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후 남쪽이나 북쪽이나 많은 사람들이 정국의 혼란을 맞이하였다. 친일파로 잘 나가던 인간들은 숨을 곳을 찾아갔고 해방의 주역들은 어깨를 펴고 거리를 활보하였다. 그것도 잠시 분단의 비극이 시작되면서 개개인의 삶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었고 각자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만 했다. 이러한 때에 자의반 타의반 누구는 남으로 누구는 북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 힘들게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을 재조명하고 소개하고자 한다. 북행을 택한 사람들의 관하여 남쪽의 여러 가지 자료에도 소개되었지만 내용이 대부분 짧아 전후 내막을 알기가 어려웠다. 마침 북에서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사이트에 당시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북에서 어떻게 정착했고 어떻게 살아갔는지 그나마 자세하게 소개 되었다. 그 자료를 다시 미국에서 운영하는 <재미련> 사이트에 소개된 것을 원문 그대로 소개한다. 북을 택하고 어렵게 올라간 사람들의 행적에 대해 알고자 하는 독자들에 매우 유용한 자료라 생각하며 <프레스아리랑>이 ‘[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14. 배우 문예봉- 인생의 참다운 포구' 원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 1917년 1월 3일 출생. • 1932년부터 배우생활 시작. • 1948년부터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배우. • 1999년 3월 26일 사망. • 인민배우.
문화성혁명사적관에는 어버이수령님께서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시기에 문학예술부문의 오랜 로장들과 함께 찍으신 뜻깊은 기념사진이 모셔져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오랜 친구들이라고 불러주신 그 6명의 행운아들속에는 문예봉도 있다. 어버이수령님의 바로 곁에 서서 무한한 행복과 긍지에 잠겨있는 그의 단아한 모습을 보느라면 부지중 예술영화 《곡절많은 운명》에 나오는 주제가의 구절구절이 떠오른다.
추억의 돛을 달고서 저 멀리 올라가보면 곡절도 많은 내 한생 굽이굽이 흘러왔네 사나운 파도를 넘어 내가 닿은 포구는 어디 장군님의 사랑의 품에 삶의 닻을 내리였네
망망대해에서 배들은 포구로 향한다.
사람도 인생이라는 항로에서 깃을 들일 포구를 찾는다.
허나 포구는 많아도 운명을 맡기고 닻을 내릴 삶의 보금자리, 인생의 참다운 포구를 찾는것은 결코 쉽지 않은 법이다. 그곳에 가닿자면 사나운 풍랑을 헤쳐야 할 때도 있고 별도 없는 캄캄한 밤에 향방을 잃고 헤매일 때도 있다.
우리는 여기서 곡절많은 인생항로에서 돛대도 삿대도 없이 작은 매생이를 몰아가며 끝끝내 희망의 등대불을 찾아 행복의 포구에 삶의 닻을 내린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저 한다.
《임자없는 나루배》
1930년대초 서울의 영화관들에서는 무성영화 《임자없는 나루배》가 상영되였다.
이 영화는 당시 나라잃은 식민지민족이 겪고있는 비극적운명을 비교적 진실하게 그려낸것으로 하여 조선사람이라면 누구나 보고싶어하는 작품으로 알려져있었다.
이 영화에서 녀주인공역을 맡아 수행한 신인배우가 바로 문예봉이였다.
문예봉은 비판적사실주의영화창작의 대표자의 한사람이였던 라운규의 주선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였다.
그러고보면 라운규는 문예봉에게 있어서 영화를 알게 하고 예술을 알게 해준 선배였고 스승이다.
원래 라운규와 문예봉의 아버지 문수일은 한때 연극에 뜻을 두고 연극창작활동을 벌린것으로 하여 심복지우같이 지내는 사이였다.
당시 라운규는 《임자없는 나루배》를 자기의 야심작으로 여기고 이 영화의 녀주인공을 누구에게 맡길것인가를 오래동안 모색하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친구인 문수일에게 찾아갔던 라운규는 그만 속으로 환성을 내질렀다. 금방 피여나기 시작한 한떨기 백합과도 같은 문예봉을 보았기때문이였다. (그때 문예봉은 아버지의 극단에서 연극의 단역배우로 출연하고있었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라운규가 그토록 고심하며 찾던 영화의 녀주인공이 바로 눈앞에 있는것이 아닌가. 예봉은 미모만이 아니라 조선녀성의 외유내강과 순후함을 체현한것으로 하여 영화를 성공에로 이끌어갈수 있는 참신한 인물이였다.
라운규는 제꺽 친구에게 동의를 얻고 자기가 새로 만드는 영화 《임자없는 나루배》의 녀주인공으로 문예봉을 출연시키기로 하였다. …
문예봉은 라운규에게서 자기가 출연할 《임자없는 나루배》의 줄거리를 감명깊게 들었다.
문예봉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주인공이 불쌍해서 자꾸만 울었다. 임자없는 나루배를 타고 정처없이 흘러가는 녀주인공의 운명은 어떻게 될가?
다음날부터 영화촬영이 시작되였다. 영화의 주인공 춘삼역은 라운규, 그의 안해역은 김련실이 맡았다.
난생처음으로 촬영기앞에 나선 문예봉은 몹시 당황했다. 얼굴표정과 몸의 움직임 어느것 하나도 자연스럽지 못하고 자꾸만 실수를 했다.
문득 문예봉의 눈앞에는 자기가 일하던 제사공장으로 찾아와 뜨거운 물에 덴 자기의 손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손녀의 땀과 눈물이 슴배인 돈을 죄송스럽게 받아쥐고 공장정문을 느릿느릿 걸어가던 할아버지, 병석에 누워있는 자기를 위해 한겨울에 두터운 얼음장을 까고 물고기를 낚아오던 할아버지, 연극에 미쳐돌아가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손녀를 정성껏 돌봐주던 불쌍한 할아버지의 모습이 어쩌면 영화의 주인공들과 그리도 비슷할가? 아, 불쌍한 사람들!
문예봉은 자기도 모르게 자감상태에 깊숙이 빠져들어갔다.
《좋다!》
감독의 웨침소리와 함께 촬영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울리였다. …
라운규의 손에 이끌려 영화계의 문턱을 힘들게 넘어선 예봉이였건만 예상외로 첫 배역은 그에게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대인기와 영화계의 별이라는 명성을 가져왔다.
1921년 영화 《월하의 맹세》로 자기의 첫 페지를 펼친 무성영화는 1936년에 이르러 마침내 수난많던 자기의 마지막페지를 덮어버렸다.
무성영화들은 현실의 움직임을 직관적으로 재현하고있었지만 운동적인 형식과 직관적인 형식의 측면에서는 아직 영화의 체모를 원만히 갖추지 못하고있었다.
특히 무성영화의 제약성은 변사들의 《창조성》과 무책임성 그리고 무식성으로 하여 관객들의 불만을 야기시키는것이였다.
당시 무성영화는 배우들의 대사가 필림에 취입되지 못하였으므로 변사(영화해설자)들이 영화의 첫시작부터 마감까지 능란한 화술로 배우들의 대사를 구연하면서 장면들과 내용들을 해설해주었다. 그들은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면서 관객들과 더불어 호흡을 같이하는 영화의 소개자, 대변자들이였으며 그 과정에 여러가지 재미있는 일화들도 많이 남기였다.
당시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어느날 술을 마시고 나와 떨떨한 기분이였던 변사는 빠리의 풍경이 나오는 장면에서 그만 이런 실수를 하고말았다.
《여기는 독일의 파리! 세계의 문화와 류행의 도시로 이름난 파리! 오, 독일의 파리!》
객석에서 폭소가 터져올랐다. 그 시기는 도이췰란드를 독일이라고 하였으며 프랑스를 불란서, 빠리를 파리라고 하였다.
그제서야 정신이 펄쩍 든 그는 자기의 실수를 알아차리고 다음과 같이 둘러쳤다.
《오, 독일의 파리건 불란서의 파리건 파리는 파리였다!》
객석에서 또 웃음이 터져올랐다.
《옳도다! 옳도다! 여러분의 그 웃음 옳도다! 술취한 사람 정신이 펄쩍 들고 철문같이 입이 과묵하게 닫긴 신사숙녀제씨들은 웃었나니 여기 광무대의 객석에는 봄이 왔도다!》
변사의 능란한 말솜씨는 온 객석을 한바탕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
이렇게 당시 변사들은 영화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객관적립장에 서지 않고 자신의 화술기교를 시위하는데 치중하는가 하면 작품의 내용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기도 하는 등 여러가지 편향들을 발로시켰다.
무성영화의 이런 제약성을 극복하고 영화분야에서 예술화를 더욱 다그치려는 시도에서 우리 나라에서도 첫 유성영화가 출현하였다.
그 첫 유성영화가 바로 사람들속에 널리 알려진 《춘향전》이였다. 영화의 성공여부는 춘향의 연기를 어떻게 하는가 하는데 달려있었다.
문예봉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소박한 품성과 아련하면서도 인정미가 넘치는 아름다운 녀배우였다. 게다가 그는 벌써 촬영기앞에서 억지스러운 연기때문에 눈물을 쥐여짜던 신인배우가 아니였다.
연출가와 영화인들의 추천으로 춘향역을 맡게 된 문예봉은 수정처럼 맑고 순결한 춘향의 외유내강한 성격과 내면세계를 진실하게 형상하였다. 특히 영화의 절정을 이루는 변학도에 대한 춘향의 항거장면은 동료들을 감탄시켰다.
촬영이 끝난 후 한 녀동료가 어떻게 되여 그렇게 진실하게 역을 수행할수 있었는가고 묻자 문예봉은 쓸쓸히 웃으며 대답했다.
《연기에 들어가니 그 변학도가 꼭 왜놈같더군요.》
왜놈! 그 한마디에는 나라를 빼앗고 우리 인민에게 망국노의 운명을 강요한 일본놈들에 대한 증오의 감정이 응축되여있었다.
그는 일개 배우로서 춘향의 역을 했다기보다 자기가 체험한 쓰라린 지난날을 그대로 펼쳐보인것이였다.
《춘향전》을 상영하는 영화관들은 련일 초만원을 이루었으며 대경사나 난것처럼 들끓었다. 반면에 일본영화나 눅거리련애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들은 텅텅 비다싶이 하였다.
조선적인것에 대한 열렬한 호응!
당시 일제가 우리의 모든것을 없애버리려고 미쳐날뛰던 형편에서 이것은 왜놈들에 대한 은페된 형태의 반항이였다.
유성영화 《춘향전》의 인기와 더불어 문예봉은 은막의 혜성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예술영화 《춘향전》을 관람하는 관객들은 그 은막뒤에서 펼쳐지는 녀배우의 눈물겨운 생활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
삼라만상이 잠든 새벽 3시경, 쥐죽은듯 한 서울의 밤거리에 다급한 달음박질소리가 울렸다. 정신없이 뛰여가던 그 발자국소리가 뚝 멎은것은 안국동의 어느 한 집 대문앞에서였다.
녀인은 가쁜숨을 모두어쉬면서 대문가에 한쪽 귀를 조심히 가져간다. 집뜨락에는 고요한 정적이 깃들어있었다.
문예봉은 대문을 살그머니 밀어보았다. 끄떡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는 왜서인지 문을 두드릴념을 않고 무너지듯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는다.
며칠전에도 밤새껏 영화록음을 마친 문예봉은 새벽녘에야 세방으로 돌아왔었다. 빈방에 혼자 있을 아이를 생각하며 급히 문을 두드렸다.
한참만에야 신을 철철 끄는 소리가 나더니 얼굴을 잔뜩 찌프린 녀주인이 대문밖으로 머리를 쑥 내밀었다.
《지금이 몇시인데 소란을 피우는거요? 늦으면 촬영소에서 자고말게지.》
문예봉은 기가 막혔다. 세방에는 그가 아침에 나올 때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방기둥에 띠로 매놓고 나온 사랑하는 자식이 있었던것이다. 아마 지금쯤은 엄마를 부르다가 잠들어버렸을는지도 모른다.
녀주인은 대문을 찌그덕 닫으며 다시금 토달거렸다.
《이름난 배우라는게 집세를 제때에 물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눈치가 있길 하나.》
문예봉은 와락 귀를 막고싶은 충동을 애써 누르며 세방쪽으로 뛰여갔다. …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문예봉은 밤늦게 돌아오면 차마 문을 두드릴념을 못하고 한겨울에 대문앞에서 떨군 했다.
오늘도 문예봉은 문을 두드릴수 없어 대문앞에 쪼그리고 앉아 녀주인이 우물에 물을 길러 가려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있어야 했다.
별들이 무수히 반짝이는 밤하늘을 쳐다보니 시골에 내려가 병치료를 받고있는 사랑하는 남편이 못견디게 그리워났다.
남편 림선규와 문예봉은 서로 열렬히 사랑했지만 그들의 결합은 순탄치 않았다. 한번은 페결핵을 앓고있던 림선규가 자기의 병때문에 처녀의 일생을 불행하게 할수 있다는 죄의식으로 문예봉과의 사랑을 포기했었고 또 한번은 딸을 밑천으로 연극단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려는 아버지의 리기적목적때문에 그들의 사랑이 시련을 겪게 되였었다.
그때의 심정을 문예봉은 후날 이렇게 표현했다.
《온 세상이 귀치않고 몸과 마음을 붙일 곳이 없었다. 캄캄한 하늘아래서 내 마음이 정처없이 흘러갈뿐이였다.》
그때로부터 몇달이 지난 어느날 문예봉은 신의주에서 공연하게 된 기회를 타서 몰래 극단을 빠져나가 림선규를 찾아갔으며 하여 두사람은 다시 만날수 있게 되였던것이다.
그렇게 랑만적인 사랑으로 결합된 그들의 가정은 임자없는 배처럼 여기저기 표류하게 되였다. 아버지의 극단전속작가였던 림선규와 가정을 이룬 때로부터 시작된 고달픈 세방살이는 문예봉에게 어느 하루도 끊기지 않는 괴로움을 강요하고있었다.
제일 가슴아픈것은 남편이 결핵병자라는것을 안 주인집들에서 값눅은 세방마저 주기를 거절하는것이였다.
현재 살고있는 세방도 남편이 시골에 내려가 병치료를 한다는 구실을 대고 가까스로 구한 집이였는데 여름이면 빈대가 와글거리고 겨울에는 벽마다 성에가 가득 덮이는 차거운 랭방이였다.
문예봉의 두볼로는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내리였다. 돈없는 설음, 자식을 마음껏 돌볼수 없는 설음, 병에 시달리고있는 남편에 대한 설음… 그중에서도 제일 큰 설음은 집없는 설음이였다.
아, 언제면 제 집에서 남편이랑 함께 모여살수 있을가?
그것은 그가 바란 최대의 소원이였다.
하지만 한줄기의 빛도 스며들지 않는 이 땅에서 그 소원은 한갖 꿈에 지나지 않는것임을 그도 모르지 않았다.
… 동녘하늘이 푸름푸름 밝아오고 얼마후 대문이 찌그덕 열리자 문예봉은 놀라서 쳐다보는 녀주인에게 억지웃음을 던지고나서 허둥지둥 하숙방으로 뛰여들어갔다.
방안에 들어서던 문예봉은 억이 막혀 그 자리에 굳어졌다. 울다가 지칠대로 지친 애기는 얼음처럼 차거운 방바닥에 쓰러져있고 그애의 허리에 매여진 긴 띠의 끝은 방기둥에 그대로 매여져있었다.
문예봉은 터져오는 아픔속에 너무 울어서 눈물로 얼굴이 얼룩덜룩한 어린것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죄없는 자식에게 너무도 고통을 주는 자기가 미워나서 흑- 하고 흐느꼈다. 이런 때 남편이라도 곁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그렇다. 비록 앓기는 해도 그이가 곁에 있으면 이 모든 고통을 견디여내기 헐할것 같았다.
그후 몇달이 지나자 그토록 고대하던 남편이 시골에서 올라왔다. 그는 안해의 서운한 눈길도 느끼지 못한채 방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부터 붙들고 기뻐서 어쩔줄 몰라했다.
《자, 우리 종화 얼마나 컸는가 좀 보자요.》
그러자 캐득거리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붓한 가정의 달콤함이 부엌에서 동자질을 하고있는 문예봉의 가슴속으로 흘러들었다. 빨리 설겆이를 끝내고 그들과 한데 섞여 즐겁게 지내고싶었다.
그가 금방 부엌에서 나오려는데 공교롭게도 문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순간 문예봉의 얼굴은 해쓱해졌다. 문너머에 서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인차 알아차린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며칠전에 나타나 《어쩔가? 방을 빌리겠다는 사람이 나섰는데…》 하고 쌀쌀하게 말했던 주인집 녀자였다. 벌써 석달째나 방세를 물지 못했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때 《며칠만 참아주세요. 이제 새 영화가 봉절되면 다 갚겠어요.》 하고 간신히 말미를 얻은 문예봉이였던것이다. 오늘은 기어코 끝장을 보자고 할것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떨렸다. 문을 열자 아닐세라 그 녀자가 성큼 들어섰다.
《그래, 오늘은 방세를 주겠지?》
《이왕 기다리던바에 조금만 더 참아주세요.》
녀주인의 쌀쌀한 얼굴이 단박에 굳어졌다.
《내 지금껏 이름난 배우라고 해서 참아왔는데 이거야 너무하지 않소. 우리 사정도 좀 봐주어야지. 안되겠어. 오늘중으로 방을 내주게.》
문예봉은 더는 출로가 없다는것을 깨닫자 눈앞이 아뜩했다.
《알겠어요.》
간신히 대답한 그는 녀주인이 돌아서자 문설주를 손으로 꼭 잡았다. 눈앞이 빙그르 돌아갔다. 여기서 나가면 우린 어쩌나?
한동안 멍하니 서있던 문예봉은 급히 눈구석을 손으로 찍고나서 방에 들어섰다. 그러던 그는 놀랐다. 남편이 옷을 갈아입고있었던것이다.
《어디 가시려고 그래요?》
림선규가 돌아보았다. 안해에 대한 동정의 빛과 자신에 대한 환멸이 한데 엉킨 흐려진 눈동자…
《!》
남편은 이미 자기가 녀주인과 나눈 이야기를 다 들은것이다.
《여보!》
문예봉은 자기가 무엇때문에 남편을 찾는줄도 모르면서 그를 찾았다.
《내 좀 나갔다 오겠소.》
림선규는 미처 만류할새도 없이 밖으로 사라졌다.
문예봉은 비내리는 거리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남편을 불안속에 지켜보았다.
한겻이 되여서야 림선규는 집에 돌아왔다. 혼자가 아니였다. 자기의 친구인 한규설과 함께 손달구지까지 끌고 왔다.
《여보, 그건 어쩌자고…》
림선규는 아무말없이 방구석에 잔뜩 무져놓은 책궤짝들을 내가기 시작했다.
문예봉은 서둘러 다가서며 남편의 손을 잡았다.
《종화 아버지, 왜 그래요?》
그 순간 남편이 고개를 돌렸는데 눈굽이 벌겋게 짓물려있었다.
문예봉은 남편의 의도를 알았다. 그는 자기 이상으로 사랑해온 책들을 팔아 방세를 마련하려고 결심한것이다. 보잘것없는 이 집안의 유일한 재산이 세 가족의 호구지책을 위해 사라지고있는것이다.
문예봉은 그를 만류할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서있었다. 여느때 같으면 남편의 앞을 막아서며 《여보, 어쩌면 작가인 당신이 책을 팔수가 있어요?》 하고 만류했으련만 이 순간에는 그럴 용기도 나지 않았다.
책을 다 실은 림선규는 문예봉에게 부탁했다.
《여보, 당신이 좀 수고해주오.》
문예봉은 자기 손으로 차마 책들을 팔지 못하는 남편의 그 아픈 심정이 가슴에 마쳐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얼마후 남편의 친구가 앞채를 메고 문예봉이가 뒤에서 밀면서 손달구지가 굴러갔다. 그뒤에서는 어진 두눈에 눈물이 고여있는 림선규가 고개를 푹 떨구고 서있었다. 울고있는 사람은 남편만이 아니였다. 손달구지를 밀고 가는 문예봉이도 울고있었다.
앞에서 굴러가는 손달구지가 별스레 기우뚱거리는것 같더니 급기야 책꾸레미가 쏟아졌다. 황황히 책꾸레미를 손달구지에 싣던 문예봉은 갑자기 스며드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비로소 그는 자기 운명이 노대도 없이 막막한 바다를 표류하는 임자없는 나루배의 신세와도 같다는것을 깨달았던것이다.
그러나 문예봉의 앞길에는 더 큰 어려움이 기다리고있었다. 일본놈들이 문예봉에게 저들의 편에 서서 군국주의영화에 출연하라고 강요하였던것이다.
문예봉의 생각은 복잡하였다. 만약 놈들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더는 영화계에 발을 붙일수조차 없게 될것이였다. 이것은 기우뚱거리는 가정의 가장노릇을 해야 하는 그에게 있어서 또 영화배우를 일생의 천직으로 여기며 살아온 그에게 있어서 쉽게 결심할 일이 아니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계가 급하다 하여도 민족적량심마저 팔아가며 목숨을 연명할수는 없었다. 며칠후 《조선일보》를 비롯한 여러 신문들에는 문예봉이 영화계에서 은퇴했다는 기사가 일제히 실리였다. 《조선영화의 기라성》으로 떠올랐던 문예봉이 은막에서 조용히 사라져버린것이였다. 《임자없는 나루배》는 겹쳐드는 풍랑에 정처없이 표류하고있었다.
《내 고향》
문예봉은 시골에서 8. 15해방을 맞이하였다. 일제가 쫓겨가고 해방이 되였으니 민족영화예술의 발전을 위하여 발벗고나서리라는 커다란 포부와 희망을 안고 그는 다시 서울로 갔다.
그러나 서울은 민족영화예술을 꽃피울수 있는 활무대가 아니였다. 일제를 대신하여 남조선을 강점한 미제는 우리 민족예술발전의 앞길을 가로막고 또다시 식민지노예의 운명을 들씌우고있었다.
하여 문예봉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량심적인 예술인들과 함께 미제의 식민지파쑈통치를 반대하여 공장과 가두, 거리와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민주주의적인 민족문화를 발전시킬데 대한 구두선전을 벌리였다.
그 죄아닌 죄로 체포령을 받게 된 문예봉은 가족들과 헤여져 이집저집 숨어다니며 살지 않으면 안되였다. 거리와 골목마다엔 현상금까지 건 체포령이 나붙어있어 그는 어쩔수 없는 막다른 고비에서 헤매이게 되였다.
바로 이러한 때 그는 민족의 태양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민족영화예술발전을 위하여 영화예술인재들을 귀중히 여길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고 예술영화를 전문으로 창조하는 기지를 세워주시였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듣게 되였다.
헤여날길 없는 운명의 막바지에서 예술에 대한 희망마저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문예봉은 가족과 함께 단연코 38°선을 넘어 북행길에 올랐다.
공화국의 품에 안긴 문예봉은 조선국립예술영화촬영소(현재 조선예술영화촬영소)에서 보람찬 예술창조의 날을 보내게 되였다.
그러던 1948년 8월 22일, 그날은 문예봉에게 있어서 일생을 두고 잊지 못할 운명전환의 날이였다.
촬영소의 한 책임일군이 급히 문예봉의 집에 찾아왔다.
《예봉동무, 빨리 가기요.》
《무슨 일입니까?》
《장군님께서 동무를 찾으시오.》
문예봉은 깜짝 놀랐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소.》
문예봉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누르며 집을 나섰다.
촬영소로 뛰여가는 그의 머리속에는 줄곧 한가지 의문이 맴돌았다.
(장군님께서 어떻게 나를 다 아실가?)
숨이 턱에 닿아 촬영소구내에 들어서던 그는 그 자리에 굳어졌다. 글쎄 해빛같은 웃음을 지으신 수령님께서 마주 걸어오시는것이 아닌가.
문예봉은 몸둘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그러다보니 자기가 그분께 인사의 말씀을 드리지 못했다는것도 알지 못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손을 다정히 잡아주시면서 문예봉동무를 만나니 반갑다고, 남조선에서 얼마나 고생했는가고, 오느라고 수고했다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다정하게 말씀하시는것이였다.
《장군님!》
문예봉은 겨우 이렇게 말씀올리고나서 그만 고개를 떨구었다. 눈물이 샘처럼 솟구쳤다. 자기가 정말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앞에 서있는것인지 모든것이 꿈만 같았던것이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일제의 백만관동군을 쥐락펴락하시며 놈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시던 민족적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 절세의 애국자이신 위대한 장군님께서 아무런 격식도 없이 현지에 나오시여 한낱 보잘것없는 영화배우를 이렇듯 따뜻이 만나주시리라고 감히 상상이나 할수 있었겠는가.
아무리 눈굽을 훔쳐도 눈물이 걷잡을수 없이 흘러내렸다.
(아이참, 내가 왜 이럴가.)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헤아리신듯 친근하게 집은 잡았는가고 따뜻이 물으시였다.
이번에도 문예봉은 아무 말씀도 드리지 못했다. 다만 그의 두볼을 타고 흐르는 감사의 눈물이 대답을 대신하고있었다.
《지난봄에 장군님께서 돌아보신 그 집에 들었습니다.》
문예봉을 데리고 온 일군이 그를 대신하여 대답을 올리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어쩔바를 모르고 감격에 목메여 하는 문예봉에게 아이들은 몇이나 되는가, 학교에는 다 다니는가고 친어버이심정으로 하나하나 물어주시였다.
문예봉은 그토록 인자하신 어버이수령님앞에서 어느덧 어려움도 다 잊어버리고 친정집에 찾아간 딸자식마냥 가족들도 다 무사히 들어왔으며 아이들도 모두 학교에 다니고 어버이수령님께서 다녀가신 집에서 아무런 불편이 없이 행복하게 생활하고있다고 말씀드렸다.
문예봉의 대답을 들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러면 마음이 놓인다고 하시면서 애로되는것이 있으면 어려워말고 다 제기하라고 하시는것이였다.
문예봉은 다시금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울기 시작했다. 지금껏 누가 자기의 집걱정을 해준 사람이 있었던가. 해방전이나 해방후에도 남조선에서 집없는 설음을 얼마나 사무치게 느꼈던가.
추운 겨울날 대문앞에서 손을 호호 불며 밤을 새우던 일, 밀린 방세때문에 남편의 살점과 같은 책꾸레미를 실은 손달구지를 끌면서 비물인지 눈물인지 모를것을 연방 훔치면서 걸어가던 일… 지금껏 제 집이 없어 세방살이를 해온 그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에게 자기의 집-보금자리가 생긴것이다.
그 집을 주신분은 바로 김일성장군님이시다. 만일 장군님이 아니시였더라면 그는 지금도 미제의 식민지로 된 남조선에서 숨어지내야 했을것이다.
그런 문예봉에게 공화국에서는 그와 가족이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훌륭한 집을 마련해주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주신것이 어디 집뿐인가. 그의 삶과 행복까지도 다 찾아주지 않으셨던가. 문예봉은 그날 그토록 뵈옵고싶던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뵈온 영광과 끝없는 감격을 가슴깊이 간직하고 그이의 크나큰 신임과 배려에 꼭 보답하리라 굳게 속다짐하였다.
그후 문예봉은 해방후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되는 예술영화 《내 고향》의 녀주인공역을 맡는 영예를 지니게 되였다.
아무것도 없는 빈터우에서 위대한 수령님에 의하여 첫걸음을 떼는 영화예술의 력사적인 화폭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예가 어찌 아무에게나 차례질수 있겠는가.
이것은 정녕 어버이수령님께서 문예봉에게 주시는 은정깊은 사랑이며 크나큰 믿음이고 기대이기도 하였다.
《내 고향》의 녀주인공 옥단이는 해방전에 문예봉이가 《임자없는 나루배》나 《춘향전》 등에서 형상하였던 녀인들과 완전히 다른 형의 녀성이였다.
그는 외유내강하면서도 새 사회를 열렬히 동경하는 꿈을 가지고있는 아름답고 훌륭한 처녀이다. 하기에 옥단은 유격대로 간 애인에 대한 소박하면서도 열렬한 사랑을 지니고 계급적으로 각성하며 자기앞에 닥쳐오는 가혹한 난관과 시련을 뚫고나간다.
문예봉은 옥단의 유순한 기질과 강의한 성격을 진실하게 형상하기 위하여 사색하고 또 사색하였으며 피타는 노력을 기울이였다.
문예봉은 옥단의 형상을 통하여 모진 가난속에서 천대를 받다가 해방을 맞은 조선녀성의 기쁨과 환희를 진실한 연기로 보여주었다.
그는 옥단의 역형상을 창조하는 과정을 통하여 예술영화 《내 고향》은 단순히 고향마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어버이수령님께서 찾아주신 내 조국, 인민이 주인된 내 조국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주게 된다는 심오한 사상을 깨닫게 되였다.
영화예술인들은 어버이수령님의 현명한 령도와 따뜻한 보살피심속에 반년 남짓한 기간에 창조적지혜와 열정을 다 바쳐 예술영화 《내 고향》을 완성하였다.
예술영화 《내 고향》이 완성되였다는 보고를 받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처럼 바쁘신 가운데서도 영화를 보아주시였다.
영화가 끝나자 그이께서는 자애로운 눈길로 창조성원들을 대견하게 바라보시며 해방후 처음 나온 영화인데 잘되였다고, 동무들의 손으로 만든것이니 무에서 유를 창조한셈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첫 예술영화인데 잘되였다고 거듭 치하하시면서 예술영화를 계속 만들어야 하겠다고 고무해주시였다.
무한한 행복감에 휩싸인 문예봉은 《내 고향》은 진정 수령님의 품이며 그 품을 찾아떠난 자기의 선택이 참으로 옳았다는것을 가슴뜨겁게 느끼게 되였다.
3) 인생의 참다운 포구
이 땅에 전쟁의 포화가 휩쓸던 준엄한 그 나날에도 영화예술인들에 대한 어버이수령님의 사랑과 배려는 끊임없이 돌려졌다.
1950년 12월 어느날 문예봉을 비롯한 예술인들은 어버이수령님께서 보내주신 차를 타고 그이께서 계신 곳으로 가게 되였다.
차에서 내려 회의장에 들어서던 문예봉은 그만 《어마나?!》 하며 다급히 제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차를 타고 올 때에는 똑같이 솜동복차림이였는데 회의장에 들어서면서 보니 어느새 다들 준비해가지고 온 양복과 세타를 날래게 갈아입었던것이다.
녀배우중에 누런 솜동복을 입고있는 사람은 유독 자기 혼자뿐이였다. 고운 세타에 맵시있는 치마를 산뜻하게 받쳐입은 다른 배우들과 뚜렷이 대조되는 차림새에서 문예봉은 덜퉁한 자신을 자책할수밖에 없었다.
그때 어버이수령님께서 회의장에 들어서시였다.
순간 폭풍같은 만세소리가 터져올랐다.
오매에도 그리던 어버이수령님을 우러르는 순간 격정에 사무친 문예봉은 만세를 높이 부르며 사람들의 사이를 헤집으며 정신없이 앞으로 나갔다.
어버이수령님께서 가까이 오시게 되였을 때 유별나게 솜옷을 입고있던 자신을 발견한 문예봉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려고 하였다.
그런데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를 알아보시고 걸음을 멈추시였다.
몸둘바를 몰라하는 문예봉을 보시며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에게 손을 내미시며 그동안 앓지 않았는가고 다정하게 물어주시는것이였다.
《장군님, 안녕하십니까?》
문예봉은 인사를 올리며 저도 모르게 몇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그러다가 갑자기 망설이며 몸을 움츠렸다.
수령님의 눈길이 자기의 옷차림에 와닿았던것이다.
문예봉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싶은 심정이였다.
바로 그때 수령님의 우렁우렁한 음성이 머리우에서 울렸다.
《그렇게 입으니까 보기도 좋고 절도가 있어보입니다. 전시인데 옷을 잘 입으면 인민들이 욕합니다. 그렇게 입으니 아주 좋습니다.》
《?!》
문예봉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온몸을 휩싸고있던 죄스러움이 바람에 연기날리듯 순식간에 날아났다.
문예봉은 끝없는 감사의 마음으로 수령님을 우러렀다. 예봉이 자신도 부끄러워했던 옷차림새를 그토록 평가해주시는 수령님, 참으로 수령님은 한 녀배우의 마음속깊이까지 다 헤아려주시는 인민의 어버이이시였다.
문예봉은 그이를 삼가 우러르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또 흘리였다.
그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전쟁승리를 앞당기는데 이바지하는 작품을 만들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이의 가르치심대로 문예봉을 비롯한 창작가, 예술인들은 예술영화창조사업에 자신들의 정열을 다 바쳐 전쟁시기의 첫 예술영화인 《소년빨찌산》을 완성하였다.
그 공로로 하여 문예봉은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제정한 공훈배우칭호를 수여받았다.
전쟁이 한창인 영웅의 나라 조선에서 나온 예술영화 《소년빨찌산》은 체스꼬슬로벤스꼬(이전)에서 진행된 국제영화축전에서 《자유를 위한 투쟁상》을 수여받았으며 련일 초만원을 이루면서 상영되였다.
전쟁의 포성이 울리던 조국의 하늘가에 승리의 축포가 오르고 전후복구건설의 힘찬 노래소리가 울리던 1954년 문예봉은 예술영화 《빨찌산처녀》의 주인공역을 훌륭히 형상하여 인민들을 기쁘게 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37살이였다. 그는 연기를 진실하게 잘하여 1955년 새해를 경축하는 국가연회에서 어버이수령님으로부터 처녀역을 정말 잘하였다고, 앞으로도 처녀역을 잘하라는 과분한 치하의 말씀과 함께 축배잔을 받았다.
복은 홀로 온다는 옛사람들의 말이 무색해지는 세월이였다.
1960년 어느 한 연회장에서 문예봉은 또다시 수령님을 만나뵙게 되였다.
연회가 한창 진행되고있을 때 수령님께서는 문예봉에게 축배잔을 부어주시며 《문예봉동무! 축배잔을 드시오.》라고 하시며 동무는 아직 젊었는데 왜 로인역을 하는가고 매우 섭섭해하시였다.
문예봉은 당황하여 고개를 푹 숙이였다. 아마도 얼마전에 방영된 예술영화를 보고 하시는 말씀이신듯 하였다. 그 영화에서 문예봉은 할머니로 분장하여 출연하였던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그 모습이 수령님께 이토록 심려를 끼쳐드릴줄이야.
처녀역을 하라고 하시던 수령님앞에 정말 면목이 없었다.
5년전에 하셨던 말씀을 잊지 않으시고 그이께서 자기의 역 하나하나를 그토록 세심히 살펴보고계시였다는 생각에 문예봉은 몸둘바를 몰랐다.
이때 한 일군이 수령님께 문예봉동무에게는 이젠 대학에 다니는 자식이 있다고 말씀올리였다.
그것은 사실이였다. 15살의 어린 나이에 라운규의 손에 이끌려 《임자없는 나루배》의 녀주인공으로 출연하였던 문예봉은 어느덧 중년부인에 어울리는 체모를 갖추기 시작하고있었다. 수령님께서는 섭섭한 표정을 지으시며 대학에 다니는 아들딸들이 있다고 해서 할머니역을 하는가 하시며 머리를 저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얼굴을 들지 못하고있는 그에게 동무에게는 지금이 한창때인데 벌써부터 로인역을 하기 시작하면 진짜 늙어버리고만다고 타이르듯 말씀하시였다.
문예봉은 머리를 번쩍 들었다. 영화배우도 사람인것만큼 나이가 들면 늙기마련이고 따라서 로인역을 맡는것은 응당한것이다.
하지만 수령님께서는 녀배우를 그토록 아끼시는 마음에서 점차 사라져가는 한 녀배우의 청춘을 두고 그렇듯 아쉬워하시는것이 아닌가.
배우로서의 20대 청춘기를 수난의 그 세월에 다 흘러보내고 30고개에 수령님의 품에 안긴 문예봉이였다.
그의 진정한 예술활동은 바로 수령님의 품에 안겨서야 비로소 시작된셈이니 문예봉의 예술창조도 청춘기라고 보아야 할것이였다.
그러니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청춘시절, 예술창조의 청춘시절은 바로 지금이라고 수령님께서 깨우쳐주신것이다.
문예봉의 심장은 격동의 불꽃으로 튀여오르고 얼굴은 흥분으로 하여 붉게 상기되였다. 그럴수록 자신을 소중히 여겨주시고 앞날까지 축복하여주시는 수령님의 사랑앞에 가슴이 뜨거워지는것을 금할수 없었다.
(내 언제나 청춘으로 수령님께 기쁨을 드리리라.)
문예봉은 전후복구건설시기와 천리마운동이 벌어지던 격동적인 시기에 조국과 숨결을 같이하며 영화창조사업에 자기의 재능과 열정을 다 바치였다.
하여 그는 이 시기에 《다시 찾은 이름》, 《성장의 길에서》, 《금강산처녀》를 비롯한 많은 예술영화들에 출연하여 조선영화사의 한페지를 수놓을수 있었다.
그 행복의 나날속에 그는 1982년 인민배우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하루의 일과대로 《로동신문》을 펼쳐들던 문예봉은 《무대를 잃은 〈아리랑〉의 녀주인공》이라는 기사의 제목을 보게 되였다.
《아리랑》의 녀주인공이라면 해방전 영화계의 혜성으로 떠받들리우던 신일선(본명은 신홍련)이였다. 그가 대체 어떻게 되였다는건가.
문예봉은 서둘러 기사에 눈길을 박았다.
병약한 로파의 사진과 함께 기사에는 가게방을 운영하던 신일선이 병석에 누워 해외에서 이붓자식이 부쳐주는 돈으로 생명을 겨우 유지해나간다는 기막힌 사실이 씌여져있었다.
조선의 영화재사로 높이 떠받들리우던 라운규와 함께 민족영화의 대표작인 《아리랑》에 출연하여 만사람의 각광을 받던 신일선, 미모의 명배우로 명성을 떨치던 그가 생활의 막바지에서 죽을 날만 기다린다니…
《… 신홍련양의 연기는 처녀출연으로는 놀랄만 한 성공이라 하겠으며 그의 용모나 기예는 확실히 조선녀우로서는 누구보다도 영화배우적소질을 가장 풍부하게 가진 사람이라 하겠다. …
끝으로 이 영화에 출연하여 성공한 여러분과 더욱 장래의 기대가 적지 않은 신홍련(신일선)양의 자중(自重)을 바란다.》
이것은 1926년 10월 7일 《동아일보》에 실린 예술영화 《아리랑》이 거둔 예술적성과에 대한 관평의 일부분이였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였다.
문예봉은 밤새도록 잠들지 못하였다. 신일선은 그렇게도 넘고싶던 아리랑고개를 넘지 못하였다. 참다운 인생의 포구를 찾지 못한 신일선, 그는 여전히 주인없는 나루배에 실려 한많은 세상에 대한 가슴저미는 저주와 통한이 서리고서린 어둠짙은 망망대해에서 정처없이 떠돌고있는것이 아닌가.
그날 문예봉은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따뜻한 품속에 안긴 자기의 행복한 생활에 대하여 새삼스럽게 돌이켜보았다.
아담한 새 집을 받던 때의 일, 영화촬영소에 나오신 수령님을 처음으로 만나뵙고 해방후 첫 예술영화 《내 고향》에서 옥단이의 역을 수행하던 시절, 어느해인가 국가연회에 참가하였을 때 수령님께서 동무는 아직 젊었는데 왜 로인역을 하는가고, 동무에게 로인역은 맞지 않는다고 하시며 청춘의 활력을 부어주시던 그 나날…
예술영화 《춘향전》을 촬영할 때는 또 어떠했던가.
그때 문예봉은 60고개를 넘긴 자기가 그 영화창조에 참가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물론 그가 우리 나라에서 첫 유성영화 《춘향전》의 주인공역을 한것은 사실이였다. 그러나 그것은 아득한 옛적 일이다. 누구도 그 일을 생각지 못하고있었다. 그러나 예술영화 《춘향전》의 완성을 위해 수십차례의 말씀을 주시고 배우선발문제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관심을 돌려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문예봉에게 리도령의 어머니역을 형상하도록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그리하여 문예봉은 력사주의적원칙과 현대성의 원칙이 잘 결합된 력사물영화로 널리 알려진 예술영화 《춘향전》창조집단의 한 성원으로서 우리 나라 영화사에 또 한페지를 기록할수 있게 되였다.
주체82(1993)년 2월 12일은 문예봉의 인생에서 최절정으로 되였던 뜻깊은 날이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래동안 당을 받들어 일을 잘해온 문학예술부문의 로장들과 함께 문예봉을 친히 오찬회에 불러주시였다.
《나는 동무들과 협의회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정적분위기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점심식사나 한끼 같이하자고 불렀습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들모두를 나의 오랜 친구들이라고 부르시면서 한명한명씩 이름을 찍어 해방직후부터 50년 가까이 함께 일해온 나날들을 감회깊이 추억해주시였다.
문예봉은 자리를 같이한 동지들을 둘러보았다. 영생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와 《애국가》를 작곡한 작곡가 김원균을 비롯하여 영화혁명, 가극혁명, 음악혁명의 선구자들이였던 작가 백인준, 조령출, 신진순, 배우 유경애 등 모두가 한사람같이 우리 수령님과 당을 받들어 주체문학건설의 초행길을 개척해온 쟁쟁한 공로자들이였다. 바로 그속에 자신도 속해있다고 생각하니 마냥 부풀어오르는 심정을 금할수 없었다.
그는 자기 차례가 오자 정중히 일어나서 일생동안 어버이수령님의 배려만 받고 기쁨을 드리지 못했다고 죄송스레 말씀올리였다.
그러자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손을 들어 자리에 앉으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문예봉동무가 일생동안 나의 배려만 받고 기쁨을 드리지 못했다고 하는데 왜 기쁨을 주지 못하였겠습니까.
문예봉동무는 해방직후부터 지금까지 많은 영화를 만드는데 참가하였습니다.》
그러시면서 예술영화 《내 고향》으로부터 시작하여 그가 출연한 영화들을 일일이 꼽아주시였다.
문예봉은 솟구치는 눈물을 금할수 없어 젖어드는 눈굽을 옷고름으로 찍어내며 앞으로 다부작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에도 출연하겠다고,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을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 충실하게 키우겠다고 말씀드리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감사하다고 하시며 문예봉에게 자식들이 모두 몇이나 되는가고 따뜻이 물으시였다.
문예봉은 어려움도 잊고 아들딸 3명에 손자, 손녀가 6명이나 된다고 말씀올렸다.
그의 대답을 들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환하게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는것이였다.
《문예봉동무에게 아들딸 3명과 손자, 손녀가 6명 있으면 대단한 밑천을 가지고있는셈입니다.》
좌석은 금시 밝은 웃음으로 차넘치였다.
그날 식탁에는 사연깊은 언감자국수가 올랐는데 수령님께서는 간고한 항일무장투쟁시기 장백현에서 활동할 때 량강도사람들한테서 배워가지고 언감자국수를 만들어 먹던 일이며 해방후에도 자신을 찾아온 해외교포들에게 언감자국수를 대접하면서 언감자국수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주시던 일들을 감회깊이 회고하시였다.
그날 좌석에는 남조선에서 활동하다가 해방직후 공화국의 품을 찾아온 예술인들이 과반수였다.
문예봉은 그 동무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조국이 통일된 다음 수령님을 제주도까지 모시고 가고싶다고, 그날 제주도 산기슭에서 이런 언감자국수로 통일연을 차리겠다고 말씀올리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감사하다고 하시며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우리는 기어이 미제를 몰아내고 조국을 통일해야 합니다. 조국이 통일되면 우리 인민들이 잘살수 있습니다.》
바로 이날에 문예봉은 자기의 한생을 크나큰 영광과 행복의 한생으로 빛내여준 태양의 품이 얼마나 은혜로운것인가를 다시금 사무치게 절감할수 있었다.
기구한 운명의 곡절로 열다섯살에 영화배우가 되여 나라잃은 예술인의 민족적설음과 온갖 모멸을 사무치게 느껴온 녀배우를 한창시절은 더 말할것도 없고 인생의 황혼기에도 언제나 잊지 않으시고 손잡아 이끌어주시여 주체예술의 꽃바다우에 활짝 핀 한떨기의 붉은 꽃으로 되게 하여주신 위대한 그 사랑.
그렇게 놓고보면 문예봉은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품속에서 비로소 행복의 포구를 찾은 행운아였고 행복자였다.
그는 1997년 예술영화 《먼 후날의 나의 모습》에 출연하였다.
이 영화는 그의 한생을 돌이켜보게 하는 총화작이라고도 말할수 있었다.
영화의 창조과정을 마치고나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어렸을 때 먼 후날의 나의 모습인 지금을 상상조차 할수 없었다. 어릴 때 나의 할아버지가 커가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가인박명〉이라는 말을 자주 외우군 하였다. 하지만 나는 오늘 이 말을 부정하게 된다.
내 나이 이제는 80이 넘었다. 작년초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은정어린 80돐생일상을 받아안던 날 나는 당의 품에 안겨 값있게 살아온 나날들을 돌이켜보면서 위대한 장군님에 대한 고마움에 감사의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다.》
그는 《영화와 함께 70년》이라는 회상록을 집필하다가 1999년 3월 82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애국렬사릉에 안치되여있다. (끝)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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