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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보의 고향이야기

바걸강변에서

프레스아리랑 | 기사입력 2023/05/26 [08:30]

김문보의 고향이야기

바걸강변에서

프레스아리랑 | 입력 : 2023/05/26 [08:30]

고향이야기

바걸강변에서

 

 

잔디밭 모래사장 돌삐들의 고향

구마리포 말달리던 역사의 고장

 

 

어느 이른 봄 목동왕자의 고향입니다.

바걸강변에 펼친 풍경입니다.

보현산에서 발원한 자을천(慈乙川)이 이곳에 이르러, 짐 가득 실은 큰 황소가 목에 바만 걸면 출발할 수 있는 산 흐름을 만났다 하여 바걸재 바걸강변으로 불렸습니다.

 

원래 이 강변엔 푸른 잔디밭과 황금 모래사장, 하얗게 빛나는 돌삐(돌별)들이 많아 수석 채취자들이 많이 찾던 곳입니다. 전설의 <사랑연곡>에선 별을 만지고 싶어하는 아리공주를 목동이 데려오는 곳으로 됩니다.

 

수많은 돌들을 가리키며, 저것이 바로 별이어요. 돌별이어요. “하늘에 뜨면 별이요, 땅에 떨어지면 돌이라, 돌별이라 해요라고 말해줍니다. 이때부터 이곳 사람들은 돌을 돌이라 하지 않고, ‘돌별이라 부르다가 돌삐가 되고 결국 '별의 고장'을 만든다는 이야기입니다.

 

서라벌 아씨도 보고 싶던 50리 장림

 

이곳 강물에는 물반 고기반이라 송어, 피리, 먹지, 꺾자구, 뿌구리, 텅갈래, 텅수, 모래무지, 미꾸라지, 노고지리, 징거미, 고디, 메기, 배미재이, 자라, 꺼들 뭉치(버들치), 중택이, 무리, 물나비, 물총새, 억머구리, 비단개구리, 돌개구리, 검처리까지 온갖 것들이 풀과 꽃들과 어울려 생태계를 이루었습니다.

 

방둑엔 자천숲, 운산숲, 월지숲에서 시작된 왕버들 느티나무 숲이 영천까지 이어져 50리 장림을 이루었습니다. 바걸재 능선에서 바라본 자천숲 오리장림(五里長林)은 너무 아름다워 신라 서라벌 '새벌아씨'(서울아씨)도 보고 싶어 했습니다.

 

"외바걸 두레바걸 바걸재 십리길 서울아씨도 예 와서 바걸재 오리장숲 구경하면 여한이 없겠네" 신라 때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노랫말입니다.

 

바걸재 고개는 소의 목에 바를 걸 자리를 찾아 무덤을 쓰면 당대에 큰 부자가 되는데, 지금껏 아무도 그 자리를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곳곳에 임란 권응수 장군 흔적

 

임진왜란 때는 이곳 출신 권응수 장군이 바걸재 능선에 깃발을 쭈루룩 꽂아 군사가 많은 것처럼 위장, 왜군을 한천 방면으로 유인해 격파했다고 합니다. 그를 위해 불현듯 백마 한 마리가 나타났는데, "장군나자 용마났다" 하여 용마(龍馬)가 난 골짜기를 용난골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용난골 바로 너머는 구마리덤으로 이어진 바걸재 길이 계속되어 선관 화동 대천 사천 사래들 영천, 학지 삼창 현고 한천 귀일 가래실 신녕, 능계 온천 별곡 등으로 건너갈 수 있습니다.

 

사진: 말 달리던 동네의 중심 무대인 구마리 강변                                                  © 프레스아리랑



구마리(驅馬里)는 말 달리는 동네라는 뜻입니다. 권응수 형제들과 인근 장정들이 이곳에서 말 달리고 활쏘며 궁마술(弓馬術)을 익힌 곳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신작로와 과수원이 생기기 전, 산동중고교(영천전자정보) 앞 뜨락들과 붕어듬까지의 개활지 전체를 구마리라 불렀습니다. 예전에는 물이 많고 깊어 '구마리포'라고 불렀습니다. 곳곳에 늪지대도 있어 사람들이 건너기 힘들었으므로 신라 때이래 바걸재 산길로 다녔던 것입니다.

 

땅은 산을 밀어올리고, 산은 물과 돌을 끝없이 흘려보냅니다. 물과 돌은 오랜 세월 강과 강변과 유역을 만듭니다. 우리 조상들은 그 유역마다 산을 끼고 마을을 만들었습니다. 들을 개척했습니다. 도랑이 생기고 논둑 밭둑이 생겼습니다. 들길이 생기고 우리도 생겼습니다.

 

내고향 보현산과 방가산과 화산과 경림산과 팔공산을 바라볼 때마다, 국토 곳곳 산과 강과 유역 도시와 마을들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입니다. 내 고향 구마리와 바걸재와 나와 우리들이 생긴 연원입니다. 전설의 우리들입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와 꼬마 손자들

 

이른 봄, 시어머니와 며느리간인 두 할머니가 어린 손자들을 놀게 하고 빨래 방망이 치는 곳은 바걸재 입구, 바걸강변이 되겠습니다. 아랫 쪽으로 구마리 강변, 위쪽으론 내지 월지 자천 보현산으로 닿은 큰 성지골이 보입니다. 이곳 일대 강변을 따라 잔디밭과 모래사장이 많아 말도 달리고, 활쏘기 연습도 할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들 뒷 쪽에 보이는 돌삐들은 지금은 도시아파트 건설과 도로공사용 골재로 채취되어 가고 없는 상태입니다. 구마리바걸강변은 이렇게 돌삐들이 사라지기 전 마지막 정겨운 모습을 남겨놓았습니다. 목동이 친구들과 소 먹이러 다니며 헤엄질도 배우고 온갖 물고기들과 놀던 바로 그곳입니다. 수십 명의 아이들이 남녀 구분 없이 종일 물에 뒹굴어도 맑은 물 그대로 흐르던 곳입니다.

  © 프레스아리랑



 

사진엔 황사가 멀리 보현산을 덮고 있는 희뿌연 봄이 아련할 뿐입니다.

 

 

2023. 5. 김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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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응수 : 초유사 학봉 김성일에 의해 경상좌도 의병대장에 임명된 후, 좌도 열읍의병들을 영천으로 모아 전국에서 최초로 영천성을 탈환했다. 이어 병마절도사 박진과 함께 경주성도 탈환했다.

 

다시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안동 비안 예천용궁 대구달성을 회복하고 울산성 탈환전도 벌였다. 전후 40여 차례 싸워 이겼다. 왜군들이 몹시 두려워하여 그들 기록에 권응수를 아주 무섭고 흉폭스럽게 그림으로 그려 놨다.

 

황현필 선생은 임란시 조선 3대 용장으로 권응수 정기룡 황진을 꼽고 있다. 1546년생으로 63세에 선조임금 문상 중 한성 여사(旅舍)에서 생을 마쳤다.

 

광해임금은 이원익 대감을 보내 문상했고, 운종가 시장에 철시명령을 내려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졌고, 시호 충의공(忠毅公)이다. 이순신 다음으로 많은 유물을 남겼다.

 

* 꺼들뭉치 : 버들치

* 배미재이 : 뱀장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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