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연재 『단군민족의 명인들』
29)전승의 기록만을 남긴 최영
고려말에 들어와 봉건통치배들의 부패타락과 악랄한 착취행위로 하여 사회계급적모순이 첨예화되고 국가질서는 극도로 문란해진 속에 북쪽과 남쪽에서 계속된 외래침략자들의 침범과 략탈로 인하여 전쟁의 불길은 가실줄 몰랐다. 바로 이러한 때에 나라가 처한 위기를 가시고 겨레의 운명을 지키기 위하여 삼척검을 비껴들고 일생을 전장에 바친 한 대장부가 있었다. 그가 바로 력사에 애국명장으로 그 이름을 남긴 최영이였다. 최영은 료동원정을 조직하고 계속되는 외적의 침입을 물리쳐 나라와 겨레의 안전을 수호하는데 기여한 애국명장이였다. 최영(1316-1389년)은 고려의 이름있는 가문의 출신이였다. 11대 조상인 최준옹은 왕건을 도운 공신이였으며 5대조인 최유청은 1170년 정중부의 란에 문관들이 모두 살해당하였으나 여러 장수들이 평소에 그의 덕망에 감복하고있었던지라 군사들에게 그의 집은 다치지 말라고 한 까닭에 친척들까지도 모두 화를 면하게 해준 재능과 덕망이 뛰여난 사람이였다. 최영의 아버지 최원식은 사헌부의 관리로서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러한 가문에서 나서자라난 최영이였기에 애국의 억센 의지를 지니고 한생을 싸움판에서 보내고 청렴결백한 마음과 강직한 성격을 지니고 기울어져가던 나라를 지켜 억센 기둥이 될수 있었던것이다.
1. 《공은 이 나라를 덮었다》
최영은 어릴 때부터 얼굴에 영채가 돌고 위엄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양광도(경기도)의 도순문사휘하에 있으면서 여러차례 왜적을 잡아 용맹을 떨치였으며 그것이 조정에 알려져 달치(왕의 호위대원)로 등용되였다. 1352년에 최영은 안우, 최원 등과 협력하여 친원파관료인 조일신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그 공로로 장군이 되였으며 2년후에는 대장군이 되였다. 당시 북쪽대륙에서 강대함을 자랑하던 원(몽골)제국은 급속한 내리막길을 걷고있었다. 몽골의 지배를 반대하여 한족농민폭동군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급해맞은 원나라에서는 고려에 장수와 군대를 보내여 도와줄것을 청해왔다. 그들이 청한 명망이 있는 장수와 재상들가운데 최영도 있었다. 그것은 그가 이미 해외에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였음을 말해준다. 이 원정과정에 최영은 원나라가 추설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으며 그 나라 통치배들이 부패무능하고 고려의 군대는 그들의 군대보다 월등하게 강하다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이것은 최영이 원나라에 강경립장을 취하면서 나라의 권위를 높이는것을 무력으로 뒤받침할수 있게 한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 인민들속에서 고려의 일부 지역을 강점한 원나라침략세력을 몰아낼데 대한 열의가 높아가고 실제로 원나라의 취약상을 목격한 관료들의 적극적인 주장에 발맞추어 고려정부는 친원정책으로부터 반원정책으로 방향전환을 하였다. 1356년 한해동안에만도 원나라정부의 비호밑에 반란을 꾀하던 기씨일족을 우두머리로 한 친원파두목들을 처단체포하며 우리 땅을 전부 수복하기 위한 군사적조치를 취하였다. 5월에는 고려내정에 대한 간섭의 도구이며 인민들의 증오의 대상이였던 《정동 행 중서성리문소》를 철페하였다. 고려왕정에서는 평리 인당과 전 대장군 최영 등을 파견하여 압록강너머의 8개 참을 공격하게 하였다. 인당과 최영 등은 6월 16일에 압록강을 건너 파파부 등 3개 참을 공격하여 격파함으로써 교통의 요충지들을 장악하였다. 1357년 8월 16일 최영은 동북면 체복사로 임명되여 수복한 땅들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358년 4월 13일 최영은 왜구의 침입에 대처하여 양광도와 전라도의 왜적체복사로 임명되였다. 최영은 복병전술로 오예포에 침입한 왜구의 병선 400여척을 물리쳤다. 최영은 1359년 11월부터 1361년 3월까지 계속된 홍두적의 1차 침입을 물리치는 싸움에서 서북면 병마사로서 안우, 김득배, 리방실 등 여러 장수들과 함께 용감히 싸웠다. 홍두적은 원래 1350년대초에 황하류역에서 머리에 뻘건 수건을 쓰고 봉건적억압과 착취를 반대하여 싸움에 일떠선 농민폭동군으로서 홍건적이라고도 불리웠다. 여러 부대로 나뉘여 활동하던 수십만의 농민군가운데서 관선생, 사유의가 지휘한 부대는 1357년 만리장성을 넘어 원나라 제2수도인 상도(개평부)를 점령하고있다가 료동땅을 휩쓸면서 1359년에는 고려땅으로 기여들게 되였다. 이때부터는 그 진보적성격을 상실하고 략탈과 파괴를 일삼는 침략군, 살인마집단으로 변질되였다. 최영 등 장수들의 지휘밑에 고려군은 홍두적에 결정적타격을 주었다. 1361년 1월 16일 최영은 평양윤 겸 서북면 도순찰사가 되였다가 인차 좌산기상시로 옮기였다. 그해 10월 20일 반성, 관선생, 주원수 등이 거느리는 홍두적이 두번째로 우리 나라에 쳐들어왔다. 적들은 고려군의 반격으로 많은 손실을 당하면서도 계속 남하하여 11월 24일에는 수도 개경까지 일시적으로 강점하였다. 복주로 옮겨간 고려정부는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하여 20만의 방어군을 편성하였다. 고려군장병들은 포위된 성안에서 살인과 략탈행위를 자행하는 적들에 대한 불타는 증오를 안고 적들에 대한 공격전을 개시하였다. 1362년 1월 17일 최영은 여러 장수들과 함께 개경 동쪽교외 천수사앞에 집결하였다가 진군하여 성을 포위하고 다음날 새벽부터 일제히 진공하였다. 고려군은 눈비가 내려 적의 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서 불의에 공격하여 해질무렵에 벌써 적장 관선생을 비롯한 10여만의 적을 섬멸하였다. 최영 등 장수들은 포위환을 좁히면 적들이 최후발악을 하고 피해가 커질수 있으므로 숭인, 탄현 두 문을 열어주어 적들이 도망치게 해주며 매복습격전과 추격전으로 소멸할 방책을 제기하였다. 홍두적의 잔당들은 고려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많은 인적 및 물적손실을 당하고 싸워볼념을 못하고 도망쳐 압록강을 건너갔다. 이때 세운 공로로 최영은 벽상에 초상을 그려붙이게 되는 영광을 지니고 전리판서로 임명되였다. 그는 다시 양광도 진변사로 임명되였다가 인차 밀직사로 옮기였다. 1363년 윤3월 1일에 간신 김용 일당이 일으킨 반란소식을 듣고 여러 장수들과 군대를 거느리고 진압하였으며 공이 1등으로 되였다. 윤3월 23일에는 진충분의좌명공신 판밀직사사로 되였다. 1363년 5월 원나라는 자기 나라에 가있던 덕흥군(원나라에 가있던 충선왕의 서자)을 《고려왕》으로 삼고 반역자인 최유를 《좌정승》으로 하는 하나의 가짜 《고려정부》를 조작하고 침략군대를 주어 고려를 침략하게 하였다. 1364년 1월 1일 최유가 이끈 원나라군사 1만명은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포위하였다. 도지휘사 안우경이 7번 싸워 승리하였다. 다시 나가 싸우다가 도병마사 홍선이 포로되고 아군은 패배하였다. 아군은 퇴각하여 안주로 들어가고 적들은 선주(평안북도 선천)에 들어가 거점으로 삼았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녀진의 삼선삼개가 대군을 끌고 오늘의 홍원, 북청일대에 기여들었다. 동녕로 만호 박백야대 역시 침략군을 끌고 연주(평안북도 운산군)일대에 침입하였다. 그리하여 고려군민은 세 방면에서 거의 동시에 쳐들어오는 적의 대군과 싸워야 하였다. 고려정부에서는 최영을 도순위사로 임명하여 정병을 거느리고 급히 안주로 가서 모든 군사를 지휘통제하게 하였다. 최영은 명령을 받고 곧 출발하였으며 장수들과 군사들을 격려하여 기어이 적을 섬멸할것을 맹세하였다. 그때 조정과 민간에서는 다 그를 신뢰하여 공포가 사라졌다고 한다. 1월 18일, 정주에 이르렀을 때 적들이 벌써 수주의 달천에 주둔하고있었다. 최영은 여러 장수들에게 군사를 나누어주어 여러 방면에서 적을 공격하여 달천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적들은 병영에 불을 놓고 압록강을 건너 도망쳤다. 1월 24일, 최영은 곧 군사를 돌리여 동녕로 만호 박백야대를 공격하여 격퇴하였다. 서북면에서 승리를 거둔 고려군은 동북면으로 이동하여 이곳의 방어군과 협동하여 1364년 2월 총공격으로 넘어가 화주(금야)이북을 차지하였던 삼선삼개를 내쫓고 그 지역을 회복하였다. 공민왕은 너무 기뻐 관리들을 파견하여 교외에서 회군하는 그들을 왕의 행차를 맞이하는것과 같이하도록 지시하였다. 원나라는 고려의 위력에 겁을 먹고 1364년 10월 저들의 앞잡이 최유를 붙잡아 보내면서 관계를 개선할것을 제기하였다. 1364년 12월 1일 찬성사 최영은 조강에 침입한 왜적을 쳐물리쳤다. 1365년 3월 2일 왜적이 교동과 강화를 침범하였다. 공민왕은 동서강 도지휘사이며 찬성사인 최영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동강에 나가 주둔하면서 지키게 하였다. 그런데 최영은 그때 한창 왕의 총애를 받던 신돈에게 미움을 사서 그의 모함을 당하고 계림윤으로 좌천되였다가 귀양을 가게 되였다. 1371년 신돈일파가 제거된 후 다시 소환되여 찬성사로 임명되였다. 1373년 10월 7일 최영은 6도 도순찰사로 임명되였다. 왕은 그에게 장수들과 고을관리들을 처벌하고 군적을 정리하며 병선을 제작보수하고 죄가 있는 자는 즉결처형할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1374년 최영은 경상도, 전라도, 양광도의 도순문사로 임명되였다. 이때 헌사에서 왕에게 전해에 최영이 6도 도순찰사로 되여 《소동》시켰다고 하면서 다시 파견해서는 안된다고 제의하였다. 그들이 말하는 《소동》이란 최영이 법을 어긴 자들을 엄격히 처벌하고 그가 누구든 등급에 따라 곡식을 징발하여 군량을 보충한 사실을 두고 한 말이였다. 최영은 후에 《내가 이전에 6도 도통사로 있으면서 800척의 병선을 건조하여 해적을 깨끗이 소탕하려고 하였다.》고 회상하였다. 결국 그의 《소동》이란 나라와 겨레를 위한 사업이였던것이다. 공민왕은 최영을 옳다고 인정하면서도 짐짓 대간과 도당에 대신할만 한 자를 추천하라고 명령하였으며 얼마 안 가서 최영의 파면을 제기하였다는 리유로 대사헌 김속명을 파면시키고 지평 최원유를 연안부사로 좌천시켰으며 최영에게는 진충분의선위좌명정란공신칭호를 주었다. 1374년 7월 고려정부는 제주도원정을 결정하고 그 준비를 본격적으로 다그쳤다. 7월 26일 왕은 문하찬성사 최영을 양광, 전라, 경상도 도통사로 임명하고 큰 병선 314척과 정예군사 2만 5,605명을 보내여 제주도에 남아있던 몽골강점자들을 쳐몰아내게 하였다. 8월 28일에 원정군은 제주도(탐라)에 도착하여 최영의 능숙한 지휘밑에 용감하게 싸워 강점자들을 소멸하였다. 1375년 9월에 왜선이 덕적도와 자연도에 침입하자 왕은 판삼사사 최영에게 양광, 전라, 경상 등 여러 도의 군사와 초모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적을 막게 하였다. 1376년 7월 홍산전투는 최영의 장수다운 기개와 무비의 용감성이 남김없이 과시된 전투였다. 7월 왜구의 대부대가 충청도앞바다로 올라와 금강을 거슬러와서 백마강에 닻을 내리고 부여일대를 략탈하고 련산의 개태사에까지 침입하였다. 수천명의 왜적들은 민가에 불을 지르고 재물을 략탈하였으며 무고한 주민들을 살륙하면서 마침내는 공주를 점령하였다. 고려정부에서 파견한 원수 박인계는 왜적들과 용감히 싸우다가 실수하여 말에서 떨어져 적들에게 살해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은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최영은 분연히 왜적토벌을 자청하였다. 우왕이 늙었다 하여 만류하자 그는 《비록 몸은 늙었으나 뜻은 꺾이지 않아 종묘와 국가를 편히 하고 왕실을 보위하려는 일념뿐이옵니다. 곧 휘하를 인솔하고 나가 싸우게 하여주기 바라옵니다.》라고 재삼 요청하였다. 임금의 승낙을 얻자 최영은 군사를 거느리고 밤낮으로 홍산(방면)으로 행군하였다. 최영은 양광도 도순문사 최공철, 조전원수 강영, 병마사 박수년 등과 함께 급히 홍산으로 가서 먼저 요충지를 차지하였다. 그곳은 삼면이 절벽이고 오직 길 하나가 통할뿐이였다. 여러 장수들은 머뭇거리며 전진하지 못하였다. 최영은 정예부대를 모두 동원하여 공격하게 하고 자신이 그 앞장에 섰다. 적들은 바람앞에 풀잎 쓰러지듯 너부러졌다. 이때 한 적병이 숲속에 숨어 최영을 쏘아서 입술을 맞혔다. 그는 류혈이 랑자하였으나 당황한 기색이 없이 태연자약하였으며 단살에 그 적병놈을 쏘아죽이였다. 그후에야 맞은 화살을 뽑았다. 그리고 더욱 용감히 돌진하였다. 최영의 영용한 전투모습을 본 장병들은 기세가 올라 원쑤들을 무자비하게 족치여 거의 전부를 살상하였다. 이 싸움후에 적들은 《언제나 제일 무서운 자는 백발의 최만호뿐인데 홍산전투에서 최만호가 오니 그 사졸들이 앞을 다투어 말을 달려 우리를 짓밟아댔으므로 몹시 무서웠다.》고 늘 말하였다고 한다. 홍산전투에서 세운 공로를 표창하여 우왕은 최영을 철원부원군으로 책봉하였다. 1377년 3월 최영은 6도 도통사로 임명되여 착량과 강화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다. 1378년 4월 최영은 고려군을 지휘하여 승천부(개풍군)에 침입하여 수도 개경을 엿보는 왜적들을 해풍(개풍군)에서 전멸시켰다. 이 공로로 그는 안사공신(사직을 안정시킨 공신)칭호를 받았다. 이후에도 최영은 왜적의 침입소식을 들으면 솔선 전장에 나갈것을 제기하였다. 1380년 최영은 령삼사사 겸 해도도통사로 임명되여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동강, 서강으로 출동하여 주둔하면서 왜적을 방비하였다. 1381년에 최영은 수 시중으로 임명되였으며 1384년에는 판 문하부사로 되였다. 그가 사직하려고 제기하자 왕은 9월에 문하시중으로 임명하였다. 1387년 1월 왜적이 강화에 침입하자 도통사 최영은 다시 해풍으로 나가 주둔하여 적을 방비하였다. 1388년 정초에 최영은 권세를 등대고 조정을 쥐락펴락하고 백성들의 원망의 대상으로 되고있던 렴흥방, 림견미, 리인임일당을 제거하였다. 그해에 최영은 다시 문하시중으로 임명되였다. 1388년 2월 최영은 우왕과 료동공격을 비밀리에 의논하였다. 그들은 료동공격을 조정의 론의에 붙였다. 처음에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였다. 그 앞장에는 왕좌를 엿보던 역적 리성계가 서있었다. 명나라의 침략책동이 로골화되자 우왕은 《군신이 짐의 료동공격계책을 듣지 않아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개탄하면서 다시 의논에 붙였다. 후에 정변을 일으킨 여러 장수들을 설유한 우왕의 지시문의 한토막을 통하여 당시 우왕과 최영의 뜻을 짐작할수 있다. 《하물며 강토를 회복하는것은 조종의 유지이다. 어찌 쉽게 남에게 줄수 있단 말이냐. 군사를 일으켜 지키는것만 같지 못하여 내가 여러 사람들과 의논하였는데 그들이 모두 옳다고 하고는 지금에 와서는 어째서 감히 어기느냐?》 이것은 그때 우왕과 최영이 선조의 유언대로 옛 강토를 모두 회복할것을 계획하고있었으며 여러 장수들도 그들의 큰 뜻에 찬동을 표시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최영은 료동원정을 견결히 반대하던 리자송을 죽이고 8도의 군대를 징발하였으며 새로 서북지역에 성들을 수축하면서 원정준비를 완강히 밀고나갔다. 이미 1360년대말부터 1370년대초까지 여러차례 료동원정이 있었지만 그것은 원침략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반원투쟁의 연장이였다. 그러나 이번의 원정은 그곳으로 세력을 뻗치면서 고려에 압력을 가하고 고려의 땅을 빼앗으려던 명나라의 침략기도를 분쇄하기 위한 투쟁이였으며 고구려의 옛 강토를 되찾기 위한 투쟁이였다. 1388년 4월초 우왕은 봉주(황해북도 봉산)에 이르러 료동공격을 정식 선포하였다. 최영은 당시 원정의 승리를 확신하고있었다. 그것은 료동의 명나라군사들이 대부분 북원과의 싸움에 나가있었기때문이다. 그때 료동의 형편을 알고있던 사람들은 고려군의 원정이 승산이 있다는것을 믿고있었다. 어떤 사람이 니성(창성)으로부터 와서 《료동군은 모조리 호인(봉건몽골)토벌에 나가고 성안에는 단지 지휘 한사람만이 있을뿐이므로 대군이 가면 교전하지 않고도 함락될것이다.》라고 보고하였다. 최영을 8도 도통사로 하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리성계를 우군도통사로 하여 원정군은 3만 8, 830명으로 이루어졌으며 4월 18일에 평양을 출발하면서 10만대군이라고 공포하였다. 최영은 전체 부대가 출발하자 우왕에게 이제 대군이 행군도중에서 열흘이나 한달을 끌게 되면 큰일을 성취할수 없으니 자기가 가서 단속하겠다고 제의하였다. 그는 이번 원정에서 속전속결을 노렸던것이다. 5월 11일, 니성원수 홍인계와 강계원수 리의가 선참으로 료동지역에 돌입하여 전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속에 흉심을 품은 리성계는 위화도에 머물러있으면서 질질 시간을 끌어 군량이 부족하게 하고 그것을 이번 원정을 조직한 최영의 책임으로 전가시켰으며 《목자(木子)》 즉 리씨성을 가진 사람이 《나라를 얻는다.》는 요언을 퍼뜨리면서 뜻을 같이하는 자들과 반변음모를 꾸미고있었다. 6월초,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에 돌아온 리성계일파는 최영을 귀양보내였다가 후에 료동공격을 주장하였다는 죄명을 씌워 죽이였다. 하지만 진실은 가리울수 없었다. 력사는 과연 누가 진짜 애국자이고 누가 진짜 반역자인가 하는것을 정확히 평가해주고있다. 이전에 리인임이 최영에게 《리판삼사사(리성계)가 나라의 주인이 되려고 하니 주의하라》고 한적이 있었다. 그러나 최영은 리성계의 용맹을 아끼여 리인임이 허튼소리를 한다고 꾸짖으며 그 말을 흘려들었다. 그가 리성계가 속에 딴 꿈을 묻어두고있던 너절한 역적이라는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었다. 그때에야 비로소 최영은 지난 일을 회상하여 《전날 리인임의 말이 참으로 옳았다.》고 개탄하였다. 적들이 그 이름만 들어도 《백발의 최만호가 제일 무섭다.》고 비명을 지르던 최영, 거의 한생을 싸움터에서 보낸 그의 이름은 원쑤들에게는 공포의 대명사로, 고려의 군대와 인민들에게는 승리의 대명사로 불리웠다. 최영에 대하여 옛 사가들은 이렇게 평하였다. 《전선에서 적과 대치하여 태연하였으며 화살이 비발같이 지나가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군대를 지휘함에 있어서는 규률을 엄격히 하여 필승을 기하였으며 전사가 한걸음만 물러서도 곧 목을 베였다. 그러기에 크고작은 수많은 전투에서 어디서나 승리를 쟁취하였고 일찌기 패한적이 없었다.》 참으로 정당한 평가라고 할수 있다. 최영은 비록 억울하게 최후를 마쳤지만 100여차의 전투에 출전하여 모두 승리함으로써 나라와 겨레의 운명을 지켜낸 그의 한생은 력사에 길이 남아있으며 두고두고 사람들의 추억속에 전해내려오고있다. 하기에 간대부 윤소종은 최영의 《공은 이 나라를 덮었다》고 평하였던것이다.
2. 황금은 돌이다
적들을 전률케 하는 위엄과 명성을 지닌 최영은 장병들과 인민들을 감동시키는 인정미와 청렴결백한 마음씨를 지닌 눈물많은 보통사람들중의 한 사람이였다. 자기자신의 명예나 사리사욕보다도 나라와 겨레를 먼저 생각하는 그 마음이 그를 성공에로 떠밀어준 요인이기도 하였다. 《그는 성질이 강직하고 충실하며 또 청렴하였다.》, 이것이 최영에 대한 옛 사람들의 총적평가였다. 최영을 칼밖에 모르는 엄하고 몰인정한 사람으로 치부하는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는 눈물많은 장수였다. 한번은 왜구들이 병선 50여척을 끌고 착량에 침입하고 이어 강화부와 수안, 통진, 동성현들을 침공하였던적이 있다. 이때 놈들이 가는 곳마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도통사 최영은 경천에 가서 왜적방어대책을 토의할 때 《왜적의 횡포 잔악함이 이러하니 원수로서 어찌 낯을 들수 있는가.》고 하면서 주르르 눈물을 흘리였다. 이때 원수 석문성은 기생이 오는가 안 오는가 하는데만 관심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최영과 석문성은 근심하고 즐기는바가 서로 같지 않다고 하였다. 최영은 우왕이 주색과 사냥에만 미쳐돌아가자 누구보다도 가슴아파하며 극력 간하여 제지시켰다. 언젠가 우왕이 유람을 가려 하였다. 최영은 《지금 기근이 자주 들어 백성들이 살수 없는 형편이며 또 방금 농사철인데 분별없이 유람을 즐기여 백성을 괴롭히는것은 옳지 않소이다.》라고 간하였다. 우왕이 계속 고집하자 최영은 눈물을 떨구면서 《재상자리에 있으면서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무슨 면목으로 사람들을 대하겠는가》고 하였다. 하여 끝내 우왕이 《이제부터 고치겠다.》고 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였다. 그후에도 최영은 《왜적이 우리 나라를 좀먹고있고 토지제도가 날로 문란해졌으며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져서 국가운명이 절박》할 때이니 대신들과 국가사업을 의논하고 사냥을 지나치게 즐기지 말라고 눈물이 랑자하여 우왕을 타이르군 하였다. 이처럼 최영의 눈물은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이였다. 이러한 그였기에 그는 백발을 머리에 이고도 언제 한번 싸움을 피한적 없으며 항상 자진하여 군사임무를 맡군 하였다. 지어 왜적을 격멸한 공로로 시중벼슬을 주려 하자 《시중으로 되면 제때에 전선으로 나갈수 없을것이니 왜적을 평정한 후라면 좋을것이다.》라고 사양하였던것이다. 최영이 임금이 옳바르게 행동할것을 자주 간한것은 《온 백성의 운명이 모두 전하의 마음여하에 달려있기때문》이라고 여긴데 있었다.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고있던 최영은 서북면 도순찰사로 있을 때 홍두적의 침입으로 전쟁의 상처가 아직 가시지 못하여 아사자가 속출하자 여러곳에 구제소를 많이 설치하고 량식과 종곡을 주어 농사를 장려하고 전사자들의 시체를 거두어 묻어주게 하였다. 최영 역시 통치계급의 한사람이였지만 일정하게나마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을 느끼고있었으며 하여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관료들과 돈밖에 모르는 수전노들을 몹시 증오하였다. 리인임이 시중이 되여 임금의 총애를 믿고 사리사욕만 채우며 돌아가자 그에게 《나라가 매우 곤난한데 당신은 재상으로서 어찌 이것을 우려하지 않고 다만 가정살림에만 관심하는가.》고 면박을 주었다. 1384년 리인임, 렴흥방, 림견미 등 일파가 권력을 독차지하고 토지략탈에 광분할 때 최영은 도당에 나가서 모든 재상들에게 백성의 재산을 강탈하고 토지를 겸병하는 해독을 력설하였으며 마침내 다같이 금지할것을 약속한 서약서를 작성하여 일제히 서명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여러 재상들을 돌아보며 《이제 또다시 전날과 같이할 자가 있겠는가.》라고 하며 은근히 위협하였다. 그후에도 고치지 않자 1388년에 리인임, 림견미, 렴흥방일당을 처형하는 단호한 조치를 취하였다. 한때 경성에서 물가가 폭등하여 장사군들이 털끝만 한 리해를 놓고도 다툰적이 있었다. 최영은 이것을 증오하면서 일체 매매하는 물품은 우선 경성시서에서 가격을 사정하여 세를 받은 표식이 있은 후에야 매매할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그 법을 어기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고 공포하였다. 최영은 항상 법을 존중하고 법에 따라 모든 일을 처리함으로써 장병들과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다. 한번은 최영의 조카사위 판사 안덕린이 함부로 사람을 죽였으므로 양광도 안렴 양이시가 구속하여 헌사에 압송한적이 있었다. 이때 최영은 판순위부사로 있었는데 도당(재상들이 일을 보는 곳)에서는 최영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안덕린의 죄를 경하게 하려고 순위부로 넘기였다. 최영은 노하여 《안덕린이 무고한 사람을 죽였은즉 응당 헌사에서 판결할것이다. 하물며 내가 순위부에 있으면서 어찌 문초를 추진시킬수 있겠는가.》고 하면서 헌사로 돌려보내였다. 최영은 우왕의 유모 장씨가 정사에 관여하여 페해를 끼치자 우왕의 간절한 청에도 불구하고 엄형에 처하였다. 최영은 생의 전기간 그가 높은 관리거나 그 후원을 받는 자라고 해도 법을 어기면 용서치 않았다. 최영은 청렴결백을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어긴적이 없었다. 최영의 나이 16살때 아버지가 죽었는데 그때 이런 유언을 남겼다. 《너는 황금을 돌같이 여기거라.》 최영은 한생 아버지의 이 훈계를 가슴에 깊이 새기고 살았다. 그는 아버지의 훈계를 늘 띠에 써가지고 다니면서 재물에 관심하지 않았으며 거처하는 집이 초라하였으나 이에 만족하고 살았으며 의복과 음식을 검소하게 하여 간혹 식량이 모자랄 때도 있었다. 남이 좋은 말을 타거나 좋은 의복을 입은것을 보면 개나 돼지만큼도 여기지 않았다. 지위는 비록 재상과 장군을 겸하고 오래동안 병권을 장악하였으나 뢰물과 청탁을 받지 않았으므로 세상이 그 청백함에 탄복하였다. 항상 큰것을 견지하는데 힘쓰고 조그마한것에 구애되지 않았다. 종신토록 장군으로서 군대를 통솔하였으나 그가운데서 얼굴을 아는 자는 수십명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최영은 공로를 표창하여 토지를 주면 국고가 빈약한것을 고려하여 받지 않고 도리여 자기의 량곡 200석을 내여 군량에 보충하게 하였다. 그는 자주 자기의 량곡을 내여 군량미에 보태게 하였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최영의 집에 재상들이 모여왔다. 그때 재상들이 서로 집을 돌아가면서 청해다 바둑으로 심심풀이를 하고 좋은 음식을 대접하여 자기 사치를 과시하는 호화스러운 습관이 류행되고있었다. 그런데 최영만은 손님들을 청해다놓고 한낮이 지나도록 음식대접을 하지 않았다. 거의 저녁때가 되여서야 기장밥에 나물 몇가지를 내놓으니 손님들이 시장한 판이라 그나마 먹을수밖에 없었다. 《철성댁(최영을 말함)음식은 특별히 맛이 있거든.》 《이 역시 용병지술(군사를 쓰는 전술)이야.》 하고 대꾸하며 최영은 웃었다. 청렴결백, 참으로 이것이야말로 최영의 용병술, 최대의 성공적인 작전이라고 할수 있었다. 바로 그는 이것으로 전투의 담당자인 대중을 얻었던것이다. 최영을 죽이고 역신 리성계를 내세워 리씨조선을 세운 자들은 그에게 너무 혹독하였다느니 무식하다느니 하며 비난도 퍼부었지만 그것이 거짓말이라는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최영이 지나치게 혹독한 일을 했다면 그자신이 말한것처럼 단 한번이였다. 그것은 사치를 일삼고 세도를 부리며 백성들을 억압착취한 림견미, 렴흥방일당을 가혹하게 처리한것이였다. 그는 처형되기 전에 그것이 마음에 걸려서인지 이렇게 마지막말을 남겼다. 《내 평생에 고약한 일이라고는 해본적이 없다. 오직 림가, 렴가의 일족을 과도하게 죽였을뿐이다. 내가 조금이라도 탐욕한 마음이 있었다면 나의 무덤우에 풀이 날것이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으리라.》 정말 그의 무덤에는 풀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최영은 다정다감하고 글도 잘 알며 시문에도 밝은 사람이였다. 어느 날 저녁 여러 재상들과 련구를 지었는데 경복흥이 《하늘은 옛 하늘이지만 사람은 옛 사람이 아니로다.》고 하자 최영은 《달은 명월이로되 재상들은 밝지 못하구나.》 하고 대구를 놓아 여러 관료들을 경악케 하였다. 또 한번은 리성계가 수 시중이 되였을 때 《석자되는 환도로 나라를 안정하고》라고 하자 당대 문인이노라고 자부하던 사람들이 모두 그 대구를 채우지 못하였다. 최영이 제꺽 《한가닥 채찍끝에 천하가 평정되리》라고 대구를 놓았다. 그의 시들에는 불의를 증오하고 천하에 고려를 우뚝 내세우려는 웅건한 뜻이 집약되여있었다. 허나 세상은 너무도 그의 뜻을 알아주지 않았다. 언제나 도당에 나가서는 정색하여 바른말을 기탄없이 하였는데 좌중에 공명하는 자가 없어 혼자서 탄식하군 하였다. 언젠가 한사람에게 《내가 국가정치에 관하여 밤중에 생각하고 날이 새여서 그것을 동료들에게 말하면 여러 재상들중에서 나와 의견이 같은 자가 없으니 사직하고 은거하는것만 같지 못하다.》고 말하면서 가슴을 쳤다. 어지러운 세상에 홀로 안타까이 나라와 겨레를 근심하며 몸부림친 사나이, 황금을 돌같이 여긴 최영은 오직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깡그리 바쳤다. 사람들은 바로 그의 이러한 강직하고 고결한 마음을 크게 샀고 그가 싸움터마다에서 승전고를 높이 울릴수 있게 해주었던것이다.
3. 그 공적 청사에 드리우리
명장 최영은 과연 어떤 공을 세웠던가. 우왕이 최영의 공을 평가하여 철권을 주면서 내린 지시문가운데 일부를 보면 그 대체적인것을 알수 있다. 《… 그대는 실로 우리 왕조 력대 공신의 후손으로서 그대의 선조들은 우리의 력대 선왕들에게 복무하여 문교와 정사에서 모두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 그리고 그대의 고매한 소질과 강의한 기개는 일세에 탁월하며 전대 력사들에 못지 않으며 특히 군사상 공훈은 그 류례가 없다. 경인년(1350년)부터 륙지와 해상에서 적을 막아 비로소 그 지혜와 용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였으며 우리 부왕이 선발하여 시위로 임명하였다.… 지금 장수들중에서 많은 전투를 한것과 그 공로가 큰것으로는 오직 그대 한사람만이 뚜렷이 나타난다. 또 더우기 충성이 지극하고 의리를 중히 여겨 임금을 존중하며 백성을 보호함에 있어서 재상중의 참된 재상이다. 토지와 노비를 주어 표창하는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그대는 천성이 결백하여 반드시 굳이 사양할것이므로 다만 철권을 주고 옥으로 족자를 만들어 특별히 우대하는 뜻을 표시한다. 아, 공은 크고 상은 박한것을 짐은 게면쩍게 여기노라. 그대가 혹 죄를 범하더라도 아홉번까지는 묻지 않을것이며 열번에 이르러도 응당 최종의 형을 감할것이다. 자손에 대해서도 고려할것이다. 후대의 임금과 신하는 내 뜻을 체득하기 바라노라.》 철권이란 옛날에 공이 있는 신하에게 주는것으로서 기와같이 생겼는데 공과 죄를 막아줄 《은혜》의 조치를 안팎에 금으로 새겨넣었다. 좌우로 나누어 왼쪽것은 공신에게 주고 오른쪽것은 내부에 건사하여 후에 맞추어보고 믿게 하였다. 고려봉건정부의 이러한 조치는 최영의 공로를 정당하게 평가한것이라 할수 있었다. 조종의 땅을 되찾고저 하여 료동원정을 계획하고 추진시킨것이 《죄》가 되여 찬탈음모를 꾸미던 역적 리성계일파에게 피해를 입은 최영, 하지만 가해자들조차도 최영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였다고 하면서 실로 국가의 흥망을 걸머진 신하였다고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최영의 한생은 떳떳하였다. 하기에 그는 처형될 때 언사와 안색이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자기가 걸어온 떳떳하고도 자랑스러운 생애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이였을것이다. 온 나라 사람들이 그의 억울한 죽음을 두고 비통해마지 않았다. 나라와 겨레를 위해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쳐온 그의 한생을 돌이켜보며 사람들은 그를 추모하였다. 그가 《죽던 날 경성사람들은 저자를 중지하였으며 어디서나 이 소문을 듣고는 거리의 어린이들이나 시골부녀자나 할것 없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시체가 길가에 놓여있었는데 오고가는 사람들이 말에서 내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를 잊지 못해하며 오래도록 추억하였다. 후세에까지 전해진 최영을 노래한 가요의 한구절은 이러하다.
공개일국(공이 온 나라에 가득차다) 정말이오 죄만천하(죄가 천하에 가득차다) 무고로다 최영장군 죽고나니 고려왕실 끝이 났네 충신을 몰라보는 네가 무슨 왕일소냐 신돈의 피를 받은 거짓왕이 분명하다
노래에서는 공이 온 나라에 가득찼다는 말은 옳지만 죄가 천하에 가득찼다는 말은 모함이라고 하면서 최영을 죽이게 한 우왕을 저주하고있다. 당시 리성계일파는 리씨조선의 성립을 합리화하기 위해 우왕이 신돈의 피를 받은 왕이라는 말을 돌렸는데 사실상 최영을 죽이게 한것도 우왕의 본의가 아니라 리성계를 비롯한 정권찬탈자들의 강요에 못이겨서였다. 최영은 우리 나라 민간신앙에 있어서 가장 인기있는 영웅신으로 되였다. 경기도 파주군 덕물산 산정에는 20세기중엽까지도 우리 나라에서 드물게 보이는 무당부락이 있었다. 이 덕물산의 꼭대기에 있는 장군당의 본존이 곧 최영장군인것이다. 서울이북 황해도일대의 민간신앙에서는 이 장군당이 신앙의 본거지이며 무당들은 덕물산우에서 기도함으로써 무력을 얻는다고 믿고있었다. 덕물산에서는 2년에 한번 음력 3월에 도당굿을 하는데 이때에는 각처의 무당들이 모여 일대 성황을 이루므로 전국의 제일가는 굿으로 쳤다. 굿이 끝난후에는 잔치가 베풀어지고 이때의 명물은 국내의 진미로 알려진 돼지고기인데 이 고기를 성계육이라고 하였다. 성계육은 두말할것도 없이 충신 최영을 죽인 찬탈자 리성계에 대한 끝없는 증오를 나타내는 이름이다. 민간신앙에는 우리 나라 민간에 퍼져있는 고유한 일반대중의 감정이 반영되여있다. 최영이 봉건사회에 이처럼 숭배되고있은것은 그가 나라와 겨레를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쳐 투쟁하였기때문이다. 최영은 통치계급의 일원으로서 계급적제한성도 가지고있지만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고 그를 지켜 안일사치와 명예를 바람이 없이 한생을 전장에 바쳐 헌신분투한 군사가이다.
30)《동방의 성인》으로 불리운 세종대왕
반만년 우리 력사를 돌이켜보면 나라와 민족을 위해 큰공을 세운 임금들이 적지 않다. 그들가운데는 《해동요순》(혹은 《동방요순》 요, 순은 모두 이웃나라 전설중의 《성인》으로 불리운 제왕들)으로 찬미된 리조의 제4대왕 세종대왕도 있다. 맏아들이 왕위를 잇는것이 원칙으로 되여있던 당대 사회에서 셋째아들이였던 그는 어떻게 되여 왕위를 이어받게 되였으며 과연 민족앞에 어떤 공을 쌓았는가. 그가 《동방의 성인》으로까지 불리울 업적을 쌓을수 있은 비결은 어디에 있었던가.
1. 태종의 갑작스런 정권이양
1418년 7월 4일 개경에 가있던 태종은 세자를 한양(서울)에 가서 종묘에 참배하라고 떠나보낸 뒤 옥좌에 몸을 깊숙이 잠그고 사색을 모았다. 리성계의 다섯째아들로서 리씨조선을 세우는데서 큰 역할을 한 태종, 그는 이 태종이라는 묘호보다도 방원(자는 유덕)이라는 이름으로 독자들과 더 깊은 인연을 맺고있을는지도 모른다. 꿈에도 소원하던 왕좌를 노리여 배다른 동생 방번과 친형 방간을 죽이고 정도전, 남은 등 정치적적수들을 매장해치운 태종, 왕자리를 탐냈다는 비난을 모면해보고저 친형인 방과(둘째형)를 2대왕(정종)으로 내세웠다가 2년후에 밀어내고 1400년에는 자신이 왕좌에 올랐다. 전제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주되는 장애세력인 사원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여 그를 약화시키고 반란의 화근이였던 사병을 철페하였으며 외척들의 세력확장과 그들의 정권참여를 가차없이 탄압한 태종. 그의 가혹한 성격으로 하여 무참히 죽어간 많은 신하들이 꿈에 나타나 그를 염라국으로 끌어가겠다고 잡아끄는 바람에 침상을 흥건히 적시며 깨여나기는 얼마였던가. 피로 얼룩져온 죄많은 과거사가 돌이켜져서인가 미간에 내천자를 그리는 태종, 50대초면 정치가로서는 한창나이이다. 그러나 33살에 보좌에 올랐던 이 사나이는 때이르게 자기의 정치적생애를 총화하고있었다. 권력과 음모의 소용돌이속에서 패권을 위해 골육상쟁도 서슴지 않았던 그가 어인일로 6월에 양녕대군 제에게서 세자의 자리를 넘겨받은 충녕대군 도를 종묘에 보냈던가. 령리한 신하들이 그의 뜻을 모를리 없었다. 그들은 금상(태종)이 은밀히 왕위를 양도할 뜻을 가지고있다는것을 눈치챘다. 6대언들은 울면서 간청하듯 말했다. 《전하, 그것은 신하들이 바라는바가 아니옵니다.》 태종은 무뚝뚝하게 오금을 박으며 말했다. 《이런 말을 절대로 입밖에 내지 말라.》 7월 29일, 근 한달만에 종묘를 참배하러 갔던 세자가 돌아왔다. 8월 8일에 태종은 경회루에 앉아서 지신사 리명덕 등을 불렀다. 그가 헐레벌떡 종종 걸음쳐 이르자 태종은 엷은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과인이 왕위에 오른지 이젠 벌써 19년이로다. 밤낮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 감히 편히 지내지 못하면서도 하늘의 의사에 보답하지 못하여 여러차례 재변을 당하게 된데다가 또 오랜 병이 요즘 더욱 심하여지기때문에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노라.》 《전하, 그래서는 아니되옵니다.》 《과인의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다른 말 말라!》 명덕 등이 한사코 안된다고 하였으나 태종은 듣지 않았다. 그는 보평전에 나가서 내시를 시켜 세자를 불러오라고 두세번 재촉을 하고 상서사에 지시하여 옥새를 가져오도록 하였다. 의정부와 6조의 관리들과 공신들, 3군 총제들과 6대언 등이 대궐문을 떠밀고 들어가 통곡하며 옥새를 끌어당기여 바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태종의 노여움만 더했을뿐이다. 태종은 세자에게 옥새를 넘겨주고 그의 거듭되는 사양에도 불구하고 직접 임금이 쓰는 모자인 익선관까지 씌워주었다. 1418년 8월 10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세자는 왕위에 올라 관리들의 축하를 받았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 력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세종대왕 도가 21살로 리왕조 4대왕위에 오르게 되였다. 32년간의 통치년간을 성과있게 장식한 세종대왕. 그는 1397년 4월 5일(양력 5월 12일)에 한양 준수방에서 태여났다. 그의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였다. 그에게는 이미 1404년에 세자로 책봉받은 맏형인 제(양녕대군)와 둘째형인 보(효녕대군)가 있었다. 세종은 《영특하고 문명하면서도 과단성이 있고 강의하고 신중하면서도 너그러우며 인자하고 공손하며 효성스러운것이 타고난 천품》이였다고 한다. 그는 1408년에 충녕군의 봉호를 받고 우부대언 심온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다. 1413년 5월에는 충녕대군의 봉호를 받았다. 그러면 어떻게 되여 이 셋째 왕자는 형님들을 밀어제끼고 왕세자로 되게 되였는가. 1418년 6월 3일에 태종이 개성에 있을 때 모든 문무관리들이 세자를 그 자리에서 내쫓을것을 제의하였다. 그가 부화방탕하고 막된짓을 하면서 여러번 사단을 일으켰기때문이다. 태종 역시 자기를 절제할줄 모르고 나이 20살이 되자 학문을 좋아하지 않고 음악과 녀색에만 빠져돌아가는 세자를 좋지 않게 보았었다. 혹 너무 젊어 그럴수도 있겠다 하여 장성해서는 고칠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여러번 용서해주었으나 20살이 넘어서부터는 불량한 무리들과 개인적으로 왕래하면서 옳지 못한 행동을 자행하고 1417년 봄에는 일이 발각되여 여러사람이 처단되게 만들었다. 그후에도 세자는 자기 잘못을 깡그리 적어서 종묘에 고하고 태종에게도 글을 올려 스스로 뉘우치고 자책하는듯 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간신 한로의 음모에 걸려들어 죄를 범하였다. 이때 와서 의정부, 공신, 6조, 대간과 문무의 모든 관리들이 일치한 의견으로 함께 수표한 글을 올렸다. 세자의 행실로 보아 왕위를 계승할 무거운 책임을 맡길수 없으니 내쫓아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는 동시에 임금의 아들가운데서 현명한 사람을 골라 세자로서 다시 세워야 한다는것이였다. 태종은 그들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였다. 태종은 제의 맏아들을 세자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아버지를 내쫓고 그 아들을 올려앉혀가지고 뒤날을 담보할수 있느냐 하는것이였다. 옳은 의견이였다. 마침내 군신들의 생각은 한사람에게로 모아졌다. 태종은 신하들에게 만족한듯 말하였다. 《충녕대군(세종)은 천성도 총명하지만 공부를 좋아하고 부지런하여 몹시 추울 때나 더울 때나 밤을 새워가면서 글을 읽고있으며 또 정사의 기본도 알고있기때문에 큰 사건을 당할 때마다 제기하는 의견이 모두 다른 사람으로서는 생각도 할수 없는 그런것이다. 또 그의 아들도 앞으로 크게 될 자질을 가지고있다. 나는 충녕을 세자로 정하고싶다.》 여러 신하들도 얼굴에 화색을 띠우며 임금의 말을 받았다. 《신 등이 현명한 임금을 고르십사 한것도 실은 충녕대군을 념두에 둔것입니다.》 이리하여 맏아들인 양녕대군 제는 왕세자자리에서 밀려나고 셋째아들인 충녕대군 도가 왕세자로 되게 되였다. 총명, 부지런한 학풍. 결국 이것이 그를 왕세자로 되게 하였던것이다. 1418년 6월 5일 태종은 세자에게 임명장을 주었으며 17일에는 정전에 나와서 세자를 책봉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그로부터 한달이 좀 지나 태종은 뜻밖에도 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준것이다. 어째서 태종은 부랴부랴 왕위를 넘겨주고 《은퇴》하였는가. 《임금이 더 나이들기 전까지 군사에 관한것만은 내가 직접 처리할것이고 그 이외의 처리하기 어려운 일은 그때마다 의정부와 6조에서 옳은가 그른가 하는것을 함께 의논할것이다. 나도 그런 의논에는 참여하겠다.》 이것은 왕위를 물려준 후 태종이 내시 최한을 시켜 의정부의 재상들에게 내린 지시이다. 그때에야 의정부의 재상들도 머리를 끄덕였다. 속으로 모략가로 자처하는 그의 음흉한 속궁냥에 코웃음을 친 자들도 있었는지 어이 알랴. 박은 등은 《전하가 왕위를 물려주는데 대하여 신 등은 편안하게 지내려는것으로만 여겼더니 이제야 전하의 의도를 알겠습니다. 청컨대 반포문을 내려 왕위를 물려준 의도를 타일러줌으로써 신하와 백성들의 속마음을 시원하게 해줄것입니다.》라고 제의하였다. 태종의 의도는 한마디로 정권안보를 노린것이였다. 이것은 온갖 권모술수로 고려왕조를 뒤집어엎고 또 왕좌를 가로챈 태종으로서는 충분히 가능한 뒤수습책이라고 할수 있었다. 태조 리성계의 다섯째아들로서 쉽지 않게 왕좌에 오른 그에게 있어서 새로 군림한 세자 역시 셋째아들로서 자기와 비슷한 운명의 길을 걷지 않겠는가 하는 위구심이 항시적으로 뒤따랐다. 마음이 온순한 새 세자에게 있어서 양녕대군만이 적수라고 장담할수 없었다. 태종은 세자가 더 나이들어 정치가로서의 체모를 갖추고 자기의 지반을 꾸릴 때까지 그를 군사적으로 뒤받침해 줄것을 목적하였다. 그렇게 하자면 자기가 죽기 전에 빨리 양위하여 세자가 자기 발로 걸어나갈수 있도록 도와주는것이 필요하였다. 태종이 부랴부랴 군권은 이전대로 자기가 틀어쥐고 왕권을 세자에게 넘겨준것은 바로 이런 의도에서였다. 왕실내부에서는 피할수 없는 권력을 노린 피의 쟁탈전, 그속에 영원한 패권자로 남아있게 하려는 《다심한》 부왕의 사랑이 낳은 《양위》였다고 할수 있다. 태종은 《상왕》이라는 존호를 받고 6년간 막뒤에서 아들의 통치를 조종하였다. 후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왕위를 물려준것은 본래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한가로이 마음대로 지내보자고 한것이였다. 오직 군사에 대해서만 아직 내가 직접 틀어쥐고있는것도 임금이 나이 젊어서 군사관계는 잘 알지 못하기때문에 그렇게 하였을뿐이다. 나이 서른이나 되고 세상일에 대한 경험도 많아지기를 기다려서 모든 권한을 다 념겨줄 작정이다. 만약 여러 아들들을 원수로 삼고 여러 도의 군사를 나누어 맡기여 장수나 군사들과 접촉하게 하였더라면 임금이 왜 지금까지 군사관계를 알지 못하고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굳이 그렇게 하지 못한것은 저런 시기꾸러기가 당장 세자로 있는 판에 여러 아들이 각각 군사와 관련된 권한을 잡고있는 날이면 어떻게 서로 용납되였겠는가.》 바로 세종은 총명으로 왕세자로, 왕으로 되였고 그의 지반을 굳건히 해주기 위해 태종은 부랴부랴 왕권을 넘겨주었던것이다.
2. 력사에 남긴 뚜렷한 자취
총명으로 왕위를 이은 세종, 그는 총명으로 왕좌를 빛내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한 세종은 책과 깊은 인연을 맺고 다문박식한 정치가의 자질을 갖추어나갔다. 그는 책을 읽을 때 백번을 반복하여 그 내용을 완전히 섭취하였으며 《좌권》, 《초사》와 같은 경우에는 백번을 더 읽었다고 한다. 그는 비록 병을 앓을 때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세종은 《나는 책을 한번 눈에 거치기만 하면 잊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언젠가는 《내가 궁중에 있으며 팔을 끼고 한가로이 앉아있은적은 없었다.》고 말하였다. 세종은 왕좌에 올라서도 자기의 그 부지런한 품성을 유지하였다. 그는 매일 인시(새벽 4시)에 일어나 날이 밝으면 신하들의 조회를 받고 정사를 보며 다음에는 경연석에 나가 유신들과 강론하며 침전으로 돌아가서는 책을 읽으면서 하루일과를 보내였다. 총명한 두뇌와 부지런한 품성은 그에게 정치, 경제, 법률, 문학, 경전, 음운학, 천문, 지리, 력산, 음악, 의학, 군사학, 불경, 기계제작, 서화 등 여러 분야에 걸치는 폭넓은 지식을 소유하게 하였다.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지금도 사람들이 조선의 자랑으로 이야기하는 많은 공적들을 이룩하고 그는 단군민족사에 뚜렷한 자리를 차지할수 있었다. 세종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허송세월하는것을 경계하였다. 그렇다고 무의미한것을 생각하거나 소용없는것을 한것은 결코 아니였다. 반드시 의의가 큰것을 생각하였고 필요한 일을 하였다. 그는 비록 유교를 숭상한 군주였지만 거기에 물젖은 편협하고 고루하며 공리공론만을 일삼는 속된 유교숭배자가 아니였다. 이러한 특질들이 그의 정치생애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세종이 쌓은 공적가운데서 첫손가락에 꼽을수 있는것은 령토완정을 이룩한것이다. 그는 강력한 군사력에 의거하여 남으로는 해안지방을 로략하던 왜구를 징벌하고 북으로는 조상전래의 땅을 되찾기 위한 투쟁을 벌리면서 변경을 소란시키던 녀진을 정벌하였다. 력사에 《기해동정》으로 기록된 1419년의 쯔시마원정은 고려말기부터 계속된 왜구의 침입을 줄이고 남부해안의 평온을 유지하는데 기여하였다. 세종이 즉위한 다음해인 1419년 5월 한무리의 왜구가 충청도 비인현 도두음곶을 습격하여 막심한 피해를 끼쳤고 이어 연평(황해도) 앞바다에 침입하여 우리 나라 병선을 위협하며 식량 45섬을 략탈해갔다. 왜구의 횡포한 준동은 나라의 안전을 크게 교란시켰으며 리조정부와 군민을 격분케 하였다. 상왕인 태종과 왕인 세종은 왜구의 침입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그 소굴인 쯔시마에 대한 원정을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곧 리종무를 삼군도체찰사 겸 중군도절제사로 하여 원정군이 편성되였다. 원정군 총수는 1만 7,285명이고 병선수는 227척이였다. 원정군은 6월 19일 거제도를 출발하여 쯔시마에 대한 단호한 응징을 가하였다. 원정기간에 우리 군대는 적선 124척, 적의 가옥 2,007호를 소각하였으며 적병 123명을 소멸하고 21명을 포로하였다. 이와 함께 왜구에게 랍치되였던 주민 154명을 구출하고 20척의 적선을 로획하였다. 리조정부는 재원정을 계획하였으나 쯔시마도주가 항복서를 보내온 조건에서 중지하였다. 이번 원정의 결과 왜구의 침입은 현저히 적어졌으며 적지 않은 왜인들이 평화적인 통교자로 둔갑하게 되였다. 세종은 원정의 성과에 토대하여 왜인들에 대한 통제를 일층 강화할수 있게 되였으며 1443년에는 《계해약조》를 체결하여 왜인들의 탐리적인 무역활동을 제한하고 그에 대한 대우를 규범화하였다. 남쪽의 평온을 지키는것과 함께 북변에서 녀진인들의 빈번한 침입을 물리치고 나라의 안정을 이룩하는것은 세종에게 지워진 중대사의 하나였다. 1432년 12월 건주위녀진기병 400여명이 려연군(김형직군)에 침입하여 살인과 략탈을 감행한 사건이 터졌다. 세종은 크게 노하여 실태를 료해하게 하였으며 책임있는 자들을 처벌하고 최윤덕을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하여 건주위녀진의 소굴을 치게 하였다. 최윤덕을 총지휘관으로 하여 1만 5,000여명으로 구성된 원정군은 1433년 4월 건주위녀진에 대한 원정을 단행하여 170명의 적을 죽이고 236명을 포로하였으며 말, 소 등 가축을 로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 이후에도 건주위녀진이 련이어 평안도의 내륙변경으로 침입하여 략탈행위를 감행하였다. 세종은 격분하여 또다시 원정을 명령하였다. 1437년 9월 리천을 총지휘관으로 하여 7,700여명으로 편성된 원정군은 압록강을 건너 적의 소굴을 들이쳐 60명의 적을 살상포로하고 가옥과 알곡을 소각하고 개선하였다. 1433년 원정후 려연과 강계중간에 자성군을 설치하여 두 군의 련락을 짓게 하고 방비를 강화하게 한 세종은 1440년에는 려연 동쪽에 무창현(김형직군 무창리)을 설치하고 2년후에는 군으로 승격시켰으며 1443년에는 려연, 자성 중간지대에 우예군을 설치하였다. 1416년에 설치된 려연군까지 포함한 이 4개 군이 설치됨으로써 변경의 방비를 더욱 강화할수 있게 되였다. 또한 이 4군의 설치는 오늘의 조선과 같은 령역을 확정해놓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였다. 세종왕은 한편 동북방에서 녀진침입자들을 몰아내고 령토완정을 이룩하는 공을 세웠다. 고려말, 리조초부터 동북방 두만강류역까지는 이미 우리 나라의 령역으로 되여있었다. 고려말에 길주만호부가 설치되여있었고 리왕조를 세운 리성계와 그의 아버지가 이 지역에서 《무공》으로 《위엄》을 떨치여 건국직후 령역은 두만강하류까지 미치고있었다. 1393년 8월 동북면도안무사 리지란이 공주와 지금의 갑산인 갑주에 성을 쌓아 다스렸고 1398년에는 동북면선무순찰사 정도전이 파견되여 주, 부, 군, 현의 경계를 확정하고 부를 공주에 두고 처음으로 경원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1406년 2월 녀진의 한 부족인 혐진올적합이 경원 소다로에 침입하였고 1410년 2월에도 올량합과 결탁하여 경원부에 침입하였다. 아군의 반격으로 격퇴되고 추장까지 피살되자 적들은 각 부가 련합하여 경원에 침입하였다. 조정론의끝에 부를 경성으로 후퇴시키기로 하였고 공주에 있는 두개 릉도 함흥으로 옮겼다. 태종은 경원부를 옛땅에 다시 두려고 하면서 먼저 부거로 전진시켜 설치하게 하였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녀진의 침입이 계속되자 1422년에는 부를 다시 룡성으로 후퇴시키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이에 강하게 반발한것은 김종서였다. 그는 북변의 정황과 방비와 관련된 계책을 올리면서 부를 후퇴시켜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세종은 이에 찬성하면서 《조종의 강토를 줄일수는 없다. 땅을 개척함은 조종의 뜻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오히려 조정의 결의로 북쪽으로 전진하여 경원부를 1428년에 횟가(새별읍)로 옮기고 1432년에는 석막(부령)에 령북진을 설치하게 하였다. 세종은 국토회복의 포부를 안고 김종서를 함길도 도절제사로 임명하여 동북방개척을 추진시키게 하였다. 이것은 녀진족내부에서 일어난 분쟁을 좋은 기회로 여긴 세종이 황희, 맹사성 등 신하들과 의논하여 내린 결단이였다. 세종의 적극적인 비호를 받은 김종서의 노력에 의하여 1434년에는 백안수소(회령시 행영리)로 녕북진이 옮겨지고 회령도호부로 승격되였으며 1435년에는 공주(은덕군 고읍)에 공성현이 설치되였다가 1437년에는 경흥군으로 개편되였다. 그해 회령도호부 동쪽의 400호를 떼내여 백안수소에 종성군을 새로 내왔고 1440년에는 수주(온성군 종성구)로 옮겨졌으며 그 북쪽의 다온평에는 온성군을 설치하였다. 1446년에는 갑산 서북부에 삼수군을 내왔고 1449년에는 이미 1428년 부거에 설치하였던 부거현을 석막으로 옮기고 부령도호부로 격을 높이였다. 이리하여 15세기 40년대말까지 경흥, 경원, 온성, 종성, 회령, 부령 등 6개 진이 두만강 남쪽연안지대에 설치되였다. 이것은 세종의 통치년간에 이룩된 가장 큰 공적이였다고 할수 있다. 세종은 령토완정만이 아니라 문화의 발전을 이룩하고 국력을 강화하기 위한 사업에서도 공적을 남겼다. 여기에서 우선 취급해야 할것은 집현전의 설치와 인재의 배양이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그자신이 총명한 군주로서 인재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던 세종은 집권 다음해인 1420년에 고려에 그 연원을 둔 집현전을 다시 내왔다. 집현전은 일종의 학술연구기관으로서 국내의 수재들이 모여 경전을 위주로 하면서 여러 분야의 학술적인 문제들을 연구하고 서적을 편찬하기도 하는 두뇌기지였다. 수재로 집현전에 들어간 선비들가운데서 10명은 경연(왕에게 강독하는 곳), 10명은 서연(세자에게 강독하는 곳)의 직무를 맡아보았다. 그리하여 학사들은 매일 여기에 출근하여 고전을 연구하기도 하고 론쟁도 하면서 일관이 시간이 되였다고 하기 전에는 퇴근하지 못하였다. 세종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집현전의 유신들을 교대로 숙직하게 하고 두터운 대우도 해주었다. 바로 이 집현전에서 성삼문, 최항, 박팽년, 리개, 하위지, 류성원, 량성지, 신숙주, 정린지, 신석견(후에 신석조로 고침.) 등 수많은 유명한 재사들이 배출되여 나라의 문화발전과 국력강화에 이바지하였다. 세종이 품들여 키운 인재들의 노력과 세종의 직접적인 지도에 의하여 가치있는 성과작들이 련이어 출현하게 되였다. 오늘도 사람들이 즐겨 외우며 세종시대의 자랑으로, 문화사적공적으로 전해가는 창조물들의 일부를 아래에 펼쳐보인다. 1420년 11월 세종은 공조참판 리천에게 활자를 새로 주조하게 하였다.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제일먼저 금속활자를 주조하였다는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더 좋은 책을 더 많이, 더 빨리 출판하게 하려는 세종의 이 요구에 응하여 재능있는 우리 기술자들은 아주 정교하고 빈틈없는 새로운 활자를 만들어냈다. 이것이 바로 《경자자》이다. 세종은 1421년에 리천과 남급에게 동판을 고쳐 주조하도록 하였다. 이번에 만든것은 글자모양과 서로 들어맞도록 하여 용랍이 없어도 식자가 정확히 되였다. 책을 찍는 사람들이 편리해하였는데 하루에 찍어내는 량도 20여장이나 되였다. 이로부터 찍어내지 못하는 책이 없게 되니 문화는 날로 발전하고 세상은 더욱 륭성하게 되였다고 한다. 세종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1434년에 리천에게 지시하여 옛 활자(큰자)를 고쳐 주조하도록 하였는데 경연에 소장된 《효순사실》, 《론어》 등 책들을 밑글로 삼고 부족되는것은 수양대군(후의 세조)에게 씌워 20여만자를 주조해냈다. 이것이 바로 《갑인자》라고 하는것이다. 하루에 인쇄량이 40여장인데 글자모양이 정밀하고 인쇄능률이 전에 비해 배나 늘어나 이것으로 인쇄된 책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 세종은 력사를 비교적 사실주의적으로 수록한 《고려사》를 만들어내도록 하였다. 건국직후 정도전과 정총 등은 고려의 력사를 편찬하면서 리색과 리인복이 쓴 《금경록》에 의거하여 37권으로 편찬하였다. 그런데 정도전은 원왕이하의 사료에는 참람된것이 많다고 하면서 《종》(宗)은 《왕》(王)으로, 《절일》(節日)은 《생일》(生日)로, 《짐》(朕)은 《여》(予)로, 《조》(詔)는 《교》(敎)로 바꾸어놓았다. 즉 고려가 황제국가의 징표로 사용하던 호칭들을 한급 낮은 왕급으로 교체해넣은것이다. 1418년에 임금이 류관과 변계량을 시켜 교정하게 하였으나 이때도 《태자》는 《세자》, 《태자비》는 《세자빈》, 《제, 칙》은 《교》로, 《주》(奏)는 《계》(啓)로 고치였다. 이것 역시 우와 같은 사정에서 력사를 심히 외곡한것이였다. 력사를 맡은 관리들인 리선제, 량봉래 등이 변계량에게 항의하였으나 그는 듣지 않고 임금에게 전달하게 하였다. 세종은 력사를 사실대로 기록하게 하였다. 변계량이 우기자 정도전이 고친것까지 포함하여 몽땅 이전의 글대로 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1424년 8월에 원종이전의 사실을 당시 실록원문에 따라 기록한 《수교고려사》가 편찬되게 되였다. 이후 세종은 1442년에 인쇄까지 된 새 고려사에 아직도 공정하지 못한 부족점이 있다하여 반포를 중지시키고 그것을 집필한 사관에게 형벌까지 가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세종 다음 왕인 문종대에 오늘날 우리가 보게 되는 《고려사》가 김종서, 정린지에 의하여 편찬되게 되였던것이다. 우리가 자랑하는 조선글자 《훈민정음》의 창제는 세종의 문화적업적가운데서도 가장 큰것이라고 할수 있다. 최항, 성삼문, 정린지, 신숙주 등이 이 훈민정음의 창제에 관여했다고 하지만 그 직접적인 발기자, 창제자는 세종이라고 한다. 그는 궁중에 정음청을 설치하고 여러 학자들과 고심참담한 노력을 기울여 1443년 12월(양력 1444년 1월) 《훈민정음》 28자를 창제하였다. 그리고 3년후인 1446년 9월에 《훈민정음해례》를 발표하였다. 이 독특한 우리 글자의 창제는 세종의 깊은 연구와 고심참담한 노력과 함께 그의 웅심깊은 생각과 단호하고 완강한 의지의 산물이라고 할수 있었다. 세종은 나라마다 모두 자기의 문자가 있어서 제 나라의 어음을 기록하는데 오직 조선만이 고유한 문자가 없으니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하였다. 또 관료들이나 지식층에서만 사용하는 한자나 관공문서에 쓰이는 리두문자 같은것을 일반백성들은 널리 통용하지 못하므로 자기 심정을 터놓지 못하는것이 많으니 이를 민망하게 여긴다고 하였다. 바로 이것이 세종이 새로 28자를 창제하게 한 기본동기였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세상에 발표하기 전에 《룡비어천가》(리왕조 조상들의 사적을 기록한 가사)를 지어 실지 은을 낼수 있는가를 확인해보게 하였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널리 사용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책까지 취하였다. 세종은 우선 정음의 창제와 보급을 반대하여나서는 관료들에 대하여 강경히 대응하였다. 집현전의 최만리, 신석조, 정창손, 하위지 등은 국문창제가 아무런 의의도 없고 유해로운것이라고 하였다. 최만리 등이 올린 정음반대상소를 받아본 세종은 몹시 불쾌하여 《너희들이 음으로 글자를 합치는것은 모두 옛적것에 위반된다 하는데 설총의 리두는 이 음이 아니고 무엇이냐, 운서의 사성칠음자모를 과인이 바로잡아놓지 않으면 누가 하겠느냐, 과인이 앞서도 정창손에게 말하기를 국문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하여 널리 민간에 돌리여 백성들 누구나 다 알아보게 하고싶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창손의 말은 삼강행실반포후에 아직 충효의 소행이 많이 나타나지 않으니 사람의 행위는 자질여하에 달린것이요, 이를 꼭 국문으로 번역한 뒤에라야 효과가 있겠는가고 하니 이것은 선비된 자의 말이 아니다.》라고 추궁하였다. 세종은 상소한 자들을 모두 의금부에 가두었다가 놓아주게 하고 정창손만은 파직을 시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앞뒤말이 맞지 않는다 하여 김문에게는 심문을 진행하도록 하였다. 세종은 또한 자기가 직접 새 글자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는 정음을 발표한 1446년 10월에 대간의 죄를 렬거하는 문건에 정음을 썼다. 세종은 새로 만든 국문으로 서적을 간행하는 사업도 적극 추진시키게 하였다. 그의 관심하에 《룡비어천가》에 이어 《동국정운》, 《석보상절》(석가모니일대의 사적), 《월인천강지곡》(석가모니에 대한 찬송), 《농잠서》 등과 유교 및 불교경전들의 번역본들이 출판되였다. 1446년에는 훈민정음을 아천시험과목으로 정하도록 하였다. 세종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도 깊은 관심을 돌렸다. 그는 1432년에 천체관측기구, 기상관측기구에 큰 흥미를 가지고 문화사적의의를 가지는 많은 성과물들을 내놓게 하였다. 그는 이러한 기구와 관련된 고전들을 조사하게 하고 리천과 장영실에게 그 제작을 맡아보도록 하였다. 7년간의 고심참담한 노력끝에 1438년에 간의대(관측시설), 흠경각, 혼의, 앙부일구(해시계), 자격루(물시계) 등이 생겨나게 되였다. 이것들은 모두 세종이 구상한것으로서 여러사람들은 헤아리지 못하고 오직 장영실만이 기이한 재주로 그의 뜻을 헤아려 한껏 기교를 부렸다 한다. 그리하여 그때 사람들은 《박연과 영실은 사실상 대왕의 성대한 제작을 위하여 시대에 응하여 태여난 사람이다.》라고까지 말하였다. 세종은 1433년에 직접 고금의 천문도를 참고하여 새로운 천문도를 만들어 돌에 새기게 하였으며 정린지 등에게 여러 력서를 참고하여 직정산내외편을 편찬하게 하였다. 그리고 력관을 백두산, 마니산(강화도), 한나산(제주도)에 파견하여 북극의 고도를 측정하게 하였다. 이가운데서도 특별히 이야기할수 있는것은 1442년도에 동으로 측우기를 만들어 서운관에 두게 한것이였다. 이것은 강우량을 측정하는 기구였다. 세종은 꼭같은 기구를 각 도, 각 읍에 나누어보내여 국내각지의 강우량을 명확히 재게 하였다. 측우기의 발명은 참으로 세계적인것이였다. 유럽에서는 1639년 이딸리아인 베네데토 카스텔리에 의해 6월에 강우량을 기구로 처음 측정하였다고 한다. 세종은 악곡에도 깊은 조예를 가지고 당시 음악의 대가로 불리우던 박연과 함께 조상전래의 악곡들을 정리하고 아악을 새로 창제하였으며 정대업, 보태평, 발상, 여민악, 봉황금 등의 새로운 악곡들을 제작하였다. 세종이 새로운 악기를 만들게 하고 중국의 악기소리와 대조해들으면서 좋은 점과 잘못된 점을 가려낸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처럼 세종은 집권기간 령토완정을 이룩하고 동방문화의 보물고를 풍부히 하였으며 세계문화사에 특기할만 한 공적을 쌓아올렸다. 그는 이밖에도 백성들의 곤난한 처지에 어느 정도 관심을 돌리고 그 해결책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우리 나라의 민생가운데 곤궁한 자가 어이 없을가보냐, 과인이 궁중에서 나서자란 까닭에 인생의 고난을 하나하나 알지 못하고있다.》 《자손들이 깊은 궁중에서 자라다보니 농사짓는 고충을 알지 못한다. 참으로 탄식할만 한 일이로다.》 세종의 이 말들에 어느 정도 진심이 깃들어있는가는 제쳐놓고라도 그는 궁한 처지의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대책들을 취하게 하고 지방관들로 하여금 구제사업에 힘쓰게 하였으며 매해 봄에 쌀을 꿔주었다가 가을에 가서 받아들이는 환곡법을 철저히 시행하게 하였다. 그는 자주 농사를 장려하고 1423년에는 금속화페인 《조선통보》를 주조하게 하고 재인, 화척들의 신분차별에 대한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그들의 신분명칭을 《신백정》으로 고치고 그들이 량인임을 재확인하였다. 세종은 《도천법》이라는것을 과거시험외에 별도로 제정하여 각 도 관찰사들이 덕행과 재주가 있는 뛰여난 자들을 추천하게 하고 고을장관들의 임기를 《6기》 즉 6년으로 하는 법을 제정하여 임기중에 자주 옮기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토지제도와 권세법을 개정하여 토지는 비옥도에 따라 6등분하고 매해의 수확은 9등분으로 나누어 납세하도록 하였다. 세종은 사람들에게 함부로 형벌을 가하는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법관들에게 될수록이면 죄를 경감시켜 원한을 품는 자가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3복》의 법을 제정하여 사형에 처해야 할 대상이라도 반드시 세번 반복하여 심문하게 하였다. 특기할만 한것은 1444년에 《노비는 비록 천한 자이나 역시 하늘이 낸 백성이라 어찌 함부로 무고한 자를 죽일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노비에게 죄가 있더라도 관부에 알리지 않고 제 마음대로 죽이는 자에 대해서는 법률에 의거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노비는 사람으로 치지도 않던 당대 사회에 있어서 이런 규제령을 내린것만 보아도 세종의 소위 《민본정치》의 일단을 엿볼수 있다. 세종은 나라의 군력을 강화하기 위한 사업에도 관심을 돌렸다. 그는 군사훈련, 무기제작, 도성과 지방(특히 연해지방)성보의 수축, 병선의 개량, 병서의 간행을 꾸준히 밀고나가게 하였다. 그는 신하들이 백성들의 페해를 말하는 경우 군사적대책을 강구하는것은 조종의 뜻이고 선왕이 정한 제도이며 중대한 사업이라 페하여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직접 금갑옷을 입고 열병식도 사열하고 사냥도 정기적으로 하였다. 새로운 화포의 제조와 조선의 력대 전쟁사를 취급한 《동국병감》편찬(세종대에 시작하여 다음왕인 문종대에 완성), 군사훈련의 강화를 위하여 《진도》, 《진설》을 출판하여 각 도에 배포하는 사업 등 군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세종은 계속되는 조치를 취하였다. 1421년부터 중앙관청들도 《진도》를 연습시키도록 하였다. 군사를 사열하는 날 모든 관리들은 중위의 5소에 나누어 소속되는데 의정부, 돈녕부, 제군부, 리조, 병조, 승정원, 사헌부, 사간원 3군진무소는 각기 자기 관하의 관청을 거느리고 중소에 소속되고 례조는 자기 산하관청을 거느리고 좌소에 소속되며 형조는 우소에 호조는 전소에 공조는 한성부와 함께 후소에 소속되도록 하였다. 세종은 군사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군사훈련을 강화하기 위하여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궐안에 무관들의 활쏘는 곳을 꾸리게 하였다. 새로운 문물제도의 확립과 국력을 강화하기 위한 사업에서 이룩한 세종의 공적들은 민족사의 한페지를 빛나게 장식하고있다.
3. 세종의 인재등용
확실히 세종의 정치는 당시로서는 성공적이라고 볼수 있다. 그러면 그 성공의 비결은 무엇인가. 과연 세종 혼자서 그 거창한 사업들을 해낼수 있었겠는가. 강력한 두뇌진이 세종의 고문이 되고 손과 발이 되여 그의 정치를 보좌하였다. 또 그 두뇌진들을 찾아내고 아낀데 세종의 성공의 비결이 있는것이다. 세종은 인재를 얼마나 중시하였는가. 세종은 태종에게서 왕위를 넘겨받은 그해(1418년) 11월 3일 첫 사업으로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에게 12항목으로 된 지시문을 내려보내게 하였다. 거기서 그는 재주와 덕행을 가지고도 민간에 파묻혀있으면서 출세를 바라지 않는 선비들을 감사들이 두루 찾아서 보고할데 대한 항목을 따로 쪼아박았다. 세종이 인재를 중시한 사실은 천인이였던 장영실을 궁중에 불러들여 자기가 구상한 사업들을 맡기고 크게 등용한 사실을 통하여 알수 있다. 장영실(14세기말-1450년)은 기생의 아들로 태여나 당시 사회의 가장 하바닥신분인 《관노》로 천대와 멸시를 받았다. 그무렵 세종은 천하지대본인 농사와 깊은 련관을 맺고있는 력을 정비하기 위하여 천문대의 건설에 착수하였다. 여기에 절실히 필요한것은 해시계, 물시계, 혼천의 등 기구였는데 제노라는 수많은 기능공들이 그의 뜻을 만족시켜주지 못하였다. 이때 한 대신이 경상도 동래에 뛰여난 기술을 가진 노비가 있는데 사람들의 칭찬이 대단하다는 보고를 하였다. 세종은 몹시 기뻐하며 사람을 시켜 알아보게 하였다. 소문그대로였다. 세종은 곧 장영실을 궁성으로 불러올려 천문대건설에 참가시키려고 하였다. 하여 여러 대신들의 의논에 붙였다가 강한 반대에 부닥치게 되였다. 노비를 사람취급하지 않던 당시 사회에서 이것은 너무도 응당한 귀결이였다. 세종은 장영실을 꼭 불러올리려고 상왕인 태종에게 말하고 도움을 청하였다. 태종의 도움으로 장영실은 등용되여 궁정기술자로 되였다. 그는 세종의 기대대로 천문대건설에 필요한 많은 기구들과 정교한 금속활자, 세계적인 발명품인 측우기 등을 만들어내고 력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장영실이 만든 자동물시계인 《자격루》가 얼마나 정교한것인가 하는것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1592-1598년 일본사무라이들에 의하여 강요된 임진조국전쟁을 겪으며 이 《자격루》는 심하게 파손되게 되였다. 여러 기술자들이 이것을 복구하려고 애써 노력하였지만 실패만을 거듭하게 되였다. 그러다가 1657년에 가서야 겨우 복구할수 있었다. 이것은 장영실의 뛰여난 재능을 보여주는 단적인 실례라고 할수 있다. 세종의 창발적인 지혜를 받아들여 기발한 재능과 창발성을 발휘함으로써 뜻을 만족시켜주는 장영실을 세종은 몹시 중히 여겼다고 한다. 세종은 장영실이 성과작을 내놓을 때마다 벼슬을 높여주고 큰상도 내리였다. 세종은 집현전을 설치하고 인재들을 뽑아올렸을뿐아니라 그들을 지극히 대해주었다. 그들은 일찌기 들어가고 늦게야 물러나오는데 대궐문을 닫게 되여야 겨우 나오게 되였다. 아침저녁과 같은 끼니때에는 내시들을 보내여 대접도 하게 하였다. 세종은 그렇게 하면서도 문학이 더 발전하지 못할가봐 념려하여 그가운데서 나이 젊고 총명한 사람들을 뽑아서 절에 올라가 글을 읽게 하였다. 그들에 대한 공급은 풍성하였다. 한번은 세종이 심부름군을 보내여 집현전에 가서 당직학사가 무엇을 하는지 보고 오라고 한적이 있었다. 그가 돌아와 신숙주가 초불을 밝히며 책을 보고있는 모양을 보고하였다. 세종은 그의 말을 듣고 자신이 직접 가보았는데 보고한 그대로였다. 신숙주는 밤새껏 책을 읽고 닭이 울녘에야 잠자리에 누웠다. 세종은 기뻐하며 자기가 입고있던 돈피로 지은 잠옷을 벗어주며 잠이 깊이 들기를 기다려 그에게 덮어주도록 하였다. 세종의 인재중시와 관련된 이러루한 일화들은 적지 않다. 세종은 신하들이 큰 죄를 저질렀다 해도 그에게 자그마한 공이라도 있으면 그 공을 아껴 극형에 처하는것을 거절하였다. 병조판서를 지낸 조말생의 처벌제의를 묵살한것은 그 대표적실례의 하나이다. 그는 세조 즉위 초년에 병조판서를 지내면서 태종과 세종의 뜻대로 쯔시마원정을 가장 강하게 주장하고 실무적인 사업을 처리한 공로있는 대신이였다. 그런데 그는 지나친 탐오행위로 하여 1426년 5월 강직되게 되였다. 그 탐오정도가 너무 한심하여 극형론의까지 제기되였다. 세종은 다른 처벌은 그만두고 먼 지방에 거주제한을 시키는 동시에 탐오한 물건을 관청에서 몰수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관료들은 계속 처벌을 제기하였다. 세종은 시끄러울 정도로 제기되는 처벌제의를 모두 묵살해버리였다. 그는 조말생이 한심한 정도로 탐오행위를 하였으니 그 죄로 보아 응당 죽여야 하겠지만 나라에 공로도 있고 하니 죽일수는 없다, 더구나 재상을 죽이지 않는다는것은 이미 조상의 법으로 되여있는것이 아닌가고 하면서 극력 변호해주었다. 이것은 조말생에게만 국한된 사실이 아니다. 하기에 옛사람들도 세종의 대에 사대부들가운데 극형을 당한 자가 없었다고 하였다. 물론 세종이 이러한 관용을 베푼것은 정치의 성공을 바라서였다. 그 역시 인민대중우에 군림한 착취계급의 한사람이였다. 그가 과연 피착취근로대중의 운명까지도 지켜주었던가. 1442년 작업과정에 실수한 장영실을 불경죄(임금을 존경하지 않은 죄)로 몰아 태형 100대를 치고 관직에서 몰아낸 사실은 그의 계급적제한성을 여실히 보여주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재를 중시한 세종의 정책은 효력을 나타내여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여러 분야의 성과가 여기에 기인된것이다. 리조 9대왕인 성종때에도 문사들에 대한 은총과 영화가 지극하였지만 문학으로 명성을 얻은 사람은 세종시대처럼 그렇게 성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리조 500년력사에 세종시대만큼 훌륭한 인재들이 배출된 시대는 찾아보기 힘들다. 명재상 황희, 허조, 문무를 겸비한 명재상 최윤덕, 김종서, 충효를 겸전한 성삼문, 박팽년, 리개, 류성원, 하위지, 세조때 명성을 떨친 정린지, 신숙주, 재능있는 기술자들인 리천, 장영실, 유명한 음악가인 박연 등은 그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세종은 총명과 함께 이 재사들의 힘을 입어 통치 32년간을 성공적으로 수놓을수 있었던것이다.
총명으로 왕좌에 올라 부왕의 보살핌속에 자기 정치의 첫걸음을 뗀 세종, 나라의 원쑤들에게 무자비하고 조상의 땅을 확정하여 후대에 길이 전할 군사적업적을 쌓은 세종, 내정을 개혁하고 새로운 문물제도를 확립하며 문화적발전을 이룩하고 국력을 강화한 그의 공적은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아있다. 특히 오늘 우리가 쓰는 조선글자를 처음으로 독특하게 만들어내여 보급시킨 그의 공로는 민족의 자랑으로 된다.
31) 일화가 많은 명재상 황희
세종때 그의 인재중시로 하여 많은 명사들이 배출되고 민족사에 자기의 이름을 남겼으니 그가운데는 령의정을 지냈던 황희도 있다. 황희(1363-1452년)는 장수현사람으로서 처음 이름은 수로이고 자는 구부, 호는 방촌이며 시호는 익성이다. 그의 아버지는 판강릉부사를 지낸 황군서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알려졌고 5살이 되여서는 총명이 뛰여나 보는 족족 기억하니 아는 사람들은 그가 큰 사람이 되리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다. 14살이 되는 해에 음직으로서 안복궁륵사가 되였고 21살에 사마시를 거치고 23살에는 진사시를 치르었다. 황희가 26살이 되던 해에 부친이 충주로 전직되여나가자 그는 따라가 여가시간에 학문을 탐구하고 낮에 밤을 이어 부지런히 경전을 읽어 깨치지 못한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정치적생애의 밑천으로 된 풍부한 지식은 대체로 이때에 마련된것이였다. 황희는 27살에 문과시험에 합격하고 다음해에 성균학관이 되여 발전의 길이 열려있었으나 당시 고려의 국운은 쇠퇴되여가고있었다. 그는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은퇴하여 적성훈도가 되였다. 리왕조가 수립된 후 다시 벼슬길에 나선 황희는 30살부터 46살사이에 정자, 교관, 경력, 사간대언 등의 직을 력임하였다. 그러나 그의 재능에 비하여 벼슬은 그리 높지 못하였다. 그의 정치적수완은 47살에 지신사로 임명되여서부터 남김없이 발휘되였다. 그의 전임이였던 박석명은 오래동안 지신사로서 국가의 기밀을 맡고있다가 내놓으며 태종에게 황희를 천거하였다. 황희는 지신사가 되여 국가기무를 맡아보았는데 태종은 12일만 보지 못해도 그를 불러 이 일은 나와 경만이 아는것이니 루설되면 나 아니면 경이라고 하면서 믿음을 주었다. 그후 황희는 형조, 병조, 호조, 공조, 례조 등 6조의 판서를 력임하고 그사이에 대사헌, 지의정,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신, 참찬, 평안도순문사, 한성판사로도 임명되였다. 1410년부터 1418년사이에 황희가 리상적정치로 구상하던 문물제도가 정비되였다. 《경제륙전》의 제정, 병마의 점검과 군사력강화조치, 농사와 누에치기의 장려, 《고려사》개작, 30여종의 례법제정 등 리조일대의 제도와 례악을 완성하였다. 리조의 문물제도확립에 분투하던 황희는 뜻하지 않는 곡절을 겪게 되였다. 1418년 태종은 세자인 양녕대군을 밀어내고 새 세자를 세우려고 하면서 황희에게 의견을 물었다. 황희의 생각은 복잡하였다. 예나 지금이나를 막론하고 맏이를 밀어내고 동생을 세우는것은 후날에 화란을 불러오는 경우가 많았기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세자가 비록 덕을 잃었으나 나이가 아직 젊어서 기가 뻗칠 때여서 그럴수 있으니 큰 과실은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태종은 자기의 뜻과 어긋나는 이 대답을 듣고 격분하였다. 그는 황희가 전에는 여러 민씨(세자의 외척)를 제거하자고 주장하더니 지금은 세자를 옹호하고있다, 이것은 세자에게 붙어 민씨의 원한을 풀어 후날에 총애를 굳히자는 뜻이라고 하면서 그를 신임하지 않고 한성부판사로 좌천시켰다가 얼마후에 공직에서 추방하여 서인으로 만들어버렸다. 남원에 내려간 황희는 59살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5년동안 독서와 글쓰기로 한가한 나날을 보냈다. 그후 태종은 황희를 불러 직첩을 주고 세종에게 곧 등용하라고 하였다. 세종대에 황희는 령의정이 되여 국정을 보좌하고 문물제도확립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국정의 기본제도가 이때에 마련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가 정승으로 있은 20년간 정부의 무게가 그로 인하여 올라갔고 그는 리조 500년사에 첫째가는 령의정으로, 명재상으로 일러주게 되였다. 그가 90살의 고령으로 죽던 날 조야가 모두 놀라며 하늘이 우리 현상(현명한 재상)을 빼앗아갔다고 슬퍼하였다고 한다. 그가 세종을 도와 큰 공을 세웠다는것은 죽은 후에 세종의 릉에 배양된 5명의 신하(령의정 황희, 령중후 최윤덕, 좌의정 허조, 좌의정 신개, 리조판서 리수)가운데 한사람이였다는 사실로써도 잘 알수 있다. 오래동안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 임금과 신하들에게 큰 미움을 사지 않고 비교적 무난하게 자기의 정치적목적을 달성한 황희는 유명한 일화들도 많이 남겼다. 황희의 성격은 상당히 느슨하고 온건한것이 특징이였는데 그가 이렇게 된 리유를 전해주는 이런 일화가 있다. 황희가 고려말기 적성훈도로 있을 때 송경으로 가던 길에 한 늙은 로인을 만나게 되였다. 그 로인은 누런 소와 검은 소 두마리로 밭을 갈다가 방금 연장을 벗겨놓고 정자나무그늘아래서 쉬고있었다. 황희 역시 그의 곁에서 말을 쉬우면서 로인과 더불어 서로 이야기를 하게 되였다. 《소 두마리가 모두 비대하고 건장한데 밭가는 힘도 역시 우렬이 없는가요?》 이렇게 묻는 황희의 말을 듣자 로인은 얼른 곁에 다가와 《어느 빛갈 가진 소가 낫고 어느 빛갈 가진 소는 못하오.》라고 소곤거렸다. 황희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로인께서는 왜 소를 그렇게 꺼리여 귀속말을 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로인은 몹시 실망하는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도 모르오. 그대는 나이 젊고 들은것이 없는 까닭이요. 짐승이 비록 사람의 말은 모른다 해도 좋다 나쁘다는 말은 알아듣는다오. 만일 제가 남만 못하다는것을 듣게 되면 마음의 불평이 어찌 사람과 다르리요.》 황희는 로인의 이 말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는데 한생 겸허하고 관후한 도량은 실로 이 말로부터 이루어진것이라고 한다. 황희의 이러한 넓은 도량을 보여주는 이런 이야기들도 있다. 그는 령의정이 된이래 말과 얼굴에 기쁨과 노여움을 나타낸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비복들에 대해서도 은혜와 의리로써 대우하며 매질을 해본적이 없었다. 자기가 귀여워하는 몸종이 젊은 남종과 보기 민망할 정도로 노는것을 보고도 웃을뿐이였다고 한다. 그는 늘 평소에 《노복들도 같은 사람이다. 어찌 혹사하겠느냐.》라고 말하고 이런 뜻을 글로 써서 자손들에게 남기기까지 하였다. 한번은 그가 후원을 거닐 때 이웃의 장난군애들이 후원안의 배나무에 돌을 던졌다. 무르익은 배가 땅에 가득 떨어졌다. 황희가 큰소리로 시종을 부르자 아이들은 겁이 나서 달아나 의슥한 곳에 숨어 엿보았다. 황희는 종에게 광주리를 가져오라고 하여 배를 주어담아 그 애들의 집에 가져다주었을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선비가 장원급제하고 정언이 된 인사차로 왔을 때 시녀가 음식을 차린 소반을 들고 들어와 황희에게 기대고서 술을 치라는가고 물었다. 황희가 기다리라고 하자 시녀는 왜 그렇게 늦추는가고 볼멘소리로 두덜거렸다. 황희는 빙그레 웃으며 상을 차리게 하였다. 그러자 어린아이 두어명이 달려들었다. 모두 헌옷에 맨발로 매달려 어떤 애는 수염을 잡아끌고 어떤 애는 옷을 짓밟으며 상에 놓인 음식을 모두 움켜먹었다. 아이들은 공을 이리저리 때리는것이였다. 황희는 《아야! 아야!》 하고 웃을뿐이였다. 그 애들은 모두 노비의 아이들이였다. 봉건시대에는 찾아보기 힘든 《너그러운》 정치가 황희였지만 자식들에게는 매우 엄격하였다. 황희의 아들 황수신이 젊었을 때 한 기생에게 깊이 정들어있었던적이 있다. 황희가 아들을 준렬히 꾸짖었지만 그는 애정을 일조에 끊어버리기 아쉬워 여전히 기생집을 찾아다니군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황수신이 여느 날과 같이 집에 돌아왔을 때 황희가 의관을 차리고 아들을 맞아들이는것이 마치 귀한 손님을 영접하는것 같았다. 웬일인지 모르는 수신은 너무도 놀랍고 송구하여 땅에 엎디여 연유를 물었다. 황희는 《내가 아들로서 너를 대하였더니 너는 듣지 않는구나. 이는 나를 아비로 여기지 않는것이니 지금 나는 손님에 대한 례로써 너를 대할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하였다. 황수신은 땅에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고 그후 기생을 더는 찾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후 말이 습관대로 취한 수신을 싣고 기생집으로 향한적이 있었는데 그는 단호히 검을 빼여 말머리를 베여죽였다고 한다. 황희의 정치적재능을 보여주는 일화로서 파랑새이야기가 전해온다. 동북면에 6진을 개척할 때 비밀이 자주 새여나가 극비에 속하는 지시가 현지에 내려가기 전에 벌써 그곳에서는 다 알고있는 판이였다고 한다. 세종은 그 원인을 해명할 과제를 황희에게 주었다. 정치적감각이 예민한 황희는 그 원인을 대체로 짐작하고있었다. 어느 날 황희는 뒤간에 갔다와 근심스러운 낯빛으로 안해를 마주하였다. 그의 처는 어째서 그러는가고 물었다. 황희는 어데 가서 절대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고 방금 변소를 보는데 파랑새 한마리가 나와 날아갔다고 하였다. 황희의 처는 혼자 있으면 너무도 기이한 일이라 때로 허구픈 웃음을 짓군 하였다. 그의 시녀가 묻자 황희의 처는 어데 가서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며 남편이 한 이야기를 하였다. 시녀는 또 그대로 어데 가서 이야기하지 말라면서 자기 남편에게 말하였다. 남편은 또 그대로 주막집에서 자기 친구에게 그렇게 이야기하였다. 이렇게 황희의 뒤로 파랑새가 나왔다는 이야기는 순식간에 여기저기에 퍼져 대궐안에까지 들어갔다. 세종은 황희를 불러 그 연고를 물었다. 그 자리에서 황희는 그것은 자기가 꾸며낸것으로서 나라의 비밀이 바로 이렇게 새여나가고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바로 궁중에서 비밀단속을 못하고 루설시키는 장본인인 세종에 대한 은근한 비판이였다. 이야기의 뜻을 알아차린 세종은 그후 비밀보장에 류의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황희의 정치적수완을 보여주는 이야기들가운데 한토막이다. 황희는 선견지명있는 정치가로서 장래 봉건정부의 중견력량을 꾸리는데도 깊은 주의를 돌렸다. 그는 당시 6진개척으로 명성을 떨치고 문무를 겸비한 대신으로 임금의 총애를 받던 김종서가 과오를 범하면 되게 꾸짖거나 매질까지 하였다. 하루는 맹사성이 명성이 자자한 종서에게 너무하지 않는가고 물은적이 있었다. 황희는 종서가 성격이 강의하고 기질이 날카로우며 일을 함에 있어서 과단성이 있으니 후날 우리들의 지위(재상)에 있을것이라 스스로 신중하지 않으면 꼭 일을 그르칠수 있으므로 그 성격과 기질을 다스려주고 일을 경솔하게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은퇴하면서 김종서를 추천하여 자기를 대신하도록 하였다. 세종시대 《태평성세》를 이룩해놓는데 기여한 황희, 그는 퇴임하여서도 허조와 함께 임금이 수시로 불러 정국을 의논하였으므로 항상 옷을 벗지 못하고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총명과 넓은 도량으로 수십년간의 정치생애를 빛나게 장식한 황희, 그의 성격에는 일부 보신주의적인 면모도 엿보이지만 리왕조의 건국초기 그 정치제도와 경제제도를 완비하고 발전의 기초를 축성하는데서 세운 공로는 그가 남긴 의미있는 일화들과 더불어 오래도록 전해질것이다.
32) 출장입상의 재능을 보여준 최윤덕
세종시대에 배출된 수많은 명사들가운데는 나가서는 장수요, 들어와서는 명재상의 재능을 보여준 최윤덕도 있다. 그는 세종을 위하여 특출한 공을 세운것으로 하여 세종릉에 배향된 다섯 신하가운데 한 사람이였다. 최윤덕(1376-1445년)의 자는 백수 또는 여화이며 호는 림곡이고 본관은 통천이다. 그는 1410년에 무과에 합격하여 후에는 우찬성, 평안도 도절제사와 안주목사를 력임하고 나중에는 우의정, 좌의정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1419년에 3군 도절도사로서 리종무를 도와 쯔시마원정을 승리적으로 진행되게 하였으며 1433년 4월에는 파저강 건주위녀진정벌을 성공적으로 조직지휘하였다. 최윤덕은 15세기전반기 리조봉건정부의 요직에 있으면서 외적의 거듭되는 침입을 막고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에 어느 정도 관심을 돌림으로써 출장입상의 재능을 보여준 군사정치가이다. 그는 태여나 일찌기 어머니를 여의였다. 그의 아버지 최운해는 변방을 지킬 중임을 띠고있는 무관으로서 그를 키울수 없어 이웃에 사는 양수척(버들고리 만드는 자, 가죽신 만드는 자, 백정노릇 하는 자 등 천인들을 가리키는 말)의 집에 키워달라고 부탁하였다. 이것은 최윤덕이 최하층 사람들의 생활을 리해하고 그에 동정심을 품을수 있게 한 계기로 되였다. 최윤덕은 성장하면서 힘이 남보다 곱절이나 셌다. 그는 센 활로 굳은 물체도 잘 쏘아뚫었다. 그는 가끔 양수척을 따라 사냥을 나가군 하였는데 그가 잡은것이 오히려 더 많았다. 하루는 그가 혼자 가축을 몰고 산속에 가서 풀을 먹이고있었는데 숲속에서 별안간 범이 내달아 가축들이 모두 흩어졌다. 윤덕은 얼른 말을 타고 이를 쏘아 한살에 죽여넘어뜨리고 돌아와 양수척에게 《얼룩얼룩한것이 그 크기가 보통이 아닌데 도대체 이것이 무슨 짐승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이미 쏘아죽였소.》라고 하였다. 양수척이 곧 산으로 올라가보니 커다란 범이 쓰러져있었다. 양수척은 윤덕의 무예가 뛰여난데 경탄하면서 합포에 있던 그의 부친을 일부러 찾아가 칭찬하였다. 윤덕의 부친은 아들을 사냥을 통해 시험해보고 수법이 민첩은 하지만 아직 무예의 규범을 알지 못하니 그의 동작은 한낱 산지기의 기능에 불과하다, 그쯤한것을 무슨 장끼라 하겠는가고 하면서 그에게 쏘는 기술과 방어하는 방법, 병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리하여 윤덕은 명장으로 될수 있었다고 한다. 최윤덕의 명장으로서의 면모가 가장 잘 나타난것은 1433년 4월의 파저강 건주위녀진정벌이였다. 1432년 11월 29일 녀진족의 기병 400여명이 려연군(자성군)에 쳐들어와 주민 53명을 살해하고 77명을 랍치해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강계절제사 박초가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사로잡혀가던 우리 나라 사람 26명과 말 30마리, 소 50마리를 탈환해왔다. 하지만 이 과정에 우리측에서도 전사자 13명, 부상자 25명이 났다. 평안감사 박규로부터 장계를 받은 세종은 몹시 노하였다. 그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격으로 이번 사건을 당하고서야 초소마다에 돌성이나 목책을 세워야 하겠다고 의견을 내였다. 최윤덕은 그러는 임금에게 자기가 이미 생각하고 제기해온것이라고 하면서 빨리 지대를 선택하여 성을 쌓고 방비를 잘하여 백성들이 야인들에게 잡혀가지 않게 하는것이 소원이라고 하였다. 세종은 명나라사신들때문에 서북지방의 백성들이 더욱 지쳤기에 여직껏 쌓지 못하고있다고 변명하였다. 최윤덕은 《먼 후대에 가서 혹시 훌륭하지 못한 임금이 나게 되면 반드시 오랑캐들의 침입을 받아서 변방에 대한 걱정이 커질것이옵니다. 또 명나라사신은 오지 않는 해가 없는데 어떻게 사신이 오지 않는 때에 가서 쌓을수 있겠소이까.》 하며 안타까이 말하였다. 이것은 그가 변경에 성과 목책을 쌓는것을 당면한 문제로만이 아니라 먼 후날까지도 내다보고 제기하였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최윤덕은 성을 쌓는것과 함께 려연과 강계는 요해지인것만큼 무술에 능한 사람을 임명할것을 제의하였다. 한편 건주위녀진의 우두머리 리만주는 부하들을 시켜 붙잡아갔던 우리 사람 7명을 데리고 와서는 모든 죄행을 자기들과 적대관계에 있던 홀랄온 올적합에게 넘겨씌우고 저들은 오히려 조선을 위하여 노력하고있는듯이 요설을 피우게 하였다. 리조정부는 파저강 건주위녀진의 검은 속심을 꿰뚫어보고 이번 침입사건의 진범인이 바로 그놈들이라는것을 알아차렸다. 세종은 여러 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최윤덕을 평안도 도절제사로 파견하고 각 도의 수군과 륙군이 무예를 익히는 훈련을 강화할데 대한 지시를 내렸다. 이것은 최윤덕의 제의를 따른것이였다. 세종은 최윤덕에게 목책을 새로 만들고 군사를 초모하며 움직이는 일을 먼저 처리하고 후에 보고하게 하였다. 이것은 그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한것이였다. 세종은 파저강 건주위녀진을 정벌할 계획을 무르익히면서 한편으로는 사람을 보내여 놈들의 움직임을 엿보게 하였다. 전 소윤 박호문은 1433년 2~3월사이에 두차례에 걸쳐 건주위녀진에 파견되여가서 녀진인들의 전쟁준비상태, 력량, 지형과 도로 등을 탐지하였다. 1433년 3월 21일 그를 만나본 세종은 최종적으로 토벌결심을 내렸다. 그리고 최윤덕에게 죄악을 징벌하기 위해 군사를 출동시킨다고 하면서 장수의 직권은 이미 명령한것이니 그대로 행사하라고 비밀지시를 보냈다. 또한 중군절제사 리순몽, 좌군절제사 최해산 등 장수들과 군관, 군사, 백성들에게도 지시문을 내리여 장수의 명령을 성실히 받들도록 하였다. 겸하여 구체적인 사업세칙도 하달하였다. 리조정부에서는 원정군수를 처음에 기병과 보병 3,000명정도로 정하였다. 최윤덕은 정벌임무를 맡고 내려갈 때 정예한 군사 1,000명이면 족하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정세를 료해하면서 그의 초기의 결심은 달라졌다. 마천에서 올랄 등지까지는 야인들이 개짖는 소리나 닭우는 소리까지도 서로 들리는 거리의 산골짜기에 널려살고있으므로 한두마을만 친다면 반드시 서로 구원해줄것이므로 승패를 예측하기 어려울것이였다. 최윤덕은 큰 군사란 다시 출동시키기 어려운 일이므로 한번 동원된 기회에 최상의 성과를 거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대병을 동원하여 한두 마을마다 한개 부대씩 보내여 치게 한다면 야인들이 제 코도 씻기 바쁜 형편에서 언제 남까지 도와줄 겨를이 없게 될것이라고 하였다. 최윤덕의 이 각개격파전술은 조정의 승낙을 받았다. 최윤덕은 자기의 각개격파전술의 구체적인 안을 이렇게 제기하였다. 한 방면으로는 만포에서 떠나고 다른 한 방면으로는 벽동에서 떠나서 모두 올랄 등지로 향하고 또 다른 방면으로는 감동에서 떠나 마천목책 등지로 향하여 동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공격을 들이대게 하며 자기는 소보리에서 떠나 타납노할랄이 사는 곳을 향해간다는것이였다. 그는 이를 위해서는 군사가 최소한 1만명은 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더우기 야인의 땅은 험한데가 많으므로 수비하는 군사를 나누어 배치해야 하고 또 군수물자를 호송하는 군사들도 두어야 하였기때문이였다. 세종은 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최윤덕은 다시 적들에게 사람을 보내여 정세를 탐지해보고 4월 20일이후 놈들이 농사를 지으러 집으로 내려오는 기회에 몰래 습격하겠다고 하였다. 1433년 3월 27일 세종은 정벌명령을 내렸다. 보병과 기병 1만 5,000명이 1433년 4월 10일에 강계부에 집결되였다. 최윤덕은 원정대오를 다음과 같이 나누었다. 중군절제사 리순몽은 2,515명을 거느리고 괴수 리만주의 목책을 향해가며 좌군절제사 최해산은 군사 2,070명을 거느리고 거여 등지로 향해가며 우군절제사 리각은 군사 1,770명을 거느리고 마천 등지로 향해간다. 그리고 조전절제사 리징석은 군사 3,010명을 거느리고 올랄 등지로, 김효성은 군사 1,888명을 거느리고 림합랄의 부모가 있는 목책으로, 홍사적은 군사 1,110명을 거느리고 팔리수 등지로 각각 향해가게 한다. 최윤덕자신은 2,599명을 거느리고 주되는 적인 림합랄 등의 목책을 향하여 곧바로 공격하기로 하였다. 최윤덕은 임금의 지시문과 규정을 보여주고는 《주관하는 장수의 명령을 어기는 경우에는 전하의 지시에 의하여 군법으로 처리할것이니 자기 죄를 변명하지 말것이다.》라고 다짐을 받았다. 그가 내린 군사명령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것은 주관하는 장수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고 군사비밀을 엄수하며 자기 대오에서 떨어지지 말고 병사, 관병 호상간 협력하며 사람을 마구 죽이지 말고 투항하는 자는 죽이지 말라는것이다. 그리고 재물을 망탕 거두지 말고 지어 가축도 죽이지 말며 가옥도 불태우지 말아야 한다는것이였다. 그는 정벌하는 원칙은 의로운것으로 불의를 치는것이며 그들의 나쁜 마음을 쳐서 의로움을 원만하게 하는것이라고 하면서 만약 늙은이와 어린것들을 죽이거나 한인을 죽여서 군공을 낚아보려고 명령을 위반하는 자는 다 군법에 의하여 처리한다고 강조하였다. 1433년 4월 19일 동틀무렵 최윤덕은 공격명령을 내렸다. 최윤덕은 최대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4월 19일 심타납노목책을 공격할 때 함화공작을 배합하게 하였다. 강변에서 저항하는 자들에게 군사를 출동한것이 너희들때문이 아니라 단지 홀랄온때문이다, 그래서 너희들의 목책은 공격하지 말게 하였다고 함으로써 적들의 투항을 받아냈다. 최윤덕은 어하하강변에 도착하였을 때 600명의 군사를 떨구어 앞으로 원정군의 철수를 보장할수 있도록 목책을 세우고 기다리게 하였다. 4월 20일 최윤덕의 부대는 조전절제사 홍사석의 부대와 련합하여 적군의 저항을 분쇄하면서 전진하였다. 원정군은 산릉선과 산기슭, 강변을 따라 세 부대로 나뉘여 수색작전을 폈다. 가물던 하늘에서 갑자기 대줄기같은 비가 쏟아지고 마초가 떨어진 불리한 조건에서도 녀진촌락에 대한 소탕전은 계속되였다. 침략의 괴수 리만주는 아군의 창칼에 찔리워 아홉곳이나 상처를 입고 겨우 포위망을 벗어나 도망쳤다. 원정군은 근 500명의 적을 살상포로하고 수많은 전리품을 로획해가지고 개선하였다. 건주위녀진에 대한 조선군대의 원정은 최윤덕을 비롯한 장수들과 평안도(1만명), 황해도(5,000명)병사들의 애국적이며 희생적인 투쟁에 의하여 승리적으로 결속되였다. 최윤덕은 그후에도 변경의 안전을 위한 많은 군사적대책안들을 제기하고 직접 변경에서 활동하면서 나라와 겨레의 안전을 지켜내는데 이바지하였다. 최윤덕은 재능있는 정치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정치에서 민심을 얻는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하여 그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신망을 얻고 민심을 안정시키는데 깊은 주의를 돌렸다. 그는 공무여가에 청사 뒤뜰의 공지를 일구고 오이를 심었는데 직접 김을 매주군 하였다. 하루는 소송하러 온 사람이 김매고있는 그를 보았으나 사또인줄을 모르고 《상공께서 지금 어데 계시는가요?》라고 물었다. 그는 내색하지 않고 《지금 아무데 있을거요.》라고 대답해주고는 슬그머니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와 송사를 처결해주었다고 한다. 또 하루는 어떤 촌녀인이 와서 《범이 제 남편을 물어갔사오니 원쑤를 갚아주옵소서.》 하고 하소연하였다. 윤덕은 《내 그대를 위하여 원쑤를 갚아주리다.》 하고는 활을 둘러메고 범의 종적을 찾아 산으로 들어갔다. 그 범을 쏘아잡아놓고 배를 갈라 그 남편의 골육을 꺼내여 렴습을 시키고 관을 갖추어주어 매장하게 하였다고 한다. 오래도록 그 고을사람들은 그의 어진 정치와 덕행을 치하하면서 부모같이 여기였다고 한다. 사실 그가 군사가로서, 정치가로서 성공할수 있었던 비결의 하나도 대중의 지지를 받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할수 있다.
용맹과 지략을 갖추고 대중의 신뢰를 얻어 군사정치가로서의 명성을 남긴 최윤덕이야말로 단군민족의 슬기를 빛내인 후손이라고 말할수 있는것이다.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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