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상훈 - 한생 통일을 불러
해방이후 남쪽이나 북쪽이나 많은 사람들이 정국의 혼란을 맞이하였다. 친일파로 잘 나가던 인간들은 숨을 곳을 찾아갔고 해방의 주역들은 어깨를 펴고 거리를 활보하였다. 그것도 잠시 분단의 비극이 시작되면서 개개인의 삶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었고 각자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만 했다. 이러한 때에 자의반 타의반 누구는 남으로 누구는 북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 힘들게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을 재조명하고 소개하고자 한다. 북행을 택한 사람들의 관하여 남쪽의 여러 가지 자료에도 소개되었지만 내용이 대부분 짧아 전후 내막을 알기가 어려웠다. 마침 북에서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사이트에 당시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북에서 어떻게 정착했고 어떻게 살아갔는지 그나마 자세하게 소개 되었다. 그 자료를 다시 미국에서 운영하는 <재미련> 사이트에 소개된 것을 원문 그대로 소개한다. 북을 택하고 어렵게 올라간 사람들의 행적에 대해 알고자 하는 독자들에 매우 유용한 자료라 생각하며 <프레스아리랑>이 ‘[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작가 김상훈 편 ‘한생 통일을 불러’ 연재내용1회와 2회분을 모두 게재하기로 하였다.
김상훈의 ‘한생 통일을 불러’
∙ 1919년 7월 10일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출생.
∙ 1943년 10월에 원산철도공장에서 로동.
∙ 1946년 현대일보사에서 활동.
∙ 1950년 7월 의용군으로 입대.
∙ 1962년부터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작가로 활동.
∙ 1987년 8월 30일 사망.
∙ 조국통일상수상자.
《조선은 하나다!》
나의 말은 한평생
이 한마디뿐이다
…
이 말 웨치며 싸우리라!
불에도 뛰여들고 물에도 뛰여들고
적의 교수대에도 기꺼이 오르리라
내 통일의 원쑤들과 싸우다 죽으면
땅우에 흩어진 살점 하나하나
붉게 뿌려진 피방울 하나하나가
빠짐없이 높이 웨칠것이다
《조선은 하나다!》라고
(김상훈의 시 《한마디 말》중에서)
항 거
《사랑이 무엇인지 말해보라! 인간이 무엇인지 말해보라! 고향이 무엇인지 말해보라! 이런 무서운 질책이 밤에도 날아오고 낮에도 날아오고 벽에서도 날아오고 천정에서도 날아오고 땅에서도 날아오른다.》(김상훈의 글중에서)
거대한 산발들이 병풍처럼 둘러막힌 산골농촌마을인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거멓게 썩어든 두터운 벼짚이영을 인 초가집들이 산기슭에 다닥다닥하니 붙은 골안에 이르니 농군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괴물같이 큰 기와집이 눈앞에 막아나섰다.
넓다란 마당에 들어선 어린 김상훈은 겁기어린 눈동자로 옆에 서있는 어머니를 올려다보았다.
동네적으로 비단을 걸치고 하얀 쌀밥을 먹는 집은 바로 이 집뿐이였다.
피죽도 없어서 초근목피로 연명해가는 동네사람들과는 하늘과 땅차이를 둔 이 지주집에서 자기에게 흰쌀밥과 고운 옷을 준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모자가 대문안에 들어서자 《허, 인제야 왔나?》하는 힐난의 목소리와 함께 큰아버지벌이 되는 김채환이 비단저고리를 걸치고 토방마루에 나섰다.
어머니는 죄스러운 자세로 황급히 허리를 조아리며 떠듬거렸다.
《저- 어, 정작 아이를 떼놓자고 생각하니…》
《물론 제 새끼와 떨어지자니 가슴이 아프겠지. 허나 임자네 집이야 벼룩이도 먹여살리기 힘든 형편이 아닌가. 저애를 우리 집안에 들여보내면 호강스럽게 자라고 또 우리 상산 김씨가문의 종가집 장손이 될텐데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데 있겠나.》
…
이렇게 되여 김상훈은 여섯살 나던 해인 1925년 친부모들과 헤여져 고향마을의 지주인 김채환의 양아들로 되였다.
그는 1919년 7월 거창군 가조면에서 아버지 김채완, 어머니 권태성의 둘째아들로 태여났다.
그의 집은 얼마 되지 않는 토지를 자작으로 경작하였는데 소가 없고 로력이 부족해서 해마다 생활이 쪼들리군 했다.
봄부터 가을까지 온 한해 밭에서 살며 피땀을 묻어왔건만 언제 한번 배부른 날이 없었다.
김상훈은 태여나서부터 무명낳이를 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눈에 익혀왔으며 걸음마를 떼면서부터는 어머니의 치마폭을 잡고 이삭줏기에 따라다니군 하였다.
갈수록 설익은 조롱박처럼 초들초들 말라들어가는 집안살림에 지칠대로 지친 아버지는 노상 술독에 빠져 살았다.
거기에는 사연이 있었다. 그래도 조선독립이라는 기대를 안고 아버지는 얼마 안되는 가산을 팔아 독립군들의 뒤바라지를 했었다.
그런데 독립군은 독립은커녕 왜놈들과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초야의 무주고혼으로 되거나 산산이 흩어지고말았다.
이때부터 아버지는 거의 타락한 인생길을 걸었다. 사는것을 귀찮게 여기는데 습관이 되였으며 걸핏하면 화를 내군 하였다.
쪼들리며 말라들어가는 어려운 살림속에서도 어머니는 상훈을 위해서는 모든것을 다 바쳐왔다.
그렇게 온갖 정을 깡그리 쏟아가며 키워가는 아들인데 갑자기 종가집에서 양자로 삼겠다고 하니 애틋하고 정결한 모성애는 무참히 란도질당하는듯 했다.
후날 알게 된 일이지만 김채환도 김상훈과 마찬가지로 자식없는 큰집에 양아들로 입양한 몸이였다. 종손이 되여 대를 잇기는 하였으나 정작 자기 대에 와서 자식을 보지 못해 마음고생을 많이 한 그였다.
김상훈은 양자로 큰집에 들어온 해부터 시작하여 6년간을 고향에 있는 공립보통학교에 다녔다. 그가 학교를 졸업하자 양아버지는 그에게 한문공부를 하도록 강요하였다.
원래부터 남다른 영민성과 감수성을 지닌 김상훈은 훈장이 배워주는 내용을 인차 자기의것으로 받아들이군 하였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벌써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뗐다.
하지만 김상훈의 마음은 도저히 밝아지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소리없이 닥쳐온 부귀를 누리는 어린 그의 마음에서는 항상 친부모들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가 큰집에 옮겨온지 얼마후 친아버지인 김채완은 그만 한많은 세상을 하직하고말았다.
박복한 운명을 타고난 아버지의 죽음은 그의 가슴속에 지울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때없이 담너머에서 눈물을 흘리며 서있는 람루한 녀인, 그가 다름아닌 자기의 친어머니 권태성이라는것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
무엇때문에 양가집과 생가집, 양부모와 친부모들의 차이가 이리도 심하단 말인가?
양가집 주인들은 비단옷을 입고 머슴을 부리며 부족함이 없이 살아가는데 자기를 낳아준 친부모들은 가난을 명줄로 안고 태여난것만 같았다.
자기 주위에서 배회하는 불공평한 인간세상의 비밀을 제손으로 해득하고싶은 마음은 가야산의 봉우리처럼 높아만 갔다.
그는 진정한 공부를 하고싶었다. 다른 친구들과 함께 서당이 아니라 학교를 다니며 불합리한 이 사회를 투시하는 눈을 가지고싶었다.
《저도 중학교에 진학해서 공부를 하고싶습니다. 수락해주십시오.》
며칠동안을 벼르고 벼르다가 큰마음 먹고 꺼낸 말이였다.
《남들이 신학문, 신학문 하니까 너도 그게 그렇게 좋아보이느냐? 그건 다 부질없는짓이야. 집에 있으면 먹고 입고 사는것이 하나 걱정없는데 뭣때문에 객지를 떠돌아다니면서 고생을 사서 한단 말이냐. 그런 말은 다시는 꺼내지 말아.》
대번에 그의 요구를 묵살해버린 김채환은 신학문은 진짜 공부가 아니며 한문을 익혀야 옳은 공부로 된다고 력설하였다.
김상훈은 자기의 요구가 수락될 때까지 일체 식음을 거절하기로 결심했다.
《덜된 놈의 자식, 그래 이 애비의 요구가 그렇게도 마뜩지 않느냐?》
김채환은 노발대발하며 김상훈의 처사를 꾸짖었다.
그러나 김상훈은 자기의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두문불출하며 절식하는 그의 몸은 날이 갈수록 수척해지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날 뜻밖에도 상훈의 방에 김채환이 들어왔다.
《네 소원이 정 그렇다니 학교에는 보내주겠다.》
김상훈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그었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그가 내놓은 조건이란 두가지였는데 하나는 장가를 가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문공부를 계속해야 한다는것이였다.
그의 속심은 장가를 보내서 종가집안의 대를 잇게 할 자식을 보자는데 있었다.
그 조건은 김상훈에게 있어서 너무도 아름찬것이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벌써 자기를 울타리처럼 둘러막은 높은 산발너머로 달리고있었다. 이렇게 되여 그는 16살이 되는 해인 1935년에 북상면에서 사는 녀성과 결혼을 하게 되였다.
김상훈은 1936년초에 드디여 자기를 둘러막고있던 울타리에서 해방되였다.
김상훈은 그해 4월 서울에 있는 어느 한 사립중등학교 시험을 치르었다.
시험장에서 그는 또다시 나라잃은 민족의 수치를 절감하게 되였다. 모든 시험은 조선말이 아니라 일본어로 치르게 된것이였다.
김상훈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산골에서 한자공부만을 해온 그에게 일본어란 너무도 생소한것이 아닐수 없었다. 시험은 치나마나 락선이였으며 그렇게 되면 또 집게같은 양아버지의 손아귀로 다시 들어가야만 했다.
바로 오늘을 위해 모든것을 희생한 그였다. 시험지만을 들여다보며 길게 한숨을 토해내던 그는 피뜩 떠오르는 생각에 펜을 들었다.
에라, 모르겠다.
드디여 그의 펜은 시험지우로 달리기 시작하였다. 그가 펜을 떼였을 때 시험지우에는 한시형식인 4언시가 적혀있었다.
그런데 결김에 써놓은 한시가 그의 입학시험지에 합격도장을 새기게 할줄은 꿈에도 몰랐다.
학교 교장은 김상훈의 4언시를 두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나이에 4언시로 재치있고 의미가 깊은 시를 쓴것을 보면 분명 천성적인 재능을 타고난것이 틀림없소. 난 이 수험생을 입학시키면 앞으로 훌륭한 학생이 되리라고 믿소.》
이렇게 되여 김상훈은 사립중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였다.
그는 5년간의 재학기간에 력사, 문학 등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였다.
이 기간에 그의 학문적시야만 트인것이 아니라 세계관에서도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삼천리강토는 바로 제땅이 아니라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된 남의 땅이였으며 조선사람은 제 말과 글, 이름마저 빼앗기고 살아야 하는 불행한 운명을 짊어진 너무도 비참한 민족이였다.
김상훈은 1944년에 쓴 시 《종다리》에서 사랑하는 친어머니와 고향땅에서 비참한 삶을 연명해나가는 농민들의 고달픔, 봄은 왔건만 제땅이 없어 봄을 맞지 못하는 우리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처지를 종다리의 울음소리에 비유하여 노래하였다.
배움의 나날과 함께 김상훈의 두눈은 틔워져 나라를 빼앗긴 설음은 날이 갈수록 커갔으며 그에 대한 항거의식도 대나무처럼 자라기 시작했다.
쌓이고쌓였던 울분은 그가 중등학교 3학년때에 처음으로 폭발하였다.
학교측에서는 일제의 강압에 못이겨 조선어과목을 전면적으로 페지하는 조치를 취했던것이다.
이를 계기로 김상훈은 동창생들과 함께 동맹휴학을 조직할것을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도 일시적인 흥분으로 인한 항거로밖엔 달리 되지 않았다.
난생처음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에 나선 걸음이라 총칼을 휘두르는 일제경찰에 정면으로 대항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당면하게는 학교에 있는 악질친일교원을 반대하는 동맹휴학을 단행하기로 결심했다.
그렇지만 투쟁은 처음부터 흐지부지되고말았다. 조직자인 김상훈이 일제경찰에게 체포되여 서울 종로경찰서에 구류되였던것이다.
이렇게 되여 그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감옥생활을 하게 되였다.
일제의 야수적인 고문과 악행을 당해야 하는 류치장생활은 김상훈의 마음속에 자란 반일의식과 계급의식을 한계단 더 발전시키는 계기로 되였다.
온 나라가 감옥으로 전변되여 모든 조선사람들이 죄인취급을 당해야 하는 현실, 수난당한 민족의 아픔이 온몸으로 흘러들었다.
식민지민족의 아들로 태여난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식민지민족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제 나라를 되찾지 못하는것은 최대의 죄악이다!
일제에 대한 항거의식은 그의 모든 세포와 피줄마다에 그대로 흘러들었으며 반일성전에 나설 의지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10일만에 석방되여 나왔으나 학교에서는 그에게 무기정학을 주었다.
그러나 반년후에는 해제되여 김상훈은 마침내 중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였다.
1940년 4월 서울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 후 그의 반일정신은 더욱 굳어져갔으며 항거의 목소리로 울려나왔다.
당시 우리 인민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더욱 악랄해져 학생들은 문학공부도 제대로 할수 없었고 군사교련과 검도 등에 많은 시간을 빼앗겨야 했다.
김상훈은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학생들과 많이 접촉하면서 맑스주의서적들을 적지 않게 탐독하게 되였으며 그 과정에 투쟁의 길에 나설 결심을 품게 되였다.
어느해 그는 방학기간을 리용하여 부모처자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동안 헤여진 양부모들과 안해, 자식들을 만나게 된다는 생각에 걸음은 구름을 탄듯 했다.
《아버지!-》 하며 달려와 안길 귀여운 자식들의 모습을 그려보며 양가집에 이른 그는 그만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여느때는 두팔을 벌리며 반기는 양부모들처럼 항상 열려있던 대문이 오늘은 입을 꾹 다문채 차거운 랭기를 풍기고있었다.
대문에 붙인 《공산주의자는 들어오지 말라!》라는 표어가 서슬푸르게 쏘아보고있었다.
방금전까지 흥분되였던 김상훈의 가슴은 한순간에 싸늘하게 식어갔다.
집뜰안에서는 김채환의 분기어린 호령소리가 들려왔다.
《천하에 배은망덕한 놈! 가난뱅이를 집에 데려와 호의호식시켜주었는데 뭐 이젠 이 애비를 반대하는 빨갱이가 돼서 나타나?! … 오늘부터 당장 이 집에서 나가거라. 나한테는 너같은 불효한 자식은 필요없다, 없어.》
김씨의 통곡소리도 들렸다. 제 자식처럼 품에 안고 키워온 상훈의 행동에 대한 장탄식이였다.
그렇듯 애틋한 정을 부어온 김상훈이 자기들의 기대와는 너무도 어긋난 모습으로 나타난것이였다.
아버지를 보겠다고 모지름쓰는 맏아들의 손목을 꼭 잡은 안해의 울음소리도 귀청을 찌르고있었다.
한참후에 대문이 열리더니 눈물범벅이 된 양어머니 김씨가 매정스러운 눈초리로 김상훈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아들을 위해 남모르는 정을 부어주던 그 따스한 인정미와 애정은 간 곳 없고 얼음장처럼 차거운 표정이였다.
《빨갱이자식놈의것은 헌털뱅이도 다 보기 싫다!》
그러면서 그는 김상훈이 어릴 때부터 입던 옷가지들을 마구 내던졌다.
《더는 보고싶지 않으니 이걸 가지고 썩 사라지거라.》
식칼로 두부모를 자르듯 차거운 말을 남긴 김씨는 대문을 쾅하니 닫아버렸다.
김상훈은 발치에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옷가지들을 내려다보았다.
이 양가집에서 살아온 나날들이 화폭처럼 안겨들었다. 그와 함께 담너머에서 자기를 바라보며 눈물을 짓던 녀인, 친어머니의 처량한 모습도 비껴들었다.
주섬주섬 옷가지들을 줏는 그의 눈가에는 비통함이 어려있었다.
갑자기 손에 딱딱한것들이 잡혔다.
의문과 호기심이 엇갈린 심정으로 그는 그것들을 헤쳐보았다.
어떤 옷가지사이에는 엿가락들이 들어있었고 또 다른 옷가지에는 종이로 꽁꽁 싼 돈도 있었다.
찢어지는 가슴을 달래며 모질게 이 아들을 욕질해야 하는 심정, 지금껏 키워온 자식을 한순간에 내버려야 하는 양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허나 무엇때문에 이 아들이 걷는 길을 리해하지 못하는가.
그래 한사람의 부귀와 안락이 아니라 나라를 되찾고 나의 친부모들과 같이 한생 뼈빠지게 일해도 가난의 멍에를 벗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도 다같이 잘사는 사회를 세우려고 일제에게 항거한것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김상훈은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돌렸다.
잘못했다는 단 한마디의 말로 사죄하고 다시 대문에 들어서면 이전의 생활을 되찾을수 있는 그였다.
하지만 그의 눈가에는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들의 모습이 어려왔고 불합리한 이 사회를 뒤집어엎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슴은 세차게 굽이치고있었다.
하기에 그는 1947년 5월에 쓴 시 《어머니》에서 그날의 자기 심정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
천사람이 무어라고 해도
제가 걷는 길은 바릅니다
과일밭에 돌팔매를 던지든 제일망정
젖가슴에서 받은 봄볕같이 따스한 사랑을
인민의 가슴속에 골고루 전해주는
그런 동무들의 뒤를 따라갑니다
어머니들이 흙속에 들어가시고
입술과 더운 가슴이 모두 없어지면
흙을 움켜쥐고 어머니를 부르지 않겠습니까
이 나라의 흙을 사랑하는것이
어머니를 위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1940년대에 이르러 일제는 식민지나라들에 대한 수탈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인민들은 극도의 기아와 빈궁속에 허덕이였으며 청년들에게는 징병령이 내리고 학생들에게는 《학도병제》가 실시되여 수많은 사람들이 징용과 보국대로 끌려나갔다.
연희전문학교에서 공부를 하고있던 김상훈에게도 《학도병령장》이 떨어졌다.
그러나 침략자들의 요구에 순순히 응할수 없었던 그는 날마다 찾아와 성화를 먹이며 위협해나서는 경찰들의 눈길을 피해 경기도와 강원도일대로 피신하여 다녔다.
하지만 쌍심지를 켜고 미쳐날뛰는 일본경찰들의 마수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그는 학도병기피자라는 죄아닌 죄로 하여 2주일동안이나 각종 기합과 군사훈련을 받았다.
1943년 10월 김상훈은 《징용공》이라는 딱지가 붙은 몸으로 원산철도공장에 끌려가 선반공, 주물공으로 일했다.
일은 힘들고 고되였지만 김상훈은 로동자들에게서 강의한 의지와 기질, 투지를 배웠다.
그는 로동자들과 함께 일하며 생활하는 과정에 백두산에서 강도 일제에게 섬멸적인 타격을 안기시는 불세출의 영웅 김일성장군님과 그이께서 이끄시는 항일빨찌산들의 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수령님에 대한 끝없는 흠모의 마음을 가슴에 새겨안게 되였다.
그러던 1944년 여름 전문학교동창생이 그를 찾아왔다. 오래간만에 만난 그들은 너무도 반가워 서로 마주잡은 손을 놓을줄 몰랐다.
이날 동창생은 김상훈에게 일제를 반대하는 비밀결사조직에 가입하고싶은 생각이 없는가고 은근히 물었다.
김상훈은 그의 요구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병을 구실로 서울에 올라와 조선민족해방협동단이라는 반일지하단체에 가입하였다.
이 단체에는 징병, 학도병, 징용을 기피하여 숨어다니던 사람들이 망라되였다.
모두가 식민지노예의 운명을 강요하는 일본제국주의자들에 대한 치솟는 격분을 안고 그놈들과 결사의 항전을 벌릴 큰뜻을 품고있는 사람들이였다.
그러나 옳은 로선과 주장이 없었다. 그들은 경기도와 강원도사이에 있는 백운산에 별동대까지 조직하여 일제와의 무장투쟁을 준비하고있었지만 적들과 싸워본 경험도 없었으며 가지고있는 무장장비란 고작해서 낡은 보총과 화승총 몇자루, 참대창이 전부였다. 오직 욕망과 의기만이 충만된 조직이였다.
조선민족해방협동단에서는 자기들의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고 옳바른 투쟁로선과 방도를 찾기 위해 모색하다가 마침내 김일성장군님께서 령도하시는 항일유격대에 사람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후날에 알려진 일이지만 그들이 파견한 대표는 조국이 해방되는 그날까지 조선인민혁명군과 련락을 맺지 못했다고 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별동대는 변절자의 밀고로 비밀이 탄로되여 일제군경들의 《토벌》로 완전히 파괴되였으며 대원들은 적과의 싸움에서 희생되거나 피신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김상훈은 조선민족해방협동단과 별동대사이에 련락임무를 수행하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철도공장에서 일을 하고있는데 몇명의 사복쟁이들이 나타났다.
《네가 로스께인가?》
워낙 키가 남보다 크고 코날선이 뚜렷하며 두눈이 억실억실하게 생긴 미남형인 김상훈을 별동대에서는 다들 그렇게 불렀다.
아마 변절자가 김상훈의 이름을 모르고있었던 모양이였다.
그때까지 조직이 완전히 파괴되였음을 모르고있던 김상훈은 사복쟁이들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이상한것을 감촉하며 마뜩지 않은 어조로 대답했다.
《그렇소, 그런데 당신들은 누구요?》
말끝을 맺는 순간 눈앞이 번쩍했다.
《네놈이나 말버릇이 꽤 고약하다.》
이렇게 되여 김상훈은 경찰에 체포되여 경기도 경찰부에서 한달동안 고문과 심문을 받으며 심한 고초를 당하다가 서대문형무소 미결감으로 수감되였다.
그때 조선민족해방협동단의 핵심성원들을 비롯하여 거의 백명에 가까운 청년들이 감옥에 미결수로 갇히게 되였다.
김상훈은 비통한 마음으로 동가슴을 두드렸다. 집안에 덤벼든 파렴치한 날강도에게 매도 안겨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놈들의 사슬에 얽매였으니 이 나라 사나이로서 어찌 하늘을 쳐다볼수 있으랴.
주먹으로 감방바닥을 내리치고 감방이 떠나갈듯 울분을 토한들 이 나라 하늘에 해빛이 비쳐들소냐, 가슴을 긁어내리는 한밤중의 소쩍새 울음소리는 도탄에 빠진 민족의 신음소리요, 교형리들의 저 채찍소리는 고향사람들의 등가죽 벗기는 소리였다.
아서라! 감방벽을 긁으며 하늘을 향해 빌지 말어라, 빈다한들 드리운 먹구름 가셔내고 태양이 이 땅에 비쳐들랴.
가슴속에 갈마드는 이런 생각에 잠겨 김상훈은 절망과 한탄으로 옥중의 나날들을 보냈다.
하지만 태양은 마침내 눈부신 자태를 드러내며 떠올랐다. 어둠을 가셔내고 두터운 얼음벽을 녹이며 이 나라의 하늘가에 찬연히 솟아올랐다.
그 태양은 반만년의 우리 민족사에서 처음으로 맞이하고 높이 모신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이시였다. 그 빛발은 산간벽지에도, 번화한 도회지에도, 차디찬 감방안에도 흘러들어 예속의 철쇄를 녹여버리였다.
그 휘황한 해발은 삼천리강토우에 마침내 조국해방이라는 크나큰 격정과 환희의 새 세계를 펼쳐놓은것이였다.
해방! 수십년세월 우리 민족이 얼마나 갈망하던 날인가. 꿈속에서도 그려보고 가난의 쪽박으로 피눈물을 떠마시면서도 바라고 기원한 이날이여서 더없이 귀중하고 더없이 소중한 8월 15일이였다.
통일을 위하여
…
나에겐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모른다
다만 조국을 사랑하는 한가지 길밖에
인민을 위한 인민의 나라를 세우는것밖에
나는 이래서 시를 쓴다 그리고 가장 자랑스럽다
(김상훈의 시 《나의 길》중에서)
해방과 함께 감옥에서 나온 김상훈은 이듬해초 어느날 서울 남산밑에 있는 어느 한 하숙집으로 달려갔다.
《서병곤군!》
서병곤은 예고도 없이 뛰여든 그를 보고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아니… 아, 이게 상훈군이 아닌가?!》
두 친구는 서로 손을 부여잡고 돌아갔다.
《그런데 우리 시인이 갑자기 무슨 일로 나타났나?》
서병곤은 더운물을 부어주며 물었다.
김상훈은 흥분을 늦추지 못하며 품속에서 《서울신문》을 꺼내놓았다.
《나도 봤네. 우리 민족의 령수, 절세의 영웅 김일성장군님에 대해 쓴 자네의 이 기사를 읽었단 말이네.》
그제서야 서병곤은 친구의 얼굴이 왜 이처럼 상기되였는가를 짐작했다.
《병곤군! 지금 임자네들이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해방의 은인이신 김일성장군님의 영상을 모시고 쓴 기사 <우리의 영웅 김일성장군>의 열풍으로 온 서울장안이 환희로 들끓고있네. 우리 전체 조선민족이 오매에도 그리고 흠모하던 위대한 태양의 존귀하신 모습을 처음으로 뵈옵게 된 우리들이 아닌가 말일세.》
그러면서 그는 가슴속에 넘쳐나는 감격과 희열을 억누르며 서병곤의 두어깨를 부여잡았다.
《병곤군, 정말 부럽네. 임자는 우리 남쪽에서 제일먼저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뵈옵는 영광을 지니고 그이에 대한 기사를 처음으로 쓴 행운아일세.》
서병곤은 정색한 기색을 지으며 안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너무 과찬하지 말라구. 솔직히 말해서 난 그 기사를 쓰고 자신을 얼마나 질책했는지 모르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우리 민족의 운명을 구원해주신 해방의 은인, 조선민족의 영원한 구세주이신 청년장군의 위인상을 너무도 짧은 기사로 썼으니…》
《병곤군, 나에게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뵈옵던 일을 이야기해줄수 없겠나?》
김상훈의 절절한 눈빛에서 그의 심정을 읽으며 서병곤은 감격스러운 날들을 돌이켜보았다.
《난, 천출명장 김일성장군님을 무한히 흠모하며 그이께로 달리는 우리 남녘의 인민들에게 그이의 위인적인 모습을 조금이라도 알려주는것이 기자로서의 직분을 다하는것이라고 생각하고 북행길을 단행하였네.》
이렇게 말꼭지를 뗀 서병곤은 자기들이 1945년 12월 28일 새벽녘에 38°선을 넘어 북으로 들어서던 때부터 시작하여 자기가 직접 보고 듣고 느낀 소감에 대하여 터놓기 시작하였다.
평양행 기차의 앞머리에 정중히 모셔진 김일성장군님의 초상화에 대하여, 새 조국건설의 열정으로 들끓는 북의 전야들에 대하여, 민주건설의 노래를 부르며 씩씩하게 거리를 행진하는 학생들과 사람들의 얼굴들마다에 넘쳐나는 행복과 희망으로 밝은 웃음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었다.
《정말 꿈같은 세상이였네. 이 땅에서는 상상도 할수 없는 현실이였지. 공장담벽과 큰 건물들에 붙어있는 <조선민족의 절세의 애국자이신 김일성장군 만세!>, <우리의 손으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자!>,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숙청하라!>는 구호들을 보는 순간 우리의 정신은 금시 맑아지는것만 같았네.
사실 정치적식견이 너무도 어린 우리였지만 하루동안에 목격한 북의 현실을 통해서 우린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께서 베푸시는 현명한 정사에 대해서 알수 있었으며 우리 조선인민이 나아갈 길이 어느 길인가를 어렴풋이나마 깨달을수 있었지.》
《그래, 그이께서는 우리 조선이 나아갈 앞길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였나?》
김상훈은 여직껏 자기가 묻고싶었던것을 물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해방된 우리 인민은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을 수행하는 길로 나가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러기 위하여서는 민주주의적인 모든 정당, 사회단체들을 망라하는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고 광범한 애국적민주력량을 묶어세워 민주주의적인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네.》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 …》
너무도 현명하고 심오한 가르치심에 김상훈은 막혔던 가슴이 후련해짐을 어쩔수 없었다.
바로 이 길이였구나!
김상훈은 암흑속에서 헤매다가 밝은 해빛을 본듯 앞이 환히 트이고 그이의 현명한 령도를 따른다면 무슨 일이든지 거침없이 해낼것만 같았다.
뜨거운 격정과 환희속에 흥분을 금치 못해하는 김상훈에게 서병곤은 정히 포개인 털외투를 들고 다가섰다.
《상훈군, 이 외투는 바로 그이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이네!》
김상훈은 감동을 금치 못해하며 털외투와 서병곤을 번갈아 보았다.
《우리가 떠나는 날 그이께서는 이 털외투와 털신을 보내주시였네. 추운 이 겨울에 외투도 변변히 입지 못한 우리들이 걱정되시여…》
그는 뜨거운것이 목에 꽉 메여 말을 잇지 못했다.
(아! 언제면 나도 자애로운 그 품에 안길수 있을가. 아, 못견디게 그리운 김일성장군님의 품!)
김상훈은 보물을 받아안듯 그 외투를 정히 받아 자기의 품에 꼭 껴안았다.
절세의 위인의 뜨거운 체온이 자기의 온몸으로 흘러드는것만 같았다.
심장은 높뛰였고 가슴은 격정의 파도로 설레여 시적흥분과 충동을 금할수 없었다. 그의 입가에서는 저도 모르게 즉흥시가 흘러나왔다.
비탄의 피울음 울며
절망의 거리를 헤매던 우리
장군님 밝혀준 민족의 진로따라
어깨겯고 나아가자 힘차게 앞으로!
이것은 결코 김상훈 혼자만이 아닌 남녘인민들의 한결같은 마음이였다.
이날 그들은 두손을 꼭 부여잡고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께서 밝혀주신 통일애국의 길에서 문필가로서의 본분을 다해나갈 굳은 결의를 다졌다.
이것은 김상훈의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운명의 선택이였다.
김일성장군님을 따르는 길! 바로 여기에 민족의 운명은 물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길이 있다는것을 그는 확신한것이였다.
압제의 사슬이 거미줄처럼 칭칭 감겨도는 남조선사회에서 자기의 신념을 고수하고 지켜싸운다는것은 피와 목숨을 요구하는 혈전의 나날들이였다.
1946년 1월 학도병동맹사건이 일어났다.
학도병동맹은 일제의 《학도병제》실시로 전쟁터에 끌려갔다가 해방을 맞아 조국으로 돌아온 청년학생들이 조직한 진보적인 단체였다.
여기에 망라된 성원들의 대다수가 애국적경향을 가진 젊은 지식인들이고 그들의 정치적영향력이 강한것으로 하여 동맹은 당시 주요정치세력의 하나로 지목되였다.
김상훈도 이 조직에 가입하여 서울 삼청동에 있는 본부와 문화회관에 자주 다니면서 이들과 마주앉아 시국을 론의하고 앞길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1946년에 《전위시인집》을 공동으로 발간하여 전위시인으로 이름떨친 유진오, 김상훈, 박산운 등은 원래 학도병출신들이 아니였다.
다만 조선과 일본의 전문학교, 대학들에서 함께 공부하다가 일본침략군대의 총알받이로 끌려나갔던 학도병출신 학우들과 동창생들의 연줄로 학도병동맹에 발을 들여놓았던것이다.
학도병동맹안에서 진보적인 청년학생들과의 접촉은 전위시인들의 창작활동에서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
특히 일본군대의 삼엄한 철조망안에 갇혀있던 자기들에게 재생의 서광을 안겨주시는 어버이수령님을 우러르며 반일결사전을 각오해나섰던 반일학도병무장대 성원들이 전위시인들에게 준 영향은 컸다.
비록 몸은 남녘땅에 있어도 마음은 언제나 어버이수령님의 품을 그리며 열정의 시, 투쟁의 노래를 구가한 전위시인들의 첫걸음은 이렇게 시작되였다.
그러나 악독한 일제식민지통치기반에서 해방된 기쁨을 안고 새 조국건설에 자신들의 지혜와 열정을 남김없이 바치리라던 김상훈을 비롯한 학도병동맹 성원들의 환희는 오래 가지 못했다.
미제와 그 앞잡이들이 남조선의 진보적인 단체들을 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학도병동맹사건을 조작하였던것이다.
1946년 1월 18일 미제의 사촉을 받은 반탁전국학생련맹의 폭력배들은 인민당과 서울시인민위원회청사 등을 습격하여 학도병동맹 성원들과 격렬한 싸움을 벌렸으며 이 과정에 량측에서 4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경찰은 학도병동맹이 총기류를 소지하고 먼저 불집을 일으켰다는 무근거한 사실을 날조하여 19일 새벽 삼청동에 있는 학도병동맹본부를 습격하였으며 동맹성원 3명을 무참히 살해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이로 하여 온 서울시내는 공포의 분위기에 휩싸여있었다.
미제와 그 앞잡이들에 의하여 해방된 조국땅에서 무참히 살해된 3명의 렬사들과 영결하는 장례식장은 야수들에 대한 치솟는 분노와 울분으로 끓어번졌다.
이날 그들의 령전앞에서 김상훈은 피눈물을 삼키며 추모시 《눈물로 쓰는 시》를 랑송하였다.
…
함께 이 땅의 일군이 되자고
손과 손 맞잡고 맹세하드니만
머리 부서지고 가슴과 배가 찢어지고
의좋은 삼형제처럼 비좁게 맞대고 누웠느냐
누구의 고운 맘인지 가느다란 초불만 파달거린다
우리는 천백번 옳아도 죽고 끌려가고
바른말을 극성으로 보답하는자
의기충천하야 나라를 다스린다
아아, 앞서간 세 동무야 서러울건 없다
또 하나의 쇠사슬이 끊어질 때까지
네 이름을 부르며 따라가는
무수한 동무가 있다
동지들의 영웅적희생은 김상훈의 투쟁열의를 더욱 돋구어주었다.
그들의 령전앞에 부끄럽지 않게 싸워 그들이 바라던 념원을 기어이 이룩할 일념을 안고 그는 학도병동맹 성원들과 함께 미제와 반동경찰들의 만행을 반대하여 시위투쟁을 벌렸으며 항의성명도 발표하였다.
그러나 파쑈적인 폭거는 날이 갈수록 더해지기만 했다.
미제의 마수에 의해 백주에 애국인사들이 거리에 피흘리며 쓰러졌고 수많은 무고한 인민들이 감옥으로,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민족을 또다시 피의 참화속에 몰아넣는 미제와 그 추종세력들에 대한 항거로 김상훈은 전위시인들과 함께 1946년에 출판한 《전위시인집》에 시 5편(《말》, 《전원애화》, 《장렬》, 《기폭》, 《바람》)을 실었다.
…
황량하다 천한 촌백성이 사는 이 마을엔
어미가 자식을 헐벗겨 떨리고
삽살개 사람을 물어 흔들고
금전과 바뀌여진 딸자식을 잊으랴 애썼다
…
(시 《전원애화》중에서)
김상훈은 해방후 외세에 의하여 갈라진 민족의 아픔과 통일에 대한 자기의 견해와 의지를 밝힌 시들을 창작하였으며 이로부터 전위시인으로 불리우게 되였다.
그는 자기가 일하던 현대일보사가 미제의 탄압으로 또다시 페간되자 시인으로서 창작사업에 힘을 기울이면서 조선문화단체총련합회(문련) 서기국에서 사업하였다.
문련서기국은 남조선의 문학예술에 대한 창작지도, 련락, 문건작성 등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미제와 리승만역적은 진보적경향이 강한 문련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다가 마침내 1949년 11월에는 문련사건이라는것을 조작하였다.
이 사건으로 김상훈은 놈들에게 체포되여 룡산경찰서에 구금되게 되였다.
교형리들은 갖은 고문을 들이대면서 그의 통일의지를 꺾고 애국자들에 대한 단서를 뽑아내려고 미쳐날뛰였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몇달동안 감옥에서 온갖 고초를 다 겪던 그는 병보석으로 출옥하게 되였다.
양아버지 김채환이 뒤공작을 한 대가였던것이다.
그날 감옥문을 나서면서 김상훈은 쓰거운 웃음을 지었다.
《허, 반공분자가 련공분자를 구원해주었군! …》
그것은 어제날의 친일주구로부터 친미주구로 전락된 김채환에 대한 개탄이였다.
김상훈은 감옥문을 나서면서 자기의 심정을 시 《옥문》에 담았다.
옥문을 나섰으나 기쁘지 않소이다
아이는 울먹울먹 나를 반기지만
옥에서 다른 옥으로 전옥온듯 하오이다
…
양놈에게 매여사는 칼부림만 흔한 세상
나무 한그루도 마음놓고 못 서있는
이 땅 그 어디가 감옥이 아니리까
문이라고 생긴 문은 안팎이 있다지만
이 땅의 옥문들은 안팎이 없소이다
얽매인 이 발자욱을 그 어디로 옮기리까
남조선을 강점한 미군과 그에 기생하는 역적무리들에 대한 치솟는 적개심은 날이 갈수록 높아갔다.
김상훈은 예술의 무기를 틀어쥐고 불합리한 남조선의 현실을 비판하고 미제와 그 앞잡이들을 반대하는 투쟁에 떨쳐나섰다.
전위시인의 한사람이며 전후복구건설시기 가사 《복구건설의 노래》를 창작하여 우리 인민들과 친숙해진 시인 류종대는 1947년 3월 《남조선민주투사들에게 드리는 시집》이라는 부제아래 발간된 김상훈의 시집 《대렬》의 후기에 이렇게 썼다.
《… 아직 창백하고 병약했지만 약을 먹기보다, 부모에게 달려가기보다 상훈은 새 조선의 요구앞에 예술을 들고 거리로 뛰여나갔다. 정의와 진리를 사랑하는 조선청년이면 다 그러하듯이 위대한 력사적현실앞에 새로운 각오가 불타올랐다. …》
약을 먹기보다 예술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간 사람! …
미제가 공화국을 반대하는 침략전쟁을 일으켰을 때 김상훈의 신념은 더욱 확고해졌다.
인민군대에 의하여 서울이 해방되자 노예의 사슬을 벗어던진 흥분으로 가슴을 들먹이던 김상훈은 지체없이 손에 총을 틀어잡고 의용군에 입대하였다.
김상훈은 자기의 군복입은 모습을 력사라는 거울앞에 비쳐보았다.
동족의 피로 물든 군복을 입고 손에 파쑈의 총칼을 든자들과 지금껏 맨손으로 싸워온 그에게 있어서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였다.
해방전에는 누런 군복을 입고 총칼로 조선사람들을 무참히 죽여 이 땅을 하나의 피바다에 잠그었던 일제에게 항거하여 학도병을 거부했고 해방후에는 《해방자》의 탈을 쓰고 총을 휘두르며 남조선의 수많은 애국자들과 인민들을 살륙한 미제, 그자들의 앞잡이가 되여 오늘날에는 동족을 반대하는 침략전쟁에 나선 역적무리들을 반대하여 펜을 휘두르고 항거의 주먹을 내흔들던 그였다.
그러나 오늘 그가 입은 군복은 단순한 의복이 아니였다. 민족을 둘로 갈라놓고 동족의 머리우에 전쟁의 불구름을 몰아온 미제와 리승만역적을 반대하고 이 땅우에 평화롭고 정의로운 인민의 새세상, 조선민족의 영원한 삶의 터전을 수호하기 위하여 스스로 선택한 군복, 민족의 운명을 걸머진 군복이였다.
《아빠, 우리도 같이 가면 안되나?》
《아버지, 이제 가면 언제 다시 오나요?》
올망졸망한 다섯 자식들이 그의 품에 와락 매달렸다.
김상훈은 아들과 딸들의 이름을 차례로 하나하나 불렀다.
《애들아, 아버지가 미국놈들을 모조리 족치면 우리 다시 만나게 된다. 그때까지…》
목구멍이 꽉 메여와 그는 말끝을 채 맺지 못했다. 기약할수 없는 길이였다. 하지만 자식들을 위해서, 이 나라의 수천만의 생명들을 위해서 이 길을 가야만 하는 김상훈이였다.
의용군에 입대한 그는 싸우는 전선으로 포탄과 탄약을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였다.
이 나날 그는 피를 흘리며 귀중한 조국의 촌토를 목숨으로 사수하는 전우들의 모습을 보면서 기어이 이 땅에서 외세를 몰아내고 조국을 통일할 결사의 의지를 굳혀갔다.
…
정의는 반드시 이기는 법
장군님 이끄시는 승리의 길에
간악한 원쑤놈들 무찌른 날에
영광의 전승가를 부르기 위하여
나는 밤과 낮이 없이
아둔한 목청을 가다듬고있다
나의 총구는 오직 원쑤를 향하여
나의 노래도 오직 원쑤를 향하여
불같은 증오로 달려나간다
아, 타오르는 불길이 되여!
(김상훈의 시 《나의 노래여 불길이 되라》중에서)
포연탄우를 헤치며 전시수송을 보장하던 김상훈은 1950년 가을 다리에 부상을 당하여 야전병원에 입원하였다.
침상에 누워 매일 매 시각 싸우는 전선의 전우들을 그리는 그의 가슴은 터질것만 같았다. 총탄이 없으면 보병삽을 틀어잡고 육박전으로 조국의 고지를 사수하고 수류탄이 떨어지면 가슴으로 적의 화점을 막아 부대의 진격로를 열어나가던 귀중한 전우들이 그리워졌다.
그러한 그였기에 그는 채 완쾌되지 않은 몸이지만 우리 조국이 가장 준엄한 시련을 겪고있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후방병원으로가 아니라 빨찌산부대에 소속되여 원쑤격멸의 성전으로 달려나갔다.
빨찌산부대의 정찰분대에서 싸우던 김상훈은 곧 정치부에 소환되여 문화과장으로 사업하였다.
그는 전투소보로 대원들을 승리에로 고무하였으며 그들의 영웅적위훈을 널리 소개선전하였다.
김상훈은 이 나날 《배낭의 노래》, 《봄비》, 《나의 노래여 불길이 되라》, 《소녀빨찌산》, 《습격조의 노래》, 《훈장》 등 수많은 시를 써서 원쑤와의 판가리싸움에 떨쳐나선 용사들과 인민들을 고무하였다.
고마워라, 내 안겨사는 어버이품이여
조국의 해방과 함께 그가 처음으로 신문지면에서 뵈옵고 그토록 그리워하던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의 품! 고마운 공화국의 품에 안겨 김상훈이 보낸 나날들은 그의 인생에서 더없이 참된 삶, 만복을 누린 나날들이였다.
이 땅을 위하여 헌신하자! 누구나 다 평등하게 사는 사회, 누구나 다 나라의 주인된 고마운 인민의 세상을 위하여 힘껏 일하자!
1958년말 김상훈은 사회주의건설의 거세찬 열풍으로 들끓고있는 생산현장에 나갈것을 자원하였다.
복구건설에서 큰 몫을 담당하고있는 락원기계공장(당시)으로 탄원한 그는 재단직장에서 단야공으로 로동생활을 시작하였다.
그의 로동은 그대로 시와 노래였으며 웃음이고 생활이였다.
약동하는 시대의 흐름속에 발걸음 뒤질세라, 변천되는 조국의 모습앞에 자신이 초라해질세라 김상훈은 달리고 또달렸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자기의 인생에서 더없는 영광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였다.
1958년 6월 어버이수령님께서 전쟁의 흔적이 채 가셔지지 않은 락원기계공장을 찾아주시였던것이다.
나라의 전반사업을 돌보시는 그 바쁘신 가운데서도 자신들을 찾아주신 수령님을 공장에서 만나뵙게 된 락원의 로동계급은 끝없는 환희와 격정으로 가슴을 들먹이였다.
해방후 《서울신문》에 실린 수령님의 젊으신 영상을 뵈옵고 그이를 민족의 수령으로, 운명의 구세주로 심장에 새겨안았던 김상훈이였다.
이날 수령님께서는 먼지가 풀풀 날리고 소음이 진동하는 공장의 구석구석을 돌아보신 후 로동자들과 허물없이 자리를 마주하시고 대형굴착기를 만들기만 하면 당이 안타까워하는 문제가 풀린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생산방도까지 의논해주시였다.
로동계급의 기름묻은 손을 허물없이 잡아주시고 그들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시며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시는 인자하신 모습, 활달하고 소탈하신 그이의 환하신 모습앞에 김상훈은 목이 꽉 메여오고 심장은 흥분으로 세차게 고동치는것을 금할수 없었다.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 만세!》
언제 어떻게 터쳐나온 격정인지 알수 없었다.
만세의 우렁찬 함성에 답례하시는 그이의 영상은 천하를 밝게 비치며 온 겨레를 한품에 따뜻이 안아주시는 민족의 어버이의 영상이였다.
그날 밤 김상훈은 잠을 이룰수 없었다. 부드러운 압록강바람이 강변을 거니는 그를 포근히 감싸고있었다.
자꾸만 떠오르는 수령님에 대한 생각에 자신을 진정할수 없었다.
하늘가에 떠있는 수천수만의 별들은 무엇이라 표현할수 없는 격정과 흥분에 젖어있는 그를 조용히 지켜보고있었다.
고요를 가볍게 건드리는 강바람조차 깊은 감명속에 잠긴 그를 깨우기 저어했다.
예지와 슬기가 빛나는 안광, 정열과 자신심이 넘쳐나시는 표정, 한없이 자애로우신 미소…
첫눈에 만사람들의 온넋을 끌어당기시는 절세위인의 존귀하신 영상을 그리며 그는 펜을 들었다.
어버이수령님을 생각하면은
흐리던 날씨도 밝아옵니다
어버이수령님을 생각하면
차갑던 누리도 더워집니다
…
(김상훈의 시 《수령님생각》중에서)
심장을 높뛰게 하고 뇌리를 진감하는 격동적인 서정은 김상훈에게 가슴벅찬 시적세계를 안겨주었으며 시인으로서가 아니라 이 나라의 한 공민으로서, 백두산절세위인의 숨결과 넋을 시시각각으로 체험하는 한 인간으로서 매혹과 숭배의 격정을 터치게 하였다.
이것은 그의 격정만이 아니였다.
보람찬 로동의 희열을 함께 나누던 정든 공장사람들, 이 나라 모든 인민들의 심정이였으며 환희의 웨침이였다.
절세의 애국자이신 위대한 수령님의 영상을 뵈옵고 그이에 대한 매혹과 신뢰로 가슴을 세차게 들먹이던 김상훈은 은혜로운 태양의 빛발에 영원히 몸을 맡기고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수령칭송의 노래를 부를 결심을 더욱 굳혔다.
하기에 그는 1965년에 창작한 서정시 《위대한 수령님께 삼가 드리는 노래》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심장에 아로새긴 노래가 있어
생명보다 소중한 노래가 있어
영원히 변함없는 한마음으로
인민들은 수령님을 노래합니다
…
천만년이 천번을 거듭 흘러서
들과 바다가 바뀌고
모래알이 자라 큰 산이 될 때까지
이 노래는 끝없이 울릴것입니다
태양과 함께 영원할것입니다
… 어버이수령님을 처음으로 만나뵈온 그날 김상훈은 안해와 함께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김상훈이 새 가정을 이룬것은 10여년전이였다. 야전병원에서 퇴원한 그가 조쏘출판사(당시)에 배치되여 잡지를 편집하는 부서에서 한창 사업하던 1953년 가을 어느날이였다.
창밖에서는 어둠이 어슬렁어슬렁 찾아들었지만 김상훈은 시간의 흐름을 잊고 편집사업에 몰두하였다.
온 신경이 원고의 글줄들과 한덩어리가 되여 호흡하던 그는 가볍게 문두드리는 소리도 감촉하지 못했다.
다시금 《똑똑-》 하는 소리가 울려서야 김상훈은 미심결에 눈길을 들었다.
반쯤 열려져있는 문밖에는 체소하고 영민하게 생긴 녀인이 서있었다. 출판사에서 여러번 보아 낯익은 얼굴이였다.
《동무가 어떻게? …》
녀인은 대답대신 주춤거리며 손에 든 원고부터 내밀었다.
그제서야 김상훈은 그가 원고편집때문에 왔다는것을 짐작했다.
이것이 그들의 첫 인연이였다.
그후 김상훈은 그 녀인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였다. 그도 자기처럼 가슴속에 너무도 큰 상처를 안고있다는것을 알았을 때 저도 모르는 아픔이 흉벽을 허비였다.
27살의 젊은 녀성인 류희정의 고향은 군사분계선너머로 보이는 경기도 파주군(당시)이였다.
그는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공화국북반부에 들어와 출판사에서 일하고있었다. 미군의 폭격에 부모와 남편을 잃은 그에게는 두 딸이 있었다.
후퇴의 혼잡속에서 큰딸만 데리고 북으로 들어온 그는 남쪽에 있는 친척에게 맡기고 온 막내딸에게 항상 죄스러운 마음을 안고있었다.
남녘에 있는 자식들과 상봉할 그날만을 그려보는 두사람의 마음은 한줄기로 이어져 새 가정을 이루게 하였다.
이렇게 결혼한 그들은 30여년간을 함께 살았다.
류희정은 결혼기념으로 자기 딸의 손목을 잡고 전등알 한알을 사왔다.
김상훈은 그것을 소중한 물건처럼 여겼다. 비록 집은 반토굴이였지만 가정을 밝은 빛으로 감싸안아주는 전등알은 장차 자기 가정의 창창한 앞날을 예언해주는것만 같았던것이다.
그는 즉시 전쟁시기부터 내내 쓰고 다니던 털모자를 전등밑에 놓았다.
그것이 혹시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랴 하는 심정에서였다.
그들의 가정은 행복하였다. 비록 가슴속에 아픈 상처를 안고있었지만 그 아픔이 한순간에 가셔질 그날을 위해 서로가 한마음한뜻이 되여 나라를 위한 일에 모든것을 다했다. …
《여보, 난 오늘 뵈온 위대한 수령님의 영상을 심장에 간직하고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그이를 받드는 전사로 살겠소.》
김상훈은 안해에게 자기의 솔직한 심정을 터놓았다.
류희정도 남편의 손을 꼭 잡으며 《저도 더 많은 부속품들을 깎아서 우리 수령님의 복구건설구상을 힘껏 받들겠어요.》라고 화답했다.
김상훈에게는 공화국의 품에 안겨사는 날과 달의 흐름이 평범하지 않았다.
그가 공장에 탄원하여온 첫해 마가을이였다. 때는 김장철이라 가정마다 김치담그기에 손이 드바쁜 시기였다.
김상훈의 가정도 마찬가지였다. 공장에서는 그의 가정에 많은 배추를 공급하였다.
어른베개통보다도 더 크고 실한 배추들을 받은 그들은 공장일을 끝낸 다음 지게에 배추통들을 차곡차곡 쌓고 날랐다.
그러나 그것도 수월한 일이 아니였다. 전쟁시기 미군의 폭격으로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었던 김상훈이나 녀성인 류희정의 힘에도 한계가 있었던것이다.
그들은 절반도 채 나르지 못하고 모두 토방에 털썩 앉았다.
그들이 다리쉼을 하고있는데 대문쪽에서 웅성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장에서 같이 일하는 작업반원들이였는데 모두들 등에 배추들을 한짐씩 지고 곧장 그의 집마당으로 들어서는것이였다.
《상훈선생! 벌써 기운이 진했나?》
나이지숙한 작업반장의 석쉼한 목소리였다.
《아, 우리가 날라주겠다는데 고집을 부리더니…》
인심후한 목소리들이 무겁던 집안공기를 바꾸어놓았다.
그들은 퇴근길에 김상훈이 받은 배추들을 한짐씩 지고 왔던것이다.
후더운 인정세계앞에 그들부부는 목이 꽉 메여오는것을 금할수 없었다.
남조선에서는 도저히 바랄수도 생각할수도 없는 일이였다. 하루일에 지친 그들이지만 너도나도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나선것이였다.
다음날에는 이웃 아낙네들이 갓 이사온 평양집인 김상훈네의 김장담그기를 도와주었다.
별식이 생겨도 집대문을 두드리고 집안에 경사가 생겨도 손을 잡아끌군 하는것이 바로 동네사람들이였고 작업반사람들이였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항상 평양집이 있었으며 평양집은 그들의 다심어린 인정세계속에 아담하게 서있었다.
이웃들의 후더운 인심에 안스러운 표정을 지으면 오히려 그들켠에서 나무라면서 질책하군 하였다.
《공부개나 했다는 사람이 왜 그렇게 속통이 좁쌀같나? 심장이 있으면 저 용광로처럼 뜨거워야지!》
《원, 별소릴 다하십니다. 우리야 한가정이 아니나요!》
한가정! 남에서 살 때에는 언어적관념이나 한집안울타리안에서만 존재하던 단어였다. 하지만 북에서는 그것이 동네와 직장, 온 나라에 파급되여 실생활에서 존재하는 하나의 시대어로 되고있었다.
생활은 김상훈으로 하여금 서로가 화목한 대가정을 이루고 진심으로 돕고 이끌어주는 공화국의 현실에서 아름다운 인간들이 사는 세상, 인민이 나라의 주인으로 된 사회주의의 본태를 심장으로 절감하게 하였다.
하기에 김상훈은 락원기계공장에서 생산로동을 하면서 시초 《단야공의 노래》, 장편수기 《인민복수자들》(1, 2권), 시 《안해의 기대앞에서》 등 수십편의 시들과 작품들을 창작발표하여 사회주의건설에 떨쳐나선 인민들을 적극 고무추동하였다.
…
공기함마의 가쁜 숨결은
한시각도 멎지 않았건만
상기 밤중인줄 알았는데
시간은 너무도 빨리 지나가
완성공들의 성급한 재촉에
…
당이 가리키는 한길을 따라
이렇게 싸우는 밤은 좋구나
일을 해도 일을 해도 신이 나누나
가열로야 달아라
함마야 소리쳐라
신나게 한바탕 더 두드리자
우렁우렁 이 기계가 굴러나가
조합벌의 새싹이 파랗게 자라도록
(김상훈의 시 《이 함마소리 전야에 울리라!》중에서)
현실에서 매일 매 시각 받아안는 모든 체험들은 그에게 풍만한 창작적령감과 서정세계를 안겨주었다.
김상훈은 자기가 안긴 품에 대한 고마움이 커갈수록 보답의 마음을 더욱 굳혔다.
그는 보람찬 로동생활을 하는 속에서도 우리 나라 한시집과 민요집을 수집편찬하고 번역할 큰 계획을 세웠다.
그의 이러한 결심을 지지하고 적극 떠밀어준것은 어머니조국이였다.
나라에서는 그의 희망과 소원을 깊이 헤아려 1962년초 그를 평양으로 소환하여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작가로 사업하도록 하여주었다.
앞날에 대한 희열을 안고 가족들과 함께 평양에 올라오는 그들을 기다린것은 보통강변에 새로 일떠선 아빠트였다.
서재까지 있는 새 집에는 가정생활에 필요한 살림도구와 가구들이 그쯘하게 차려져있었다.
이날 김상훈은 밤이 깊도록 한마디의 말도 없이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곁에 다가온 안해가 그에게 물었다.
《왜 그러세요? 혹시 전쟁때 상한 부상자리가 또 도지는게 아니세요?》
김상훈은 안해의 손을 꼭 잡았다.
《여보, 난 행복한 사람이요. 어버이수령님의 품에 안겨 이렇게 작가가 되였으니 이 얼마나 큰 행복이요!》
이렇게 말하는 그의 눈굽은 물기에 젖어 흐려져있었다.
김상훈은 위대한 수령님들의 품에 안겨 작가로서 참된 삶을 마음껏 누려가게 된 자랑과 긍지로 가슴을 들먹이며 온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처럼 문학으로 고마운 사회주의조국을 받드는 길에 헌신할 일념으로 순간순간을 살아온 김상훈이였기에 그는 자기 육신의 아픔보다 창작을 두고 더 고민하고 안타까와 하였다.
어느해인가 한시들을 번역편집하던 김상훈은 그만 창작실에 쓰러졌다.
지나친 과로에 좌골신경통까지 겹쳐들어 운신을 할수 없는 몸이 되였던것이다. 일군들은 그를 평양의학대학병원(당시)으로 후송하였다.
비록 침상에 매인 몸이 되였지만 김상훈은 손에서 일을 놓을수 없었다.
일군들과 문단의 지우들, 의사와 간호원들이 만류했지만 김상훈은 그때마다 《난 문학을 떠나서는 못사는 사람이요. 받아안은 은정이 하늘같은데 내 살아생전에 고마운 내 조국의 은덕에 조금이라도 보답해야 할게 아니요.》라고 하면서 창작의 붓을 멈추지 않았다.
오직 축복받은 자신의 삶에 대한 긍지와 행복감을 가슴에 안고 헌신의 일념으로 사는 불같은 사람이였다.
나라에서는 그의 병이 걱정되여 신경계통을 비롯한 여러가지 병치료에 효과가 좋은 종달온천이 있는 달천영예군인료양소에서 치료받도록 은정깊은 조치를 취해주었다.
병을 완치하게 된 김상훈은 다시금 문단에 서게 되였으며 그후 자기가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것을 알면서도 맡은 일을 끝까지 수행하기 위해 온 육신을 보답의 초불로 불태웠다.
안아주고 키워준 고마운 품이 있어 김상훈은 우리 나라 고전문학을 번역소개하는 사업에 자신의 열정을 다 바쳐 생의 말년까지 《우리 나라 한시이야기》, 시집 《한시선집》(1, 2), 시집 《풍요선집》, 시집 《력대시선집》, 시집 《가요집》(1, 2), 시집 《리규보작품집》(1, 2) 등을 번역편찬하여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나라의 고전문학연구사업과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통일이여 어서 오라
제 아비의 얼굴도 못 본채 어른이
되여버린 손자와
손자가 너무도 제 아비를 닮아
자꾸만 마음이
저릿해오는 늙은 할머니가
마당가에 함께 서서 철새를 보고있다
…
흐르는 물줄기가 바다를 이루듯
한곬으로 모아야 할 만백성의 마음은
여전히 가시줄에 얽매여있어
혈육의 몸부림을 겹겹히 싸안고
할머니와 손자가 철새를 보고있다
(김상훈의 시 《철새》중에서)
김상훈의 생은 통일을 바라고 통일을 노래한 인생이였다고 할수 있다.
공화국북반부에서 땅의 주인이 되여 풍년로적가리를 하늘높이 쌓아놓고 농악소리를 울려가는 농민들의 모습을 볼 때도 그렇고 황금이삭 물결치는 협동벌의 전야에 서있을 때도 언제나 고향을 잊지 못한 향토시인이였다.
북과 남의 온 겨레가 서로 얼싸안는 통일의 그날 위대한 수령님들의 품에 안겨 진정한 땅의 주인이 되여 허리가 늘씬하도록 농사를 짓는 농민들의 모습을 보는것이 그의 소원이기도 했다.
그러한 김상훈이였기에 1971년에는 어버이수령님을 민족의 태양으로, 통일의 구성으로 우러르며 수령님의 품에 안기고싶어하는 남조선농민들의 한결같은 지향과 념원을 노래한 서정시 《흙》을 창작하였다.
…
이른봄철이나 늦은가을날에
수령님께서 뜻밖에 마을에 들리시여
늙은이는 백발숙여 절을 하옵고
철부지 어린것은 손길에 매달리며
거리와 집집마다 자랑이 넘치고
온 산천이 눈부시게 밝아올
그 가슴 저리도록 황홀한 순간을
농토와 농군들이 함께 꿈꾸나이다
…
가없는 하늘같이 넓고 크시고
밝은 봄날같이 인자하시고
아무리 간고한 싸움속에서도
다함없는 용기와 지혜를 주시는
자애로운 어버이 김일성원수님
수령님의 품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남쪽땅의 한줌의 흙과
그속에 스며있는 저희들의 맹세를
저희들을 보시는듯
보시옵소서!
진실하고 소박한 정서적형상으로 김상훈은 어버이수령님을 우러러따르는 남조선농민들과 자기의 사상감정을 깊이있게 반영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고향은 비단 추억의 대상만이 아니였다. 조상의 무덤과 두고 온 혈육들과 자식들, 잊을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였다.
고향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아픔이였으며 한생 안고 산 마음속상처였다. 한지맥으로 잇닿아 자동차길로 몇시간밖에 걸리지 않을 그 길, 꿈속에서조차 발목이 시도록 걸어보던 그 고향길을 그는 수십여년동안 찾아보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서 고향은 분렬의 비극을 안고 몸부림치는 이 나라의 강토였으며 처자들에 대한 그리움은 자기의 혈육들을 찾고 부르며 통일, 통일을 목놓아부르는 겨레의 웨침이였다.
외세가 없는 고향땅, 서로가 얼싸안고 온 민족이 모여 통일잔치 벌릴 그날은 과연 언제일가?
어느해 일요일, 이날 열두살 난 맏아들 김종설은 집안의 구석들을 뒤지다가 당반우에 놓인 낡은 고리짝을 발견하였다.
동심으로부터 오는 호기심에 헤쳐보니 그속에는 뜻밖에도 이전에 전혀 본적이 없는 옷가지, 집식구들에게는 전혀 필요없는 새옷들이 차곡하니 들어있었다.
《아버지, 이건 무슨 옷들이나요?》
서재에서 책을 보던 김상훈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깊은 한숨을 내그었다.
《종설아, 이건 남쪽에 있는 네 형님들과 누나들의 옷이란다.》
아들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아직까지 남조선에 자기의 이복형제들이 있다는 말은 전혀 들어보지 못한 그였다.
자리에서 일어선 김상훈은 창가로 다가가 흐릿한 눈길로 멀리 남쪽하늘을 바라보았다.
두고 온 자식들의 얼굴이 그의 흉곽에 아프게 비껴들어왔다.
《아버지, 그럼 형님과 누나들은 거기서 뭘 하나요?》
아들의 물음앞에 김상훈은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어린 자식들과 헤여진지도 이젠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소식 한장 나누어보지 못한 그들이였다.
살아나 있는지? … 살아있으면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가슴을 저미며 눈앞에 얼른거리는 자식들의 얼굴들을 그려보는 그의 눈가에는 물기가 어리고있었다.
《종철, 종식, 종국, 경애, 경숙.》
행복넘친 이 집안이 터지도록 한구들 모여앉아 함께 웃을 그날은 과연 언제인지? …
북쪽으로 날아가는 철새를 바라보며 《아버지!-》 하고 목메여 웨칠 다섯 자식들의 눈물젖은 모습은 김상훈의 한생에 영원히 지우지 못한 상처였다.
《속가슴 타는것이 밤초불 그뿐이며 피울음 우는것이 산접동새 그뿐이더냐.》 하며 장밤 눈물을 흘리던 날들은 또 그 얼마였던가.
벌써 열해가 지나갔다
내가 손에 총을 잡고
집을 나서던 그날 아침엔
너는 할머니의 품에 안겨서
《아빠 안녕히!》를 해보였지
…
마름집이나 큰집의
멍텅구리같은 아이녀석들이
혹 너를 아버지가 없다고 놀려주거든
너는 고개를 더 번쩍 쳐들고
북쪽하늘을 바라보아라
…
(김상훈의 시 《아버지의 부탁》중에서)
사람들은 그를 두고 통일시인이라고 불렀다.
그렇듯 그의 시는 통일을 노래했고 목이 쉬도록 통일을 불러왔다. 침략자 미제와 반통일분자들을 저주하면서도, 통일없이 지나는 섣달그믐날밤에 분렬의 아픔으로 피울음을 토하면서도…
그의 시는 사람들을 울리군 하였다.
고향을 남쪽에 둔 사람만이 아니라 이 나라에 생을 둔 모든 사람들의 가슴굽을 허비고 통일의 아침을 기원하며 눈물을 흘리게 한다.
워낙 인정이 많고 다감하며 유모아까지 풍부한 김상훈은 자기의 시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에게 미안한감을 느끼며 시의 양상을 밝게 하려고 애를 쓰기까지 했다.
새 빛이 터져나와
하늘땅이 다시 열려
산도 절로 물도 절로
뭉게구름 기쁨이는
삼천리 이 강산에
통일의 날 오거들랑
강강수월래로
두레춤을 추어보자
…
(김상훈의 시 《강강수월래》중에서)
김상훈은 이 시에서 조국통일의 념원을 밝은 웃음으로 펴보이려고 하였다.
통일시인 김상훈은 누구보다도 더 통일을 그리워하였다. 받아안는 혜택과 믿음이 커갈수록, 세월의 년륜속에 머리에 흰서리가 한오리두오리 늘어날 때마다 가슴 섬찟하게 느껴지는것은 민족분렬의 아픔이였다.
김상훈에게 있어서 고향은 육신의 한부분이였고 조국통일은 그의 전부였다.
그는 언제나 자기 가정의 비극을 북과 남으로 갈라진 우리 민족이 당하는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눈을 감는 마지막순간까지 통일된 조국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1987년 8월말 김상훈은 침상에서 마지막숨을 내쉬고있었다.
자기가 불치의 병을 앓고있다는것을 알면서도 이미 계획했던 고전시가작품들을 번역편집하는 사업에 혼신을 바쳐온 그였다.
《아버님! …》
눈물을 흘리는 맏아들의 눈굽을 닦아주며 김상훈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종설아, 통일이 되면 자식들을 데리고 이 애비의 고향에 가서 큰소리로 웨치거라. <내가 상산 김씨 김상훈의 아들이다!>라구 말이다. 그리구 네 형들과 누이들도 꼭 찾아보거라. …》
마지막숨을 거두면서도 통일된 조국과 사랑하는 고향땅, 남쪽에 있는 자식들을 그려본 작가 김상훈!
그는 자기의 전 생애를 훌륭한 시들로 빛나게 장식하였다.
김상훈은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께 드리는 송가들인 《위대한 수령님께 삼가 드리는 노래》(1965년), 《2월의 송가》(1975년) 등 작품들을 창작하였으며 다년간의 현지체험에 기초하여 시초 《단야공의 노래》(1959년), 시《안해의 기대앞에서》(1960년) 등 현실주제의 시가작품들을 창작하였다.
그의 시창작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것은 우리 인민의 최대의 민족적숙원인 조국통일을 노래한 작품이다.
그는 시초 《어머니에 대한 생각》(1980년), 시 《한마디의 말》(1987년) 등 수많은 통일주제작품들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출판을 전제로 하지 않고 부피두터운 창작수첩에 써놓은 수백편에 달하는 통일주제의 시가작품들에서는 조국통일에 대한 우리 인민의 절절한 념원을 뜨겁게 노래하였다.
수천수만의 전사들을 사랑의 한품에 안아 생전이나 사후에나 변함없이 아껴주시는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작가 김상훈이 불치의 병으로 사망했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못내 가슴아파하시면서 그의 장례를 기관장으로 잘해주도록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그러시고도 못다 주신 사랑이 있으신듯 수년전에 떠나간 작가를 잊지 못하시여 1991년 4월에는 그가 창작한 시들을 묶어 시집 《흙》을 출판하도록 하여주시는 한량없는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하나를 주시면 열백을 주고싶어하시는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사랑은 정녕 끝이 없었다.
장군님께서는 비록 작가는 떠나갔어도 조국통일을 위해 바친 그의 공로와 한생토록 그가 부르고부른 통일의 노래들을 높이 평가하시여 1998년 4월에는 김상훈에게 조국통일상을 수여하도록 하시는 크나큰 영광을 안겨주시였다.
생의 은인이시며 자애로운 어버이이신 위대한 수령님들의 사랑은 정녕 끝이 없었다.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께서는 이제는 자식들의 기억속에서마저 삭막해졌을 김상훈의 시, 그가 조국통일을 기원하며 창작한 작품들이 하나라도 빠질세라 진주알처럼 다 찾아내여 2015년 1월에는 또다시 그의 시집 《통일을 불러》를 출판하도록 각별한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정녕 떨어져서는 한순간도 살수 없는 고마운 어머니의 품, 위대한 수령님들과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의 품이 있어 김상훈의 가정은 대를 이어가면서 세상의 만복을 다 누리는 행복한 가정으로 되였다.
나라에서는 둘째아들 김종석의 문학적재능을 귀중히 여겨 그를 김형직사범대학을 졸업시켜 아버지의 대를 굳건히 이어나가도록 하여주었다.
보살펴주고 내세워주는 은혜로운 품이 있어 김종석은 두편의 장편소설과 예술영화 《평양날파람》을 창작하여 오늘은 인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작가로 자라날수 있었다.
자식들만이 아니라 손자, 손녀들도 김일성종합대학을 비롯한 여러 대학들에서 마음껏 배우고 자기의 재능을 꽃피웠으며 오늘은 나라의 훌륭한 역군으로 자라 강성국가건설의 전성기를 열어나가며 조국통일을 앞당겨오기 위한 애국투쟁의 대오에서 청춘의 지혜와 열정을 남김없이 발휘하고있다.
김상훈은 비록 우리의 곁을 떠났지만 위대한 수령님들의 품에 안기여 우리 주체조선의 문학사에 보람찬 생의 한페지를 남기고 온 나라 인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작가로, 온 민족이 다 아는 조국통일상수상자로 영생하는 삶을 누리고있다.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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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 조선은 하나다, 통일을 위하여, 한생 통일을 불러 관련기사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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