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의 첫 인민배우 황철
(1) 이루어진 소원
황 철 (배우)
• 1912년 1월 11일 충청남도 청양군에서 출생. • 해방전 조선연극사와 동양극장산하의 극단인 청춘좌 등에서 배우생활. • 1939년 9월 아랑극단 단장. • 1948년 4월 남조선대표로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련석회의에 참가. • 1955년-1961년 국립극장(오늘의 국립연극단) 총장. • 1958년-1960년 교육문화성 부상. • 1961년 6월 9일 사망 • 조국통일상수상자, 인민배우.
북(조선)의 첫 인민배우, 무대나 화면에 나타나기만 하면 한순간에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명배우, 리순신과 변학도의 모습으로 지금도 남아있는 황철을 두고 일화인들 얼마나 많았던가. 어버이수령님께서 보기만 하여도 마음이 시원해진다고 높이 평가해주신 인민배우 황철! 그의 운명이 안겨주는 생의 진리는 무엇인가. 황철은 힘들게 북행길을 선택하였다.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북에서 어떻게 정착했고 어떻게 살아갔는지 재조명하고 소개하고자 한다.
(1) 이루어진 소원
1948년 4월 초순 어느날 황철은 뜻밖에도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련석회의에 참가하라는 초청장을 받았다. 그것은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친히 자신의 명의로 보내주신것이였다.
(김일성장군님께서 나를 불러주시다니! …)
위대한 수령님의 존함이 정중히 모셔진 초청장을 받아든 그는 높뛰는 가슴을 진정할줄 몰랐다. 얼마나 그립던분이신가! 모진 수난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그분의 존함을 얼마나 외우며 경모하여왔던가! 위대하신 장군님의 품속에 안길 영광의 그 시각을 그리면서 갖은 풍상고초를 다 겪어온 그였다.
황철은 1912년 1월 충청남도 청양군 비봉면 강정리에서 출생하였다. 망국노의 설음을 안고 태여난 그의 집은 몹시 가난하였다. 황철이 5살 잡히던 해 어머니가 앓다가 사망하고 그처럼 어머니를 사랑하던 아버지도 상심끝에 사그라지는 불처럼 조용히 운명하고말았다. 할수 없이 누이와 형과 함께 큰아버지집에서 생활을 하다가 누이는 출가하고 하나밖에 없는 형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는 큰아버지의 집에 홀로 남게 되었다. 거기서 학교에 다니던 그는 살기가 힘들어지자 큰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왔다. 하지만 일제통치하에서는 어디 가나 그의 희망이 이루어질수가 없었다.
어려서부터 연극에 남다른 취미를 가지고 배우가 될것을 꿈꾸어온 그였지만 량반가정이라는 큰아버지의 봉건관념으로 하여 집에서 내쫓기우게 되였으며 공부도 더 할수 없게 되었다. 그에게 차례진것은 무대가 아닌 실업의 거리였고 겨우 얻은 직업이란 자동차운전조수였다. 자동차운전조수로 일하면서도 그는 늘쌍 노래를 불렀다. 그가 부르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배우가 되였으면 좋겠다고들 하였다. 그럴 때면 황철은 마음속에서 저도 모르게 무대배우가 되고싶은 충동이 더더욱 강렬해졌다.
그후 그는 그 직업을 그만두고 요행 신극단체인 토월회에 들어갔으며 이때부터 식민지배우의 쓰라린 고통과 설음을 안고 배우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던 어느날 극단에서 빅또르 유고의 소설을 각색한 연극 《쟝 발쟝》을 공연하고있었는데 주인공역을 맡은 배우가 나타나지 않았다. 여기저기 알아보니 그가 급병으로 병원에 실려갔다는것이였다. 벌써 관중들이 관람석을 반나마 채웠는데 주역을 맡은 당사자가 없는것으로 해서 극단에서는 소동이 벌어졌다. 계약된 공연을 보장하지 못하면 경영주로부터 잡일을 하는 심부름군에 이르기까지 그날로 밥줄이 떨어져야 했던 세월이라 모두들 울상이 되여 안절부절 못하고있을 때 문득 《내가 한번 해보겠소.》라고 나서는 애숭이청년이 있었다.
그가 바로 극단에 들어온지 한달도 채 못된 경력을 가진 황철이였다. 무대막뒤에서 연극에 출연하는 배우들에게 대사를 튕겨주느라고 연극대본을 읽어주던 젊은이가 대담하게 주인공역을 맡아하겠다고 나설 때 모두들 놀라와했다. 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는 경영주는 그에게 주인공의 의상을 입고 분장할것을 지시했다.
황철은 배포유하게 의상을 갈아입고 무대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황철의 대담한 행동이 다른 배우들에게 그대로 옮겨져 그들은 최면술에 걸리기라도 한것처럼 하나둘 무대로 나갔다. 놀랍게도 그의 연기는 원래 역을 맡았던 배우의 수준을 훨씬 릉가한것으로 하여 떠나갈듯 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때로부터 황철은 배우로서의 자기의 이름을 나타내게 되였으며 사람들의 인기를 모으게 되였다. 그러나 일제놈들은 저들의 요구가 담긴 연극을 할 때만 통과시키고 그렇지 않으면 무조건 금지시켰다. 생계를 유지하자니 별수 없이 그 치욕의 무대에도 끌려다녀야 하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더욱 가슴속에 못견디게 그리워지는것은 압제와 예속이 없는 해방된 내 나라, 내 무대였다.
이러한 나날속에 그는 연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서 주인공역을 맡아가지고 생동하게 연기를 하여 더욱 인기가 높아지게 되였으나 일제놈들의 탄압으로 극단은 해산되였다. 배우들은 갈길을 찾지 못해 헤매이다가 자기들끼리 연극을 해보겠다고 황철을 축으로 극단을 조직하였다. 하지만 역시 나라를 빼앗긴 배우들의 처지는 비참하였다.
이번엔 연극대신 노래를 해볼가 하는 욕망으로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 갔으나 그에게 차례진것은 한갖 꿈에 불과한 치욕의 무대였다. 독창가수는커녕 천대와 멸시만 뒤따랐다. 나라없는 설음만이 마음속에 가득찬 그는 다시 서울로 돌아오고말았다.
당시 일제는 보잘것없는 신극이나마 민족적색채를 띨가봐 검열을 엄격히 실시하였으며 조금만 이상한것이 생겨도 공연을 중지시키고 저들의 요구를 담은 작품만을 무대에 올릴것을 강요하였다. 그는 당장 극단을 뛰쳐나오고싶었으나 일제놈들의 강압으로 하는수없이 치욕의 무대로 끌려다녔다.
그러던 1945년 8월 15일 나라가 해방되였다. 환희와 기쁨에 휩싸인 인민들은 저저마다 만세를 높이 부르며 거리를 행진하였다. 그러나 해방자의 탈을 쓰고 남조선에 기여든 미제는 첫날부터 민족문화를 더욱 가혹하게 유린말살하였으며 예술활동을 무참히 탄압하였다. 민주의 새 연극을 소개하는 극장광고들이 떨어져나가고 막이 오른 무대우로 폭탄이 날아들었으며 진보적인 예술인들은 감옥으로 끌려갔다. 아, 갈수록 더욱 모질어만 가는 이 캄캄한 세월은 언제면 끝장나려나? 어느때면 광명한 무대우에서 새 조선의 연극을 해볼것인가?
황철이 갈길 몰라 몸부림치던 이무렵 그에게 재생의 밝은 서광을 안겨준것은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북반부의 극장무대에서 울려오는 참다운 민족예술창조의 힘찬 목소리였다. 이때부터 황철은 공화국북반부를 동경하며 예술활동에서 활기를 띠게 되였고 새로운 목표를 가지고 연기를 보다 목적의식적으로 진행하였다.
그는 서울뿐아니라 여러곳에서 연극 《태백산맥》을 비롯하여 경향성이 좋은 연극들에 출연하고 지도하며 인민들을 각성시켰다. 진보적인 연극활동을 벌리던 황철은 1947년 7월 서울시 남산공원 군중대회에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연설을 류창하게 하여 인민들을 투쟁에로 불러일으켰다. 그러자 미제와 남조선괴뢰도당은 인기배우 황철이도 《빨갱이》가 되였다고 소문을 내돌리면서 체포령을 내렸다.
황철은 적들의 검거선풍에 걸려 연극배우생활은 물론 자유로운 생활도 할수 없게 되였으며 무대를 떠나 은신해있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러하던 그가 자나깨나 경모하여마지 않던 위대하신 김일성장군님으로부터 크나큰 믿음과 사랑에 넘친 부르심을 받게 되였으니 어찌 벅차오르는 감격과 흥분을 억제할수 있었으랴! 황철은 곧 평양을 향해 서울을 떠났다.
그로부터 며칠후인 1948년 4월 모란봉극장에서는 력사적인 남북련석회의가 열리였다. 민족의 태양이시며 전설적영웅이신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름름하고 활기에 넘치신 모습으로 단상에 나오시자 거세찬 경탄의 열풍이 만장을 휩쓸며 열광적인 환성이 터져올랐다. 어버이수령님을 우러르며 목청껏 만세를 부르던 황철은 가슴속에 쌓였던 설음과 감격의 격정이 한꺼번에 북받쳐올라 어깨를 들먹거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장군님, 망국노의 설음을 안고 떠돌아다니며 예술을 팔지 않으면 안되였던 연극배우 황철이가 평양으로, 장군님께로 왔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으며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한없이 인자하고 열정에 넘치신 어버이수령님의 거룩하신 모습을 우러러볼수록, 수령님을 모신 기쁨과 행복이 크면 클수록 그의 가슴에 더욱더 절절해지는것은 이제는 그 어디에도 가지 말고 오직 장군님의 품속에서 살고싶은 그 한가지 생각이였다. 하기에 회의가 끝난 후 남조선에서 온 일부 대표들이 다시 서울로 떠날 때 황철은 자기의 소원은 평양에 남는것이라고, 평양에 남아 인민을 위한 배우로 살고싶은것이라고 하면서 이 소청을 어버이수령님께 꼭 말씀올려달라고 하였던것이다.
황철의 소청을 보고받으신 수령님께서는 황철동무의 소원이 평양에 남아서 조국과 인민을 위한 무대예술창조사업을 하는것이라면 그 소원을 풀어주는것이 좋겠다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가 서울에 나가면 연기활동을 할수 없을것이라고, 황철동무의 소원대로 그가 평양에 남아있도록 하여야겠다고 거듭거듭 말씀하시였다. 드디여 그 소망이 현실로 이루어지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을 전달받고 황철은 너무도 고맙고 고마워 그저 눈물만 날뿐이였다. 지난날 식민지예술인으로서 굴욕적인 연기생활을 하여온 이름없는 배우를 그 넓고도 따뜻한 품속에 안아주시는 수령님, 량심있는 조선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속깊이 품고있는 그 간절한 소망을 귀중히 여기시여 과분한 사랑과 은정을 베푸시는 수령님, 그이의 두터운 배려와 신임에 보답하기 위하여 그는 새 민주조선건설을 위한 연극창조에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칠 굳은 맹세를 다지고 또 다지였다. 그 결의는 그후 예술창조활동에서 빛나게 실천되여나갔다.
국립극장 배우로 된 그는 연극 《항쟁의 노래》에 출연하여 맡겨진 역형상을 훌륭히 창조해냄으로써 새 사회건설에 떨쳐나선 인민들을 힘있게 고무하였다. 그로부터 몇달이 지나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새 조국건설로 그처럼 바쁘신 가운데서도 일군들을 남조선에 파견하여 황철의 일가식솔을 데려오도록 하시고 그들이 왔을 때는 살림집까지 마련해주시였다.
새집들이를 하는 날이였다. 유명한 배우라고 하지만 해방전에는 세방도 제대로 구할수 없어 한해에도 몇차례씩 이사를 해야 하였고 끼니걱정으로 마음편할 날이 없이 살아온 황철은 난생처음으로 제집이라고 문패를 달고 살게 된 새 집에 선뜻 들어서지 못하였다. 방만 해도 여러칸이 되고 갖가지 가구들과 차곡차곡 개여놓은 이불이며 옥백미가 가득차있는 쌀독을 바라보는 황철은 참으로 이 모든것이 꿈만 같았다.
그는 민족의 위대한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을 우러러모시고 따르려는 오직 그 한마음을 품고 서울을 떠나 사선을 넘어왔지만 찾아와 안긴 장군님의 품이 그처럼 넓고 은혜로운줄은 다는 몰랐었다. 황철은 참고참아오던 격정을 터뜨리며 오랜 삯빨래질로 거칠어진 안해의 손을 잡고 말했다.
《아! 우리 장군님 계시고 장군님께서 세워주신 인민의 나라가 있어서 이 황철에게도 무대가 차례지고 쓰고살 제 집이 생긴것이 아니겠소. 내 무대우에서 네활개를 치며 장군님의 은덕에 꼭 보답하겠소. 그러니 가정일은 당신이 맡아주오.》
황철은 한 연극배우의 재능을 귀중히 여기시고 그것을 빛내여가도록 아낌없는 사랑과 배려를 거듭 돌려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고마운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극장의 련습실과 무대에서 침식을 하면서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새 조국건설로선을 관철하는데 이바지할 연극창조사업에 열정을 쏟아부었다. 그는 이 나날에 연극 《을지문덕》, 번역극 《어느 한 나라에서》 등 여러 연극들의 주역과 연출 그리고 방송소설랑독도 하면서 나라의 연극예술발전에 크게 이바지할수 있었다.
(2) 보람찬 창조의 나날에
공화국의 품에 안긴 황철은 식을줄 모르는 열정을 안고 보람찬 창조의 첫걸음을 뗐다. 국립극장(지금의 국립연극단)에 배치받은 초기까지만 해도 그는 무대에 나가 연기하기는 북이나 남이나 마찬가지일것이라고 여기고있었다. 그런데 차츰 날이 지날수록 그는 자기의 연기에 대하여 의문을 품게 되였다.
공화국의 예술인들은 자기의 개인적명예를 위해서 그 어떤 체험도 없이 무대에 등장해서는 떠오르는 즉흥적인 대사나 틀에 박힌 동작을 위주로 하는 기형적인 신파연기와는 다른 연기체계와 방법에 기초하여 형상을 창조하고있었다. 물론 그때당시 그들의 연기가 낡은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황철이 해방전이나 해방후 남조선에서 해오던것과는 전혀 다른것이였다.
특히 서로 돕고 이끌면서 예술창조사업을 진행해가는 모습은 황철에게 지울수 없는 인상을 새겨주었다. 커다란 충격을 받은 그는 자기 몸에 배일대로 배인 신파연기의 잔재를 털어버리고 새로운 사실주의연기체계와 방법을 받아들이기 위해 피타는 노력을 기울이였다. 그가 얼마나 연기훈련에 열중했던지 곁의 배우들은 그가 꼭 미친 사람같다고 혀를 찼다. 배치된지 1년도 채 안되는 사이에 새롭게 변모되여 두각을 나타낸 그는 1949년 한해동안에만도 다섯편의 중장막연극들에서 주인공, 주역을 맡아 형상하는데 이르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황철이 출연한 연극 《을지문덕》을 비롯한 세편의 연극들을 직접 보아주시고 그가 맡은 역인물의 감정을 능숙하게 잘 표현한다는 과분한 치하의 교시를 주시였다. 그해에 진행된 8. 15해방 4돐기념 전국문학예술축전에서 그는 연기 1등상을 받았다. 그때부터 그에게는 무서운 정열가, 예술을 위해 사는 인간이라는 칭호가 붙게 되었다. 애국의 열정에 넘치는 그의 재능은 1950년 6월 25일 미제가 일으킨 전쟁이 일어나자 조국보위의 성스러운 싸움터에서 더욱 뜨겁게 불타올랐다. 공연단은 남진하는 인민군대를 따라 서울에 나가 전선위문공연을 할데 대한 명령을 받았다. 황철도 배우들과 함께 서울에 나갔다.
1950년 7월초 공연의 첫막을 열던 날이였다. 황철은 그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 가슴에 충격이 커서 끓어오르는 흥분을 걷잡지 못했다. 그곳은 일찌기 젊은 시절 치욕의 연기를 강요당하며 비탄의 눈물을 짓던 무대였다. 그런데 그 잊지 못할 무대에 오늘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의 존엄있는 예술전사로 다시 찾아와 이렇게 서울시민들과 만나게 되였다고 생각하니 이름할수 없는 마음의 격동으로 한자리에 서있을수 없었다. 그는 공연을 앞둔 무대에로 나갔다. 그리고는 관중을 향하여 감격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여러분! 참으로 오래간만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들 하셨습니까? 우리 민족의 영명한 령도자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압제의 멍에에서 서울시민들을 해방시켜주시고 저희들을 여러분들에게 보내주시였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오랜 세월 억눌리고 짓밟히며 살아온 남조선동포형제들에게 참된 인민의 예술을 보여주시기 위해 이렇게 우리들을 보내주신것입니다.》
순간 우렁찬 박수소리와 함께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난 관중들은 뜨거운 경모의 눈물을 머금고 《김일성장군님 만세!》를 소리높이 웨쳤다. 이 열화와 같은 흠모의 선풍에 뒤이어 다시 정숙이 깃들무렵이였다. 객석에서 한 사람의 흥분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황철이 보고싶었소. 정말 잘 왔소. 장군님께서는 옥체무강하시오? 장군님을 우리 서울에도 모시고싶소. 장군님께서는 언제 서울로 오시오?》
《장군님께서는 지금 전선에 계십니다.》
《아니 장군님께서 전선에?!》
이렇게 목멘 소리를 하는 그도 뜨거운것을 삼키고 관중들도 눈물짓고 온 극장이 다 울었다. 어찌 경모의 눈물을 흘리지 않으랴. 생각하면 벌써 8. 15때 장군님께서 서울에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서 역두에 푸른 솔대문을 높이 세우고 장군님 오시기를 기다려 사흘낮 사흘밤을 정거장에서 지낸 그들이였다. 그런데 서울이 해방된 오늘 장군님께서 또다시 그 환영의 인사마저 사양하시고 멀리 전선에 나가계신다니 한평생을 조국과 인민을 위한 투쟁속에서만 보내시는 그이의 크나큰 로고에 가슴이 뜨거워 울지 않을수 없었던것이였다.
경애하는 수령님의 품은 지난날 모멸에 눌리우고 폭압에 신음하던 배우를 이렇듯 조국과 혁명을 위해 참답게 복무하는 인민의 배우로, 선동가로 키워준 위대한 스승의 품이였을뿐아니라 투쟁의 길에서 뜻밖의 위험에 처하였을 때에는 그를 사경에서 구원해준 자애로운 어버이의 품이였다. 사람들은 전선위문공연의 길에서 황철이 원쑤들의 폭격에 부상당하였을 때 어버이수령님께서 베푸신 가슴뜨거운 사랑의 이야기를 잊지 못하고있다.
서울공연을 끝마치자 그들에게는 소편대로 나뉘여 남진하는 인민군부대들을 따라 계속 전선으로 나갈데 대한 명령이 떨어졌다. 그리하여 처음 영등포전상자병원에서 공연을 마친 소편대는 인천, 수원을 거쳐 평택에 도착하였다. 적기의 계속되는 폭격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여러차례의 공연을 진행한 그들은 밤 9시경에 다른 장소인 천안을 향해 길을 떠났다.
그런데 갑자기 미제공중비적들이 행군하는 공연대의 머리우로 날아들면서 기총탄과 폭탄을 마구 퍼부었다. 그때 길가의 도랑옆에 엎드렸던 황철은 폭탄이 터지는 요란한 폭음소리와 함께 그만 불행하게도 오른팔을 잃었다. 한손으로 잘리운 팔을 쳐들고 미제공중비적들을 쏘아보던 그는 치를 떨며 쓰러졌다. 출혈은 점점 심하여 운신조차 할수 없었다. 동무들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평택읍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혼수상태에 빠진 뒤였다. 이무렵 전선사령부와 서울지구를 현지지도하고계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황철이 중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보고받으시고 전선사령관으로 사업하고있던 김책을 급히 전화로 찾으시였다. 전화종이 급히 울리기에 김책이 송수화기를 드니 교환수가 최고사령관동지께서 말씀하신다고 알려주었다. 그가 자세를 바로하였을 때 장군님의 우렁우렁하신 음성이 울리였다.
《황철동무가 중상을 당했다는것이 사실이요?》
김책은 그의 오른팔이 파편에 잘리웠다고 말씀드렸다.
《오른팔이 떨어졌다고?!》
장군님께서는 격하신 심정을 억제하시는듯 잠시 침묵을 지키시다가 가라앉으신 음성으로 《출혈을 많이 했겠구만…》 하시며 걱정하시는것이였다. 그러시고는 빨리 치료대책을 세우고 입원시켜 무조건 살려야 한다고 하시였다. 얼마후 위대한 수령님께서 보내주신 자동차가 서울에서 평택으로 달려왔고 차는 중상당한 황철을 싣고 오던 길을 되돌아 서울로 달리기 시작했다.
전쟁승리를 떠나서는 다른 그 무엇도 생각할 여유가 없는 때에 한 배우의 생명을 위하여 포연서린 전선길로 사랑의 구급차가 달린다는것은 일찌기 어느 전쟁력사에도 있어보지 못한 일이였다. 그것은 오직 혁명전사들을 가장 귀중히 여기시며 극진히 아끼시고 보살펴주시는 우리의 위대한 수령님의 품속에서만 창조될수 있는 숭고한 동지적사랑의 새 전설이였다.
한 배우를 구원하기 위하여 돌려주시는 어버이수령님의 사랑이 이토록 뜨거운것이였기에 그 이야기는 환자가 입원한 그날로 서울영등포병원의 온 구내에 퍼져 또 하나의 격동적인 장면이 펼쳐지게 되였다.
그날 의사와 간호원들은 물론 방금 상처를 회복하고 전선으로 떠나려던 인민군용사들도 환자의 생명을 위해 자기의 피를 뽑아달라고 앞을 다투어나섰다. 어버이수령님께서 그처럼 뜨거운 은정으로 심려하시는데 자기들이 무엇을 아끼랴고 생각하는 그들이였다. 그리하여 입원 첫 시각에 벌써 뜨거운 심장들에서 용솟음쳐오른 1 300g의 고귀한 피가 환자의 체내에로 흘러들었던 것이다. 황철자신이 이 모든것을 알게 된것은 다음날 의식을 회복하기 시작하였을 때였다. 그는 의사들에게서 이야기를 들으면서 목이 메여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장군님! 제가 무엇이라고 이토록 크나큰 은혜를 베푸십니까! 이 사랑에 저는 무엇으로 보답을 올려야 합니까!) 황철은 울지도 못하고 속으로 이렇게 부르짖고있었다. 그러다가 의사들이 다시 수혈을 받자고 했을 때에야 그는 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진정하십시오. 이것이 어찌 동무에게만 돌려지는 사랑이겠습니까. 우리 나라 모든 예술인들에게 베풀어지는 사랑이지요.》
곁에 있던 의사와 간호원들이 이런 말을 하며 손수건으로 눈굽을 닦았다. 그럴수록 환자의 가슴속으로는 더욱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위대한 인간사랑이 있어 황철은 그후 생명의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점차 회복기에 들어섰다. 소생의 보고를 받으시고 누구보다 기뻐하신분은 어버이수령님이시였다. 그이께서는 미국놈들이 비록 황철동무에게서 한팔을 빼앗아갔지만 그는 억세게 살아있다고 하시면서 놈들에게 본때를 보이기 위해서도 본인의 요구대로 그를 다시 무대에 나서게 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하지만 황철의 가슴속에는 한팔이 없이 계속 무대예술인으로 생활할수 있겠는가 하는 위구심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위구심은 공연한것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황철에게 전과 같이 연기를 할수 있게 의수를 잘해주어야겠다고 하시며 그를 외국에 가서 치료를 받도록 은정깊은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그리하여 무대에 다시 설수 없다고 생각했던 황철은 의수를 하고 다시 공연무대에 나서게 되였다.
황철은 그때부터 자기의 육체적제한성을 극복하고 이전보다 더 높은 수준에서 맡은 역을 훌륭하게 형상할 목표를 제기하였다. 그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왼팔을 자유롭게 놀리기 위해 애썼다. 글씨쓰는 련습도 했고 재봉과 바느질도 배웠으며 여러가지 재료를 가지고 고급한 손로동을 요구하는 세공품들을 만드는데 많은 시간을 바쳤다. 극장에서는 물론 지방순회공연기간 휴식의 짬시간에조차 나이많은 로인들곁에 쭈그리고 앉아 돗자리며 초물모자를 만드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고심참담한 노력끝에 그는 두팔이 성한 사람들 못지 않게 왼손을 능숙하게 쓸수 있게 되였다.
지금도 그의 집에 가면 그가 순전히 바느질을 해서 만든 멜가방과 두개의 초물모자가 있다. 그중 멜가방 앞면에 붙어있는 세마리의 토끼는 전부 색실을 가지고 수를 놓아 완성한것인데 정신없이 풀을 뜯고있는 모양이 얼마나 신통한지 모른다. 황철은 왼팔의 기능을 높이는 한편 관중들이 자기가 불구의 몸이라는것을 느끼지 못하게 연기하는데도 깊은 주의를 돌렸다. 이를테면 의상착용과 소도구리용에서 연출대본에 제시된것외에 작업복이나 코트, 비옷, 외투 같은것들을 더 설정하여 어깨에 걸치는 방법으로 떨어진 오른쪽부위를 자연스럽게 가리웠는데 그 착상이 얼마나 기발한지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한팔이 없이 무대에 나선 그를 처음 보신 그날은 전쟁이 끝난지 1년만인 1954년 5월 22일이였다.
▲오른 팔을 잃고 이순신역을 맡은 황철 배우
그날 황철은 자기가 연출한 장막극 《리순신장군》에서 주인공역을 맡아 형상하였다. 공연시간이 되여 어버이수령님께서 관람석에 나오셨을 때 황철은 기쁘기도 하고 송구스럽기도 하여 안절부절 못하였다. 만일 한팔이 그대로 있다면 연기를 큰 손상이 없게 할수 있으련만 이런 몸으로 하는 어설핀 역형상을 수령님께 보여드리다니…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일이였다. 이윽고 막이 오르자 그는 끓어오르던 흥분을 진정시키고 무대에로 나섰다.
한편 그때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무대에 리순신장군으로 분장한 황철이 나타나자 곁에 앉은 간부들에게 저 사람이 황철이라고, 전쟁때 한팔을 잃은 동무라고 하시며 자못 침중하신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연극을 첫 장면부터 깊은 감동과 흥분속에 보시는것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량반들이 지방인민들을 억압하는 장면이 펼쳐지면 저런 놈들이 지방에 내려가서 악정을 했다고 분노를 터뜨리기도 하시였고 피난민들이 병영을 찾아오는 장면이 나타나면 조선사람들은 저런 고난을 여러번 겪었다고, 인민들이 병영을 찾아오는것은 참 좋은 일이라고 감회어린 표정을 짓기도 하시였다.
얼마후 무대우의 장면이 바뀌여 리순신장군이 적을 맞받아나가면서 장쾌하게 령을 내리는 장면이 펼쳐졌을 때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만족하신 표정으로 저 동무가 황철이라고, 한팔이 없는데도 저렇게 연기를 잘한다고 하시며 거듭 치하의 말씀을 하시는것이였다. 황철이 어버이수령님의 말씀을 전달받은것은 막간휴식시간이였다. 막이 내리자 한 일군이 그를 찾아 무대뒤로 달려왔다.
《황철동무, 수령님께서는 동무의 연기를 보시고 매우 만족해하십니다. 한팔이 없는데도 저렇게 연기를 잘한다고, 사람들에게 힘을 준다고 치하하시였습니다.》
순간 황철은 떨리는 목소리로 《수령님께서? …》 하고 나직이 부르짖더니 왼손으로 의수를 한 오른팔을 움켜쥐는것이였다. 이 부실한 몸으로 내가 연기를 하면 얼마나 하였으랴. 그런데도 어버이수령님께서 나더러 연기를 잘한다고 치하해주시는것은 비록 팔은 하나 원쑤들에게 잃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힘을 내여 연기를 하라고, 그래서 인민들에게 투지를 북돋아주고 원쑤들은 기겁을 해서 나자빠지게 하라고 뜨겁게 등을 떠밀어주고 고무해주시는것이다.
황철은 다함없는 감사의 눈물을 머금고 다시 막이 오른 무대로 나갔다. 그리고는 아까보다 더욱 우렁찬 목청으로, 더욱 힘찬 동작으로 격동적인 역형상의 세계를 펼쳐나갔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의 훌륭한 연기로 하여 극성이 고조될 때마다 먼저 큰 박수를 쳐주시며 깊은 감명을 표시하시는것이였다. 전쟁에서 입은 중상의 흔적으로 하여 의기소침해할가봐 더욱 머리를 높이 추겨들고 자신있게 연기하라고 사랑에 넘친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시는 어버이수령님! 이 뜨거운 은정속에 더욱더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역형상을 훌륭히 창조하는 배우.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연극 《리순신장군》을 상연하던 어느날 8장이 거의 끝나갈무렵에 그만 황철의 의수가 무대바닥에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 모해에 걸려 옥살이를 하고있는 리순신에게 박로인이 수군절도사 리억기가 희생된 소식과 함께 그의 편지를 전해준다. 뒤이어 막내아들 리면이 찾아와 어머니가 돌아간 소식을 전해준다. 주인공의 감정은 고도로 격화된다.
이때 뜻밖의 사태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때 련이어 겹쌓이는 비보를 전달받는 주인공의 복잡한 내면심리세계를 얼마나 실감있게 형상했던지 리면역을 맡은 배우가 연극의 세계에 파묻힌 나머지 그만 황철을 진짜 인물로 착각하고 그의 두팔을 와락 붙잡고 흐느끼다나니 그런 실수를 저지른것이였다.
물론 황철이 왼쪽으로 자세를 취하고있었기때문에 객석에서는 미처 눈치를 채지 못하고있었다. 다만 의수가 떨어지는 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울렸을뿐…
일을 저지른 배우는 물론 같이 등장했던 배우들도 깜짝 놀라 어쩔줄을 몰라했다. 옆무대에서 공연전반을 세밀히 주시하던 무대감독도 이제 더는 공연을 계속할수 없다고 생각하고 막을 닫으려고 바줄에 손가락을 걸었다. 그런데 당사자인 황철만은 태연하게도 허리굽혀 땅을 치며 통곡하는 즉흥연기에로 넘어가면서 관중이 눈치채지 못하게 의수를 슬쩍 끼워 그 대목을 넘기였다. 하여 그날 공연 역시 관중의 박수갈채속에 끝났다.
황철의 열정과 재능은 날이 갈수록 깊어만지는 어버이수령님의 고결한 은정속에 더 활짝 꽃펴났다.ㅡ어버이수령님께서는 1952년 그에게 공훈배우칭호를 주도록 하신데 이어 1955년에는 우리 나라 예술인들중에서 처음으로 인민배우칭호를 수여하도록 은정깊은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다음날에 있은 8. 15해방 10돐 경축연회에도 참가하도록 그를 불러주시였다. 그날 연회가 한창 진행되던 때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친히 황철을 자신의 곁으로 부르시였다. 황철은 자리에서 일어섰으나 감격에 온몸이 떨리여 발걸음을 옮길수 없었다. 한갖 평범한 배우인 자기를 암흑의 남녘땅에서 불러 안아주신 그날부터 헤아릴수 없는 크나큰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여 오늘과 같은 영광의 언덕에 높이 세워주신 위대한 수령님! 지금까지 무대에서만 뵈워오던 어버이수령님을 이렇게 지척에서 뵈옵게 된 기쁨과 감격을 무엇이라 표현할수 없었다.
그가 어버이수령님께서 계시는 연탁으로 나갔을 때 그이께서는 만면에 환한 웃음을 담으시고 자리에서 일어나시였다. 그러시고는 자애에 넘친 음성으로 황철동무가 왔구만, 우리 명배우가 왔어, 나는 동무의 얼굴만 봐도 속이 시원하다고 하시면서 친히 그에게 잔을 권하시였다. 순간 황철은 너무도 당황하여 몸둘바를 몰라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권하시는 잔을 두손으로 받들어 받아야겠는데 한팔이 의수였으므로 두손으로 받을수 없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황철이 머뭇거리며 성한 손을 내밀지 못하자 그의 심정을 인차 헤아려보시고 자신께서 그의 한손을 따뜻이 잡으시고는 자, 일없소. 잔을 받으시오라고 하시며 그의 왼손에 잔을 들려주신 다음 손수 술을 부어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손수 따라주신 넘칠듯 찰랑이는 사랑의 큰 잔을 받아든 황철의 입에서는 《흑-》 하는 흐느낌이 터졌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머리를 수굿하고 어깨에 격정의 큰 물결을 일으키는 그를 자애로운 눈길로 바라보시며 황철동무, 자 축배를 듭시다, 이번에 인민배우가 되였지, 축하합니다, 오늘은 그 잔을 다 들어야 하오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순간 황철의 량볼로는 참고참아오던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난날 재능이 있어도 꽃피울수 없었던 식민지배우, 빛없이 살아오던 한 예술인을 은혜로운 품에 안아주시여 예술적재능을 활짝 꽃피워주시고 또 나라에서 처음으로 되는 인민배우칭호까지 안겨주시고도 오늘에는 이처럼 영광스러운 자리에 불러주시고 축배를 들자고 하시는 어버이수령님의 자애로운 이 사랑, 이보다 더 크고 다심한 사랑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로부터 두해후인 1957년이였다.
어버이수령님의 끊임없는 사랑속에 황철은 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사업하게 되었다. 황철은 능력도 부족한 자기에게 이렇듯 분에 넘치는 정치적신임을 베풀어주신 어버이수령님의 고귀한 은정을 생각할수록 눈굽이 젖어들었다. 베푸시는 사랑은 끝이 없어 1958년 봄 어느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친히 황철을 저택으로 불러주시였다. 꿈만 같은 일에 황철은 차에 올라 어버이수령님 저택으로 가면서도 자신을 왜 부르셨는지 사연을 알지 못했다. 울렁이는 가슴을 안고 황철이 저택에 들어섰을 때였다. 정원에 나오시여 그가 오기를 기다리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를 보시자 마주 걸어오시며 황철동무가 왔구만라고 말씀하시면서 뜨겁게 손을 잡아 맞아주시였다. 그러시고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황철동무가 왔구만. 우리가 함께 일한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내가 늘 바쁘다나니 동무와 조용히 앉아 이야기 한번 나누지 못했소. 그래서 오늘 내가 좀 시간을 낸것이요.》
황철은 뜨거운 은정이 담긴 말씀에 또다시 목이 메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감격에 겨워 어쩔바를 몰라 하는 그의 한팔을 잡아주시고 방으로 이끄시였다. 그리고 응접실에 들어선 그에게 의자를 가리키시며 앉기를 권하시였다. 그가 먼저 앉기 송구스러워하자 수령님께서는 거듭 권하시면서 가정형편도 물어주시고 건강상태도 살펴주시며 마음의 긴장을 풀도록 허물없이 대해주시였다. 그는 어느사이 수령님앞에 앉아있다는 생각을 잊고말았다.
《황철동무, 그래 지금은 그 부상당한 팔이 아프지 않습니까?》
《아무 일 없습니다.》
《왜 아무 일 없겠소? 지금도 날씨가 무덥거나 추운 겨울에는 상처자리가 좋지 못하지?》
《수령님, 일없습니다. 아무 일도 없으니 수령님께서 이제 더는 저때문에 심려하지 말아주십시오.》
황철은 뜨거운것을 삼켰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저고리웃단추를 터놓으시며 흐리신 안색으로 그를 바라보시였다. 가슴이 아프셨던 일들이 떠올라 한동안 말씀을 잇지 못하시는것 같았다. 황철은 눈물이 고인 눈을 들어 어버이수령님을 우러러보았다. 자기가 부상당했던것은 벌써 근 10년전 일인데 수령님께서는 아직까지도 그날의 그 심정으로 걱정해주시니 가슴은 마냥 격정으로 부풀어올랐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당을 따라 혁명의 길을 꿋꿋이 걸어온 그가 대견하신듯 동무는 꽃을 계속 피우고있다고 하시면서 《나는 동무와 같은 배우를 사랑합니다.》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이윽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믿음에 넘치신 어조로 황철동무가 불편한 몸에 이제는 나이도 있기때문에 다른 사업을 맡기자고 하는데 본인의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그이께서는 다른 사업이라고 하여 무대생활과 관련이 없는 사업은 아니다, 교육문화성 부상의 중요직책을 맡겨 문학예술부문 사업전반을 보도록 하려고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순간 황철은 너무도 뜻밖의 말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어망결에 《저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중한 사업을 맡아할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저는…》하며 잠시 갑자르던 그는 《어버이수령님, 저는 무대를 떠나고싶지 않습니다.》라고 자기의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말씀드리였다. 그의 이 말에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앉으라고 하시면서 부상의 직책을 맡으면 연기활동을 더는 할수 없게 되는것으로 아쉽게 생각할수 있는데 부상으로 사업하면서 필요할 때에는 연기도 할수 있고 방송소설도 읽을수 있으며 연출도 할수 있다고, 부상이라고 하여 이런 일을 하지 못한다는 법은 없지 않는가고 뜨거운 사랑을 담아 말씀하시였다. 황철은 과분한 정치적신임을 받아안고 어버이수령님을 우러러 행복으로 젖어오르는 가슴을 들먹이기만 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시여 천천히 방안을 거니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지도일군은 누구보다 당정책에 정통하고 당의 의도와 요구를 잘 알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일군들이 지녀야 할 사업방법과 사업작풍에 대하여서도 하나하나 가르쳐주시였다. 그것은 걸음마를 떼는 아기를 부축하며 이끌어주듯 어떻게 사업을 조직하고 어떻게 군중들과 만나고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세심하고 따뜻한 가르치심이였다. 밖에서는 새들이 우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창한 봄날의 밝은 해빛이 비쳐드는 아늑한 방에서 이렇게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있다는것이 그에게는 더없이 행복하며 그저 꿈같기만 하였다. 이날 황철은 어버이수령님을 모시고 동석식사를 하는 영광도 지니였다.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뵙고 집으로 돌아온 황철은 며칠동안 흥분을 가라앉힐수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렇게 믿어주시고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계시는데 이제부터 당의 문예방침을 받들어나가는 참된 지도일군이 되리라 굳게 마음다지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황철에게 베푸시는 믿음과 사랑은 끝이 없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일생동안 무대를 떠나고싶지 않아하는 그의 소원까지도 깊이 헤아려보시고 그가 부상사업을 하면서 국립극장 총장사업을 겸하여 맡아보도록 해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이 신임, 이 보살피심이 있음으로 하여 황철은 때로는 배우가 되여 무대에 나섰고 또 때로는 연출가가 되였으며 필요한 때에는 방송소설랑독자가 되여 청취자들로부터 아낌없는 절찬을 받기도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천리마운동이 힘있게 벌어지고있을 때였다. 황철은 천리마시대에 맞는 문학예술을 창조할데 대한 어버이수령님의 교시를 받들고 천리마현실을 반영한 현실주제의 새로운 연극을 무대에 내놓기 위하여 예술창조활동을 힘있게 벌리였다. 그는 이 시기에 인간개조사업에서 선구자적모범을 보인 한 제사공의 생활을 가지고 천리마시대 인간의 새로운 사상정신적풍모를 형상한 연극을 훌륭히 연출하여 무대에 올림으로써 어버이수령님께 기쁨을 드리였다. 황철은 자신이 연출가가 되여 천리마현실주제의 연극을 창조해냈을뿐아니라 지도일군으로서 집단의 창조적지혜를 모아 천리마시대가 낳은 새로운 인간, 농촌선동원의 사상정신적풍모를 진실하게 형상하여 어버이수령님으로부터 연극단이 높은 평가를 받게 하는데 이바지하였다.
연극 《붉은 선동원》이 창조되던 나날이였다. 황철은 천리마기수들의 높은 사상정신적풍모를 진실하게 형상하기 위하여 총장으로서 배우들을 이끌고 현지에 나가 수십일씩 농민들과 같이 농사일도 하고 침식도 같이하고 주인공의 정신세계도 체험하면서 작품을 완성하도록 조직정치사업을 벌리였다. 그리하여 작품은 천리마시대의 농촌현실을 진실하게 형상한 대표작의 하나로 되였으며 어버이수령님으로부터 농촌에서 벌어지고있는 감동적인 사실을 그대로 잘 그려낸 좋은 작품이라는 높은 평가를 받게 되였다.
황철은 배우, 연출가로서만 아니라 《무대화술》, 《분장론》 등의 론문들과 평론들도 내놓아 연극예술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이것은 어버이수령님의 크나큰 사랑과 믿음에 보답하려는 창조적지혜와 열정의 산물이였다.
(3) 영생하는 인민의 배우로
▲애국열사능에 안치된 황철 인민배우. 오른쪽부터 차남 황준영, 장남 황태영, 3남 황세영
어버이수령님의 품속에서 극진한 배려를 받아오던 황철은 뜻밖에도 불치의 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었다. 황철은 침상에 누웠으나 새로운 연극창조사업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는 병으로 신음하면서도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 《돈화의 수림속에서》를 더듬고 또 더듬어나갔다. 그것은 어서빨리 이 회상실기를 각색한 혁명전통주제의 연극을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병상에서 연극의 연출대본을 한장한장 정력을 퍼부으며 써나갔다.
1961년 6월 어느날이였다. 황철이 앓기 시작한 초기부터 못내 걱정하시며 할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 취해주시고 보살펴오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의 병세가 몹시 위급해지고있다는 보고를 받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가 입원하고있는 병원 원장을 전화로 찾으시였다.
《지금 황철동무 상태가 어떻습니까?》
《여전히 좋지 못합니다.》
《황철동무를 꼭 살려야 하오. 그를 어떻게 하나 살려야 하오. 그 동무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아낄것이 없으니 약도 제일 좋은것으로 쓰고 정성을 다해서 그를 꼭 살려내야 하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몇번이나 이렇게 거듭 당부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그러시고도 마음놓이지 않으시여 몇시간도 못되여 또다시 두번째로 전화를 거시고 문병을 하시였다. 황철동무는 고생도 많이 하고 공로도 있는 동무인데 꼭 살리자고, 우리가 사랑하는 동무인데 반드시 구원해야 한다고 절절한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황철은 안해를 통해 이 사실을 전해듣고 어버이수령님의 한없이 은혜로운 사랑에 목메여 소리없이 울었다. 그는 이제까지 보고있던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책을 다시 가슴우에 펼쳐놓고 《돈화의 수림속에서》를 더듬어나갔다. 어버이수령님의 고마운 은정이 가슴에 사무쳐올수록 어서빨리 이 회상기를 각색한 연극을 완성하자는것이였다.
얼마전 국립연극극장에서는 그가 연출한 연극 《우리는 행복해요》와 《붉은 선동원》을 무대에 올려 어버이수령님께 기쁨을 드린 일이 있었다. 황철은 그때 천리마작업반운동을 형상한 이 작품들에 이어 이번에는 혁명전통을 취급한 연극을 창조하여 위대한 수령님께 충정의 선물로 올릴것을 결의하였다. 그래서 병상에 있으면서도 연출대본작성에 정력을 퍼붓고있는 그였다.
그러나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워낙 불치의 병인 심장협심증은 급격히 악화되여 그날 점심무렵에는 글줄마저 눈에 잡히지 않고 정신이 자꾸만 흐려갔다. 황철은 이제 자기에게 더는 회복될길 없는 마지막 림종의 시각이 왔다는것을 알았다. 그는 어버이수령님을 모시고 그이의 품속에서 많은 일을 해드리려고 하였는데 이렇게 50나이에 가는것이 안타까웠다. 수령님의 사랑과 은혜만을 받고 심려만을 끼쳐드리다가 하던 일도 마저 끝내지 못한채 떠나게 되는것이 못내 죄송스러웠다.
그는 안해를 시켜 극장연출가를 데려오게 하였다. 그리고는 연출가에게 자기가 생각해온 연극 《돈화의 수림속에서》의 연출대본내용을 들려주었다. 자기가 없은 후에도 이 연극을 꼭 완성하여 어버이수령님께 보여드리라는것이였다.
《여보, 당신 무슨 말을 해요?!》
안해가 남편의 손을 흔들며 목멘 소리를 했다. 황철은 자기의 몸을 일으켜달라고 하더니 위대한 수령님의 초상화를 우러러보았다.
《어버이수령님, 저는 하는 일도 없이 수령님의 사랑만을 받다가 이렇게 갑니다. 이 불민한 황철이를 용서해주십시오. 저는 이제 죽어도 수령님께서 세워주신 그 행복한 무대에 가있을것입니다. 수령님, 그럼 부디부디 만년장수하십시오.》
그는 《돈화의 수림속에서》를 가슴에 안은채 이렇게 마지막숨을 거두었다.ㅡ병원에서 황철의 운명에 대하여 어버이수령님께 보고드리려던 그 시각 수령님께서 먼저 세번째로 전화를 걸어오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황철이 방금전에 숨을 거두었다는 비보를 들으시자 너무도 놀라우시여 《황철동무가 죽다니?! … 아니, 죽지 않았소. 그렇게 죽을수 없소. 그를 살리시오. 빨리 살리시오.》 하시고는 한동안 아무 말씀도 못하시였다.
한시도 무대를 떠날수 없어 하던 사람이 무대에서 사라지다니, 당을 따라 그렇게도 억세게 달려오던 그 열정의 심장이 고동을 멈추다니, 그렇게도 바라던 통일의 날도 보지 못하고 가다니?!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황철이 생명의 마지막시각에도 《돈화의 수림속에서》의 연출을 생각하며 회상기를 가슴에 품은채 운명하였다는 원장의 보고를 들으시자 더욱 침통해하시는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그래 죽을 때까지도 연출을 생각했단 말이지. … 죽지 말아야 할 동무가 죽었소. 참 훌륭한 동무였소. 정말 아까운 동무를 잃었소. … 재능있는 연출가를 잃었소. 그는 마지막까지 당에 충실한 동무였소.》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가슴에 저려오는 아픔을 막을길 없어하시였다. 황철의 안해는 어버이수령님께서 그토록 비통해하시며 하신 말씀을 원장에게서 전해듣는 순간 다시금 고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의 손을 그러잡았다. 조용한 방안에 북받치는 감격의 오열로 도간도간 끊어지는 안해의 크지 않은 목소리가 울렸다.
《여보, 눈을 뜨세요. 어서 눈을 뜨세요. … 어버이수령님께서 당신은 죽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어요. 당신이 그렇게 죽을수 없다고, 당신을 빨리 살리라고 하셨어요. 여보, 이 말씀을 들어요? 예? 한번만이라도 눈을 뜨세요. 어버이수령님께서 죽지 말아야 할 당신이 죽었다고 그렇게 가슴아파하시는데 그렇게도 애통해하시는데 여보, 당신은 왜 눈을 못 뜨세요? …》
안해의 이 울부짖음은 방안에 있던 유가족들로 하여금 참고참았던 눈물을 일시에 쏟게 하였다. 그들만이 아니라 자리를 같이하였던 의사, 간호원들과 극장배우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도 어버이수령님의 고매한 의리와 크나큰 은정앞에서 눈물을 금치 못해하였다. 그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관계부문 일군들에게 황철동무가 사망한것과 관련하여 신문에 부고도 내고 장례를 사회장으로 성대히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그의 자녀들을 만경대혁명학원에 보내주고 유가족들을 잘 돌봐주도록 뜨거운 배려를 돌려주시였다.
며칠후 황철의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국립연극극장에서 성대히 진행되였다. 그때로부터 어느덧 26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간 1987년 4월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오래전에 곁을 떠난 황철에 대하여 회고하시면서 일군들에게 그의 자식들이 지금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가고 하나하나 물으시고는 그들이 당의 배려속에서 아버지의 대를 이어 문학예술부문에서도 일하고 정치일군으로도 일하고있다는 보고를 받으시고는 황철동무의 자식들이 그렇게 일하고있으면 좋다고 하시며 못내 기뻐하시였다. 참으로 황철에 대한 어버이수령님의 은혜로운 사랑과 배려는 세월이 흘러가도 끝이 없었다. 어느해 6월 중순이였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나라의 연극예술발전에 기여한 황철의 예술적재능을 높이 평가하시면서 그는 한팔이 없었으나 연기를 아주 잘하였다고, 화술도 독특하였다고, 재능있고 훌륭한 배우였다고 추억하시였다.
그리고 어느해에는 당과 혁명을 위하여 충실히 일하다가 일생을 마친 혁명전사들의 빛나는 이름속에 황철도 세워주시며 그의 유해를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하시고 조국통일상도 수여해주도록 하시였다. 그리하여 황철은 애국렬사라는 영생의 이름으로 조국과 더불어 길이 남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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