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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연재)『민족수난기의 가요들을 더듬어』2

민족수난기의 신민요들을 더듬어

프레스아리랑 | 기사입력 2023/03/10 [00:39]

(도서연재)『민족수난기의 가요들을 더듬어』2

민족수난기의 신민요들을 더듬어

프레스아리랑 | 입력 : 2023/03/10 [00:39]

『민족수난기의 가요들을 더듬어』

 

 

 

2. 민족수난기의 신민요들을 더듬어

 

우리 나라 전래민요를 밑거름으로 하여 새롭게 창작한 민요조의 노래를 신민요 또는 현대민요라고 일러왔다. 민요조의 노래로 사람들의 감정을 민족적인 정서로 정화시켜주고 계몽시켜주는 역할을 하였기때문에 민족수난기에는 신민요를 중요시하여왔다.

전래의 민요들은 민간에서 창작되여 가창으로 전해져왔기때문에 작사자와 작곡가들을 알수 없지만 신민요는 전문가들에 의하여 창작되였기때문에 작가, 작곡가들이 전해오고 있다.

신민요란 말이 처음으로 쓰이게 된것은 1933년경부터였다.

이 시기 작곡가 리면상은 《꽃을 잡고》라는 민요조의 노래를 작곡하여 당시 민요가수 선우일선의 노래로 레코드취입에 넘기면서 민요라고 쟝르를 밝혔다.

이것을 본 작곡가들은 이 작품은 엄연한 창작인데 어떻게 민요라고 할수 있는가라는 의견을 제기하였다.

그리하여 리면상은 전래의 민요와 새로 창작되는 민요조의 노래를 구분하기 위하여 새《신》를 달아서 《신민요》라고 하는것이 어떤가 하고 문의하였다. 그러자 동료작곡가들도 그것이 좋겠다고 일치하게 지지하였다.

그러자 《포리톨》레코드회사는 《꽃을 잡고》의 음판을 제작하면서 신민요의 첫 작품으로 요란스럽게 광고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리면상은 이것을 반대하면서 신민요의 첫 작품은 《오케》레코드에 박부용의 노래로 취입된 신불출 작사, 문호월 작곡인 《노들강변》을 첫 작품으로 보아야 옳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신민요는 민족음악에 바탕을 두고 현대적미감이 나게 새롭게 창작한 민요이며 따라서 민요로서의 예술적품격을 갖추어야 하기때문이였다.

그 시기 리면상의 이러한 제기에 의하여 음단에서는 《노들강변》을 신민요의 첫 작품으로 보는데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

《노들강변》은 그 시기 성과작이였으며 민족의 재부로 될만 한 월작이였다.

이리하여 이 소식을 전해들은 《오케》레코드회사에서는 《노들강변》을 다시 재판제작하면서 이 노래가 신민요의 첫 작품이며 계속 늘어나는 수요자들의 요구를 수락하여 다시 재판제작한다고 광고하였다.

《노들강변》이 창작된 년대는 1930년이다.

작곡가 문호월은 1930년에 접어들면서 고뇌의 나날을 보내고있었다.

이 시기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신작가요들과 신작무용들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학무국의 《검열원》이란 자들을 내세워 악착스러운 탄압책동에 열을 올리고있었다.

일제는 조선에 《총독부》가 설립된지도 20년이나 되였는데 조선사람들이 이제는 일본노래 몇곡씩은 부를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일제의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우선 조선의 가수들부터 일본노래를 부르는데 앞장설것을 강요하여나섰다.

이에 격분한 작곡가 문호월은 나라를 잃은 망국의 설음을 통탄하면서 울분에 찬 나날을 보내고있었다.

그 시기 일본 우에노음악학교에 입학하였다가 학비사정으로 집에 돌아와 무용창작에 뜻을 품고있던 옥명화는 문호월을 찾아와 조선의 민족적인 춤가락을 살리면서도 현대적미감이 나는 무용곡을 창작해줄것을 부탁하였다.

그의 부탁을 쾌히 수락한 문호월은 여러날 고심하였으나 신통한 곡상이 잡히지 않아 모대기던 어느 날 신불출과 함께 친구의 병문안을 갔다가 서울의 로량진나루를 건느게 되였다.

로량진은 서울의 중심에서 벗어난 한강의 중요한 나루터였다.

작곡가 문호월은 노를 젓는 사공의 노래소리에 심취되면서 기슭을 치며 흘러가는 물결우에 칭칭 늘어진 봄버들이 한폭의 그림처럼 수면에 비낀것을 보고 여기에서 곡상을 얻었다고 한다.

그가 곡상을 골라잡는 사이에 배는 어느덧 강기슭의 착선장에 와닿았다. 작곡가 문호월은 배에서 내리기가 바쁘게 어느 한 목로집에 들렸다.

목로집이란 자그마한 술집을 이르는 말인데 담배불에 타고 그슬은 낡은 상을 놓고 신불출과 마주 앉은 문호월은 선률을 적어 나갔고 신불출은 가사를 써서 선률에 밀착시키며 시어를 다듬었다.

이렇게 되여 세상에 나온 노래가 신민요 《노들강변》이다.

이날 작곡가가 건너온 로량진나루는 옛날에 노들나루라고도 하였다.

《노들》이란 어휘는 지명이기도 하지만 낫버들의 준말 이다.

낫버들이란 로양나무나 수양나무같이 큰 버드나무가 아니라 낫으로 베기 알맞춤한 버들을 이르는 말이다.

《노들나루》, 《노들강변》, 《노들갯변》 등은 이런 낫버들이 많은 곳이란 의미에서 생겨났다.

한강의 로량진나루를 옛날에는 《노들강변》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런 지명들은 다른 지방들에도 있다.

자강도 전천군 화암리로 흐르는 장자강의 화암나루를 옛날에는 《노들변나루》라고 하였으며 함경남도 장진군과 영광군과의 접경을 이루는 황초령에서 고토(황초리)를 감돌아 흐르는 버들방천의 장진강류역을 《노들강변》 또는 《노들갯변》이라고도 하였다.

우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노들》이란 말은 낫버들을 이르는 말이다. 이 어휘는 이미 고어로 되여 우리들의 생활에서 사라져버렸지만 이런 낫버들은 옛날에 바구니와 키를 비롯한 가정용품들을 만드는데 리용되였다.

그러므로 노들강변이란 말은 이런 낫버들이 많은 강변을 이르는 말이다.

작곡가 문호월은 한강의 로량진나루(노들나루)를 건느면서 수면에 비낀 봄버들을 취급대상으로 이 작품을 창작하였으며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낫버들(노들)이 많은 강변을 념두에 두면서 부른다.

1930년에 이 노래가 창작되자 옥명화는 동료들이 보태주는 돈으로 무용을 창작하여 단성사에서 《신작무용발표회》를 가지기로 하였다.

그러나 반일감정이 강한 옥명화를 《요주의인물》로 감시해오던 일제의 경찰은 그의 《신작무용발표회》를 《총독부》 학무국의 《검열승인》이 없다는 트집을 걸어 《금지령》을 내렸던것이다.

이렇게 되여 단성사에서 《매화타령》으로부터 시작하여 《노들강변》으로 마감을 장식하려 하였던 옥명화의 《신작무용발표회》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후 리철에 의해서 《노들강변》이 레코드에 취입되였다.

리철은 그 시기 트롬본, 트럼베트에서 첫손에 꼽히는 연주가였으며 《오케》레코드회사의 창설자였다.

무용곡으로 창작된 이 노래가 일제경찰의 탄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된것을 알게 된 리철은 이 시기 레코드회사 창설운동을 벌리면서 시험삼아 다른 레코드회사에 의뢰하여 제작해본것이 박부용의 노래로 취입된 《노들강변》이다.

그는 1932년 12월에 《오케》레코드회사의 창설을 공식적으로 선포하고 1933년에 이 회사의 개설곡으로 《노들강변》을 재취입하였다.

1930년에 《노들강변》으로 무용을 창작하였으나 일제경찰의 탄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옥명화는 중국 룡정으로 건너가 조선인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향무회》라는 비상설적인 무용회를 조직하여 무용 《노들강변》을 무대에 올려 해외에서나마 그 뜻을 이루게 되였다.

이렇게 망국비운의 설음속에서 창작된 《노들강변》은 그 시기 선진적인 작곡가들에 의하여 신민요의 첫 작품으로 소개되군 하였다.

물론 《노들강변》이전에도 전래의 민요에 기초한 몇몇 작품들이 창작되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팔청춘가》와 《신아리랑》 등은 전래의 민족적선률에 가사를 새롭게 창작하여 밀착시키는 과정에 선률들이 다듬어졌기때문에 완전한 의미에서 새로운 창작은 아니였다.

그러나 《노들강변》은 신민요로서의 새로운 예술적경지를 개척하였기때문에 그 시기 작곡가들과 음단에서는 이 작품을 신민요의 첫 작품으로 소개하였던것이다.

이 노래의 작곡가인 문호월은 1908년에 경상북도 김천에서 출생하여 황해남도 해주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후 서울 휘문고보를 졸업한 이후 바이올린연주가로 활동하면서 서도민요들을 연구수집하고 채보하는 과정을 통하여 작곡가로 성장하게 되였다.

그는 《노들강변》을 창작한 이후 《불사조》, 《앞강물》, 《봄맞이》, 《봄아가씨》, 《봄강》, 《오대강타령》, 《뽐내지 마소》 등 많은 민요조의 노래들을 창작하였으며 대중가요들도 창작하였다.

그의 사망년대는 1943년이란 기록도 있고 1953년이라는 기록도 있으나 1943년이라는 기록들이 더 많다.

문호월의 《노들강변》이 창작된 이후 리면상의 《꽃을 잡고》, 《뻐꾹새》, 《님 오실 때 되였는데》, 《물결따라》, 《한가위노래(추석의 노래)》, 《그네 뛰는 처녀(추천)》, 《사랑가》, 《날 다려 가소》, 《영춘가》, 《사랑의 길은》을 비롯하여 형석기의 《조선팔경가》, 전수린의 《금수강산 에라 좋구나》, 김교성의 《능수버들》, 《아리랑랑랑》, 김해송(김송규)의 《천리춘색》, 《약산의 진달래》, 김준영의 《봄이 왔네(처녀총각)》, 김룡환의 《꼴망태목동》 등 수많은 신민요들이 창작되였다.

아래에 리면상 작곡인 《사랑가》의 가사를 적어본다.

 

1. 수박같이 둥근 사랑

   참외같이 달고 달아

   오이같이 순한 정이

   앵두같이 무르익어

   딸기같이 피운 정

   백년해로를 하자꾸나 응

   백년해로를 하자꾸나

2. 고추같이 붉은 사랑

   벼알같이 영글어서

   호박같이 수수하게

   사과같이 무르익어

   오곡처럼 가꾼 정

   백년해로를 하자꾸나 응

   백년해로를 하자꾸나

3. 복사같이 푸른 청춘

   대추같이 주름 돋어

   호도같이 굳은 맹세

   잣과 같이 변치 않고

   석류같이 멋이 있게

   백년해로를 하자꾸나 응

   백년해로를 하자꾸나

 

이 시기 대부분의 대중가요들이 슬픔과 눈물에 젖어들고 있을 때 신민요는 전래의 민요들을 밑거름으로 하여 흥겨운 선률들을 엮어나갔다.

아래에 박영호(처녀림) 작사, 김교성 작곡인 《아리랑랑랑》의 가사를 적어본다.

 

1. 봄이 오는 아리랑고개

   제비 오는 아리랑고개

   가는 님은 밉단이요

   오는 님은 곱단이라네

   아리아리랑 아리랑고개는

   님 오는 고개

   넘어넘어도 우리 님만은 아니 넘어요

2. 꽃이 피는 아리랑고개

   새가 우는 아리랑고개

   피는 꽃은 진달래요

   우는 새는 종달이라네

   아리아리랑 아리랑고개는

   새 우는 고개

   넘어넘어도 우리 님만은 아니 넘어요

3. 달이 뜨는 아리랑고개

   별이 뜨는 아리랑고개

   돋는 달은 유정이요

   지는 달은 무정이라네

   아리아리랑 아리랑고개는

   달 뜨는 고개

   넘어넘어도 우리 님만은 아니 넘어요

 

이 노래와 함께 《에 금강산 일만이천 봉마다 기암이요/ 백두산 높고높아 창공에 솟았구나》로 긍지높이 엮어진 왕평 작사, 형석기 작곡인 《조선팔경가》와 《봄이 왔네 봄이 와 숫처녀의 가슴에도/ 나물캐러 간다고 아장아장 들로 가네》라고 흥취나게 이어지는 《처녀총각》 등 알차고도 구성진 수많은 신민요들이 창작된것은 참으로 우리 민족의 자랑이 아닐수 없다.

 

 

 

1) 신민요의 창작과정과 대중가요와의 호상관계

 

신민요는 민족적바탕에 토양을 두고 의도적으로 창작된 가락들도 있지만 예술가요나 대중가요들을 창작하는 과정에 민요조에 가까운 노래들이 창작되기도 하였다.

이 책에 실린 악보들을 통해서도 알수 있겠지만 홍란파의 《봄처녀》는 민요조에 가까운 노래다. 그리고 안기영의 《그리운 강남》은 동요이지만 선률을 더듬어보면 민족적인 바탕우에서 창작한 노래임을 알수 있다.

1920년대말엽과 1930년대에 이르러 일명 《류행가》로 치부되던 《한양은 천리원정》, 《날 다려 가소》, 《날라리바람》, 《앞강물》, 《오동나무》, 《가려거든 어서 가소》 등은 엄연히 신민요인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우에서 지적된 곡명들은 이미 오래전에 민요집들을 묶으면서 일부 잘못된 쟝르의 표기들을 바로잡아 신민요로 구분하였다.

1920년대말엽과 1930년대초에 이르러 작곡가 문호월은 철저하게 민족적바탕에 토대하여 새로운 예술적경지를 개척하기 위한 고심어린 탐구와 노력을 기울여 《노들강변》과 같은 명작과 《봄아가씨》, 《세월아 가지 말아》 등의 민요조의 노래들을 창작할수 있었다.

그러나 《노들강변》, 《봄맞이》를 제외한 문호월의 작품은 가수의 선택을 잘못한탓으로 응당 거둘수 있는 예술적성과들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 시기에는 잡지의 지면들에 음악이 실린다거나 음악도서가 출판되는 일이 드물었기때문에 오로지 레코드가 음악의 유일한 보급통로였다. 그리고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음판에 취입된 노래가 귀맛이 당겨야 그 노래를 배우면서 자신의 애창곡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는 작곡가가 작품을 창작하면 가수의 선택이 매우 중요하였던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작곡가들은 자신의 노래를 불러줄 가창자를 선택해놓고 그의 창법에 맞게 작품을 창작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에 왕수복과 선우일선의 취입판들중에서 대부분의 신민요들은 작곡가 리면상선생이 그들의 창법에 맞게 창작한 노래였다. 그리고 리화자가 취입한 대부분의 신민요들은 김룡환 작곡인데 그도 가수의 창법과 기호에 맞게 창작한 노래였다.

그런가 하면 대중가요들을 창작하는 과정에 민요조의 노래들이 창작되기도 하였다.

민요조의 노래란 신민요나 그에 가까운 풍의 노래를 의미하는데 이 시기에 창작된 일부 신민요들은 우리 민족이 일제식민지의 기반에서 신음하던 때였으므로 가사창작에서 슬픔이 안배되지 않을수 없었고 작곡가는 가사문학에 담겨진 민족의 비애를 피할래야 피할수 없었다.

그리하여 선률은 민요조로 흐르지만 노래가 안고있는 내용은 비탄적이다.

물론 민요에는 슬픈 가락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민요가 안고있는 양상적특성에 맞는 전래의 가락이다.

신민요는 우리 조상대대로 물려오는 민족적인 가락에 토대하면서도 현대적미감에 맞게 창작하여야 한다. 그런데 창작과정에 대중가요풍과 혼잡을 이룬 작품들도 있다.

례를 들면 리화자의 취입판인 《화류춘몽》, 《기다리는 마음》, 《화륜선아 가거라》를 비롯하여 박향림의 취입판인 《사나이 마음이란》 등이 그러한 노래들이다.

이상과 같은 노래들은 가사와 선률이 적중하게 예술적밀착을 이루지 못하여 신민요로서의 품격을 갖추지 못하는 결과가 빚어지기도 하였다.

바로 신민요와 대중가요(류행가)는 쟝르적특성이 엄연히 구별되면서도 밀접한 관계속에서 창작되였다.

왜냐하면 신민요만을 전공하는 작곡가는 따로 없었고 대중가요들을 창작하던 작곡가들이 민성(民聲)의 창법을 지닌 가수들의 기호에 맞게 창작하다보니 이런 작품들이 신민요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1930년대에 음판들에 취입된 신민요들의 선률이나 반주들에는 대중가요풍의 흔적이 남아 있고 대중가요들에는 민요조에 가까운 노래들도 있다.

아무튼 노래는 사람들속에서 불리워지면서 그들의 사상정서를 맑게 정화시켜주는것이 자기 본연의 예술적사명이다.

어느 한 노래가 창작되여 사람들속에서 불리워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술로서의 자기의 생명력을 잃기마련이다.

바로 그 시기에는 세상에 태여난 대중가요와 신민요들이 사람들속에서 불리워지지 않아 흘러가는 구름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것이 수다하다.

물론 대중가요들을 창작하던 작곡가들이 민요조의 노래들을 창작하다보니 이러한 타작현상들이 초래되였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은 작곡가들이 신민요의 새로운 예술적경지를 개척하기 위한 사색과 탐구와 노력이 부족하였던탓으로 대중가요의 풍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채 이와 같은 얼치기노래가 되여버려 사람들속에서 비난을 받지 않으면 안되였다.

문제는 피타는 노력이 있어야 하나 손쉬운 방법으로 창작하다보니 이런 결과가 초래되였다고 본다.

그런가 하면 세상에 나와 일정하게 평가를 받은 일련의 신민요들도 반주의 편곡에서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이 시기의 대중가요나 신민요의 반주들을 더듬어보면 제1박, 제3박이 저음으로 되여있고 제2박, 제4박이 고음으로 연주되고 《쿵짝쿵짝》 하는 소리를 내여 민간에서는 이런 류의 음악을 《쿵짝》이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신민요의 선률이 안고있는 특색을 살리지 못하고 대중가요풍으로 반주가 편곡되여 《류행가》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 창작된 대부분의 신민요들은 알찬 가락들이며 오늘 귀중한 음악유산으로 남아있다.

더우기 1930년대는 신민요를 창작하면 그것을 평가해 주고 장려해주는 창작지도기관이나 비상설적인 평가단체마저도 없었기때문에 제각기 제나름이였고 지내 자연발생적이였다.

그러다보니 신민요란 쟝르는 세상에 태여났지만 그 싹이 활력있게 자랄수 없었고 발전할수도 없었다.

이 시기는 신민요나 가요를 창작할수 있는 작곡가양성체계도 없었고 가수들을 키워내는 양성소나 강습소마저도 없었기때문에 고작해서 《음악콩클》을 조직하여 가수들을 선발하는것이 전부였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이 일제의 기반에서 신음하던 민족수난기에는 신민요가수들은 고사하고 대중가요를 부르는 사람들도 몇몇밖에 되지 않았다.

한편 이 시기는 가수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녀성들속에서는 더욱더 없었다.

왜냐하면 예술을 천한 직업으로 생각하는 녀성들이 많았고 가창력이 있는 녀성들은 가수가 되면 나중에는 기생이 된다거나 아니면 타락의 길을 걷지 않을가 하는 생각으로 하여 무대에 나가 노래를 부른다거나 레코드취입을 하려고 하지 않았기때문에 신민요를 부를 가수가 적을수밖에 없 었다.

물론 전래의 민요들을 부른 가창자들은 얼마간 있었다. 서도민요로서는 장학선, 문명옥, 김진명, 최순경, 김칠성, 김윤식, 오봉기, 김종조 등이 명창이였고 《가곡, 가사》와 《시조》의 명창으로서는 리영산홍(李英山紅), 백모란 등이였다. 그리고 경기도민요로서는 장경순, 김란홍, 김인숙, 박부용, 김선월, 조모란, 김갑자 등이 명창으로 알려졌고 전라도의 《륙자배기》와 《판소리》, 《단가》의 명창들로는 송만갑, 리동백, 정정렬, 림방울, 김창룡, 리화중선, 오수암, 박록주 등이 명창들이였다.

그러나 전래의 민요들을 부른 이들 대부분은 신민요를 《잡탕음악》, 《얼치기음악》으로 치부하면서 배척하였고 오로지 전래의 민요들만을 부르면서 자신의 가창으로 그 가락들을 보존하려고만 하였지 새로운 가락으로 혁신할 생각들은 하지 않았다.

일제의 착취밑에서 시달리던 민족수난기에 조상대대로 물려오는 우리의 민족적인 옛 가락들을 보존하고 고수하기 위한 그들의 애국심의 발현들은 참으로 존경할만 한 일이였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대로 신민요를 《잡탕음악》이나 《얼치기음악》으로 배척해버린다면 우리의 민족음악은 발전의 일로를 걷지 못하고 백년전에도 그 노래요, 백년후에도 그 노래로 남아있을것이다.

그래서 우리 나라의 민족음악의 미래와 그 발전을 위하여 신민요의 싹을 귀중히 여기게 되였다. 그런데 이 시기에 신민요를 창작하는 작곡가들에게는 고충이 있었다. 작곡가가 아무리 민요조의 노래를 창작하였다 할지라도 그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어떤 풍의 가수인가에 따라 생명력이 좌우되기도 하였다.

전형적인 대중가요풍의 가수가 신민요를 부른다면 그 노래가 안고있는 예술적요구를 소화할수 없는것은 당연한 리치였다.

문제는 민족음악의 고유한 발성체계가 온몸에 푹 젖어있어야만 신민요가 안고있는 형상적요구를 살릴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수는 불과 몇몇 사람밖에 없었다.

이렇게 대중가요풍의 범람속에서, 더우기 나라를 잃은 망국의 설음속에서 외롭게 발족한 신민요의 행적을 더듬고보니 음판들에 귀중한 가락들을 남긴 몇몇 가수들도 간추려 보고 넘어가야 할것 같다.

1930년대초부터 널리 활약한 왕년의 인기가수 왕수복은 창법이 독특하고 주력이 좋은 가창자로 널리 알려졌다.

노래의 형상에서 부드럽고 은근한 맛을 주면서도 음역을 넓게 쓰는 특기로 하여 《삼천리》를 비롯한 잡지들에서는 그의 형상력을 두고 《설레이는 바다》로 비유하였던것이다.

아무튼 그의 창법은 독특하여 민요조의 노래를 형상하는데서 운치와 멋을 돋구는 남다른 장점이 있었다. 그가 부른 《뻐꾹새(포곡성)》, 《어부사시가》, 《봄맞이아리랑》 등을 비롯한 여러 신민요들을 들어보면 그의 특기를 알수 있을것이다.

이 시기에 왕수복은 녀류가수들중에서 노래의 형상력이 출중하여 인기가수로 널리 알려졌으며 잡지 《삼천리》에서 조직한 인기투표에서 단연 1등을 하여 민간에 더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그러나 일제식민지통치기반에서 그의 노래는 참답게 꽃 필수 없었다. 8.15광복이후 어버이수령

김일성대원수님의 은혜로운 품속에서 왕수복의 노래는 드디여 봄을 맞이할수 있었으며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가꾸시고 이끄시는 주체예술의 화원속에서 그의 노래도 활짝 꽃피여날수 있었다.

광복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는 수많은 노래를 불렀으며 《그네뛰는 처녀》, 《물소리 기계소리 들에 넘치네》, 《물레야, 동무야》, 《묘향산가》, 《어화 우리 농민들아》 등을 비롯하여 《닐리리야》, 《매화타령》, 《화편》 등 수많은 민요풍의 신작작품들과 전래의 민요들을 불러 귀중한 유산들을 남겨놓았다.

물론 왕수복은 민요가수만이 아니였고 《칠석날》, 《인생의 봄》, 《청춘을 찾아서》와 같은 대중가요들도 잘 불렀으며 레코드취입과 더불어 무대가수로 보다 많이 활약하였다.

한생을 음악과 더불어 살아온 왕수복은 왕년에 공연을 마치고 극장문을 나설 때에는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길을 막군 하였다.

노래를 하도 잘 부르는 명가수인지라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자는것이였다. 그리고 한때 왕수복이가 곰보라는 헛소문이 돌기도 하였는데 사실인지 아닌지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리라고 모여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럴 때면 왕수복은 《아니 왜 길을 막아요? 호호호, 제가 곰보인가 해서요? 자, 어서 가까이 나와서 자세히 보세요. 내가 곰보인가 아닌가를…》

그러자 왕수복의 얼굴을 자세히 보던 한 중년부인은 《실례하겠습니다.》 하며 얼굴을 손으로 쓸어까지 보고는 《아이고머니나! 내가 헛소문을 듣고 속았댔구나!》고 말하자 모여섰던 사람들속에서는 폭소가 터져나오기도 하였다.

이렇듯 왕수복은 자신의 인격을 깎아내리는 이런 헛소문이 돌기도 하였으나 성을 내는 일은 한번도 없었으며 여유 있고 아량있게 웃어넘기면서 락천적으로 생활하였다.

그리고 다른 또 하나의 헛소문이 돌기도 하였는데 여기에 그의 구술을 적어보기로 한다.

 

《해외와 남조선에서는 제가 전쟁시기 서울에서 인민군정찰병에 의해 랍북된것으로 알고있나봐요.

몇해전에 우리 나라에 왔던 한 해외동포가 저를 만나서 하는 대부분 말이 그렇게 알고있다는것이 아니겠어요.

그들은 왜 나를 랍북가수라고 하는지는 알수 없으나 저는 평양이 고향입니다. 광복전에는 레코드취입을 위해 한때 서울에 나가있었던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8.15광복을 평양에서 맞이하였고 오늘까지 평양에서 살고있습니다.》

(1997년 3월 5일)

 

그는 여러차례에 걸쳐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을 모시고 진행되는 공연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여러차례에 걸쳐 어버이수령님의 치하의 교시와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치하의 말씀을 받는 영광을 지니였다.

특히 1997년 4월 29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왕수복에게 은정어린 여든돐생일상을 보내주시고 음악으로 한생을 살아온 그의 삶을 빛내여주시였다.

그런가 하면 1997년 9월에는 윤이상음악당에서 왕수복의 독창회를 열도록 하시였다.

예로부터 인간칠십은 고래희(古來稀)라는 말이 전해왔다.

이 말은 인간칠십을 살기가 힘들고 칠십을 사는 사람이 드물다는데로부터 생겨난 말인데 하물며 팔십나이에 독창회를 한다는것은 일찌기 있어보지 못한 일이다.

참으로 왕수복은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은혜로운 보살피심속에서 인생의 로년기에도 음악과 더불어 보람있는 나날을 보내고있으며 음악연구와 후비양성에 온갖 정력을 다 바치고있다.

왕수복과 함께 선우일선도 많은 신민요와 전래의 민요들을 부른 서도민요풍의 가수의 한사람이였다.

왕수복의 가창력을 두고 《설레이는 바다》로 비유하였다면 선우일선은 《노을비낀 호수》라고도 하였다.

이를테면 그의 노래의 형상이 은근하면서도 운치가 있고 비단결처럼 부드럽고 아름답다고 하여 생겨난 비유적표현이였다.

그가 부른 신민요들중에서 《님 오실 때 되였는데(신닐리리)》, 《동백꽃 필 때》, 《사랑가》, 《물결따라》, 《한가위노래(추석의 노래)》, 《조선의 처녀들》, 《개나리고개》, 《남포의 추억》, 《그리운 아리랑》 등은 리면상선생의 작곡인바 작곡가는 선우일선의 창법에 맞게 창작한 작품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가 1930년대중엽에 취입한 《조선팔경가》, 《능수버들》과 1930년대말엽에 취입한 《망향의 가을밤》, 《주릿데치마》와 1940년에 취입한 《압록강 배노래》 등을 비롯한 모든 작품들을 종합해보면 작곡가의 의도를 잘 간파하여 형상으로 자신의 개성적특기와 경지를 개척할줄 아는 민요가수의 한사람이였다는 생각이 든다.

왕수복, 선우일선과 함께 리화자도 신민요의 인기가수였다. 그가 음판에 취입한 신민요로서는 《꼴망태목동》, 《어머님전 상서》, 《님전화풀이》 등이 대표작이라고 할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꼴망태목동》은 민간에 널리 알려졌을뿐만아니라 오늘에 와서도 그의 독특한 창법과 형상미는 이 노래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범창(範唱)의 역할을 놀고 있다.

이밖에도 신민요를 부른 가수들은 《오동나무》를 취입한 리은파, 《님맞이 가자》를 취입한 리애리수(李愛利秀), 《노들강변》을 음판에 남기고 수많은 경기도민요들을 취입하여 유산을 남긴 박부용 등이다. 그리고 대중가요 《알뜰한 당신》과 《외로운 가로등》을 불러 인기가수로 알려진 황금심(黃琴心)은 신민요 《한양은 천리원정》, 《날 다려가소》를 불러 유산을 남겨놓았다.

신민요 《요핑게 조핑게》, 《맹꽁이타령》을 취입한 박단마, 《삼천리강산 에라 좋구나》를 부른 신경녀(신카나리아), 《아리랑랑랑》을 부른 백란아, 《약산의 진달래》를 부른 황정자 등도 신민요에 기여한 가수들인데 이들은 주로 대중가요들을 많이 불렀다. 이들이 음판에 남긴 가락들도 오늘에 와서는 귀중한 유산으로 남아있다.

 

 

2) 혼돈을 가져오던 신민요의 곡명들

 

조상전래의 옛 가락인 민요에 바탕을 두고 겨레의 얼을 현대적미감에 맞게 발전시키려는 의도밑에서 신민요가 창작되는 과정에 꼭같은 곡명들과 비슷한 곡명들이 있어서 혼돈을 가져오군 하였다.

여기에 먼저 《시에론》레코드에 신카나리아의 노래로 취입된 왕평 작사, 전수린 작곡인 《뻐꾹이》와 왕수복의 노래로 《포리톨》레코드에 취입된 추야월 작사, 리면상 작곡인 《뻐꾹새》를 례로 든다.

《시에론》레코드에 신카나리아의 노래로 취입된 《뻐꾹이》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1. 봄철이 오네 봄이 와

   시들은 이 땅에도 봄철이 오네

   뻐꾹 뻑뻑꾹 뻐꾹 뻑뻑꾹

   뻐꾹새가 노래하며

   그리웁던 봄철이 오네

2. 산에도 봄빛 들에도 봄빛

   세상엔 한가지 새봄의 기쁨

   뻐꾹 뻑뻑꾹 뻐꾹 뻑뻑꾹

   뻐꾹새만 슬피 우네

   옛봄생각 슬피 울어요

3. 때는 흐르며 봄도 흘러

   이 봄도 어데로 가버리겠지

   뻐꾹 뻑뻑꾹 뻐꾹 뻑뻑꾹

   뻐꾹새야 너는 날아

   우리 함께 이 노래하자

 

왕평 작사, 전수린 작곡인 《뻐꾹이》의 가사는 이러한데 추야월(본명 김정섭) 작사, 리면상 작곡인 《뻐꾹새》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1. 봄바람이 가벼웁게 불고요

   붉은 꽃이 아릿다이 피는데

   이 산에서도 뻐꾹뻐꾹

   저 산에서도 뻐꾹뻐꾹

   뻐꾹새가 날아든다

   이 산에서도 뻐꾹뻐꾹

   저 산에서도 뻐꾹뻐꾹

   이 강산에 풍년이 온다네

   이 강산에 풍년이 온다네

2. 봄바람이 버들잎을 날리며

   리화도화 방긋이 웃는 봄

   이 산에서도 뻐꾹뻐꾹

   저 산에서도 뻐꾹뻐꾹

   금수강산 좋을시구

   봄노래하며 뻐꾹뻐꾹

   짝을 지어서 뻐꾹뻐꾹

   이 강산에 풍년이 온다네

   이 강산에 풍년이 온다네

 

이 노래가 레코드에 취입될 당시의 곡명은 《포곡성(布穀聲)》이였다. 포곡성이란 뻐꾹이소리란 뜻이다.

옛날에는 한문자로 뻐꾹새를 포곡조(布穀鳥)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노래를 레코드에 취입할 당시에는 곡명을 《포곡성》이라고 달았지만 가수가 이 노래를 무대에 나가 부르게 되면서 극장측에서는 광고에다 《뻐꾹새》라고 곡명을 적어 놓군 하여 이 노래가 《뻐꾹새》로 되여버렸다.

그런데 신카나리아(본명 신경녀)가 출연하는 극장에서는 광고판에 《뻐꾹이》라는 곡명이 나붙고 왕수복이가 출연하는 극장에서는 《뻐꾹새》라고 나붙어 사람들은 같은 노래로 알고 누가 더 잘 부르는가를 알기 위하여 극장을 옮겨가며 두 가수들이 출연하는 노래를 듣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조선타령》의 곡명들도 혼돈을 가져오군 하 였다.

이하윤(異河潤) 작사, 전수린 작곡인 《조선타령》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1. 울긋불긋 청초나 백화

   뒤산 앞뜰에 만발하면

   희망의 봄을 맞는 우리

   에헤라 뛰여라 노래하세

   (후렴)

   일터로 가세 일터로 가

   오늘 할일은 많고많아

   어서 마치고 춤을 추며

   에헤라 뛰여라 노래하세

2. 백두 금강 천만봉 솟아

   젊은 기개를 나타내고

   소나무우엔 흰구름 떴네

   에헤라 뛰여라 노래하세

   (후렴)

3. 임진 락동 굽이를 치고

   옥야 옥토 넓기도 해

   흐르는 저 벌 따라나 갈가

   에헤라 뛰여라 노래하세

   (후렴)

 

이 노래와 함께 유도순 작사, 전기현 작곡인 《조선타령》은 다음과 같다.

 

1. 아 백두산 솟아서 정기를 뻗치니 삼천리산야

   에라 좋아 얼싸 에라 좋아라

   오대강 십대산 널린 곳에서

   (후렴) 즐겁다 조선을 축복하세

2. 아 전답에 오곡이 금파를 치니 삼천리산야

   에라 좋아 얼싸 에라 좋아라

   금강산 묘향산 산과 산들은

   (후렴)

3. 아 문물이 찬란히 꽃같이 피였으니 삼천리산야

   에라 좋아 얼싸 에라 좋아라

   압록강 두만강 강과 강들은

   (후렴)

4. 아 뛰여난 인물이 수많이 났으니 삼천리산야

   에라 좋아 얼싸 에라 좋아라

   영웅과 호걸에 문장이 나네

   (후렴)

 

이 노래의 곡명과 꼭같은 김룡환 작곡인 《조선타령》도 있으나 작사자가 전해오지 않고있으며 가사의 내용은 우에서 지적한 이하윤, 유도순 작사와 별로 크게 차이나는 점이 없고 일부 시행들과 시어의 표현들이 다를뿐이다.

이상의 《조선타령》은 곡명들을 다르게 고칠수 없기때문에 작사자와 작곡가를 정확히 밝혀서 구분해온다.

다음으로 혼돈을 가져오는 신민요의 곡명들은 이하윤 작사, 전수린 작곡인 《섬색시》와 작사 미상으로 되여있는 리면상 작곡인 《섬시악씨》이다.

이하윤 작사, 전수린 작곡인 《섬색시》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1. 물새 날고 파도치는 저기 저 섬엔

   아주까리 동백꽃이 하도 잘 펴서

   아침낮에 꽃 따는 섬색시노래

   오고가는 바람결에 잘도 들리네

2. 아주까리 동백꽃이 하도 잘 폈기

   저 섬속 백성들은 잘사나 했더니

   오늘도 섬색시가 서울로 가네

   청루에 몸이 팔려 서울로 가네

3. 다홍치마 나붓기는 저기 저 색시

   닻 감을 때 노 저을 때 울기도 하네

   청루에서 동백기름 바를 때마다

   고향의 생각에 얼마나 우나

 

이 노래는 동백꽃이 활짝 피는 섬속의 시악씨가 서울로 팔려가는것을 내용으로 하고있다면 리면상 작곡인 《섬시악씨》는 동백 따는 녀인들의 생활이 한폭의 그림처럼 안겨 드는 정서적인 노래다.

 

1. 동백꽃 향기롭다 가득 핀 소에

   바구니 옆에 끼고 열매 따려가

   에헤야 듸야 동이차 좋구나

   이 강산 이 섬속에 봄소식 왔네

2. 동백꽃 활짝 피면 오신다더니

   열매가 주렁져도 오지를 않네

   에헤야 듸야 님맞이 갈가나

   이 강산 이 섬속에 봄빛 저무네

 

선우일선의 노래로 《포리톨》레코드에 취입된 이 노래는 이하윤 작사, 전수린 작곡인 《섬색시》와 곡명을 혼돈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동백꽃 필 때》로 고쳤다.

이 노래와 함께 박승훈 작사, 김월신 작곡인 《신조닐리리》와 추야월(김정섭) 작사, 리면상 작곡인 《신닐리리》도 사람들이 혼돈을 가져오던 곡명들이였다.

박승훈 작사, 김월신 작곡인 《신조닐리리》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전렴)

1. 닐리리야 닐리리야

   니나니 난실로 내가 돌아간다

   저 산 마루에 떠도는 구름

   이내 신세와 다를바 없구나

   (전렴)

2. 부평같구나 요내나 신세

   오늘은 주막에서 밤을 새운다

   (전렴)

3. 앞집의 옥녀야 비웃지 말아

   부귀와 비천은 돌고돈다

 

박승훈 작사, 김월신 작곡인 《신조닐리리》는 전래의 민요인 《닐리리》와 큰 차이가 없고 가사에 밀착되게 선률을 다듬었을뿐이다.

이와 곡명이 같은 추야월(김정섭) 작사, 리면상 작곡인 《님 오실 때 되였는데(신닐리리)》는 선우일선의 노래로 《포리톨》레코드에 취입되였는데 비교적 신민요로서의 예술적품격을 갖춘 노래다.

 

1. 님 오실 때 되였는데

   원쑤년의 비바람 가신 곳을 알아야

   우산과 장화를 보내드리지

   흥 닐리리야 둥둥둥 닐리리야

2. 삼월동풍 불어오니

   가지마다 피는 봄빛 일손 바쁜 이 마음을

   왜 이리도 밖으로 유혹하나요

   흥 닐리리야 둥둥둥 닐리리야

 

※ 이 가사의 1절 3행에서 《우산과 나막신》이라는 시어가 있는데 새 세대들은 나막신이 무슨 말인지 모르기때문에 《우산과 장화》로 시어를 다듬어 악보에 실리였다.

 

《신조닐리리》와 《신닐리리》는 《조》자가 다를뿐 같은 곡명이기때문에 작곡가 리면상은 자신의 작품인 《신닐리리》를 《님 오실 때 되였는데》로 고쳤다.

이밖에도 조령출 작사, 김룡환 작곡인 《꼴망태목동》과 김성집 작사, 조자룡 작곡인 《꼴망태아리랑》, 조령출 작사, 김룡환(김영파) 작곡인 《어머님전 상서》와 노다지 작사, 석일송 작곡인 《장모님전 상서》도 곡명들이 비슷하여 자주 혼돈을 가져오군 하였다.

우에서 더듬어본바와 같이 이런 현상이 빚어지게 된것은 그 시기 창작을 지도하는 예술지도기관이 없었고 창작된 노래들을 심의하고 평가하는 사회적조직체도 없었던것과 많이 관련된다. 그러다보니 가사작가들과 작곡가들의 련계가 있을수 없었고 누가 어떤 작품을 창작하는지 알수도 없었기때문에 이와 같은 실태가 빚어져서 후에 곡명들을 고치지 않으면 안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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