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안시성주 양만춘
645년 고구려-당전쟁은 또 한사람의 명장을 낳았다. 그가 바로 뛰여난 지략과 림기응변의 전법으로 전략적요충지인 안시성을 끝까지 지켜낸 양만춘이다. 양만춘의 생존년대와 출신에 대해서는 력사기록에 전해지는것이 없다. 다만 그가 영류왕때와 보장왕때 안시성 성주로서 성을 강화하고 침략자를 격퇴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는 사실만이 전해지고있다. 재능이 있고 용맹한 양만춘은 나라에 큰 공적을 쌓았으며 군사예술발전에도 기여하였다. 시체로 사다리를 쌓으며 투항분자들의 항복을 받아 겨우 개모성, 료동성, 백암성을 함락시킨 당나라의 대군은 다음번 공격목표를 놓고 혼란에 빠졌다. 고구려의 위력한 성방위체계의 위력앞에서 전전긍긍하던 적장들은 명장이 지키는 안시성을 피할것을 바랐다. 당태종 역시 《손자병법》에서 《치지 않을 성이 있다》고 한 문구를 자기 주장의 근거로 삼아 성이 험하고 군사가 강하며 그 성주가 재주와 용맹을 갖춘 안시성을 치지 말고 군사가 약하고 군량이 적은 건안성을 먼저 치자고 하였다. 그러나 륙군대장격인 료동도행군대총관 리적(원래 이름 서세적)은 《건안은 남쪽에 있고 안시는 북쪽에 있는데 우리의 군량은 전부 료동에 있으니 안시를 지나서 건안을 치다가 만일 고구려사람들이 우리의 군량수송로를 끊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고 하면서 먼저 안시를 치고 다음에 건안을 치자고 하였다. 당태종은 그의 제의를 접수하고 안시성을 공격목표로 정하였다. 하지만 적들은 오산하였다. 리적이 거느린 선봉부대는 연개소문이 안시성을 돕기 위하여 파견한 고연수, 고혜진이 인솔한 15만 고구려지원군과 안시성군인들의 협력에 의하여 시작부터 된타격을 받았다. 리적은 뒤미처 당도한 당태종의 후군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질수 있었다. 승리에 자만도취하여 적을 경시하다가 적들의 기습공격에 의해 패배를 당한 고연수, 고혜진이 당나라군에 투항함으로써 안시성은 외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홀로 싸우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연개소문의 전략적구상이 실현되느냐 못되느냐가 안시성을 사수하느냐 못하느냐에 크게 달려있었다. 물론 수많은 고구려성들이 싸움준비를 갖추고 때를 기다리고있었지만 안시성만큼 준비된 성은 없었다. 만약 안시성만 사수한다면 고구려는 더 피해를 입지 않고 최후의 승리를 달성할수 있었다. 양만춘은 온 나라의 기대속에 성안의 군대와 인민을 이끌어 당나라의 《정예대군》과 맞섰다. 삶과 죽음의 계선에서 양만춘은 명장으로서의 군사적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싸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것은 사람들이다. 이것을 깊이 자각하고있던 양만춘은 우리 인민이 예로부터 남달리 조국을 사랑하고 부모처자를 귀중히 여기며 그것을 지켜 한목숨 서슴없이 바치는것을 무한한 영예로 여긴 전통을 적극 살리는데 깊은 주의를 돌렸다. 성을 끝까지 사수하는 길만이 자기 가정을 지키고 나라와 겨레를 지키는 길이며 자기자신을 지켜내는 길이다. 양만춘은 병사대중과 인민들의 가슴마다에 애국의 불길을 지펴주었다. 안시성의 군민들은 분발하여 일떠섰다. 그들은 당나라군의 공격을 걸음마다 짓부셔버렸다. 그들은 당태종의 기발과 일산(양산의 일종)이 나타나면 즉시 성에 올라 북을 두드리고 고함을 치며 아름다운 조국강산을 불바다, 피바다로 만든 원쑤들을 저주하며 조소를 퍼부었다. 당태종이 그 욕설을 듣고 화를 내자 리적은 성을 이기는 날 남자들은 다 구뎅이에 묻어버리겠다고 하면서 임금의 비위를 맞추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성안사람들은 성을 더욱 굳게 지켰으며 그로 하여 적들은 오래동안 공격하였지만 항복받을수 없었다. 급해맞은 적장들속에서는 비관하면서 안시성공격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분분해졌다. 배신자들인 고연수, 고혜진은 그들의 의견을 대변하여 오골성을 먼저 칠것을 제의하면서 안시사람들이 자기 가족을 생각하여 사람마다 스스로 싸우고있기때문에 쉽게 함락시키기 어렵다고 하였다. 이것은 양만춘이 벌린 군중동원사업이 성공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모든 적장들이 오골성을 치자고 하였지만 장손무기만이 임금이 직접 원정하였으니 여느 장수들과 달리 요행을 바래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먼저 안시를 깨뜨리고 건안을 취하는것이 만전의 계책이라고 하였다. 결국 당나라침략군의 안시성공격은 계속되였다. 하지만 적들은 양만춘이 평소에 잘 꾸려놓은 성과 잘 훈련시킨 군사들앞에서 패배만 거듭하였다. 양만춘은 림기응변의 전법으로 적들의 부단한 공격을 걸음마다 짓부셔버렸다. 당태종이 안시성공격에 적용한 공성전법은 크게 보면 세가지였다. 첫째로, 림이다. 그것은 흙을 쌓아 흙언덕을 만들고 높은데서 아래를 향해 공격하는 전법이다. 안시성공격이 뜻대로 되지 않게 되자 당태종은 강하왕 도종을 시켜 안시성 동남구석에 50만 공수를 들여 60일동안 토산을 쌓게 하였다. 옛 사람들은 《림》(양검)공격에 매달리는 자는 장수로서 졸렬한 자이며 군사를 피로하게 하며 성을 해치는데는 부족하다고 보았다. 이것만 보아도 《명장》이라고 자부하던 당태종이 고구려침략 특히 안시성공격에서는 궁여지책에만 매여달렸음을 알수 있다. 둘째로, 여러가지 공성무기에 의한 공격이다. 당태종은 전쟁준비를 할 때 고구려사람들이 성을 잘 지킨다는데 류의하고 여러가지 공성기재를 만들게 하였으며 제가 직접 선택했다고 한다. 자료에 있는것만 보더라도 리적이 안시성공격때 당차를 벌려놓고 돌을 날려 성다락과 치를 허물었다고 한다. 셋째로, 분번식공격이다. 당태종은 자기 시위군사들까지 내몰아 번을 갈라 교대로 안시성을 공격하게 하여 하루에 6~7차나 교전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한편으로 자기 병사들을 쉬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부단한 공격을 들이대여 성안의 고구려군사들이 피로하고 지치게 하려는 계책이였다. 양만춘은 적들의 이러한 공격에 대처하여 림기응변의 전법으로 위기를 막아내군 하였다. 적들의 《림》(양검)공격에 대하여 양만춘은 높은데서 높은데를 방어하는 전법으로 맞섰다. 그는 적들의 토산이 높아지는데 따라 즉시 성우에 대성(행성이라고도 한다.)을 쌓아올려 적의 공격에 대처하게 하였다. 적들의 토산이 무너지면서 성벽의 일부를 파괴하였을 때 고구려군사들 수백명이 무너진 곳으로 뛰여나가 토산의 적들을 격파하고 그곳을 점령하였다. 토산을 점령한 군사들은 3일간 적들의 공격을 물리치고 토산을 사수하였다. 용맹하며 그 어떤 정황에서도 능동적으로 행동할수 있게 준비되여있던 고구려군사들의 투쟁에 의하여 두달동안 50만 공수를 들여 준비하였던 당태종의 《림》공격은 수포로 돌아갔다. 양만춘은 적들이 각종 공성무기를 동원하여 공격해오면 그에 대응한 수성무기로 즉시 반격을 가하였다. 적들이 당차로 성벽과 다락을 파괴하면 즉시 목책을 세워 막게 하였다. 양만춘은 적들의 《분번》식공격에 대응하여 역시 《분번》방어를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성안의 군사들이 충분한 휴식을 배합하면서 적들의 하루에 6~7차나 계속되는 공격을 여유있게 막아낼수 있게 하였다. 양만춘은 이밖에도 놈들의 공격수법을 연구한데 기초하여 미리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리하여 적들은 료동성공격때 적용하였던 성밑으로 땅굴을 파서 공격하는 《공동》(땅굴을 파서 성벽을 파괴하는것), 《혈》(땅굴을 파고 성안으로 공격해 들어가는것)과 같은 공성전법들은 전혀 써보지 못하였다. 양만춘은 방어의 적극성을 높이는데 깊은 주의를 돌린 재능있는 군사지휘관이였다. 방어는 소극적방어가 아니라 적극적인 방어로 되여야 한다. 진지에 가만히 앉아서 적이 공격해올것을 기다렸다가 때리려고만 하여서는 안되며 부단한 습격조활동으로 적의 유생력량과 무기, 전투기술기재에 손실을 주며 적들을 피로케 하고 늘 공포에 떨게 하는것이 중요하다. 양만춘은 리적의 선봉부대가 고연수, 고혜진이 거느린 고구려지원군의 공격을 받고 혼란에 빠져있을 때 성문을 열고 제때에 반격으로 이행하여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때때로 야간습격전을 조직하여 적의 진영을 혼란에 빠뜨리고 적을 피로케 하였다. 피동적인 방어가 아니라 적극적인 방어전을 도입한데 바로 양만춘이 군사예술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있는것이다. 양만춘은 특히 평소에 군사들의 사격술을 높이는데 깊은 관심을 돌리였다. 안시성군사들의 높은 사격술에 적들은 혼쌀이 났다. 안시성공격때 당태종은 양만춘이 쏜 화살에 맞아 애꾸가 되였다고 한다. 양만춘의 능숙한 지휘를 받은 안시성군민들의 완강한 항전에 의해 패배를 거듭하며 앉아뭉개던 적들은 바다길로 적의 배후에 진입하여 퇴로와 보급로를 끊어놓은 연개소문의 적후교란활동으로 더는 견딜수 없어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양만춘은 곧 추격을 조직하여 퇴각하는 적들에게 다시한번 심대한 타격을 안기였다. 옛 중국의 사가들이 인정한바와 같이 《소위 국가가 크고 갑병이 강하며 책략이 풍족함만을 믿고 이길수 있다》고 자부하던 당태종은 《소위 훌륭한 군사는 펴지 못하였다.》(묘한 계책을 내놓고 군대를 잘 지휘하지 못하였음을 이르는 말)고 하였다. 우리 나라 고전인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당태종이 《어질고 명철하여 세상에 드문 임금으로서… 군사를 다루는데 있어서 한없이 기묘한 전술로써 향하는 곳마다 적수가 없었다.》고 과대평가하면서도 《동방을 정벌하는 사업이 안시에서 패하였으니 안시의 성주는 그야말로 비상한 호걸이라고 할수 있을것이다.》라고 양만춘의 공적을 정당하게 평가하였다. 후세 우리 나라에서는 안시성군민들의 항전을 성을 끝까지 지켜내는 위훈의 대명사로 많이 이야기하였다. 참으로 양만춘은 군민을 단합시키고 불러일으켜 잘 준비된 위력한 방어수단들에 의거하여 뛰여난 군사적지략과 능숙한 전투지휘로 《명장》 당태종의 대군을 물리침으로써 적들의 속전속결전략을 파탄시키고 전쟁승리에 크게 기여한 군사가이다.
14) 처자를 죽이고 최후결전에 나선 계백
《살아서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통쾌하게 죽는것이 낫다.》, 이것은 죽음을 각오하고 최후결전에 나섰던 계백장군이 한 말이다. 계백은 나라와 겨레앞에 닥쳐온 위기를 한몸바쳐 막아낼 애국충정의 한마음을 안고 10배나 되는 신라군의 공격을 4차례나 짓부셔버린 명장이다. 계백(?-660년)의 출신과 생애에 대한 자료는 문헌기록에 전하는것이 거의 없다. 다만 660년에 있은 반침략전쟁에서의 공적을 보여주는 자료만이 남아 전한다. 신라대군과의 싸움, 그것은 그의 생애에서 마지막싸움이자 정치가, 군사가로서 그가 걸어온 인생의 총화였다. 660년 백제와 라당련합군과의 전쟁은 삼국의 인민을 노예화하고 기름진 땅을 빼앗으려고 침을 흘리던 당나라통치배들의 침략야욕과 외세의 힘을 빌어 무너져가는 통치기반을 유지하고 넓은 땅을 차지해보려던 신라통치배들의 령토적욕구에 의하여 강요되였다. 삼국시기에 고구려는 삼국의 통일을 정책으로 내세우고 남방진출을 적극 다그쳐나갔다. 연개소문때에 와서 더욱 맹렬해지는 고구려의 남방진출을 막아낼 힘이 없었던 신라통치배들은 외세에 의존하여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며 나아가서 자기의 령토를 넓혀보려고 하였다. 신라통치배들은 648년에 왕족인 김춘추를 당나라에 보내여 두 나라 군대가 힘을 합쳐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린 다음 대동강이남은 신라가 차지하고 그 이북은 당나라가 차지한다는 《비밀협약》을 맺게 하였다. 660년 백제에 대한 라당련합군의 침공은 이 《비밀협약》의 범죄적기도를 실현하기 위한 첫단계 작전이였다. 그러므로 당나라와 신라군대를 반대하는 백제인민의 투쟁은 반침략투쟁으로 되였으며 우리 민족의 자주권을 고수하기 위한 투쟁의 일환으로 되였다. 이무렵 백제의 의자왕을 비롯한 봉건통치배들은 나라의 방위력을 강화하여 외적을 막을 생각은 하지 않고 부화방탕하고 안일한 생활에 파묻혀 허송세월하였다. 백제의 국력은 쇠약할대로 쇠약해지고 국내에서는 정치적혼란이 계속되였다. 바로 이런 속에서 라당련합군이 동서 량쪽에서 백제를 협공하기 시작하였다. 임금의 부화방탕한 생활에 대하여 바른말을 한것으로 하여 《죄》를 짓고 감옥살이를 하던 성충은 이미 656년 죽기 전에 험한 지형에 의거하여 당나라와 신라군을 막을데 대하여 제의하였었다. 역시 임금의 부화방탕한 생활에 대하여 의견을 제기한것으로 하여 정배살이를 하였다고 보이는 대신 흥수도 성충의 의견과 마찬가지로 당나라군은 백강(기벌포라고도 한다, 오늘의 금강)어구에서 막으며 신라군은 탄현(침현이라고도 한다.)에서 막을것을 제의하였다. 그는 이곳들은 백제의 요충으로서 한명의 군사와 한자루의 창을 가지고 막아도 만명이 이를 당하지 못할 곳이니 마땅히 날랜 군사를 선발하여 그곳에 가서 지키게 하며 성문을 여러겹으로 닫고 든든히 지켜 적들의 물자와 군량이 떨어지고 피곤하여질 때를 기다려서 맹렬하게 치면 단연코 이길수 있을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계책들은 적아간의 력량관계와 백제가 두 전선에서 공격을 받고있는 형편에서 매우 정당한것이였다. 하지만 여러 대신들은 그의 정당한 제의에 대하여 그가 오래동안 옥중에 있으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니 그 말을 받아들일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차라리 당나라군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게 하여 강을 따라 배가 나란히 가지 못하게 하며 신라군사로 하여금 탄현으로 넘게 하여 소로길에 편대를 짓지 못하게 하고 이러한 때를 타서 군사를 풀어 치게 되면 마치 채롱에 든 닭과 그물에 든 고기를 잡는것과 같은것이라는 얼토당토않은 계책을 내놓았다. 이것은 결국 요충지를 내주고 그의 험고함을 적을 잡는 함정으로 리용하자는것이였다. 그럴듯 한 계책 같았지만 이것은 전혀 자기를 고려하지 않은것이였다. 당시 백제는 터진 채롱, 꿰진 그물이였던것이다. 의자왕은 너무도 취약한 자기의 힘을 헤아려보지 못해 이 계책을 승낙하였다. 한때는 총명과 효성으로 《해동증자》로까지 소문났던 의자왕은 지금 간신들의 요사스러운 말속에 밝은 귀를 잃었고 부화방탕과 안일사치, 궁녀들의 애무와 권주가속에 맑은 눈동자가 흐려있었다. 그에게는 연약한 백제의 국력으로써는 요해지를 지키는 길만이 살길이라는것을 헤아려볼 능력이 없었다. 라당련합군이 요해지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에야 의자왕은 생각되는것이 있는듯 급해맞아 달솔(좌평 다음가는 벼슬등급)장군 계백을 시켜 결사대 5,000명을 거느리고 황산으로 나가서 신라군을 막게 하였다. 계백은 명령을 받고 떠나기에 앞서 심중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였다. 《한 나라의 군사로서 당나라와 신라의 많은 군사를 대해야 하니 나라의 존망을 알수 없다. 나의 처자가 사로잡혀 노비로 될가봐 두려우니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것은 통쾌하게 죽는것만 못하다.》 이 말은 그가 《지피지기라야 백전불태하다.》 즉 적을 알고 자기를 아는것이 군사에서 매우 중요하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한 나라의 군사로서 당나라와 신라의 많은 군사를 막는것이 불리하다고 한것은 능히 적을 잘 알고있은것이라고 할수 있고 자기 처자를 죽이고 자기도 죽음을 각오하고 출전한것은 자기를 잘 안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당시 당나라와 신라는 잘 훈련된 대군으로 백제를 량익측에서 공격하고있었다. 계백은 적들과 그 대장들에 대해서 깊이 파악하고있었다. 당나라군을 책임진 소정방이나 신라군의 우두머리인 김유신은 다 당대 《명장》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였다. 그러한 적들을 막자면 성충이나 흥수가 제기한대로 요해지를 막고 적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다가 공격하는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였다. 그러나 의자왕은 성충이나 흥수가 다같이 임금을 《원망》하고있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일것이 못된다는 심술궂은 간신들의 말에 넘어가 천연요새지인 백강어구(기벌포)와 탄현(침현)을 내주었으니 이기는것은 바랄수 없는 일이였다. 더우기 신라군은 백제군의 10배나 되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다른 길은 없었다. 죽기내기로 싸워 신라군의 공격을 좌절시키든가 시간을 끄는 길밖에 없었다. 계백은 분연히 처자들을 죽이고 나라와 겨레를 지키기 위한 최후결전에 나섰다. 황산벌에 도착한 계백은 험한 지형을 먼저 차지하게 하고 결사대를 3개 부대로 나누어 분산배치하였다. 신라군사가 당도하여 싸움에 들어가기 전 계백은 이렇게 웨쳤다. 《옛날에 월왕 구천은 5,000명의 군사로 오나라의 70만대군을 격파하였으니 오늘날 우리도 각자가 용기를 내여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월왕 구천은 처음에 오왕 부차에게 패하여 와신상담하며 복수심을 안고 힘을 키웠다. 그리고 한편으로 범려의 계책대로 서시로 미인계를 써서 부차를 타락하게 하였다. 부차는 월나라를 멸망시켜야 한다는 명장 오원의 제의를 듣지 않았고 나중에는 그를 자살하도록 하였다. 그가 죽은 후 월왕 구천은 군사를 일으켜 부차를 공격하였다. 강화담판요구가 거절당하자 부차는 자살하기에 앞서 오원의 말을 듣지 않아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였다고 후회하였다. 계백이 비록 이 고사를 리용하였으나 그자신은 알고있었다. 그때는 강한 5,000명으로 제 나라에 대한 승산없는 공격을 부단히 벌린것으로 하여 지치고 부패해진 70만을 대항하였으니 승리할수 있었으나 지금은 사정이 달랐던것이다. 다만 계백은 군사들을 분발시키고저 하였을뿐이다. 워낙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결사대원들이였으므로 그의 호소는 즉시에 반응을 나타냈다. 더우기 대오의 맨 앞장에서 말을 달리는 계백의 투신력은 군사들을 감동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백제군사들이 한사람이 천사람을 당해내는 용맹으로 싸우자 신라군은 겁에 질려 퇴각하군 하였다. 악전고투하며 네번을 싸우는 과정에 신라의 5만대군은 기가 질리고 백제군의 사기는 더욱 왕성해졌다. 이 싸움은 계백의 군사적재능과 함께 장군으로서의 위엄이 있고 호령이 명백하며 그에 대한 부하들의 복종심도 강했다는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있다. 후세에 자기 처자들을 죽이고 출전한것은 너무 잔인한 짓이였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잔인》한 장수가 아니였다. 신라군의 소년장수 관창이 사로잡혀 백제군 원수인 계백앞으로 끌려왔을 때 계백은 그의 투구를 벗겨보고는 그의 어리고 용감한것을 아깝게 여기여 차마 죽이지 못하고 그냥 돌려보냈던것이다. 계백은 의협심도 있고 인정미도 있는 장수였지만 그에 구애되여 대사를 망치게 하는 그런 지휘관이 아니였다. 관창이 다시 백제군에 돌입하여오자 계백은 그를 용서없이 죽이여 군률을 세웠던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계백이 인정미없는 《잔인》한 장수가 아니였음을 보여주는것이다. 그가 처자를 죽인것은 오히려 처자를 노예로 내맡기지 않으려는 대장부의 뜨거운 사랑의 표시라고 볼수 있다. 그는 처자를 죽여 자기의 굳은 의지도 보여주고 군인대중을 격동시켰다. 5,000명의 군사를 분발시켜 10배나 되는 신라군을 네번씩이나 격퇴할수 있은것은 사실상 계백의 그 《잔인》한 행위의 결과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신라군장수들은 저락된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기 위하여 반굴, 관창 같은 어린 장수들을 제물로 바쳤다. 어린 장수들의 죽음을 목격한 신라군은 비분강개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백제군을 공격하여 승리할수 있었던것이다. 계백은 초기의 결심대로 신라군과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힘이 모자라서 전사하였다. 참으로 황산벌싸움은 백제군 장수 계백의 고상한 도덕적풍모와 군사적재능, 훌륭한 지휘능력을 보여준 전투였다. 리조의 14대임금 선조왕(1568-1608년)은 선대의 여러 왕묘들의 보호에 관한 지시를 내리면서 그 왕들과 함께 이름난 신하들의 묘도 단을 쌓고 《금화》(불 피우는것 금지), 《금벌》(채벌금지)할것을 명령하였는데 그중에는 계백장군도 들어있었다.
나라에 닥쳐온 위기를 한몸으로 막아나서 참답게 한생을 마무리한 계백장군의 이름은 후세에 길이 전해지고있다.
15) 발해국의 창건자 대조영
우리 나라 중세력사에는 《발해》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도 있었다. 발해는 고구려유민들에 의하여 옛 고구려땅에 세워진 강력한 주권국가로서 7세기말부터 10세기초까지 230여년간 존재하면서 해동성국(동방의 륭성한 나라라는 뜻)으로 이름떨치였다. 대조영은 바로 이 발해국의 창건자이다. 대조영(?-719년)은 고구려의 봉건귀족가문출신으로서 그의 아버지는 고구려말기 나라를 지키는 싸움에서 공을 세운 장수였다. 대조영의 생애와 군사적활동과 관련한 자료는 옛 문헌에 얼마 남아있지 않으므로 병법에 밝고 무술에 뛰여나며 인품이 출중한 창업군주로서의 그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대조영이 군사가로서의 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한것은 천문령전투이다. 이 전투는 발해의 건국과 직접적으로 련관되여있는것으로 하여 력사에 널리 알려져있다. 대중상은 젊은 나이에 고구려의 장수로서 당나라침략자들을 쳐부시는 싸움에서 용맹을 떨쳤다. 서압록수일대에서 부친 중상을 도와 당나라침략자들과 결사전을 벌리던 어느 날 뜻밖의 소식이 그들을 놀래웠다. 보장왕이 투항하고 연개소문의 셋째아들 연남산이 그뒤를 따랐으며 둘째아들 남건이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붙잡혔다는것이다. 668년 9월 고구려는 이렇게 자기 존재를 끝마쳤다.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로 아픈 상처를 씻어낼수는 없었다. 《복수하리라!》 대중상과 대조영 부자는 국토회복을 위한 싸움에 결연히 나섰다. 대중상은 유민들의 투쟁성과를 공고히 하고 더욱 확대발전시키기 위하여 태백산일대에로 거점을 옮기였다. 이 땅의 시원이 열리고 민족의 넋이 뿌리내린 조종의 산 태백산(백두산)은 대중상의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오던 곳이기도 하였다. 대조영은 18살이 되던 해 힘과 지혜를 훌륭히 갖춘 영웅이 될 결심을 품고 부모의 슬하를 떠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한 녀자스승을 만나 그에게서 병법과 무예를 익히고 그 누구도 견줄수 없는 힘을 소유하게 되였다. 태여날 때부터 자태가 남달랐던 대조영은 몸과 마음이 더욱 성장하여 키는 구척이나 되고 군사에 막히는데가 없었으며 뛰여난 문장술을 소유하고 무술에도 능하게 되였다. 대중상과 대조영부자는 고국회복을 위한 투쟁과정에 이룩한 첫 성과로서 앞으로의 더 큰 승리를 위한 투쟁거점으로서의 소국-진국을 세웠다. 대조영은 늘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를 증오하면서 기어이 복수하려고 하였으나 좋은 기회를 얻지 못하여 속을 썩이였다고 한다. 이제나저제나 그날을 기다리던 대조영에게 그 뜻을 이룩할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 690년대에 들어서면서 당나라의 내부는 썩고 병들어있었다. 그때 당나라에서는 고종왕의 처인 무측천이 실권을 잡고있었는데 그의 독단으로 왕권은 크게 뒤흔들리고 무씨일족들과 간신들이 그의 치마폭에 매달려 부화타락한 생활을 일삼고있었다. 북방의 돌궐과 서쪽의 토번의 부단한 침입과 살인략탈은 변경정세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봉건통치배들의 학정에 불만을 품은 인민들과 기미주에 속한 여러 소수 종족들의 소요도 증대되였다. 특히 영주에는 다치면 터질듯 한 팽팽한 분위기가 떠돌고있었다. 당시 영주에는 고구려멸망후 당나라군에 의해 끌려간 적지 않은 고구려유민들과 그 후손들이 살고있었다. 또한 거란인, 말갈인, 해인, 실위인 등 이족들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당나라의 가혹한 폭정에 대해 커다란 불만을 품고있었다. 특히 영주도독 조문홰의 횡포한 행위는 그들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해주었다. 고구려와 같은 강대국을 다시 일떠세울 포부를 안고 때를 기다리던 대조영은 영주에서 투쟁의 불꽃을 지펴올리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당나라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하여 《귀순》형식으로 일가식솔까지 거느리고 영주로 들어갔다. 대조영은 고구려유민들과 말갈인들을 결속시키는 한편 영주도독 조문홰가 흉년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거란인들을 구제하지 않고 또 그 추장들을 마치 노복과 같이 대해주는것으로 하여 그들에게 조성된 불만을 포착하고 그들을 폭동에로 추동하였다. 696년 5월 12일 대조영이 이끄는 고구려유민들은 리진충, 손만영이 거느린 거란인, 걸사비우가 거느린 말갈인들과 함께 폭동에 궐기하였다. 영주성을 점령하고 도독 조문홰를 처단하는것으로 시작된 폭동은 당나라땅을 뒤흔들어놓았다. 대조영은 고구려유민폭동군을 거느리고 말갈인들과 련합하여 주변의 여러 성읍들을 점령하면서 동쪽에로 진격할 준비를 갖추어나갔다. 그들의 성과에 발 맞추어 서쪽에로 전과를 확대해나가던 거란인들은 뜻밖의 난관에 봉착하게 되였다. 당나라로부터 막대한 보상을 받기로 한 돌궐군이 배후를 엄습해왔던것이다. 폭동이 일어나서 1년만에 거란인들은 돌궐군의 간섭으로 격파당하였으며 당나라통치배들은 이 기회에 동쪽으로 진군하여 고구려인들의 폭동까지 진압하려고 하였다. 폭동대오에 엄중한 시련이 닥쳐온 이무렵 고국회복을 위해 심혼을 바쳐온 대조영의 아버지 대중상이 병으로 사망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동맹자 걸사비우의 말갈인부대도 패하였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대조영은 준엄한 시각에 불굴의 의지를 가다듬으며 최후결전에 일떠섰다. 고구려유민들은 물론 패하여 흩어졌던 말갈인들도 복수를 다짐하며 모여들었다. 수십만군중이 대조영의 휘하에 모여들었다. 대조영은 승리의 신심을 굳히며 당나라《토벌》군을 격파할 계획을 세웠다. 대조영은 적들의 심리상태와 적장들의 준비정도를 타산한데 기초하여 유인매복전을 벌리기로 하였다. 적들은 걸사비우의 말갈인폭동군을 격파한 승리에 도취하여 기고만장해있었다. 이런 적에게는 더 큰 《승리》를 주어 완전히 분별을 잃게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전국을 판별할 능력도 잃게 해야 하였다. 적 《토벌》군 대장인 리해고는 원래 거란폭동군의 장수로서 당나라에 투항한 자였다. 그는 옹노쓰기, 말타고 활쏘기, 창다루기에 매우 능하지만 용병에는 어두웠다. 대조영은 정예기병 3,000명으로 유인대를 편성하였다. 그들의 임무는 적들과 대전하여 패하는척 하여 적들이 더욱 기고만장하여 따라오게 함으로써 천문령골짜기까지 깊숙이 끌어들이는것이였다. 기본주력부대는 골짜기가 깊은 천문령의 좌우켠 릉선에 매복하였다가 적들이 함정에 기여들면 퇴로를 차단하고 공격을 들이대게 하였다. 대조영은 자신이 직접 유인대를 거느렸다. 유인대의 전술에 말려든 적들은 천문령까지 기세등등하여 추격해왔다. 허나 그곳이 함정이라는것을 깨달았을 때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대조영의 신기한 계책으로 적 《토벌》군은 천문령에서 독안에 든 쥐신세가 되고말았다. 력사에 《천문령전투》라고 전해진 이 싸움에서 고구려유민폭동군은 적 중랑장 색구를 포함하여 전군을 몰살시켰다. 대장 리해고만이 겨우 목숨을 건져가지고 도망쳤다. 천문령전투의 승리소식에 접하여 수많은 고구려유민들이 대조영의 휘하로 계속 모여들었다. 일정한 지역을 차지하고 활동하던 고구려항전세력들도 대조영을 찾아왔다. 대조영은 넓은 령토와 많은 인구를 가진 강대한 국가를 창건할수 있는 든든한 토대를 가지게 되였다. 대조영은 태백산일대에 세워졌던 소국-진국을 발전시켜 동모산에 수도를 정하고 발해대왕국의 건립을 선포하였으며 자신은 대왕이 되였다. 발해국의 창립은 30년간에 걸친 고구려유민들의 줄기찬 국토수복투쟁의 자랑찬 결실로써 고구려와 같은 강대국을 다시 일떠세우려던 그들의 념원은 비로소 실현되게 되였다. 대조영은 그후 발해국을 강화발전시키고 해동성국의 기초를 마련하는데서도 큰 공을 세웠다.
이처럼 대조영은 강한 의지와 뛰여난 재능으로 고구려의 계승국 발해를 세우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16) 천하를 크게 뒤흔들어놓은 대무예
대무예(719-737년)는 발해건국시조 대조영의 맏아들로서 발해의 2대임금이다. 그는 이름과 시호가 보여주는바와 같이 뛰여난 무예와 군사적공적으로 력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는 집권기간 부단한 군사활동을 벌려 옛 고구려의 령역을 대부분 회복하고 신라를 도와 일본침략선을 격파함으로써 겨레의 나라를 도와주고 흑수말갈과 당나라를 정벌함으로써 국가에 드리운 위협의 검은구름을 가셔내는데 기여한 정치가이며 군사통수이다. 719년에 부왕이 병으로 죽은 후 그의 뒤를 이어 옥좌에 오른 대무예는 자기의 군사적재능을 발휘하여 고구려와 같은 강대한 나라를 일떠세우기 위한 적극적인 군사활동을 벌리였다. 그리하여 동북의 여러 이족들이 두려워 복종되게 되였다. 대무예의 군사적재능을 보여주는 군사활동에서 대표적인것은 흑수말갈원정과 당나라와의 전쟁이였다. 이 두 싸움은 모두 적에 대한 주동적인 공격으로 특징지어지고있다. 726년 어느 날 발해의 왕성에는 긴장한 분위기가 떠돌았다. 조회장 북쪽의 룡상에는 곤룡포를 입은 근엄한 표정의 사나이가 틀지게 앉아있었다. 그가 발해의 임금 대무예였다. 그는 늘어선 대신들을 굽어보며 낮으나 힘있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흑수가 당나라에 가려면 반드시 우리의 지경을 지나게 된다. 그전에 돌궐에 토둔(관리)을 청할 때도 먼저 우리에게 알리고 우리와 함께 갔는데 지금은 우리한테 알리지 않고 당나라의 관리를 청하니 이것은 필시 당나라와 모의하여 등뒤에서 우리 나라를 공격하려고 하기때문이다.》 대무예의 판단은 정확하였다. 당시 발해는 이미 우리 나라의 북부, 중국 동북지방의 많은 부분을 포괄하는 광활한 지대를 개척하여 남쪽은 신라, 동쪽은 바다(동해), 북쪽은 흑수말갈, 서쪽은 거란과 각각 접하게 되였으며 정예부대 수십만을 가진 강국으로 장성강화되였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국의 장성에 커다란 위구심을 품게 되였다. 하지만 저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정면으로 대결하여 나설수 없게 되였다. 그리하여 《원교근공》의 책략으로 발해의 북쪽에 있던 흑수말갈의 힘을 빌어 발해를 견제하려고 하였다. 흑수말갈은 여러 말갈종족들가운데서 가장 강하였다. 다른 말갈부족들은 발해건국후 인차 포섭되였거나 의존하는 관계에 있었지만 흑수말갈만은 저들의 힘을 믿고 복속되지 않고있었다. 그러나 발해가 두려워 감히 독자적으로 다른 나라들과 관계를 가지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당나라의 사촉을 받아 독자적인 행동도 하게 되였으며 726년에 와서는 몰래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그의 《보호》를 요청해나서게 되였다. 이를 좋은 기회로 여긴 당나라는 기다렸다는듯이 즉시 흑수부를 《흑수주》로 개칭하고 자기의 장사(감독관)를 파견하여 흑수말갈을 발해공격의 돌격대로 만들어버린것이다. 이것은 발해에 있어서 커다란 위협으로 되였다. 만약 이것을 묵과한다면 발해는 앞뒤에서 공격을 받을수 있었다. 대무예는 군사가의 안목으로 사태를 예리하게 분석판단하고 즉시 대책을 세웠다. 그는 주동적으로 흑수말갈을 공격할것을 결심하였다. 대무예는 자기의 친동생인 대문예를 원정군의 총지휘관으로 임명하고 외삼촌인 임아로 하여금 그를 돕게 하였다. 조서를 맡은 대문예는 불안에 휩싸였다. 이미 705년부터 713년까지 당나라에 가있으면서 인구가 많고 땅이 큰데 늘 위축되여있던 그였던것이다. 한편으로 형인 대무예가 자기 용병술과 강한 국력을 믿고 조상의 나라 고구려의 령토를 수복한다면서 전쟁을 계속 벌려놓는데 대하여 늘 불만을 품고있었다. 옛땅을 회복한다는것은 결국 당나라가 빼앗은 땅을 되찾는다는것이다. 당나라는 대국이다. 대문예는 글을 올려 원정을 반대하였다. 발해보다 강대하였던 고구려도 당나라에 졌는데 발해가 그와 엇서는것은 자멸의 길이라는것이였다. 대무예는 몹시 불쾌하고 배반당한 느낌까지 들었으나 꾹 참고 원정을 계획대로 추진시키게 하였다. 원정군을 이끌고 출정의 길에 올랐던 대문예는 국경에 이르러 다시 원정의 중지를 애걸하는 편지를 올렸다. 대무예는 잔뜩 겁에 질려있는 문예를 그대로 두고서는 흑수말갈을 정복하고 고구려의 옛땅을 수복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그 대신 사촌형 대일하를 총지휘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문예는 조용히 없애버리도록 하였다.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것을 알게 된 대문예는 혼자서 사이길로 해서 당나라에 도망쳐버렸다. 당나라임금 현종은 대문예의 《보호》요청을 수락하고 높은 벼슬까지 주었다. 발해군은 계획대로 원정을 단행하였다. 발해군은 흑수말갈의 여러 부족들을 쳐서 항복시켰으며 다시는 발해를 반대하여 당나라와 협력하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내였다. 이 싸움은 사태의 본질을 예리하게 분석판단할줄 알며 일단 결심한 문제는 어떤 정황속에서도 끝까지 완강하게 내밀줄 아는 대무예의 군사적자질을 잘 보여주었다. 한편 대무예는 동생인 대문예가 배신한데 대하여 매우 격분하고 과거 고구려 말년의 반역자 연남생의 사건에서 교훈을 찾으면서 도망친 문예를 꼭 죽여버리려고 하였다. 그는 마문궤, 총물아를 당나라에 파견하여 대문예를 처단할것을 강력히 요구하게 하였다. 현종은 대문예를 은밀히 안서지방으로 피신시키고 따로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여 험한 지역에 귀양을 보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이 사실을 탐지한 대무예는 또다시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큰 나라라는것이 신의도 없이 권모술수로 일을 처리하는가고 호된 추궁을 가하였다. 더는 어쩔수 없게 된 현종은 비밀을 루설했다는 죄로 외교담당 관리인 홍려소경 리도수와 원복을 강직시키고 대문예는 일시 령남으로 귀양보내도록 하였다. 이 사건은 한다하는 대국도 잡아흔들면서 자기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적극 투쟁한 대무예의 담력과 배짱을 잘 보여주었다. 중국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은 이 사건에 대하여 평가하면서 《당명황(현종)은 힘으로 무예를 징벌할수 없었고 정면으로 문예를 비호해나설수도 없었으므로 겨우 거리의 협잡군놀음으로 일시를 모면하려다가 그것도 탄로되여 작은 나라로부터 막심한 수모를 당하고 자기의 신하 홍려소경을 파면하는것으로써 일을 마감지었으니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고 개탄하였다. 당나라는 대문예를 처단할데 대한 정당한 요구를 끝내 거절하였으며 얼마후에는 로골적으로 무력행사의 가능성도 시사하였다. 대무예는 당나라가 발해에 대한 침략위협을 여전히 버리지 않고있으며 때를 기다리고있다는것을 깨달았다. 당나라는 당시 나라의 동북변에서 맹활약을 하고있던 거란에 대처하느라고 발해를 침략하려고 하면서도 감히 덤벼들지 못하고있었다. 대무예는 당나라와 한번은 반드시 싸워야 한다는 관점에서 전쟁준비를 갖추게 하였다. 이러한 때인 732년초 발해에 매우 불리한 정세가 조성되였다. 732년 3월 거란의 추장 가돌한은 백산전투에서 패하여 멀리 북쪽으로 퇴각하였고 함께 활동하고있던 해족의 추장 리시쇄고는 5,000여호를 거느리고 당나라에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료서지방에는 당나라세력만이 남게 되였다. 이것은 당나라 동북변정세가 당나라에 리롭게 변화되였다는것을 의미한다. 사실 이러한 정세하에서 계속 대당강경정책을 실시한다면 당나라측의 반격에 부닥칠 위험성이 컸다. 어떻게 할것인가. 731년말에 이미 현종은 계속 대문예처단을 요구한다면 무력행사도 있을수 있다는것을 암시하였다. 지금에 와서 그것은 실현가능성이 높아졌다. 발해에 조성된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대무예에게는 가능하게 두가지 전략이 있었을것이다. 하나는 패하여 골짜기에 들어가 숨어있는 거란의 《여당》(나머지 무리)들을 리용하여 정세를 역전시키는것이였다. 거란의 《여당》들은 언제든지 다시 규합될수 있었으므로 당나라로서는 그들에 대해서 주의를 돌리지 않을수 없었다. 결국은 병력의 분산이 필수적으로 제기되였다. 다른 하나는 당나라가 반드시 발해를 공격할것이므로 유리한 조건에서 당나라를 치도록 하는것이였다. 이것은 모두 발해가 주동적인 공격작전을 벌릴것을 요구하고있었다. 대무예는 불리한 정황에서 물러서는것이 아니라 주동적으로 과감하게 맞받아나가기 위한 공격계획을 작성하였다. 732년 9월 대무예는 대장 장문휴에게 수군무력을 거느리고 당나라의 등주(오늘의 중국 산동성 봉래현 동남)를 기습공격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발해군이 유리한 조건에서 당나라군과 맞서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실시된 전술적조치였다. 이리하여 732-733년 발해-당전쟁이 시작되였다. 등주는 발해에로의 해상로의 출발기지이며 때때로 동방침략의 해상기지로 리용되군 하던 거점이였다. 여기에 미리 손해를 주면 《토벌》시기를 지연시킬수도 있고 그 힘을 어느 정도 약화시키는 일도 기대할수 있었다. 실제로 당나라는 발해의 주동적인 등주공격을 계기로 하남도에서는 등주방면에만 군사진영을 두었다. 그리하여 발해의 등주공격은 당나라의 병력을 료서방면에서 떼내여 분산시킬수 있게 되였다. 장문휴가 거느린 발해원정군은 맹렬한 공격작전으로 등주를 함락시켰으며 자사 위준을 잡아죽이고 반항하는 자들을 모조리 섬멸하면서 래주까지 쳐나갔다. 현종은 우령군장군 갈복순에게 명령하여 발해군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당나라군의 병력을 분산시키고 주의를 그쪽으로 돌리게 할데 대한 임무를 수행한 발해원정군은 《토벌》군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철수하였다. 당나라군의 주의를 등주에로 쏠리게 한 뒤 대무예는 지상무력을 거느리고 해상무력과의 협동작전밑에 당나라 영주, 평주지역의 여러 성읍들을 점령하면서 마도산방면으로 진출하였다. 이에 힘을 얻은 거란의 패잔병들과 당나라에 투항하였던 해족들까지 다시 당나라를 반대하여 일어났다. 이때의 상황에 대하여 옛 문헌에는 《네 번(발해, 돌궐, 거란, 해를 가리킴-인용자)이 구름처럼 밀려들고 10만이 비오듯 모여들었는데 군사를 움직이며 북치고 고함치는 소리가 100리에서도 들리고 산천이 낮에도 어둡고 땅과 나무가 모두 울리였다.》고 기록되여있다. 주동적인 공격작전으로 당나라에 타격을 주고 여러 종족들을 다시 불러일으켜 싸움에 나서게 함으로써 자기의 전략적목적을 달성한 대무예는 발해군대를 주동적으로 철수시켰다. 급해맞은 현종은 숙위로 가있던 김사란을 급히 돌려보내여 신라봉건통치배들로 하여금 발해의 남변을 치게 하였다. 이번에도 신라통치배들은 외세와 야합하여 동족의 나라를 치려고 출정하였다. 하지만 신라군은 발해변방군사들의 강력한 반타격전과 733년 겨울에 내린 큰 눈사태로 하여 과반수의 사상자만 내고 퇴각하였다. 732~733년사이에 진행된 전쟁을 통하여 대무예는 당나라군의 침략기도를 좌절시키고 그들이 발해침략에 대하여 다시는 로골적으로 떠들지 못하게 하였다. 이 전쟁은 발해에 조성된 위험한 정황속에서 주동적인 공격에로 이행한 대무예의 전략이 매우 옳았다는것을 잘 보여주고있다. 또한 그가 세운 전략과 그 실현을 위한 전술적조치들, 공격목표선택이 매우 정확하였다는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있다. 전쟁은 또한 수군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그를 효과적으로 리용할줄 안 대무예의 군사적재능도 잘 보여주고있다. 그는 수군무력으로 등주를 공격하는것과 같은 원정도 조직하였으며 지상무력의 공격을 잘 협조하게 하였다. 발해수군과 지상무력의 협동작전에 대하여 한유의 《오씨묘비》에서는 《발해가 바다우를 소란스럽게 하고 마도산에 이르니 관리들과 백성들이 살길을 잃었다.》고 전하고있다. 혼자 힘으로 발해를 대항할수 없었던 당나라는 전쟁후에도 계속 신라에 사신을 보내여 신라왕에게 발해원정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발해수군의 해상활동으로 길이 막혀버렸기때문에 라당련합에 의한 발해공격도 실현되지 못하였다. 대무예가 수전에 밝은 군사통수였다는것은 731년 봄에 신라를 도와 그 동변에 침입해오는 일본병선 300척을 격파하는 싸움을 지휘한 사실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이처럼 대무예는 담력과 배짱, 출중한 군사적지략, 대담한 공격정신으로 천하를 크게 뒤흔들어 나라에 닥쳐온 위기를 막아내고 겨레의 운명을 수호한 재능있는 정치가, 군사통수이다.
17) 자존으로 천하를 굽어보던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대흠무
력사를 좀 아는 사람들은 대흠무라고 하면 발해사연구에 귀중한 무덤비석과 벽화가 나온 정혜공주무덤과 정효공주무덤에 대한 생각을 곁달아 떠올릴것이다. 대흠무는 바로 그 정혜공주(둘째딸)와 정효공주(넷째딸)의 아버지였다. 사랑하는 딸들을 잃고 비애에 잠겨 조상전래의 돌칸흙무덤과 벽돌무덤을 요란하게 꾸려주고 벽화까지 그리여 지하궁전을 만들어주며 지상에서 못다 누린 행복을 저 세상에 가서 마저 누리도록 해주려고 마음쓴 다심한 아버지의 그날의 정경이 유적의 구석구석에 오늘도 느껴진다. 그러나 대흠무는 아버지이기 전에 자존으로 천하를 굽어보며 발해를 번영의 길에 세운 능력있는 정치가, 임금이였다. 그는 형인 태자 대도리행이 728년에 객사한 후 아버지인 2대 무왕 대무예의 어명으로 태자가 되였다. 737년에 대무예가 죽자 그는 숭경전에서 보위에 올랐다. 대흠무(737-793년)는 력대 제왕들가운데서 보기 드문 장수자로 200여년간의 발해력사에서 4분의 1을 차지하는 57년간의 오랜 통치기간에 정치, 경제, 문화의 여러 부문을 발전시켜 발해를 강력한 대국으로 세상에 우뚝 내세웠다. 대흠무는 집권후의 첫 사업으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당시 수도였던 《구국》일대는 천험의 요새이기는 하지만 경제를 발전시키는데서는 일련의 제한성을 가지고있었다. 그러나 새 수도로 정한 중경(화룡현 서고성자)일대는 토지가 비옥하고 관개에 편리하여 농업을 발전시키는데 적합하였으며 쇠돌광산이 곁에 있어 철생산을 늘일수 있었다. 또한 대흠무가 천도를 결심하게 된것은 부패한 정치를 일신하고 자기의 통치지반을 확립하려고 한데도 그 목적이 있었다. 발해국의 첫 수도인 《구국》에는 무력으로 고왕, 무왕의 전제통치를 뒤받침해주던 무신들이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있었고 국가권력은 권신들의 수중에 장악되여있었다. 당시의 형편에 대하여 일부 관리들은 《태묘》를 여는 의식을 빌어 대흠무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상소하였다. … 개국초에 관직을 설치하고 재상을 두어 6부를 거느리게 하였고 감, 시, 창고를 두어 6부를 돕게 하여 제도가 극성하였다. 그런데 법이 오래되고 쇠진하여 법 맡은 자는 선택하여 추천하는 사업을 모르며 군적을 보는 자는 군액을 모르며 지어 호구의 참과 모자람, 돈과 낟알의 많고 적음도 모른다. 감옥소송이 밝지 못하고 가렴주구를 다스리지 못하고있다. 호적을 짜고 법을 만드는 자는 가득하나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무릇 6부 백관의 근본은 정사를 하는것이다. 근본이 어지러우니 다스리지 못하는것이다. … 옛날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반드시 먼저 기강을 세웠으니 나라에 기강이 있으면 몸에 혈맥이 있는것과 같다.… 야심만만한 청춘의 열기로 정치를 펴나가던 대흠무는 자기 측근들을 추동하여 부패해진 정치실태를 까밝히게 하였으며 그것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국왕의 전제군주제를 더욱 강화하고 통치기구들을 정비보강하기 위한 대책들을 강구하였다. 대왕을 황상으로 높이여 부르게 하고 황제국가에 어울리는 관직, 벼슬등급, 훈급, 작위 및 복장제도를 제정하도록 하였다. 대흠무의 통치기간에 발해에서는 3성(정당성, 선조성, 중대성) 6부〔충부(리부), 인부(호부), 의부(례부), 지부(병부), 례부(형부), 신부(공부)〕제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기구체계가 완비되였으며 직할지에 대한 지방행정구역단위로서 5경 15부 62주가 정비됨으로써 지방행정기구체계도 완비되였다. 이밖에 후국과 속령들에 대한 통치체계도 갖추어졌다. 742년경에 단행되였다고 보이는 중경에로의 천도도 바로 이러한 새로운 통치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이였다. 그러나 얼마후에 수도는 다시 상경에로 옮겨졌다. 상경에로의 천도는 이웃한 당나라에서 《안록산의 반란》이 일어날 즈음에 거행되였다. 돌궐족계통출신인 안록산은 당나라임금 현종과 그의 애첩 양귀비의 총애속에 은밀히 반변을 준비하고있었다. 대흠무는 동방의 강국인 발해와의 관계를 잘 가지려고 애쓰면서 군비를 증강하고있던 안록산세력을 주시하면서 그들과 본국과의 관계를 리용하여 서부변경의 안정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앞으로 벌어질 복잡한 사태를 예견하고 천도준비를 다그쳤다. 755년 11월 안록산의 반란이 일어남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대흠무는 수도를 북쪽의 상경(흑룡강성 녕안시 발해진)으로 옮기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것은 안록산의 란을 계기로 당나라와 있을수 있는 군사적충돌을 미연에 방지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상경은 분지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주변은 장광재령과 로야령과 같은 산들로 둘러싸이고 홀한하(목단강)가 성을 감싸고 북으로 흘러 형세가 험하고 군사요충지로써는 리상적인 곳이였다. 동시에 넓은 평야가 펼쳐져있고 토지가 비옥하며 관개가 편리하여 농경을 발전시키는데도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있었다. 대흠무는 수도를 상경에 정하고 당나라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능동적으로 대처해나갔다. 당나라정부측과 반란군측에서 부단히 사신을 파견하여 지원을 요청해왔지만 모두 거절하였다. 당시의 복잡한 사태발전속에서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는것은 앞으로의 관계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수 있었다. 대흠무는 《안사의 란》의 후과로 당나라경내에 생겨난 《번진》들과의 관계에도 깊은 주의를 돌리였다. 특히 산동지방에 할거하고있던 평로치청과의 관계에 특별한 관심을 두고 친선관계를 유지하기에 노력하였다. 평로치청의 우두머리인 리회옥(리정기)은 고구려유민출신으로서 765년에 부하장병들의 요구에 의하여 당나라사람인 후희일의 후임으로 평로치청절도사로 되고 그후에 당나라임금의 《승인》을 받았다. 발해는 고구려계통출신의 권력자가 다스리는 번진을 방파제로 리용하려고 하였고 리정기는 당나라조정을 견제하는 세력으로, 자기의 후방안전을 도와주는 원조자로 발해를 리용하려고 하였다. 781년에 리정기가 죽은 다음 그의 아들 리납이 절도사를 스스로 세습하였다. 대흠무는 그들과의 관계를 계속 좋게 가지도록 함으로써 서부국경의 안전을 도모하도록 하였다. 한편 대흠무는 동족의 나라인 신라와 바다건너 일본과의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785년경에 수도를 동경(청진시 부거 혹은 중국의 길림성 훈춘 팔련성)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발해와 신라사이에는 역참이 개설되였는데 옛 문헌에 의하면 동경소재지인 책성으로부터 신라의 정천군(오늘의 덕원)까지 39개 역참이 있었다고 한다. 그 길을 따라 790년 3월 신라의 사신인 일길찬 백어가 북국(발해를 가리킴)에로 력사적인 행보를 하게 되였다. 대흠무는 통치 전기간 일본을 보잘것 없는 나라로, 일본의 임금을 속국의 제후와 같은 존재로 하대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일본이라는 나라는 발해에 비교도 안될만큼 뒤떨어져있었기때문이였다. 대흠무는 일본에 가는 사신들에게 국서도 지참시키지 않고 자기의 말을 구두로 전하게 하였으며 혹 문서를 보내는 경우에도 대충하였다. 그래도 일본측은 대흠무의 위세에 눌리워 발해사신들을 후대하여 보내였다. 대흠무가 대국이라고 자처하던 서쪽의 당나라에 취한 《오만》한 태도는 그의 자존심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잘 보여주고있다. 중국의 력사이야기책 《수당연의》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740년대초경이였다. 그때 당나라임금 현종은 양귀비를 무척 총애하며 그의 치마폭에 푹 빠져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지방의 관리들이 임금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공물을 올렸는데 도로에 끊길 날이 없었다. 이역의 여러 나라와 종족들도 령물스러운 새와 괴이한 짐승, 기이한 보물과 진귀한 토산음식물들을 가지고 산 넘고 바다 건너 바치러 왔다. 현종은 기뻐하며 멀든 가깝든 모두 손님으로 맞아주게 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발해국에서 사신을 보내여왔는데 요란한 토산물은 고사하고 국서 한통만 가지고왔다. 연변의 관헌들이 먼저 글을 보내여 보고하고 발해사신은 며칠후에 수도에 도착하여 관사에 들었다. 현종왕은 소감 하지장에게 관반사(접대사신)의 임무를 맡겨 사신이 온 뜻을 문의하게 하였다. 사신은 통역관을 시켜 《국왕께서 국서를 보내신 뜻을 사신들이 어찌 알리까. 당국 임금께서 글을 펼쳐보고 더 분명히 알게 되기를 바랄뿐입니다.》라고 대답해주게 하였다. 조회때 하지장은 발해사신을 데리고 들어가 임금에게 국서를 올렸다. 합문사인이 전달받고 어전에 가져갔다. 현종왕은 발해사신에게 관사에 돌아가 있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날의 선주관이였던 소경에게 개봉하여 읽게 하였다. 소경은 국서를 개봉해보고 깜짝 놀랐다. 글자는 초서도, 예서도, 전서도 아닌데 글자형태가 기이하여 전혀 알아볼수 없었던것이다. 《발해글자 형적이 모두 올챙이형태 같은데다가 신이 본시 용렬하고 우둔하여 판별할수 없으니 성상께서 밝혀주시기를 엎드려 기다릴뿐이옵니다.》 소경은 땀을 철철 흘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현종왕은 웃으며 시까슬렀다. 《경이 일전에 복랍이라고 읽어야 할것을 복렵이라고 하여 동료들에게 웃음거리가 된적이 있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다. 한자도 모르는것이 많거늘 어찌 하물며 발해글자이겠는가. 재상들에게 보이도록 하라.》 리림보, 양국충 두사람이 임금앞에서 보았으나 눈뜬 소경이였다. 어찌할바를 몰라하는 재상들의 꼴을 본 현종왕은 전문 외국글자를 번역하는 관리들을 불러 보게 하였고 또 조정에 가득한 문무관료들에게 다 보이게 하였다. 그러나 한사람도 아는 자가 없었다. 현종왕은 몹시 노하였다. 《당당한 천조에 숱한 관료들이 있으면서 한장의 발해국서를 종시 한글자도 아는 자가 없단 말이냐! 편지속에 무슨 말이 있는지 모르고서야 어떻게 회답을 할수 있겠느냐. 작은 나라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느냐. 3일내로 상주하지 못하면 조정관원들은 대소를 물론하고 모두 파직이다.》 조회가 파하자 여러 관원들은 답답한 마음을 안고 흩어졌다. 하지장은 관사에 가서 발해사신을 대접하면서 몇번이고 국서사건을 터놓으려다가 부끄러워 꺼내놓지 못하고 한숨을 쉬며 늦게야 집으로 돌아갔다. 우울한 심정에 즐겁지 않았다. 그때 리태백이 마침 하지장의 집에 얹혀있었는데 그 모양을 보고 사연을 물었다. 지장은 국서사건을 이야기하고나서 《이제 임금이 준 기한이 박두하여 매우 급하고 절박한데 상주할길은 없소. 만약 이 글자를 알수 있는 자가 있으면 어떤 사람임을 막론하고 천거하여 임금의 노여움을 풀어주련만.》 하고 덧붙였다. 리태백은 이 말을 듣고 미소하면서 발해글자도 번역할수 없는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지장은 기뻐하며 임금께 아뢰겠다고 하였다. 다음날 하지장의 상주를 받은 현종왕은 내시를 보내여 임금의 수레로 리태백을 데려오게 하였다. 리태백은 먼곳의 천한 선비가 배운것이 루추하고 귀한 사람들의 눈에 들게 하기에는 부족하니 감히 조서를 받들지 못하겠노라고 거절하였다. 내시는 그냥 돌아가 임금에게 상주하였다. 하지장은 현명한 그가 지난해 과거에 응시하여 떨어진것때문에 서민으로 입조하면 부끄러워 부름에 응하지 않았을것이라고 하면서 특별히 벼슬을 내려줄것을 희망하였다. 재상 양국충과 환관 고력사가 반대하였으나 여양, 왕진, 좌상 리적지 등이 《리태백은 기이한 재사니 신들은 잘 알고있소이다. 페하께서는 속히 부르시여 의심하지 말기를 바라나이다.》 하고 한목소리로 청하였다. 현종왕은 리태백에게 5품의 관과 띠를 하사하고 조정에 들어올데 대한 어지를 전하였다. 하지장이 임금의 명령을 전하며 리태백을 달래였다. 리태백은 하지장과 나란히 말을 타고 대궐에 들어갔다. 리태백을 본 현종왕은 기뻐하며 국서를 보여주었다. 리태백은 국서를 두루 훑어보고 아뢰였다. 《이역의 글자들이 각각 서로 같지 않은데 이것은 바로 발해국의 글자이옵니다. 다만 옛 제도에 이역에서 국서를 올리면 다 중국의 글자체를 따랐고 따로 부함(다른 함)에 본국의 글자로 베끼여 보내군 하였소이다. 지금 발해국이 표문을 갖추지 않고 마침내 국서를 올려 임금께서 보게 하였으니 이미 례를 다하지 않은것은 둘째치고 국서속의 말은 거슬리고 거만함이 더우기 한심하나이다.》 《그 국서안에 요구한것이 무슨 일이며 말한것은 무슨 말이냐? 경이 명백히 짐에게 아뢰여 듣게 하라.》 리태백은 명령을 받자 국서를 들고 임금의 앞에서 중국 당음으로 하나하나 번역해나갔다. 그 내용은 대체로 이러하였다. 《발해 대가독은 당조관가에 이 국서를 부치노라. 너희가 고려(고구려)를 차지한데로부터 우리 나라와 가까와지고 변강군사들이 루차 강역을 침범하였는데 관가의 뜻에서 나온것이리라 생각한다. 내 지금 참을수 없는것이니 관리를 파견하여 국서를 가지고와서 이에 대해 설명하며 장차 고구려의 176성을 우리 나라에 양도함이 옳을것이다. 나에게는 좋은 물건이 있으니 대신 보내줄것이다. 태백산의 토끼, 남해의 곤포, 책성의 메주, 부여의 사슴, 교힐의 돼지, 솔빈의 말, 옥야의 풀솜, 하타미의 붕어, 구도의 오얏, 락유의 배이다. 너희 집에는 다 구분이 있어 1년에 한번 공물을 바칠것이다. 만약 수락하지 않으면 우리 나라는 곧 군사를 일으켜 와서 쳐죽일것이니 또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가 보자.》 리태백은 소리를 높여 류창하게 번역하였다. 현종왕은 국서의 내용을 듣고 낯색을 흐리며 불만조로 관리들에게 물었다. 《발해가 무도하여 곧 고려를 차지하려고 하는데 재력이 다 소모되여 장차 어떻게 이에 응할것인가?》 리림보가 나섰다. 《발해인들이 비록 방자하게 큰소리를 치지만 그 병력을 헤아리건대 어찌 능히 천조에 맞설수 있사오리까. 이제 변장에게 지시하여 방어를 엄격히 하다가 침범하면 군사를 일으켜 치는것이 옳을것이옵니다.》 양국충이 뒤를 받았다. 《고려(고구려)는 멀고 원래 우리 령토의 밖에 있으며 그 군사들과 련이어 병화를 맺어 힘이 모자라는데 다 다루지 못할 땅을 다투는것은 앞으로 변방밖의 여러 성들을 버려두는것만 같지 못하나이다. 페하께서는 오직 힘껏 변방안의 지방을 굳게 지키는것이 편할것이옵니다.》 마침 조정에 있다가 두 재상의 말을 들은 삭방절도사 왕충사는 조심스레 자기 생각을 아뢰였다. 《옛날에 태종왕이 세차례 고려(고구려)를 치다가 재력이 다 소모되였소이다. 고종왕때에 이르러 대장 설인귀가 수십만의 용병으로 대소 수십차례 싸워서야 겨우 얻었나이다. 오늘 어찌 경솔하게 버리는 의견을 용납하리까. 다만 오늘날 태평세월이 오래되여 사람들이 얼마간 전쟁을 잊었으니 만약 다시 전쟁을 일으키면 작은 나라라고만 보고 적을 가볍게 대할수도 없소이다.》 여러 신하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현종은 침묵하며 결정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발해대왕(대가독) 대흠무가 보낸 《거만》한 국서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당시 당나라조정의 당황망조한 모양을 보여주는 이야기의 한토막이다. 일부 인물들은 허구이지만 리태백이 발해국서를 번역한 내용은 진실이다. 국서내용에서 고구려의 176성을 양보하라는것은 당시 옛 고구려의 령역을 거의 전부 차지하고있던 발해가 당나라의 《안동도호부》를 페기하라는 요구였다고 볼수 있다. 《안동도호부》는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둔 통치기관이였는데 고구려유민들의 투쟁에 의하여 쫓겨나 그무렵에는 연군(의현)에 가있었다. 유명무실한 통치기구로 전락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나라는 이 기구를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동방에 대한 지배를 유지해보려고 하였다. 발해는 이 원한의 표적을 없애버리려고 하였다. 발해의 강경한 자세는 만약 말을 듣지 않으면 다시 군사를 일으켜 치겠다는 위협적인 언사에서 찾아볼수 있다. 당나라가 743년에 《안동도호부》를 료서고군성에로 옮기고 756년경에는 아예 철페해버리고만것은 발해의 강경한 자세와 관련되였다고 볼수 있다. 대국이라고 자처하던 당나라를 《너희》라고 하대하며 령토반환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군사를 일으켜 치겠다고 호통식의 편지를 써보낸 발해 제3대왕 문왕 대흠무. 그 위력으로 그는 주변의 여러 종족들을 제압하고 포섭함으로써 령토완정을 이룩하고 국토를 넓혔다. 조상의 나라를 크게 일떠세우리라는 웅지를 품고 청춘의 기백이 넘치는 홍안의 나이에 룡좌에 올라 년호를 《대흥》이라고 정하였던 대흠무. 774년에는 각종 문물제도를 완비하고 국력이 강화되는데 만족하여 나라의 복록이 영구하라는 의미에서 년호를 《보력》이라고 고쳤던 대흠무. 57년이라는 오랜 통치기간에 그가 발해국의 륭성을 위하여 한 일도 결코 적다고 할수 없다. 아마 대흠무자신도 그것을 자부하였기에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이라는 요란스러운 존호까지 괴여올리게 하였으리라. 《대흥》과 《보력》은 년호이고 《효감》은 효행의 덕이 스스로 신인을 감동시켰다는 뜻이다. 유교에서 쓰이는 이 표현의 적용은 대흠무를 존중하고 숭배하며 미화하자는데 목적을 둔것이며 이것을 통하여 그가 봉건적유교사상으로 나라를 세우고 다스리는 근본을 삼았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금륜성법》은 불교에서 쓰는 말이다. 《금륜》은 불교에서 말하는 《삼륜》(풍륜, 수륜, 금륜 혹은 지륜)가운데 하나이다. 금륜은 금륜전륜성왕이 감득한 7보가운데 하나로서 금륜의 전륜성왕을 금륜왕이라고도 한다. 이 륜이 굴러가는 곳이면 그곳에서는 모두 항복하고 귀순하였다고 한다. 당나라 녀임금 무측천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자기의 존호를 금륜성신황제라고 칭하게 했다. 대흠무가 존호에 《금륜성법》을 덧붙인것은 불교를 숭배하고 그것으로 백성을 다스리며 저들의 통치를 유지하려고 한데 그 목적이 있었다. 요란스러운 존호를 괴여올리게는 하였지만 그는 나라의 국력을 강화하고 높은 자존심으로 천하에 발해를 우뚝 세움으로써 그 존호에 어울릴만 한 공적을 세운 정치가이며 우리 민족사에서 자랑할만 한 군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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