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광명의 길을 찾아서
김명준
1930년대 초만 해도 내가 살던 통화지방에는 독립군이 많았다.
나는 독립군이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는 군대라는것을 마을사람들을 통해서 들었으며 나자신도 또한 그렇게 믿었기때문에 철이 들면서부터 독립군에 입대할것을 몹시 희망하였다. 16살나던 해 여름에 나는 이웃마을에 독립군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입대하려고 찾아가기까지 했었다. 그러다가 일제놈의 밀정이라는 혐의를 받아 그들에게 따귀를 맞고 며칠간 감금당했다가 아버지가 불리워와서야 겨우 석방되여나왔다.
그러나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1934년 여름 나는 다시금 내 친구 한 동무와 짜고 남모르게 집을 떠나 연사흘을 걸어서 홍경현 연통산부근에 있는 독립군을 찾아갔다. 우리는 거기서 다시금 입대를 거부당했다. 장이나 두어독 더 먹고오라는것이였다. 그러고보니 집에 다시 되돌아갈수도 없어 이왕 나선바에야 끝까지 자기 결심을 관철하려고 그 부대의 뒤를 먼발치에서 그냥 따라갔다. 부대가 휴식할 때는 달려가서 그들의 잔시중을 열심히 들어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한 보름을 계속했더니 그 부대의 중대장이 비로소 우리를 련락병으로 입대시켜주었다.
그러나 정작 입대하여 생활하는 과정에 나는 자기가 여직껏 생각해오던 독립군과는 너무도 판이한데 대하여 실망하지 않을수 없었다. 물론 독립군이 조선독립을 위하여 일제를 반대해 싸워오고있는것만은 사실이였다.
그들은 한때 일제를 무찌르는 싸움에서 용감했으며 적지 않은 전투에서 승리도 거두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인민의 군대가 아니였으며 앞으로 조선을 어떻게 독립시키겠다는 정치적강령조차 없었을뿐만아니라 이미 이 시기에는 일제를 타승하리라는 신심마저 잃고있었다.
실지 이 시기 독립군이란 어지간한 부락하나도 진공할 능력이 없어서 불가피한 방어전외에는 전투도 피해버렸다. 그러다나니 자연 총은 낡은 《로국대》그대로였고 탄알도 구할 길이 막혀버렸었다. 기껏 한다는것이 압록강 물목을 지키다가 흘러가는 떼목이나 잡아세워놓고 거기서 량식을 얻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복하고 조선인부락에 내려가서 징수한 군자금으로 나날을 보내는 형편이였다.
초기에는 그렇게도 열성적으로 방조해주던 인민들도 이제와서는 독립군을 두려운 존재로 여기고 외면하게 되였다.
거기에 일제군경들의 《토벌》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바야흐로 독립군은 걷잡지 못할 붕괴의 구렁텅이에 직면하고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령도하시는 조선인민혁명군부대가 온 동북땅에서 혁명의 불길을 일으키며 일본제국주의자들을 섬멸하고있다는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일부 부대는 이미 독립군의 활동구역이던 흥경, 통화, 관전, 집안, 환인, 본계호에까지 진출하고있었다.
더우기 위대한 수령님께서 축지법을 쓰시여 일제의 대부대를 몰살시켰다는 소문에 우리는 조선에 장수가 났다고 경탄할뿐이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조선인민혁명군이 어떤 군대인지, 무엇을 위해 싸우는 군대인지조차 알지 못하였다. 뿐만아니라 편협한 민족주의자들이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하여 갖은 비방중상을 퍼부었기때문에 우리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이 조선독립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것으로 속아오고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언제까지나 그들의 비방중상에 속고있지는 않았다.
1936년 정초인 날씨가 몹시 추운 어느날이였다. 우리들은 집안현의 한 산간부락에서 우연히 조선인민혁명군의 일부 소부대와 만났다. 그들은 우리가 뒤늦게 그 부락에 도착했기때문에 집에 들지 못하는것을 보자 자진해서 자기들이 들었던 집을 성큼 내주었으며 또 우리가 량식이 떨어진것을 알자 얼마안되는 자기들의 식량까지 갈라주었다.
한밤중에 내가 잠에서 깨여나 밖에 나갔을 때였다. 문득 마당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등불이 꺼져가는 둘레에 웬 사람들이 강낭짚을 깔고 서로 껴안고서 자고있었다. 더 자세히 살펴보던 나는 그들이 바로 우리에게 군말없이 집을 내준 조선인민혁명군 동무들이라는것을 알자 그만 놀라서 어쩔줄을 몰랐다. 나는 방안에 얼른 들어가 동무들을 깨웠다. 동무들은 나의 말을 곧이 듣지 않았다. 나중에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고야 그들도 눈을 휘둥글게 떴다. 우리는 자리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설한풍이 윙윙 소리치며 악을 쓸 때마다 나의 마음은 미안한 생각에 차서 마치 바늘방석에라도 누워있는것만 같았다. 나는 세상에 태여나 이런 사람들을 처음보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령도하시는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군대가 어떠한 군대이라는것을 우리들은 체험을 통해서 알기 시작하였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들은 어느새 일어났는지 벌써 밖에서 주인집마당을 쓴다, 물을 길어다준다 하며 그 집 주인내외의 일들을 도와주기에 법석들 하였다. 집주인은 이사람저사람 붙잡고는 당신들이야말로 진짜 우리 군대라고 하면서 어쩔줄을 몰라하고있었다.
우리는 그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면서 자신들을 뉘우쳤다. 우리 자신들이 가난한 집안 자식들이면서도 여직껏 인민들에게 이렇게 대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큰일이나 하는것처럼 그들을 괄세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니 인민들로부터 고립될것은 뻔한 리치였다. 나는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르는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있기가 몹시 면구스러웠다. 나는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해서 많은것을 알고싶었다. 그러나 우리는 곧 그들과 갈라져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다.
집안현 산간부락에서 만났던 조선인민혁명군이 우리에게 준 큰 영향은 나로 하여금 잊지못할 충격으로 가슴에 인박아놓았다. 그리고 나의 머리 한구석에서는 언제나 그 인상이 소용돌이쳤다.
이해 봄 어느날이였다.
독립군내에는 지휘부에서 들은 이야기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하여졌다.
…조선인민혁명군의 한 부대가 환인지방에서 일제의 련락수송차를 습격하고 그 수색과정에 일제놈들의 중요한 비밀문건을 발견하였다.
그 비밀문건의 내용은 독립군으로 하여금 조선인민혁명군을 의심하게 하고 반목, 알륵을 일으키게끔 조작한것이였다.
악랄한 일제의 흉계를 사전에 알게 된 조선인민혁명군부대에서는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독립군지휘부에 놈들의 위조문건이며 위조편지들을 보내왔고 그와 함께 원쑤일제를 반대하여 같이 손잡고싸우자는 친선의 편지도 전해왔다는것이였다.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우리들은 새삼스럽게 일제의 간책에 격분하였고 동시에 조선인민혁명군이야말로 진실로 우리의 벗이라는것을 더욱 똑똑히 알게 되였다.
이리하여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령도하시는 조선인민혁명군을 더욱 동경하게 되였으며 자주 전해오는 그들의 활동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의 마음은 그리로 달려갔다. 이러한 생각은 비단 나혼자뿐만이 아니라 부대내 많은 동무들의 공통된 념원이였다.
우리들은 보초를 설 때나 혹은 잠자리에 같이 누워잘 때나 뜻이 맞는 동무들끼리 모이기만 하면 우리가 조선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자기들의 심정을 털어놓군 하였다. 개중에는 부대에서 도주할 계획을 짜는 동무들까지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 혼자나 둘이서 대렬을 떠난다는것은 모험이였다. 그것은 어디 있는지 딱히 알지도 못하고 조선인민혁명군을 찾아서 무턱대고 산속을 헤매다가는 언제 어디에서 적《토벌대》와 맞다들지도 모를 일이기때문이였다.
그해 여름 어느날이였다. 통화현 어느 강옆을 따라 남으로 이동중에 있던 우리는 강건너에 적대부대가 나타났다는 긴급련락을 받고 당황망조하였다. 그래서 모두 몸을 은페하느라고 야단했고 일부 겁쟁이들은 명령도 없이 뛰여달아나기까지 했다.
우리는 숨을 죽이고 《적》을 주시했다. 정말 한 대부대가 위풍당당하게 강기슭을 따라 올라오고있었다. 그런데 이 부대는 적부대가 아니라 바로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것을 대화를 통하여 알게 되였을 때 우리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쉴수 있었다. 그리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나는 그 씩씩한 대오의 활기있는 행군을 보면서 높뛰는 가슴을 억제할수 없었다. 그 부대에는 기관총도 많았고 복장도 훌륭했으며 사람들도 모두 끌끌해보였다. 나는 혹 대렬선두에 선 지휘관이 김일성장군님이 아닌신가 하여 눈을 비비고 유심히 바라보기도 하였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강을 건너 그 대오에 따라서고싶었다. 그러나 당시 상관의 통솔하에 있다는 사정도 있지만 나에게는 아직 그러한 대담성과 결단성도 없었다. 다만 나는 불같이 일어서는 마음의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그들이 다 사라질 그때까지 우두커니 그 뒤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우리도 다시 행군을 시작하였다. 나는 그들과 반대방향으로 스적스적 걸어가는것이 못내 안타까왔다. 걸으면 걸을수록 그들과의 사이가 점점 더 멀어져가는것이 서운했고 다시는 만나지 못할것만 같은 영원한 작별처럼 쓸쓸했다. 많은 동무들이 역시 이러한 생각에 잠겨서 음울하게 걷고있었다.
나는 이렇게 속다짐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가자. 여기에 더 머물러있으면 있을수록 우리앞에는 전도가 없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계시는 그곳으로 가야 한다. 거기에서만이 우리의 념원인 조선의 독립도 성취할수 있기때문이다. 내 멀지 않아 그대들의 뒤를 따라갈것이다.)
이러한 지향은 내가 속한 독립군 상층내부에서도 생겨나고있었다. 특히 최윤구사령은 독립군이 조선인민혁명군에 련합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내세우고있었다. 그는 한때 백두산일대에서 활동한바 있어서 동만사정을 잘알고있었으며 특히 위대한 수령님에 대하여 경모의 정을 품고있었다. 그는 빈농출신이였고 병사로부터 발전하여 방면군사령관(당시 독립군에는 총사령부밑에 3개의 방면군으로 부대가 편성되여있었다.)의 직위에까지 오른 사람으로서 병사들은 그를 몹시 존경하고 따랐었다. 그도 또한 우리들과 차별없이 접근해서 여러가지 세상형편을 이야기해주었고 때로는 우리가 묻는대로 위대한 수령님의 탁월한 지략과 풍모에 대하여 알려주군 하였다. 그와의 담화를 통하여 우리는 조선인민혁명군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 군대인지를 초보적이나마 알게 되였다.
이러한 과정에 우리앞에는 실로 운명을 좌우하는 획기적인 사변이 일어났다. 그것은 1937년 8월경에 조선인민혁명군대표가 독립군대표를 만나 조국광복회조직에 망라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회담을 진행한것이였다.
이 회담을 통하여 우리는 비로소 위대한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조선혁명에 대한 로선을 명확히 인식하게 되였으며 그이께서 조직하신 조국광복회에 참가함으로써 우리도 참다운 조선인민이 나아가는 길을 따라설수 있다는 신심을 굳게 가지게 되였던것이다.
회담에서는 또한 독립군에서 조선인민혁명군에 들어올것을 제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받아주겠다는것도 제의되였다. 이것은 다름아닌 그이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따뜻한 구원의 손길이였으며 날이 갈수록 암담하며 붕괴의 구렁텅이에서 허덕이고있는 우리를 휘황한 광명의 길에로 인도해주시는 크나큰 배려였다.
회담이 있은 이후 우리는 의식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지휘부내에서도 최사령을 비롯한 많은 량심적인 간부들이 조국광복회 10대강령을 적극 찬성하였으며 독립군이 조선인민혁명군에 편입되여야 한다고 주장하여나섰다.
그러나 당시 총사령이던 문가는 이것을 완고하게 반대하였다.
이해 겨울에 접어들면서 일제는 가장 혹독한 《토벌》을 독립군에게도 들이대였다. 우리는 자주 놈들의 포위에 들었으며 계속 추격을 받게 하였다. 총탄이 떨어져 사령이 지팽이로 전투지휘를 하게 되였다. 겨울을 날 일도 막연하였다. 지휘부에서는 이러한 정황에 부딪치자 완전히 사기를 잃고 그해 겨울은 적《토벌》을 피해 관전현 운지거우치기에 가있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두곳으로 갈라져서 각기 등성이를 하나 사이두고 밀영을 짓고 량식도 마련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독립군부대는 겨울을 보낼수 없었다. 설을 쇠기 위해 공작나갔던 몇사람이 소를 끌고 밀영으로 들어오면서 발자국을 제대로 메우지 못한것이 적에게 발각되여 놈들이 불시로 달려들자 우리는 또다시 산속을 방황하게 되였다. 먹을것도 의지할곳도 없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오직 투항의 길이냐, 그렇지 않으면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넘어가느냐 하는 두갈래의 길이 앞에 가로놓여있을뿐이였다. 부대내에서는 도주자, 변절자들이 생겨났다.
눈이 녹기 시작하고 산에서 눈사태가 골안을 울리는 그 이듬해인 1938년 3월초의 어느날이였다.
지휘부의 명령으로 독립군 전체 성원들이 정렬되였다. 겨우 100명 남짓한 인원이였다.
지휘부성원들이 심중한 낯색들을 하고 우리들앞에 나타났다. 최사령이 우리를 뜻있게 바라보며 미소를 담고있었다. 우리들은 그 어떤 예감에 사로잡혀 숨을 죽이고 무엇인가를 기다리였다.
총사령 문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현재 독립군이 처한 실정을 뜨직뜨직 설명하였다. 그럴 때 그의 볼편은 떨리고 말이 자주 중단되였다. 우리도 사실 가슴이 아팠다. 가까스로 말을 마친 문가는 잠시 숨을 가다듬고나서 이렇게 소리쳤다.
《이중에서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갈 의향이 있는자는 앞으로 나서라.》
그것은 너무도 뜻밖에 내린 명령이여서 우리는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알수 없었다. 그가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넘어가겠다는 사람들을 군률에 적용시켜 《본때》를 보이려는 심산일지도 모를 일이였다.
일순간 폭풍직전과 같은 무서운 침묵이 무겁게 흘렀다.
(드디여 왔구나.)하는 생각이 번뜩 나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나는 결정적인 시각에 자기가 섰다는것을 의식하고 극도로 긴장하였다.
《아무도 없느냐?》
엎어누르듯 재차 다그치는 문가의 호령이였다. 최사령의 격려하는듯한 시선이 우리를 쭉 훑었다. 나는 아무 주저도 없이 성큼 한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비록 목이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 길에서 물러설수 없다는 굳은 결심이 나를 추동했던것이다. 그러자 나의 뒤를 이어 좌우에서 다른 동무들이 쑥쑥 따라나섰다. 내가 슬며시 곁눈질로 보니 평소에 조선독립을 진정으로 바라며 전투마다에서 가장 용감하던 동무들이 거의다 나서고있었다. 개중에는 이미 나이가 50살을 더 넘긴 로병사들까지 나섰다.
그 수는 부대성원의 반수가 더 되여보였다.
나는 기뻤다. 지휘부에서 어떤 의도밑에서 우리를 불러낸지는 모르나 어쨌든 우리가 그처럼 그리던 위대한 수령님의 품으로 가는 길을 택하여 용감히 나섰다는 오직 그 한가지 생각만으로도 가슴은 부풀어올랐다. 나는 나와 같이 나선 그 동무들이 더없이 미더웠고 그들과 같이 가면 어떤 적들과 맞다들더라도 무서울것이 없으며 어떤 난관이 막아서더라도 자신있게 뚫고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로 갈수 있다는 기운이 용솟음치는것이였다.
지휘부성원들은 자기들끼리 한참 무엇인가를 토의하고있었다.
이윽고 문가가 다시 우리앞에 나와 입을 열었다.
《여기 앞에 나온 사람들은 오늘부터 최사령의 인솔하에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가서 싸우게 된다. 그것은 현재 독립군이 처한 처지가 곤난하기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도 뒤미처 분산된 소부대들을 모아가지고 뒤따라가게 될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일행은 최사령의 인솔하에 희망찬 앞길을 향해 떠났다.
그후 얼마안가서 문가가 인솔한 부대는 봉황성부근에서 일제《토벌대》의 매복포위에 들어 전원이 투항해버렸다.
내가 걸어온 이제까지의 길은 암담하였다. 부모를 따라 국경을 넘어 살길을 찾던 방황의 길, 독립군에 입대하여 붕괴의 구렁텅이에서 속절없이 헤매던 길에서 나는 광명의 길, 행복이 약속된 길에 처음으로 들어섰다.
먹지 못해 배가 고파도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기러간다는 그 희망으로하여 우리의 심장만은 그냥 높게 고동쳤다. 그이의 품을 찾아가는 길에 있는 험산준령도 굶주림도 우리의 속도를 늦추지 못했다.
(어서 그이께서 계시는곳으로 가자, 그래서 우리가 지나보낸 헛된 나날을 메꾸며 힘껏 싸우자.)
우리의 행군은 며칠을 두고 계속되였다. 먼저 떠나보낸 련락원이 약속된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장소에는 적《토벌대》가 나타났다. 사흘을 굶고난데다 또 눈길속의 강행군으로 몸은 더없이 지쳤으나 우리는 놈들과 싸우면서 그이께서 계시는곳을 향해 전진했다.
(우리들이 가는곳, 그곳에는 무기도 총탄도 량식도 그리고 따뜻한 솜옷도 우리들을 기다리고있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 힘을 주고받으며 걷고 또 걸었다.
며칠후에 우리는 집안과 관전경계지점인 어느 골짜기에서 마중나온 유격대동무들과 만났다.
이리하여 나는 1938년 3월에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위대한 수령님의 전사가 되였다.(최윤구동지는 사령부 참모의 직위에서 사업하다가 1938년 12월 화전현 지방전투에서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그후 나는 남패자에서 오매에도 그리고 흠모하여오던 위대한 수령님을 드디여 만나뵙게 되였다. 그때 나는 그저 그이의 품에 안겨울고만싶은 그러한 격동된 충격에 자기를 억제하지 못하였다. 그이의 은정이 넘쳐흐르는 미소와 자애가 깃든 격려의 말씀은 나의 온몸에 파고들었다. 나의 손을 잡아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손길에서 나는 나만이 아니라 우리모두와 그리고 조선인민을 이끌어주시고 포옹해주시는 그이의 위대한 힘을 느꼈다. 그 순간 나에게는 그이의 명령이라면 목숨을 바쳐도 두려울것이 없다고 생각되였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 이제는 누구도 나를 김일성장군님곁에서 떼여놓을수 없다. 그이께서 부르시고 이끌어주시는 그곳으로 나아가는 길만이 우리모두의 진정한 행복의 길이니 어찌 그 길에서 내가 물러서며 어떻게 그 품을 떠나서 살수 있을것인가. 나는 영원히 장군님과 같이 가겠다. 그리고 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생사를 걸고 싸우고 또 싸우겠다.)
나는 이렇게 위대한 수령님앞에서 엄숙한 맹세를 마음속깊이 다지고 또 다지였다.
10. 첫행군의 날에
조명선
내가 어려서 살던 장백현 베개골은 압록강연안지대에 있는 조선인부락의 하나이다.
이곳은 일제경찰뿐만아니라 《국경수비대》, 《토벌대》, 헌병들이 주둔하고있는 장백현 소재지와 이도강에서 불과 30~40리밖에 되지 않는곳이여서 적들의 감시와 탄압이 혹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지대에까지도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파견하신 정치공작원들이 수시로 와서 혁명단체들을 조직지도하였고 인민들에게 반일사상을 해설선전하였다.
1936년 여름 어느날이였다. 그날도 정치공작원들이 우리 마을에 찾아왔었다. 그들은 비밀리에 조직된 우리 아동단원들과도 한자리에 앉아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령도하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정형을 재미나게 이야기하여주었고 혁명가요도 불러주었다.
이미부터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명성을 들었고 유격대원들의 용감한 소식을 알아온 우리들이였으나 이렇게 유격대원들을 가까이 만나서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기는 이때가 처음이였다.
비밀리에 만나는것만큼 조심스러운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그만큼 반갑고 미더운 마음은 그지없었다. 나어린 우리들뿐만아니라 어른들도 그러했다. 특히 청년들은 저마다 유격대에 입대할것을 탄원해나섰다.
김병희, 김룡연, 홍규표동무들과 특히 나와 한마을에서 자란 리두익동무가 입대하게 된것도 바로 이때였다. 당시 14살밖에 되지 않은 철부지인 나는 처음부터 이런 내막을 알리 없었다. 그들이 마을을 떠날 때에야 비로소 그들을 만나게 된 나는 리동무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곳으로 가게 됐다. … 이제부터는 나도 일제놈과 싸우는 소년유격대원이다.》하고 내 손을 잡아주며 벙긋이 웃던 리동무는 휭하니 달려가버리는것이였다.
나는 부러움을 금할수 없었다.
리동무를 데리고가는 유격대공작원을 급히 따라가서 나도 일제놈과 싸우는 소년유격대가 되고싶다고 졸랐다. 그는 내 나이가 리동무보다도 3살이 더 어리다고 하면서 나를 타이르고나서 군복주머니속에서 혁명가요집 한권을 꺼내주며 말했다.
《우리가 또 올테니 부모님말씀도 잘 듣고 아동단사업도 잘해라.》
혁명가요집을 받아들기는 하면서도 이런 말을 듣는 내 마음은 섭섭하기 그지없었다.
(한마을에서 함께 자란 두익동무는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곳으로 가는데… 나는 뒤떨어져 창가책이나 가지면 뭘하나.)
이런 생각을 하니 혼자남는듯 외롭기도 하고 무엇인가 잡았다놓친것 같아서 어찌나 마음이 서운한지 마을앞에 있는 둥지바위에 올라서서 그들이 사라지는쪽을 오래오래 바라보다가 그만 울음을 터치고말았다.
유격대원들이 다녀간후부터 마을에는 일제놈들이 더 싸다녔다.
나는 그놈들에게 들킬가 보아서 산으로 나무하러갈 때나 또는 밤중에 이불속에 엎드렸을 때 노래집을 가만가만 펼쳐읽군 했다.
《아동단가》, 《총동원가》같은것을 입속으로 외우느라면 그처럼 친근하였던 동무들이 간곳으로,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유격대로 가고싶은 생각이 더욱 불같이 치밀군 했다.
그럴수록 나는 유격대공작원이 타이르던 말을 명심하고 아동단사업에 더욱더 충실하기에 힘썼다.
이렇게 1년이 지나간 그 이듬해 여름 어느날이였다.
우리 마을 웃부락에 사는 로인한분이 우리 집에 와서 사이문을 닫고 우리 아버지와 무슨 이야기를 하고있었다. 나는 처음에 무심히 지나쳐버렸으나 《김일성장군님!…》이라는 말소리를 얼핏 듣게 되자 그만 버쩍 호기심이 나서 마침내 문짬에다 귀를 대고 엿듣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의 내용인즉 위대한 수령님께서 대원들을 거느리시고 조선으로 건너가 보천보의 일제놈들을 습격하셨다는것이엿다.
나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당장 뛰여들어가 그 로인에게 더 자세한것을 물어보고싶었다. 그러나 내가 들어가면 오히려 하던 이야기도 끊고말것 같아서 귀를 바짝 대고 문틈으로만 엿듣고있었다.
《장군님께서는 왜놈들이 그렇게 철통같이 막아선 압록강을 어떻게 건느셨을가?!》
감격하여 듣고있던 우리 아버지의 물음이였다.
《장군님께서는 축지법을 쓰신다는데 압록강쯤이 무슨 문제가 될라구. … 이 산에 번쩍 저 산에 번쩍 땅을 주름잡아다니시며 왜놈들을 치신다네.》
《이젠 밥을 안먹어두 살것 같군.》
《누가 아니래나. 나이라도 젊었으면 나도 그분을 따라 총을 잡고 왜놈들과 싸우겠네.》
이날 이런 말을 들은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꼭 유격대에 입대해야겠다는 결의를 더욱 굳게 하였다.
그후 며칠이 지났을 때였다. 보천보전투에서 승리한 유격대원들이 우리 아래마을에 들렸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나는 단걸음에 그곳으로 달려갔다.
마을어귀에는 조국광복회 회원들과 그곳 아동단원들이며 부녀회원들이 보초를 서고있었다. 그리고 마을집들에서는 모두 명절날처럼 사람들이 웅성거리고있었다. 이런 속에서 나는 유격대간부들이 있는 집을 찾아냈다.
그 집마당에는 수많은 청년들이 모여있었다.
어떤 청년들은 벌써 유격대군복을 차려입고 떠날 시간을 기다리기도 하고 또 어떤 청년들은 간부들과 담화를 하고있었다.
나는 입대자명단을 들고있는 간부에게로 달려가서 나도 이번에는 꼭 입대시켜달라고 탄원했다.
유격대원은 웃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며 머리를 쓸어주더니 이제 대답해줄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나는 조급하게 더 졸라댔으나 유격대원은 여전히 웃으면서 《입대하겠다는 동무가 말을 듣지 않으면 되나.… 이제 지시가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지.》하고 나를 한쪽자리에 가있으라고 했다.
거기에는 나처럼 나어린 아이들이 몇명 있었다.
나는 그들이 있는데로는 가고싶지 않아서 청년들속에 그대로 서있었다.
얼마를 그러고있을 때에 누구인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덥석 나를 그러안는것이였다.
《아, 두익동무!》
너무도 반가운김에 나는 군복을 입은 그의 몸을 마주 그러안았다.
《명선이두 기어이 유격대에 입대하게 됐구나.》
《뭘, 아직 모르겠어. 나는 나이가 어려서…》
반가움과 초조한 심정으로 리동무를 마주보며 내가 이런 말을 했을 때 그는 간부들이 발표한 소년중대입대자명단에 내 이름이 있었다는것을 말했다.
이 말에 나는 리동무를 다시한번 힘껏 그러안았다.
《정말이냐.》
《거짓말이야 왜 하겠니. 너에게 알리라고 해서 너를 찾아왔다. 그런데 …아동단에서 보초나 서고 통신이나 나르던것과는 딴판이다. … 그렇게 힘든데를 갈수 있겠니?》
리동무의 말이였다.
《념려말아, 아무리 힘이 들어두 참아낼테니. 그런데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어디 계시냐, 어서 가리켜주렴.》
《지금은 간부들과 회의를 하신다. 이제 행군할 때에는 뵈올수 있을거야. 어서 집에 가 인사하고 오너라. 이제 2시간후에 다시 모이라고 했으니 시간을 어기지 말아라.》
이 말을 들은 나는 급히 집으로 달려갔다.
우리 아버지는 내 말을 듣자 《아들 키운 보람이 있다.》고 하며 번쩍 안아올려주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어머니만은 선뜻 승낙을 하지 않았다.
《네가 그렇게까지 가겠다고 조르니 막을수는 없다. 그러나 철없는것이 그곳에 가서 장군님과 유격대아저씨들에게 근심이나 끼치게 되면 오히려 안보낸것만 못할것 같구나.》
어머니의 말씀이 떨어지자 나는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서서 날개라도 돋친듯 아래마을로 다시 달려갔다. 이때의 기쁘고 자랑스럽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흐뭇하다.
그때 소년중대에는 나처럼 나어린 동무들이 40명가량 있었다. 주요임무는 아직 나이가 어리니만큼 유격대원들을 따라다니면서 훈련을 하는것이였고 어느 일정한 지점에 도착하거나 또는 행군을 하면서도 유격대원들에게서 정치지식을 배우는것이였다.
우리는 그날밤 입대자들을 축하하는 모임에서 간부동지들의 연설을 들었고 마을사람들의 환송을 받으며 행군을 시작했다.
나는 용기를 내여 행군대렬을 따라섰고 지난날에는 숨어서만 부르던 혁명가요도 발걸음에 맞추어 높이높이 부르며 될수록 앞장에 서서 걸으려고 했다.
그날밤 아래마을을 출발한 행군대렬이 우리 마을앞 둥지바위곁을 지나게 될 때에 나의 마음은 진정키 어려웠다. 우리집 창문에 비친 등불이 보였을 때 나는 그만 《어머니!》하고 소리치며 달려들어가서 유격대처럼 몸차림을 하고 새 신에 새 모자를 쓰고 배낭까지 멘 내모습을 어머니에게 다시한번 더 보여드리고싶은 충동이 불현듯 일어났다.
그러나 나는 대렬에서 떨어질가보아 이러한 내마음을 애써 참았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하던 부탁을 생각하며 (김일성장군님과 유격대아저씨들에게 반드시 칭찬을 받는 소년중대원이 되겠어요.)하고 마음속으로 단단히 다짐을 하였다.
이렇게 마음을 굳게 다지는 나의 눈앞에는 뼈가 빠지게 일을 하고도 무명치마 하나 바로입지 못하고 겨울을 지내며 허리끈으로 배를 졸라매며 근근히 살아가시는 어머니의 수척한 모습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바로 그러한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마을사람들에게 빚진 돈과 쌀을 내라고 강다짐을 하고 매질을 하던 지주놈과 일제경찰놈들의 흉악무도한 낯판대기가 내주먹앞에 있는것만 같았다.
(내 반드시 네놈들을 잡아없애고 말테다.)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대렬에서 뒤떨어지지 않으려 더욱 노력했고 소년중대동무들이 주고받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무엇이든지 놓치지 않고 배우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나어린 나에게 행군의 길은 점점 힘겨워갔다. 산길에 들어서니 더욱 그러했다. 나보다 먼저 입대한 동무들, 특히 리두익동무에게 몇번이나 부축을 받게 되였고 숨이 차게 발을 놀렸으나 대렬을 따를수 없었다.
어디가 하늘인지조차 분간할수 없는 캄캄하고 우중충한 천고의 밀림속, 얼굴을 찌르는 나무가지와 가시덤불이며 어른의 키를 훨씬 넘는 갈대숲들이 앞을 가로막기도 하며 또는 어둠속 바위돌에 발끝을 호되게 찧고 넘어질 때도 있었다. 나는 아픈 자리를 더듬어볼새도 없이 급히 일어나서 유격대아저씨들이나 또는 리동무가 보지 않았나 하고 가슴을 두근거리며 대렬을 따라서군 하였다. 그런데 더 곤난한것은 울창한 밀림속에 이리저리 가로누운 몇백년씩 묵은듯 한 진대나무통들을 넘는 일이였다. 십리어간에도 이러한 나무통들을 수십개 또는 백여개씩 넘어야 했다. 아직 나이가 어리고 훈련이 부족한 나는 집채같은 진대나무통이 문뜩 앞에 나타날 때면 겁부터 났다. 진대나무통은 또한 밤이슬에 젖었으므로 기여넘다가도 자칫하면 미끄러져서 허궁 나가떨어지거나 요행 바라오르기는 했지만 앞이 캄캄한 깊은 숲속이라 어디가 낭떠러지고 바위벼랑인지 모르고 뛰여내리다가는 넘어질 때가 많았다.
이렇게 어물거리는 동안이면 행군대렬은 또 저만큼 가군 했다.
분대장이나 리동무가 이러한 나를 념려해주었고 앞서 가다가도 되돌아와서는 부축해주었다.
《어디 상하지 않았니. … 고집을 부리지 말고 내손을 잡고 걷자.》
《명선아, 너 한 1년 더 있다가 입대하렴. 혁명이 오늘래일에 끝나는것도 아닌데. 벌써 그렇게 힘들어 해서야 어떻게 따라다니겠니.》
리동무가 이런 말을 할 때 나는 그에게 지지 않겠다는 승벽이 부쩍 생겼다.
《그런 소린 왜 하는거야. 아무러면 내가 못따라설줄 알구 그래.》
이럴 때에도 리동무는 내말을 탓하지 않았다.
그역시 아직 나이는 어렸으나 1년전에 마을에서 함께 지낼 때와는 판판 딴사람 같았다. 그는 내가 굳이 사양을 하거나 지어 시답지 않은 대꾸를 해도 내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앞을 가로막는 나무가지를 젖혀주고 비탈길에서는 내손목을 잡아 이끌어올려주었으며 내가 대렬에서 퍽 뒤떨어졌을 때에는 묵묵히 숲사이로 사라지는 대렬을 살피면서 내가 따라서기를 기다려주군 하였다. 그러면서도 발이 부르트지 않았느냐고 하며 신발을 풀어보자고도 하고 등에나 깔따구가 있을듯 한 곳에 가서는 수건을 고쳐매주기도 하였다. 유격대아저씨들이 그럴 때에도 나는 여전히 사양을 해보았고 고집도 부려보았다.
그러나 행군이 장시간 계속됨에 따라 나는 차차 리동무나 유격대아저씨들의 손을 물리칠수 없었다.
걸어도걸어도 좀체로 끝장이 나지 않아서 나는 그들에게 이제 얼마나 더가야 하느냐고 묻기도 했다. 이럴 때에 나를 도와주던 유격대아저씨는 빙긋이 웃으며 행군은 이제 겨우 시작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런 행군은 비단 오늘 하루밤만이 아니라 일제를 물리치고 조국을 광복하는 그날까지 계속되며 이 준엄한 혁명의 길에는 가렬한 전투도 있고 헤아릴수 없는 고난과 때로는 죽음도 가로놓여있다는것을 숨김없이 말해주었다.
《나도 그건 알아요. 어서 휴식을 하게 되면 사령부에 가서 김일성장군님을 뵙고싶어 그랬지요.》
이렇게 대답하며 나는 길을 처음 떠날 때에 기세높이 부르던 《아동단가》나 《총동원가》의 씩씩한 구절들을 상기하군 하였다.
그러면서 실지행동이란 노래부르듯 쉽지 않다는것을 점점 더깊이 느끼게 되였다.
한동안 이렇게 행군을 계속하던 뒤에 우리는 밀영에 도착하여 휴식을 하게 되였다.
대렬이 멈춰서자 나는 아무렇게나 몸을 내던지듯 땅우에 털썩 누워버렸다.
발은 부르터서 물집이 잡히고 다리는 쑤시는데다가 손과 얼굴에 긁힌 상처로하여 온몸이 불속에 잠긴듯 했다.
그리고 도무지 기력을 낼수가 없었다.
감겨지는 눈을 애써 뜨고 수림사이로 트인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고향집뒤산에서 바라보군 하던 그런 하늘이였다.
또다시 어머니생각이 났고 나보다 먼저 유격대에 입대한 마을청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부터 나도 일제놈들과 싸우는 소년유격대원이다.》
나는 혼자 이렇게 입속으로 외우며 누워있었다. 이때 누구인가 나의 곁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났다.
《명선동무, 사령관동지께서 동무를 찾으시니 어서 가보오.》
이 말을 들은 나의 가슴은 설레였다.
이때까지 행군대렬에서 멀찌감치 그이를 뵙기는 했으나 가까이 만나서 말씀을 들은 일은 없었다.
(무슨 일로 나를 부르실가.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혹시 분대장이나 두익동무가 나의 약한 심정을 눈치채고 그이께 말씀을 드리지나 않았을가. 나를 돌려보내지나 않으실가.)
조심스러워지는 마음으로 위대한 수령님께서 계시는 사령부천막앞에 다가선 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들어섰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어느 부대의 간부인듯한 동무와 이야기를 하고계셨다.
《명선이가 이제야 왔군. … 기다리고있었는데, 자 어서 여기 와앉소.》
이렇게 말씀하시며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곁의 자리를 가리키셨다. 나는 더욱 어쩔바를 몰랐다.
《어째 그렇게 섰어. … 자 어서 여기 와앉으라구.》
인자하신 웃음을 담으시고 자리에서 일어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가까이오셔서 나의 손을 쥐시더니 식탁앞으로 이끌어주셨다.
《어때? 행군은 어른들에게도 힘이 드는데 명선이는 더할거야.》
그이께서는 자리에 앉으시며 이렇게 물으셨다.
《괜찮습니다.》
《뭘, 내가 다 알고있는데.…》
이 말씀을 들은 나는 그만 눈앞이 아뜩했다.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시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좀 힘들기는 하지만 참을수 있습니다.》
《그렇게 솔직하게 대답하는것은 좋은 생각이야. 명선이가 얼마나 참을성있는 소년이라는것도 나는 잘 알고있소. 두익이도 나에게 그런 말을 했소. 그렇지만 힘들 때에는 동무들의 방조도 받을줄 알아야 해. 괴로운 일도 함께 겪고 기쁜 일도 함께 겪는것이 동지간의 의리니까.》
나의 속심을 낱낱이 꿰뚫어보시고 나에게 옳은 생각과 새힘을 안겨주시는 말씀이였다.
이런 때에 밖에서 밥그릇을 들여왔다.
그이께서는 어서 먹으라고 나에게 권하시였다.
《명선이는 올해에 15살이라지. … 누구보다도 집생각이 더 날거야. 자, 어서 들라구.》
나의 등을 만져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그이의 어버이보다도 더 깊은 사랑을 생각할수록 나는 더욱더 새힘이 솟았다.
수많은 대원들을 거느리시고 가는 곳마다에서 인민들을 투쟁에로 고무하시기에 항상 바쁘신 그이께서 평범한 대원인, 아니 그보다도 이날 비로소 대오를 따라선 나어린 한 소년인 나의 마음속생각까지도 이렇듯 세심히 통찰하시고 그것을 풀어주시려는 자애깊으신 그이앞에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질뿐이였다.
(이처럼 나를 아끼고 사랑하여주시는 그이곁에 있는데 무엇이 힘들고 괴로우랴. 어찌 집생각이 나를 사로잡고 내 마음을 약하게 하랴.)
나는 밥을 먹으면서도 곰곰히 이런 생각을 하였고 그 후에도 두고두고 그이의 명령이라면 물불을 헤아리지 않고 집행해나아가겠다는 결의를 더욱더 굳게 다졌다.
첫행군의 날에 그리고 그때부터 나를 크나큰 사랑의 품속에서 키워주셨고 무한한 배려를 돌려주신 그이, 우리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시며 위대한 혁명의 선두에서 포악한 적들과의 헤아릴수 없는 가렬한 투쟁과 첩첩한 난관을 물리치시며 오늘의 이 승리와 번영에로 우리 조국과 인민을 이끌어주신 그이, 그이를 우러러 흠모하고 그이의 가르치심을 따라 걸음마다 세인을 놀래우는 혁신과 기적을 창조해나아가는 오늘의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을 구절구절 가슴에 아로새기며 휘황한 조국의 앞날을 향해나가는 우리의 온몸엔 새힘과 희망만이 용솟는다.
바로 이 신심과 투지로 위대한 수령님의 두리에 철석같이 뭉친 당원들과 전체 근로자들에게는 극복못할 난관과 애로가 없으며 싸우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신만이 있을뿐이다.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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