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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가 최승희

프레스아리랑 | 기사입력 2023/03/28 [04:18]

무용가 최승희

프레스아리랑 | 입력 : 2023/03/28 [04:18]

해방이후 남쪽이나 북쪽이나 많은 사람들이 정국의 혼란을 맞이하였다친일파로 잘 나가던 인간들은 숨을 곳을 찾아갔고 해방의 주역들은 어깨를 펴고 거리를 활보하였다그것도 잠시 분단의 비극이 시작되면서 개개인의 삶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었고 각자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만 했다이러한 때에 자의반 타의반 누구는 남으로 누구는 북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많았다그중에 힘들게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을 재조명하고 소개하고자 한다북행을 택한 사람들의 관하여 남쪽의 여러 가지 자료에도 소개되었지만 내용이 대부분 짧아 전후 내막을 알기가 어려웠다마침 북에서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사이트에 당시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북에서 어떻게 정착했고 어떻게 살아갔는지 그나마 자세하게 소개 되었다그 자료를 다시 미국에서 운영하는 <재미련사이트에 소개된 것을 원문 그대로 소개한다북을 택하고 어렵게 올라간 사람들의 행적에 대해 알고자 하는 독자들에 매우 유용한 자료라 생각하며 <프레스아리랑>이 ‘[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연재] 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17. 무용가 최승희을  게재하기로 하였다.

 

 

 

 

한 무용가의 운명 

 최 승 희(무용가)              © 프레스아리랑



• 1911년 11월 24일 서울에서 출생.

• 1938년 국제무용심사원으로 추천.

• 1946년 10월 조선무용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사업.

•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1969년 8월 8일 사망.

                                                           

 

 

무용은 률동의 예술이다.

 

붓대와 종이로 글을 쓰는 시인이나 건반과 악보로 노래를 울리는 음악가와는 달리 무용가는 자기 온몸의 률동으로써 사람들의 가슴을 열어젖히고 그 심장우에 열정의 시와 노래를 새겨주는 률동의 시인, 률동의 가수이다.

 

록화촬영이나 무용표기법 같은것이 없던 지난날 무용가가 무대를 떠나는것과 함께 사라져버리고마는것이 무용이였건만 세월의 락엽도 민족의 넋을 안고 나래쳤던 최승희의 무용을 덮어버릴수 없었다.

 

압제의 사슬에 육체도 넋도 꽁꽁 얽매였던 민족수난의 시기에 태여난 무용가 최승희가 눈물젖은 춤과 률동으로써 어둠속에 터뜨린 시와 노래는 무엇이였으며 따사로운 새 조국의 품에 안겨 한없이 은혜로운 태양의 해살을 받아 엮어낸 시와 노래는 무엇이였던가.

 

 

운명의 배에 돛을 달고

 

최승희는 1911년 11월 서울에서 태여났다.

 

그의 아버지는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는 사람으로서 조선봉건왕조시기 참봉이라는 말석벼슬을 지낸바도 있는 학식이 높고 견문이 넓은 사람이였다.

 

최참봉은 서당훈장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였으므로 이웃들은 최승희의 아버지를 《참봉님》으로 존경하여 불렀다.

 

참봉은 조선봉건왕조시기 여러 관청들에서 실무를 맡은 봉건관료직제의 가장 낮은 자리에 해당하는 종9품 벼슬에 불과했으나 최승희의 집안은 궁색함을 모르고 지낼수 있었다.

 

그가 자서전에도 쓴것처럼 《따뜻한 비단이불과 요우에서 세상에 괴롭고 아픈 불행이라는것이 있다는것을 도무지 모르고 어린 병아리와 같이 어머님과 아버님의 사랑과 귀여움을 받아가면서》 자라났었다.

 

하지만 이것은 한순간의 짧은 꿈처럼 사라져버리였다.

 

일제의 침략의 마수라고 할수 있는 동양척식회사는 온 나라의 밭들과 함께 최승희네 토지도 집어삼켜버리였다.

 

그의 집은 졸지에 빈농의 나락속으로 깊숙이 빠져들어가게 되였다.

 

가난과 주림은 최승희네 집안에 설음과 눈물을 가져다주었다.

 

이에 대하여 최승희는 자기의 글에서 이렇게 썼다.

 

《쓰라린 운명의 검은손은 세월의 풍랑속에서 괴로움과 아픔을 모르면서 귀엽게 자라던 내 몸에 닥쳐오고말았다. 언제까지든지 웃음과 사랑으로써만 나를 어루만져줄줄 알았던 나의 운명은 어느덧 사라져버리고 거칠고 풍파사나운 길에 떨어지고말았다.

 

 

우리 집에서는 승일오빠가 애써서 쓴 얼마 안되는 원고료를 제외하고는 아무 수입도 없었다. 그래서 하루에 두끼의 밥도 끓이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

 

하지만 이처럼 가난하고 불행한 운명도 결코 최승희를 실망시키지는 못하였다.

 

최승희가 눈물 잘 흘리는 연약한 계집애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으나 이때부터 그의 작은 가슴속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의 힘으로 무너져가는 가정을 다시 일으켜세우고 부모님의 여생을 행복하게 해드리겠다는 결심이 꿈틀거리군 하였다.

 

최승희의 성장에서 오빠 최승일의 영향은 대단히 컸다.

 

그는 오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그때 오빠는 진보적문학자로 활동하면서 소설을 쓰고있었는데 나에 대한 오빠의 애정과 지도가 얼마나 나를 격려하였는지 모른다.

 

오빠는 나에게 사물현상에 대한 정확한 관찰과 리해의 길을 열어주며 가르쳐주었다.

 

나는 오빠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시와 소설을 읽었다.》

 

일찌기 문학에 뜻을 두고 대학을 나온 오빠는 당대 사회를 비판하고 우리 인민의 민족적 및 계급적해방을 내용으로 한 단편소설 《파산》을 비롯하여 여러편의 소설들과 희곡작품들을 창작한 재능있는 작가였다.

 

문학에서뿐아니라 음악과 무용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었는데 그는 왜색왜풍이 짙어가는 탁류속에서 민족문학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굳건한 사람이였다.

 

그가 보건대 녀동생 최승희는 천성적인 예술적감각과 재능으로 보나 육체적인 조건으로 보나 민족무용을 살리는데 한몫할수 있을것 같았다.

 

그래서 틈만 있으면 동생에게 우리 나라 민족무용의 한심한 실태에 대하여 이야기해주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의 민족무용형식을 정립하여 살려내야 한다는데 대하여 열정을 담아 이야기하군 하였다.

 

숙명녀자고등보통학교 재학중이던 최승희는 오빠가 들려주는 이 말이 애국적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것을 자기의 운명적인 과제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도 나이상 먼거리에 있었다.

 

사실상 민족무용을 살리기 위해 자기 한몸을 내대야 한다는 결심을 내리기에는 최승희네 집안을 덮은 생활이 너무도 궁핍하고 눈물겨운것이였던것이다.

 

그리고 당시 최승희의 마음속에 가까운 예술은 무용보다도 음악이였다.

 

그는 자기가 무용가로 되리라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었다.

 

하기에 최승희는 자기의 수기에서 《… 내가 학교때부터 무용가가 되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학과성적은 우등, 창가도 제법 잘하였으니 학교의 무슨 모임에서든지 의례히 내가 독창을 하게 된 까닭에 장래에 음악가가 될것이라고 생각하였다.》고 썼던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객관적인 환경은 최승희를 음악전공에로 떠밀었다.

 

자기의 앞길에 대해서 별로 방책이 없는 상태에서 숙명녀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게 되였을 때 모교의 교원회의에서는 최승희를 도꾜에 있는 사범학교나 음악학교에 보낼것을 계획하고있었다.

 

하여 그는 열여섯살 되는 다음해 봄을 기다리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최승희는 그 1년이 10년처럼 길게 생각되였고 거기에 가정적인 설음과 슬픔까지 겹쳐 가슴이 터지는듯 아파났다.

 

그는 자기가 아무리 음악을 하고싶어도 하루하루 연명하기조차 어려운 가난한 집 딸이라는것을 뼈아프게 절감하면서 제일 품들이지 않아도 될 사범학교에 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사범학교시험에서 800명의 수험생중 7등으로 합격은 하였지만 나이가 어린탓에 그곳에마저 갈수 없게 되였다.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는 자기 운명의 앞길을 절감하면서 그는 몸부림쳤다.

 

하지만 오빠는 누이동생의 앞길을 두고 조금도 실망하거나 주저하지 않았으며 늘 이야기하던 민족무용의 길을 새롭게 개척하는데로 그를 떠밀어주고 고무해주었다.

 

오빠는 녀동생에게 한탄만 하지 말고 보다 유익하고 광활한 미래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그 길이 다름아닌 민족무용을 정립하는 길이라고 일깨워주었다.

 

오빠에게는 우리 인민이 고유한 자기의것으로 세상앞에 내세울 똑바른 무용이 없는것이 늘 가슴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던것이다.

 

한편 동생의 성격이나 몸매, 얼굴생김새, 정서를 보아 문학예술의 여러 분야가운데서 무용이 꼭 알맞으며 동생이 결심만 하면 무용에서 크게 성공할수 있으리라고 확신하고있었다.

 

그래서 최승일은 녀동생이 음악학교나 사범학교 가는 날을 기다릴것이 아니라 전문무용단에 들어가 무용을 배울것을 요구하였고 우리 나라 무용예술을 잘 알고 발전시키자면 다른 나라 무용도 깊이 알아야 하며 대비적인 관찰속에서 민족적이면서도 독창적인 무용을 창조할수 있는 능력을 키우라고 간곡하게 일깨워주었다.

 

오빠의 이런 수고는 헛되지 않았다.

 

최승희는 점차 오빠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였고 마을사람들이 추는 민간적인 춤에 관심을 가지고 눈여겨 살피였으며 제나름으로 춤동작을 해보거나 만들어보기도 하였다.

 

음악인가, 생계유지를 위한 사범학교인가? 아니면 무용인가?

 

갈림길에서 고민하며 망설이던 최승희는 드디여 무용을 자기 운명의 배로 삼고 거기에 돛을 달았다.

 

이 운명의 선택이 옳았는가 틀렸는가는 운수나 세월이 증명해주는것이 아니라 자기의 노력과 열정이 증명해줄것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최승희는 완강하게 반대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설복해내고 이웃들에게도 자기의 생각을 설명해준 다음 1926년 3월 고향인 서울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가서 어느 한 무용단에 들어가게 되였다.

 

일부 친척들과 가까웠던 사람들은 최승희의 이 행동을 두고 격분하여 소리쳤다.

 

《춤을 추다니, 기생이 된단 말이야?》

 

《굶으니까 딸을 기생으로 판다나. 량반집도 그러나?》

 

《하여간 춤추는 사람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은 최씨네와는 섭섭하나 결별해야 해!》

 

귀아프고 가슴저린 비난이 비발치듯 하였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최승희가 이 비난의 소나기에 겁을 먹거나 주저한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완강하게 벋디디고 일어나 오빠와 합심하여 자기의 목적달성에로 매진한것이였다.

 

나중에는 아버지와 어머니도 딸을 리해하여주었고 옹호하여주었다.

 

온갖 민족적멸시와 천대속에 종일토록 잡일을 하면서 망국민의 설음을 체험할대로 체험한 최승희는 이를 악물고 어떻게 하나 조선민족무용의 우수성을 온 세상에 떨치고야 말겠다는 민족적자존심과 야심을 굳히며 피타는 노력을 기울이였다.

 

그는 무용기초련습으로부터 각 나라의 무용특성에 이르기까지 파고들었고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조선민족이 창조한 무용이라면 아무리 세습적이고 작은것이라고 하더라도 놓치지 않고 다른 나라의것과 대비해보면서 우리것을 더 잘 살려낼 방도를 모색하였다.

 

어머니는 이국땅에서 고생하는 딸에게 따뜻하고 고무적인 편지를 보내주었다.

 

《이곳 사람들은 우리 집이 구차해서 딸을 기생으로 팔았다고들 수군거린다. 너는 기어이 훌륭한 사람이 되여서 이러한 사람들에게 보란듯이 부럽게 해라.》

 

최승희는 어머니의 이 편지를 가슴에 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반드시 훌륭한 무용가가 되리라고 굳게 다짐하였다.

 

이렇게 흘러간 3년간에 최승희는 무용가로 자라나 민족무용에 대한 지향을 확고히 세웠다.

 

그는 오직 조선의 고유한 춤가락을 찾고 습득하는데 목적을 두고 피타는 노력을 아낌없이 바치였다. 그 바탕에는 민족의 넋을 지키고 억세게 살려나갈 의지가 깔려있었고 식민지노예의 운명에서 인간이하의 고생살이를 하는 자기 민족에 대한 동정과 사랑이 깔려있었다.

 

최승희는 민족무용에 대한 자기의 꿈과 지향을 실현하기 위하여 1929년 10월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당시 우리 나라의 여러곳에서 활동하고있는 무용가들속에서는 전통적인 민족무용(민속무용이 많았음.)을 예술화, 무대화하려는 기운이 높아가고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두가지 측면을 띠고있었는데 하나는 전통적인 민족무용형식을 가공함이 없이 그대로 추어야 한다는것이였고 다른 하나는 민족적인 성격을 살리면서도 그 형식은 현대인의 미감에 맞게 현대화하여 무대에 올려야 한다는것이였다.

 

최승희는 무용을 배우고 우리의 민족무용과 다른 나라 무용을 대비해본데 기초하여 단호하게 민족적인 성격을 살리되 당시 사람들의 미학정서적요구에 맞게 새로운 무용을 창작하여 무대에 올려야 한다고 결심하고 자립으로 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자기의 의도대로 교육도 하고 창작출연도 하였다.

 

1930년부터 1932년까지 3년동안에 최승희는 9회에 걸쳐 신작무용을 발표하였고 연구생들을 새로운 민족무용창작과 연구에로 분발시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때 그가 새롭게 창작한 무용작품들중에는 《그들은 태양을 찾는다》, 《방랑인의 설음》과 같은것도 있었는데 여기에는 일제의 식민지통치밑에서 신음하고있는 망국노의 슬픔과 고통, 비참한 생활현실을 반영하고있었다.

 

최승희는 우리 나라 방방곡곡을 편답하면서 전통적인 춤가락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여 다듬어갔고 현대적미감에 맞게 세련시켜 무대에 올리였다.

 

그는 무당들도 만나보고 승무를 보기 위해 험한 벼랑길도 톺았으며 궁중무용체험자들도 만났다.

 

그리고 지방마다 다르게 변색되여 이어지는 민간무용들인 농악무, 탈춤, 기생춤, 포수들의 사냥춤, 바가지장단으로 흥취를 돋구는 두레놀이의 춤 등 여러 부류를 분석하고 특징들을 찾아 새로운 민족무용창작에 구현하였다.

 

그리하여 최승희는 민족적색채가 짙고 우아한 춤가락들을 고르고 다듬어 완성하는데서 커다란 전진을 이룩하였다.

 

최승희의 첫 무용공연은 1930년 1월 《동아일보》와 《매일신보》의 후원하에 서울 경성공회당에서 막을 올리였다.

 

늘씬하고 아름다운 몸매, 부드러운 미소를 담고 무대에 나선 최승희가 다양하고 새로운 춤동작으로 넓은 무대를 황홀하게 휩쓰는것을 사람들은 모두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들은 민족성이 짙고 우아한 그의 첫 공연에 완전히 매혹되였고 우리의 민족무용의 훌륭함과 아름다운 미래에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출판보도물들은 그의 공연에 대하여 련일 대서특필하였다.

 

공연은 그해 10월에도 그 다음해 정월에도 계속되였는데 그에 대한 절찬이 고조를 이루었으나 최승희는 절대로 만족하지 않았고 보다 더 큰 목표를 걸고 이악하게 우리 무용을 다듬고 세련시켜나갔다.

 

그의 포부는 무엇이였던가.

 

그것은 조선민족무용의 우수성을 세계에 과시하며 그것을 통하여 조선사람의 우월함과 그 넋의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경탄시키고 머리숙이게 하자는 야심과 함께 그 과정에 수난당한 민족의 울분과 원한을 온 세계앞에 터쳐놓고 호소하려는 강렬한 지향이였다.

 

그래서 그는 다른 나라들을 밟아가며 우리의 무용으로 우리 민족의 바람을 일으키리라 결심하였다.

 

그는 일본, 미국, 프랑스, 벨지끄, 중국 등지로 다니며 《에헤라 놀아라》, 《마을의 풍작》, 《승무》, 《초립동》, 《감옥에 갇힌 춘향》, 《아리랑》, 《고구려의 전쟁무》 등 조선의 멋과 맛이 풍만한 춤들로 자기의 무대를 황홀하게 장식하여 매개 나라 극장들에서 파문을 일으키였다.

 

그리하여 일본에서는 1935년에 제나름대로 최승희의 민족무용을 소개하는 《반도의 무희》를 만들어 보급하였으며 신문지상에서는 《그녀의 머리, 그녀의 가슴, 그녀의 혈관과 춤속에 어느때나 충만된 민족애야말로 가장 찬양해야 할것이다.》, 《최승희의 무용은 다만 눈으로 보기만 하는 무용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의 접촉을 의미하는 무용이다.》라고 떠들었다.

 

1937년 12월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세계 각국 순회공연때 미국으로 간 최승희는 쌘프런씨스코에서 나라잃은 민족의 눈물겨운 감정을 안고 울며 춤을 추었는데 그것은 이곳에 살고있는 조선사람들이 공연을 관람하고있었기때문이였다.

 

그들도 울고 최승희도 울었다.

 

나라잃은 설음, 떠나온 고국에 대한 그리움, 망국민의 절통한 심정이 최승희와 그들의 감정을 하나로 련결시켜 놓았던것이다.

 

빠리에서는 최승희가 비행장에 내리자마자 이채로운 조선옷차림에 시민들이 반하였는데 그가 무용 《초립동》을 공연한지 한주일만에 그 초립동모자가 전체 빠리시에 쫙 퍼지였다.

 

1938년 벨지끄의 브류쎌에서 열린 제2차 국제무용콩클에서는 최승희를 국제무용심사원으로 추천하였다.

 

이렇듯 최승희의 황홀한 률동과 매력적인 용모는 관중의 대인기를 끌었다.

 

신문과 방송들이 그에 대해 아낌없이 떠들어대였고 최승희에 대한 소문은 신비화되여 퍼져갔다.

 

간악한 일제놈들은 최승희를 빌어 제놈들의 위상을 돋구기 위하여 《샤이쇼끼무용단》이라는 이름을 달고 공연하라고 강박하여나섰다.

 

하지만 최승희는 단호히 그 강요를 물리치고 《최승희무용단》으로 세계 각국에서 순회공연을 하였고 자기들이 조선의 무용가라는것을 떳떳하게, 자랑스럽게 웨치였다.

 

그러나 일제에게 짓밟혀 세계지도에서 자기 이름마저 잃어버린 조선을 알려고 하는 나라도 없었고 더구나 식민지나라의 무용배우를 《조선의 배우》로 불러주는 사람도 없었다.

 

세계의 이르는 곳마다에서 환영을 받기는 했으나 최승희는 무대우에서 자기를 비치는 일장기의 후광에서 벗어날수 없음을 가슴찢기는 아픔속에서 절감하였다.

 

그는 세계올림픽경기대회 마라손경기에서 1등한 손기정이 어째서 일본인이기를 거부하고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시련을 겪어야 했으며 리준이 어째서 조선독립을 부르며 할복자살하였는가를 통절히 깨닫게 되였다. 조선무용으로 조선민족의 넋을 떨치려 애썼건만 조국이 없었기에 그의 노력은 식민지민족의 한 성원의 몸부림으로서 일제의 리용물에 불과했다는 쓰라린 체험만을 가져다주었다.

 

자기 조국이 없으면 아무리 재능이 뛰여난 정열가도 노예나 다를바가 없다는것이 최승희가 깨달은 교훈적인 진리였다.

 

소박하나마 자기의 작은 가슴에 품은 민족문화의 얼을 찾고저 무용이라는 운명의 배에 돛을 달았던 최승희의 반생항로는 식민지인의 쓰라린 좌절과 깨달음으로 눈물에 젖어있었다.

 

그자신이 말했듯이 자기가 무대우에서 아무리 화려한 률동을 펼치며 매혹적인 웃음을 짓고있었어도 그것은 망국의 설음이 빚어내는 가슴아픈 몸부림일따름이였다.

 

 

 

깃들인 인생의 보금자리

 

최승희는 감격적인 조국해방의 날을 무용연구소를 운영하고있던 중국 베이징에서 맞이하였다.

 

그는 하루빨리 그리운 조국, 꿈에도 잊지 못할 고향으로 가고싶었다.

 

왜놈이 없는 그곳에 가서 마음껏 민족의 향기를 춤으로 뿜고싶었던것이다.

 

하지만 발목을 붙잡는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하여 이듬해에야 그는 귀국의 배길에 오르게 되였다.

 

서울에 도착한 최승희는 그곳의 분위기와 사람들의 감정이 무겁게 그늘져있는것을 느끼게 되였다.

 

그가 온다는 기별을 받고 마중나온 친척들과 친우들이 반겨맞아주기는 했으나 왜서인지 얼굴들이 밝지 못했다.

 

날이 지나감에 따라 그 의문이 점차 풀리게 되였다.

 

해방이란 말뿐이였지 조선사람의 심장을 짓누르며 피를 토하게 하던 일제의 식민지통치가 미군정통치로 바뀌여 민족의 운명은 여전히 외세에 의하여 롱락당하고있었다.

 

미군에 복종을 강요하는 미군정청의 포고문, 거리를 누비는 미군병정들의 어지러운 군화소리, 어딜 가나 눈에 뜨이는 미국식양풍의 범람…

 

비극의 력사가 다시금 되풀이되고있는 가슴아픈 현실앞에서 최승희는 마음을 진정할수 없었다.

 

그는 서울로 오라고 한 오빠가 해방바람에 들떠 《해방자》라는 미군의 본질과 그로부터 빚어지는 비운에 대하여 미처 모르고 속아넘어갔음을 깨닫게 되였다.

 

도처에서 소란스레 들려오는 《반공》나발, 미국식《자유》를 설교하는 김빠진 사대광신자들의 란무장을 보며 최승희는 속으로 울었다.

 

더구나 그를 격분하게 만든것은 자기를 《친일파》로 몰아붙이는 소문이 나도는것이였다.

 

그는 이것이 누구의 소행인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것은 리승만패거리들의 작간이였다.

 

그가 해방전 미국에서 공연을 할 때 리승만이 불쑥 나타나서 《한국독립당강령》이라는것을 내대며 그것을 공연전에 관중앞에서 랑독하여줄것을 요구하였었다.

 

최승희는 그의 면전에서 단마디로 거절해버리였다.

 

미국땅에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그자체가 어처구니없는것이기도 하거니와 리승만이 미제의 철저한 하수인이 되여 서양녀자를 끼고 《독립자금헌납》명목으로 동포들의 돈을 뜯어먹으면서 부화방탕하게 사는 송충이같이 너절한 흉물이라는것을 오빠한테서 들어 잘 알고있었던 최승희로서는 그에게 침을 뱉고싶었다.

 

만약 그의 요구대로 그따위 《강령》을 읽게 되면 공연자체가 그들의 롱락물로 되는것은 물론이거니와 최승희자신은 민족의 배신자로 되여버리고마는것이였다.

 

최승희는 죽음을 각오하고 리승만과 맞서 싸웠었다.

 

바로 최승희를 꺾지 못한 그때의 앙갚음을 하려고 리승만은 앞잡이들을 내세워 그를 《친일파》로 몰아붙이는 소문을 퍼뜨리게 하였던것이다.

 

최승희는 코웃음을 쳤지만 가슴이 찢기는듯 아팠다.

 

더구나 그를 더 괴롭힌것은 미군정청의 요구였다.

 

최승희에게 《자유세계》인 미국에 건너가 서양춤을 추라는것이였다.

 

모진 가난과 운명의 풍파속에서도 조선민족무용을 고수하고 발전시켜 그 아름다움을 세상에 과시하려고 애를 써온 그 애국의 마음을 짓밟다 못해 최승희자체를 미국화하려고 달려드는 이런 놈들과 어떻게 상대할수 있단 말인가.

 

그는 서울로 온것을 후회하였다. 오지 말아야 할 땅에 발을 디딘것이였다.

 

그는 출로를 찾아 모대기였다.

 

량심적인 유지들을 여러명 만나보았는데 누구나 다 남쪽땅에서 빚어지고있는 비극적현실을 개탄하면서 통분해할뿐 그가 기대하는 출로를 안내하는 사람은 없었다.

 

암중모색하던 최승희는 조선인민당 당수로 명망이 높아 미군정청에서도 감히 어쩌지 못한다는 려운형을 찾아가 만났다.

 

려운형은 해방전부터 최승희의 무용활동과 그에게 잠재해있는 민족적자각과 애국심을 귀중히 여겨주고 적극 도와주기도 한 고마운 인사였다.

 

그는 최승희가 국내공연과 외국공연에서 성과를 거두었을 때에는 집에 초청하여 소박한 음식상을 차려주고 고무해주기도 하였다.

 

재정난에 부닥쳐 안타까워할 때면 식량과 돈으로 최승희를 후원해주군 하였었다.

 

려운형에 대한 최승희의 인상에서 제일 잊을수 없는것은 1936년 8월 베를린에서 열린 여름철올림픽경기대회 마라손경기에서 1등을 한 손기정과 같은 해 에스빠냐의 마드리드에서 열린 세계무용콩클에서 단연 1등을 한 최승희를 조선민족의 명성을 떨친 장한 아들딸로 내세워주면서 그들을 한자리에 앉히고 사진을 찍어준 사실이였다.

 

최승희는 그때 겨레의 기대를 잊지 말고 계속 민족의 아들딸답게 투쟁하기를 바라는 려운형의 말없는 당부를 가슴에 새겨안았었다.

 

그렇게 알게 된 려운형이였으나 지금은 한개 당의 권위있는 당수라는 관념으로 하여 망설이고 주저하다가 찾아가 만났는데 그는 매우 반가워하며 최승희의 고민을 기꺼이 들어주고 주저없이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의 품을 찾아 공화국북반부로 들어가야 한다고 뜨겁게 말해주는것이였다.

 

그러면서 해방이 되였으나 미제에 의해 강요된 민족분렬의 비극에 대하여, 각이한 경로와 방법으로 북으로 간 인사들과 재사들에 대하여 이야기해주면서 자기가 어떻게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뵙고 어떤 가르침을 받아안았는가를 사심없는 그리움과 흠모의 정을 담아 말해주는것이였다.

 

사실 최승희도 해방전 민족의 태양으로 칭송받고계시는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에 대하여 많이 들었고 또 그이께서 이끄시는 항일무장투쟁내용을 무용작품에 담기 위해 노력도 많이 했었다.

 

《태양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해방을 구하는 사람들》, 《폭풍우를 뚫고》, 《녀성이여, 강하다》, 《미래는 청년의것이다》 등과 같은 무용들이 다 그러한 취지에서 창작된 작품들이였다.

 

최승희는 망설이지 않을수 없었다.

 

서울을 떠나자니 오빠를 비롯한 가족, 친척과 친우들이 속에 걸렸고 그냥 있자니 식민지화된 살벌하고 파쑈적인 폭정이 증오스러웠다.

 

북으로 끌리는 마음은 강렬했으나 그곳은 아무런 인연도 없는 생면부지의 고장이여서 선뜻 걸음을 뗄수도 없었다.

 

어떻게 할것인가?

 

최승희는 해방전 무엇을 할것인가를 선택해야 할 때처럼 어디에 삶의 좌표를 정해야 할지 심각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모대기지 않을수 없었다.

 

이러한 때인 1946년 7월의 무더운 어느날 낯모를 사람이 최승희를 찾아왔다.

 

그는 뜻밖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 최승희에게 보내시는 편지를 가져왔다는것이였다.

 

(김일성장군님께서? 나에게 편지를?)

 

쉽사리 믿을수 없는 놀라운 사실앞에서 최승희의 몸은 흥분으로 떨리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편지에 최승희가 지난날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의 넋과 절개를 지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춤가락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여 조선민족무용발전의 기초를 마련하고 세계앞에 시위한데 대해 잘 알고있다고, 하루빨리 북반부로 들어와 민주주의민족문화건설에 참가하여 지난날 그처럼 소망하던 민족무용을 우리 인민의 지향과 요구에 맞게 더욱 발전시켜나가는데 적극 기여하기를 기대한다고 쓰시였다.

 

최승희는 뜨거운 사랑과 신임이 어린 편지를 가슴에 그러안고 뜨거움에 젖은 목소리로 웨쳤다.

 

《고맙습니다. 김일성장군님! 기어이 장군님품으로 가겠습니다.》

 

최승희는 서둘러 출발준비를 끝내고 일행과 함께 마포를 거쳐 인천에서 배에 올랐다.

 

바다의 밤이 지새고 낮이 기울어지기 시작할무렵 남포앞바다에 이른 최승희의 가슴은 이름 못할 흥분으로 파도처럼 뒤설레이였다.

 

항구에 와닿은 최승희는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마중나와있었기에 깜짝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밀선으로 들어온 자기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맞아주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것이다.

 

한 일군으로부터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말씀이 계시여 마중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최승희는 감격에 목이 꽉 메였고 지난날의 눈물겨운 생활의 자욱자욱이 어려와 눈물을 감출수 없었다. 동시에 자기가 선택한 길이 인생의 보람과 행복이 약속된 길이라는 확신에 가슴은 터질듯 들먹이였다.

 

최승희가 더더욱 감격의 눈물을 머금은것은 그가 평양에 들어와 《최승희무용연구소》라고 쓴 현판을 정면에 내건 어느 한 건물에 이르렀을 때였다.

 

건국사업으로 어디서나 건물이 긴절히 요구되였던 때였지만 이 큰 건물을 최승희무용연구소로 리용하도록 배려하여주신 위대한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이야기에 접하고 그는 끝내 오열을 터뜨리고야말았다.

 

최승희로서는 감히 상상할수도 없었던 사랑과 믿음의 세계가 꿈아닌 현실로 펼쳐진것이였다.

 

학생들이 기숙할 방들이 아래층에 아담히 갖추어져있고 2층에는 사무실, 응접실, 3층에 꾸려진 넓은 훈련장…

 

거기에 가구와 부엌세간까지 일식으로 갖추어져있고 독마다 흰쌀이 가득가득한 아담한 살림집까지 받아안았을 때 최승희의 감격은 최절정에 이르렀다.

 

과연 지난날 자기를 그 누가 이렇듯 진정한 사랑, 친부모를 초월하는 따뜻한 품에 안아주었던가. 의지하고싶어 붙잡고보면 권력과 황금의 리용물로 속이려고만 들었고 정들이자고보면 위선과 야욕의 롱락물로 꺾으려고만 날치는 그런 세상이였다. 그속을 헤치며 이를 악물고 살아온 최승희는 진정 모든것을 맡기고 민족무용의 나래를 마음껏 펴볼수 있는 어버이의 품에 안겼다는 희열에 울고웃었다.

 

하기에 그는 펜을 들어 한자한자 정성담아 자기의 느낌을 적었는데 그 글이 1946년 8월 7일부 신문 《정로》에 그대로 실리였다.

 

《우리 민족의 영웅 김일성장군님의 령도밑에서 우렁차게 전진하는 북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건설의 위대한 성과를 볼 때 북조선에서 적은 힘이나마 예술활동에 참가하게 된것을 행복으로 생각한다.…》

 

최승희는 1946년 8월 4일 한생에 있어서 가장 큰 영광의 시각을 맞이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나라일에 그처럼 바쁘신 가운데서도 그가 사업하고있는 무용연구소를 몸소 찾아주시였던것이다.

 

최승희는 꿈같은 현실앞에 솟구치는 격정을 이기지 못하며 엎어질듯 달려가 그이께 허리굽혀 정중히 인사를 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인사를 받아주시고 건강에 대하여 물어주시면서 앓지 말아야 민주주의민족문화건설에 적극 이바지할수 있다고 말씀해주시였다.

 

방안에 들어와 앉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뜻깊은 미소를 지으시며 물으시였다.

 

《그래 이번에 평양에 구경하려 왔습니까, 아니면 완전히 왔습니까?》

 

이 물으심에 최승희는 진정을 담아 말씀올리였다.

 

《장군님의 손길아래 마음껏 민족무용을 하고싶어 왔습니다. 그래서 온 가족이 이렇게 다 왔습니다.》

 

그의 이 대답을 들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호탕하게 웃으시며 민족의 얼을 지닌 최승희선생다운 결단이라고 격려해주시면서 그가 악독한 일제의 통치하에서도 민족무용의 기초를 마련하였다고 못내 대견해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지금까지 해오던 조선민족무용의 기초를 마련하는 사업을 계속하여 완성해나갈데 대해서와 무용가후비를 전망성있게 양성하는 사업을 잘할데 대하여 그 방도에 이르기까지 세세히 가르쳐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최승희에 대한 믿음을 담아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씀으로 뜨겁게 격려하여주시였다.

 

우리의 무용예술을 믿음직하게 떠메고나갈 무용가후비를 양성하는 사업을 전망성있게 해나가야 합니다.

 

유능한 무용가들을 많이 키워 그들이 인민이 좋아하는 민족무용의 춤동작에 기초하여 우수한 무용작품들을 수많이 창작공연하게 되면 우리의 무용예술은 더욱 찬란히 발전하게 될것이며 민주주의민족문화도 그만큼 개화발전하게 될것입니다.

 

나는 선생이 반동파들의 온갖 회유와 책동을 대담하게 박차고 진정한 인민의 품에 안긴것만큼 우리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일을 잘하리라고 믿습니다.

 

 

최승희는 감격에 겨워 어버이수령님을 우러러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쳐 일하겠다고 굳게 결의를 다지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의 결심을 매우 귀중히 여겨주시면서 애로되는것들과 필요되는것들에 대해 차근차근 물어주시고 그가 요구하는 모든 자재와 조건을 다 보장해주시겠다고, 앞으로 무용연구소사업과 관련한 문제가 제기되면 아무때나 찾아와 함께 토론하고 대책을 세우자고, 힘을 합쳐 우리의 우수한 무용예술을 온 세상에 널리 시위하자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최승희는 어버이수령님의 그 고매한 덕망과 뜨거운 사랑에 감격하여 《장군님, 어버이장군님품에 안기니 만시름이 놓이고 어떤 어려움도 다 극복할수 있습니다.》 하고 거듭거듭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또 드리였다.

 

그후 최승희는 어버이수령님앞에 다진 결의를 실천하는 길에서 자기의 정력과 재능을 다 발휘하였다.

 

그는 무용연구소 교원들과 학생들에게 종종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뵈옵던 그날의 감격을 자주 이야기하여주면서 자기의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군 하였다.

 

그는 지난날 자기가 세계의 수많은 나라들을 돌아다니면서 직접 창작한 무용을 공연할 때 적지 않은 고위인물들을 만났었는데 그들은 누구나 다 자기를 특이한 춤을 추는 매력있는 무용수로 보았을뿐 침략자에게 짓밟힌 조국, 망국의 설음에 우는 우리 인민의 원한을 절절하게 호소하려고 나선 자기의 마음속지향을 리해하려고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그들에게 있어서 무용은 예술이 아니라 한갖 구경거리에 불과한것이였다고 눈물에 젖어 이야기하여주군 하였다.

 

그의 이 고백은 진실한것이였고 민족무용의 앞날을 스스로 걸머진 의무감으로부터 오는 책임감의 발현이기도 하였다.

 

하기에 최승희는 어버이수령님으로부터 받아안은 크나큰 신임과 은정에 보답하기 위해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하였다.

 

민족의 넋을 무용에 담아보려고 세계를 편답하면서도 자기가 깃들 운명의 포구를 발견하지 못해 몸부림하던 최승희는 드디여 어버이수령 김일성장군님의 품을 자기 한생을 깃들일 보금자리로 정하였다.

 

이것은 정녕 최승희가 민족의 추억속에 영원히 살수 있게 한 진리의 길이였으며 참선택이였다.

 

 

우리 장단, 우리 춤가락으로

 

최승희의 무용예술활동과 교육에 있어서 새로운 출발점은 1946년 9월에 진행된 무용연구소창립행사를 위한 무용작품준비와 공연을 계기로 하여 마련되였다.

 

그는 학생들에 대한 무용교육을 정력적으로 진행하는 한편 무용 《김일성장군님께 올리는 헌무》를 준비하고있었는데 민족의 태양, 전설적영웅을 칭송하는 춤가락과 률동은 어떤것이여야 하겠는지, 또 그것을 어떤 장단에 태워야 좋겠는지 몰라 모대기고있었다.

 

바로 그러한 때인 1946년 9월초에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께서 무용연구소를 찾아주시였다.

 

어머님께서는 최승희의 건강과 학생들의 학업에 대하여 일일이 물어주시고 어버이수령님께서 연구소운영을 위해 30만원이라는 거액의 자금을 보내주신데 대하여 이야기하여주시였다.

 

갓 해방된 조국을 일떠세우던 당시의 어려운 조건에서 그것이 얼마나 크고 귀한 돈인가를 잘 알고있는 최승희는 너무도 감격하여 어쩔줄을 몰라하였다.

 

그는 백두의 녀장군이신 그이께 자기들이 준비하고있는 《김일성장군님께 올리는 헌무》의 구성과 내용을 일일이 말씀드리고 가르치심을 주실것을 거듭거듭 간절히 청드리였다.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처음에는 무용을 잘 모른다고, 여러분들의 의견을 들어보자고 겸손하게 사양하시다가 너무도 간절한 그들의 청을 들으시고는 웃음을 지으시며 말씀하시였다.

 

우리 장군님께서는 인민을 믿고 사랑하시기때문에 늘 인민들속에 계신다고, 그래서 우리 인민들은 오직 한마음 장군님만을 우러러 운명도 미래도 다 맡기고 따른다고, 내 나라의 이러한 생활, 이러한 지향과 뜻을 화폭으로 펼치자면 지금의 구성안은 어딘가 선이 가늘고 격조가 낮아보이는데 이것을 극복하자면 혼자 추는 춤에 여러명이 어울리면서 받쳐주면 어떻겠는가고 말씀하시였다.

 

최승희는 녀사의 그 말씀에 접하자 대번에 눈앞이 환해지는것을 느끼였다. 자기 고충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발견하였던것이다.

 

독무형식의 무용창작에만 몰두하다보니 헌무의 사상주제적내용을 훌륭히 보여줄수 있는 군무형식의 폭넓은 형상에 대해서는 미처 주의를 돌리지 못하였던것이다.

 

이날 김정숙어머님께서는 또한 최승희에게 무용의 앞부분에 헌시를 넣는것이 좋겠다는 새로운 방도도 내놓으시였는데 이것은 최승희로서는 상상조차 할수 없었던 헌무형식의 작품에 필수적인 새로운 발견이였다.

 

이러한 가르치심속에서 최승희는 무용창작에서 자기의 부족점이 무엇인가를 깊이 깨달았고 독무를 군무로 바꾸고 앞에 헌시를 넣으면서 송가무용창작에 박차를 가하였다.

 

드디여 무용연구소창립기념공연이 막을 올려 1946년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15일부터 19일까지 11일간 낮과 밤 2회씩 진행하였다.

 

첫 공연의 막을 올린 10월 5일 최승희와 무용연구소는 또다시 크나큰 영광을 맞이하였다.

어버이수령님과 김정숙어머님께서 공연을 보아주시였던것이다.

 

막이 열리면서 영생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의 관현악반주가 장중하게 흐르는 가운데 한 학생이 헌시를 랑송하였다.

 

 

구만리 장천 높다한들

천첩 암흑이 가로막고

살륙과 공포 으르렁대고

기아와 살륙이 아우성치던 날

 

죄없는 민족의 아들딸들

끝없는 고난의 길 헤매이고

정의를 찾던 전사의 붉은 피

넓은 대지를 물들이던 날

 

광명은 영원히 이 강토를

버린것 같았고

원쑤는 영원히 이 강토를

지배하리라 호언하던 날

 

우리 인민은 죽지 않고

조국은 정복되지 않았나니

절세의 애국자 김일성장군님

항일의 혈전만리 넘고 헤치시며

조국해방의 새봄 안아왔나니

 

아, 영광을 드립니다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께

인민은 다함없는 축원의 마음담아

감사의 노래 삼가 드리옵니다

 

 

시랑송이 끝나는것과 동시에 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 후렴반주에 맞추어 최승희가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한없이 경건한 마음을 안고 무대중심에 나와서고 이어 흰 치마저고리에 붉은 수건을 목에 걸고 두손에 진달래꽃을 든 여러명의 무용수들이 좌우에서 사선으로 주인공을 향해 달려나왔다.

 

이렇게 시작된 작품은 항일의 혈전만리를 헤치시며 조국을 찾아주신 어버이수령님의 업적과 혁명선렬들의 투쟁모습을 보여주는것과 함께 해방을 맞이한 인민들의 기쁨과 감격도 잘 펼쳐보임으로써 관중들의 대절찬을 받았다.

 

조국해방을 위한 투쟁과 해방된 현실의 감격을 보여준 거창한 화폭을 우리 민족의 독특한 무용예술적기법으로 펼쳐놓을 때마다 관중들은 장내가 떠나갈듯 박수갈채를 보냈다.

 

무대에는 《장고춤》, 《고구려의 무희》 등 최승희가 발굴정리한 민속무용들도 올랐고 조선민족무용의 기본동작들과 신흥무용기본, 남방무용기본동작들도 펼쳐졌다.

 

공연관람이 끝나자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연구소가 사업을 시작한지 한달밖에 안되는데 공연준비를 잘했다고 치하하시고나서 우리 민족무용동작들을 더 발전시킬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이의 이 가르치심을 심장에 새기며 최승희는 자신의 무용연구와 공연의 부족점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심심히 돌이켜보게 되였다.

 

더구나 1946년 10월 13일 어버이수령님께서 최승희에게 우리 나라 무용예술의 전반사업을 맡아보는 조선무용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의 중책을 맡겨주시자 최승희는 조국과 민족앞에 지닌 자기의 사명감을 두고, 더우기 자기에 대한 어버이수령님의 높으신 기대와 신임을 두고 온몸을 휩싸는 감격과 함께 어깨가 무거워지는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조선민족무용을 발전시킬데 대한 김일성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우리의 무용을 세계에 빛을 뿌리게 해야 한다는 자각이 그의 가슴에 더더욱 든든히 자리잡게 되였다.

 

최승희는 무용가동맹위원장의 첫 사업으로 어버이수령님께서 깊이 관심하여 무어주신 봉산탈춤보존회를 잘 운영하기 위한 사업에 착수하여 그것의 민족적특성을 살리면서도 현대적미감에 맞게 좋은것을 찾아 발전시킴으로써 봉산탈춤정리와 공연에 대하여 주신 어버이수령님의 가르치심을 훌륭히 관철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최승희를 1946년 11월에 진행된 첫 민주선거에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위원으로, 1947년에는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으로, 1948년 8월에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내세워주시였다.

 

이것은 식민지민족의 예술인으로 눈물속에 몸부림하며 물우에 뜬 부평초처럼 곡절많은 인생길을 방황하던 최승희에게 있어서 생각조차 할수 없었던 영광의 상상봉이였다.

 

해방후 김정숙어머님께서는 무용연구소를 5차례나 찾아주시였다. 이 나날에 어머님께서는 최승희를 고무격려해주시였으며 그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거되였을 때에는 몹시 기뻐하시면서 나라의 정사를 의논하는 인민주권기관의 당당한 일군으로 된 영예와 책임감을 언제나 명심하고 모든 사업에서 더 큰 성과를 거두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최승희는 어버이수령님과 김정숙어머님의 당부를 언제나 잊지 않고 우리 인민이 좋아하는 춤, 혁명과 건설에 일떠선 인민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무용작품창작에 전심전력하였다.

 

그리하여 《농악무》, 《칼춤》, 《봄타령》, 《풍년맞이》 등을 잘 만들어 무대에 올리여 어버이수령님께 커다란 만족을 드릴수 있었고 항상 도식주의를 반대하는 끝없는 고심과 탐구를 기울여 새로운 형식의 무용작품을 창작해내군 하였다.

 

최승희가 보다 새로운 우리의 민족무용창작에서 주되는 힘을 기울인것은 우리 민족장단을 살려 작품전반을 형상하면서 속도를 당기거나 타악기(특히 장고)의 장단으로 절정을 이루군 하여 말그대로 우리 민족의 향취가 철철 넘쳐흐르도록 한것이였다.

 

이것은 어버이수령님께서 최승희에게 가르쳐주신 우리 무용이 나갈 길이였고 바로 그 길에서 최승희가 이룩한 귀중한 성과였다.

 

어버이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들어 우리의 민족무용을 발전시키기 위한 최승희의 노력은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판가리하던 준엄한 조국해방전쟁시기에도 그칠줄 몰랐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승리한 조국의 래일을 내다보시고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순안군 석암리에 소개시켜주시고 다시 중국 베이징으로 들여보내시여 우리 무용발전과 중국무용발전에 다같이 이바지하도록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하여 중국국무원 곽말약부총리는 자기의 글에서 《최승희와 그의 동지들은 중국예술전선으로 달려온 조선인민지원군이라고 할수 있다. 그가 지도해준 우리 중국무용가들의 공연은 중조인민의 영광스러운 전선을 더욱 강화하고 항미원조애국주의운동에 떨쳐나선 중국인민을 크게 고무하였다.》라고 썼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문학예술인들과 하신 담화 《우리의 예술은 전쟁승리를 앞당기는데 이바지하여야 한다》에서 제시하신 과업을 높이 받들고 최승희는 무용극 《조선의 어머니》를 창작하였다.

 

작품은 원쑤놈들에게 자식을 빼앗긴 어머니의 슬픔과 울분, 증오와 복수의 감정을 무용언어로 훌륭히 형상한것으로 하여 싸우는 조선인민의 불굴의 기상과 영웅적투쟁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무용극의 줄거리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작품의 첫부분에서 적들에게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복수심으로 가슴을 불태우며 적진속에 뛰여들어 수류탄으로 놈들의 병영을 까부시는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머니는 적들에게 체포되여 처참한 고문과 협박을 당한다. 빨찌산의 행처를 대라는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굴하지 않고 적들과 대결한다.

 

놈들이 어머니를 사형장으로 끌어내갈 때 노도와 같이 진격하던 인민군대가 어머니를 구원하고 적들을 모조리 소탕해버린다.

 

작품의 주인공인 어머니역을 맡은 최승희는 완벽한 연기로 첫 공연부터 관중들의 심장을 틀어잡았다.

 

작품을 보고 감동된 인민군용사들은 멸적의 기세를 더욱 가다듬었고 장내에서는 미제를 단죄하는 구호가 우렁차게 울려나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최승희의 이러한 성과를 높이 평가하시면서 그와 그가 양성한 청년배우들을 1951년 제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도록 하여주시였고 1953년 8월 로므니아의 수도 부꾸레슈띠에서 진행되게 될 제4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도 나갈 준비를 잘할데 대한 대책을 취해주시였다.

 

최승희는 《농악무》, 《북춤》, 《물동이춤》, 《시내가에서》, 《장검무》와 같은 민족성이 짙고 아름다우며 힘있는 민족무용작품들을 가지고 축전에 참가하였다.

 

최승희네 일행은 로므니아로 가던중 씨비리의 광활한 대지를 달리는 렬차칸에서 전승의 소식을 듣고 울고웃으며 만세를 불렀다.

 

최승희와 예술인들은 종목마다에서 영웅적조선인민의 기상을 높은 예술적기교로 남김없이 보여줌으로써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독무 《장검무》는 축전의 특등상을 수여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어버이수령님의 높은 신임과 끝없는 사랑속에서 펼쳐온 최승희의 무용세계를 돌이켜볼 때 스쳐지날수 없는 작품은 《사도성의 이야기》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55년 8월 14일 조국해방 10돐경축공연무대에 올린 이 작품을 몸소 보아주시고 지도하여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주인공 금이가 녀자의 몸으로 왜적을 물리치기 위한 결전장에 탄원하여나선 장면에서 제일먼저 박수를 보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이 작품이 이룩한 성과에 만족을 표시하시면서 무용극 《사도성의 이야기》는 왜적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켜싸운 선조들의 슬기와 용맹을 잘 보여주었다고, 그들의 애국주의정신을 잘 반영하였다고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책상우에 놓여있는 무용극대본을 가리키시면서 우렁우렁하신 음성으로 다른 나라 사람들도 우리의 무용극을 보면 높이 평가할것이라고, 다른 나라에서는 민족무용으로 된 무용극을 만들지 못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창작하였다고, 이 무용극을 보면 우리 나라 민족무용이 얼마나 훌륭한가를 잘 알수 있다고 대단히 기뻐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1955년 12월 21일에도 이 무용극을 다시 보시고 이 작품을 두번째로 보았는데 내용이 좋다고 하시면서 이 작품을 영화로 찍어 보존할데 대하여 이르시였으며 영화가 나왔을 때에는 제일먼저 보아주시고 잘 되였다고 평가해주시였다.

 

최승희는 《사도성의 이야기》를 창작공연한 후 무용극 《맑은 하늘아래》와 《계월향》을 만들어 또다시 우리 나라 민족무용의 수준을 한단계 더 올려세웠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이 작품들뿐아니라 그가 제자들과 더불어 창조공연한 무용조곡 《평화의 노래》와 음악무용서사시 《영광스러운 우리 조국》을 다 보아주시고 수정방향을 주시였으며 그들이 거둔 성과를 두고 못내 기뻐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이렇게 보아주시고 지도하여주신 최승희의 무용작품은 수십편이나 되며 그 과정에 최승희는 우리 민족, 우리 인민이 요구하는 우리 식의 민족장단을 타고 흐르는 주체가 선 무용을 창작하는 무용예술인으로 성장할수 있었다.

 

그는 우리의 민족무용을 종합체계화한 도서 《조선민족무용기본》(1, 2)을 집필하여 내놓음으로써 어버이수령님께 기쁨을 드리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57년 10월 29일 그의 피타는 노력과 탐구가 깃든 이 도서를 보시면서 무용극장 총장으로 일하고있던 최승희의 설명도 들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책장을 번지시던 손을 멈추시고 최승희를 매우 대견한 시선으로 바라보시면서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정말 대단합니다. 총장동무가 우리 인민의 자랑할만 한 훌륭한 국보를 마련하였습니다. 세상에 나라도 많고 민족도 많지만 자기의 무용기본을 가지고있는 나라나 민족은 별로 없을것입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최승희가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책동에 도전하여 유구한 우리 민족무용을 발굴하고 체계화하기 위해 조국의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면서 예로부터 내려오던 춤가락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여 정리하고 그것을 가지고 현대민족무용의 기초를 쌓았다고, 참으로 수고가 많았다고 치하하시면서 말씀을 이으시였다.

 

《총장동무의 설명을 들으면서 책을 보니 더 잘 리해됩니다. 민족무용의 기초동작들과 함께 부채춤, 칼춤, 탈춤, 장고춤, 북춤의 기본동작을 비롯한 우리 인민들이 즐겨 추던 춤종류의 기본동작들과 매 춤에 대한 반주곡들을 다 기록하였는데 정말 이 책에 바쳐진 총장동무의 심혈과 피타는 노력이 그대로 안겨옵니다.》

 

이처럼 위대한 수령님께 기쁨을 드린 최승희는 그후 련이어 《조선아동무용기본》(1, 2)도 집필하였고 《무용극대본집》과 《무용극원본강좌》를 비롯한 도서들과 수많은 론문들도 집필하여 신문과 잡지들에 소개함으로써 우리 나라 무용예술발전을 위한 사업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와 같이 최승희는 우리 장단, 우리 춤가락으로 수령을 받들어온, 우리 나라 무용예술사에 특출한 공적을 남긴 예술인이였고 문필가이기도 하였다.

 

 

 

최승희의 무용은 오늘도 계속되고있다

 

우리 민족무용예술의 기초를 튼튼히 닦아놓았을뿐아니라 무용후비육성에서도 많은 경험을 남긴 최승희는 세계적인 무용가로서 널리 이름을 떨치다가 1969년 8월에 우리곁을 떠나갔다.

 

어버이수령님께서와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가 세상을 떠난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무용예술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마다 최승희를 감회깊이 회고하군 하시였다.

 

그리고 그의 생을 더 아름답게 빛내주시려고 여러모로 마음을 써오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최승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시였다.

 

《1920년대와 1930년대는 왜색왜풍의 탁류속에서 시들어가는 민족성을 고수하고 민족적인것을 발전시키려는 강렬한 모대김이 문학예술의 여러 분야에서 분수처럼 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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