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영도, 역사의 자주적 주체 민중
“착취계급사회에서 인민대중은 소수 지배계급의 착취와 압박을 받아 왔으며 역사의 주인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착취계급사회에서도 역사를 발전시킨 것은 인민대중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의사대로가 아니라 많은 경우에 지배계급의 의사에 따라 역사를 창조하는 무거운 부담을 걸머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러한 처지에 있는 인민대중은 아직 역사의 자주적인 주체로 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민중이 역사의 주체이면서도 착취사회에서 사회의 진정한 주인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할 수 없었던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민중이 자기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지나간 역사만 돌이켜 보아도 민중의 항쟁은 끊임없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민중이 사회의 참된 주인이 되지 못한 것은 그들이 자기의 사회계급적 처지와 힘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의 정치적 역량으로 결집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민중이 자기의 처지, 자기의 힘을 깨닫기까지에는 참으로 오랜 세월이 흘렀던 것입니다.
19세기 말엽에 있은 갑오농민전쟁은 그 하나의 사례가 될 것입니다. 1894년 4월8일 전 봉준의 지도하에 ‘척양척왜’ ‘보국안민’의 슬로건을 내걸고 일어선 농민들의 투쟁은 전라도와 충청도를 휩쓸었습니다. 농민군은 도처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전주까지 점령하였으며 전라도 53개 고을에 ‘ 집강소’를 설치하고 일련의 정치적 개혁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갑오농민전쟁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갑오농민전쟁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통하여 민중의 의식성, 조직성이 약할 때 초래되는 뼈아픈 피의 교훈을 보는 것입니다.
농민군은 자신들의 그처럼 무권리하고 가난한 원인이 봉건사회의 제도 자체에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일부 악질적인 관리들의 악정과 부패에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탐관오리들만 숙청하면 자기들의 처지가 개선되리라고 생각하였고 국왕에 대한 환상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농민들이 하나의 정치적 역량으로 굳게 결집되어 있지 못한데다가 농민군에 대한 통일적 지도가 보장되지 못하였습니다. 갑오농민전쟁은 봉건사회가 붕괴되기 시작한 우리나라 자본주의 여명기의 농민들의 투쟁은 어떤 것이던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농민들은 자기의 투쟁으로 봉건제사회를 밑뿌리까지 뒤흔들어 놓고 그의 멸망을 촉진시키는 데서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나 유감스럽게도 하나의 독자적인 정치적 세력으로 결집되지 못한 탓에 투쟁의 열매를 횡취당하고 역사무대에 새로 나타난 자본의 노예로 전락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역사의 갈피갈피에 피로써 아로 새겨진 이러한 사실은 의식화되고 조직화되지 못한 민중의 투쟁은 실패를 면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때문에 착취사회에서 민중은 역사의 주체이면서도 사회의 주인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였으며 역사를 자주적으로 개척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역사는 그처럼 장구하고 고통스러운 길을 걸어왔던 것입니다.
민중은 자기를 이끌어 주는 올바른 지도에 의해서만 하나의 사상의지로 결집되어 자기 운명을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개척해 나가는 역사의 자주적인 주체로 될 수 있습니다.
민중의 의식화, 조직화는 올바른 지도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역사에 빛나게 기록된 파리 꼬뮨의 역사적 교훈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1871년 프러시아침략자들에게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침략자들과 싸우기 위하여 국민 자신이 조직한 국민자위대를 해체하려는 것을 계기로 파리 시민들은 용감하게 들고일어나 싸웠으나 반동들의 공세를 끝내 막아내지 못하고 처절했던 몽마르트르언덕의 마지막전투가 끝나는 것과 함께 72일 간 존속했던 꼬뮨은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였던 것입니다.
꼬뮤나들이 옳은 지도를 받지 못한 것, 이것이 파리 꼬뮨이 남긴 역사의 교훈 가운데서 가장 주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과학적인 지도를 받지 못한 탓에 파리 꼬뮨은 우선 하나로 굳게 결집되어 있지 못하였습니다. 꼬뮨위원회는 주로 푸르동주의자들로 이루어진 ‘소수파’와 좌경모험주의적 블랑키주의자들이 지도권을 쥐고 있던 ‘다수파’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꼬뮨위원회는 그 자체가 이렇게 분열된 상황에서 파리 시민을 하나의 정치적 역량으로 굳게 결집시킬 수 없었고 투쟁에 대한 통일적 지도를 보장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과학적인 지도가 보장되지 못한 까닭에 파리의 노동자계급은 농민을 비롯한 광범위한 민중을 자기편에 결속하지 못하였고 한편 반동들의 이간 책동을 효율적으로 격파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리하여 파리의 노동자계급과 시민들은 숫자상으로나 무장상에서 몇 십 배나 우세한 반동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과학적인 지도가 없었던 까닭에 파리의 노동자계급과 시민들은 옳은 전략전술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베르사이유로 도망가는 적들을 계속 추격하지 않았으며 군사적 우세가 보장되고 있던 초기에 반동의 소굴인 베르사이유에 대한 결정적인 공격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반동들로 하여금 병력을 다시 수습할 시간을 주었고 게다가 프러시아군에게 잡혔던 프랑스포로들까지 넘겨받아 파리를 공격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파리 꼬뮨은 민중이 자기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에서 거족적으로 떨쳐나서는 경우에도 옳은 지도를 받지 못하면 자기 운명을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개척할 수 없다는 것을 피의 교훈으로 뚜렷이 보여 줍니다.
영도자의 올바른 지도에 의해서만 민중이 역사의 참다운 주체, 자주적인 주체로 될 수 있다는 것은 피로써 얼룩진 우리 민족해방투쟁사의 교훈에서도 인식되는 진리입니다.
민중에 대한 지도문제는 어떤 사회역사적 운동에서나 다 제기되지만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광범위한 민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서 더욱 절실한 문제로 나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광범위한 민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이 온갖 착취와 압박을 종국적으로 청산하기 위한 가장 심각한 사회변혁운동이며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민중이 참가하여 진행하는 고도의 의식적, 조직적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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