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운동의 결정적 시기를 앞당기자(2)
뗏목지기는 조직원이었네 양자강 물가에 뗏목지기 있었네 물 속에 노니는 고기처럼 한가하게 산맥을 빠져나온 구름처럼 유유하게 장기도 두고 낚시질도 하고 혁명의 세월에 한가하게 사는 꼴이 청년들 눈에 차암, 안돼 보였네 홍군에 참가하여 전장터에 한 목숨 내맡기고 싶었던 젊은 뗏목지기 견디기 힘들었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5년, 6년, 7년이 지나도 아무런 전투에도 불려가지 않았네 머리에 하나 둘 흰머리가 나도록 무기력과 낮잠과 권태와 싸웠네 이마에 깊은 주름살이 서도록 초조감과 조급성과 세월과 싸웠네 아무도 그 뜻을 헤아리지 못했네 그를 배치한 조직을 빼놓고는 백군에게 쫓겨 파국을 앞두게 된 홍군이 어느날 그곳을 지났네 뗏목지기 나서 뗏목을 준비했네 5년이 넘게 10년이 넘게 흰머리가 나도록 준비한 뗏목지기 뗏목 풀어 한꺼번에 대군을 살렸네 무기력과 낮잠과 권태와 싸운 끝에 초조감과 조급성과 세월과 싸운 끝에 대륙의 역사를 10년쯤 앞당겨 놓은 조직의 역사를 10년쯤 늘려놓은 뗏목지기 인생을 아는 사람 없었네 그의 청춘을 관리한 조직을 빼놓고는
다음으로 정세분석의 기준에서 중요한 것은 객관적 요인과 주관적 요인의 상호관계, 아방대 타방간의 역학관계입니다. 이에 대한 분석에서 자체 변혁역량, 즉 아방의 역량 평가 기준은 대중의 의식화 조직화 수준과 투쟁경험, 변혁세력의 정치사상적 통일과 조직적 결속의 실태, 노동자 계급의 주도적 역할정도, 통일전선조직의 유무와 그 강고성 등이며 타방의 역량평가 기준은 저들의 물리력과 이데올로기 선전력, 내부모순과 대중으로부터의 고립정도, 정치 경제 군사적 역량의 약화정도와 전략전술의 약점 등입니다. 이 양자를 비교하는데서 중심은 어디까지나 정권문제를 둘러싼 아방과 타방간의 역학관계와 대중의 정권장악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세 분석의 기초에 따라 결정적 시기를 판단해야 변혁운동의 결정적 시기에 대한 오판을 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
현 시기가 의연히 전략적 준비기로 되는 여건에서 그 대응의 요체는 주체의 전략전술이 밝혀주는 준비기의 기본처방을 차질없이 관철해서 변혁역량을 유지 비축 성장시킴으로써 결정적 시기를 맞이할 준비를 튼튼히 갖추는데 있다 할 것입니다. 역사적인 촛불항쟁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새로운 정세는 결정적 시기가 점차 성숙되어가고 있음을 예고해 주고 있다 할 것입니다. 변혁운동의 객관적 조건은 날을 따라 성숙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 땅에 미제의 식민지 통치가 지속되는 한 사회경제적 모순은 더욱 심화되고 자주성을 위한 민중의 진출은 날이 갈수록 강력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변혁운동의 결정적 시기의 성숙은 오직 그 결정적 요인인 주관적 요인의 조건의 성숙, 즉 강력한 변혁역량의 준비와 그 주동적 작용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역사적인 4.19와 광주민중항쟁 6월민중항쟁의 피의 교훈이 사회변혁운동에서 중요성 문제가 강력한 변혁역량의 유지, 비축, 성장에 있다는 것을 응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척박한 식민의 땅에서 투쟁하는 우리들은 변혁운동의 결정적 시기를 더욱 앞당기고 그것을 승리로 종결짓기 위해 변혁역량을 유지, 비축하고 급속히 성장시키는 이 중차대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배가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줄 압니다.
지도와 대중의 결합
영도자의 올바른 지도에 의해서만 민중이 역사의 참다운 주체, 자주적인 주체로 될 수 있다는 것은 피로써 얼룩진 우리 민족해방투쟁사의 교훈에서도 인식되는 진리입니다.
일제침략을 반대하며 백의동포, 민족전체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들고 일어난 거족적인 3•1운동 역시 올바른 영도가 없었던 탓에 삼천리강토의 산하를 피로 물들이고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3•1운동의 ‘지도자’로 자칭하던 기미독립선언서 작성자들은 명월관에서 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총독부에 “우리들 독립선언서 서명자 일동은 명월관 지점에 회동하여 포박을 기다리고 있다” 고 전화를 걸고 자수해 서명자 중 4명을 제외한 29명이 자동차로 연행되어 경무총감부 구치소에 수감되었을 정도였으며 오늘도 사람들의 통탄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우리민족은 애국문화개몽운동도, 국채보상운동도 해보고 구미세력에 기대를 걸고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할복으로 호소도 해보았고 이등방문을 처단하는 개인테러도 해보았습니다. 민족의 갈망을 안은 이 모든 투쟁은 한낱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우리 민족이 삼천리강토를 피로 물들이며 쓰러지면서 가슴치며 부르짖은 외침은 민족, 민중을 광복의 길로 이끌어 주고 세계의 정상에 내세워 줄 위대한 영도자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위대한 영도따라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우리 민족은 조국광복의 민족사적 대업을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지도자의 올바른 영도를 받을 때에만 민족, 민중은 역사의 자주적인 주체로 될 수 있으며 자기 운명을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개척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시해 줍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이와같이 민중의 자연발생적 운동이 실패한 역사적 경험 속에서 사회변혁운동을 위한 지도와 대중의 결합의 필요성이 절감되는 것입니다. 민중에 대한 지도문제는 어떤 사회역사적 운동에서나 다 제기되지만 노동자 계급을 비롯한 광범위한 민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서 더욱 절실한 문제로 나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광범위한 민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이 온갖 착취와 압박을 종국적으로 청산하기 위한 가장 심각한 사회변혁운동이며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민중이 참가하여 진행하는 고도의 의식적, 조직적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전진운동에 적으나마 이바지한 민중의 사회적 운동을 보면 다 이러저러하게 선각자들의 지도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이 출현하기 이전시기 민중운동을 지도한 선각자들이란 많은 경우에 신흥세력에 속하는 착취계급의 대표자들이었으며 근로민중의 근본적 요구와 이해관계를 체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계급적, 세계관적 한계성으로 하여 광범위한 민중을 하나의 사상의지로 의식화, 조직화할 수 없었으며 민중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의 일시적 동반자들이었을 뿐입니다.
역사의 자주적 주체는 선진적 노동자계급이 출현하고 그들의 자주적인 혁명사상에 의하여 근로민중이 의식화, 조직화됨으로써 비로소 역사무대에 널리 등장할 수 있었습니다.
2023년12월22일 눈 덮힌 산천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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