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고향의 김치맛
리광식(재중동포 작가)
나의 제2고향은 연변의 룡정현로두구이다. 해마다 추석이되면 나와 둘째딸은 조상이 뼈가 묻은 로두구탄광골안 으로 벌초하려간다. 내가 인젠80이넘은 령감이 되었어도 가고싶은 마음으로 안가면 못 견딘다. 이상 어른들의 말을 들어 보면 조상을 잘 모시면 나도 잘 풀린다고 하기에 지금까지 산소로 다님을 잊지 않는다. 나는 원래 한국 강원도춘천군 신북면룡산리 태생이다. 춘천 룡산리는 나의 제1고향이다. 무서운 산골은 아니어도 낮은 산이 가까운 동네이다. 지금부터 약10년전에 내조카가 한국에서 일하니 찾아볼겸 처음으로 한국으로 다녀 왔다. 하긴 내가 태여난 제1고향 강원도 춘천 룡산리를 찾아갈 마음으로 더욱 간절했다. 찿다보니 한국사회는 지명을 잘 보존하는 사회로서인지 70년 전 이름과 똑같았다. 룡산리는 확대되어 룡산1, 2, 3리로 되였을 뿐 찿기가 쉬어서 다행 이었다. 70년만에 찾은 내 고향, 그맘이야말로 흐믓하고 감명 깊었다... 내가 좀 큰다음 아버지가 알려주기를, 내가 약 두살때 일제의 식민통치아래 어려운 생활을 못이겨 우리 할아버지가 우리집식구와 삼촌, 고모등 여럿을 데리고 이곳 중국 동북(그때 만주라고 했음) 으로 이사해 왔는데 처음으로는 흑룡강성 흥개호부근에 자리잡고 있다가 후에 지금 연변의 로두구에 정착하고 작으마한 땅을 부치고 살았었다. 난 여기 로두구에서 소학교, 초급중학을 다녔고 소년시절을 보냈으니 이것이 봐로 나의 제2고향이다. 내가 소학교를 다닐때 처음으로 배운노래가 바로 아리랑 노래이고 구차한 살림에서 맛드린 음식이 바로 내고향 춘천에서 우리 어머니가 배워온 구수한 토장국이며 최고맛으로 세계를 흔드는 맛나는 김치이다… 정녕 고향의 맛은 언제가도 생생하며 일생을 기억한다. 내가 어릴때 자란 소년시절의 로두구 산천, 아버지의 등을 굽힌 한 뙈기의 밭, 그리고 흙냄새, 천보산다리 밑에서의 꼬마들과의 수영, 물작난, 소학교1학년때의 음악시간의 “아리랑”노래, 어머니가 정성드려 챙긴 토장국, 그리고 그 맛좋은 김치 ! ...이 모두가 고향의 맛이겠다.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우리집 밥상에서 떨어 안지는 김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오늘날의 김치 모양은 1600년대 고추가 상용화되기 시작하면서 나타났다. 그러나 실제 김치의 기원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될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인류는 음식을 오래도록 보관하기 위한 방법으로 먼저 말리는 방법, 즉 건조를 통해 수분을 증발시키는 방법이었다. 이후 인류는 소금으로 절이는 방법으로 발전했다. 그 다음 단계가 발효시키는 식품저장방법이 나왔다. 김치도 이런 식품저장 발전과정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우리조상들도 염장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이용해 식품을 절이는 방법을 개발했고, 이것이 김치의 시작이었다. 당시 한반도는 탄수화물이 주성분인 쌀을 주식으로 하는 농경사회였기 때문에 비타민과 각종 미네랄을 채소를 통해 섭취했다. 그러나 4계절이 뚜렷한 기후 특징으로 한겨울에 채소를 먹을 수 없게되자, 염장에서 생산되는 소금으로 배추를 절이게 되었고, 이것이 점차 발전하여 오늘날의 김치가 된 것이다. 약 3천년 전의 중국 문헌 '시경(詩經)'에 오이를 이용한 채소절임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저(菹)'라는 글자가 나온다. 이것이 김치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문헌이다.그리고 상고시대때 김치류를 총칭하는 말로 소금에 절인 야채를 뜻하는 침채(沈菜)라는 말에서 오늘날 김치의 어원을 찾을 수 있다. 침채(沈菜)'가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침채→딤채→김채→김치로 변화하면서 김치가 되었다. '저(菹)'라는 말은 조선시대의 성종 6년(1475)에 와서 성조의 생모인 인수대비가 부녀 교육을 위하여 엮어낸 내훈(內訓)에 보면「저(菹)」가 「딤딤채)」그리고 성종 12년(1481)에 간행된 두시언해(杜時諺解)에서 「저」를 「디히」라는 말로 번역을 하였다. 그 후 중종(1505~1544)때 최세진이 한자교육을 위하여 편찬한 훈몽자회(訓蒙字會)에 「저」를 「딤조」라고 하였다.“딤”가 구개음화하여 「짐」를 거쳐 「김」 또는 「김치」로 되었다고 한다. 구개음화는 '디→지→기'로 변화되는 현상을 말한다. 홍자현대옥편에서도 「저」가 김치로 풀이되어 있다 삼국시대부터 유래한 김치는 고려시대 발전기를 거쳐 조선에 들어와서 오늘날과 같은 김치의 모습을 띄게 되었다. 이렇듯 김치는 우리민족의 변천사와 궤를 같이 하며, 끊임없이 발달한 <한민족 음식문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김치는 단순히 음식의 차원을 뛰어넘어 문화이며, 역사인 것이다. 그렇다 ! 김치는 우리 백의민족이 자랑하는 대표음식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어데가나 그 싱그러운 고유의 맛으로 세상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우리 백의민족으로서 누구나 즐겨 드시는 김치 ! 김치의 향그러운 입 천정의 느낌은 어쩌면 엄마의 손끝 사랑이 담뿍 담긴 음식맛에 대한 그리움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있던것이 곁을 비웠기에 그리워지고 갖고 있을 땐 몰랐던 소중함이 느낌의 세계를 윤색해주는 법이니 말이다. 타향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면 먹고싶음을 길어올리는 맛의 시달림 역시 하나의 어려운 시험이라는 것을 알아내게 하는 나날들이 낯설지 않을것이다. 사실 나의 입맛은 튀김음식의 본토에 고향을 두었다. 가끔 한번씩 맛보고나면 식도가 금방 미소를 하고 온몸에 도사렸던 궁증의 집념은 모래탑 마냥 순식간에 허물어져 버린다. 하여 식욕의 품에 안겼던 욕망은 금방 퇴색해 버리게 되고 한두번 먹는것으로 수년간 터실터실해진 입맛에 달램을 줄수가 있고 이런 맛은 마음의 시킴을 곰상곰상 들어주기에 접어버리기도 쉬웠고 있어도 없어도 별 할일없는 그러한 먼거리의 느낌이었다.. 그런데 김치만은 아니다. 식사상의 찬들이 아무리 푸짐해도 김치는 꼭 곁들여야만 먹음의 직성이 코대를 수그린다. 전라도 한정식 밑반찬 가지 수가 어마어마하리만큼 많다고 하지만 거기에서 김치를 빼버린다면 살을 다 뜯어낸 뼈골같아 금방 먹을 것이 없을 것 같은 느낌을 하게 될 것이다. 꽁꽁 어는 부엌방에 쪽걸상 놓고 앉아 대독 에다 김치를 담그는 날은 지금 생각해봐도 기분의 마당을 흥성거리게 하는 설날과 같탔다. 엄마가 양념장 입은 손으로 뚝 잘라주시는 통배추김치는 정말 맛의 하늘이였다. 가족과 자식을 위한 엄마사랑을 고스란히 먹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어릴때 한번은 바로 그맛에 꽁꽁 묶여서 잠자리에 지도를 그려놓을 만큼 탐식을 했던 일이 무던히도 행복한 기억으로 되어 지금도 내삶의 나무를 푸르게 수놓아 주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맛의 집에서 떵떵거리며 세습황제의 틀을 차릴 자격자는 김치뿐인 것 같습니다. 편한것에만 눈밝히는 인간의 게으름이 세계기록에 오를만한 요즘 분위기가 언짢긴 하지만 세월은 그런 일군들에게 찬의 천태만상을 함유한 슈퍼문화라는 행운을 풀어주었다. 김치도 마찬가지다. 가지수를 헤아릴수 없을 만큼 다종의 김치들 이 하나같이 빨강 화장을 하고 줄을 서서 ‘날 좀보소’ ‘날 좀 사주소’를 부르고 있는 호 시절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돈의 냄새를 맡고 이루어진 아이디어 조각들이라 엄마의 포기김치 앞에선 어린 아이일 뿐이다. 울엄마의 김치를 머리에 이고 다니며 먹을 수는 없으니 말이지 그래서 김치가 먹고 싶을 땐 매장 앞으로 가서 가격표 눈요기를 한다. 어떤 때는 반포기씩 사서 먹기도 하며 비록 김치갈증을 푸는데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 맛을 핧게 하고 기억하게 해 줘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참, 그렇다, 김치의 맛은 어머님의 정성이고 사랑이며 제1고향 강원도 춘천군 신북면 룡산리의 맛이며 우리민족의 진정한 맛이다...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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