백제가 신라서변의 중진인 대야주를 점령한것으로 하여 두 나라는 앙숙관계에 있었다.

이런 형편에서 연개소문은 백제를 끌어당기기로 하였다. 그것은 신라는 동해에 면해있고 백제는 서해에 면해있는 지형학적조건과 중요하게 관련되여있었다. 만일 백제가 당나라와 련합하면 당나라군이 병선으로 군사를 날라 백제로 들어와 백제의 쌀을 먹으며 남으로부터 고구려를 칠것이므로 이것은 고구려에 큰 위험으로 될수 있었다. 백제와 련합하는것은 당나라가 바다를 건너와 남방으로부터 고구려를 공격하는것을 방지하는데 유리하였다.

더우기 백제의 군사력이 강하고 군사인재들이 많은 조건에서 그와 손을 잡는것이 유리하였다.

연개소문은 백제와 련합하고 그로 하여금 신라를 견제하도록 함으로써 남방의 근심을 덜수 있게 되였다. 한편으로는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남방으로 진출하여 신라의 국력을 약화시켰다.

연개소문은 북방의 여러 종족들을 제압하여 그들이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지배밑에서 벗어나 당나라와 관계를 가졌던 북흑수말갈을 다시 세력권안에 넣었다. 후에 북흑수말갈은 고구려에 지원병까지 보내왔다.

연개소문은 또한 먼곳과 사귀고 가까운 곳을 치는 《원교근공》의 책략으로 당나라의 배후를 위협하기 위한 조치도 취하였다.

그 실현을 위하여 연개소문은 당나라의 북방에 있던 설연타(돌궐의 갈래)에 두차례나(한번은 고구려사신 또 한번은 말갈인들을 보내였다.) 사신을 보내여 유사시에 함께 당나라를 공격하자고 약속하였다. 연개소문이 보낸 후한 뢰물에 마음이 동하여 진주극한은 앞에서는 약속을 해놓고도 당나라의 눈치를 보며 선뜻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였다. 어쨌든 당나라로서도 설연타의 공격에 주의를 돌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고구려에 있어서는 꼭 그들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되였으므로 이것만으로도 만족하였다. 설연타의 당나라공격은 고구려의 승리가 거의 확정적인것으로 되여갈 때 진주극한의 뒤를 이은 다미극한에 의하여 실현되였다. 허나 그들은 당나라《토벌》군에 의해 곧 진압되고 성과없이 물러갔다.

연개소문은 이밖에도 대결전을 준비하는데서 국내의 단합을 이룩하고 도교를 부흥시켜 불교, 유교에 의거하여 자기 세력을 부식하던 낡은 세력들을 약화시키는 등의 조치들을 취하였다.

《명장》이라고 자처하던 당태종의 침략기도에 대처하여 세워진 이러한 정치, 군사적조치들은 매우 타당한것들이였다.

후에 당나라와의 전쟁과정은 연개소문의 조치들이 매우 옳았다는것을 보여준다. 연개소문은 확실히 전략적안목이 있는 군사가였다.

  

3. 강경대응 

 

배짱이란 자기 힘에 대한 믿음에서 생겨난다. 힘이 따라서지 못할 때 배짱은 그저 떼질에 불과하다.

연개소문은 자신의 힘을 믿었다. 하기에 그의 배짱은 언제나 강경대응으로 발현되였고 강경대응은 언제나 적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준비가 있으면 무서울것이 없다.

643년 9월 신라의 사신은 당나라에 가서 고구려, 백제가 련합하여 자기들을 공격하니 구원해달라고 청하였다. 이것은 신라통치배들이 민족내부문제해결에 외세를 끌어들이는 배족행위를 계속 감행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당나라통치배들은 신라의 《요청》을 좋은 기회로 여기고 먼저 외교적방법으로 간섭하고 그래도 안되면 군사적침략을 개시하는 구실을 마련하려고 책동하였다.

644년초에 고구려에 온 당나라 사신 사농승 상리현장은 신라를 치지 말라고 은연중 압력을 가하였다. 연개소문은 즉시 남방전선에서 돌아와 지난날 수나라의 침입때 신라가 그 틈을 타서 몰래 빼앗은 고구려의 땅 500리를 돌려주기 전에는 공격을 중지할수 없다고 면박을 주어 돌려보내였다.

연개소문은 당나라의 침략기도를 분쇄하며 그 준비상태와 대응정형 등을 타진하기 위해 일부 병력으로 644년 여름에 당나라의 유주와 영주지역을 주동적으로 공격하게 하였다.

침략전쟁준비에 여념이 없던 당태종은 그 소식을 듣고 영주도독 장검으로 하여금 영주, 유주의 병력과 거란, 해, 말갈족 경기병들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범하게 하였다. 사실 당태종 역시 침략에 앞서 고구려의 준비상태를 타진해보려는 의도에서 그 작전을 벌렸던것이다. 그러나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친 장검이 장마를 구실로 료수 서쪽계선에서 앉아뭉개는 바람에 그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말았다.

침략전쟁준비가 거의 끝나자 고구려의 대응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당태종은 우둔위 병조참군 장엄이란 자를 또다시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그때 당태종이 고구려를 치기에 앞서 그 형세를 알아보려고 사신으로 갈만 한 관리를 탐문하였는데 배짱있는 연개소문이 무서워 모두 가기를 꺼렸다고 한다. 겨우 한사람이 나섰는데 그가 바로 혹시 높은 벼슬이 차례지지 않겠는가 하여 마음을 다잡고 나선 장엄이였던것이다.

장엄은 건방지게도 연개소문에게 당나라가 인차 공격하려고 하니 사죄하라고 협박하였다.

연개소문은 주제넘게 훈시하려 드는 장엄을 호되게 꾸짖고 고구려의 강경한 자세를 보여주기 위해 그를 토굴에 가두어버렸다. 장엄은 6년만에야 제 나라로 돌아갔다고 한다.

연개소문은 이렇게 배심있게 적들의 위협공갈에 맞서 나라의 존엄을 지켜냈다.

하기에 당태종이 직접 고구려를 치겠다고 하였을 때 저수량, 장량(후에는 적극적인 지지자로 둔갑하여 수군대총관까지 된다.), 리정 등 많은 대신들과 무관들이 고구려침략은 반대하였다고 한다. 게다가 수나라때 수양제를 따라 고구려침략에 동원되였던 관료들도 고구려사람들은 성을 잘 지키기때문에 항복시킬수 없다고 하면서 전쟁을 반대하였다. 임금의 명령으로 수도를 지키기 위해 남았던 리대량이라는 대신은 병으로 죽으면서까지 고구려와의 전쟁을 중지할것을 간청하였다. 맹장이라고 하는 을지경덕은 임금만이라도 가지 말아달라고 거듭 제의하였다. 리정은 병을 구실로 종군하기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가 한때 자기보다 30살정도 아래인 연개소문을 스승으로 모시고 병법을 배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적의 《명장》들도 전률케 한 연개소문은 역시 배짱있는 장군, 자기 힘에 대한 믿음이 있는 장군이였다.

 

4. 최후의 승리 

 

싸움에서는 이길수도 있고 질수도 있다. 이것은 군사에서 흔히 있을수 있는 일이다.

중요한것은 전쟁의 종국적인 전략적승리를 이룩하는것이다.

연개소문의 총적인 전략은 적들을 고구려 서북변방어계선에 붙잡아두고 완강한 항전으로 적의 전투력을 소모약화시키면서 추위가 닥쳐올 때를 기다려 바다건너 적의 배후를 기습하여 보급로를 끊어놓고 퇴로를 차단하여 적들을 독안에 든 쥐신세로 만들어놓는것이였다.

645년초 당나라의 100만대군이 드디여 고구려에 대한 침략을 개시하였다. 적들 역시 만만치 않았다.

당태종은 물론 륙군무력을 총 지휘하는 리적(원래 이름은 서세적)은 수나라말기 농민군두령으로 이름떨친 자이고 장손무기는 모략에 능한 자였다고 한다. 륙군무력의 부대장격인 강하왕 리도종(당태종과 6촌간)은 맹장으로 리적, 설만철과 함께 당태종때의 《3대명장》으로 불리우던 자이다.

명장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을 다 끌고온 당태종의 《정예》 100만대군과의 싸움은 시작부터 치렬하였다.

고구려군민들은 영용하게 싸웠으나 엄청난 력량상 차이로 하여 일부 성들이 적들의 손에 넘어갔다.

연개소문은 추호도 흔들리지 않고 배심 든든하여 전쟁전반을 지휘하였다.

어떻게 하나 적들을 료동계선에 붙들어두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들사이의 긴밀한 협동작전을 벌려 잘 째인 고구려성방위체계의 위력을 발휘해야 하며 제때에 지원을 조직하여 력량상 균형을 어느 정도 보장해주어야 한다.

이기는것은 물론 최대의 목적이지만 지는 경우에는 완강한 저항으로 적의 력량을 소모약화시키고 시간을 끌어야 한다.

연개소문은 이러한 전술적대책을 작성하고 긴밀한 협력, 힘있는 지원을 조직해주었다.

개오성이 당나라 전군의 공격을 받을 때에는 가시성의 군사들이, 료동성이 공격목표로 정해졌을 때에는 국내성과 신성의 군사들이, 백암성이 공격당할 때에는 오골성의 군사들이 도와주게 하였다. 특히 적들이 안시성을 공격할 때에는 15만명의 지원군을 보내주었다. 당나라군은 안시성을 공격하기 전에 벌써 이 15만 지원군과의 싸움에서 졸경을 치르었다.

건안성과 안시성에서의 거듭되는 패배로 하여 곤경에 처한 당나라군내부에서는 의견충돌까지 생겼다. 안시성을 먼저 공격해야 한다고 하던 리적을 포함하여 많은 장수들은 안시성을 포기하고 오골을 먼저 쳐야 한다고 하였고 장손무기만은 안시성을 계속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리도종 같은 자는 싸움을 피하여 곧바로 평양을 치자고도 하였다. 하지만 도종의 의견은 즉석에서 기각되였다. 당나라군은 더욱 강화된 고구려의 위력한 성방위체계앞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던것이다.

그 꼴이 하도 민망스러웠던지 옛 중국의 사가들조차도 《당태종이 천하를 평정함에 있어서 기이한 승리의 책략들을 많이 내놓았으나 오직 료동성싸움에서만은 만전의 계책으로 적을 제어하고저 한 까닭에 공이 없었다.》고 비평하였다.

당나라군은 장수도 군졸들도 모두 지쳤다.

바로 이 기회를 노리고있던 연개소문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적 수군무력을 격파한 후 바다건너 당나라지경에 진입하였다.

고구려군은 당나라침략군의 보급로와 퇴로를 차단하고 당나라의 북부지역을 종횡무진하였다.

바빠맞은 당나라의 태자가 애비인 태종에게 련락을 보냈으나 그는 그때 애꾸가 되여 인사불성이였다. 직접 성아래까지 나가 군사들을 《고무》하다가 양만춘장군이 쏜 화살에 맞았던것이다.

당태종은 총 퇴각을 명령하였다. 때는 벌써 음력 9월 18일이라 료동반도에서는 풀들이 다 말라버리고 물이 얼어 붙었다. 량식이 떨어진데다가 보급로마저 차단되였다.

양만춘장군은 성문을 열고 퇴각하는 적들에 대한 추격전을 벌렸다.

이렇게 고구려군은 초기에 일부 성들을 적들에게 잃었으나 완강한 저항으로 궁극적인 전략적목표를 달성하고 반공격에로 넘어가게 되였다.

전쟁은 신념으로 한다. 전쟁의 운명을 걸머진 장수는 일시적인 패배앞에서 의기소침해지거나 동요하지 말아야 하며 전쟁의 최후승리를 위해 한번 먹은 마음을 변치 말고 완강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 물론 그것은 자기가 옳음을 확신할 때이다.

연개소문이 적들과의 싸움에서 전략적승리를 이룩하는데서는 안시성군인들의 역할이 컸다. 특히 성주 양만춘은 근 90일간의 항전을 승리적으로 결속짓게 함으로써 명장으로서의 영예를 고수하고 력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그를 안시성주로 그대로 임명한 연개소문은 역시 군사가로서의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할수 있을것이다

 

5. 영원한 승리의 자취 

 

645년 고구려-당전쟁은 사실상 당시 내외에 널리 알려져있던 두 명장의 대결이기도 하였다.

당태종은 당나라를 세우고 강화발전시키는데 기여한 《명군주》로 수나라말기의 동란속에서 봉기하여 여러 지역에 할거하던 두령들을 모두 타승한 《명장》으로 후세에까지도 그 이름이 알려져있다. 그리고 중국군사리론발전에 기여한 군사가로 많이 이야기되고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연개소문의 적수가 못되였다.

당태종은 상대를 잘못 보았다. 강한 룡도 자기 땅에서 나서자란 뱀을 이겨내기 어렵다고 하거늘 그는 자기 조국을 지켜나선 고구려인민의 열렬한 애국심과 고구려군민을 승리에로 이끈 연개소문의 정치, 군사적재능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결국 상대에 대한 잘못된 판단이 제노라고 하는 로장, 맹장들을 다 거느리고 나선 당태종에게 패배의 쓴맛을 보게 하였다.

퇴각하던 당태종은 진퇴량난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앞에서는 연개소문이 퇴로를 차단하고 위협하고 뒤에서는 고구려의 추격병이 뒤를 바싹 물고 숨통을 조였다.

군량보급로가 차단되여 장졸들은 주린배를 부여잡고 자기들을 이 전쟁판에 내몬 임금을 원망하고 자기들을 낳아준 부모를 원망하였다. 료하류역의 진펄에 딩구는 수나라장졸들의 해골을 보며 자기를 보는것만 같아 눈물지었다. 더욱 참기 어려운것은 엄습해오는 추위였다.

이때 당태종이 당한 봉변에 대하여 당나라의 사가들은 극력 언급을 피하였다. 단편적인 사실기록들이 이것을 확증해주고있다.

한번은 당태종이 탄 말이 진펄에 빠져 꼼짝 못하고있었다. 고구려의 추격병이 그를 거의 사로잡게 되였을 때 설인귀가 말을 몰고와서 구원하여 달아났으며 전군선봉 류홍기가 뒤를 막음으로써 겨우 살아났다고 한다. 이로부터 《당태종함마처》(당태종이 탄 말이 빠졌던 곳)라는 유적지도 생겨났다. 지금도 그곳 사람들은 당태종의 말이 진펄에 빠지고 화살에 눈을 잃고(당태종의 눈이 이때 애꾸가 되였다고도 한다.) 목숨만 살려주면 연개소문에게 나라를 절반 갈라주겠다고 하였다는 이야기를 전해오고있다.

당나라군이 발착수에 이르렀을 때에는 눈바람이 세차서 사졸들의 젖었던 몸이 얼어 죽은 자가 많았다고 한다.

당태종은 눈바람이 세차서 지척을 분간할수 없게 된 기회를 타서 군사들에게 불을 피워 날 풀리기를 기다리라고 해놓고 자기는 슬쩍 빠져 달아났다.

연개소문이 거느린 고구려군은 리세민을 추격하여 오늘의 베이징근방까지 공격해갔다. 그때 연개소문이 당나라경내를 종횡무진한 자취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있다.

당나라사람 번한은 《고려성 회고시》라는데서 연개소문이 한때 당나라의 북부지역을 차지하고 인민들을 이주시켜 새로 점령한 지역에 풍만한 생활을 펼쳐놓은데 대하여 전하고있다.

상대를 잘못 보고 접어들었던 대가는 바로 이러하다.

당태종이 리정, 리대량 등 조정대신들의 충고를 들어 침략전쟁을 도발하지 않았더라면 《위징(당태종의 측근신하, 643년에 죽음)이 곁에 있었더라면, 내가 이번 걸음을 하지 못하게 하였을것이다.》라고 후회의 눈물을 짓지 않았을것이다.

후회란 언제나 때 늦은 법이다.

당태종은 《료동전역에서 얻은 근심》 즉 《리질》, 《등창》 같은 병으로 지지리 고생하다가 그것이 도지여 4년후인 649년에 죽었다. 죽기 전에 그는 다시는 고구려를 침범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였다.

결국 당태종은 자기를 과신하면서 상대를 잘못 본탓에 자기자신의 운명도 지켜내지 못하였다.

《명군주》, 《명장》이라고 하는 당태종을 파멸시킨 연개소문은 그야말로 명장중의 명장이였다.

후세에까지도 《명군주》, 《명장》이라고 일러온 당태종이 패한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던지 후에 중국 송나라(960-1279년)임금 신종은 측근신하 왕개보와 이야기하다가 《당태종이 고구려를 치다가 무엇때문에 이기지 못하였는가?》고 물었다. 이에 대해 왕개보는 《연개소문이 비상한 사람이기때문》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연개소문이 살아있는 동안 당나라는 고구려를 감히 건드리지 못하였다. 고구려는 이 시기에 가장 강대해졌다.

 

이처럼 연개소문은 뛰여난 지략과 무비의 용맹으로 고구려를 천하에 우뚝 내세우려던 뜻을 실현시키고 나라와 겨레의 안전을 지켜내는데 이바지한 애국명장이였다

 

 



                                                (계속 이어집니다)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삶과 문학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