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극로
리극로는 1912년 중국동북지방에 가서 내도산의 독립군부대에서 한동안 훈련도감으로 있다가 무송의 백산학교와 환인현의 동창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1~1927년에 베를린종합대학에서 공부하였으며 그 대학에 동방어학부 조선어과를 창설하고 강사로 있으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27년 2월 제1차 세계약소민족대회 조선대표단 단장으로 참가하고 세계 여러 나라를 려행하면서 조선말을 지켜내기 위한 투쟁을 벌렸다. 1929년 1월 서울중동학교에서 조선어학자협의회를 조직하였으며 조선어학회 회장으로 있었다. 그는 1930년에 신간회 대표로 동포구제의 목적을 띠고 만주지방을 돌아보면서 그 과정에 불요불굴의 혁명투사 김형직선생님과 일가를 깊이 알게 되였으며 그후 조국광복회창건과 보천보전투승리에 대한 소식을 듣고 힘을 얻어 반일애국의 지조를 끝까지 지켰다.
1942년 7월 일제가 조작한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흥감옥에 갇히였다가 8. 15를 맞이하여 출옥하였다. 1945년 8월 25일 서울에서 김일성장군 개선환영위원회의 조직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였으며 조선어학회 복구, 조선말교과서 편찬, 국어강습회 조직 등 사업을 적극 추진하는 한편 조선인류학회, 에스페란트학회, 국술협회 등을 조직지도하였다.
1946년에는 조선건민회를 조직하였으며 남북합작통일전선 위원장으로, 1947년에는 민주독립당, 민족자주련맹의 요직에서 활동하였다. 1948년 4월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로부터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련석회의 초청장을 받고 평양에 왔으며 1948년 9월~1953년 12월에는 내각무임소상으로, 1974년까지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단성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동안 언어학분야의 연구기관들과 나중에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비롯한 여러 사회단체들의 소장, 위원장 등의 직책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과학연구사업에도 깊은 관심을 돌려 가치있는 론문들과 책들을 써내였다. 주요론문으로는 《조선어어음의 된소리음리에 대한 과학적천명》(1928년), 《훈민정음의 독특한 음성관찰》(1932년), 《〈·〉의 음가에 대하여》(1937년), 《조선말 력점연구》(1957년) 등이 있으며 주요책으로는 《실험도해조선어음성학》(1949년), 《조선말 조연구》(1966년) 등이 있다.
그는 오랜 기간의 교수 및 과학활동을 통하여 유럽의 대학들과 학계에 조선말에 대한 과학적관심을 높이게 하였으며 조선말 말소리와 조선말 조(소리가락)에 대한 과학적연구를 하는데 이바지하였으며 일부 력사적인 조선글자의 소리값과 본질을 해명하는데 관심을 돌림으로써 민족어의 고수발전과 규범화의 확립, 주체적인 조선어학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리극로는 일제통치시기 후에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의 자료로 된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투쟁자료들을 보관하였으며 학술단체, 민속운동 지도에서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지지하고 민족정신, 민족문화를 고수하는 립장을 견지하였으며 후대들이 선렬들의 투쟁력사를 잊지 말고 혁명전통교양을 잘할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원사(1973년)이며 박사(1970년)이다. 조국통일상과 국기훈장 제1급을 비롯한 많은 훈장과 메달을 받았다. 묘는 애국렬사릉에 있다.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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