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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에 가다 1

영호남 차이/수운, 해월,녹두, 조병갑/요산 김정한 선생

프레스아리랑 | 기사입력 2023/04/24 [21:42]

안동에 가다 1

영호남 차이/수운, 해월,녹두, 조병갑/요산 김정한 선생

프레스아리랑 | 입력 : 2023/04/24 [21:42]

안동에 가다 1
- 영호남 차이/수운, 해월,녹두, 조병갑/요산 김정한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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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안동에 다녀왔다.
안동의 한 인물의 93주기 기념행사에 그의 고향 안동을 찾았다.
그는 혁명가로 불과 삽십대 초반에 독립과 순국의 삶을 마친 한국의 예수와 같은 불꽃 같은 짧은 삶을 살은 주인공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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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나의 고향인 호남의 전주와 같은 곳이 안동일지도 모른다. 옛 뿌리가 강한 땅으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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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 진성이 부른 <안동역> 에서로 안동은 대중들에게는 새롭게 히트로 떳는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오랜 무명가수와 병고를 당하던, 사실상 고아처럼 성장하였다는 진성이 그 노래로 대박을 치고 힘을 얻었다는 것은 나름 인간적으로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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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아마도 한국의 근대와 현대사에서 안동과 영남이 보수의 땅과 본거로, 그리고 그 대척점에 호남과 전주 광주는 동학혁명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반골과 혁명의 땅과 흐름으로 이어져 오는 측면도 있다. 어쩔 수 없이 역사적 사실들도 그렇고 오늘의 현실에서도 부정할 수 없는 그런 현상들이 이어져 오는 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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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특히 박정희의 20년 가까운 집권을 통하여 그리고 그 이후 그의 군사철권통치를 계승한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통하여 그리고 이명박과 박정희의 딸 박근혜의 어이없는 대통령이 되는 –비록 중도에 탄핵당하여 도중에 낙마하고 감옥에 투옥되어 있다가 사면으로 간신히 풀려나오기는 했지만 -이런 보수와 극우 집착 현상은 이 곳에 상당히 깊게 뿌리 내린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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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가 필요할 수 있다. 조금 깊게 따져본다면, 반골과 혁명의 땅으로서의 전라도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며 특히 근, 현대사의 큰 분기인 1894년 깁오동학농민혁명으로 인하여 녹두장군 전봉준과 김개남 손화중들과 농민, 민중에 의한 위대한 혁명의 불길과 전쟁이 호남과 전주를 중심으로 가히 전국적으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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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더 깊게는 이 위대한 사변인 동학농민혁명을 가능케하고 그 씨를 뿌린이는 경주가 고향인 몰락한 양반 출신인 수운 최제우였고 그가 대구 장대에서 젊은 나이에 조선의 예수처럼 불과 40생애를 처형으로 마감하였다. 그리고 무서운 관헌들의 체포령과 엄중한 수색과 탄압 속에서도 길고 긴 세월동안 조선 방방곡곡을 두발로 돌아다니면서 잠행 속에서 지하포교를 계속하여 가히 조선의 위대한  <사도 바울>로 일컫어지며 그의 스승이자 교조인 최수운이 창도한 동학을 민중 속에 길고 긴 세윌에 걸쳐 조선의 사도 바울처럼 민중 속에 깊게 널리 거대한 에너지로 형성하고 숙성시킨 이가, 초명은 최경선 훗날 아호는 해월인  최시형이었다. 그 또한 경주 태생이었다. 그는 1827년에 태어나 1898년 72세 당시로서는 고령이지만 끝내 동학의 수괴로 체포되어 교수형으로 처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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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장군 전봉준이 갑오년 그 통한의 우금치에서의 일본군들에게 비참하게 기관포와 비교도 아니되는 화력 속에서 마침내 동학혁명군이 궤멸되어 항전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동학혁명군의 해산을 명령한 후 다시 내일을 도모하며 피신중에 순창의 피노리 마을에서 옛 부하의 밀고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모습은 그것을 시로 써서 그의 문단 데뷔를 이룬 젊은 시인 안도현이 아니더라도 나와 많은 이들의 심장에 깊게 각인된 그 모습이었다. 그와 함께 당시로서는 극노인인 최시형, 그의 피체되는 산발한 모습과 신산스러운 못차림의 모습은 많은 이들의 가슴에 깊이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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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이 최시형의 체포된 사진을 훗날 민중신학을 안병무와 더불어 창도한 죽재 서남동은 자신의 서대문에 옛 선교부의 건물에 있던 기독교장로회 선교교육원장실에 일체의 그가 생전에 오랫동안 사모하고 천착하였던 기라성 같던 서구신학자들의 사진은 일체 없이, 이 신산스러운 70 극노인 해월 최시형의 마지막 피체되던 사진을 걸어놓고 경책, 경성의 시선을 던지곤 하였다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오늘 우리의 상황에서 가히 최고의 원로 신학자로 존경을 받는 숨밭 김경재 교수님의 저서와 말씀 속에 인상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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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 해월 최시형에게 사형을 재판장으로서 판결한 자가 하필이면 고부군수로서 만석보를 부러 만들어 무서운 민중의 토색질로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명을 촉발시킨 악명 높은 조병갑이었다. 이자는 처형을 당해도 부족한 탐관오리였고 민중들에게는 불구대천의 대역, 중죄인이었다. 그는 결코 씻지 못할 이런 범죄로 그러나,겨우 1년간 강진군 고금도 유배되어 근신하는 척 하였으나 당대의 권력자 조두순의 서자이며 중앙권력과 끈끈한 관계를 지니던 조병갑은 불과 일년 후에 사면 복권되어 고등재판관의 신분으로 다시 기연이며 악연같은 드라마의 한 장면으로 그가 원인을 제공한 동학농민혁명의 또 다른 수괴 인물인 해월 최시형에게 사형의 판결을 내린 것이니 이것이 한말 이씨 왕조의 조선이 망하지 않으면 이상한 필연이 아니고 무엇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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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놈들과 왕과 세력 때문에 필연적으로 조선이 망하고 일제식민지가 되어서도 봉건시대에 호의호식하던 세력과 무리들이 왕족들로서는 일제로부터 특권을 유지하며 작위와 부를 보장받고 수많은 관료와 양반과 토호세력들이 일제에 복속하여 충성하고 그들의 충견틀, 기생세력으로 잘 살다가 해방과 더불어 반민족세력으로 다시 근절이 되어야만 하는 상황에서 다시 친미 반공세력으로 둔갑하고 보존되어 오늘까지도 온존 환산된 것이 우리 한국정치와 역사의 기본모순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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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교수로 있다가 노무현 정권시절에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낸 조기숙의 증조부가 바로 이 악명높은 역사적 범죄자 조병갑이었다. 이 조병갑은 고부군수의 패악질 토색질 당시에 녹두장군 전봉준의 아버지인 전창혁을 민중을 선동한다고 끔찍한 장살형으로 목숨을 끊어낸 바 있고 그 아들이 가난한 훈장과 동학의 접장으로 있다가 바로 훗날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전명숙, 훗날의 녹두장군-전봉준이었다. 그는 1855년 1월 10에 태어나 1895년 4월 24일에 수운 최제우와 같은 40세의 나이로 일제의 사주 속에 겉으로는 조선의 한성부에서에 교수형으로 처형된다.
그는 의연히 죽어가던 마지막 순간에 ”나라 위한 붉은 단심 그 누가 알랴“라는 절명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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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앙대 사학과 교수로 일찍이 동학혁명운동에 대한 좋은 연구와 글을 쓰시던 김용덕 선생님과 고대 사학과 교수로 민주주의에 대한 좋은 글을 쓰시던 김성식 선생님을 나름 존경하면서 원래는 사학과 전공으로 대학생이 되고 싶어했던 사상계를 탐독하던 조금 이상하고 조숙한 고교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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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고교생이 사학도의 연장선상에서 사회과학도가 되고 또 다른 필연성에서 신학을 하고 운동가와 시인으로 삶을 추구하려하였다. 그리하여 사제로서의 소명 내지 사명감과 전태일의 삶과 죽음에 대한 채무의식에서 공장에 들어가서 어려운 일이지만 좋은 꿈과 추구를 하며 노력하다가 좌절당하면서 독일유학을 떠나기 직전에 자신의 이십대 청춘의 고뇌와 열망과 시와 꿈을 엮어 시집을 발간하고 구라파로 떠나갔다. 그 어간에 내가 평소에 존경하던 문학의 어른과 시인 작가 선생님들에게 자신의 무명시집을 증정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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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발간해내고 유학준비로 무척 분망하던 상황에서 어느 날 엽신들이 날아들었다. 아, 한분은 그 당시에 문단의 최고 어른이자 민족문학진영의 최고 어른으로 추앙되던 요산 김정한 선생이셨다. 그분의 함자를 대하며 나는 놀랐다. 그분의 육필로 쓰신 엽신의 내용에 보내주신 시집은 ”위대한 사랑의 울부짖음과 절규“라는 말씀을 주셨다. 이제 시집 한 권으로 세상과 문단에 갓 나온 무명 소졸에게 큰 그릇이신 문단의 최고 어른이 주시는 따뜻한 격려와 인사였겠으나 나로서는 평생 격려와 귀한 인연으로 간직할 잊지못할 일이었다. 조금 여유가 있었다면 – 아니 인사로라도 필히 부산에 거주하시던 선생님을 찾아 뵙고 가르치심 말씀을 듣고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만 마땅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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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에서 돌아오니 고령의 선생님은 이미 이 세상 분이 아니신 허전함이 있었다. 요산 김정한 선생님은 창립된 민족문학작가회의 초대 회장과 어른이 되셨다. 마땅히 당연한 일이었다. 유학에서 돌아온 나도 신경림 선생 권유와 추천으로 민족문학작가회의에 입회하였다. 요산 김정한 선생님은 평생 영남, 부산에 거주하시면서 ‘낙동강의 파숫군’으로서 ‘인간단지’의 문학을 일구시면서 영남과 부산지역에서는 예외적으로 지역정서를 외롭고 의연하게 뛰어넘은 소신으로 김대중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셨다. 그분의 소설 ‘사하촌’이나 어느 소설에 나오는 가야부인의 이름과 내용들은 나의 시와 문학에서도 엄연하고 소중하게 깃들어 있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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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과 해월의 동학과 이육사의 삶과 시와 문학 그리고 요산 선생의 삶과 소설과 작품과 나와의 인연 또한 천박한 영호남의 지역적 차이와 갈등과 모순을 본질적으로 뛰어넘는다.
내가 찾아가려던 안동땅 – 조선의 모스코바로 불리우던 혁명가들의 고향과 그 내력 또한 그러한 고귀한 줄기와 강물과 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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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출간 후 멀지 않은 시간에 신경림 시인을 비롯하여 매우 긍정적인 평문들이 나와 감사하고 행운스러운 일이었다. 출간 직후 또 다른 정중한 격려와 인사의 엽신이 평소에 존경하던 <분지>의 작가 남정현 선생님이셨다. 작은 엽서에 활달하고 굵은 연필 필체로 따뜻하신 격려와 인사의 내용을 담으셨다. 유학에서 돌아와 단아하고 따뜻하신 선생님과의 인연과 관계가 소중하게 이어졌다. 선생님은 나에게 한일관에서 갈비탕을 사주시고 겨울거리에서 따뜻한 군밤도 사주시고 문학과 삶과 역사에 대한 귀한 대화는 수없이 이어지는 축복을 감사하게 주셨다. 막상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시집이나 작품집을 적지않게 받으면서도 ㅡ마음이 가는 시집과 작품집들이 있어도 ㅡ 나 스스로 이 어른 귀한 선배님들 그림자도 못밟는 어쩌랴..너무 부족하고 못난 자신임을 항상 자책한다.

 

 

                                                                                          최자웅(신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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