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사회변혁운동 소고(1)
사회변혁운동은 온갖 예속과 불평등을 없애고 자기 운명의 참된 주인이 되기 위한 매개나라 전위조직과 민중의 자주적 운동이다.
근로대중은 역사의 주체, 사회발전의 동력이다. 이러한 근로대중이 역사의 주체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역할을 다하자면 의식화, 조직화되어야 하며 그러자면 반드시 지도와 대중이 결합되어야 한다. 근로대중은 역사의 창조자이지만 옳은 지도에 의해서만 사회발전에서 주체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그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지도문제는 다름 아닌 근로대중에 대한 전위조직의 영도문제이다.
한국전쟁이 종결되는 53년에 이르기까지 남한변혁운동의 중추역량은 철저하게 파괴되어 나간다. 8•15로 부터 50년 6월까지 기간이 분단 및 식민지예속화를 반대하는 남한민중들과, 식민지파쇼 지배체제를 유지함으로써 남한을 대소 전진기지 반공분단국가로 정착시키려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반동세력들과의 비정규전적 투쟁시키였다면, 한국전쟁은 전면전쟁의 시기였다.
먼저 남한사회변혁의 주체역량은 대중역량과 지도역향을 막론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심각한 피해를 입게되며 이로부터 남한사회변혁의 주체적 역량은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70여년의 엄청난 세월의 피나는 투쟁 속에 거의 새롭게 준비 육성되고 조직화되어야 하는 시련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1920년부터 시작되어 남로당에까지 이르는 동안 종파분자들이 저지른 폐해는 우리 민족사에 너무나 엄청난 대가를 요구하였다.
미국이 전쟁을 통하여 노린 주요한 목적중의 하나는 미국과 이승만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을 철저히 괴멸시키려는 것이었고 이 의도에 따라 미군에 의한 서울탈환시에 이미 11만여 명의 진보적 민중들이 죽어갔다.
1950년 12월1일 ‘부역행위자 특별처리법’이 만들어 지고 국가보안법과 ‘특별처리법’ 에 의해 55만 1천여 명의 민중들이 단지 좌익적 성향을 나타냈다는 이유로 검거되어 그 중 상당수가 처형되었다.
간고하고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치게 될 장기항전의 자세를 견지하지 못한 채 공산당의 합법성이 유지되던 시기에 섣불리 당조직을 노출시킨 탓에 본격 투쟁시기로 넘어가면서 지도역량의 상당부분이 이미 파괴되었고 잔존역량조차도 무리한 빨치산투쟁으로 거의 잃고 만다.
이때마저도 이현상 등 종파분자들의 단독행동, 남부군에서 직접 검증되지 못한 잘못된 정규전, 당적 지도의 미비 등이 가세되어 운동지도역량의 보존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빨치산에 동조하던 민중들의 피해도 극심하여 빨치산 토벌작전이 시작되면서부터 유격대 거점의 초토화전술에 따라 소위 적성부락은 모조리 불태워지고 부락민들이 살상당했다.
뿐만 아니라 비조직적 좌익세력, 혁신계인사, 중도좌파, 체제불만세력 심지어 진보적 민족주의자들까지도 상당수 미군과 이승만정권에 의해 살상되거나 월북하여 전쟁이후 남한의 변혁역량은 거의 소진되고 반공이데올로기 체제하에서 잔존 좌익 또는 중간파세력들이 운신할 수 있는 근거는 거의 상실된다.
한 나라의 변혁역량이 이렇게 ‘씨를 말리듯’ 소진되는 경우는 역사상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변혁역량의 초토화는 물론 제국주의의 야만적이고 잔악한 만행에 의해 저질러졌지만 문제의 요인을 주체의 활동에서 찾는다면, 남로당의 종파주의를 역량파괴를 가속화시킨 주요요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견해일 것이다.
남로당의 종파주의의 핵심은 전쟁기간에 남한지역 당조직을 종파적으로 장악하고 중앙당의 올바른 노선구현과 유일적 지도를 끊임없이 방해했으며( 전쟁 중 이승엽 일파에 대한 숙청이 진행되면서 수구러들긴 했으나) 군사조직까지도 장악할 흑심에서 남부군 조직화 등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각개 산개된 유격투쟁이 아닌 정규군편성에 열을 올려 유격부대를 엄청나게 희생시켰다.
전쟁은 8•15 해방 후의 혁명적 정세를 종결시키는 동시에 분단체제를 구체화시킨다. 45~53년 기간까지는 비록 한반도의 전체 변혁운동이 이미 두개의 지역혁명으로 나눠져 추진되었다 하더라도 양자는 매우 긴밀하게 결합된 시기였다
즉 전국적인 혁명, 통일국가 수립의 과제는 남한의 반미자주화투쟁과 직접적으로 대중적인 행동구호로 되었고 이것이 정점에 달했던 48년부터는 반미자주화에 대한 요구는 단선반대로, 즉 통일국가 건설투쟁으로 표출 되었으며 이는 당조직을 49년에 하나로 통합하여 수행할 만큼 통일된 과제가 되었다. 그러나 53년 이후에는 두개의 지역혁명이 상대적인 독자성을 지니고 진행되어야 했다.
이북은 전후 재건과 경제건설위주의 민주기지 역량복구와 강화를 기본으로 하는 사회주의건설사업에 착수하게 되고, 남한은 낮은 수준의 경제투쟁, 민주민권투쟁으로부터 시작되어 대중운동을 소생시키고 이 속에서 핵심역량을 새로 준비하는 과정을 밟게되며 4•19로 잠시 폭발적 통일운동까지 비약을 하긴 했으나, 70년대까지 민족해방운동의 한 부분적 측면이라 할 반파쇼민주화투쟁에 주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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