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봉오동 전투 승리로 이끈 대한독립군 홍범도 총사령관

프레스아리랑 | 입력 : 2020/11/02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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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홍범도 선생(1868. 8. 27. ~ 1868. 10. 25.)은 가난한 농부 홍윤식(洪允植)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여천(汝千)이다. 선생은 매우 어렵게 성장하였다. 

 
태어난 지 7일만에 어머니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하여 동네 부인네들로부터 젖을 얻어먹으며 자랐고, 또 9살 되던 해에는 부친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선생은 작은 아버지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며 지내다가 어느 부잣집의 머슴 노릇을 하기도 하였다. 
 
1895년 8월 일제는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895년 11월 강원도 회양에서 김수협과 의기상통하여 봉기한 뒤, 경기, 강원 지방과 관북지방을 연결하는 길목인 철령에 매복하여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소총과 탄약 등 전리품을 노획하여 함경도 안변의 학포(鶴浦)로 이동한 뒤, 여기에서 12명의 동지를 모집하여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최초의 홍범도 의병부대로 불린 이 부대는 안변의 석왕사에 주둔하면서 1896년 8월 북천지계(北遷之計)에 따라 북상하던 유인석의병부대와 연계하여 일본군과 세 번의 전투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 와중에서 김수협은 전사하고 나머지 의병들 또한 전사하거나 도주하여 선생 혼자 남게 되었다. 때문에 이후 선생은 1897년까지 평남과 함남, 그리고 황해도 접경지역에서 일본군을 살상하고, 친일 관리와 부호들을 응징하는 등 단독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선생은 함남 북청에 정착하여 1907년 후반까지 북청군 안산사 노은리에 거주하며 사냥과 농사에 종사하였다. 특히 이 때 선생은 안산사 일대 포수들의 동업조직인 포연대(捕捐隊)의 대장으로서 포수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선생은 포연대를 주축으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반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포수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여 갔다. 
 
한편 망국적 상황에서 포수들의 반일의식을 더욱 부채질한 것은 1907년 9월 3일 제정 공포된 ‘총포 및 화약류 취체법’의 강제 시행이었다. 이 법의 주요 내용은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무기와 탄약 및 무기가 될 수 있는 모든 장비를 정부와 관청에서 거두어들이고, 그 위반자를 처벌하도록 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법은 일제가 이 시기 전국적으로 파급되던 의병전쟁을 봉쇄하고 탄압할 목적으로 강행한 것이었지만, 총으로 수렵하여 먹고 살던 산포수들에게는 매우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때문에 산포수들은 일제의 침략에 대해 민족적 분노와 더불어 생활상의 위협을 직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같은 상황이 전개되자 선생은 일제 침략자를 쳐부수고 자기의 생존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궐기하자고 포수들을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1907년 11월 15일 선생과 차도선은 북청의 안산사와 안평사 포수들의 동업조직인 포계를 주축으로, 화전 농민과 광산노동자, 그리고 북청 진위대의 해산군인 등 70여 명을 모아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봉기하였다. 
 
이 의병부대는 선생과 차도선의 지휘 아래 봉기 직후 일진회 회원이며 친일 관리인 안평면장을 처단하면서 본격적인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국내에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이제야 말로 독립전쟁을 전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당시 참여하여 활동하고 있던 노령 대한국민의회의 군무부와 상의하여 그 해 8월 마침내 항일무장투쟁의 길로 다시 나서게 되었다. 
 
선생은 우선 간도로 가서 그곳에서 독립군 병사들을 추가 모집하여 부대를 확대한 뒤 국내로 진공할 예정이었다. 이에 따라 선생은 노령에서 대한국민의회 군무부 소속 군대의 일부를 인솔하고 그 해 9월 간도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의 부대는 간도 대한국민회의 재정 지원과 인원 지원을 받아 대한독립군을 편성한 뒤, 본격적으로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 
 
초기 대한독립군은 3개 중대에 약 300여 명의 병력, 소총 200여 정과 권총 약 30정의 화력, 그리고 지휘부는 사령관에 선생, 부사령관에 주건, 참모장에 박경철로 구성되어 있었다. 선생이 지휘한 대한독립군은 1920년 초반 경부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와 연합하여 대규모 국내 진공작전을 감행하였다. 이 같은 대한독립군의 활동은 다른 독립군 부대에도 영향을 주어 끊임없이 국내 진공작전이 수행되었다. 
 
그리하여 일제의 경비 강화에도 불구하고 독립군 부대들은 국내 진공작전을 계속 결행하였고, 그 전과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효과적이었다. 독립군의 국내 진공을 방어하기 위하여 군사 및 경찰력을 대폭 강화했음에도 대대적인 기습을 받게 된 일제는 ‘조선군’ 제19사단 소속 남양수비대의 1개 중대와 헌병경찰 중대로 독립군을 추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추격군은 삼둔자의 서남방에 매복해 있던 최동진의 군무도독부 소속 독립군에게 재차 격퇴당하고 말았다. 
 
독립군에 의해 연달아 참패를 당한 일제는 이번에는 약 250명의 병력으로 ‘월강추격대’를 편성하여 1920년 6월 7일 봉오동(鳳梧洞)으로 진군해 왔다. 이곳에는 이미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선생의 대한독립군과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및 안무가 이끄는 국민회군이 통합하여 조직한 대한북로독군부군(大韓北路督軍府軍), 그리고 이흥수가 이끄는 대한신민단이 일본군 침입자들을 맞아 전투를 벌일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선생이 지휘하는 독립군 통합부대는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지형의 봉오동 골짜기 안으로 일본군 추격대를 유인하여 격파함으로써 대승을 거두었다. 
 
선생이 이끈 독립군 통합부대가 승전하게 된 요인은 지형을 이용한 전술 구사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독립정신이었다. 
 
<독립신문>(1920. 12. 25)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157명이 사살되고 수많은 인원이 중경상을 입었고, 독립군 측은 4명의 전사자에 2명의 중상자만을 내었을 뿐이었다. 독립군의 빈번한 국내 진공전에 의해 큰 피해를 입게 된 일제는 1920년 8월 소위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작성하고 첫 단계로 ‘훈춘사건’을 조작하였다. 
 
일제는 중국 마적을 매수하여 1920년 10월 2일 훈춘의 민가와 일본영사관 분관을 습격, 13명의 일본인과 한국인 순사 1명을 살해하고 30여 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일제는 이 사건을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중국측에 그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였다. 나아가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그들 자신이 직접 병력을 투입하여 마적단을 토벌하겠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중국 측의 답변이 있기도 전에 일제는 대병력을 서북간도로 침입시켰다. 독립군의 항전사상 가장 빛나는 승첩인 청산리대첩은 이 같은 일본군의 간도 침입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훈춘사건’이 있기 이전에 독립군 측은 일본군의 간도 침입을 이미 간파하였다. 
 
그리하여 독립군 부대들은 근거지에서 대규모의 일본군과 정면 승부할 경우 본영은 물론이고 간도지역의 한인들도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하여 백두산록 서쪽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920년 10월 20일 선생의 대한독립군을 비롯한 북로군정서, 대한신민단, 국민회군 등의 독립군 부대는 백두산록으로 향하는 길목인 화룡현 2도구(道溝)와 3도구에 집결하게 되었다. 독립군의 이러한 동태를 첩보원의 보고에 의해 파악한 일제는 침략군의 일부를 2, 3도구 방면으로 진입시켜 독립군을 ‘토벌’하게 하였다. 따라서 독립군과 일본군은 이곳에서 피할 수 없는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전투가 일어난 지역은 한인마을이 있던 청산리 일대였다. 첫 전투는 3도구 방면에서 포진하고 있던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일본군 야마다(山田)토벌대 간에 10월 21일 오전 8시경부터 전개된 백운평 전투였다. 김좌진이 지휘하는 독립군은 일본군을 백운평 골짜기 깊숙이 유인하여 섬멸함으로써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선생이 사령관으로 지휘하는 독립군 통합부대는 2도구 완루구(完樓溝)에서 일본군에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선생이 지휘하는 독립군 통합부대와 북로군정서는 합동으로 10월 26일까지 천수평, 어랑촌, 맹개골 만기구, 천보산, 고동하곡 등지에서 일본군과 10여 회의 격전을 치렀다. 이들 전투에서 독립군과 일본군 양측의 전과 및 피해는 자료마다 서로 다르지만 임시정부가 조사하여 발표한 기록에 의하면 일본군의 전사자는 1,200여 명에 부상자는 2,100여 명이었고, 독립군측은 전사자 130여 명, 부상자 220여 명뿐이었다. 
 
이후 선생은 700여 명의 독립군 통합부대를 이끌고, 일본군 간도토벌대와 격전을 치르면서 1921년 1월 하순 우수리강을 건너 러시아령 이만을 거쳐 자유시로 들어갔다. 이 시기 연해주 각지의 한인 무장부대와 간도 독립군은 자유시 일대로 집결하고 있었다. 그것은 각지에 흩어져 있던 한인 부대의 전격을 통합하고 볼셰비키 정부의 지원을 받음으로써 항일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결한 한인 부대의 통솔권을 둘러싸고 지도부간에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다. 국동공화국 한인부에서 조직한 전한군사위원회 산하의 대한의용군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후원 하에 조직된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지도하는 고려혁명군 간의 군권대립이 그것이다. 전한군사위원회는 상해 임정과 연관을 가지고 있었고, 중심 인물은 이용, 채영, 박일리아 등이었다. 
 
군정의회에는 김하석, 오하묵, 최고려, 유동열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선생은 처음 대한의용군에 참여하여 부총재로 선임되기도 하였으나, 6월 초 예하 부대원 440여 명을 대동하고 군정의회측에 가담함으로써 고려혁명군 제3연대로 편성되었다. 
 
6월 28일 군정의회 지도부는 완강한 대치상태에 있던 대한의용군의 무장해제를 결정하였다. 장갑차 등 중화기까지 동원한 고려혁명군은 대한의용군이 주둔한 자유시 부근의 수라세프카 일대를 포위한 채 대규모 공격을 가하여 쌍방간의 대충돌이 발생하였다. 자유시사변으로 불린 이 같은 한인 무장세력 간의 분쟁으로 사상자가 속출하고, 대한의용군 부대는 사방으로 흩어짐에 따라 독립군의 투쟁역량이 크게 훼손되었다. 
 
자유시사변 이후 한인무장세력은 러시아 공산당의 강력한 통제로 인하여 활동에 많은 제약이 가해졌고, 이로 인해 선생도 항일무장투쟁의 꿈을 간직한 채 이만, 연해주 등의 집단농장, 협동농장 등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농민층의 생활 향상과 한인동포들의 권익보호에 힘썼다. 그 후 1937년 9월 스탈린에 의한 한인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 선생은 연해주를 떠나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선생은 1943년 10월 25일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75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독립운동가자료 정상규 / 대구이육사기념사업회 다음카페 / 정리 문해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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