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연재】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4)
《인터나쇼날》의 노래소리를
들을 때마다
김 병 식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령도하신 항일무장투쟁시기 1939년 겨울부터 40년 봄에 걸쳐 다섯달나마 나는 안도현 홍석라자의 밀림속에서 환자들을 간호하고있었다.
환자는 모두 5명이였는데 그들은 중대정치지도원을 비롯하여 대부분이 허약한 환자들이였고 관통상을 입은 동무도 한명 있었다.
이밖에 우리들속에는 책임자인 왕령감과 간호원 겸 식사를 담당한 김숙자라는 18살난 녀대원이 있었고 나와 동갑인 16살나는 꽝재동무가 있었다.
부대는 원정을 떠나면서 두달후에 련락을 보내주기로 하였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약속한 두달이 지나고 다시 석달이 지나 양지쪽에 덮인 눈이 녹기 시작하는 이른 봄이 되여도 부대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그간 환자들의 상처는 점차 회복되여갔다. 그러나 식량이 이미 떨어진지 오래였다. 우리들은 풀죽으로 겨우 끼니를 이어나갔다. 마지막시기에는 누가 환자인지 모를 정도로 우리 간호하는 사람들도 몹시 수척해졌다.
부대와의 련계가 오래동안 끊어진 나머지 우리들은 가끔 침울한 기분에 휩싸이는 때도 있었으나 숙자동무만은 항상 명랑한 기분으로 환자들을 돌보았고 《인터나쇼날》의 노래를 즐겨불렀다.
우리들은 언제 들으나 새 힘이 솟는 그 노래를 사랑하였으며 그가 부르는 노래를 따라 함께 부르군 하였다.
그리나 우리들은 몹시 초조한 가운데 이제나저제나하고 부대에서 련락이 오기를 기다리고있었다.
(아주 련계가 끊어진것이나 아닐가. 아니다, 그럴수 없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련락원을 보내지 못하고있을것이다. 부대에서는 우리들이상으로 우리를 생각하고있으며 반드시 련계의 손길을 보내줄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굳은 신념을 한시도 버리지 않았다. 그렇게도 애타게 고대하던 련락원이 나타난것은 몇달후였다. 부대와 련계를 가지게 된 우리들의 기쁨은 한량없이 컸다.
우리는 곧 출발준비를 서둘렀다. 련락에 의하면 전 부대는 화전현 송화강부근에 있는 밀영에 집결했다가 다시 다른 밀영으로 근거지를 옮기게 되는것만큼 제때에 목적지까지 도착하기 위해서는 빨리 떠나야 했던것이다.
그러나 아직 상처가 채 낫지 못한 환자가 두 사람이나 있었다. 그들을 간호하면서 길도 없는 험한 준령을 넘어 수백리의 로정을 행군해야 하는 우리들의 앞길에는 많은 난관이 있을것이였다.
간호하는 우리들이 경험이 없고 나이 어린 신입대원인만큼 더욱 그러했다.
우리의 행군은 굼뜨기 짝이 없었다. 첫날에는 겨우 30리밖에 못가고 숙영하였다. 이튿날에도 그럭저럭 30리가깝게 행군했으나 벌써 사흘째부터는 25리로 줄어들었고 닷새째되는 날에는 하루에 20리도 채우지 못했다.
한주일이 채 못되여 정치지도원동무의 상처입은 다리가 도로 팅팅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아직 채 낫지 못한 2명의 환자도 우리의 부축을 받으면서 이악하게 이를 악물고 따라오고있었으나 매우 힘에 겨워하였다.
우리는 할수없이 사흘에 반나절, 닷새에 하루씩 쉬여가지 않을수 없었다.
나중에는 하루에 겨우 십리밖에 못가는적도 있었다.
우리들 성한 사람들도 환자의 짐을 건사하고 그들을 돌보며 행군했기때문에 지칠대로 지쳐서 자기 몸도 가누기 힘들었다.
행군을 시작한지 20일가량 되여서야 우리들은 겨우 예정한 로정의 절반길을 왔다. 환자들은 계속 뒤에 떨어졌다.
벼랑밑에 굴러떨어져서 다시 기여오르다가 쓰러진채 운신을 못하는 때도 있었다. 어느 하루였다. 내앞에서 다리를 절며 간신히 걸어가던 정치지도원동무가 돌부리에 부딪쳐 그만 옆으로 넘어지면서 아차하는 사이에 벼랑밑으로 굴러떨어졌다.
나는 급히 그의 뒤를 따라 벼랑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내 뒤로 왕령감도 내려왔다.
왕령감과 나는 넘어진채 일어설념도 못하고 신음하는 정치지도원동무를 부축하여 일으켰다.
그는 아픔을 참느라고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다리에서는 상처가 터져 피가 흐르고있었다.
다른 환자들도 그 자리에 푹푹 주저앉고말았다.
우리들은 이날 행군을 부득불 중지하고 우등불을 피웠다. 저녁식사를 끝마치기가 바쁘게 모두 꼼짝 않고 잠들고말았다. 나도 그만 어느 사이에 잠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나는 내옆에서 도란도란 들리는 이야기소리에 어렴풋이 눈을 떴다.
《이렇게 늦어지다간 안되겠소. 만약 부대가 옳겨갔으면 어떻게 하겠소?
그러니 성한 사람만이라도 먼저 가는게 좋을것 같소. 걷지 못하는 우리들은 천천히 뒤따라가지요. 그렇게 합시다.》
이렇게 말하는 정치지도원의 음성에는 지체되는 행군을 무척 안타까와하는 심정이 깃들어있었다.
그러나 뒤를 이어 느리고 탁한 왕령감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런 근심은 아예 안하는게 좋겠소. 부대가 옮겨가더라도 련락을 취할 조치를 취했을게 아니요? 그래선 안되오. 다른 동무들이 그러더라도 말려야 할 처진데 왜 자꾸 그러오?》
두 사람사이에는 잠시 말이 없었다.
무거운 침묵에 잠겨있는 그들을 생각하며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것을 금할수가 없었다. 지체되는 행군을 념려해서 떨어지려는 정치지도원동무나 부상당한 동지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함께 데리고가려는 왕령감의 갸륵한 심정들이 자꾸만 나의 심금을 울리는것이였다.
고된 행군은 또다시 계속되였다. 이것은 그야말로 피어린 투쟁이였다. 한 사람이 넘어지면 모두 붙어서 부축하고 부축할 힘이 없으면 함께 의지하며 걸어갔다.
다시 열흘이 지나 우리들은 험준한 산길에 접어들게 되였다. 이 길은 30리를 올라가야 하고 20리를 내려가야 하는 가파른 고개였다.
골짜기를 굽이쳐흐르는 시내물을 건너가고 도로 건너와야 하는 험한 벼랑길을 짐을 지고 오르기란 성한 사람도 힘에 겨운 일이였다. 그런데 한달이 넘는 고된 행군에 지칠대로 지친 우리들이 환자까지 부축하며 가자니 얼마 못가서 맥이 진하고말았다. 목에서는 단내가 오르고 숨이 차서 발을 뗄수가 없었다. 우리들은 얼마쯤 먼저 올라가서 짐을 벗어놓고 도로 내려와 환자들을 업고서 산길을 기다싶이 올라가군 하였다. 그러나 단 5Om도 올라가지 못하고 환자를 업은채 주저앉는것이 일쑤였다.
점심무렵이 다되였지만 우리들은 이날 겨우 5리밖에 올라가지 못했다. 이래가지고서는 사흘이 걸려도 산등성이에 올라설것 같지 않았다.
울창한 밀림속에서 점심식사를 마치자 우리 성한 사람들은 모여앉아 오후에는 한 5리쯤 먼저 짐을 져다놓고 돌아와서 환자들을 데려가는것이 좋겠다는 의논을 하고있었다.
토의가 막 끝난 때였다.
《동무들.》 하고 무릎을 상한 동무가 앞으로 다가앉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내였다.
우리는 심상치 않은 그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왜 그러오.》
《내 다리로써는 이 이상 더 행군할수가 없소. 우리 부상자들은 여기 남아서 며칠 안정했다가 뒤따라가게 해주십시오.》
《아니 , 임자가 그게 무슨 말인가.》하며 왕령감이 먼저 그를 찬찬히 쳐다보며 말을 받았다.
《…나도 이런 말을 입밖에 내고싶지는 않았소. 그렇지만 동무들이 우리때문에 너무 고생하는걸 생각하면 … 더는 참을래야 참을수가…》하고 그는 말끝을 채 맺지 못하였다. 그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뜨거운 눈물이 쏟아질것만 같았다.
그 말이 얼마나 간절하게 울렸던지 둘러앉은 대원들은 마치 납덩이에 눌린듯 무거운 마음으로 아무 말 없었다.
《동무.》
마침 그의 옆에 앉았던 정치지도원동무가 그의 두손을 잡았다.
나는 얼마전에 있은 일을 회상하고 그도 역시 같은 의견을 내놓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한참만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예상과는 아주 딴 말이였다. 1
《동무, 그 심정은 내나 동무나 마찬가지요. 그러나 그건 약한 생각이요. 곤난앞에서 물러서지 맙시다. 우리는 가야 하오. 부대는 지금 우리가 도착하기를 애타게 기다리고있소.》
이렇게 말하는 그의 음성은 떨리고있었다.
이때 귀에 익은 《인터나쇼날》의 노래소리가 저쪽에서 들려왔다. 시내가에 물을 뜨러갔던 숙자동무가 돌아오면서 부르는 노래였다.
…
일어나라 저주로 인 맞은
주리고 종된 자 세계
…
하느님도 임금도 영웅도
우리를 구제 못하리
우리는 다만 제 손으로
해방을 가져오리라
항상 듣고 또 부르는 노래였지만 이때처럼 이 노래가 나의 마음을 격동시킨적은 없었다.
나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노래를 따라불렀다. 나뿐만아니라 왕령감도, 정치지도원도 그리고 환자들도 모두 따라불렀다.
그 노래소리로 하여 우리들의 팔다리에서는 새힘이 용솟는것이였다.
우리는 새로 행장을 꾸리고 노래를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자들도 지팽이를 짚고 한걸음두걸음 힘주어 발길을 옮겨디뎠다.
이튿날 저녁 우리는 드디여 산등성이에 올라설수 있었다.
우리는 땀을 들일 생각도 못하고 오래도록 환성을 올리였다. 그렇게도 목마르게 그리던 우리의 밀영이 있는 산발이 눈앞에 바라보였던것이다. 그쪽으로는 동지들이 부르는 손길인듯 송화강 푸른줄기가 해빛에 번쩍이며 유유히 흐르고있었다.
우리는 한량없는 기쁨으로 하여 쉬지도 않고 밀영이 있는 곳을 방향잡아 다시금 발걸음을 옮겨디뎠다.
그리고 마침내는 우리를 맞으러 달려나온 동무들의 품에 안길수 있었다.
《인터나쇼날》의 노래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감개무량한 지난 생활의 이 한때를 생각하게 되며 그렇듯 어려운 환경속에서 그 어느 한 사람이라도 뒤떨어질세라 서로 돕고 서로 앞장서며 만난을 이겨나가던 왕령감을 비롯한 여러 동지들의 모습을 가슴뜨겁게 그려보게 된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 충직한 혁명전사들이였던 그들의 이 고귀한 정신은 오늘 사회주의건설에 떨쳐나선 천리마기수들의 영웅적기상에서 력력히 구현되고 있다.
뜨거운 동지의 사랑으로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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