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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연재 『단군민족의 명인들』(9):프레스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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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연재 『단군민족의 명인들』(9)

위엄으로 변방을 안정시킨 김종서

프레스아리랑 | 기사입력 2023/02/05 [02:13]

도서연재 『단군민족의 명인들』(9)

위엄으로 변방을 안정시킨 김종서

프레스아리랑 | 입력 : 2023/02/05 [02:13]

33) 위엄으로 변방을 안정시킨 김종서 

 

우리 나라 력사에는 위엄과 명성으로 변경의 안전을 지켜낸 장수들이 적지 않다. 그가운데는 리조시기의 김종서도 있다.

김종서(1390-1453년)는 도총제 김후의 아들로서 자는 국경, 호는 절재이며 본관은 순천이다.

그는 1405년에 문과에 합격한 후 여러 벼슬을 력임하여 나중에는 좌의정에까지 이르렀다.

그가 발탁되기 시작한것과 관련하여 이런 일화가 전해지고있다.

태종이 직접 인사이동을 집행하던 날 최흥효가 리조의 아래관리로 들어가 사령장을 쓰게 되였다. 그는 글씨를 잘 쓴다고 소문이 났는데 진나라 유익이라는 사람의 글씨체를 모방하였을뿐이다. 붓대를 움직이는것은 익숙하나 루추한 꼴을 면치 못하였다. 그는 사령장을 쓰면서 붓을 가지고 획만 만드느라고 오래도록 한장도 다 쓰지 못하였다. 그때 김종서는 병조의 아래관리로 곁에 있으면서 수십장의 사령장을 한꺼번에 쭉 내려써서 임금의 도장인 옥새까지 찍었다. 그 글자획이나 옥새찍은 자국이나 모두 반듯하였다. 태종은 좌우의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이야말로 쓸모가 있는 인재로다.》라고 말하였다. 김종서는 이로부터 발탁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그의 총명과 재능을 보여주는 단적인 실례라고 할수 있다.

그가 수십년간의 정치생활에 쌓은 가장 큰 공적은 1433년부터 1440년사이에 함길도관찰사, 도절제사로 있으면서 두만강류역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한것이다.

동북지방에서의 륙진개척 하면 사람들이 먼저 생각하게 되는것은 김종서라는 이름이며 김종서 하면 륙진개척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만큼 김종서의 생애에서 륙진개척은 당시는 물론 오늘까지도 사람들이 값높이 쳐주는 거창한 사업이였다고 할수 있다.

새로운 진과 고을의 설치, 남쪽지방인민들의 이주와 안착, 녀진인들의 저항… 헐치 않은 이 륙진의 개척은 강의한 성격과 날카로운 기질을 가진 김종서만이 끝까지 내밀어 완성을 볼수 있은 력사적인 사업이였다. 그처럼 어려운 사업을 기어이 수행한것으로 하여 사람들은 오래도록 그 이름을 외우는것이다.

고려때 윤관이 조종의 뜻을 받들어 동북을 개척하여   9성을 설치하였으나 녀진의 저항으로 그들을 완전히 구축하지 못하였으며 후에는 그들에게 양보하였다. 허나 이 원정으로 국경선은 확정되여 동북지방은 고려의 령역이라는 인식이 누구에게나 자리잡고있었다.

김종서는 동북지방에서 녀진세력을 구축하고 오늘의 조선 동북국경을 확정해놓은것이다.

고려 윤관때도 그러하였거니와 이때도 이 동북방개척사업은 고난을 동반하였다. 녀진인들은 계속 변경을 위협하며 략탈과 살인을 일삼았고 일부 우리 사람들속에서는 빈번한 부역을 부담시하며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였다. 일부 관료들속에서는 페지하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어떤 관료들은 김종서를 혹독하게 비난하였다.

세종왕도 몹시 안타까운 기색이였다.

당시 리조봉건정부는 서북쪽에서 리만주의 파저강 건주위녀진을 제압하고 응징을 가하는 한편 함길도쪽에서는 공격보다 방어를 강화할것을 주장하였다. 때문에 김종서가 여러차례 원정계획을 올렸으나 승인하지 않았다.

세종은 진을 설치하여 무력으로 소란을 피우는 녀진인들을 위압하도록 하였다.

김종서는 임금의 의도대로 진을 꾸리기 위한 적극적인 군사활동을 벌렸다. 일부 사람들이 불평을 부렸지만 김종서는 나라의 만년대계를 위한 사업이라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완강하게 일을 내밀었다. 그는 1434년 봄부터 1436년 가을까지 4진을 설치한 이후 홍원이남은 편안하게 지냈다고 하면서 4진의 설치는 정당한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오늘 네 고을을 설치한것은 전적으로 북방을 보위하자는것이고 오늘 성곽을 쌓는것은 전적으로 변방을 공고히 하자는것이며 오늘 변방을 방비하는것은 역시 적들을 막고 우리 백성들을 편하게 하자는것이옵니다. 그런것만큼 오늘의 일은 그만둘수 있는것을 그만두지 않고 경솔하게 백성들의 힘을 쓰자는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좀 힘들더라도 끝까지 밀고나가자고 하였다.

한번은 그가 밤에도 초불을 돋구고 앉아 사업을 생각하고있을 때 적수들이 쏜 화살이 날아와 벽을 뚫었으나 그는 조금도 얼굴빛을 변하지 않고 강의한 의지력을 발휘하였다.

끼니때마다 그의 음식에는 그를 없애치우려고 꾀하는 자들이 충독(벌레의 독)을 섞어 들여왔다. 이것을 알게 된 종서는 먼저 소주 서너되를 마신 후에 식사를 하였더니 벌레의 독이 작용을 못하였다고 한다.

일부 사람들은 김종서가 한정된 인력을 가지고 성공하지 못할 큰일을 벌려놓았으니 그 죄는 죽어마땅하다고 독설을 내뱉기까지 하였다. 이에 대해 세종은 《비록 과인이 있더라도 종서가 없다면 이 일을 처리할수 없을것이요, 종서가 있더라도 과인이 없다면 이 일을 주장할수 없었을것이다.》라고 하면서 김종서를 변호해주고 그의 사업을 떠밀어주었다.

이런 믿음속에 김종서는 온갖 곤난을 강의한 의지로 이겨내며 동북방개척에 투신하였다. 하기에 옛 사람들이 평한것처럼 김종서는 나라를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한몸으로 이 일을 담당하였던것이다.

4개 진의 설치의의에 대하여 세종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번에 네 진을 설치하여 무력으로 위압하는것이 그들(회령의 범찰, 경원의 올량합족)에게는 마치 등에다가 가시를 지고 다니는것 같아서 깊숙한 곳에 피해가서 있고싶지만 올적합족의 여러 족속들이 반드시 종처럼 부려먹을것이였다. 그대로 살자니 마음이 편치 않고 깊이 들어가자니 자신들이 욕을 당하게 될것이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것만큼 그들이 우리의 네 진의 무력을 꺼려하는것은 명백한것이다.

영구히 네 고을을 꾸려가지고 야인들을 움쩍 못하게 눌러놓는다면 우리 백성의 마음은 동요하지 않고 야인들의 마음도 자연 안정될것이며 변경에 적들이 아무리 침입하려고 해도 길잡이를 설 사람이 없게 될것이다.》

후에 김종서는 북변의 정황과 방어대책과 관련한 장문의 글을 올리였는데 이것을 본 세종은 몹시 기뻐하며 그를 더 중히 여기게 되였다. 리조정부는 곧 남도의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온성, 부령 두 진을 더 설치하여 6진을 완성한 후 강변에 장성을 쌓아 방어를 더욱 강화하였다. 이렇게 북변의 6진이 설치되였다.

강의한 의지를 지니고 위엄으로 야인들의 방해책동과 소요를 짓누르고 일부 백성들의 불평불만을 억제하며 변방의 안전을 위한 김종서의 헌신적투쟁은 계속되였다. 그 길에 바쳐진 그의 애국의 일념은 그가 지은 한편의 시조에도 반영되여있다.

 

  삭풍은 나무끝에 불고 명월은 눈속에 찬데

  만리 변역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 바람 큰 한소리에 거칠것이 없어라

 

사람들은 륙진이 개척되고 국경이 안정되게 되자 비로소 김종서의 공을 알게 되고 그의 성과를 누리게 되였다고 한다.

김종서는 6진지방에서 활동한 경험에 기초하여 《제승방략》이라는 군사서적을 집필하였다. 2권 1책으로 되여있는 이 책은 처음에 김종서가 쓴것을 후에 리일이 함경도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보충정리하여 1588년에 출판하였다. 그리고 1670년에 함경도 북평사 리선이 재판하였다.

김종서는 글씨도 잘 쓰고 선대왕조실록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집필에도 참가하였다.

재능있는 김종서는 위엄과 명성으로 변방의 안전을 지켜냈으나 어린 임금 단종을 잘 받들데 대한 세종과 문종의 유언은 지켜내지 못하였다. 그의 최대의 약점은 자기 과신이였다.

황보인이 도승지로, 김종서가 좌승지로, 안숭선이 동부승지로 있을 때였다. 김종서만이 아니라 안숭선도 호협하고 큰 재주와 학식을 지녔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였다. 이 두사람은 도승지를 우습게 여기면서 턱아래수염을 뽑는것쯤으로밖에 보지 않았다. 후에 황보인이 딴데로 옮긴 후 동부승지로 있던 안숭선이 도승지가 되였다. 안숭선은 명령을 받자 곧바로 승정원에 이르러 중문을 들어서서 도승지가 앉는 자리에 척 나가앉으면서 말하였다.

《이 자리가 앉을만 하군.》

김종서의 얼굴이 질리여 재빛이 되였다. 이로부터 두사람사이는 그만 좋지 않게 되였다. 후에 병조판서로 되였던 안숭선은 죄를 당해서 멀리 귀양을 갔는데 김종서가 얽어넣은것이라고 한다. 자기 과신은 결국 시기를 낳았던것이다.

여러차례 과오를 범하여 황희로부터 된욕을 당하면서도 김종서는 자기의 버릇을 끝내 털어버리지 못하였다. 그는 자기의 재능과 용력을 과신한 나머지 옆사람들로부터 수양대군이 정변음모를 꾸미고있다는 암시를 받았으나 코웃음을 쳤다.

수양대군은 단종을 제끼고 제가 왕좌에 오르자면 범같은 재상으로 명성이 자자한 좌의정 김종서를 먼저 제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1453년 10월 10일 수양대군은 힘장사들을 데리고 돈의문(서대문)밖에 사는 김종서를 찾아갔다. 결국 김종서는 궁노 임운이 소매속에 감추어가지고 왔던 철여의에 맞아 운명했다. 그는 《역적》으로 취급되여 《고려사》집필자명단에서도 삭제되였다.

위엄으로 변방을 안정시킨 김종서는 그 《위엄》으로 단종은 물론 자기자신과 지어 자기 가족도 지켜내지 못하였다.

일련의 과실이 있기는 하지만 《북변 6진》을 개척하여 변경의 안전을 보장하고 겨레의 무궁한 복록의 토대를 축성한 김종서의 공적은 력사에 길이 전해질것이다.

 

  

 

34) 청년장수 남이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다 말리리

  사나이 스물에 나라평정 못한다면

  뉘라서 뒤세상에 대장부라 하리오

 

구절구절에서 장수의 기개와 용맹이 맥박치는 이 시는 청년장수 남이가 지은것이다.

남이는 조선을 천하에 우뚝 내세울 웅대한 포부를 지니고 외래침략세력과의 싸움에서 용맹을 떨치고 20대에 나라의 중신이 된 청년장수였다.

남이(1441-1468년)의 본관은 의령이고, 리조 3대왕인 태종의 외손이며 의산군 남휘의 아들, 좌의정 권람의 사위이다.

뜨르르한 문벌을 가진 남이는 어렸을 때부터 용모가 기걸차고 구애됨이 없었다고 한다.

아이적에 그는 《귀신》도 알아보는 재주로 좌의정 권람의 넷째딸을 구원해주고 그의 사위가 되였다고 한다.

무예에 대한 깊은 지식과 만사람을 압도하는 기개를 지니였으며 어릴적부터 날래고 억센 기질로 하여 1457년 16살에 무과에 합격하였고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대궐을 호위하는 반렬에 참가하였다.

그는 1463년 건주위녀진을 정벌하는데서 공을 세워  행-부호군, 행-호군, 공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출세의 일로를 걸었으며 적개공신 1등으로, 27살에는 병조판서로 임명되였다.

그가 장수로서 성공할수 있게 된 비결은 용감성, 언제나 돌격전의 앞장에 서는 희생적인 투쟁정신이였다.

세조왕(1455-1468년)은 남이를 표창하면서 《군사의 앞장에서 곧장 달려갔고 오직 싸우다 죽는것을 영광으로 여겼으며 싸움판에서 뒤떨어질가봐 늘 걱정하였다.

팔을 걷고 앞장서는 용맹을 발휘하였으며 한몸바쳐 감당하겠다는 마음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하였다.

화살과 돌이 비발치는 속을 뚫고 용감하게 돌진하는 남이의 용맹에 대한 칭찬이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였다는것은 그가 참가한 전투과정들이 잘 보여주고있다.

특히 1467년 9월말부터 10월초사이에 단행된 리조봉건정부의 파저강 건주위녀진정벌과정에 남이의 용감성은 남김없이 과시되였다.

원래 그해 1467년 4월 29일에 모련위올량합녀진 1,000여명이 의주 조모정에 침입하여 목책을 포위한 사건이 있었다. 싸움과정에 아군의 손실이 있었다. 의주목사 우공이 량신과 린산군수 리규 등과 함께 3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대창산밑에까지 추격하였다가 갑자기 적을 만나 패하여 달아났다.

아군의 패전소식을 들은 세조왕은 노하여 가만히 앉아 치욕을 당할수 없다고 하면서 적들의 죄를 공포하고 들이칠것을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릉성군 구치관을 도체찰사로 하고 강순, 오자경, 어유소, 최적, 리극균 등을 비장으로 하여 정예군사 1만 5,000명을 거느리고 5개 방면으로 나누어 쳐들어갈데 대한 계획이 세워졌었다.

그러나 인차 터진 함경도농민전쟁이 8월까지 계속되면서 원정계획은 뒤로 미루어졌다.

농민전쟁이 진압되자 9월에 리조정부는 다시 중추부 지사 강순을 주장으로 하고 중추부 동지남이와 중추부 지사 어유소를 대장으로 삼아 1만여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원정을 단행할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원정은 서북쪽으로부터 명나라군대와 협동하기로 되여있었다. 명나라 역시 녀진인들의 《교만》한 행위와 로략질로 하여 골머리를 앓고있었던것이다.

그러나 명나라군대가 시간을 질질 끄는 바람에 원정은 조선군사의 단독행동으로 진행되였다.

세조는 《이번 싸움은 그림자를 잡는것 같아서 명나라에서 아무리 오래 시일을 끌어도 결국은 저희들이나 피로를 가져올뿐이다. 싸움의 방법은 들어갔다 나왔다 하고 왔다갔다 하며 번개처럼 변화하여 정황이 일정하지 않은바 다만 허실을 잘 타산하고 기회를 옳게 리용하는데 있다.》고 하면서 기어이 건주위녀진을 쳐없애라고 하였다.

원정군은 좌군, 중군, 우군으로 편성되였는데 중군대장은 주장 강순, 좌군대장은 어유소, 우군대장은 남이였다.

강순, 남이의 부대는 이미 9월 24일에 압록강을 건느고 25일에 어유소의 부대와 황서평(집안현성)에서 만났다. 원정군은 불의성을 기하기 위하여 예정했던 27일(명나라측은 29일에 하자고 제기했었다.)보다 하루 당겨 26일에 단독으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조선원정군은 두길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원정군의 작전계획은 적의 두개의 기본소굴을 동시에 타격하여 리만주와 조삼파를 처단하는것이였다. 이 계획에 따라 강순과 남이의 부대는 리만주의 소국인 올라산성의 옹촌을, 어유소의 부대는 조삼파와 건주우위추장 보하토의 소굴인 오미부를 공격하였다.

원정군은 건주위녀진에 대한 정벌을 성과적으로 끝마치고 10월초에 개선하였다. 이번 원정에서 남이의 부대는 강순의 부대와 협동작전을 벌려 침략의 괴수 리만주와 그의 아들 고납합, 타비랄 등 근 200명을 죽이고 만주와 고납합의 처자권속 24(23?)명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한인남자 1명과 녀자 5명을 사로잡고 무기와 기재, 말과 소들을 로획하였다. 원정군은 집과 쌓아둔 곡식을 불살라버린 다음 철수하여 명나라군대를 기다렸으나 여러 날 소식이 없으므로 10월 2일에 부대를 돌려 3일에 강을 건넜다.

좌군대장 어유소의 부대는 적 71명을 죽이고 한인녀자 1명을 붙잡았으며 무기와 기재, 말과 소들을 로획하고 집 97채를 불살랐다. 그들도 명나라군사를 기다리다가 소식이 없자 철수하였다.

총적인 전과를 보면 286명을 죽이고 24명을 포로하였으며 말 17마리, 소 10마리를 로획하고 229마리를 죽이였다. 그리고 집 195채와 낟가리 217개소를 불사르고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동시에 이전에 잡혀갔던 료동 동녕위의 남자 1명과 녀자 6명을 구원하였다.

원정에서 가장 큰 성과는 건주 중위의 도지휘사인 리만주와 그의 아들 고납합을 죽인것이다. 이미 세종집권시기 최윤덕이 리만주를 정벌하였을 때 이자는 부상을 당하고 도망쳤었다.

리만주는 교훈을 찾지 못하고 빈번히 수하졸개들을 보내여 략탈과 살인만행을 자행하였다.

이번 원정에서 침략의 괴수들을 소멸함으로써 건주위녀진에게 타격을 주고 변경을 소란시키던 적들이 한동안 기가 질려있게 하였다.

이 싸움에서도 남이는 역시 날래고 용맹이 남보다 뛰여난 청년장수로서의 명성에 어울리게 잘 싸웠다.

그는 항상 먼저 적을 공격하고 먼저 성에 올랐으며 힘껏 싸워 공을 세웠다.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라는 시는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국경지대를 두루 돌며 회군하는 길에 백두산의 웅건한 자태를 감회속에 바라보며 청춘의 열정과 기상을 담아지은것이다. 이 시는 나라 위한 싸움에 한몸 다 바치려는 애국적기상이 맥맥이 흘러넘치는것으로 하여 당대 사람들은 물론 후시기까지도 사람들속에 널리 불리워지고 있다.

하지만 청년장수의 최후는 매우 비참하였다.

일부 문인관료들은 무엇에도 구애되지 않는 그의 용맹하고 호방한 기상을 은근히 두려워하며 제거할 음모까지 꾸미였다.

남이는 자기에게 미구에 닥쳐올 화를 의식하지 못한듯 서슬푸른 장검을 비껴들고 나라를 위한 길에 전공을 수놓아갈 꿈만 꾸고있었다.

 

  장검을 비껴들고 백두산에 올라보니

  일엽제잠이 호월에 잠겼어라

  언제나 남북풍진을 헤쳐볼가 하노라

 

1468년 9월 7일 세조가 갑자기 병이 심하여 세자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1468년 9월 8일 남이를 사랑해주던 세조가 죽고 그뒤를 이어 예종이 즉위하였다.

그는 세자로 있을 때부터 5촌숙이여서 자기보다 한 항렬 우인 남이가 자기를 업수이 여기지 않는가 하여 몹시 신경을 썼다.

집권후에는 혹시 어린 자기를 병권으로 내리누르지 않겠는가 하여 몹시 저어하면서 겸사복장으로 좌천시켰다.

하루는 세조의 시신이 아직 빈전에 있을 때 남이가 궁안에 들어와 일을 보던중 밤에 혜성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혜성을 두고 이런저런 말을 하던중 남이는 《혜성은 옛것이 없어지고 새것을 펴는 징조요.》라고 말하였다.

승정원 옆방에서 이 말을 엿들은 류자광은 손벽을 쳤다. 그 역시 용맹이 뛰여난 자인데 단번에 여러층의 섬돌을 뛰여오르고 큰 기둥을 잡고 우로 기여올라가기를 마치 원숭이가 나무를 타듯 하는 자였다.

그는 세운 공이 적지 않지만 단지 애비 류규의 첩의 소생인 서자라고 하여 수모와 멸시를 받는데 대하여 늘 앙앙불락이였다.

세조왕의 특별지시로 그가 병조정랑이 되였을 때 서자로 병조의 정랑자리를 차지한것은 안될 일이라고 대간에서 얼마나 떠들어댔는지 모른다.

그러나 류자광은 이 기회에 가문을 믿고 우쭐렁대는 자들에게 혼쌀을 내주고싶은 생각이 불쑥 들었다.

류자광은 10월 24일에 어전에 들어가 역적고변을 하였다. 그는 남이의 옛것을 멸하고 새것을 편다는 말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여 반역의 뜻을 로골적으로 드러낸것이라고 하였다. 지어 이자는 남이가 지은 시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에서 《…나라평정 못한다면》(《미평국》)을 《나라를 얻지 못한다면》(《미득국》)으로 고치여 읊어보였다.

지어 남이가 공주를 강간하려고 했다는 터무니없는 말까지 하였다.

평시에 용맹한 남이를 꺼리던 예종왕은 이때라고 생각하고 류자광의 모함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잡아가두게 하였다.

남이는 애젊은 나이에 큰뜻을 펴보지 못하고 죽는것이 원통하였다. 그가 옥에 갇혀있을 때 큰칼과 족쇄를 벗어던지고 몸을 솟구쳐 천정에 올라가 도망치려는데 누군가 그의 옷소매를 꽉 붙잡았다.

남이가 누구냐고 물으니 그는 《나는 옥졸이다. 그대가 힘이 보잘것 없으면서도 높은 벼슬을 하고 나는 그대의 몇백배 되는 용력이 있는데도 신분이 낮아서 옥졸노릇을 하니 어찌 그대가 벌을 받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남달리 뛰여난 힘과 무예를 지닌 남이였지만 그의 손에서 도저히 빠져나가지 못하리라는것을 알고 다시 옥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남이의 뛰여난 용력과 함께 당시 많은 사람들이 힘과 재능을 가지고있으면서도 단지 신분이 낮은것으로 하여 등용되지 못하는것을 원망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그들의 원망이 당시 청년장수로서 명성을 떨치고   20대에 대신이 된 남이에게 옮겨졌는지 어쨌든 남이에게 운명은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남이는 령의정이라는 최고관직에 있으면서도 자기의 무고함을 변호해주지 않는 강순이 아니꼬왔다.

80객으로 죽을 나이가 다가왔는데도 아직 30도 안되고 더 많은 일을 해야 할 인재를 구해주지 않는 강순이야말로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물건, 국록만 없애는 산 송장이였다.

남이는 자기가 강순과 함께 모반하려 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결국 강순도 남이와 함께 형장으로 끌려나갔다. 남이의 소행을 누구도 그르게 여기지 않았다.

 

남이는 때를 잘못 만나 청춘의 기개를 펴보지 못하고 억울하게 최후를 마쳤다. 그러나 나라의 안전을 지켜 언제나 돌격전의 앞장에서 헌신적으로 투쟁한 그의 공적은 그의 넋과 기개가 어린 훌륭한 시들과 더불어 길이 전해질것이다.

 

35)《10만 양병》을 주장한 리이 

 

리이에 대하여 평가할 때 정치가들은 그를 충의롭고 능력있는 정치가로, 군사가들은 선견지명있는 군사전략가로, 철학가들은 리기이원론을 제창한 철학자로 내세우고있다.

력사에 지울수 없는 흔적을 남긴 리이, 그의 생에서 가장 의의깊었던 일들의 일부를 펼쳐보기로 하자.

리이(1536-1584년)는 본관이 덕수로서 고향은 강릉부 북평촌이며 자는 숙헌, 호는 률곡이라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의 낮은 벼슬을 지낸 리원수이다. 리이의 아버지쪽은 명문거족이 못되였고 한미한 시골선비가문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어머니 신사임당의 평산신씨가문은 매우 유명하였다. 리이의 외할아버지 신명화는 중종때에 윤상공, 은보, 남공, 효의 등이 현량으로 천거하였지만 굳이 사양하고 진사로 생을 마쳤다. 강릉에서 신명화와 리씨의 다섯 딸(아들은 없다)가운데 둘째딸로 태여난 신사임당은 어린 나이에 경서를 통독하고 글을 지을줄 알았으며 그림을 잘 그리고 수를 잘 놓고 바느질을 잘하였는데 그 모든것이 극히 정교하였다. 그리고 타고난 자질은 순박하고 효성스러우며 지조가 있고 말이 적으며 행동을 삼가하였으니 부녀의 덕을 다 갖추었다고 한다.

이런 어머니의 슬하에서 나서자라서인가 리이는 어려서부터 총명으로 이름을 날렸다. 신사임당은 셋째아들인 리이를 임신하였을 때 꿈에 룡을 보았으므로 처음 이름을 현룡(몌龍 꿈에 룡을 보다)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리이의 생가는 《몽룡집》(꿈에 룡을 본 집이라는 뜻)이라고 전해 온다.

리이가 세살 나던 해 외할머니 리씨가 석류를 따주면서 이것이 무엇과 같으냐고 물은적이 있었다. 리이는 《석류피리쇄홍주》(石榴皮裡碎紅珠 석류껍질안에 부서진 붉은 구슬)이라는 한시를 지어 대답하였다. 4살 나던 해에는 《사략》 첫권을 배우다가 마을선생이 잘못 가르친 구독을 지적하여 바로잡아주었다. 그리고 7살에는 경서를 통달하고 글을 지었으며 10살때에는 《서리바람 땅을 흔들매 일만군마의 칼휘두르는 소리울리듯, 눈꽃이 하늘에 흩뿌릴제 천섬의 구슬알 흩어지는듯》이라는 유명한 《경포대부》를 지었는데 오늘도 사람들이 즐겨 읊고있다. 그의 문장은 열네댓살때 크게 성취되였다고 한다.

앞날이 촉망되는 수재로 소문을 자자하게 내며 재능있는 어머니의 품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리이에게 생각지 못했던, 생각하고싶지도 않았던 커다란 불행이 닥쳐왔다. 그토록 남편에게는 현숙한 안해로, 자식들에게는 자애론 어머니로 사랑받고 공경받던 신사임당이 병사한것이다. 12살때 아버지가 병에 걸리자 자기 팔을 찔러 피를 내여 대접했다는 효자 리이, 그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죽음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아직은 열여섯살, 어머니의 사랑이 한껏 그리운 그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그의 슬픔이 얼마나 컸으랴.

밤낮으로 통곡하며 슬퍼하던 그는 19살이 되던 해 어느날 봉은사에 들어가 불교서적을 보고 사생의 설에 깊이 느끼고 그 학문이 간편하고 정교로운것을 기뻐하며 거기서 진리를 찾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의 계률을 지키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러자 산속에는 산부처가 나타났다고 떠들썩하였다.

여러해 불단에 몸을 던져 진리를 탐구하던 리이는 그것이 허무한것임을 깨닫고 유교학문을 닦는데로 돌아섰다.

그는 금강산을 내려 성혼, 송익필과 막역지우의 정을 맺고 22살에 성주목사 로경린의 딸과 결혼하고 다음해 강릉외가로 가는 길에 퇴계 리황을 만나게 되였다. 두사람은 이틀간 이야기를 나누며 현격한 나이차이에 구애되지 않고 서로의 재능과 인간됨에 탄복하며 찬사를 마지 않았다. 이로부터 리이는 유학에 깊이 발을 잠그게 되였고 또 그의 학설에는 리황의 영향이 다분히 미치게 되였다.

리이는 29살때 진사시와 명경과에 급제한 후 뛰여난 재능과 인격으로 하여 빠른 승급의 일로를 걷게 되였다. 좌랑, 정랑, 정언, 지평, 직강, 교리, 검상, 사인, 청주목사, 응교, 사간, 승지, 직제학, 대사간, 황해관찰사 등 중앙과 지방의 벼슬을 력임하였다.

리이는 능력있는 정치가였다.

그는 강직한 성격과 언제나 멀리 내다보는 정견으로 대바른 상소문을 자주 올려 당시의 페단을 강하게 지적하고 개혁을 주장하였다. 오래동안 큰 전쟁이 없이 평화가 지속되자 봉건통치배들속에서는 안일사치한 풍조가 만연되고 저들의 부화타락한 생활을 위해 인민들에 대한 착취와 압박도 증대하였으며 그에 반항하는 인민들의 반봉건적진출도 강화되였다.

리이는 1569년에 당시의 사회경제적형편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이 형편대로 간다면 불과 수년내에 백성들이 반드시 폭동을 일으켜 토붕와해를 면치 못할것이다. 백성들이 거의다 죽어가는 사람과 같이 허덕이고있으니 그냥 살아가기도 어려운데 만일 남, 북으로부터 외적이 침입한다면 마치 질풍이 락엽을 휩쓰는것과 같이 될것이다.》

리이가 여러차례 개혁안을 제기하였으나 간신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던 13대왕 명종(1546-1567년)과 옛 관습에 물젖어있던 대신들은 그의 제의를 청년의 호기에서 나온 망상으로 몰아붙이고 크게 신임도 하지 않았다.

14대왕인 선조(1568-1608년)집권후 그는 자기의 개혁대책을 완강히 제기하였다. 리이는 임금이 왕도정치를 실현하느냐 못하느냐는 말공부가 아니라 실지행동에 달려있는것이라고 하면서 권력잡은 간신들 특히 외척들이 날뛰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리이는 사람들이 인종(12대 재위 1545년)의 외삼촌인 윤임일파에 가담하였다가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일파에 의해 탄압당한 1545년의 《을사사화》에 대한 재평가문제를 강하게 제기하여 당시 대신이고 원로인 령의정 리준경과 대립되기도 하였다.

1574년 리이가 왕에게 올린 1만자에 달하는 장문의 건의서는 당시의 환경에서 매우 적절한 대책안으로서 그의 정치적재능을 잘 보여주고있다. 그는 당시의 정사를 보면 공물대장은 연산군이 백성들을 못살게 굴던 법을 그대로 그러쥐고있고 관리임명은 권세잡은 간신들이 청탁하던 관례를 따르고있으며 문학을 앞세우고 덕행을 부차시한 결과 덕행이 높은 사람이 결국 낮은 벼슬에 파묻혀있고 문벌을 중히 여기고 어진 인재를 천대한 결과 집안이 보잘것 없는 사람은 자기의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는 나쁜 풍습과 잘못된 관례는 이루 다 진술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뜯어고쳐야 한다고 하였다.

리이는 정사의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것은 실지공력을 들이지 않기때문이라고 하면서 그 원인을 일곱가지로 밝히였다. 그것은 첫째로, 웃사람과 아래사람사이에 서로 믿어주는데서 실속이 없는것이고 둘째로, 신하들에게 일을 맡겨주는데서 실속이 없는것이며 셋째로, 경연에서 임금의 덕망을 길러주는데서 실속이 없는것이고 넷째로, 어진 사람을 불러들여 등용하는데서 실속이 없는것이며 다섯째로, 재변을 당하고도 하늘에 보답하는데서 실속이 없는것이며 여섯째로, 여러 신하들이 올린 대책에는 백성을 구원하는 실속이 없는것이며 일곱째로, 사람들의 마음이 착한데로 지향하는데서 실속이 없는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 내용을 하나하나 밝히였다.

리이는 건의서에서 임금에게 덕을 고수하는 면이 부족하고 의심하는 결함이 있다고 하면서 임금이 자신을 수양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데서 지켜야 할 점들을 지적하였다. 그는 임금이 자신을 수양하는데서 옛날 《성인》들의 훌륭한 시기를 회복하는것을 목표로 하고 《성인》의 학문에 힘을 넣으며 공정한 도량을 가지고 어진 선비를 가까이 하는 등 네가지 항목을 대강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백성을 편안케 하는데서는 성의를 보여 아래실정을 알아내고 공물대장을 고쳐 함부로 걷어들이는 페단을 제거하며 절약과 검박한것을 숭상하여 사치한 풍속을 없애고 노비를 뽑아올리는 제도를 변경하여 관청노비들의 고통을 덜어주며 군사에 관한 정사를 바로잡아서 안팎의 방비를 굳건히 다지는것 등의 다섯가지 항목을 대강으로 제기하였다.

선조는 아주 좋은 말들이나 뜯어고칠것이 많아서 갑자기 모두다 변경할수는 없다고 하였다. 당시 부패한 봉건사회에서 리이의 주장들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하여도 성사될리 만무하였다.

1574년 10월 황해도관찰사로 임명되여 내려간 리이는 도안의 페단들을 전부 개혁할것을 진술한 상소문을 올렸다. 학교를 대대적으로 개선하고 학교규범을 거듭 강조하며 탐오하는 자를 단속하고 착한 사람을 표창하며 백성들의 고통을 돌봐주고 군사에 관한 정사를 개선할데 대한 그의 제의는 선비들과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의 제의를 많은 경우 들어주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유감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리이는 후날 명재상으로 이름날린 리원익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일을 맡기며 내세워주었다.

리이는 정계에 있을 때나 은퇴하였을 때나 언제나 나라일을 걱정하며 많은 대책안들을 제기하였다.

옛사람들은 리이의 정치적재능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하였다.

《조정에 나와서 임금을 섬길 때에는 충성과 힘을 다하였으며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시골에 들어가있으면서도 늘 생각이 끌리여 잊지 않았다. 전후에 걸쳐 밀봉해올린 글들과 직접 만나서 제의한 말들은 정직하고 간절하였다. 정사의 원칙을 론할 때에는 그 범위가 높고 원대하였는데 <3대>때(성인들이 통치하던 시대를 의미함)의 정사를 회복하는것을 목표로 삼았다.

나라형편이 쇠퇴해지는것을 보고는 어지러워질 기미를 환히 알았기때문에 언제나 임금의 그릇된 생각을 고치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조정을 화합시키는것을 기본으로 삼았고 나쁜 정사를 뜯어고치고 백성들을 구제하며 군사와 관련한 준비를 마련하는것을 앞세웠다. 곱씹어 조항별로 렬거하여 론의한것은 처음이나 마지막이나 한결같은 의견이였는데 그때마다 소인과 속된 무리들의 저해를 받았으나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리이는 사람들사이의 화목을 보장하는데 깊은 주의를 돌렸다.

그는 무엇보다도 집안의 화목을 도모하는데서 사람들이 본받을만 한 본보기를 보였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한집에서 아홉세대가 동거한 옛사람을 공경하였으며 자기도 그처럼 하리라고 마음다졌다. 그는 맏형수에게 신주를 받들고 와서 함께 살것을 청하였으며 삼촌과 둘째형, 아들, 조카들을 전부 모아서 먹고 입는것을 같이하였다. 설날과 초하루, 보름의 이른새벽이면 어른들을 찾아뵙고 인사를 올리였으며 드나들 때에도 모두 례절을 갖추었다.

그는 별도로 훈계하는 글을 짓고 우리 글로 해석하여 가르치군 하였는데 집안이 꼭 관청과 같았다고 한다. 한 대청에 죽 모여앉아서 밥을 먹으며 글을 읽거나 노는 장소에도 모두 례절이 있으니 당시 례법을 강론하고 상례와 제례를 잘 지키노라고 하는 사람들도 집에서 가르치는 례절은 모두 따를수 없다고 하였다.

리이는 늘 아버지를 일찌기 여읜것을 비통하게 여기여 둘째형을 엄한 아버지 모시듯 하면서 부지런히 시중들기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계모를 친어머니처럼 섬겨서 여름이나 겨울에는 덥고 서늘한 정도를 맞추며 저녁에 잠자리를 보살피고 새벽문안을 하였으며 록봉마저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지 않았다. 일부 사람들이 례절이 아니라고 나무라면 리이는 《나 개인의 의견이 이러할뿐이지 별로 본받을것까지는 못된다.》라고 하였다.

리이는 가정을 화목하게 만든 그 방법으로 정치가들사이의 화합도 이룩해보려고 노력하였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바로 동인과 서인의 당쟁조정을 위한 꾸준한 노력이였다.

리왕조의 통치질서를 문란시키고 나라를 파국에로 몰아넣은 당파싸움은 리조전랑임명문제를 둘러싸고 시작되였다. 전랑은 홍문관의 정3품 직제학이하의 관리들을 제 마음대로 임명하고 철직시킬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있었다. 리조의 장관인 판서와 그아래 참판, 참의 세 당상은 전랑들이 제기하는데 응하기만 할뿐이였다. 이전의 여러 사화들도 많은 경우 여기서 출발하였다. 1565년에 리조참의 심의겸이 전랑후보자 김효원을 권신 윤원형의 망나니사위와 가깝게 지냈다고 하여 임명하지 않은 일이 있었다. 그후 전랑이 된 김효원은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 전랑후보로 추천되였을 때 왕가의 외척이라고 하여 반대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심의겸과 김효원이 서로 엇나가게 되고 당파가 갈라지게 되였다. 김효원의 집은 동쪽성에 가까왔으므로 그에게 붙은 젊은 신진들을 동인이라고 하였고 심의겸의 집은 도성 서쪽에 있어 그에게 붙은 오랜 신하들을 서인이라고 하였다.

리이는 어느 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되도록 화해시키려고 하였다. 그는 조정에서 두파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지방관으로 내보낼데 대한 의견을 내놓았다. 당파싸움이 격화되기 시작한 해인 1575년에 김효원은 부령부사로, 심의겸은 개성류수로 임명되였다.

리이는 서인으로 지목받던 이름있는 관료인 정철에게 젊은 선비축들과 친근하게 지내면서 동인, 서인에 대한 말을 깨뜨려버리라고 하기도 하였고 여러차례 글을 올려 동인, 서인을 화합시킬것을 제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리이의 노력은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1581년 대사간으로 있던 리이는 사직시켜줄것을 청하면서 《오늘의 급선무는 동인, 서인의 관계를 깨뜨려버리고 선비들을 단합하는것인데 신이 진정시켜내지 못하였으니 차라리 일반 관리로 있으면서 하찮은 정성이나마 다할것을 원합니다.》라고 안타까운 심정을 호소하였다.

, 서 두 글자는 나라를 망칠수 있는 화근으로 간주하며 어떻게 하나 화합시키려고 하던 리이는 나중에 《하나의 승려》에 불과하며, 《임금도 부모도 버리고 륜리에 어긋나는 죄를 지었다.》느니 하는 비난도 받았다. 그가 한때 승려로 되였던 사실을 트집잡은것이였다.

그러거나말거나 리이는 《당면한 난국을 수습하는것을 앞세우면서 일단 벼슬길에서 물러났다가도 다시 나왔으며 선비들을 보호하고 화합시키는것을 자기의 임무로 여기면서 사사로운 생각이 없이 할말을 다하였다.》고 한다.

리이는 군사에도 밝은 군사전략가였다.

1583년 리이는 병조판서로 임명되여 군사관계사무를 맡아보게 되였다. 당시는 북쪽변경에서 녀진인들의 준동이 우심해져 리조정부로서는 매우 골머리를 앓고있을 때였다. 리이는 《지난날의 사실로 보아도 대제학으로 있던 신하가 군사에 관한 직무를 맡아본 일은 드뭅니다. 그것은 문과 무의 중요한 자리이므로 결코 한사람이 겸임할수 없기때문입니다.》라고 하면서 교체하여줄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리이의 재능을 인정하고있던 선조는 그의 제의를 거절하면서 《경은 이전부터 제도를 뜯어고치자고 계속 간절히 말하여왔는바 이것이 경의 소원이였다. 경이 정말로 신기한 계책을 내여 이때까지 내려오는 페단들을 깡그리 씻어버리고 군사를 양성하는 규정을 마련한다면 나라의 다행으로 될것이다.》라고 하였다.

병조는 사무가 복잡하고 바빠서 민첩하고 로련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도 미처 처리해내지 못할가봐 늘쌍 걱정하는 판이였다. 리이는 선비출신의 관리로서 갑자기 군사와 관련된 중대한 임무를 맡은데다가 때마침 변방일이 소란한 때였지만 문서가 잔뜩 쌓여있어도 거침없이 처리해내였다. 이에 대하여 옛 기록에서는 《그물줄을 추켜들면 그물코가 일어서듯이 크고 작은것을 놓치지 않으니 병조의 늙은 서리들이 말하기를 이때까지 판서를 보아오던중 이처럼 일을 잘 처리하는분은 없었다고 하였다.》고 전하고있다.

리이는 나라의 군사력을 강화할데 대한 여러가지 대책안들을 제기하였으며 그가운데 일부는 실시되여 일정하게 효과도 거두었다.

리이는 서자들과 공노비, 사노비들가운데 무예가 있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자기 주둔지에 가서 일정한 기간 복역하면 서자에 한해서는 벼슬길을 틔워주고 노비들에 한해서는 량인신분으로 고쳐주도록 할것을 제의하여 승낙을 받았다. 그는 또한 병조의 군사들이 자기의 번을 빼먹은 속죄값으로 바친 베가 다락창고에 쌓여있는것을 관리들이 자기 개인물건처럼 여기고 망탕 써버리는데 이것을 변방에 보내여 군사장비를 갖추는데 이바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군자감에 쌓아둔 베를 싸움터에 나간 군사들의 옷감으로 보충하며 모든 관리들의 록봉을 줄여서 주둔지에 나간 군사들의 처자에게 돌려줄것을 청하였다.

이렇게 되여 주둔지 군사가 넉넉해져서 안쪽지대에서 징발하는 군사가 많지 않았으며 변방의 량식을 넉넉하게 당겨쓰면서도 변경에 저축하여둔 곡식은 줄어들지 않았고 군사들은 모두다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면서 자기 집 걱정을 잊게 되였다고 한다. 그리고 표창과 형벌이 공평하고 진영과 보의장수와 군사들이 점차로 적을 맞받아나가 적을 잡을수 있게 되였고 6진이 다시 안정되여 변방야인들이 더는 배반하지 않는지가 20여년이나 되였으니 이것은 대체로 리이의 한때 조치가 옳게 취해진 성과였다고 하였다.

리이가 군사전략가로서의 안목을 가지고있었다는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실례는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사실을 들수 있다. 언제인가 리이는 경연석상에서 의견을 올리면서 10만의 군사를 미리 양성하여가지고 앞날에 있을수 있는 뜻밖의 변란에 대처할데 대하여 요청하였다.

그런데 류성룡은 《군사를 기르는것은 재난을 기르는것이다.》라고 하면서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전에도 류성룡은 인재를 찾아들여 정사를 맡기고 규률을 추세우며 묵은 페단들을 뜯어고치며 반대의견들에 귀를 기울이지 말것을 제의한 리이의 대책안에 반대립장을 표명한적이 있었다.

리이는 인재로, 앞날이 기대되는 재상감으로 임금의 총애를 받던 류성룡이 자기 의견을 반박하는데 대해 한탄하면서 이렇게 말하군 하였다.

《류성룡은 재주와 기개가 정말 대단하지만 나와 함께 일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들이 죽은 다음에야 자기의 재주를 실현할 날이 있을것이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서야 류성룡은 그때 자기가 리이의 《10만 양병》주장을 반박한데 대해 몹시 후회하였다. 그는 이 전쟁에서 나라일을 맡아가지고 군무를 처리하게 되면서 언제나 리이가 앞일을 내다보는 안목과 충성스럽게 일한 절개가 있었다고 칭찬하였으며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오늘에 꼭 도움이 되였을것이라고 하였다.

리이는 재능있는 철학자로서도 명성을 남겼다. 그의 철학사상은 리기이원론에 기초한 객관적관념론이였다. 그의 리기이원론은 리의 기에 대한 선차성, 지배와 통제를 인정하는 관념론적립장에 서있으면서도 리의 작용을 일면적으로 내세운 리황에 비하여 기의 작용을 강조한 점에서 진보성을 가지였다. 그의 사상은 중소토지소유자계층의 리익을 대변한것인 동시에 통치계급전체의 리익을 고려한것이였다. 그의 제자들은 후에 기호학파를 형성하여 리황의 제자들로 꾸려진 령남학파와 대립하였다.

정치가로서, 군사전략가로서 리조봉건국가의 통치제도가 가장 문란해졌던 시기에 국력의 강화를 위해 고심분투한 리이. 그가 제기한 개혁제안들과 전망적인 건의안들이 당시 부패한 봉건통치배들에게 모두 접수될리는 만무하였다. 그러나 그가운데 일부는 채용되여 실지로 덕을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후에 임진전쟁이 일고 리왕조의 형편이 기울어지게 된 때에 가서 사람들은 리이의 예견성에 감탄하고 그가 시행하여야 할 대책을 건의한것들을 하나하나 되새기며 채택한 문제가 많았다고 하니 리이의 정치적재능, 군사가로서의 안목을 이로써 알수 있다.

타고난 자질이 매우 높고 갈수록 수양이 더욱 깊어졌으며 맑고 화기로우며 소탈하고 과단성이 있었다고 하는 리이. 그가 나라를 위해 바친 공적은 력사에 남았고 후세에 전해졌다.

리이가 죽던 날 임금이 놀라며 슬퍼서 소리내여 울었으며 3일동안 고기없는 음식을 들고 부의를 전례없이 후하게 주었다. 모든 관리들과 친우, 동료들, 성균관의 여러 유생들과 호위하는 군사, 저자사람들, 품계에 드는 모든 관리들과 서리들, 하인들까지 다 앞을 다투어 모여들어 제물을 올리고 소리내여 울었다.

외진 항간의 백성들도 간혹 서로 조문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백성들이 복이 없구나.》라고 말하였다. 발인하던 날 밤에는 먼데 가까운데 할것없이 모여와서 상여를 호송하였는데 수십리에 련달려 홰불이 하늘을 환히 밝히였다.

수도안의 리이가 거처하던 집에는 여유량곡마저 없었으며 친우들이 옷을 갈아입히고 부의를 주어 렴하고 장례를 지내주었다. 그리고 집식솔들에게 자그마한 집을 사주었으나 식솔들은 여전히 살아나갈수가 없었다고 한다.

 

리이는 비록 통치계급의 일원으로서 그가 바란것은 봉건국가의 강화발전이였지만 나라의 형편이 어지러운 때 국력의 강화와 겨레의 안녕을 위해 바친 공적은 단군민족사에 길이 전해질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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