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북의 무소속대변지 《통일신보》가 공화국창건 75돐을 맞아 특집으로 마련한 몽양 려운형 선생의 손자 려인혁이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쓴 내용의 글이다.
온 겨레가 안겨살 진정한 삶의 품
할아버지가 안긴 품
나의 할아버지는 우리 인민들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널리 알려져있는 몽양 려운형이다. 꿈속에서도 해빛이 그리워 자기의 호마저 몽양이라 불렀다는 나의 할아버지. 나는 할아버지를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와 고모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하여, 할아버지에 대해 쓴 책들을 읽으면서 할아버지의 인생행로에 대해 잘 알게 되였다. 빛이 없는 만물의 소생에 대해 생각할수 없듯이 운명의 앞길을 밝혀주는 탁월한 수령의 령도를 떠나 참다운 인생에 대해 말할수 없는것이다. 돌이켜보면 속절없이 내리는 비도 겨레의 피눈물이 되여 내리던 그 시기 강도 일제의 군화발에 짓밟혀 한점 빛이 없는 칠흑같은 어둠속에 잠겨 신음하던 삼천리강토였고 그래서 세상천지 둘러봐도 백의민족 불쌍토다며 가슴을 치던 우리 동포들이였다. 설음중의 제일 큰 설음은 나라잃은 망국노의 설음이여서 수난에 몸부림치던 그 시기 얼마나 많은 애국자들이 나라찾는 싸움에 떨쳐나섰던가. 나의 할아버지도 일찌기 봉건의 멍에를 벗어던지고 겨레의 운명을 구원하고저 활약한 독립운동가들중의 한사람이였다.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은 웅변과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었는데 할아버지가 길가에 나서기만 해도 수많은 청중들이 자석처럼 묻어다녔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타고난 천성과도 같은 류창한 언변술에 나라잃은 설음을 담아 토로해 보기도 하고 큰 나라에 기대를 걸고 독립청원서를 써서 보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국제공산당과의 련계속에 당시 쏘련과 중국의 공산주의자들과도 자주 만나 조선의 독립에 대해 모색하기도 하였고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의 각지로 동분서주하며 조선독립을 부르짖기도 했다. 나중에는 단신으로 현해탄을 건너가 《조선이 자 주독립하는 길은 우주, 자연의 법칙이며 신이 명하는 민족의 권리이다.》고 웨치며 일본정계를 벌둥지 쑤셔놓듯하기도 하였고 《나는 외국인이지 식민지노예가 아니다.》고 하면서 왜왕앞에서도 허리를 굽히지않고 조선의 독립에 대해 당당하게 주장했다. 할아버지는 한때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으로도 활약하였고 조선체육회를 뭇고 회장으로도 활동하였다. 할아버지가 조선체육회를 무은것은 단순히 체육에 대한 취미때문이 아니라 체육을 통해서라도 얼어든 동포들의 가슴마다에 민족의 넋을 일깨워주고싶었던 나름대로의 몸부림이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언제인가 서울운동장에서 진행된 우리 축구선수들과 중국 상해축구팀과의 경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한 우리팀의 우승에 만족한 할아버지가 선수들을 데리고 어느 한 식당에 갔던적이 있다. 그런데 그 식당의 접대원들은 2층에 있는 일본인들에게만 부지런히 드나들고 우리 선수들에게는 음식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격분하여 식당주인을 불러내서는 《당신도 조선사람인가, 나라가 있다면 이 선수들을 응당 국가적으로 표창하고 축하연을 베풀어주어야 하겠는데 나라를 빼앗겨 그렇게는 못할망정 떠받들어 주어야 할 선수들을 하대하고 무시하면서 일본인들만 접대해서야 되겠는가?》고 준절하게 꾸짖었다. 지금도 사람들이 나라없던 그 시절을 되새겨볼 때마다 가슴아프게 떠올리군 하는 《일장기말소사건》때에도 할아버지는 그 일이 너무도 내려가지 않아 나라가 없으니 휘날릴 기발조차 없다며 조선민족의 운명을 구원해줄 태양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고 가슴을 치며 통탄하였다고 한다. 정말이지 딛고 사는 땅은 있었어도 민족의 존엄은 없었고 하늘에 태양은 있었어도 사람들의 가슴가슴은 망국민의 슬픔으로 짙은 어둠에 싸여있었다. 바로 이런 때 보천보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조선은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는 신심을 안겨준 보천보의 거세찬 불길은 억압받던 조선민족에게 있어서 재생의 밝은빛이였다. 할아버지는 너무도 감격하여 친지들과 함께 조선인민혁명군의 전승을 축하했고 《조선중앙일보》에 특별보도로 이 소식을 게재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택시를 세내여 보천보에 가서 불타버린 일제의 기관들을 보며 기쁨을 금치 못하였으며 백두산에까지 올라가 김일성장군님을 위하여,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축배를 들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할아버지의 마음속에는 항일의 전설적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만이 민족운명의 구원자이시고 전 조선의 유일한 령수이시라는 확신이 깊이 자리잡게 되였다. 하기에 할아버지는 해방직후 미군강점으로 그처럼 복잡한 정치적혼란속에서도 허헌, 홍명희선생을 비롯한 여러 인사들과 함께 《김일성장군 환영준비위원회》의 발기인의 한사람으로 나섰으며 수령님께 하루속히 서울에 오시여 혼란된 정국을 바로 잡아주실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올리고 그이를 만나뵈옵기 위하여 직접 38°선을 넘나들었다. 그 나날 할아버지는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을 따르는 길에 민족통일과 번영의 지름길이 있음을 페부로 절감하였다. 일제식민지통치에서 해방된 우리 나라는 다른 나라가 나아가는 길을 그대로 따라가서는 안된다고, 우리는 어디까지나 조선식으로 건국사업을 해나가야 한다고, 우리는 맞지도 않는 다른 나라의 옷을 입을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맞는 조선식옷을 만들어 입어야 한다고,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는 조선식민주주의의 길로 나가야 한다고 단호히 주장하시며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에 명확한 해답을 주시는 김일성장군님의 위대한사상과 누구도 따를수 없는 담력과 배짱 그리고 한없이 고결하신 인품과 덕망앞에 할아버지는 끝없는 매혹과 존경심이 끓어넘치는것을 걷잡을수 없었다. (장군님께서 계심으로 하여 우리 조선에 대통운이 텄습니다. 우리 겨레가 안겨살 품은 바로 김일성장군님의 품입니다!) 그때 할아버지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웨쳤다고 한다.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뵙고 서울로 나간 할아버지는 청년들앞에서 격정에 넘쳐 연설하였다. 《내가 왜 김일성장군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아끼고 따르는가. 그것은 김일성장군님이 백두산이 낳은 조선의 명장이시고 일제놈들의 무기를 빼앗아 무장투쟁을 벌려 조국을 해방한 민족의 영웅이시기때문이다. 김일성장군님이 내놓으신 건국로선이야말로 나의 신념이며 오직 김일성장군님을 따르는 길만이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이고 조국이 나아갈 진로이다. 김일성장군님의 품은 나 하나, 한가정만이 아닌 온 민족이 운명도 미래도 다 맡길 위대한 태양의 품이다.》 이것은 한생 독립운동에 한몸바친 할아버지의 인생총화였으며 겨레앞에, 후대들앞에, 력사앞에 남긴 절절한 당부였다. 할아버지는 아쉽게도 공화국의 창건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김일성장군님의 령도아래 이 땅에 머지않아 진정한 인민의 조국이 일떠서게 되리라는것을 확신했다. 할아버지는 미국놈들의 사촉을 받은 반동놈들의 총에 맞아 숨이 지는 마지막순간까지도 혼신의 힘을 모아 《조선…》이라고 불렀다. 나는 할아버지가 마지막숨을 몰아쉬면서도 부른 조선, 그 조선은 바로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의 품이였다고 생각한다
그 품 떠나 못살아
언제인가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뵈온 영광의 자리에서 려연구고모가 《우리 형제 아홉남매중에 수령님의 품에 안긴 형제들만 살아있습니다. 나머지 형제들은 다 제명을 살지 못했습니다.》라고 말씀올린적이 있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절세위인들의 은혜로운 사랑의 품을 떠나 우리 려씨일가의 오늘에 대해 어찌 생각할수 있겠는가. 돌이켜보면 할아버지와 하신 약속을 지키시여 어버이수령님과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께서 나의 고모들에게 베푸신 사랑은 친부모도 줄수 없는 따뜻한 어버이사랑이였다. 그때 어버이수령님의 저택에 도착한 자기들에게 이제부터 너희들은 우리와 한가족이라고 하시던 김정숙어머님의 다심하신 음성과 현지지도의 길에서 돌아오신 길로 넓으신 한품에 안아주시고 새조국건설로 그처럼 바쁘신속에서도 학습정형을 일일이 알아보시고 모르는것이 있으면 친부모의 심정으로 차근차근 일깨워도 주시며 부모들의 슬하를 멀리 떠나 외로움을 느낄세라 세심히 보살펴주시던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을 평생 잊을 수 없다고 고모들은 종종 외우군 하였다. 그 나날 고모들은 자기들에게 돌려지는 어버이수령님과 김정숙어머님의 사랑이 하도 뜨겁고 고마워 서울에서 싸우고있는 할아버지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고 한다. 《…아버지, 저희 자매는 그동안 장군님의 따뜻한 품속에서 응석을 부리면서 자랐습니다. 배움이 한없는 기쁨이 되고 삶이 한없는 자랑이 되는 그런 나날을 보냈습니다. …저희들은 장군님의 혜택으로 곧 류학의 길을 떠납니다. 그러나 아무리 먼 나라로 가더라도 저희들은 결단코 장군님의 품, 조국의 품에서는 떠나지 않겠습니다. …》 이렇게 고모들은 어버이수령님의 저택에서 수개월동안 함께 살면서 수령님과 김정숙어머님의 각별한 사랑과 정을 받아안았고 류학의 길을 떠났다. 그후 세월이 흐를수록 더해만 가는 절세위인들의 사랑과 믿음속에 려연구고모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부의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서기국장, 의장 등의 직무에서 사업하였고 그 기간에 로므니아, 유고슬라비아(당시), 중국, 뽈스까, 동도이췰란드(당시)를 비롯하여 세계 여러 나라에 조국전선대표단 단장의 중임을 맡고 나가 공화국의 존엄과 명예를 떨치였다. 려원구고모도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부의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의 직무에서 사업하면서 값높은 삶을 누리였다. 우리 나라에서 녀성들은 나라의 한쪽수레바퀴를 떠밀고나가는 혁명의 꽃, 나라의 꽃으로 남자들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일하고있지만 나의 고모들은 이 나라의 녀성들 누구나 다 지닐수 없는 그런 영광의 단상에서 복받은 삶을 누리였다. 고모들뿐이 아니다. 전쟁때 할머니와 함께 공화국의 품에 안긴 나의 아버지도 절세위인들의 다심하고 변함없는 사랑속에 더없이 행복한 삶을 누리였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1978년이 다 저물어가던 어느날 아버지가 여느때없이 일찍 들어오시더니 다짜고짜로 어머니의 손을 잡아 흔들며 이제 인차 평양으로 떠나야 한다고 하는것이였다. 아직은 너무도 어린 나이였던 나는 아버지가 왜 그토록 흥분했는지 리해할수 없었다. 그렇게 떠난 그 길이 아버지가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뵈오러 가는 영광의 길인줄은 후에야 알게되였다. 당시로서는 나의 아버지도 나도, 우리 려씨일가가 모두 그 영광의 길이 어떻게 마련된것인지 알지 못했다.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 려씨일가의 운명을 지켜주고 보살펴주고계시던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아버지의 형제들이 한날한시에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뵙도록 크나큰 은정을 돌려주셨던것이다. 위대한 장군님의 그 사랑에 떠받들리워 새해 신년사가 5분이나 늦어진 감동적인 일화가 이 세상에 태여났고 아버지와 고모들은 수령님을 모시고 사랑의 기념사진을 찍는 더없는 행복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였다. 주시고 주시여도 못다 주신 사랑이 있으신듯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우리 수령님께서는 려운형선생을 잊지 못하시듯이 그 자녀들에 대해서도 잊지 못하신다고, 더우기 그들중 두 딸은 광복직후에 우리 집에 와서 우리 어머니가 키워주었다고 하시며 그들이 일찌기 부모를 잃고 얼마나 외롭겠는가고, 이제라도 모두 평양에 모여서 살게 해야겠다고 뜨겁게 교시하시였다. 이렇게 되여 우리 가정은 온 나라 인민들 누구나 심장속에 간직하고 사는 수도 평양으로 이사를 오게되였다. 그날 아버지는 우리 형제를 불러앉히고 너희들은 우리 려씨일가를 잊지 못해하시는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사랑을 영원히 잊어서는 안된다고, 우리 려씨일가는 공화국을 떠나서는 순간도 살수 없다고 거듭거듭 당부하였다. 은혜로운 그 품속에서 그후 아버지는 우당 부위원장, 조국통일민주 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서기국장으로 일하였으며 오늘은 신미리애국렬사릉에서 고모들(려연구, 려원구)과 함께 영생하는 삶을 누리고있다. 진정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께서 우리일가에 돌려주시는 사랑은 그끝을 헤아릴수 없는 대해와도 같은것이였다. 지금도 나는 1991년 《아시아의 평화와 녀성의 역할》에 관한 제2차 토론회에 참가하기 위해 우리측 대표단 단장으로 서울에 간 려연구고모가 할아버지의 묘소를 찾고 《고 몽양 려운형 선생을 추모하여 김일성》이라고 새겨진 댕기를 드리운 화환을 진정하며 목놓아 울던 모습을 잊을수가 없다. 이미 수십년전에 떠나간 할아버지를 잊지 못하시며 화환을 보내주신 절세위인들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여러 기회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력사에 숭고한 인덕과 믿음의 화폭으로 빛나게 아로 새겨진 잊지 못할 그날에 나의 고모는 수령님의 품으로 자기들을 떠밀어보내던 아버지가 다시 환생된듯 봉분의 흙을 더듬고더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제가 왔습니다. 보십니까. …아버지가 생전에 그토록 경모해마지 않던 위대한 수령님께서 몸소 은정어린 화환을 보내주시였습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그 마음 소중히 여기시며 우리 아버지를 통일의 선각자로, 애국지사로 불러주시고 오래 잊지 못해하고계시는 우리 수령님이 절 이렇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때 오열을 터치고터치는 고모의 모습을 TV로 보며 나와 우리 가족모두가 뜨거운것을 흘리고흘리였다. 아니 온 겨레가 절세위인들의 숭고한 도덕의리심에 감심하여 격정의 눈물을 흘리 였다. 그날 고모가 서울에서 만난 려운형추모회 회장은 《묘소에 따님이 온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준비를 하였지만 이렇게 주석님께서 직접 보내주신 화환이, 그것도 생화가 와닿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하였습니다. 김일성주석님께서 어떻게 50년가까이 정사를 보시게 되였는가 하는 의문이 단번에 풀립니다.》라고 감동어린 어조로 말하였다. 시작은 있어도 끝이 없는 절세위인들의 은혜로운 사랑의 품에서 나의 할아버지도 조국통일상수상자로 후세에 그 이름 전해지고 있다. 오늘 나를 비롯한 우리 형제모두는 당의 크나큰 사랑과 믿음속에 국가의 중요직책에서 사업하고 있다. 하기에 우리 려씨일가 모두는 심중에 끓어넘치는 고마움을 담아 이렇게 터치고터 친다. 《은혜로운 태양의 품, 그 품 떠나 우린 못삽니다!》 * * 해마다 공화국창건기념일을 맞이할 때면 우리 가정은 꼭꼭 신미리애국렬사릉을 찾는다. 그곳에서 나는 나의 아버지와 고모들만이 아닌 각이한 년대, 각이한 계층의 사람들의 영생의 모습들을 보고 또 보면서 가슴이 뭉클해짐을 금할수 없다. 허담, 신상균, 박정호, 장정환, 최철웅, 김치구, 심창완, 신윤선, 림수만, 홍건의, 리현상, 송억만, 리진수, 최재하, 최동오, 백고산, 한덕수, 최덕신, 최홍희, 오익제, 류미영과 리인모를 비롯한 비전향장기수들… 태여난 곳, 걸어온 인생길은 서로 달라도 절세위인들의 품에 생의 닻을 내리여 후세에 길이길이 전해지는 불멸의 모습들이다. 오늘도 후세들에게 절세위인들의 숭고한 도덕의리의 세계와 공화국의 동지애의 력사를 전하며 영생의 언덕우에 서있는 렬사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참으로 생각이 깊어지군한다. 온 겨레를 따사로운 한품에 안아주시는 절세위인들을 대대로 높이 모시여 여기 신미리애국렬사릉만이 아니라 대성산혁명렬사릉, 조국해방전쟁참전렬사묘를 비롯하여 영생의 언덕에서 값높은 삶을 누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뿐만아니라 이 땅에 생을 둔 모든 사람들이 자주적인민의 존엄높은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있다. 어찌 이 땅에 사는 사람들뿐이랴. 해외동포들도 이역에 사는 위대한 우리 인민이라고 따뜻이 불러주시며 더뜨겁게 품어안아주시는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의 사랑속에 값높은 삶을 누리고있다. 경애하는 원수님의 탁월한 령도아래 오늘 공화국은 초강대국의 존엄과 위용을 온누리에 떨치고있다. 얼마전에는 우리가 만든 첫 전술핵공격잠수함의 진수식이 성대히 진행되고 《김군옥영웅》함이 태여나 주체적해군무력의 강화발전과 국가핵무력강화, 선진해양강국건설에 크게 기여하게 되였다. 숨이 지는 마지막순간에조차 《조선…》이라고 부르며 이 땅, 이 조선을 그토록 사랑한 나의 할아버지가 살아 오늘의 강대한 우리 조국의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기뻐하겠는가. 뜻깊은 공화국창건 75돐을 맞는 이 아침 나는 우리일가의 한결같은 심정을 담아 온 세상을 향해 다시금 소리높이 웨친다. 민족의 자애로운 어버이이시며 위인중의 위인이신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의 품은 온 겨레가 안겨살 진정한 삶의 품, 따사로운 보금자리이라고. 려 인 혁 (려운형의 손자) <저작권자 ⓒ 프레스아리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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