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인민봉기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1919년 3월 1일에 폭발한 우리 인민의 전민족적반일봉기.
김일성동지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919년 3월 1일은 우리 민족이 〈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 〈조선독립 만세!〉의 구호를 소리높이 웨치면서 강도 일제를 반대하여 전민족적투쟁을 전개한 날이며 우리 민족이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준 날입니다. 이날은 우리 민족이 자기의 자유를 위하여 고귀한 피를 흘린 날입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야만적인 무단통치로 말미암아 쌓이고 쌓인 조선인민의 민족적울분과 사무친 원한은 마침내 1919년 3월 1일에 전민족적인 반일항쟁으로 폭발하였다. 력사적인 3. 1인민봉기는 평양에서의 대중적인 독립만세시위투쟁을 첫 봉화로 하여 먼저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평양에서의 대중적인 반일독립만세시위투쟁은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인 김형직선생께서 일찌기 혁명의 씨앗을 뿌리시고 반일독립운동의 믿음직한 거점의 하나로 꾸려놓으신 평양숭실학교의 애국적청년학생들이 주동이 되여 일어났다. 3월 1일 평양에서는 미리 짜놓은 계획에 따라 낮 12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지자 그것을 신호로 하여 청년학생들을 비롯한 수천명의 각계각층 군중이 장대재에 있던 숭덕녀학교 운동장으로 물밀듯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정각 13시 애국의 열정으로 불타는 수천명의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청년학생대표가 단우에 뛰여올라 《독립선언서》를 랑독하고 뒤이어 조선은 독립국가라는것을 엄숙히 선포하였다. 장대재에서는 일시에 《조선독립 만세!》의 함성이 터져올랐다. 이 웨침소리는 평양의 온 거리와 주변농촌에로 메아리쳐갔다. 만경대와 칠골인민들도 대렬을 지어 평양으로 밀려갔다. 떠날 때 수백명에 불과했던 시위대렬이 나중에는 수천명으로 불어났다. 군중은 북과 징을 울리고 《조선독립 만세!》를 웨치면서 보통문쪽으로 밀려갔다.
김일성동지는 이때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시고 어른들과 함께 시위대렬에 참가하시여 독립만세도 웨치시면서 보통문앞에까지 갔다.
김일성동지는 그때를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때 여덟살이였던 나도 다 꿰진 신발을 신고 시위대렬에 끼여 만세를 부르면서 보통문앞에까지 갔다. 성안을 향해 노도와 같이 밀려가는 어른들의 걸음을 나로서는 미처 따라 잡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너덜거리는 신발짝이 거치장스러워 짚신을 벗어서 손에 들고 뜀박질로 대렬을 따라갔다. 어른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면 나도 함께 만세를 불렀다.》
평양시민들의 시위대렬은 삽시에 10여만명으로 늘어났다. 극도로 당황한 일제침략자들은 이 대중적인 시위투쟁을 진압하려고 더욱 미쳐날뛰기 시작하였다. 일제살인귀들은 수많은 경찰을 내몰고도 부족하여 기마경찰대와 100여명의 군대, 별동대인 소방대까지 동원하였다. 일제야수들은 총칼과 쇠갈구리를 마구 휘두르면서 평화적인 시위자들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학살하고 체포구금하는 야수적폭압만행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일제침략군과 경찰을 맞받아 용감하게 싸웠다. 그들은 비록 맨주먹이였지만 돌멩이를 던지면서 일제경찰 및 군대들과 맞서 완강하게 싸웠다. 보통문앞에서도 치렬한 육박전이 벌어졌다. 평화적시위가 폭동적진출로 넘어가기 시작한데 놀란 부르죠아민족운동상층분자들이 이것을 막아보려고 책동하였으나 군중들은 이들을 물리치면서 계속 전진하였다. 남문밖에 이른 시위대렬은 여기서부터 3개의 편대로 나뉘여 행동하기 시작하였다. 한 시위대는 일제경찰서를 향하여 전진하였고 다른 한 시위대는 평안남도 도청과 재판소앞을 거쳐 평양역을 향하여 행진하였으며 나머지시위대는 평양감옥을 둘러싸고 거기에 갇혀있는 애국자들을 즉시에 석방할것을 요구하면서 시위투쟁을 벌리였다. 세개 방향으로 갈라져 기세를 올리면서 싸우던 시위대는 다시 경찰서앞에서 합류하였다. 경찰서앞에 집결된 10여만의 시위군중은 일제야수들의 폭압만행을 신랄히 폭로규탄하면서 다시금 체포구금된 애국자들을 즉시로 석방할것을 요구하였다. 일제경찰이 이 정당한 요구에 순순히 응하지 않자 용감한 청년학생들은 시민들과 함께 돌로 유리창을 까부시고 경찰서에 돌입하여 그곳에 구금되였던 60여명의 애국자들을 빼앗아냈다. 이날 평양시민들의 대중적인 반일시위투쟁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가운데서도 밤늦게까지 줄기차게 진행되였다.
전민족적인 3. 1인민봉기의 첫 봉화를 지펴올린 평양시민들의 대중적인 반일독립만세시위투쟁은 각지 인민들을 반일항쟁에로 불러일으키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서울에서는 평양에서보다 좀 뒤늦게 반일시위투쟁이 벌어졌다. 낮 12시가 되면서부터 탑동공원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군중은 삽시에 사람의 숲을 이루었다.
부르죠아민족운동상층분자들의 투항주의적인 배신행위에도 불구하고 정각 14시 30분, 수많은 군중이 가슴을 불태우며 지켜보는 가운데 한 청년학생대표가 탑동공원 6각당 단우에 뛰여올라 《독립선언서》를 랑독하고 조선은 자주독립국가라고 선포하였다.
그러자 모임에 참가한 수천명의 군중은 서로 얼싸안고 발을 구르면서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높이 웨치였다.
탑동공원에 모였던 군중은 일제경찰의 저지책동을 박차고 곧 대렬을 지어 대중적인 반일시위투쟁에로 넘어갔다. 종로거리에 진출한 시위군중은 여러 대로 나뉘여 거리를 누비며 전진하였다. 시위대렬에는 청년학생들은 물론 로동자, 도시소시민, 소년, 소녀, 로인, 부녀자 그리고 지방에서 고종의 장례식을 보려고 온 농민들까지 참가하여 잠간사이에 그 수는 수십만명에 이르렀다. 총독 하세가와는 시위를 탄압하기 위해 룡산주둔 20사단무력까지 동원하였다.
놈들은 총으로 쏘고 칼로 찌르면서 시위군중을 야수적으로 학살하였다. 서울거리도 삽시간에 피바다가 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은 앞대렬이 쓰러지면 그 뒤대렬이, 뒤대렬이 쓰러지면 또 그다음 대렬이 앞장에 나서면서 전진하였다. 나어린 한 녀학생은 국기를 들었던 바른팔이 놈들의 칼에 잘리자 왼손에 국기를 바꿔쥐였고 왼팔마저 떨어져 더는 움직일수 없는 순간까지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조선독립 만세!》를 불러 일제군경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3. 1인민봉기의 불길은 평양, 서울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평안남도 남포, 안주, 평안북도 의주, 선천, 함경남도 원산(오늘의 강원도 원산) 등지에서도 세차게 타올랐다. 그가운데서 1만여명의 광범한 군중의 참가하에 진행된 의주에서의 봉기는 일제침략자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의주에서는 3월 1일 14시가 좀 지나서 애국적인 청년학생들을 선두로 각계각층 군중이 양실학교 운동장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랑독한 다음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높이 웨치면서 일대 반일시위투쟁에로 넘어갔다. 이날 선천과 안주에서는 각각 3 000여명이, 원산에서는 2 000여명이 일제경찰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조선독립 만세!》를 높이 부르면서 시위투쟁을 벌리였다. 평안남도일대에서는 평양에서 반일시위가 있은 다음날에 평양과 잇닿아있는 대동군, 강서군(당시), 룡강군, 중화군으로 투쟁이 확대되였으며 그 다음에는 강동군, 평원군, 순천군, 성천군으로 항쟁의 불길이 타번져갔고 그에 뒤이어 평양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있는 녕원군, 개천군, 양덕군, 맹산군 같은 산간지대의 군들에서 반일봉기가 폭발하였다.
3. 1인민봉기는 또한 우리 나라의 북부지방으로부터 남부지방에로, 철도연선의 군들로부터 점차 교통과 통신련락이 불편한 산간지대의 군으로 퍼져나가면서 전국에로 확대되여갔다. 3월초에 서북부일대에서 급속히 타번진 반일항쟁의 불길은 3월중순에 들어서면서 우리 나라의 중부 및 남부지방에로 급속히 확대되였다. 3월 1일에 4개 도에서 폭발한 반일봉기는 3월 11일에는 벌써 12개 도로 확대되였으며 3월 19일에 충청북도에서 투쟁이 일어남으로써 마침내 전국의 13개 도를 모두 포괄하게 되였다. 투쟁의 불길은 3월중순까지의 기간에 우리 나라 232개 부, 군가운데서 52%에 해당하는 122개의 부, 군을 휩쓸었다. 3. 1인민봉기의 급속한 확대로 온 나라는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반대하는 반일구국항쟁마당으로 전변되였다. 반일항쟁이 급속히 확대됨에 따라 투쟁은 한층 더 격렬하여졌다. 평화적인 독립만세시위투쟁은 점차 폭동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기 시작하였다. 3. 1인민봉기가 급속히 확대되여가고 인민들의 폭력적진출이 강화되게 된 주되는 요인은 혁명적인 로동자, 농민들이 항쟁대렬에 대중적으로 망라되게 된 사정이였다.
전민족적인 3. 1인민봉기는 3월하순부터 4월상순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였다. 이 시기 인민들의 폭력적진출은 국한된 일부 지역에서가 아니라 반일항쟁이 벌어지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보편적인 현상으로 되였다. 4월 1일 하루동안에 전국적으로 60회이상의 투쟁이 있었는데 그중 폭력투쟁만 하여도 28회나 되였다. 3. 1인민봉기의 불길은 국내에서만 일어난것이 아니라 만주와 상해, 연해주, 하와이 등지에서도 세차게 타번지였다. 3. 1인민봉기에 가장 광범히 참가한것은 농민대중이였다. 그들은 반일시위운동과 함께 일본인들에 대한 량곡 및 땔나무공급을 거절하고 세금납부를 반대하여 투쟁하였다. 당시 로동계급은 아직 발생기에 처하여있던 청소한 계급이였으나 파업을 일으키고 시위와 폭동의 앞장에 서서 용감히 싸워 반제투쟁에서의 완강성과 전투성, 단결력과 조직성을 잘 보여주었다. 선진사상에 민감하고 정의와 진리를 사랑하며 그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싸우려는 의지가 강한 애국적인 청년학생들은 각계각층 인민들에게 반일민족해방투쟁에 나설것을 열렬히 호소하는 한편 시위와 동맹휴학을 단행하여 일제의 식민지노예교육정책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수공업자들과 상인들도 일제히 문을 닫고 일본인과의 거래를 끊어버리는 등 애국적인 투쟁을 벌리였다.
3. 1인민봉기에는 이밖에도 일제 관청 및 기관에 복무하는 하급관리들과 사무원들도 참가하였다. 3. 1인민봉기가 폭발한후 5월말까지의 석달동안에만 하여도 200여만명의 각계각층 인민들이 반일봉기대렬에 합류하였으며 그해 12월까지는 전국각지에서 3 200여회의 시위와 폭동이 일어났다. 반일항쟁의 불길은 전국의 232개의 부, 군가운데서 229개의 부, 군을 휩쓸었으며 해외의 조선인거주지역들에서까지 타번지였다.
전민족적인 반일항쟁인 3. 1인민봉기는 로동자, 농민을 비롯하여 청년학생, 지식인, 소자산계급 등 각계각층 애국적인민들의 희생적인 투쟁에도 불구하고 민족적독립을 이룩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3. 1인민봉기가 실패하게 된것은 당시에 아직 주체적인 혁명력량이 튼튼히 마련되지 못한데 주되는 원인이 있었지만 특히는 일제의 극악한 폭압만행과 이 운동을 압살하기 위한 미제의 책동과 주요하게 관련되여있었다.
거족적인 3. 1인민봉기가 폭발하자 일제는 그것을 교살하기 위하여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 일본반동정부의 륙군대신은 3월 7일 조선주둔군 우두머리에게 무력에 의한 단호한 대책으로 사태를 수습할것을 명령하였으며 일본반동정부의 총리대신 하라는 조선총독 하세가와에게 밖으로는 대단치 않은 사건처럼 묘사하여 세계여론을 기만하는 동시에 안으로는 반일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라는 비밀지령을 주었다. 일제는 투쟁이 일어나자 룡산, 라남주둔 2개 사단의 무력과 헌병, 경찰을 총동원하는것으로도 부족하여 일본본토에서 보병 6개 대대와 헌병 400명을 더 끌어들여 전국도처에 배치하였으며 조선총독부의 《제령》 7호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을 비롯한 악법들을 조작하고 모든 권력기구와 폭력수단들을 총동원하여 3. 1인민봉기를 교살하기 위하여 미쳐날뛰였다.
일제살인귀들은 3. 1인민봉기초기에 평안남도 맹산군에서 치떨리는 대중적학살만행을 감행하였다.
3월초순에 맹산에서 독립만세시위투쟁이 벌어지자 일제헌병들은 총칼로 위협하면서 수많은 시위참가자들을 체포구금하였다. 이에 격분한 시위참가자들이 헌병주재소로 밀려가 체포구금한 사람들을 당장 내놓으라고 들이대자 일제교형리들은 그들에게 마구 사격을 가하여 60여명을 무참히 학살하는 귀축같은 만행을 감행하였다. 일제살인마들은 또한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에서 무고한 부락민들을 교회당에 모이게 해놓고는 교회당건물에 석유를 뿌린 다음 불을 질렀고 뛰쳐나오는 사람들에게 기관총사격을 가하여 마구 죽이였다. 일제야수들의 잔인무도한 만행으로 이날 제암리에서는 300여명의 주민들이 일제살인귀들에 대한 사무친 원한을 품은채 집단적으로 학살당하였다. 일제는 1919년 3월하순 평안북도 정주에서 5 000명의 평화적시위대렬에 집중사격을 퍼부어 120명의 사상자를 내였다. 실로 반일인민봉기의 전기간 일제의 총칼에 맞아 쓰러진 조선사람의 수는 10여만명에 이르렀다.
한편 일제침략자들은 전국도처에서 대대적인 검거선풍을 일으켜 수많은 애국자들을 검거투옥하였다. 주체8(1919)년 3월 1일부터 5월 31일까지의 기간에 국내에서만 하여도 약 4만 6 700명에 달하는 애국적인민들이 체포투옥되였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일제의 이러한 탄압만행을 적극 지지하고 부추겼으며 저들의 《선교사》, 《의사》 등을 내세워 봉기가 일어나기전에 반일항쟁의 기운을 없애려고 책동하였으며 투쟁이 일어나는 경우에도 그것이 《독립청원운동》의 테두리안에 머물러있게 하려고 집요하게 날뛰였다.
미제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은 일제야수들의 가혹한 탄압으로 말미암아 온 나라 방방곡곡에서 세차게 타오르던 반일항쟁의 불길은 봄이 지나고 여름이 되면서부터 점차 수그러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거족적인 반일봉기의 여파는 그후 거의 1년동안 계속되였다.
3. 1인민봉기는 비록 실패하였으나 조선인민의 반일투쟁사에서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는 전민족적애국투쟁으로서 커다란 력사적의의를 가지는 사변이였다.
그것은 첫째로, 이 투쟁을 통하여 슬기롭고 용감한 조선인민의 열렬한 애국적투지와 혁명적정력이 뚜렷이 과시되였다.
둘째로, 일제의 식민지통치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으며 조선인민의 민족적각성을 크게 높여주었다.
셋째로, 식민지예속국가인민들의 민족해방운동발전에 고무적영향을 주었다.
3. 1인민봉기의 실패는 조선혁명가들과 애국적인민들에게 심각한 교훈을 남기였다.
그것은 첫째로, 3. 1인민봉기는 탁월한 지도자의 령도, 혁명적당의 지도가 없이는 어떤 혁명운동이든지 승리할수 없다는것이다.
둘째로, 3. 1인민봉기는 부르죠아민족주의자들이 더는 민족해방운동의 지도세력으로 될수 없으며 부르죠아민족주의가 민족해방운동의 사상적기치로 될수 없다는것을 보여주었다.
셋째로, 3. 1인민봉기는 민족적독립과 사회적진보를 위한 혁명운동의 승리를 이룩하기 위하여서는 사대주의를 철저히 배격하고 자체의 혁명력량을 튼튼히 마련하여야 한다는것을 가르쳐주었다.
넷째로, 3. 1인민봉기는 무장한 원쑤들과는 조직적인 무장투쟁으로 맞서야 한다는것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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