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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과 대원각의 숨겨진 사연
박헌영과 대원각의 사연에 대해들은 바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는 "죽쩡이가 아니면 다 사회주의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회주의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희망이자 꽃이었습니다. 가장 치열하게 실질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가장 극악한 탄압과 고문을 받은 이들도 대부분 사회주의 범주 내 인물들이었습니다. 박헌영은 그 대표적 인물이었습니다.
해방이 되고 미군정과 이승만이 우파 민족주의 탈을 쓰고, 반민족 친일파들과 대한민국을 세우면서 좌파 빨갱이 사냥이 시작됐습니다. 사회주의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탄압이었습니다. 건전한 중도 우파 민족주의자들도 암살되거나 사라져갔습니다.
김구 선생보다 현상수배 몸값이 높았던 김원봉 조선의용군의열단장 같은 분은 일제시기 내내 일경들도 붙잡지 못했는데, 소위 해방된 조국에서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 노덕술에게 잡혀 뺨을 맞고, 고문당하며 갖은 모욕을 겪습니다. 분통이 터진 김원봉 단장은 며칠 동안 식음 전폐하고 통곡하다가 북으로 가고 맙니다.
이때 이후 대한민국 극우정권의 반민족 반역사 반시대 민족정기 훼손 DNA는 한반도 남반부 주류세력으로 미국 후원하에 자본주의 사탕발림 편법과 쿠데타 등으로 정권을 이어 옵니다. 마침내 70여년 세월 끝에 윤석열이란 정점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사라진 역사와 사라진 자주 통일 평화로운 독립 조국을 되찾기 위한 우리들의 항쟁은 윤석열이라는 꽝철이를 만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됩니다. 일제강점기가 미제 신식민지로 전환된 세월이 어언 80년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독립된 해방조국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닌 것입니다. 꽝철이 윤석열이 하는 짓이 그걸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2023. 7. 김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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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싶어요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까?
그렇다면 길상사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천억원이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는 김영한의 허언에 감동 먹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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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규는 충남 광산에서 식당과 여관을 하다가 금광 주인 조씨의 처가 되어 경영에 참여, 크게 벌었다
조봉희란 딸이 있었고, 남편이 폐렴으로 죽은 후 쌀장수 박현주를 만나 낳은 아들이 박헌영이다
박헌영의 씨 다른 누나 조봉희는 기생집을 경영했다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조봉희는 어머니를 닮아 경영수완이 있었고, 전북의 부농 김병순을 만나 김제술과 김소산을 낳았다. 조봉희는 김소산에게 외삼촌인 박헌영을 잘 모시라고 각별히 당부하였다
누나는 박헌영에게 ‘여기는 네 집이니 여기서 살라’ 했다 박헌영은 사회주의운동을 하는 사람이 이렇게 큰 집에서 살 수 없다고 말했다 이것을 지켜보며 자란 이화여전 출신 김소산은 박헌영을 존경하며 사회주의운동에 헌신하였다
박헌영을 후원하는 두산그룹 창업자 박승직이 건넨 자금을 박헌영은 김소산에게 주었고, 김소산은 기생집 대원각을 지어 운동자금을 벌어들이다가, 1949년 김소산 간첩사건이 터졌다. 김소산이 감옥에 갈 때, 기생 김영한에게 관리를 부탁했다
1950년 전쟁통에 김영한은 당시 국회부의장이던 이재학의 첩이 되어 대원각 큰 땅의 등기를 자기 앞으로 돌려 놓았다
김영한은 박헌영 아들(원경스님)에게 대원각을 돌려주겠다고 말은 하고 있었다. 원경스님은 대원각을 인수하면 부자들의 쉼터가 아닌 사회개혁의 교육기관을 세우려고 하였다
이에 불안을 느낀 김영한은 법정스님에게 대원각을 넘기며 당시 천억 원이 넘는 재산이 백석의 시 한줄 만 못하다는 허언으로 눈 먼 세상의 칭송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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