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곡의 우리 역사(1)
한 나라의 전위조직이 변혁운동의 정치적 참모부로서 제기능을 다할수록 민중들의 희생을 최대한 막아내며 혁명을 성공시키게 된다. 우리 변혁운동의 역사에서 1945년부터 1953년까지의 기간은 미증유의 참담한 몰락과 파산의 시기였다. 해방의 감격이 채 진정되기도 전에 한껏 희망에 들뜬 민중들의 가슴을 향해 미군정의 총부리가 겨누어졌고 수많은 민중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다.
또한 해방 후의 혁명적 정세 속에서 새롭게 자라나기 시작한 활동가들을 비롯하여 일제치하에서부터 오랜 세월 민족의 해방을 위해 싸워왔던 탁월한 혁명가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희생되었다. 1950년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조선노동당 남반부당 성원이 거의 대부분 체포되어 처형당했고 빨치산투쟁으로 돌입했던 많은 혁명가들이 조국의 이름없는 골짜기에서 생을 마감했다.
악명 높은 이승만의 국가보안법에 의해 1949년 한 해 동안에만도 10만 여명의 애국자들이 투옥•처형되었다. 이들은 당 중앙의 노선을 투쟁으로 옮기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오직 조국의 해방과 통일을 위해 헌신적으로 싸웠던 남한혁명의 정수들이었다. 남한혁명의 전위조직인 남로당은 어떻게 해서 이러한 참담과 파국을 맞게 되었는가?
통곡의 우리 역사(2)
우리는 남로당에 의해 지도된 1945~1950년 시기의 남한 변혁운동에 대해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남로당은 1949년 6월30일과 7월1일 이틀간 열린 ‘남북조선노동당통합대회’ 를 거쳐 조선노동당으로 통합된다. 이때부터 한반도 전역을 포괄하는 전위조직은 조선노동당으로 일원화되고 김일성은 당중앙위원회 위원장에 그리고 박헌영은 부위원장에 각각 선출된다. 이것으로 남한 혁명투쟁은 조선공산당 남반부당이 이끌어가게 된다.
남반부당의 책임자는 남로당의 주요간부였던 김삼룡이었고 이주하가 부책임자가 된다. 또 이때 남반부당의 성원은 거의 대부분 남로당 출신이었고 남한지역에 대한 정치지도를 담당하는 ‘남조선정치공작위원회’ 가 있었다고는 하나 남로당의 기득권을 이용하여 노동당내에서 자신의 지위를 높이려 꾀한 박헌영 일파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였다. 이런 점에서 1950년 전쟁 시기까지 남한지역 혁명의 총책임은 남로당이 맡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920년대 조선공산당도 건립과정에서부터 문제가 있었고 전위조직으로서의 역할행사에서도 결정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지만 민족전체가 생사존망의 기로에 서고 대다수의 민중이 혁명 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된 판갈이 싸움이 벌어지고 있던 시기에 전위조직의 역할을 맡았던 남로당의 노선상의 오류는 1920년대 조선공산당에 비해 백배, 천배의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먼저 남로당의 구조적 한계는 무엇인가?
첫째로, 그것은 당 창건의 기초가 박약했던 점에 기인한다. 즉 당의 조직사상적 기초 축성작업이 매우 일천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미 당의 조직사상적 기초를 쌓는 일이 당창건의 필수적 전제요, 당의 생명력과 전위적 질을 보장하는 관건으로 어느 시기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이와 같은 기초 작업에서 예외가 있을 수 없으며, 특히 강대한 제국주의자를 주적으로 장기적이고 간고한 투쟁을 전개해야 하는 식민지나라의 전위조직에게는 그것이 제일의 사활적 문제가 됨을 알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남로당은 전혀 그러한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 시작된다. 4차에 걸친 조선공산당 건립이 완전히 실패한 이후 국내에서는 몇 차례 당 재건 시도가 있었지만 당 창건 작업에서 제기되는 근본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당의 핵심과 골간대오를 투쟁 속에 준비한다든가 조선혁명에 필요한 지도사상으로 사상적 통일을 이룬다든가 하는 일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당 중앙부터 조급히 꾸리고 당 창건을 선포하는 구태의연한 모습이 체현되었다. 당을 진정으로 튼튼하고 건실하게 꾸리며 조성된 혁명정세를 추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당 중앙이 꾸려진 뒤에 각지에서 지방당 조직을 만드는 작업이 진행되었지만 당시 민중들의 혁명정세에 비해 볼 때 당 조직들은 나약했고 대중과 깊이 결합되지 못했다. 기층 당조직을 꾸려낼 핵심인자들이 없는 상황에서 조직사업이 원활하게 진행될 리가 없고 골간이 짜임새 있게 갖춰지지 못한 지방당 조직은 탄압이 부딪치면 금방 와해되거나 또는 역으로 돌출적 투쟁에 나서곤 했다.
어떠한 혁명적 정세 속에서도 조직사상적 기초가 축성되지 못하는 한 전위조직은 치유할 수 없는 한계를 드러내게 됨을 남로당의 경우로부터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된다.
둘째로, 남로당은 종파주의를 전혀 해소하지 못했다. 1920년대 이래 종파주의는 우리나라 변혁운동의 크나큰 질곡이었다. 조선에서의 진정한 혁명운동은 혁명가 하나 하나가 노동자•농민계급 속에서 투쟁을 수행하며 단련 개조되어 종파를 일소하고 혁명적 조직체계를 세워나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했다.
그러나 종파주의의 악폐를 물려받은 많은 공산주의자들은 1930년대, 1940년대를 거치는 동안 그들의 고질적인 파벌책동으로부터 벗어나기는커녕 점점 더 그 정도가 악화된다. 일제가 승승장구하여 위세를 떨치고 조선 전체가 헌병과 경찰로 뒤 덮이는 상황 속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실천투쟁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골방 속으로 깊이깊이 숨어들어가 사변적이고 사대교조적인 이론놀음에만 열중했다. 조직보존이라는 미명하에 학습소조에 불과한 모임들은 투쟁속에서 단련되지 못하고 화요회, 서울파,ML파, 콤그룹을 서로 구분하는 분파투쟁에만 급급했다. 일제치하 조선공산당이 파탄된 이후 그 교훈을 명심한 적지않은 활동가들이 공장과 광산, 농촌에 내려가 민중속에서 혁명운동을 추진하였고 그들의 활동으로 인해 적색노조, 적색농조의 움직임이 활발하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남로당은 그 존속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종파놀음을 중단하고 침략자 미제와의 결사항전을 위해 단합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음은 물론이고 더욱 심각한 것은 박헌영일파의 배타성, 종파성이었다. 월북은 명목으로는 피신을 위한 것이었다고 하지만 음모적 야심가 박헌영의 흉중에는 공산주의운동의 지도중심으로 정착되어가고 있던 북조선 노동당에서 자신의 확고한 지위를 마련하려는 계획이 더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바로 북한 지역에서 주도권 쟁탈전을 벌이려 획책하였던 것이다.
조직사상적 기초축성의 부족과 종파주의의 해독은 남로당의 각종 구조적 한계를 양산한다. 그것들은 당이 대중속에 확고하게 뿌리박고 모든 대중조직들을 움직여내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고 민족통일전선을 협소화시켰으며 전체 변혁운동세력의 단결을 저해했다.
통곡의 우리 역사(3)
남로당 노선의 전반적인 오류를 살펴보기 위해 사전작업으로 박헌영의 8월 테제를 점검해 보는 것은 오류의 근원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8월테제는 1945년 8월20일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가 결성될 때 정치노선으로 채택된 것으로 당시 정세와 혁명의 전도에 대한 박헌영의 견해를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이후 수립된 재건 조선공산당의 기본노선을 이루게 된다.
테제는 먼저 당면정세가 주체적 투쟁의 산물이 아닌 연합국세력에 의해 실현되었다고 규정한다. 또한 연합국인 미•영•중•소 등의 국가를 모두 진보적 민주주의국가로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박헌영의 우경화된 대미관을 엿볼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남로당은 대미인식에서의 무원칙함과 오류로 인하여 남한혁명의 전도를 크게 그르친다. 해방을 맞은 시점에서의 대미관이 근본적으로 수정되고 미국을 적으로 간주하는 본격적인 투쟁이 전개될 즈음에는 이미 미군정이 정세의 주도권을 확고히 틀어진 이후였다.
또한 테제는 조선혁명의 현단계를 부르조아민주주의혁명으로 규정하고 러시아혁명의 틀을 그대로 따오는 교조적인 모습을 노출하고 있다. 게다가 주요과업으로는 토지와 산업시설의 국유화를 내세우고 있는데 이는 스스로 설정한 부르조아민주주의혁명단계에 조응하는 것이 못될 뿐 아니라 대중들의 의식수준과 요구정도를 훨씬 뛰어넘는 좌편향이었다. 북한지역에서 김일성주석이 당면의 혁명단계를 반제반봉건혁명으로 보아 일제식민지잔재와 봉건유제의 청산을 주요과업으로 내세우며 점차적으로 토지와 주요산업의 국유화를 시행하여 민중들이 두려움과 거부감 없이 혁명을 적극 지지해 나서게 되었던 과정과 매우 대조적이라 하겠다.
우선 들 수 있는 것이 미군정의 본질에 대한 남로당의 인식과 그에 대한 투쟁노선상의 오류이다. 미군정은 초기부터 일관되게 지배자로 행세하며 그 주위에 친일반역의 무리들을 결집시키고 한국민중의 자주독립국가 수립운동을 탄압했다. 인민공화국의 실체를 부인했던 미군정은 정판사사건을 일으켜 조선공산당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했다.
그런데도 남로당은 미소공위가 완전히 결렬되고 통일국가 수립이 좌절의 위기에 놓인 1947년 말에 가서야 미국을 제국주의국가로 규정한다. 1946년 벌어진 ‘9월 총파업’ 과 ‘10월 인민항쟁’ 등 조선공산당은 1946년 7월부터 소위 ‘신전술’ 로 전화하게 되나 이것은 미국을 주적으로 간주하고 그들과 생사여탈의 투쟁을 벌일 것을 선언한 것이 아니라, 공산당의 힘과 영향력을 과시하여 미군정에 압력을 가하겠다는 지극히 기회주의적이고 개량적인 전술이었다. 또한 총파업과 대중적 시위투쟁으로 박헌영의 지도력을 과시하여 당시 추진중이던 3당통합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겠다는 추악한 종파적 속셈도 내재해 있었다.
따라서 투쟁은 정확하게 당적으로 지도된다기보다는 민중들의 자발적인 투쟁으로 확대되었으며 남로당 지도부는 투쟁의 확대, 전면화를 오히려 막아나섰고 수많은 민중들만 미제와 반동들에 의해 희생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불을 보듯 뻔한 사태의 추이에도 불구하고 남로당이 미제국주의자의 본질을 놓치고 투쟁을 주저했던 이유는 박헌영의 불철저한 반제반미관점(그가 미국의 고용간첩이었다는 주장을 논외로 하더라도) 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또한 남로당 간부들의 사대주의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성향도 여기에 일조한다. 그들은 인민공화국도 미군정의 승인을 통해 인정받으려 했고 기초도 없는 중앙만을 내세워 혁명에서 주도권을 잡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미국이 침략과 분단준비를 강행하고 반동무리들을총집결시켜 반혁명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남한혁명의 전위조직을 자처한 남로당은 미국에 대한 판단착오와 간부들 스스로의 불철저함으로 인해 투쟁을 방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에서는 이미 1945년 10월10일 당 창건시에 미국을 제국주의국가로 명백히 규정하고 북한지역을 미제의 강점으로 전국혁명의 전도에 조성된 난관을 뚫고나갈 강력한 책원지로 만들어 나가자는 민주기지노선을 채택했던 것과 비교해 보면 남로당의 어쩌구니없고 중대한 오류는 분명해 진다.
둘째로, 투쟁노선의 오류가 핵심적으로 떠오른다. 남로당의 투쟁노선은 1945년 6월경까지의 합법적 정치투쟁기, 신전술 채택이후—47년 말까지의 합법정치투쟁과 폭력투쟁의 배합기, 그리고 1948년—전쟁 발발시까지의 전면폭력투쟁기로 변화하는 양상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전술의 변화는 혁명정세와 주체역량의 발전에 따라 낮은 단계로부터 고도의 단계로 전화해 나간 것이 아니라 점차로 불리해지는 상황에 우왕좌왕하다가 급기야 좌익맹동적인 무장봉기를 단행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미소공위가 완전히 결렬되고 좌익세력의 대중기반이 현격히 축소되며 남로당이 철저한 비합법활동으로 운신의 폭이 좁아진 시점인 1948년에 들어서면 남로당의 투쟁노선은 완전히 모험적인 폭동노선으로 치닫는다. 제주 4.3항쟁, 5.10단선반대투쟁과 여수 •순천 반란 등은 대중과 고립된 채로 무모하게 전개되었고 1949년 7월 이후에는 당지도부가 산악지대로 옮겨가 빨치산투쟁으로 전화된 조건에서 유격투쟁의 초보적인 상식도 무시한 채 소위 ‘아성공격’ 이라는 전면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대부분의 남로당원을 죽음으로 몰아 넣는다. 우경기회주의와 좌경모험주의는 동전의 양면에 지나지 않음이 남로당의 투쟁노선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많은 민중들의 반미구국투쟁에 대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당적 지도는 남로당에게 기대할 수 없었다. 변혁역량을 결정적으로 소진시켜 버린 남로당의 투쟁노선에는 어떠한 구실과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다.
셋째로, 통일전선 노선의 부재를 지적할 수 있다. 식민지민족해방투쟁에서 통일전선운동은 변혁의 전술적 개념이 아니라 변혁승리의 날, 아니 그 이후 사회건설과정에서까지 일관되게 추진되어야 할 전략적 노선으로 규정된다. 제국주의자와 반동세력을 제외한 전체민중을 모두 자주적 투쟁주체로 성장발전시키고 그 통일적 역량을 동원하여 각방면으로 적을 포위공격하는 통일전선운동의 모범을 우리는 조국광복회에서 경험했거니와 이 시기에는 통일전선의 수립이 매우 유리했고 또 절실히 필요했다.
1945년이후의 남로당은 분파성과 배타성, 교조적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통일전선의 강화발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우익과 중도계열이 통일전선에서 배제되었고, 각 대중조직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남로당의 돌출로 심한 분열, 대립 양상을 나타내게 된다. 북한의 ‘북조선 민주주의민족전선’이 명실공히 모든 계급계층별 대중조직을 포괄한 굳건한 통일전선으로 선 데 반해 남한의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전체대중의 결집체가 되지 못했으며 1946년 중반이후에는 그 성격이 좌익진영의 연합에 불과한 것으로 축소되어 버렸다. 통일전선의 실패는 남로당의 대중사업에서의 취약성, 혁명에 대한 주체적 자세의 부족함 그리고 남로당 지도부의 종파성향이 낳은 산물이었다.
통곡의 우리 역사(4, 마지막)
남로당은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선언하면서 출범하였고 서울에 중앙을 두고 전국적 유일당의 지위를 차지하려 하였으나 남로당의 역량은 남한지역당 이상으로는 될 수 없었다. 1949년 조선노동당으로 통합됨으로써 남로당은 공식적으로 사라졌고 1950년 3월 김삼룡, 이주하가 체포되고 조선공산당 남반부당 지도부가 대부분 검거되고 전쟁발발 다음날인 6월26일 이승만정권에 의해 학살당하게 됨으로써 실질적으로 남로당의 중심체계는 전면 와해된다. 남로당의 비극적 와해과정은 동시에 우리나라 변혁운동의 엄청난 역량을 소진시키고 운동단계를 후퇴시키는 과정이었다.
한 나라의 전위조직이 올바른 기초위에서 건설되지 못하고 잘못된 노선으로 변혁운동을 지도할때 나타나는 결과는 실로 엄청나다. 남한혁명은 혁명가대오가 괴멸되고 민중들의 변혁역량이 피폐화된 조건에서 새롭게 시작되어야 했다. 그리고 남한혁명을 이끌어갈 전위조직은 남로당의 결정적 한계와 오류를 극복함으로써만 건설될 수 있고 그 전위적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남로당이 남긴 교훈의 첫 번째가 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해방후 전개된 전체 한반도의 변혁운동이 조성된 조건에 따라 지역적 특성에 의거하여 진행되었을 뿐 그것이 결코 남과 북에서 별개로 진행된 투쟁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또한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혁명전통은 오류로 점철된 남로당의 잘못된 지도행사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일제하 간고한 항일투쟁 속에서 혁명전통을 세우고 당의 조직사상적 기초를 다져온 민족해방운동을 주류로 하여 해방후 정확한 반미투쟁을 전개하게 되는 조선노동당의 전위적 지도에서 구현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남한혁명의 전위조직이 조선노동당이 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1945년 10월 ‘북조선 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가 결성되고 이후 정립되는 민주기지노선을 철저한 대미항전을 전개하기 위해 조건이 유리한 북한지역을 혁명의 책원지로 만든다는 전체 한국혁명의 총적노선이 된다.
민주기지 존재의 유무와 상관없이 남한변혁운동의 주체는 남한민중이 될 수 밖에 없고 그것을 지도할 전위조직도 남한자체의 역량에 의해 구성되어 지역혁명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로, 남로당의 투쟁경험은 우리의 혁명이 본질에 있어서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이며, 주적이 일제로부터 미제로 바뀌었다 해도 식민지혁명운동의 모든 고유한 원칙이 그대로 통용됨을 여실히 증명한다.따라서 우리는 식민지 장기항전의 관점에서 변혁운동에 임해야 하고 전위조직 또한 식민지의 특수한 조건에 맞게 결성되어 운동을 지도하게 됨을 알 수 있다.
넷째로, 혁명의 수령이 어떤 존재인지를 우리는 좀 더 구체적으로 고민할 수 있게 된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그리고 주체형의 당 창건과정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전위조직이 수령에 의해 창건됨을 확인하였다. 또 하나의 전위조직을 탄생시키고 강화발전시켜 혁명을 완수하게 되기까지 수령의 역할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그리고 혁명적 영도체계의 구심인 수령의 지위에 대해서도 올바른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당의 최고 지도자라고 해서 그가 바로 혁명의 수령이 되는 것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 남로당의 경험이다. 역으로 혁명의 수령에 의해 지도되지 않는 조직이 진정한 전위조직이 될 수 없다는 사실도 여기에서 증명된다.
2024년6월16일 통곡과 학살의 땅에서 서화조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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