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만세시위투쟁탄압사건
6.10만세시위투쟁은 1926년 6월 한성(서울)과 지방에서 벌어진 우리 인민의 대중적인 반일시위투쟁에 대한 일제의 야수적인 탄압사건이다
6.10만세시위투쟁은 간악한 일제의 식민지통치에 대한 조선인민의 쌓이고 쌓인 원한과 분노의 폭발이였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에서는 노동자, 농민들의 혁명적 진출이 적극화되고 전국적 범위에서 반일기세가 앙양되였다.
이러한 때 조선봉건왕조의 마지막황제였던 순종이 죽은 것을 계기로 조선인민의 반일감정은 더욱 격화되였다. 순종의 장례에 참가한다는 명목 밑에 《망곡단》의 형식을 빌어 수많은 군중이 서울에 모여들어 군중집회를 열었다. 시위조직자들은 날로 높아가는 대중들의 반일기세에 의거하면서 순종의 장례식날인 6월 10일에 전국적인 반일시위투쟁을 벌릴 준비를 비밀리에 추진시켰다.
대중의 반일기세가 높아지고 시위투쟁준비가 진척되고 있는데 대한 실머리를 잡은 일제는 그를 탄압하기 위하여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일제는 각 도의 경찰대와 군대까지 동원시켜 한성(서울)시내에 삼엄한 경계망을 펴는 한편 인천에 정박하고 있던 4척의 순양함해병들을 《의장병》이란 명목 밑에 상륙시켜 대기시키였다.
그리고 수많은 군대로 서울을 포위하고 4,000여명의 경찰들을 동원시켜 시내를 거미줄처럼 덮고 감시하는 삼엄한 경계망을 쳐놓았다. 이와 함께 《치안유지법》을 비롯한 각종 악법을 발동시켜 시위투쟁준비위원회 성원들을 비롯하여 《요시찰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선풍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6월 6일과 7일 이틀 동안에만도 서울에서 200여명이 체포되였다. 반일시위투쟁을 준비하던 많은 성원들이 체포됨으로써 지방과의 연계도 끊어졌다.
그러나 선진적노동자들과 청년학생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사태를 수습하면서 처음 계획대로 서울에서 대중적 반일시위투쟁을 조직하였다.
6월 10일 일제는 순종의 상여가 지나갈 길을 따라 매 전선주마다에 5~6명의 경찰을 배치하고 이른바 《예포》용이란 간판 밑에 대포까지 끌어 내여 군중을 위협하였다. 그러나 일제에 대한 증오심을 품고 길 좌우에 빼곡이 늘어서있던 군중들은 상여가 창덕궁을 떠나 종로를 지나갈 때 일제히 반일시위투쟁에 떨쳐나섰다.
시위 군중들은 《조선독립 만세!》, 《일본군대 물러가라!》는 구호를 웨치면서 기세를 올렸다. 이날 시위대열에는 수만 명의 시민들이 참가하였다.
일제군경들은 확대되는 시위투쟁을 진압하려고 발악하였다. 시위군중과 군경들과의 사이에는 치열한 격투가 벌어졌다. 격노한 시위 군중들은 무장한 경관들에게 달려들어 맨주먹으로 싸웠다. 중무장한 일제군경들과의 격투에서 시위군중 160여명이 부상당하였으며 200여명이 체포, 구금되였다.
6.10만세시위투쟁은 일제의 야수적 탄압으로 하여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 투쟁은 그 어떤 역경속에서도 반드시 나라를 되찾고 민족의 존엄을 고수하려는 조선인민의 불굴의 의지와 투쟁기세를 보여주었다.
다음 기사 내용은 6월 10일 《노동신문》에 실린 전문이다.
일제의 야수성을 고발하는 6. 10만세시위투쟁
오늘은 6. 10만세시위투쟁이 일어난 때로부터 97년이 되는 날이다.
세월은 많이도 흘렀다. 세대도 바뀌였다. 하지만 우리는 6. 10만세시위투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우리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발광한 일제의 죄악을 절대로 잊지 않고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일본제국주의는 지난날 근 반세기동안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우리 인민에게 헤아릴수 없는 재난과 고통을 들씌운 피맺힌 원쑤입니다.》
3. 1인민봉기이후 식민지통치체제의 위기를 느낀 일제는 종래의 《무단통치》의 총검우에 《문화통치》의 비단보자기를 씌워놓고 《중추원》에 친일파 몇명을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조선사람의 정치참여를 장려하는척 하였다. 《민의창달》의 허울밑에 조선글로 된 신문, 잡지를 몇종 발간하도록 허가해주고는 마치 조선사람과 일본인사이에 차별이 없는것처럼 요란스럽게 떠들어댔다.
하지만 《무단통치》가 《문화통치》로 그 명칭만 바뀌였을뿐 총독정치의 진면모는 변하지 않았다. 달라진것이 있다면 통치수법이 보다 교활하고 악랄해진것뿐이였다.
조선봉건국가의 마지막황제였던 순종이 사망한것을 계기로 조선인민의 반일감정은 더욱 격화되여 각계층 근로대중의 반일투쟁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1926년 6월 10일 마침내 대중적인 반일시위투쟁이 벌어졌다. 이것은 우리 인민의 가슴속에 응어리진 망국의 설음과 간악한 일제의 식민지통치에 대한 쌓이고쌓인 분노의 폭발이였다. 시위투쟁은 삽시에 전국각지로 확대되였으며 여기에 각계층의 광범한 군중이 참가하였다.
온 삼천리강토를 진감하며 세차게 벌어진 6. 10만세시위투쟁은 빼앗긴 조국강토를 되찾고 민족의 자주권을 확립하기 위한 대중적인 반일애국투쟁이였다.
우리 인민의 불굴의 의지와 애국적기개에 겁을 먹은 일제는 확대되는 시위투쟁을 진압하려고 발악하였다. 시위투쟁이 벌어지기 전에 벌써 각 도의 경찰대와 군부대까지 동원하여 삼엄한 경계망을 펴는 한편 인천에 정박하고있던 4척의 순양함 해병들을 《의장병》이라는 명목밑에 상륙시켜 대기시켜놓았다. 또한 수많은 군대로 경성(서울)을 포위하였고 4 000여명의 경찰로 시내를 거미줄처럼 뒤덮었다. 그와 함께 《치안유지법》을 비롯한 각종 악법을 발동하여 수백명을 체포하였다.
시위투쟁이 일어난 당일에는 중무장한 군경들을 내몰아 160여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200여명을 체포구금하였다.
일제의 야수적만행에 의해 조국강토는 무고한 인민들의 피로 물들여졌다.
6. 10만세시위투쟁참가자들에 대한 일제의 류혈적인 탄압은 조선민족말살정책의 연장으로서 놈들이 저지른 범죄들가운데서 극히 일부에 불과한것이다.
《조선사람은 일본법률에 복종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죽어야 한다.》, 《조선사람들은 혹가이도 아이누족처럼 멸족시키면 족하다.》, 이것은 사실상 일제의 조선민족말살론이였으며 식민지통치의 기본핵이였다.
일제는 조선강점 전 기간 전체 조선민족을 말살할 흉계밑에 대중적학살만행을 거리낌없이 감행하였다.
조선민족말살을 노린 일제의 만행은 중일전쟁발발이후 더욱 로골화되였다. 무려 840만여명의 조선사람들을 유괴, 랍치, 강제련행하여 죽음의 전쟁판과 고역장들에 내몰았다. 일제는 《지하대본영》과 비밀군사기지건설에 강제로 동원하였던 수많은 조선사람들을 《비밀보장》의 구실밑에 집단학살하거나 세균무기인체실험대상으로 삼는 극악한 살인범죄도 저질렀다.
일제의 만행중에서 20만명에 달하는 조선녀성들을 일본군성노예로 삼은것은 조선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서 우리 인민에게 헤아릴수 없는 상처를 남긴 특대형반인륜범죄이다.
우리 인민의 가슴속에는 오늘까지도 일제에 의해 강요당한 불행과 고통의 뼈아픈 상처가 아물지 않고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반동들은 과거범죄를 부정하면서 과거청산의 책임에서 벗어나보려고 교활하게 책동하고있다.
일본의 과거범죄는 세월이 흘렀다고 하여 무마될수 없고 지워질수도 없다.
지난날 우리 인민에게 피맺힌 원한을 남긴 일제의 특대형반인륜죄악의 대가를 철저히 받아내려는 우리의 의지는 변함이 없다.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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