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곡음악의 전통을 현대에로 이은 하규일
근세 가곡의 거장이라고 일러오는 하규일은 1867년에 서울의 중인가정에서 태여났다. 그는 자를 성소, 호를 금하라고 하였다.
엄격한 부모의 슬하에서 5살때부터 13년간 글공부를 하였으나 음악 특히 가곡가창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며 성장하였다.
하규일의 음악에로의 길은 거문고를 배우면서부터 시작되였다. 그는 글공부의 여가마다 거문고를 배워 전문가 못지 않은 연주기량을 소유하였고 이어 단소, 양금 등의 연주법을 익히며 음악적기초를 쌓았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악기연주가 아니라 당시 널리 성행하고있던 가곡가창에 있었다. 그것은 그가 성장하던 시기에 일찌기 장우벽, 오동래, 박효관, 최수보 등을 통하여 전승되여온 가곡가창의 전통이 안민영, 홍진원, 하중권, 명완벽 등을 통하여 끊임없이 보급계승되고있었고 특히는 그의 가문(삼촌인 하중권과 6촌형 하순일이 다 이름난 가객이였다.)의 영향과 관련된다. 하규일은 20살이 다 되여오던 1886년부터 명가객으로 이름난 최수보를 통하여 가곡창법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의 삼촌 하중권은 조카의 목소리가 그닥 씨원치 않은것을 보고 명가객이 될 재목이 못되니 소리공부를 그만둘것을 권고하였다고 한다. 실지 하규일은 노래부르기를 즐겨하였으나 성음의 질이 좋지 못하였던것이다.
그러나 하규일은 노력이 크면 명창이 될수 있다는 배심을 안고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가창훈련에 일심전력을 다해 달라붙었다.
20대청년기에 이른 하규일에게 있어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엄격한 훈련규범에 의한 가창기술수련은 참으로 힘겨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가곡가창에서는 맑고 아름다운 성음설치방법, 고르롭고 잔잔한 장성(긴 연장성음)의 해결, 광택있는 억양법과 우아한 표현의 높은 균형성, 《비청》(가성)에 대한 세련성 등을 원만하게 해결하는것이 중요한 과제로 되고있었다.
이와 함께 24곡이나 되는 가곡곡조들로 묶어진 가곡 《한바탕》(련쇄곡전편)을 한시간반이상 련속 부를수 있는 가창능력을 소유하여야 하였으며 가곡 및 시조곡조들에 맞추어 부르는 수백편의 노래가사들도 모두 통달하여야 하였다. 이로부터 지난날 가곡가사의 보급계승에서는 소년기부터 일찌기 가창훈련을 주는 조기교육체계가 일정하게 적용되고있었으며 그것도 주야로 간고분투하는 엄격한 훈련규범에 의하여 진행되고있었다.
그러니 청년기에야 뒤늦게 가창훈련에 착수한 하규일은 남보다 몇배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되였다. 하규일은 비상한 결심을 다지며 밤낮이 따로없이 훈련에 열중하였다. 그의 이러한 남다른 열정과 노력을 보고 삼촌 하중권도 감동되여 그의 가창훈련을 도와주었으며 자기의 제자 명완벽을 붙여 가창지도를 하게 해주었다.
이렇게 피타는 훈련으로 몇해가 흐르는 과정에 그의 목에서 몇번이나 선혈이 솟구치고난 뒤에야 꽉 잠겼던 목이 열려 폭포소리와 같은 우렁찬 소리가 터져나왔다고 한다.
가창훈련을 시작한지 5년이 되여 가곡가사에 대한 가창기술이 일정한 수준에 올랐을 무렵인 1901년에 하규일은 돌연히 가객의 길을 단념하고 벼슬길에 나섰다.
그 동기에 대해서는 당시 우리 나라의 복잡다단한 정세가 그의 민족적량심과 의무감을 분발시켜 가객의 길이 아닌 관직의 길로 이끌어간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동기는 어찌되였든 하규일은 궁중의 내인으로 있는 누이의 뒤받침에서인지 남보다 벼슬발전이 빨랐다. 그는 처음에 서울안의 인구, 주택, 토지, 도로, 산천 등에 대한 관리와 범죄단속 및 조사를 맡은 관청인 《한성부》의 소윤(종4품) 겸 한성재판부 판사로 되였고 1909년에 내장원*의 문부정리원과 전라남도 독판관을 거쳐 1910년에는 전라북도 진안군 군수로까지 되였다.
복잡한 관리생활에 부대끼는 속에서도 하규일은 자기의 가창기량을 더욱 높이기 위한 훈련을 끊임없이 계속하였다. 이러한 정열적인 노력과 열정으로 련마된 높은 가창기량은 그후에 그가 가곡가창의 보급계승을 위한 음악활동을 본격적으로 벌려나가는데서 중요한 밑천으로 되였다.
하규일은 1910년 8월 22일 일제의 강요와 그에 굴복한 친일매국노들에 의해 조작된 《한일합병》으로 하여 망국의 치욕이 현실화되자 그에 항거하여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이때부터 그는 음악에만 전념하면서 전통적인 민족고전음악유산들을 고수하고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사업에 한생을 바쳤다.
하규일의 본격적인 음악활동은 1911년 10월 《조선정악전습소》의 초대학감으로 취임하면서부터 시작되였다.
당시 《조선정악전습소》에서는 구악부(민족음악부)와 신악부(양악부)의 두개 학과로 나누어 민족음악을 전공하는 가수 (주로 가곡, 가사를 전공함)들과 민족악기연주가들 그리고 양악을 전공하는 성악가들과 기악연주가들을 양성하였는데 하규일은 여기서 학감사업을 하면서 가곡과 거문고를 가르쳤다.
정악전습소에는 교원력량도 비교적 잘 꾸려져있었는데 구악부에만 하여도 남창, 녀창가곡교원으로 하순일, 리영환, 가야금교원으로 명완벽, 함화진, 한규우, 생황교원으로 한진구, 양금교원으로 백용진, 김상순, 거문고교원으로 김경남, 조이순, 단소교원으로 조동석, 리춘우 등이 있었으며 신악부에는 김인식(음악리론, 성악, 풍금, 4현금)이 있었다.
하규일이 전습소에서 활동을 개시하던 시기 가곡가창의 전수보급에서는 일련의 변화들이 일어나고있었다.
원래 가곡음악은 그것이 발생한 때로부터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주로 《가객》이라고 불리운 남성가수들속에서 많이 창조되고 가창보급되여왔으며 여기에 녀기들의 가창활동이 소극적으로 배합되여왔다.
가곡이 발전하는 과정에 새로운 도시서정가요의 하나인 가사가 발생발전하면서 녀기들의 가창활동이 보다 적극화되고 근세에 오면서 이러한 가곡가창발전의 흐름을 반영하여 《가곡원류》, 《녀창가요록》 등에서 녀기들의 가창을 위한 곡조들을 따로 구분하여 줄 정도로 녀창이 중요시되기는 하였지만 그 당시까지도 가곡창작과 가창에서는 《가객》들이 앞에 서고 《녀기》들은 뒤전에 밀려 있었다.
그러나 하규일의 음악활동이 본격화되던 20세기초에는 변천된 시대의 흐름속에 녀자들속에서 가곡가창을 전문하려는 지망이 날로 높아져가는 반면에 남자들의 지망률은 점점 떨어져가고있었다.
이러한 시대적흐름을 간파한 하규일은 녀자들을 가곡가창의 전수보급에 적극 인입시켜 그에 토대하여 가곡음악의 전통을 고수하고 끊임없이 계승발전시켜 나갈것을 결심하고 실천에 옮겨 나갔다.
그리하여 1912년에 정악전습소 산하에 녀악분교실들을 설치하도록 하고 직접 분교실장을 겸하면서 가곡가창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한 교육사업을 꾸준히 벌려나갔다.
당시 하규일은 남창과 녀창을 포괄한 가곡가창전반에 대한 리론실천적자질을 갖추고있었을뿐아니라 가사와 시조가창에서도 《절창》의 한사람으로 인정받아왔다. 1910년대에 이미 하규일은 시조가창계의 중심류파를 이루고있던 《별감 파》의 조종(시조 또는 으뜸가는 인물이라는 뜻)으로 알려져있었다.
하규일은 조선정악전습소에서의 활동시기 가곡가창 후비육성에 전념하는 한편 민족음악유산들을 발굴정리하여 후세에 전하는 사업에도 정열적으로 참가하였다.
그는 1911∼1914년기간에 이름난 음악가들인 함재운(함화진의 아버지, 거문고명수), 명완벽(가야금, 녀창가곡의 명창) 그리고 전습소의 소감 홍긍섭, 양악교사 김인식 등과 함께 중세 우리 나라 직업음악이 달성한 성과를 집대성한 귀중한 음악리론도서인 《악학궤범》(초판 1493년)을 등사본(3책)으로 발간한것을 비롯하여 양금보로 된 남창과 녀창 《가곡선률보》(4책), 《금보》(거문고 악보) 등을 편집발간하여 후세에 전하도록 하였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고악보에 대한 지식이 깊었던 그는 우의 음악가들과 함께 《여민락》, 《령산회상》(《조선구악령산회상》으로 1914년 8월에 발간) 등의 전통음악유산들을 번역, 해득하여 5선보로 옮기는 사업에도 한몫을 맡아 기여하였다.
하규일은 말년에 경제활동에 종사(조선방적회사 사장)하면서도 전통적인 민족음악을 계승발전시키는 사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정력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날로 로골화되여 가는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하여 전통적인 민족음악을 보존유지해가던 궁중음악단체인 《리왕직아악부》*가 존망의 기로에 놓여있던 시기인 1926년부터 아악부의 촉탁(림시교사)으로 취임하여 가곡가창의 대를 이어갈 가수들을 육성하는 사업과 함께 전통적인 궁중가무형식을 보존하기 위한 일에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하규일은 아악부에서 가곡, 가사, 시조들을 전수보급하면서 가곡가창의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가곡음악의 전모를 생동한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해지도록 하는데도 깊은 관심을 돌렸다. 그리하여 1928년에 많은 가곡을 《빅터》레코드회사의 소리판들에 록음하여 후세에 전하였다. 하규일의 육성이 담긴 소리판들은 그의 가창예술의 특징과 전통적인 가곡음악의 진면모를 어느 정도 찾아보게 해준다.
하규일의 가곡가창은 뜻이 깊고 정서적으로 심오한것이 특징으로 된다. 그는 가창에서 화려한 색갈이나 우아성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하나하나의 음에 이르기까지 깊은 형상적의미를 부여하여 정서적으로 강조하면서 사색적인 깊은 음악세계를 지향하였다.
특히 하규일의 가곡가창활동과 그 가창예술의 특징을 통하여 고려시대로부터 발전의 길을 거쳐 18∼19세기의 장우벽, 오동래, 박효관, 최수보 등을 통하여 전승되여온 가곡음악의 고전적전통과 고유한 가창양식의 전통파적인 특징이 하규일에게로 이어져 마지막 꽃을 피우게 되였으며 그를 통하여 현대에로 전해져왔음을 잘 알게 된다.
근세 가곡의 명창 하규일이 남긴 가곡음악(남창가곡 90여편, 녀창가곡 70여편)들과 가사 및 시조들은 오늘도 연연히 계승되면서 선조들이 창조한 전통적인 가요음악의 진면모와 고유한 특징들을 우리 시대에 전하여주고있다.
음악사에 남긴 하규일의 음악적유산으로는 이밖에도 그가 1931년에 편찬하여 내놓은 가곡집 《가인필휴》(녀창가곡, 가사 8편, 시조 등을 수록함)가 있으며 그가 지은 시조 2편이 함화진(1884∼1948)이 편찬한 가요집 《증보가곡 원류》(1938년 편찬)에 실려 전해오고있다.
20세기 전반기에 가곡을 비롯한 전통적인 민족가요양식들을 보급전수하는데 기여한 하규일의 음악활동은 당시 우리 나라의 사회력사적환경과 음악사적견지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그가 살며 활동하던 시기 우리 나라는 봉건적지배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일제의 식민지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였으며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음악분야도 그 자유로운 발전이 심히 억제당하게 되였다.
조선인민의 민족적인 모든것을 거세말살하기 위한 일제의 책동이 날로 로골화되고있던 환경에서 민족의 얼이 깃든 전통적인 음악유산들을 고수하고 보존계승해 나가는 사업은 말그대로 민족성을 지키고 살리는 간고한 투쟁을 동반한것이였다. 민족수난기에 하규일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가곡가창의 명맥을 꿋꿋이 이어 후세에 보급전승되도록 하였으며 민족고전음악유산들을 보존계승하기 위한 사업을 정력적으로 벌려온 애국적이며 민족적량심을 간직한 음악인의 한사람으로 음악사에 깊은 자취를 남기고있다.
하규일은 민족수난의 비운과 뇌출혈로 신고하는 속에서도 가곡의 보존과 계승발전을 위하여 온갖 심혈을 기울여 오다가 1937년 5월 22일 70살을 일기로 생을 마쳤다.
* 내장원 - 1895년에 설치한 왕실소유의 보물재산, 토지, 건물 등을 관리하는 관청.
* 리왕직아악부 ― 조선봉건왕조시기 궁중음악담당기관인 장악원의 후신. 1466년에 여러 궁중 음악관리기구들을 개편통합하면서 설치된 장악원(당시 장악서)은 그때로부터 400여년이 지난 1897년에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 장례원 협률과로 개칭되였다가 다시 1900년 6월에 《교방사》(인원 720여명)로 개칭됨. 그후 일제의 책동으로 궁중기구들이 개편축소되면서 《교방사》는 1905년 3월에 《례식원 장악과》로 되였다가 1911년 2월 《리왕직 아악부》로 이름을 바꾸면서 57명으로 축소되였다. 그후에도 일제의 책동으로 여러차례 축소되여 1920년대 중엽에는 30여명으로서 명맥을 겨우 유지해가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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