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낳은 세계적 바이올린 연주가 백고산
리준무(우륵교향악단 지휘자)
교향악단에서 같이 일하였던 음악대학때의 친구가 ‘기막히게 감동을 주는 음악’이니 한번 들어보라고 하며 녹음파일 하나를 보내어 왔다. 백고산이 작곡하고 자신이 직접 연주한 CD파일이였다. 우리민족의 한을 감동적으로 풀어내는 그야말로 기가막힌 작품이었다. 이렇게 훌륭한 인재를 길러내는 데에는 국가의 꾸준하고 세심한 배려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이 세계적으로 명성을 크게 떨친 바이올린 연주가가 누구일 것 같으냐고 물어본다면, 사람들은 주저하지 않고 정경화나 장영주가 아니겠냐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조선에는 일찍부터 천재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던 세계적인 바이올린연주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필자는 1990년 평양에서 열렸던 범민족통일음악회에서 조선의 최고 음악가 백고산선생을 만나볼 기회가 있었다.
한국사람들 중 백고산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지 몰라도 선생은 이미 그의 나이 여섯 살 때에 천재적 소질과 기량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인민배우 백고산은 바이올린음악과 함께 한생을 살아오며 뛰어난 연주기술과 후비육성으로 조국과 민족의 영예를 떨치는데 크게 기여한 재능 있는 바이올린 연주가이며 작곡가이고 교육자였다.
1930년 평양에서 태어난 백고산은 3살때부터 그의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며 자랐다고 한다. 신동이라고 소문이 난 선생은 20대부터는 틈틈이 작품들을 창작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선생이 바이올린음악으로 편곡한 우리민요들은 정서적인 감성이 풍부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음악창작적 재능면에서도 세계적 수준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었다. 그가 편곡하고 연주한 바이올린곡들을 들어본 국내외 전문가들은”누구도 그의 재능을 따를 수 없는 최고”라는 평가를 하였다.
유랑연주를 이어가던 바이올린 신동
백고산은 여섯 살 되던 해, 평양 대동강 기슭에 자리잡은 평양공회당에서 처음으로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다. 이때 《아리랑》과 세계명곡들을 연주했다. 여섯 살짜리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선율은 일제치하에서 신음하던 수많은 동포들의 혼을 일깨우기에 충분하였다. 그때 신문은 “조선에 바이올린 신동이 나타났다”고 보도하였다. 이 소문은 서울에까지 퍼져나갔다.
1940년 10살이 되던 해 백고산은 6살난 동생과 함께 전국각지를 떠돌아다니며 유랑연주를 하고 다녔다. 이들 어린 형제는 흥행업자가 이끄는 대로 남으로는 해주, 서울, 인천, 충주, 대구, 전주, 광주, 부산까지 북으로는 순천, 함흥, 원산, 청진 등 전국각지 안 가본데 없이 떠돌아다녔다.
두 형제는 영화관이나 야외가설무대들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연주를 하였으며 멘델스존의 협주곡, 사라사테의《지고이넬바이젠》, 베토벤의 메누에트, 가보트와 같은 고도의 기교를 요구하는 수준 높은 곡들을 주로 연주하였고 두 형제는 같이 나와서《아리랑》, 《양산도》, 《노들강변》같은 우리민요들을 2중주로 연주하였다.
흥행업자들은, 백고산을 웬만한 실력으로는 어른들도 서보기가 힘들다는 당시 최고의 공연무대였던 서울의 부민관에 세웠다. 무대에 등장한 백고산은《노들강변》을 연주하여 청중들을 매혹시켰다. 그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너무도 감동한 청중들은 그가 연주하는 《노들강변》의 선율을 따라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비록 어린 백고산의 연주였지만 식민치하에서 민족적 존엄과 자존심을 구기고 살아오던 서울시민에게 크나큰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준 뜻 깊은 연주를 했던 것이다.
이렇게 흥행업자를 따라 발 가는대로 방랑연주생활을 하던 그들 형제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 하얼빈에 이르게 되였다. 그때 백고산의 나이는 13살이었다. 백고산은 어떤 사람의 소개로 러시아인 음악가부부를 만나게 되였다. 백고산형제의 연주를 들어 본 로씨야인 부부는 그들을 당시 하얼빈에서 제일 큰 극장이였던 모델극장에서 공연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연주회의 피아노반주는 바이올린선생의 부인이 맡아주었다.
이런 속에서 백고산의 마음속엔 기량을 더욱 연마하여 바이올린으로 민족의 재능을 떨쳐보려는 결심이 굳어져갔다. 그는 9살난 동생 백도산을 홀로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러시아인 음악가에게서 본격적으로 개별지도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해방된 소식에 접한 백고산의 마음은 그리운 조국으로, 고향 평양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중국 동북지방의 엄혹한 정세로 백고산은 당장 귀국하고 싶은 마음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귀국할 수 없던 그는 중국의 국내혁명전쟁이 승리적으로 결속되어가던 1949년 4월이 되어서야 꿈에 그리던 조국땅을 밟을 수가 있었다. 조국의 품에 안긴 그는 조선인민군 협주단 독주자이자 조선인민군 관현악단 악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공연을 본 김일성주석의 좋은 평가가 있었고 그때부터 그는 국가를 대표하는 연주 활동을 해나갈 수 있었다.
조국의 품에 안긴 백고산
김일성주석은 조국의 품에 안긴 백고산에게 각별한 사랑과 값 높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각가지 혜택을 베풀어 주었다. 팔도를 떠돌며 비참하게 살았던 그의 과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주석님은 10대의 백고산을 새로 조직된 조선인민군협주단 관현악단의 악장이라는 중책을 맡겨주었으며 독주가로써도 보람찬 음악활동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넓은 길을 열어주었다.
항일의 전설적 영웅 김일성주석이 창건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품에 안겨 각가지 누리던 백고산은, 새 나라의 주인이 된 기쁨과 새 생활을 꽃펴가며 희열에 찬 근로대중들의 역동적인 모습과 새 조선 건설로 들끓는 벅찬 현실을 무한한 감동 속에 직접 체험한 백고산은 음악으로 조국을 빛내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음악활동을 펼쳐나갔다.
1950년 설날에 백고산은 영광스럽게도 김일성주석님 앞에서 바이올린연주를 하게 되었다. 그날 백고산은 외국의 바이올린명곡과 우리민요《양산도》를 연주하였다. 주석님은 그에게 바이올린을 참 잘한다고 치하하면서 연주활동에서 외국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음악을 더 많이 연주해야 된다는 귀한 가르침을 주었다.
바이올린이라고 하면 의례히 서양의 고전음악을 연주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백고산은 서양악기를 조선음악 발전에 이용해야 한다는 주석님의 뜻 깊은 가르침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새겨 안게 된 백고산은 후에 바이올린협주곡《대를이어 충성을 다하렵니다》와 독주곡 《일편단심 붉은마음 간직하렵니다》등을 작곡하였고 다수의 민요를 세계적 수준의 독주곡으로 편곡하였다.
이러한 백고산의 천재성을 귀하게 여긴 김일성주석은 그를 세계적인 음악가로 내세울 수 있게 기량도 높이고 많은 경험도 쌓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해 주었다. 세계적인 연주가의 꿈을 안고
사회주의권 문화올림픽으로 알려진 제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1951년에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됐다. 이 축전은 세계 각국의 사회주의진영 청년들이 모여서 예술축전, 체육축전 그리고 다양한 토론회를 벌이는 행사이다. 이때 백고산도 조선의 대표로 여기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때는 조국이 전쟁 중이었던 만큼 북조선으로서는 대표를 이 축전에 파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조건에서도 백고산은 바이올린 독주부문에서 3등이라는 좋은 성과를 올려 전쟁중에 있는 조국인민들에게 무한한 고무와 기쁨을 주었다. 1953년 8월에 루마니아의 부꾸레슈띠에서 진행된 제4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다시금 3등 상을 받았으며 1955년 8월에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진행된 제5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는 대망의 1등을 함으로써 김일성주석께 큰 기쁨을 드렸고 조국의 영예도 크게 떨쳤다.
축전 참가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백고산은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에 특별연구생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그때 우리나라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지만 김일성주석의 배려와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측의 요구에 의해 그의 유학은 가능했다.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은 조선에서 온 연주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가 보기 위해 연주회를 마련해주었다. 당시 소련의 대표적인 음악가들이 그의 연주를 듣기 위해 모였다고 하고 세계적으로 이름난 모스크바 필하모니가 반주를 맡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백고산의 바이올린 실력이 세계적 경지에 올라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그 연주회에서 백고산은 무반주《아리랑 변주곡》도 연주했다. 그때 그의 연주를 들었던 차이코프스키 음악대학의 교수이자 모스크바 필하모니의 수석 독주자이고 세계적인 바이올린 연주가였던 오이스트락흐(David Oistrakh)도 백고산의 연주를 들었는데, 그는“기초도 좋고 훌륭하게 배웠다”고 칭찬하면서 누구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느냐고 물었다. 백고산은“바이올린 연주가이자 제작자인 아버지에게 배웠다”고 하자, 직접 무대 위에 올라가 “이런 음악가를 키운 아버지에게 경의를 표합시다”라면서 박수를 쳤다고 한다. 그리하여 백고산은 당대 최고 바이올린 연주가인 오이스트락흐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백고산은 체계적으로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기량을 닦아가고 있었지만 전쟁의 불길 속에 휩싸여있는 조국이 걱정이 되어 그의 마음은 한시도 편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그는 1957년 제1차 차이코프스키 국제음악 콩쿠르에 참가하게 되었다. 세계적 콩쿠르에 입상한 그는 유학생활을 마감하고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왔다. 나라에서는 그를 크게 환영하여 주었으며 공훈배우의 칭호를 수여하였으며 몇 년 후 예술가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영예로 알려진 인민배우칭호를 받았다.
1978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주최측은 백고산의 명성과 권위를 인정하여 그를 세계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이 콩쿠르의 바이올린 부문 심사위원으로 위촉하였다. 이로써 백고산의 국제적인 위상은 더욱 높아졌고 세계바이올린계에서 그의 위치는 확고한 것이었다.
이남과 중국, 일본에서는 심사위원을 한명도 배출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 조선의 음악가가 이미 심사위원으로 활약했다는 점은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에는 백고산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우려는 외국인 학생들이 평양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의 국제적 명성과 위상을 실감한 것이다.백고산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종신 심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엄혹했던 전쟁시기에 군사부문의 일꾼도 아닌 음악가를 외국유학까지 보내어 나라의 문화예술정책의 초석을 다져놓으려는 김일성주석의 원대한 구상은 전쟁의 승리를 확신하지 않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위인만이 내릴 수 있는 결단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해인 1954년, 백고산은 모스크바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인민의 나라 조선은 그를 위해 국립교향악단의 바이올린독주가로 활동하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전쟁으로 나라사정이 무척 힘든 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세계최고의 명문인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에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던 당대 최고의 바이올린의 연주가, 오이스락흐의 문하에서 기량을 닦고 높은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김일성주석님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백고산의 결심은 더욱 뜨거워져만 갔다.
백고산은 극장무대에서만이 아니라 전후 복구건설로 들끓는 공장과 농촌의 작업현장을 직접 찾아 다니며 땀 흘리는 근로자처럼 활발한 공연활동을 펼쳐나갔다.
정서적이면서도 백고산은 격동적인 바이올린음악으로 근로자들이 벌려가고 있는 전후 복구건설사업을 힘있게 고무추동 하였다.
이렇게 활동하던 나날에 백고산은 근로대중들 속에서 널리 사랑을 받은 바이올린독주곡 김길학작곡《고향길》을 비롯하여 박민혁이 작곡한 바이올린협주곡《굴진공》, 김린욱이 작곡한《용광로가 보이는 바닷가에서》 등 많은 독주곡들을 초연(첫 연주)하여 근로자들을 북돋아주었다.
백고산이 연주한 바이올린음악들은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널리 보급되었는데, 매력적인 그의 바이올린소리를 들으면 기쁨이 넘치고 생명력이 솟아난다고 하며 청취자들은 좋아하였다. 특히 그의 바이올린소리는 감화력이 깊고 호소력이 강하여 창조와 건설로 나래 쳐 가던 천리마시대의 민중들에게 ‘합심하면 이룰 수 있다’는 신심을 심어주었다.
민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공화국(북)은 백고산이 1957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차 차이코프스키 국제 음악콩쿠르에서 영예상을 받은 것과 자기의 예술적 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하여 조국의 영예를 빛낸 사실을 높이 평가하여 공훈배우칭호가 수여되었다.
백고산은 1960년대에 들어와서도 김일성주석님의 사랑과 두터운 신임 속에서 근로대중들의 전후 복구건설을 고무추동 하는 공연활동을 적극 벌려나갔다. “서양음악을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서양악기를 조선음악의 한 부분으로 복종시킬 데”대한 주석님의 가르치심을 명심하고 《아리랑》을 비롯하여 근로자들이 좋아하는 우리민요들을 바이올린곡으로 편곡하여 연주활동을 펼쳐나갔다.
그러던 1962년 초, 음악예술을 시대와 민중의 요구에 맞게 주체적으로 발전시켜나갈 데 대한 방향을 제시한 김일성주석은 현지지도의 종합공연무대에서 《아리랑》을 연주하는 백고산의 모습을 보고 “저것 좀 보라, 서양악기인 바이올린을 가지고도 우리 민요를 연주하니 얼마나 좋은가”하고 만족해 하였다.
연주활동에 있어서 주체를 세워나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강령적인 지침을 받아 안은 백고산은 주석님의 세심한 지도와 보살핌 속에서 우리의 민족성을 구현한 음악으로 조국과 민중들에게 이바지하였으며 바이올린과 더불어 조국의 명예를 세계에 빛내는 공인되고 관록 있는 바이올린연주가로 성장하였다.
조국의 따뜻한 배려 속에
김정일위원장은 주석님이 아끼고, 내세워 관록 있는 연주가로 키워놓은 조선의 자랑, 백고산을 바이올린으로 한 생을 빛내어가도록 이끌어준 위대한 스승이었다. 김정일위원장은 1971년 6월 ‘우리 식’의 주체적 배합관현악을 창조하시던 역사적인 시기에 백고산을 당시의 영화음악단의 관현악단 악장으로 내세워 연주활동을 보다 새롭게 벌려나가도록 해 주었다.
백고산은 만수대예술단을 새롭게 하는 과업을 받고 품위 있는 여성기악중주단을 조직하고 이 단체의 기술지도원으로 일하면서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훌륭한 여성악단으로 빛을 내게 하였다. 이 악단은 30여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악합주에 풀류트, 클라리넷 등의 목관악기와 호른 그리고 하프가 포함 된 실력 있는 악단으로 지휘자 없이 연주하는 매력적인 악단이다.
김정일위원장은 주체예술의 우월성을 세계만방에 떨치던 때에 백고산에게 세계적인 바이올린 연주가를 많이 배출하도록 하는 중요한 과업을 주고 이의 성공적인 성과를 도출해내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세심한 지침을 주었다. 이때에 백고산은 발전된 바이올린교육자료를 많이 만들어 내었으며 국제적으로는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국제콩쿠르 심사위원으로 되어 활약하였다.
드디어, 1976년 유고슬라비아(당시)에서 진행된 국제콩쿠르에서 백고산의 제자 김성호가 당당히 1등으로 입상하는 영광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후에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입상한 제자도 배출하였다.
이 무렵 김정일위원장은 세계적으로 흔치 않은 명품바이올린을 선물로 마련해 주었으며 1977년에는 인민배우칭호와 높은 국가수훈의 영예도 안겨주었다.
이렇게 김정일위원장의 사랑과 믿음 속에 백고산은 환갑이 훨씬 지나도록 손에서 바이올린을 놓지 않고 평양음악무용대학(당시) 특설학부 바이올린교수로 활약하면서 재능있는 후비들을 독주가로 육성하는데 정력을 쏟아 부었다.
언제인가 나의 스승이신 안용구교수와 함께 백고산의 영재교육 현장을 참관할 기회가 있었다. 안교수님으로 말하면 미국의 저명한 음악학교인 피바디음악대학에서 수십년간 후진을 양성하던 이름있는 바이올린 교수이고 60년대에는 이남을 주름잡던 최고 연주가이자 교육자였다.
그런데도 그는, 지난날 어린 백고산이 높은기량으로 연주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었는데, 오늘은 그의 학생들이 수준도 높고 세련된 연주를 한다고 경탄을 금치 못하였다.
백고산은 아무리 어려운 곡도 입으로 가르치지 않고 꼭 연주시범을 보이며 가르쳤다. 이렇게 효과적인 교육방법으로 실기교육에서 이제까지 해 본적이 없었던 새롭고 특출한 성과를 내왔다. 교수들과 제자들은 이런 백고산을 무척 존경하였다.
동료들과는 진지한 교육자적자세를 유지하고 제자들에게는 개성과 장점을 충분히 살려나가는 과학적인 분석과 연주시범으로 백고산은 바이올린교수로써의 명성도 대단하였다.
조국의 사랑 속에 영생을 누리는 행복한음악가
원래 백고산은 고지식하고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을 뿐 아니라 섬세하고 낭만적이었으며 의리가 깊은 음악가이기도 하였다.
백고산의 이런 성격에 호감을 갖고 있던 김정일위원장은 대 바르고 때묻지 않은 성품의 소유자인 그를 더없이 좋아한다고 하였다.
김위원장은 자주 백고산을 만나서 용기를 북돋아 주고, 보람된 삶을 누리도록 해주었다.
백고산은 위대한 위원장님의 은정 깊은 사랑과 믿음에 보답하기 위하여 교육사업에 헌신하다가 1997년 11월 26일 강의도중에 쓰러져 순직하였다.
백고산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동지들을 한없이 아끼는 위원장님의 사랑 속에 영생의 삶을 누리고 있다. 현지지도의 길에서 백고산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보고받은 김정일위원장은 애석함을 금치 못하며 “백고산동무는 어려서 부모 곁을 떠나 유랑하면서 고생도 많이 하였으나, 그가 조국의 품에 안겨서야 참된 삶을 찾았고 재능도 꽃피웠다”고 뜨겁게 추억하였다.
김정일위원장은 일군들에게 그의 장례와 부고를 내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지침을 주고 그의 시신을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하는 뜨거운 배려를 해주었다.
민족수난의 모진 세월동안 가난 때문에 수모도 많이 받고 눈물도 많이 흘렸던 백고산은 주석님과 위원장님의 지극한 배려 속에서 참다운 삶의 기쁨과 행복을 찾았으며, 온 나라가 다 알고 온 세상이 공인하는 세계적인 바이올린연주가로 성장하여 값 높은 생을 향유할 수 있었다.
50여년의 세월을 바이올린음악과 함께 당을 받들고 조국의 영예를 떨치며 주체음악발전에 기여하여 온 인민배우 백고산은 오늘 조국과 인민이 뜨겁게 추억하는 애국열사들과 나란히 영생하고 있다.
위인들의 품에서 행복을 누린 백고산
바이올린연주가 백고산의 일생을 되돌아 보면서, 그는 누구보다 나라와 영도자의 사랑을 듬뿍 받은 행복한 음악가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만일 그가 이남에 있었더라면 음악가로써의 그의 재능과 일생이 이북에서처럼 보람과 행복을 누리는 음악가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기사자료: kancc(5.29.)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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